애늙단편 01

애늙은이 시점 단편모음

230508

- 날조의 끝의끝의끝을 달립니다

- 애늙 결말까지 스포

1. 

와론은 살면서 단 한번도 검붉은 하마, 힌셔를 만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역사 속의 인물을 만나기를 기대하진 않잖아? 

어느 견습기사나 동경하며 영웅의 꿈을 꾸게 하는 힌셔라는 기사에 대해서 와론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영웅을 동경한건 아니었고, 책에 언급된 하마의 실전된 비전에 관심이 있었다. 

관심이 지나쳐서 비급을 찾아 별천지의 깊숙한 서고 부터 과거 기사들의 무덤까지 다 뒤지고 다녔다. 

간신히 발견한 벽공을 경지까지 익히기 위해 골머리를 싸맸다. 아니, 찾은 자가 임자고 쓰는 자가 임자지. 

5백년 전 사람이 무슨 수로 뺏겼다고 찾아오겠나. 

[아니, 내가 오만했군. 나는 기사, 검붉은 하마 힌셔다]

진심?

당연히 도망갈 건 아니고, 싸인 해달라며 수줍게 자기 이름을 말 할 것도 아니다. 

힌셔에 대한 환상은 닭이 아니라 그의 전문분야였다. 힌셔에 대한 책은 무엇이든지 다 꿰고 있었고, 가끔 닭이 관심을 가지면 기뻐하면서 설명해줬지. 한 번 말하면 아예 날을 잡고 이야기 했다. 그는. 

최초로 기어스를 맹세한 기사, 최초로 마스터피스를 사용한 기사, 최초의 여자 기사, 최초로 최초로...

와론은 투구 틈새로 피식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참으며 듣던 때를 생각했다. 아니, 결국 지루해서 도망갔던가?

'그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한 기사였다지!'

그의 얘기 덕분에 한때 기사란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으려나 생각했고, 힌셔에 대해서도 별 감정은 없었지.

힌셔가 이 시대에 있어도 영웅일지는 두고 봐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 시대의 영웅이 지금은 약할 수도 있지. 왜, 영웅은 만나면 안 된다는 말도 있잖아.

그건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라며 와론의 어깨를 치던 손이 꽤 매웠다. 

힌셔라고 듣자 일단 싸움을 걸었다. 

애초에 믿기지도 않는 일이지만 이 정도로 몸이 저릿한 존재감을 내뿜는다면 누구라도 싸워봐야지 않겠어? 

한 대 맞아보고 확신했다, 진짜 힌셔네. 역시 절대라는 건 없다니까. 

보통 기사였다면 명예의 상징인 하마와 다짜고짜 결투를 벌이진 않겠지?

네가 살해 당한 뒤 부터는 난 명예고 뭐고 아무 관심도 없거든. 그건 저 명예주의자들을 죽일 명분에 불과했어. 

명예 따윈 대충 어겼다고 치고, 정정당당한 승부 같이 보여주곤 이기려고 미리 조사해서 덫을 놓는 것도 서슴치 않았지. 

나는 명예를 위해서 그 놈들을 살해하는 게 아니라 네 복수를 하는 중이거든. 

명예라는 게 존재한다고 해도 그게 이 자식들은 아냐.  

그리고 명예로운 기사가 있다고 해도 이제는 이 대륙에서 물러날 때가 됐지. 

설령 네가 동경하던 검붉은 하마라고 해도 말이야. 

벽이 없는 곳에서 힌셔는 공중으로 뛰어오르더니 땅바닥을 향해서 벽공을 날려버렸다. 

oo, 네가 맞았나봐. 이 정도로 강하다니.

역시 전설은 실망시키지 않는 걸! 

2. 

- 핏빛거미힌셔(+와론)

대련이 끝나고 함께 앉아 쉴 때 였다. 닭은 머리로는 전투를 복기하면서 하마에게는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이런 건 대체 어디서 배웠어, 설마 ooo 기술도 당신이 원조인건 아니지- 

그게 ooo 이란게 하마를 뜻하는 말이라면 아마 맞을 거다. 

놀라는 닭을 보면서 호쾌하게 웃던 힌셔는 말한다. 

[널 보면.. 내 스승님이 떠오른다.]

[엥? 왜, 선배의 스승도 창을 썼나?]

[뭐 그렇기도 하고,]

힌셔는 약간 웃음을 지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분도 기사들과 별로 사이가 좋진 않으셨지, 사실 저잣거리에서도 종종 싸움을 벌이시곤 했다.

그때는 스승님의 행동이 명예롭지 못하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분은 그때부터 기사들의 자격에 대해 생각하셨던 거였어..]

기사의 자격이라.. 닭에게는 남과 나누고 싶은 주제가 아니었지만 힌셔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스승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 얼굴은 기쁘면서도 어딘가 고통스러워보였기에 닭의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닭의 기사사냥을 힌셔가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직감적으로 힌셔가 닭과 그의 스승을 닮았다고 한 부분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새까만 닭... 아니 와론. 기사들의 기어스가 어떻게 탄생한 건지 알고 있나?]

[그노제스는 내 스승님이 주변의 시기와 모함 때문에 그렇게 되신 거라고 말했지만, 나는 다르다. 그 분은 기사에 대한 환멸로 가끔 광증에 사로잡혔어.. 최후에는 거의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 내면까지 온전히 악마가 되려 하셨더군. 그 분의 눈을 봤을 때 깨달았지. 정말 악마가 되어야 내가 결단할 것을 아셨던 거지.. 스승님이 아무리 당대 최강이자 악마기사라고 해도 혼자서 나를 포함한 270명의 기사를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도 가끔씩 하마턱에 닿은 스승님의 다리가 너무나 물렀던 촉감이 생각난다네.]

이야기를 듣고 난 와론은 고민에 잠겼다. 기어스에 숨겨진 사실이 충격적이었고..

힌셔는 핏빛거미를 대적한 때부터 기하급수 적으로 강해졌다고 이야기 했다. 그러고 보니 난 언제부터였지? 한편 힌셔는 아마 닭을 처음 본 순간부터 제 스승을 떠올렸으리라. 다만 그는 오랫동안 그 말을 하길 망설였고, 그 이유는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거나 떠올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기어스에 관련된 사실을 말하는 것은 기사 전체를 위해서도 함구할 생각이었을 터였다. 난 꽤나 신뢰받고 있군.  

그럼에도 오늘 이렇게 진심을 꺼내놓은 것은, 아무래도 대련 후 긴장이 풀어진 까닭과 달밤의 감성 때문이려나?

닭의 농담에 호쾌하게 웃으면서 묻어가면서라도 그 별 거 아닌 말을 하고 싶었던 까닭은?

그에게 자기 스승을 닮았다고 한 것은, 아닌 척 닭을 상대해주고 어울려주는 까닭은,

어떤 이야기보다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낸 것은,

아, 500년 전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라도 품고 있는 건가. 역시 저 얼굴에 띈 바보같은 미소는. 

3. Geschichtenerzähler (이야기꾼)

람의 옛날 이야기

[해 줄게, 동쪽 대륙에 건너갔을 때 이야기.]

[갑자기 동대륙?]

[듣고 싶어 했잖아] 

아, 끝날 때가 됐구나

그때도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게 당신의 끝일지는 몰랐지만.

'죽이는 게 아니야. 넌 살고, 나는 죽는 거야. 서로가 바란 대로.

이렇게까지 살면서 난 아무것도 이룬 게 없었어.

친구들... 네프렌... 스텔라... 그 누구도 구하지 못했어. 산다고 할 수도 없는 삶.

그동안 죽어있던 내가, 널 살림으로써 진정 삶을 얻는 거야.'

트루디아는 모를 거다. 스텔라 역시 동대륙 얘기를 가장 듣고 싶어 했다는 걸. 자기가 얼마나 스텔라를 닮았는지도. 

너를 처음 만났을 때는 그게 몹시도 위안이 되어서, 너는 나를 위해 찾아온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어. 내가 존재하기 위해 너를 이용했지. 트루디아 너를 살리는 것이 나를 살아있게 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부딫혔지만, 너와 이야기하면서 나는 너에게서 유일하게 이해받는다고 느꼈고, 결국 진심으로 위로를 받았다. 스텔라처럼 사랑한 것은 아니었지만 너는 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곧 세계의 모든 역사를 알고 있어. 나는 살면서 나와 같은 존재를 만나지 못할 운명이지만, 너는 나와 같은 존재가 될 사람이니까. 애늙은이, 불멸자.

트루디아, 내가 이루지 못한 걸 이루어 줘서, 고맙다

'널 구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네가... 

날 구하는 거야.

나에겐 고통 뿐이었지만... 

너라면 분명...'

  

그리고 람이 죽은 후 불멸자로 여행을 다니며 트루디아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너희, 손가락 바위산의 검성 술딘이야기 들려줄까?]

아저씨, 그거 알아? 

아저씨가 떠난 뒤에도 자꾸 아저씨 목소리를 듣게 되는거. 여기선 어떻게 해라 이래라 저래라 하는 목소리가 자꾸 들리는 것 같아. 지금도 들리는 것 같아. 아저씨라고 부르지 말라고?

나한테 처음 가르쳐 준 게 싸울 땐 무조건 유리하게 만들라고 한 거였던거 기억나? 판단력이 좋은 사람이 강하다나 뭐라나. 근데 부끄럽지만 나 기사 시험에서 떨어졌어. 나한테 재능 있다고 천재는 다 기사라는 식으로 말하더니, 내 생각엔 천재도 하기 나름인 것 같더라? 사실 내가 여행 다니느라 연습이 좀 부족했나 싶기도 하고. 이제는 시간이 많으니까 기사도 다시 도전해보려고. 아니, 불멸자가 될 줄 알았으면 아저씨한테 파란 검술이나 더 배워둘 걸 그랬어.  

 그리고도 아저씨한테 제일 크게 배운 건 역시 생각하는 방식이려나. 아저씨 말을 듣다보니 나도 점점 아저씨를 닮아가는 것 같아. 아저씨는 내가 자기를 이해한다고 했지만 아저씨 얘기를 워낙 많이 들었어야지. 아저씨 자기 이야기 하는 거 엄청 좋아했잖아. 난 그때 살고 싶은 마음만 절박해서 다른 생각은 못했는데, 그걸 들으면서 나도 매사에 방법을 찾게 되더라. 하다르도 아저씨한테 옮은 것 같아. 새삼스럽지만, 나도 아저씨한테 고마워.

어쨋든 나는 요즘 아저씨가 갔던 곳들을 여행하고 있어. 이야기로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고 해도 역시 직접 가보는 건 다르잖아. 사실 그곳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아저씨 얘기를 들려주고 있어. 뭐, 이렇게 세계의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다보면 언젠가 애늙은이가 없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아저씨가 이 세계의 이야기를 겪은 사람이면 애늙은이는 그걸 알리는 역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사람들한테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들려주고 있어. 흑역사나 연애이야기도 해서 찔리지만.. 그냥 세계사라고 여기자구.

그래서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는데 말이지,

있잖아.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다보면,

불멸자의 삶도 그렇게 외롭지 않아. 

4. 가장 로맨틱한 연설

- 팅솔

말토와 불멸자팀, 기사들과 합류해 핀타스로 여행하던 날 밤 팅크는 어느 날 밤을 떠올렸다. 

기사 시험에 우승한 날, 솔바스는 그와 같이 기사가 될 수 없었다. 달잔이 솔바스에게 했던 말,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그 시절 팅크는 아직 순수하고 책임져야 할 세계가 작았기에, 그날 밤 자신의 합격보다 솔바스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곧 있을 연설의 내용을 정리하던 팅크는 들고 있던 책을 무릎에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그 책의 표지에는 자신만큼 큰 쇠망치를 든 기사가 그려져 있었다. 

팅크가 솔바스를 좋아하는 이유, 그건 솔바스가 강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주먹은 한 방 한 방이 강했으니까. 마치 자신이 동경하는 기사 하마처럼, 그는 사람들을 지키는 영웅 같았다. 재능은 눈부셨고, 노력하는 모습은 동기들 중에서도 최고였다. 언젠가는 하마님같은 기사가 되겠지. 솔바스에게 구해지는 사람들은 그를 보고 어떤 기분을 느낄까. 솔바스는 성격도 강인했다. 불의에 분노하고 자신의 정의를 실현시킬 힘이 있었다. 자신의 인사를 자꾸 거절하는 것도 그러한 성정이기 때문이겠거니, 했던 것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팅크는 싸움의 재능만큼이나 남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좀 더 강해질 텐데, 이 부분을 고치면 더 나을 텐데. 솔바스가 더 성장하도록 도와주고 함께 하고 싶었다. 솔바스의 기사론은 훌륭했지만 무언가 부족했고, 자신이 그걸 채워준다면 그가 기뻐할거라고 생각했다. 솔바스와 내가 서로를 채워주는 존재가 된다면. 그렇게 솔바스가 나를 바라봐준다면. 

그러나 어느 날 그의 차가운 시선을 받으면서 팅크는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아, 솔바스는 나를 싫어하는 구나. 

그 이후로 팅크는 솔바스를 도와주는 것을 반쯤 포기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를 도와주는 일이 그의 자존심을 상처입히는 일이었으니까. 괜한 참견이었으니까. 그러나 오늘 같은 날 솔바스를 직접 위로 할 수 없어 자꾸만 후회스런 마음이 들었다. 그는 오늘 싸움에서도 팅크의 도발을 하나도 피하지 않았다. 솔바스는 분명 강하지만... 상대를 이길 힘이 있는 것. 과연 그것만으로 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솔바스는 힘을 올바로 사용해야 한다고 믿었다. 너와의 싸움에서 이겨도, 내가 널 강하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그날 내게 했던 말 때문이었어. 그렇지만 너는 모르고 있는 것 같아. 

그러다 하나의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솔바스에게 부족한 것. 기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 그건 어쩌면... 

며칠 뒤ㅡ 연설장의 단상 위에서 팅크는 솔바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앞을 다시 곧게 바라보곤 연설을 시작했다.

네가 아직 날 싫어하는 걸 알기에, 직접 해줄 수 없는 말. 

그러나 행여 네가 나를 싫어하지 않게 된다면, 그리고 내 마음을 받아준다면 너에게 다정히 이야기 해주고 싶었어.

네 눈을 보면서 말이야. 

'기사란, 힘 있는 자가 아닌 강한 자여야해, 솔바스

강하다는 것은 위대한 것.

고개를 들어, 솔바스. 너는 이미 충분히 강해. 

이젠 위대해질 거야.'

내가 함께 있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기사니까.

정신없는 날들 속에서 오랜만에 솔바스를 떠올린 밤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핏빛거미는 황제 혈육이라는 썰을 밉니다 이 아재 대체 이름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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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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