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어린 너는, 그걸 조금 더 빨리 깨닫길.
와론&나견
*나견의 복수가 진행 중이고 와론은 나견의 정체를 알고 있는 시점. 둘이 어떤 임무를 맡았습니다.
와론은 땅바닥에 널브러져 얕은 숨을 몰아쉬고 있는 소년을 물끄러미 내려다 본다. 이번 임무는 목표물로부터 정보를 뜯어내는 것이고, 따라서 생포가 최선의 해결책이었다. 와론이 추격에 지친 목표물을 낭떠러지로 몰아넣었고 모든 능력치가 두뇌 회전 및 입놀림에만 분포한 나진이 다가가 협상을 진행했다. 이러한 상황 연출은 이전에도 종종 써먹던 방법이다. 물리적으로 고립된 장소에 갇혀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상대에게 협조하게 되어 있다. 이번 목표물이 절벽의 지반이 약한 부분을 부숴 적의 사령탑과 동귀어진할 작정을 했으리라고는 감히 예상하지 못했다.
상황이 인식되자마자 와론은 론누를 던졌다. 언뜻 본 절벽 아래에는 침엽수림이 자리 잡아 제가 나진을 낚아챈다 해도 딱히 안전하게 착지할 방도가 없었다. 창을 잡게 해 공중에서 건져 올릴 생각이었으나 같이 떨어져 내리는 바윗덩어리들 탓에 경로가 뒤틀렸고, 결과적으로 나진의 어깨엔 깊은 자상이 남았다.
애가 꼬챙이가 됐어도 살았으니 된 거 아닌가?
평소였다면 이렇게 가볍게 생각하고 마무리 지었을 일이다. 순간적으로 나진을 향한 시선이 큰 돌덩어리에 가로막히자 반 정도는 본능적으로 소년을 향해 뛰어내린 자신의 행동을, 와론 그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무모한 짓을 감행해서라도 구해낸 상대가 차라리 담청색 기린이었다면 앞뒤가 맞게 설명할 수 있었다. 기린은 언젠가 그가 원하는 곳에 사상지평을 사용해주기로 했고, 그 대가를 받아내기 위해서는 기린의 생존이 선행되어야만 했다.
한데 이 병아리는.
론누가 나진의 어깨에 처박힘과 동시에 와론이 그의 팔뚝을 움켜잡았다. 추락 중 머리를 부딪힌 건지 의식이 없었다. 와론은 나진이 가는 숨을 내쉬는 걸 확인하고 창 자루를 쥐었다. 날붙이가 어깨에 박힌 채로 위로 들리면 뼈에 무리가 갈 터. 추가적인 외상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론누를 뽑아낸 다음 이를 조종해 절벽을 올랐다.
...하필이면 전에 다쳤던 어깨다.
이윽고 두 발이 순차적으로 지면에 닿았다. 금빛 머리칼이 흐트러진 뒤통수에서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으므로 와론은 옆구리에 끼워둔 나견을 바르게 눕힌 후 고개만 옆으로 틀어주었다. 피가 마른 흙을 적신다. 지금은 눈꺼풀로 덮여버린 어떤 눈동자와 같은 색이다. 아득해질 만큼 붉다. 그 눈으로 바라보던 너의 형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런 걸 궁금해함조차 너에게는 무례일 테지만, 그래도 묻고 싶다.
그는 너에게 어떤 의미였나.
내가 그에게 갖는 의미와 같을까.
본래의 이름을 지우고 그 자리에 ‘새까만 닭, 와론’이라는 글자를 새겨넣은 이후로 타인의 이해를 구한다는 바람은 사치에 불과하다 여겼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경험과 주관만을 가지고 세상이라는 정보를 분석하는 존재이므로, 스스로가 직접 겪어보지 못한 사안은 결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표면적인 감정에 공감할 뿐 그 본질은 어떤 경우에라도 파악할 수 없다. 자신을 지우고 남의 인생을 뒤집어쓴 채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가장 근접한 단어는 체념이다.
한데, 이 병아리는.
이제는 와론인 그가 겪어왔던 과정을 나견이 뒤따르고 있다. 처음에는 사실을 부정하고, 다음으론 그 사실이 벌어지게 만든 원인 혹은 세상 자체에 분노하고... ...지금은 죄책감이려나. 와론은 그간 관찰해 온 나견의 모습을 바탕으로 결론을 내린다. 선행했기 때문에 알아챌 수 있는 사항이다. 반대로 말하면, 비슷한 경험이 없는 자는 짐작조차 못할 속마음이다. 나견이 감쪽같이 제 형제인 척 연기해서, 철저하게 저 자신을 숨겨서, 어떻게 보면 스스로가 고립을 자초했다. 사실이, 결국 현실이 됨을 막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혐오를 통상적으로 죄책감이라 부른다. 그 단계라면 이전보다 배는 길게, 그리고 깊게 지속된다는 것을, 와론은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조차도 아직 벗어나지 못함을 간간이 느끼기에.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와론은 나견을 지켜봐 왔다.
내가 얻고자 했던 이해를, 혹은 조언을, 너에게는 줄 수 있을 것 같다.
너는 이해 따위 필요 없다 여길지 모르겠다.
나도 그랬거든.
근데 아닌 것 같더라.
지금 나를 보면.
문득 와론은 지금의 나견과 언젠가의 어떤 소녀의 나이가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누가 누굴 어린애 취급하고 있는 건지. 비웃음일지 안도일지 모를 한숨이 잇새를 비집고 흘러나온다. 행운인 줄 알아라, 싸가지. 진정한 의미로서의 선배가 지금 네 바로 옆에 있으니.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이용해라. 어쩐지 너에게만큼은 그렇게 해주고 싶다. 너의 금빛이 나한테는 회백색을 떠올리게 해서. 잠들어 연기하지 않을 때 너의 얼굴이 과거의 어떤 여자애를 생각나게 해서. 자신이 머리칼이 차라리 무채색 눈동자에 열렬하게 담았던 그 따뜻한 갈색이 되길 바라던 아이를.
와론은 망토 끝단을 잡고 길게 찢어내어 나견의 어깨에 둘러멘다. 지혈은 이것으로 되었다. 이만한 외상의 치료는 의사나 마법사의 몫이다. 가벼운 뇌진탕이라면, 물론 며칠 간은 지켜보아야겠지만,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점차 안정되어 가는 숨소리를 들으며 와론은 머지않아 소년이 눈을 뜨리라는 것을 예감한다. 그동안 근처 아무 곳에나 주저앉아 저도 좀 쉬어볼 작정이다. 말마따나 고생깨나 했으니. 투구 속 뜨거운 공기가 선선하게 부는 바람과 맞바뀜을 가만 체감하며, 와론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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