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
잇올이 님 단편 <동짓달>의 지우스 시점 3차 창작입니다.
*개인적, 주관적 해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망 요소 있습니다.
한 번 읽어보세요. 후회하지 않으실 것. 분량마저 미쳤음. 단 한 문장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유독 상념에 젖을 때가 많았다. 전쟁이라는 커다란 사건의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전쟁이 불러일으킨, 자신에게 연속적으로 닥쳐버린 어떤 일들 때문에, 그 신속한 두뇌 회전에도 불구하고 지우스에게는 가만히 서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남들보다 배는 더 필요했다. 지우스가 노력하면 할 수록 머릿속 일련의 과정은 아무리 꼬인 부분을 정리해도 도로 엉켜버리는 뜨개실 마냥 늘어졌다.
특수 2기는, 그래, 실패했다. 창설 목적을 달성하긴 했으나 실패했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었다.
기껏해봐야 스무 살 내외인 병아리들이 민간인 수호를 외치며 최전방을 자처했다. 그 아이들을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던 은퇴 기사들까지도 참전했다. 모두가 기사라는 작자들이 처음부터 추구했어야 할, 본질적 의미로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공로나 권위가 아닌, 존엄과 품위를 위하여. 중앙 대륙 측 민간인 사상자는 보고된 바가 없었다. 기사는 긍지를 지켜냈다. 전쟁 목적 달성 유무만 놓고 보자면 기사와 장군의 싸움은 기사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다만 전사자 수가 그 반대였을 뿐이었다.
그 빌어먹을 전사자 명단에서 특수 2기 소속 인명 대부분을 어렵지 않게 찾았다. 지우스는 제 눈썰미를 저주했다.
종전 선언 후 얼마 지나지도 않아 나견은 여행을 떠났다. 아직 위험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런 염려 따위로 나견의 오랜 염원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복수 이외의 목적을 가진 것만 해도 충분히 대견했다. 그렇게 여겨야만 버틸 수 있었다.
행정 체계를 비롯한 일상이 적당히 제자리를 찾아가던 무렵, 새까만 닭이 지우스를 찾아왔다. 당장 사상지평을 써줘야겠다면서. 그의 요구는 이랬다.
사상지평을 사용해서 나를 죽여라.
전쟁을 겪으며, 이 부분이 좀 역설적이긴 하지만, 기사는 명예를 되찾았으니 이제 기사 사냥을 자행하던 저만 없어지면 된다... 라고 했던가.
처음에는 반대했다. 당연히 그랬다. 새까만 닭을 설득하려 무던히 말을 지어내던 가운데, 지우스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아니, '이해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자연스러우리라. 새까만 닭, 와론은 처음부터 이런 결말을 원했다.
담청색 기린에겐 새까만 닭과의 맹세를 이행할 의무가 있었다.
이제 내게 남아있는 게 무엇인가. 지우스는 수도 없이 생각했다. 특수 능력도, 오랜 시간 서로의 등을 지켰던 동료도 사라졌다. 집단은 승리했지만 지우스 개인으로서는 온통 잃은 것 뿐이었다. 딱 하나. 한 사람이 남았다. 한때 품에 안았으나 당장 제 곁에 없는 사람. 무슨 짓을 해서든 지키고 싶은 아이가 모든 생각이 귀결되는 꼭짓점에 서 있었다. 기어스를 어겼으니, 숙련된 견습 정도 실력 밖에 되지 않는 지우스는 다른 방법으로 강해져야만 했다. 동대륙행을 결정한 건 그 때문이었다.
몇 년 전, 자료 조사를 명목으로 황실 서고를 뒤적거리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임무가 동대륙 관련은 아니었지만 꽤나 흥미로운 기록을 발견해서 잠깐 생각이나 쉬일 겸 읽어두었다.
무인들은 예로부터 체내에 기를 쌓아, 그를 바탕으로 무공을 펼친다.
부연설명으로 심법이나 운기조식 등 기본적인 수련법도 같이 서술되어 있었다.
...세상에 쓸데없는 지식은 없다더니.
지우스는 고개를 들어 눌러쓴 삿갓 너머로 깊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늦은 저녁 시간. 달은 자정이 넘어서야 지평선을 넘어올 터였다. 동대륙에서는 공적으로는 태양력을 사용하지만 민간에서는 달의 위상을 기준으로 한 주기를 자주 썼다. 때문에 어린 아이들까지도 그날 달이 어떤 모양으로 뜨는지, 몇 시쯤 떠서 몇 시쯤 지는지 빠삭하게 알았다. 중앙 대륙에도 별자리 바탕의 방위 및 시간 계산법이 있었지만 거기서 사용하는 별자리들 상당수가 동대륙에서는 활용이 힘들었기에 다른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지우스가 달라진 밤하늘을 보고 시간을 가늠할 수 있게 된 것도, 언젠가 달을 보고 대략적인 시간을 알려준 어떤 꼬마 아이 덕분이었다. 어떻게 아는 거냐고 묻자, 아저씨 그것도 모르냐면서 재잘재잘 자기가 아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풀어놓는 모양새가 퍽 그 나이대 애들 같아 보였다.
밤 동안 달이 뜨지 않는 삭, 오른쪽 면이 밝은 반달 상현, 통상적으로 보름달이라고 부르는 망, 왼쪽 면이 밝은 하현, 그리고 다시 삭.
위상 변화를 따라 달이 뜨는 시간도 조금씩 달라졌다. 하현달은 자정에 떠오르기 시작해 하늘이 밝아질 무렵 남중했다.
어둑한 천공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떤 기억 하나가 머릿속에서 흐릿하게 재생되었다. 전쟁 발발 불과 몇 달 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안온한 밤이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거든 굽이굽이 펴리라
"동대륙에 이런 시조가 있다. 오래전에 기록으로 엮은 걸 읽은 거라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시조도 읽으시고 생각보다 감상적이시네요. 다시 봤습니다."
"비꼬는 거냐."
"그럴 의도는 없었습니다만.
...그나저나 '밤의 허리를 베어낸다'라, 표현이 독특하네요."
"그만큼 임이 보고 싶다는 의미겠지. 시간마저 일그러뜨리고 싶을 정도로."
"꼭 시간만이 문제가 아니라... 달이 원망스러울 것도 같습니다."
"달이?"
그때 되물으면서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지우스는 입꼬리의 움직임을 머릿속으로 재현했다. 특수 2기 견습들에게 처음 기사론을 언급했을 때, 그때 나견에게 보였던 웃음과 비슷한 미소였던 것 같았다. 그 표정을 본 나견이 약간 질린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정작 그리운 임은 화자 옆에 없는데 애꿎은 달만 밝게, 수려하게 빛날 것 아닙니까. 동지라면 겨울이니까 하늘도 맑을 테고. 나는 이렇게 외로운데, 차라리 달이라도 안 보였으면... 싶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나견은 항상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생각의 지평 자체가 일반인보다 배는 넓었다. 그 광활함을 갖고도 깊이까지 탐하는 성격이었다. 지우스는 금빛 머리칼로 뒤덮인 저 조그만 머리통 안에 대체 뭐가 어디까지 들어있는 건지가 궁금해 항상 먼저 화두를 꺼냈다. 철학, 예술, 과학, 역사, 인문, 경제... 주제는 뭐든 상관 없었다. 지우스가 오래전부터 생각해왔지만, 답이랄 것이 딱히 존재하지 않는 모든 질문을 나견에게 물었다. 혹은 그가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구절이나, 신기했던 현상 등을 설명해주고 나견의 생각을 들었다. 그 모든 대답이 지우스의 기억 속에 있었다. 기억해두고 있었다.
급박할 일 없는 상황이었기에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오밀조밀한 입술의 움직임, 중간중간 들리는 숨소리, 잠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말을 멈춘, 걱정 없이 진중한 표정까지도.
상념에 젖는 날이 많았다. 하염없이 과거를 되짚었다.
잠깐 머리나 식힐 겸 부러 사람이 많지 않은 시간대에 저잣거리로 나왔는데 이래서야 생각의 무게만 가중하는 꼴이었다. 지우스는 바로 눈길 끝에 닿은 가게 하나로 향했다. 문은 열려있었다.
"주인 있습니까?"
불이 대부분 꺼져있어 이미 영업을 마무리 지었나 싶었으나 예상과 달리 객 하나가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상에 놓인 탁주 한 사발. 차림새로 봐선 여행자다. 음식 냄새는 없는 걸 보니 여기서 식사를 해결한 것 같진 않고... 옛 버릇이 튀어나와 눈앞의 존재를 분석했다. 제 인기척을 들은 건지 그가 상에 엎어놓은 삿갓을 챙겨 쓰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목덜미와 어깨 언저리에서 흐드러진 태양 빛 머리칼이 시선을 훔쳤다. 한없이 익숙하기만 한 목소리가 그를 맞았다.
"기린... 님...?"
기린. 그래. 내 기사명이 그랬었지. 너는 언제나, 나를 그렇게 불렀지.
"동대륙에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아니 그것보다도, 왜 동대륙에 계신 겁니까?"
그것만큼은 묻지 말아줬으면 했다. 놀랍도록 단순한 이유였기에 설명할 수 없었다. 나견. 너 하나가 그 이유였다. 그걸 너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지우스의 대답은 아니다,였다. '너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문장 속에는 그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논리가 함축되어 있었다.
"기린님께선 종전 직후에 새까만 닭님과 수도를 떠나지 않으셨나요?"
짤막하게 끊어지는 장면들이 고장 난 영사기로 재생한 동영상처럼 이어졌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진 투구. 흩날리는 회백색 머리카락. 연둣빛 목걸이. 몇 번의 합. 핏자국. 나견의 눈동자는 붉었다. 똑같은 생명의 흔적이었지만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것과는 다른 빛깔로 반짝였다. 마치 중력이 내부의 열을 이기지 못하고 팽창하는 어떤 거대한 별을 닮아서 항상 아름답다 생각했다. 그러나 오랜만에 마주한 그 시선이 어쩐지 무거워, 지우스는 눈동자를 돌렸다.
"새까만 닭과의 맹세는... 지켰다. 그 이후 곧장 이곳으로 넘어왔고."
"언제 넘어오신 거죠?"
그는 속으로 가만 날짜를 헤아렸다. 동대륙에서는 태양년을 천구상 태양의 좌표인 황경을 따라 24등분한 절기라는 단위를 사용했다. 그가 이리로 넘어왔을 때가 입동 무렵이었고 지금이 대강 동지니까...
"...거진 1년 쯤."
계산을 끝마치고 나서야 세월을 실감했다. 제가 중앙 대륙을 떠난 지가 벌써 그리 되었던가.
"다른 기사들도 알고 있었나요? 이곳에 오기 전에 수도를 거쳐왔는데, 기린님에 대해서는 다들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극비사항이다. 별천지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직원들에게만 알렸어."
단어를 잘못 골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견 앞에서 '신뢰'를 언급하다니. 먼저 나견을 신뢰한다고 호언했던 건 지우스 자신이었다. 한때 기사들의 사령탑이라 불릴 정도로 이성적이고, 문장 표현 하나하나의 무게감을 직시하던 저도 전쟁 이후 긴장할 만한 일이 크게 없다 보니 많이 물렀구나 싶었다. 아니면... 그냥 네 앞이라 그런가. 되도 않는 말실수를 다 하고. 자조 섞인 웃음은 속으로만 삼켰다.
"저는 지금 그 극비사항에 대해 묻고 있는 겁니다.
...저를 가장 신뢰하신다면서요. 그 순간에도."
평소답지 못하게 어조에 감정이 섞여 있었다. 가장 크게 느껴지는 건... 조급함. 그리고... ...원망... 인가. 지우스는 양손으로 깍지를 만듦과 동시에 고개를 숙여 이마를 짚었다. 그대로 눈을 감았다. 지금 상태로는 나견의 눈을 마주하고 제대로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너를 신용하지 못한다는 소리가 아니야. 말 그대로 이제 남은 건 나견... 그래, 나견. 너 하나 뿐이다. 국가 정세가 이러하니 추가적인 연락은 어려웠어. 네가 수도에서 달잔 님과 만나지 못했다면 그것 역시 유감이다."
이쯤되면 인정해야 했다. 그가 짓씹듯 내뱉는 말은 그저 흔해빠진 변명에 불과했다. 너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면서 떠날 때 연락 하나 남기지 않았다. 네가 갈만한 행선지도 대략 유추할 수 있었지만 찾아가지 않았다. 기어스를 어긴 저까지도 네가 받아줄지가 의문이었다. 약자를 지키겠다는 제 명예는 특수 2기가 해체된 시점에 이미 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저마저도, 네가 전처럼 바라봐줄까. 두려웠다. 어깨 너머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아닙니다. 대륙 군데군데 발 붙이지 않은 곳이 없는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억지겠죠. 편지란 게 사람을 쫓아다닐 순 없으니까요. 더군다나 카톤도 들고 다니지 않았으니. 주제가 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쯤 해라. 난 화나지 않았어. 네가 불안해한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너한테만은 어떻게든 연락을 취했어야 했는데. 다른 누구도 아닌, 네게만은."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삭였다. 더 이상 나견이 심려 끼칠만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손을 있던 자리에 가만 놔둔 채로 고개만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실내가 어두운 탓인지 뜬금없게도 가게로 들어오기 전에 본 밤하늘이 떠올랐다. 여전히, 그 붉은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기엔 스스로 심장에 건 추가 너무나 무거웠다.
후회하는 건 저 하나로 충분했다.
"...드시겠습니까? 아직 입을 대지는 않았는데."
눈을 살짝 아래로 내려 살펴보니 가게에 처음 들어와서 본 그 탁주였다. 선뜻 한 모금을 마셨다. 취기가 올라오기 충분한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지만, 그냥 술을 핑계로, 충동적이었단 이유로 전부 털어놔 버릴까 싶었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간단해. '기'라는 것을 체내에 쌓기 위함이야."
"하지만 기린님께서는 사상지평이..."
말끝이 흐려졌다. 아마 문장을 완결 짓던 도중 깨달았겠지. 전부터 그랬듯 너는 주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진실을 추론하기에 능하니까. 지우스는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를 따라 얕은 숨을 내뱉었다. 수없이 노력한 끝에 간신히 만들어 보인, 가벼운 웃음이었다.
"기어스를 어겼다."
"...네?"
놀라는 표정이 아주 볼 만했다. 눈꺼풀은 위로 치켜 올라가더니 눈썹은 그와 반대로 호선을 그리며 끝이 아래로 축 처졌다. 그 덕인지 홍채에 작은 빛이 돌며 별을 품은 듯 반짝였다.
"사람을 죽였어. 사상지평은 없다. 그리고 나는... 이제 기사를 관둘 생각이다. 분명 녀석들을 위해서라도 기사를 계속하기 위해 쌓기 시작한 건데, 쌓으면 쌓을 수록 그럴 생각이 사라져갔어. 솔직해진 거겠지. '기어스를 어긴 주제지만 기사로 남겠다'라는 고집이 꺾였어. 아마 앞으로는 너처럼 여행이나 다니며 살 듯해. 달리 돌아갈 곳도 없고."
그러니까 함께해주겠느냐고. 얼굴에 써놓으면 나견 너는 읽을 수 있잖아. 그렇지?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사실은, 별을 보는데 가장 방해되는 존재는 달이라는 점이다. 스스로 타오르지도 못하고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주제에 먼 길 날아온 다른 별들의 찰나를 가려버릴 만큼 밝게 빛나는 달. 옅은 별빛밖에 없는 밤은 걷기조차 어렵다. 허나 빛의 속도로 몇 년 씩 걸리는 거리를 여행해 간신히 누군가의 눈에 닿은 별을 치하하기에는 그만한 순간이 없었다.
어쩌면 지우스 그 자신조차도, 이때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삭, 상현, 망, 하현, 그리고 다시 삭.
달이 뜨지 않는 밤이 머지않았다. 더없이 어두울 테지만 동시에 더없이 찬란할 밤하늘을 고대하며. 지우스는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별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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