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여명

지우견

*아주 오랫동안 끌어왔던 일이 끝난 이후 평화를 되찾은 시점

살림 합친 지우스 X 나견

창틀에 양팔을 괴어 상체 힘을 풀었다. 자연스럽게 곡선을 그리는 어깨부터 허리 언저리까지를 따라 금사를 연상케 하는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과거를 그저 지나간 일로만 바라볼 수 있게 된 이후부터 머리를 길렀다. 오래전엔 짧게 자른 것으로 모자라 틀어 올려 묶고 다녔던지라 목덜미 너머로 느껴지는 간지러움이 퍽 낯설었다. 코끝으로 찬 공기가 넘실거렸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다음 내쉬는 단계는 잠깐 뒤로 미뤘다. 새벽이슬과 솔잎 향이 섞인 공기가 폐 안 구석구석을 메웠다. 가슴 가득 끌어안은 공기가 체온을 닮아 따뜻해진 다음에야 바깥으로 풀어주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짙은 푸름이 지평선서부터 황금빛으로 잠식당하고 있었다. 선명하지 않은 경계면 부근은 주황빛이 도는 분홍색으로 번졌다. 아직 태양이 제 본래 빛을 다 드러내지 않은 틈을 타 동남쪽 하늘을 그믐달이 장식했다.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금성이 자리했다. 해 질 무렵, 그리고 새벽녘에 짧은 동안만 볼 수 있는 천체는 창공에 드리운 빛이 미처 가시지 못 한 때조차 선명하게 빛난다. 그만큼 밝고 영롱하다. 관측 가능 시간이 길지 않기에 더 아름답다.

이른 새벽부터 휘파람새가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울었다. 나견은 그 자그마한 생명이 부르는 노랫소리를 가만 듣고 있다 눈을 감았다. 잠을 쫓으려고 창문을 열었는데 바깥 분위기는 어쩐지 더 꿈결 같았다. 겨울이 긴 우디온에서는 한낮이면 몰라도 아침저녁으로는 적막이 가득한 하늘 아래를 바람 소리만이 흩트렸다. 어린 시절엔 새소리 듣기가 귀했던지라 그는 새 집터를 아주 좋아했다. 이제 그는 니젤 근처에 자리한 숲을 등 바로 뒤에 두고 살았다.

그러니까,

지금 바로 뒤에 서서 그의 어깨에 머리를 툭 내려놓은 이 사람과.

"깜짝이야."

부러 목소리를 키워 말했다. 비교선상에 오르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규격 외의 존재들이라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는 것 뿐이지 나견의 신체 능력도 일반인 평균을 한참 웃돌았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기척을 감출 생각도 않는 사람이 비척거리며 마룻바닥을 끄는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그의 청각이 무딘 건 아니라는 소리다. 상대가 아무리 노련한 기사일지라도. 더구나 담청색 기린 지우스는 나견에게 걸어갈 때에는 의식적으로 발걸음 소리를 키웠다. 그의 기준에서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나견이 그의 인기척을 충분히 듣고 뒤에서 다가가도 놀라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견이 조금 전 같은 말을 상대방더러 들으라고 내뱉은 이유는, 나잇값은 어디로 날려 먹고 아침 댓바람부터 살을 맞대오는 행동에 대한 가벼운 타박이었다. 이런 나견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간 행적을 보아 전부 다 파악했을게 분명했지만, 지우스는 짐짓 모른 척을 이었다. 그는 어느새 꽤 길어진 황금빛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빗어 한 갈래로 모아 주인의 어깨너머 가슴팍 앞으로 넘겼다. 희게 드러난 목덜미에 도로 입가를 얹으며 이번에는 팔을 감아 허리까지 끌어안았다. 매 끼니를 신경 써서 챙겨 먹였건만 여전히 품이 남았다. 그는 팔을 더 교차시켜 그들 사이를 비집은 마지막 빈 공간마저 없앴다. 살갗에서 낙엽이 사그락거리는 숲 냄새가 났다.

"춥진 않고?"

"네. 등 뒤에 누구 덕분에."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고요함에 짧게 감사를 표했다. 그동안의 생은 너무도 치열했다. 세상은 너희가 가치 있는 존재인지, 더 살아가도 될만한 존재인지를 증명해 보이라는 것처럼 끊임없이 시련을 던졌다. 가치를 증명해내지 못했을 시엔 언제든 숨을 끊어 갈 것처럼. 고난은 언제나 다른 형태로 들이닥쳐 간신히 하나에 익숙해질 때쯤 새로운 해결책을 다시 요구했다. 목숨을 걸어 물살이 험하게 몰아치는 강을 건너면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이 기다렸다.

드물게 바깥이 조용할 때면 내면이 요란을 떨었다.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장면을 극적인 과장까지 더해 연출해 보였다. 후회, 죄책감, 자기혐오 따위의 이름이 붙은 검은 그림자가 옷가지든 팔다리든 가리지 않고 붙잡아 밑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그림자가 닿은 곳마다 타르 같은 액체가 끈적하게 흘렀다. 이대로 저 검은 늪에 잠겨 죽으면 차라리 편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당장 눈앞의 목표에 집중하도록, 현재를 살아 버티도록 정신 차리게 해주는 존재가 나견에겐 지우스였고, 지우스에겐 나견이었다. 그들 모두 능력 있는 사령탑으로서 투쟁의 결과를 승리로 만들어내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위치였다. 전략적으로 그들에겐 서로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살기 위한 전략을 세우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

바깥이 조용하면 내면이 시끄러웠다.

다른 무엇보다도 상대가 살았으면 했다. 네가 구해낸 세상에서, 당신이 빛으로 이끌어낸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랐다. 그 소망 안에 정작 자신을 넣는 방법을 몰랐다. 한 쪽이 없다면 다른 쪽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몰랐다. 자신을 위한 상대의 행동에 상처 입는 날이 많았다. 상처 입었다는 것까지도 미안해했다. 그렇게나 어린 사랑이었다.

가슴께를 뜨겁게 데우며 차오르는 간절함에 얼굴에 몇 번이고 덧씌운 방벽에 금이 가서, 그 틈 사이를 엿보고 나서야 상대가 어떤 바람을 품고 있는지 깨달았다. 자신이 없으면 제가 희망한 상대방의 미래는 존재할 수 없다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다. 눈동자가 서로를 품더니 그 부피를 이기지 못하고 가득 넘쳐흘렀다. 섞인 숨은 열이 나는 만큼 달았다. 몸 안에 들어온 병원체를 제거할 때 면역 체계가 만들어내는 정도의 열이었다. 상처가 아무는 신호와도 같았다.

서로에게 상대가 자신을 버리고 떠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생기기까지 길다면 긴 시간이 걸렸다. 그때까지 나견은 지우스의 곁에 있었고, 지우스는 나견을 기다렸다. 악착같이 행복해지려 노력했다. 그들 자신을 위한 행동은 처음부터 끝까지가 상대를 위한 행동이었기 때문에.

나견은 제 한쪽 어깨를 뒤덮은 녹빛 얇은 실뭉치를 살살 헤집었다.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게 머리카락이 아니라 허리를 감싸 안은 사람이 내뱉는 숨이라는 걸 인식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등에 닿는 얇은 옷가지와 피부 너머로 심장의 느릿한 박동이 느껴졌다. 아마 제 심장도 같은 박자로 뛰고 있을 터였다. 그 작은 울림을 놓치기 싫었다. 이렇게 고요한 시간보다 더 세세하게 평화를 자각할 수 있는 순간이,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없었다.

지우스가 단단하게 감았던 팔을 풀고 연이어 고개를 들었다. 갈빗대 아래를 한 번 쓸어내린 다음 마지막으로 마른 어깨에 도장을 찍듯 입술을 얹어 눌렀다가 옅은 촉, 소리와 함께 떼어냈다. 아쉬움을 뒤로 하려는지 입맞춤이 길었다. 그대로 몸을 돌리려는 그를 나견이 손을 맞잡아 멈춰 세웠다. 설마 당신만 아쉬운 줄 알까.

"어깨에다가만 하시게요?"

표정에는 장난스러움까지 담고 손으로는 슬쩍 깍지를 끼며 물었다. 의문을 갖고 돌아본 홍채가 어느덧 어이가 없다는 식의 웃음을 담았다. 기껏 띄웠던 거리를 도로 좁혔다. 갈 수록 늘어, 아주. 지우스는 잠긴 목소리로 짧게 중얼거리곤 입술을 포갰다. 건조하지만 폭신했다. 언젠가 있었던 입맞춤은 낭만은 없게도 피 맛이 났다. 누군가의 잔뜩 튼 입술 탓에. 또 다른 누군가의 입 안쪽 살을 짓씹는 버릇 탓에. 잠시 떠오른 지난날에 지우스는 입꼬리에 얇은 미소를 얹으며 나견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잡아 받혔다. 이번에는 나견의 팔이 지우스의 목을 감았다. 깍지가 풀려 자유로워진 손으로 척추가 그리는 선을 따라 나견의 등을 천천히 쓸었다.

작게 열린 틈새를 파고들어 혀를 밀어 넣었다. 입천장을 쓰다듬는 살덩이를 나견이 혀끝을 말아 살살 누르며 반겼다. 지우스는 모든 신경을 제 품 안에 사람에게 집중했다. 가늘게 떨리는 숨결까지 온전하게 느껴야 했다. 단 한 순간도 허투루 보낼 수 없었다.

나견의 숨이 다해갈 때쯤 엉킨 호흡을 풀었다. 지우스는 입술을 한 번 더 가볍게 겹쳐 번들거리는 타액을 닦아주었다. 그게 간지러웠는지 숨을 고르던 와중에 웃음소리가 섞여 흘러나왔다. 엄지손가락으로 입가를 마저 정리해주며 처음 나견에게 온 목적을 마침내 이야기했다.

"그만 문 닫고 들어와, 아침 먹자."

"식빵도 구울까요?"

"좋지."

애초부터 그들의 남은 미래 순간순간마다 서로를 새겨 넣을 생각으로 살림을 합쳤다. 고통이 길었으니 앞으로 살아갈 시간만큼은 빠지는 곳 하나 없이 행복으로 꾸미는 편이 수지타산에 맞지 않는가.

아침해는 이제 막 떠오르고 있었다.

평화는 고요의 형태를 띄었다.

여명

黎明 희미하게 날이 밝아오는 빛, 또는 그런 무렵.

餘命 남은 생명, 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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