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의 재구성 2
지우견
*현대 AU
대학생 지우스 X 편의점 알바하는 나견
2편? 후일담? 입니다.
https://youtu.be/kGKjQqXoNwo?si=Urz7AZ4SL0g2FBYo
연속재생을 추천드립니다.
17.
잠깐 시점을 바꿔 지우스에게 집중해보자. 그는 나견을 쓰다듬고 방을 나섰다. 달칵, 하고 문틀 받이판에 잠금쇠가 들어가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는 방금 저지른 행동을 자각했다.
내가 애 머리에 무슨 짓을 한 거지.
지우스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지도 못한 채로 한참 동안 물음표만을 띄웠다. 어제저녁 바람이 찼으니 열이라도 나는지 확인하려고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래, 거기까진 합리적이었다. 취기로 달아오른 몸이 찬 공기를 쐬면 평소보다 쉽게 감기에 걸릴 수 있다는 점은 그간 경험을 토대로 알고 있었으니까. 더구나 나견은 이번에 난생처음으로 술이라는 음료를 입에 댔으니 더 많이 겪어본 자신이 그를 챙겨야 마땅했다. 문제는 그다음 이어진 동작에 있었다.
거기서 바로 손을 뗐으면 될 것을 앞머리를 쓰다듬는 건 또 어디서 날아온 개연성인가.
방문 너머로는 들리지 않도록 소리를 낮춰 기다란 날숨을 뽑아냈다. 가슴 안쪽의 답답함은 여전했다. 판단보다 행동이 먼저 나가는 일은 드물었다. 기억할 수 있는 모든 생애에 걸쳐 거의 없었다고 봐도 좋았다. 술 탓인지 자다 깬 탓인지 답지 않게 흐무러진 그 얼굴이 단지 좀...
나견에겐 죽을 데워놓겠다 말하고 나왔으니 그리 해야 했다. 전날 그를 만나러 가기 전 지우스는 근처 도시락 가게를 들러 쇠고기버섯죽을 포장해 냉장실에 들였다. 대학 신입생 시절 신고식을 가장한 선배들의 주량 자랑 대회가 있은 이튿날 아침. 동기 파디얀이 해장하라며 입속으로 한 숟가락을 밀어 넣은 이후부터 그가 술자리 다음으로 갖는 첫 식사는 언제나 흰죽이었다. 최소한의 감칠맛만이 밴 미음은 입맛 없는 통에 대충 삼키기에도 용이할 뿐만 아니라 속에 부담을 주지도 않았다. 이번만큼은 나견이 치킨마요 이외에 어떤 음식을 좋아할지 몰라 가게에서 가장 잘 팔린다는 종류를 골랐지만.
포장 용기를 바닥까지 싹싹 긁어 내용물을 냄비에 옮겨 담았다. 인덕션 레인지는 중간 정도 출력으로 조절했다. 맑은 국물이면 몰라도 죽은 중불로 천천히 데워야 바닥에 눌어붙지 않는다. 지우스는 열이 골고루 전달되도록 나무 숟가락으로 냄비 안을 휘적거렸다. 물 흐르듯 매끄러운 움직임이었으나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어젯밤 반쯤 잠든 나견을 붙잡고 바래다줄 테니 집이 어디냐 물은 건 사실이었다. 그에 몽롱한 중얼거림 뿐 알맞은 답변이 없어 제 거처로 데리고 온 것 또한 사실이었다. 말마따나 멀쩡하지도 사람을 길바닥에서 재울 수야 없지 않는가. 학생이라면 교내 기숙사에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으나 학사 일정도 끝났겠다 진작에 방을 비웠으리라 예상했다. 만일 그렇지 않다 한들 누가 봐도 알코올에 잡아먹힌 모습을 한 학생을 과연 학교에서 가만 놔둘까. 그런 질문에는 최악을 상정하는 편이 항상 나았다.
아무래도 같은 방에서 잔 게 화근이었다. 나견을 침대에 눕혔으면 내 이부자리는 거실에다 폈어야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아니지, 애초에 같이 술까지 마셨는데 한방에서 잤다고 그리 대수...인가? 그래도 서로 얼굴 보고 지낸 시간이 얼만데. 불편해하려나. 딱히 그런 기색은 안 보였지만 방금은 정신이 없었다 치면...
익숙하면서도 낯선 지끈거림을 잠재우려 눈가에 손등을 올렸다. 같은 사람의 피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서로 온도감이 달랐다. 얼굴에 찬 걸 댔으면 그 속도 따라서 냉정해져야 하지 않나. 왜 자꾸 홧홧거리기만 하는가. 어째서 이렇게까지 의구심을 품는가조차 이유를 들 수 없었다.
어쩌면 내면으로는 진작에 답을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다만 똑바로 바라볼 수 있도록 구체화할 방법을 찾지 못했을 뿐. 근래 나를 나답지 못하게 만든 일련의 사건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다시 정리해보자.
나견.
...그래, 나견. 그 애가 하는 짓이 살가워서. 짧은 대화 중에도 다감한 성정이 드러나서. 눈매가 장난기를 그득 담았을 적에도 야무져서. 새빨간 홍채는 타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서. 내 무거운 가슴 안쪽도 알아봐 줬으면 해서.
단순 호의라면 생각조차 않았을 일들이었다. 사실 편의점이야 집 바로 앞에도 하나 있다. 그쪽 점장의 사정으로 며칠인가 문을 닫았을 적에 다른 곳을 대신 들렀던 건데 네가 거기에 있었다. 너는 모르겠지만 나 원래 그렇게 자주 웃지 않아. 술은 핑계였다. 사적인 네가 어떤 모습일지 보고 싶었다. 네가 싫어할까 봐 매달 두 갑씩은 비우던 담배를 요 몇 주간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너를 눈동자에 담을 때면 매번 손수 지은 봄바람을 같이 실었던 것 같았다. 저번에 손끝끼리 스쳤을 때. 아니지,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였을까. 내가...
아,
"하아......"
어떡하지.
18.
나견은 다섯 번째 심호흡을 했다. 지우스를 다시 마주할 용기를 내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시도가 필요했다. 원체 타인의 생김새를 객관적으로 분석했으면 분석했지 평가를 내리거나 하는 성격은 아니었던지라 조금 전 난데없이 들이닥친 감상이 더욱 낯설었다.
그래서.
잘생겼다고?
...그가?
갑자기?
이번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생각이란 하면 할 수록 깊숙한 곳을 파고드는 성질이 있어 지금처럼 자신감이 필요한 상황에선 부적절했다. 나견은 쉼 없이 굴러가는 제 머리가 이토록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훔쳐보는 사람 따위 있을 리가 만무했지만 두 팔 사이로 얼굴을 숨겼다. 뒤척거릴 때마다 이불에서 서늘한 향이 배어 나왔다. 방을 나가지도, 그렇다고 마음 편히 누워있지도 못하는 상황에 제대로 끼어버렸다.
온 군데가 그의 흔적을 머금고 있었다.
당연하지 그 형네 집이니까.
그 생각을 신호탄으로 겨우 머리를 비웠다. 이번에는 심호흡을 하는 대신 아예 숨을 참고 조심스럽게 이불을 젖혔다. 대학에 지원서를 넣을 당시에조차 느껴본 적 없는 망설임이 발걸음마다 달라붙었다. 문고리를 돌리는 데에만 해도 온몸에 힘이 주욱 빠졌다. 비척거리며 거실로 나서자 지우스는 미지근한 액체가 남실거리는 잔을 건넸다. 왜 때문인지 미세하게 떠는 손끝을 피해 잔 아래쪽을 감싸 받았다. 녹음이 드리운 눈가에 언뜻 아쉬움이 비쳐 보인 건, 기분 탓일 것이었다.
"꿀물이야. 숙취에 좋으니까 그거부터 마셔."
손바닥과 물의 온도가 비슷해질 때까지 잔 입구만 엄지손가락으로 쓸다가 한 모금으로 입안을 데웠다. 혀끝이 약간 아릿하게 달았다. 어떤 감정에 관한 예사스러운 표현처럼.
지우스는 제 몫의 죽을 마저 뜨며 턱짓으로 식탁을 가리켰다. 서너 뼘 정도 너비의 탁자 한 편에는 이미 수저 한 벌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릇이 놓여있었다. 그는 원래가 그런 사람이었다. 상냥하진 않았지만 섬세한. 또는 다정한. 팔이 걸리지 않는 자리에 찻잔을 올려두고 숟가락을 들자 지우스가 맞은편에 와 조용히 앉았다. 말소리가 빈 자리를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로 채웠다. 각각 편의점 계산대와 손님용 테이블에 앉아서도 우리는 언제나 그랬다. 떠오른 화제가 있다면 꺼내고, 없으면 말고. 상대의 말을 이어받아 제 생각을 얹어가던 중 어색하지 않은 시점에 찾아온 침묵 또한 대화였다.
"이거 형이 만들었어요?"
"밖에서 사다가 내가 데웠어."
"음. 그래서 맛있었군."
"뭐라."
"솔직히 요리에 재능있어 보이진 않아서요."
"또 모르지."
19.
"지우스 형."
"응."
"......아니에요."
"...사람 궁금하게 해놓고."
"별거 아니라서요."
20.
별거 아니면.
말해줄 수 있지 않나.
21.
아니요.
아직은.
22.
'표정으로 대화하기'는 생각보다 많은 부분을 드러낼 수도, 생각보다 많은 부분을 숨길 수도 있었다.
그래도
먼저 알아봐 주면 좋겠다.
아직 나는 잘 모르겠으니까.
23.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대학교 기숙사로 이사를 했다. 정식 입학도 전이었지만 학교 측에 사정을 설명하니 미리 들어와 생활할 수 있도록 허가해주었다. 사람들은 보육원이 들어간 사연에 약했다. 당사자는 별다른 유감이라고는 없고 그 심리를 알뜰하게 이용해 먹을 따름이었지만.
"사실 도서관이 제일 기대돼요. 지나가면서 보기만 했는데도 규모가 꽤 큰 것 같아서."
여느 날처럼 편의점 계산대에 마주 보고 앉은 상태였다. 지망하던 대학에 합격했다는 사실보다도 그 대학이 마침 지우스가 다니는 곳과 같다는 사실에 떨림의 중점을 둬버린 과거의 자신은 잠깐 기억에서 지웠다. 표정 관리. 표정 관리.
"보고 싶은 책 있으면 맛보기 하는 셈 치고 빌려다 줄까? 네 성질머리 생각하면 학생증 나올 때까지 못 기다리지 싶네."
속도 모르는 인간은 그런 소리를 잘만 해댔다. 다른 사람은 겉모습만 뜯어보면 그 안에 든 감정이랄지 의도 따위가 곧잘 읽혔다. 초능력은 아니고 관찰력의 영역이었다. 모든 생각은 어떤 방식으로든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경직된 어깨, 다듬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티가 나는 손톱, 이채가 도는 눈동자 등등. 나견은 그런 흔적들을 포착하고, 종합 지어, 결론을 도출했다. 지우스만 예외였다. 의도까지는 어떻게든 추론할 수 있었으나 감정은 도무지 들여다보이지가 않았다. 내뱉는 말과 행하는 몸짓에 묻어있는 것이 특정인을 향한 정인지, 아니면 불특정 다수에게 드러내는 배려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자꾸 그러면 오해하잖아.
"성질머리라니 말이 심하네."
"은근슬쩍 말 놓는 그 성질머리."
"그렇게 존대를 중요시하실 줄은 제가 무지하여 미처 몰랐습니다?"
"이거 봐 한 마디를 져먹질 않잖아. 그래서. 빌려다 줘, 말아?"
"그럼 신간으로 부탁 좀 할게요. 아, 그리고."
여상히 주고받던 티격태격함에 한 가지를 깜빡 잊을 뻔했다. 최근 며칠 동안 꺼낼 시기만을 벼르고 벼르던 말이 있었다. 몇 번이고 문장을 다듬고 어조를 조절했다. 평범하게, 지나가는 말처럼. 제가 그 말을 내밀었을 때 지우스가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궁금했다.
"저 이번 주로 여기 알바 그만둬요. 아셔야 할 것 같아서."
샛노란 눈동자가 덜컥 내려앉았다. 적어도 나견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24.
달리 큰 이유는 없었다. 3월이 접어들면 지인의 부탁으로 과외 수업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애초에 편의점 일도 더 이상 보육원 선생님들께 손 벌리기 싫어 생활비 벌이 삼아 시작했을 뿐 크게 미련 남을 부분은 없었다. 더구나 과외가 몇 배는 시급이 셌으니 누가 봐도 합리적인 선택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럼에도 나견이 일을 그만둔다는 말을 지우스에게 전하기까지 한참을 망설인 이유는, 위 단락에서 한 가지 손봐야 할 지점이 생겨버린 탓이었다.
미련.
우리에게 편의점 밖에서 만남을 지속할 명분이 있나?
모든 인간사는 명분을 갖는다. 아무 이유 없이 행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그 '이유 없음' 기저에 깔린 감정이 명분이 되었다. 이제는 정의를 내려야 했다. 앞으로 일주일 안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그냥 얘기 좀 자주 한 점원과 손님일 뿐이고, 아니라면...
"반납일은 다다음 주 토요일이니까 그전까지만 나한테 줘."
다행히 무슨 일이 생기긴 했다. 마지막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간만에 편의점에 들른 지우스는 신용카드 대신 책을 건넸다. 표지 삽화 일부를 가린 선명한 분류라벨이 신간임을 증명했다. 그 말고도 한 권이 더 있었다. 나견의 눈동자가 그리로 데굴 굴러가자 그는 변명처럼 덧붙였다.
"이거는... 그냥 한 번 읽어봐. 내가 좋아하는 책이라."
들어본 적은 없는 작가의 단편선이었다. 세로로 가볍게 굽혀보자 책배 중간 즈음에 메모지 한 쪽 모서리가 조그맣게 튀어나왔다. 책갈피로 썼던 건가 싶어 그 쪽을 넘겨보려던 찰나 지우스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기숙사 들어갔댔지? 시간도 늦었는데 데려다줄게."
"형네 집 반대 방향이잖아요."
"정리 다 했음 나와."
"말 돌리네."
더이상 군말은 없이 가방을 챙겼다. 애초에 이러려고 퇴근 시간을 맞춰 왔으리라. 마냥 고요하지만은 않은 밤공기는 봄을 바로 앞두고서도 여즉 쌀쌀했다. 책을 껴안은 제 손과 겉옷 주머니에 끼워 넣은 그의 손은 스칠 일이 없었다. 누구 하나 앞서 나가지 않고 우리는 나란히 걸었다.
오가는 말은 없었다. 이 침묵 또한 대화일까. 당신도, 지금 나에게 말을 걸고 있을까.
25.
기어코 기숙사 현관 앞까지 따라온 지우스를 돌려보내고 책상 의자에 쓰러지듯 기대 앉았다. 진작 발에 익은 기숙사 오는 길이 유독 길다 느껴졌건만 돌이켜보니 고작 순간이었다. 한참을 흰색 벽지만 응시했다. 잠깐 수면 위로 제정신이 떠오른 틈을 타 그가 좋아한다던 책을 집어 들었다.
어떤 부분이 그렇게 좋았을까 생각하며 짤막한 이야기들을 술술 넘기다 보니 아까 전 발견했던 메모지가 붙은 쪽에 도달했다. 어느 한 문단 아래에 붙은 메모지에는 간결한 필체로 두 문장이 적혀있었다.
네 생각 나더라. 너는 어떤 것 같아?
눈동자로 물음표까지를 쓸어 넘긴 다음, 도로 조금 위로 올라가 종이에 인쇄된 글자들을 다시 한번 차근차근 받아드렸다. 한 자 한 자 나아갈 수록 또렷해지는 어떤 깨달음이 뒤통수를 후렸다. 그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 게 맞는지 확인하려 똑같은 글을 읽고 또 다시 읽었다. 혼자서 확대 해석해버린 건 아닐까도 고민했다. 하지만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답은 하나였으니 결국 뻔했다. 눈앞에 두고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전부 특별 대우였다.
차마 스스로 말을 얹지 못하고 남의 문장을 빌려 전한 진심이, 내 속마음에 덮인 천마저도 들춰냈다. 나는 어떤 것 같으냐고? 고개를 들자 책장에 비스듬히 꽂힌 짙은 초록색 일기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속지를 그 이름 세 글자로 빼곡히 채워놓고도 이제서야 이해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서둘러 핸드폰 화면을 켰다. 1초라도 더 늦어져선 안 될 것 같았다. 잠금 비밀번호는 두 번이나 틀려 먹고도 지우스의 전화번호는 단박에 찾아내는 내가 웃겼다. 그까짓 말 한 마디가 뭐 그리 어려워서 몇 겹으로 포장해 전달한 당신이, 그 마음을 보고서야 내 마음을 이해한 내가, 우리가, 그냥 웃겼다. 덜덜 떨리는 게 손인지 호흡인지 심장인지 아니면 전부 다인지 구분할 겨를도 없었다. 몇 초 남짓한 통화 연결음이 그를 기다리던 모든 저녁만큼이나 길었다.
지우스는 금방 받았다.
26.
(...) 표준 대기압 같은 사람이다, 당신은. 시선이 얽힐 적에 미디어가 떠들던 대로 굴러떨어질 것 같다느니 하는 요란스런 감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미래를 같이 걷고 싶었다.
27.
"형."
"응, 왜."
"그, 책 읽어봤어요."
"그랬어?"
빠르네. 한숨처럼 딸린 음성이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평소답지 못하게 끝음이 흐렸다. 두어 번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가 목소리를 얹었다. 어조는 단호하게, 머뭇거림 없이.
"내일 만나요, 우리. 얼굴 보고 할 얘기가 있어요."
"...그러자. 언제가 편해?"
"저녁 즈음요. 형 집으로 가도 돼요?"
한동안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연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손바닥에 자국을 남겼다. 긴장하면 나오는 버릇이 그에게도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마침내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았다. 간단하게 밥 해놓을 테니까 저녁은 와서 먹어. 주소는 알 테고, 마중 나갈까?"
"아뇨, 제가... 갈게요. 문만 열어주세요."
통화를 마무리하는 인사는 서로의 좋은 잠을 빌어주는 식상한 구절이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후회했다. 아침에 만나자고 할 걸. 얼굴 보고 전할 속마음을 다듬어두려면 하루는 필요하지 싶어 저녁에 보자고 했는데 벌써 보고 싶었다. 책상에 이마를 대고 폐를 있는 대로 비워냈다. 나오는 숨이 영 뜨거웠다. 아무래도 잠은 그른 것 같았다.
28.
아침에 지우스가 공동현관 비밀번호라며 문자로 보내온 숫자 조합을 보자마자 후회는 취소했다. 내용만 보면 건조하기 짝이 없는 문자만으로도 속이 자유낙하를 하는데 일찍 만났으면 심장이 입을 틀어막기라도 할 뻔했다. 그렇다고 생각이 정리된 것도 아니었다.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하고 여명이 황혼이 되도록 고민해봐도 적당한 문장이 떠오르질 않았다. 결국은 임기응변 능력을 믿기로 했다. 뱃속이 뒤집어지려는 모양이었다.
초인종에 손가락을 올려둔 채로 흐트러진 숨을 골랐다. 내가 달려왔던가? 어제 한 통화 이후로 생긴 모든 기억이 흐리기만 했다. 나답지 않았다. 이 문 너머에 있을 사람이 연관된 일에는 전부, 나답지 않았다. 초인종을 누르자 기다렸다는 듯 현관문이 열렸다.
"어, 왔어?"
"지우스 형."
"응."
"저 좋아해요?"
임기응변 능력을 왜 믿었을까. 당장 내가 제정신일 리가 없는데. 거기에 당신은 또 왜 곧이곧대로 대답해주고 앉아있는데. 너무 웃긴데 웃음이 안 나왔다.
"......어."
"연애감정으로?"
"나견, 일단 들어와서..."
충동적으로 튀어나온 행동이었다. 그가 길을 비켜주려는 듯 고개를 돌리길래 그냥.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바람이 등을 밀었다는 핑계를 대면 안 믿겠지. 그러니까 이건 오롯하게 충동이다. 샛노란 홍채가 가까워졌다. 그 안에 붉은색이 얽히는 광경이 꽤나 예뻤다. 날이 건조해서 그런지 입술은 약간 거칠었다. 짓씹었다 아문 흔적 같기도 했다.
"...저도요."
타고난 성격을 생각해봐도 우리 둘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그리고 우리 둘 다 서로 앞에선 서로답지도 않으니까. 한참 늦은데다 많이 갑작스럽고 좀 멋없어도 이해해주길 바라.
"형의 미래에, 제가 끼고 싶어요."
"거짓말이라고는 생각 안 했지만 설마 진짜 읽어봤을 줄은..."
지우스는 말그대로 간신히 웃어보였다. 내 얼굴도 크게 다를 바 없을 것 같았다.
내 눈에도 당신의 눈동자가 비치고 있겠지? 그럼 두 사람분의 홍채가 같은 색깔이려나. 미세하게 떠는 손끝이 내 팔을 타고 올라 그의 어깨에 얹은 손에 닿았다. 짧은 스침으로 끝내지 않고 지우스는 내 손등을 완전히 덮어 단단하게 그러쥐었다. 서늘한 손가락과 대비된 탓인지 미적지근한 손바닥이 더욱 따뜻했다. 행동의 의도는 조금 전 물음과 요구에 대한 긍정. 그 안에 든 감정은, 나와 같은...
"그럼 이제... 어떡하죠."
"그러게...
29.
우리 어떡하지."
너를 나와 같은 마음에 담으면 그 울타리 이름이 우리인가 보다. 미처 다 닫지 못한 현관문 틈새로 살가운 봄바람이 불어왔다.
30. 30.
판단이니 고민이니 잠깐 지워버리기로 했다. 그저 입술을 마저 포갰다.
26은 실제 책에서 발췌한 것이 아닌 제가 만든 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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