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의 기사&애늙은이

[잔불의 기사/힌셔+루지안] 헌사

최초의 여성 기사이며, 그리하여 여기사라는 호칭을 사라지게 한 이에게 바침

* 시간대는 적당히 무시해주시기(첫 수도 입성 이후...)

* 제목점지 도저히 되지 않아서, 그냥...

* 힌셔 님께 당신의 존재를 시작으로 그 세상은 여기까지 바뀌어왔다는 걸 꼭 보여드리고 싶어서 쓴 헌정글. 애늙은이에서 힌셔는 본인 시대에서 '여기사'로 불렸지만, 잔불의 기사에서는 여성인 기사를 그 누구도 '여기사'라고 부르지 않아! -> 추가로, 힌셔 이래의 두번째 세번째...n번째 여성기사들에게도. 당신들의 투쟁은 지금의 세상을 만들었노라고.

* 생각해보면, 현재 잔불 내 최강의 기사가 순백의 코끼리 칸덴티아 님이니까 어린이 층에서는 짱 센 기사는 원래 여자가 하는 거 아냐?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시시때때로 오탈자, 비문 등 발견하면 소소하게 수정작업 들어감

* 펜슬에 재업


수도의 어느 거리. 루지안은 눈만 끔뻑이며 서 있었다. 벼락의 날이 죽어 대장간에도 들렀는데 생각보다 빠르게 처리해준 덕에 시간이 남았지만, 잘 모르는 지역에서 어디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때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사람 사는 데가 다 거기서 거기 아닐까. 혹시 길을 잃더라도 일단 높은 곳에 올라가 방향만 잡으면 달려가는 건 금방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여긴 궁 가까이 아닌가.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수도에 처음 왔을 때, 뭣도 모르고 순백의 코끼리 칸덴티아 님과 대치했던 기억이 선했다. 정말 햇병아리여서 할 수 있는 미친 짓이긴 했어. 인솔하는 기사님들이 보기에 여전히 병아리이긴 하겠지만, 그때보다야 조금 나아졌을까. 아마 나아졌겠지. 최소한 체력은. 피도란스 님이 연병장 뛰라고 하는 것도 전보다는 오래 버티고.

‘게다가 나는 견습기사잖아. 나중에 여기서 서임도 받을 거고! 쫄지 말자, 루지안.’

“게 있는 건 견습기사인가?”

“히익!”

꿋꿋하게 다짐하기 무섭게 등 뒤에서 기척도 없이 다가온 이가 말을 걸어와, 루지안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거기까지만 해도 심장이 두근두근 달음박질을 쳤는데, 저를 부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서는 아예 심장을 토할 것만 같았다. 저는 우디안의 동기 중에서도, 아니, 특수 2기 견습 중에서 제일 멍청하고 아는 것도 없다 보니 다들 유명한 기사라고 하더라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때가 많았다. 오죽해야 수도에 처음 입성하던 날, 칸덴티아 님도 알아채지 못했겠나(물론 그때는 사람 얼굴 분간할 상황이 아니긴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바보여도 저 기사는 알고 있었다. 아니, 당연히 알 수밖에 없다. 최초의 여성 기사. 그리하여 여기사라는 호칭 자체가 사라지게 만든 이.

“검붉은 하마 님!”

거의 비명에 가깝게 외친 말에 검붉은 하마, 힌셔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지만 곧, 전쟁의 영웅은 단단한 얼굴 위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서 물었다.

“그대는 새까만 닭이 속해있는 특수 2기의 견습 기사인가? 아까 견습이냐고 말했네만, 놀란 듯하여 다시 묻네.”

“네, 네에! 루지안이라고 합니다!”

“내가 이 시대에 온 이래, 어린 친구들을 자주 볼 기회가 없어서 말일세. 자네 같이 젋은 견습생에게 꼭 대답을 들었으면 하는 게 있었지.”

“어, 제가 좀 멍청한 편이라. 제 동기 중에 진짜 진짜 똑똑한 애 있거든요? 좀 비실거리는 게 흠이지만. 걔한테 묻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까는 그렇게 바짝 긴장해서 쫄았던 루지안은 곧 평소의 텐션으로 돌아와 술술 말했다. 그 모습을 기꺼워하면서 힌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나는 이왕이면 자네에게서 듣고 싶네. 아까 그 친구가 여성이라면 그 애에게도 똑같이 묻고 싶고.”

“걔 이름이 나진인데요, 남자애예요. 음, 그러면 제가 답할 수 있는 거라면 답하겠습니다!”

힌셔 님이 왜 저런 말을 한 것인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가 제게 답을 구하고 있음은 알 수 있어서 루지안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기사론 수업도 나름 열심히 했고, 조리 있게 말은 못 했지만 기린 님도 자신의 오롯한 생각을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점수를 쳐줬으니, 그것처럼 하면 될 거라고 속으로 단단히 기합을 넣었다.

“그럼 루지안 그대에게 묻지. 여자라고 해서, 기사가 되겠다는 그 길에 무언가 문제는 없었는가?”

“엥? 아뇨. 전혀요. 오히려 여자애가 기사감이다 하면 어른들은 더 좋아했는데요. 코끼리 님 같은 인재가 나올지도 모른다면서.”

날아든 질문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오히려 맥이 빠지고 말아 어조가 느슨해졌지만, 눈치를 보아하니 힌셔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라며 중얼거리는 모습은 어딘가 감격한 듯도 했다. 정신이 먼 데로 가버린 모습에 다시 불러도 실례가 아닐까, 루지안이 고민하던 참에야 힌셔가 활짝 웃으며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대답 고맙다. 그렇다면 내 투쟁은 그리 틀리지 않았겠구나. 정말로, 내가 그대들의 길에 첫 삽을 뜬 사람이라는 것이 매우 큰 영광이야. 시대를 건너 직접 보게 된 것이 나쁘지만은 않군.”

검붉은 하마 힌셔, 오로지 남성만이 기사가 되던 시절에 최고 중의 최고였기 때문에 그 세계에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던 선도자는 이제 가장 뛰어난 자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기사가 될 수 있는 미래를 현재로서 목도했다. 모두가 다듬어질 기회를 얻는 세상. 시대는 아주 많이 변했다. 저와 많은 이들이 바라고 가꿔온 어느 순간의 단락은 시간이 단절된 그에게 유독 크게 다가온다. 그의 스승이 제게 했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네가 새 시대를 열 것이라는 말이 실현되었음을 확고하게 깨달아 웃는 그에게 돌연 눈앞의 아이가 자기 짐을 뒤적거리더니 무언가 건넸다.

“그런데 하마 님, 슬프세요? 왜 울 것 같은 얼굴이세요? 힘들어서 그러는 거면 그럴 땐 단 게 최고랬어요. 이거요!”

검을 휘두르느라 굳은살이 박이고 잔 흉터가 많은 손바닥 위에 올려진 사탕. 이번에는 눈가가 시큰했다. 어린 날의 제 손이 겹쳐 보인다. 그 손으로 결국 쥐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길을 간 자와 기다리고 기다리며 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간 자. 정말로 눈물이 핑 돌아서, 힌셔는 이 아이의 상냥함에 조금 기대어 보기로 한다.

“여전히 그대로인 것도 있구나.”

“와, 이 사탕. 힌셔 님 태어난 때도 있었어요?”

“하하.”

이 애의 작은 착각은 그저 착각으로만 남겨두며, 힌셔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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