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의 기사/목와+기린닭] 두벌잠
일단은 231031의 할로윈 연성이었음
* 잔불의 기사 136화 기반, 일단 무늬는 할로윈 연성이라고 썼던 글(펜슬에 재업)
* 팬피셜 함유량 높음 : (예) 약초방 아들내미 지우스
* 목주와론에 기린닭(조합명)을 비벼서 먹어보세요 : CP탈부착은 자유자재로 해주셔도 됩니다.
* 고쳐쓰기 거의 안 된 터라, 오탈자비문은 미래의 제가 어떻게든 합니다
* 해당 트윗타래(클릭 시 새창)에서 시작합니다
BGM : Close in the Distance(클릭 시 새창)(효월 스토리 인게임 화면이 있기에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
그는 돌연 눈을 떴다. 내가 잠을 잤던가. 아까는 밤이었나. 멍하니 떠오른 생각을 곧장 도리질을 쳐 내보냈다.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저에게 있어 상황 파악이란 언제라도 생존에 직결하는 문제다. 안전한 곳에 있었고 날이 늦어 잤던 거라면 지금처럼 흐리멍덩할 리가 없으며, 스스로 잠든 게 아니라면 왜 제가 눈을 감았다가 뜨게 된 거란 말인가. 심장 밑바닥으로 고이는 불안은 제 인지에 깊게 팬 불연속지점만큼이나 깊다. 꼭 누군가 도려내기라도 한 듯, 대체 왜 제가 여기서 난데없이 깨어난 것인지 짐작조차 가질 않는다.
오래지 않아, 새까만 닭은 자기가 제일 잘하는 일을 하기로 했다. 상황에 순응하고 적응해서 살아남는 것. 이전의 지각을 깡그리 날려 먹었다면, 그걸 당장 찾을 수 없다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곳은 안전한지, 적과 아군(그런데 아군이라고 부를 것이 제게 있나? 왜 이 단어가 함께 떠올랐는지 모호하다)이 있는지. 그런 정보는 생존율에 직접 영향을 주는 요인이었다.
기사의 오감이 예민하게 사방으로 뻗어나가다가, 돌연 삐끗한다.
“너어어어는!”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등 뒤에 아무도 있지 않았건만, 투구 안쪽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외침과 더불어 누군가 제 등짝을 팡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뒤를 허용했다는 것에 온몸이 티 안 나게 잔뜩 옴츠러들었다가 반 박자 늦게 알아차린 기척에 지지대 없이 자라는 덩굴처럼 마구잡이로 뻗어나가던 사고가 뚝 부러졌다.
“내가! 부탁한! 그거 하나를! 못! 지켜서!”
내용과 어조만으로 보면 화를 내는 거지만 그저 낭랑한 목소리였다. 물론 제 등을 마구 때리는 그 손길은 분명히 아프긴 한데, 오히려 죄이듯이 아픈 것은 심장이다.
아아, 그랬다. 그 애가 있다. 어느샌가 제 앞에 돌아선 새까만 닭 와론이 있다. 전후도 본말도 없이, 갑작스레 지금 여기에 선 그 애. 제 삶에서 갑작스럽게 떠난 것과 마찬가지로 돌연 나타났다.
‘와론’은 벌써 너댓 대를 얻어맞을 때는 아무런 신음도 안 냈다가, 뒤늦게야 앓는 소리를 냈다.
“아야, 아프잖아….”
“지금의 네가 이 정도로 아프겠니?!”
온순하고 둥근 인상을 하는 주제에 손이 맵고 깡따구도 있어서 곧잘 소리를 꽥꽥 지르곤 했던 그 애가 정녕 맞는다. 얼굴을 똑바르게 보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기억은 목소리부터 흐려져, 마침내 얼굴의 세부 사항이 뭉개진 지 오래였는데.
‘그러니 꿈이겠지.’
죽은 자가 돌아온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 죽으면 끝이다.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간다는 말조차, 산 자를 위한 미온적인 위로에 지나지 않는 법 아니던가. 상실은 그저 상실로 남기에.
빈자리를 빈자리로 오래도록 남겨두어, 야영지의 모닥불을 꺼뜨리지 않게 하듯이, 온기 한 조각 스며들지 못하게 둔 자리를 몇 번이고 돌아보았다. 이어받지 않는다는 선택지가 있었을까 모르겠지만 결국 스스로 택한 가시밭길이지 않은가. 와론의 뒤를 졸졸 쫓았던 어린애는 이제 영영 오간 데 없어졌으나, 그는 저를 타박하면서도 여전히 애정이 담뿍 어린 손길에 어린양을 부려본다. 꿈이니까. 그 얄팍한 이유에 기대어, 그 어떤 의문도 인지의 불연속 사이에 몰아넣고서.
안온한 품에서 모든 것이 묽게 풀려나간다. 어쩌면 이런 게 죽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희미하게 스쳐 지나가는 찰나에,
—그러니 너는 살아. 나는 널 오래도록 기다릴 수 있으니.
그런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그리고 의식은 급격하게 부상한다. 깊은 물 속에서 지독하게 빠르게 건져 올려진 것처럼 골이 띵하게 울리고 온몸이 단조라도 당한 마냥 얼얼하다. 와론은 이제서야 전후를 불러들일 수 있었다. 예측된 전투가 있었으나 그 양은 예상에서 충분히 벗어났다. 전부 때려눕히긴 했지만 자잘한 부상이 쌓인 탓에, 마지막엔 꽤 거나하게 몸뚱이 어딘가가 꿰뚫렸거나 튿어졌거나 했을 것이다.
등에 닿는 감각으로 이곳은 바위너설 틈새쯤이겠거니 싶고, 해는 저물었다. 우편에서 장작이 타는 소리와 열기. 모닥불이 있다. 거기서 시야 끄트머리에 뭔가 어른거리는 것을 보면 사람도. 추적을 피하려고 기척을 죽였지만 바로 곁이면 의미가 없는 수준이다.
전후와 본말이 다 꿰어지자 와론은 속으로 장탄식을 뱉는다. 하필이면 이 녀석이냐 싶다가도 이 녀석이라면 당연히 그랬겠지 싶다.
“…몸은 좀 어때, 새까만 닭?”
“…….”
“정신 든 거 안다. 지금 네 상태를 알아야 해. 구원요청을 해야 할지 우리끼리 돌파할지 늦어도 새벽까진 골라야 하니까.”
“어어, 그러냐.”
와론은 대답을 대강 뭉갰다. 투구를 벗기지도 않았으니 제가 곁눈질을 해도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왜 제가 깬 걸 알았는지 조금은 궁금했다. 그건 나중에라도 풀면 됐지. 그는 일어나지 않은 채로 손끝 발끝부터 차례로 힘을 주어 어디가 부러지고 망가졌는지를 확인한다. 웬만한 상처에는 약에 붕대까지 아주 잘 치료가 되어 있었다. 제일 심한 건 아무래도 한 움큼 뜯겨나간 옆구리인데, 전투가 끝났다는 생각과 더불어 피가 한꺼번에 빠져나가 기절했던 모양이다. 기사의 몸뚱어리란 튼튼한 법이라, 지금부터라도 살살 움직이면 자리를 옮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바로 움직—”
“그, 내가 답을 재촉한 것 같긴 하지만, 정말 새벽까지는 답을 유예해도 되니까. …자려면 더 자.”
그렇게 생각하고 입을 열었는데, 기린의 어물거리는 말에 출발 가능하다는 말이 끊겼다. 경력과 기세에서 밀리는 편이니 제게는 늘 강세를 보이는 자미 녀석이 우물쭈물하는 걸 보니 괜히 소름까지 돋았다가, 불현듯 어느 생각이 떠오르며 절로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 기린 너야말로 어디 머리라도 맞았냐? 웬일로 이렇게 친절—아, 미친. 새끼야, 너 설마 사상지평!”
“아냐, 절대 아냐! 네가 다 마무리 지어놓고선 무슨! 것보다 다시 누워! 옆구리 다 찢겨놓고 그렇게 움직이면 내장 도로 뱉는다고!”
정색하며 부정하는 꼴은 거짓은 아닌 것 같고, 제가 전장의 마지막 녀석까지 절명시켰던 걸 떠올리고서 새까만 닭은 앓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옆구리가 울컥 젖어드는 걸 보니 상처가 터진 모양이다.
당연히 근거리에 있던 지우스는 그걸 알아차리고선 인상을 찌푸리더니 몸을 돌려 붕대와 뭔가를 꺼내왔다. 약초 특유의 냄새가 짙다.
“…새까만 닭 너하고 한 약속을 잊은 건 아냐.”
“입만 살아선.”
그리곤 다시 침묵. 제 상처를 샅샅이 훑어가며 확인하는 꼴을 보아하니 어디서 약초를 조달해다 붕대까지 알뜰하게 감은 건 이 녀석인가 보다. 기사는 원체 몸뚱어리가 튼튼하고 회복력도 좋다 보니 일반인 기준으로 치명상이 났을 정도가 아니면 약은 넘기고 붕대나 얼추 감는 게 다인데, 급진적인 건지 고지식한 건지 모를 이놈은 상처마다 약을 처발라놓으셨다.
의외로 침묵을 견디지 못한 건 담청색 기린 쪽이었다.
“…집이 약초방을 했어. 그래서 웬만한 응급처치라면 다 해.”
“별일이네. 기린 네가 본인 신상을 다 털고.”
정말 별일이긴 했다. 보통 저희 둘 사이에서 대화다운 대화라곤 없다시피 하다. 농담 혹은 작전 수립. 가벼운 대화랄 것도 제가 쿡 찌르면 저쪽이 받아치는 정도지, 기린 쪽에서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온 적은 없었다. 아니, 잠깐 있어 봐. 와론은 자기가 좀 전에 떠올린 단어 하나를 돌이킨다. 이건 적극적인 게 아니라, 뭔가를 갚아야 한다는 사람의 초조함이다. 제게서 뭔가 사적인 것을 알아버려서 그 자신도 사적인 정보를 건네 천칭의 균형을 잡지 않으면 못 견디는 거다. 그런데 뭐를? 기린은 결단코 제 투구 안쪽을 들여다보는 짓을 하지 않는 놈이고, 아까까지의 저는 쭉 기절해있지 않았던가.
새까만 닭의 기색이 당돌하게 모가 나자, 소리 없는 질책에 못 이기고 지우스가 눈을 질끈 감고서 고해했다.
“네가 기절해있을 때, 잠꼬대를 좀 했는데. 아마 누굴 만나는 꿈이었던 것 같았고, 그, 절대 고의는 아니었지만 듣게 됐어. 내용을 보면 역시 네가 사적으로 잘 아는 사람 같았는데….”
일어나고 바로 두벌잠 자면 보통은 꿈을 이어서 꾸지 않나? 정말 다시 안 자도 괜찮겠어? 우물쭈물하며 말한 것치곤 희한한 의견까지 내세우는 게 지금이 결단코 현실이고 저건 그 괘씸한 담청색 기린이 맞는다는 생각만 강해진다. 특히 그 시선이 때때로 저의 목걸이에 닿는 것을 보면 더욱더. 저 녀석은 이게 누군가의 유품인 것을 아는 놈이니까 누굴 만나는 꿈이지 않았느냐고 추측성으로 말해놓고서 사실은 그 누구를 이 목걸이의 원래 주인이라고 특정했을 거다. 아 정말 괘씸하다, 괘씸해.
“야, 걍 대놓고 말해. 안 죽여.”
“…네가 그런 식으로 죽이는 게 아닌 건 알고 있어. 괜한 협박은 관두지 그래. 이 이야기는 그만한다고 치고, 뭐, 못 말할 것도 없긴 하지. 그거 아나, 새까만 닭?”
오늘은 죽은 자가 돌아오는 날이라고 해서, 세간에는 그런 소소한 행사가 있는 날이야. 그날의 해가 뜨고서 다음 해가 뜰 때까지.
“그러니 다시 물을게. 꿈을 이어서 볼 생각이 있다면 그렇다고 말해.”
기린의 설명에 와론은 잠깐 덜그럭 몸을 굳혔다가, 곧 사지의 힘을 느슨하게 풀었다. 할 말을 가둬두는 인종이 아닌지라, 숨겼던 말을 고스란히 꺼내둔 지우스는 표정이 한층 개었다. 그 앞에 대고 와론은 딱밤을 한 대 때리며 비웃었다.
“그런 배려는 됐다네. 꿈은 꿈이야.”
“…그래.”
정말 그 애가 찾아온 거라면, 걔가 나더러 지금을 살랬어. 그 말은 속으로 숨기고서 와론은 너설 입구에 놓인 론누를 불러 손에 쥐었다.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다. 그 사이는 네가 곁에 있다고 생각해도 괜찮은 거겠지. 욱신거리는 몸뚱이조차 지금은 상쾌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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