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론지우

[와론지우] 별 없는 밤

한 사람만을 죽일 수는 없다

  • CP 요소 옅음. NCP로 보셔도, CP로 보셔도, 리버스로 보셔도 됩니다. ‘와론지우’는 원산지 표기(……혹여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께서 계실까) 같은 것이니 편하게 읽어주시와요.

  • 맞춤법 검사기를 돌리지 않았습니다! 뭔가 조금 어라? 싶은 부분이 있다면 마음의 눈으로 수정해 읽어주시길 바라요S2

  • 마냑(@LastOrder_65)이라는 잔불의 기사 트위터 계정이 있답니다. 같이 놀아주시면 너무너무 기뻐요 8ㅁ8

Summary

두 사람은 이제 같은 것을 두려워한다.


“사흘.”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클 그림자가 지우스의 얼굴을 덮는다. 검지, 중지, 그리고 약지. 세 개의 손가락이 쫙 펼쳐진 손. 그것이 그의 앞에 다시 한번 들이밀어졌다. 고작 각막으로부터 고작 0.5cm만을 남겨두고 멈춘 손에도 물론 그가 눈 하나 깜짝하는 일은 없다. 지우스는 단지 눈동자만을 위로 살짝 굴려,

“말은 명확하게 해, 새까만 닭.”

하, 소리 낸 와론이 이번에는 손 아닌 머리를 들이민다. 벽에 기대어 앉은 지우스를 향해, 쭈그려 앉아.

“모르는 척을 할 거라면 성의라도 들였어야지. 이 기린 자식이 머리 얻어맞고 왔다고 정신이라도 나갔나.”

“부연 설명을 해.”

“내가 지금 네게 할 만한 말은 하나밖에 없잖아. 그 머리는 어디 두고 왔나? 하긴, ……애초 어디 하나 잘못되지 않고서야 내 허락 없이 사상지평을 사용할 일도 없었겠지.” 쭈그려 앉은 무릎에 팔꿈치를 올려 턱 괸 와론은 짧은 한숨을 한 번 쉬었다가, “아주 그냥 허락을 받고 써야겠다, 는 생각도 없었지?”

들이밀었던 손을 까닥여 지우스의 이마를 꾹 건드린다. 그는 역시 물러서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지우스의 눈에 서린 것은 오로지 바다를 닮은 고요뿐이다. 그러나 바다란 고요한 그 속에 거센 물살을 품기 마련이므로, 그처럼이나 들이쉬지도 내쉬지도 못한 채 멈춘 숨을 닭은 읽어냈던 것이다. 이 자식을 어쩌지, 생각하던 틈. 바다에 비친 해를 닮은 그 눈이 와론을 직시한다.

“그러니까, 설명을 하라는 거다.”

“하라, 가 아니고 해줘, 겠지. ‘해주세요’는 어때?”

담청의 기린은 여전히 말이 없다. 어깨는 펴고 허리는 곧추세운 당당한 모습으로. 기사답게.

결국 새까만 닭, 그녀가 먼저 입을 연다. 장난기 담은 어조이나 그 아래에 얽어 붙은 살기는 감출 생각조차 없이 살벌하다. 투구 너머 보이지 않는 그녀의 눈 또한 분명 바다를 닮았을 것이다. 다만 지우스의 것과는 달리 벼랑 앞 거센 파도를.

와론의 손끝이 지우스의 붕대 위를 몇 번 더 툭, 툭 하고.

“야. 쫄았냐?”

“헛소리.”

“쫄 짓을 왜 해. 왜 하기는.”

한숨인지 감탄인지 짜증인지 모를 숨을 뱉어낸 와론이 툭툭거리던 손을 움직여 붕대 틈으로 빠져나온 지우스의 머리카락을 덮는다.

“사흘. 정확히 사흘간은 나는 너를 쫓지 않을 거지롱. 이야,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도 해주고. 나 너무 착하다, 그지?”

“……사냥.”

“기사 사냥꾼. 이제서야 내 별명이 떠오르기라도 했나 봐. 그러게 미리미리 경계라도…… 아니다, 조심이라도 하지 그랬나.”

와론이 어깨를 으쓱인다. 다분히 희극적인 그 움직임에서야 지우스는 어깨를 늘어뜨린다.

그런 것보다도 구태여 사흘이라는 기간을 두는 것이 꼭 유희를 위해 활을 드는 사냥꾼을 닮아서. 그는 그 말을 꾹 목 아래로 내리눌렀다. 그는 단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알겠어.”

고개는 끄덕이지 않았으나 언어만큼이나 명확한 동의는 없을 것이다. 씩 웃은 와론-지우스는 그렇게 느꼈다-은 붕대 사이로 삐져나온 수더분한 머리카락을 몇 번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나서야 뒤돌아 자리를 뜬다.

뒤돌아 흔드는 그녀의 손을, 지우스는 아주 오래 바라보았다.

홀로 남은 의무실의 공기가 유난히도 텁텁했던 것도 같다.


그는 단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어떤 치는 그랬다더라. 당장 내일 세계가 멸망한다 해도 자신은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다가오지 않을 미래를 위해 무엇이라도 하겠다고. 그것이 자신이 멸망을 받아들이는 방법이라고.

굳이 따지자면 지우스 또한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덧붙여, 이번 사안은 세계의 멸망처럼이나 거창한 무언가조차 아니지 않나. 결국 미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므로. 지금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의 가치란 퇴색되지 않을 것이므로. 고작 그의 목숨 하나. 그것으로 세계가 멸망하는 일은 없으므로.

절망할 필요는 없지 아니한가.

앞에 놓인 서류를 바라본다. 사슴과 오소리가 다녀간 지 한 시간은 흐른 듯함에도, 여즉 그들이 남긴 바람이 서류를 팔랑이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정신 차려야지. 가볍게 목을 뚜둑거리며 시계를 올려다본다. 때문에 그들이 사무실을 나선 것으로부터 5분이 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때문에 금빛 눈에 잠시 초점이 사라진다. 아직 채 낫지도 않은 부상자 주제 책상에 앉았다며 끌어내려던 사슴과 그 옆에 서서 흥, 고개 돌리던 오소리.

그런 것들이 곱씹을 만큼이나 중요했던가? 지우스는 고개를 젓는다. 할 일을 하자. 적당히 풀린 목덜미를 꾹 누르는 것도 잠시, 금세 펜을 힘주어 잡는다. 그리고 뇌까렸다.

“사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새까만 닭과의 맹세를 어겼다는 것을 여우와 너구리 역시 안다. 다음 힘은 닭의 허락을 받고 사용하겠다는 맹세를 들은 사람들.

기사에게 중요한 것은 목숨보다도 명예. 바로 그런 시스템. 맹세를 깨부숨으로서 명예를 짓밟은 기사라면 본디 사냥당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그때의 일 이후로 여우와 너구리를 마주친 적 또한 없다. 이번 일로부터, 두 사람은 병문안 한 번 찾아온 적 없다. 지우스는 그 회적색 하늘 아래의 침묵으로부터 어떤 애정을 실감한다. 곧 눈을 감는다.

그는 과연 무엇을 두려워하나?

그러나 괜찮다. 다만 무책임하게 사라지지만은 않을 테니.

――그러니까, 미래를 위해.

펜이 바삐 움직인다. 한시가 아쉽다. 잠을 잘 새가 어디 있겠나. 달잔이 찾아오고, 그가 거북이를 찾아가고. 오랜만이라며 찾아온 동료들을 만나고. 차후 이어질 임무의 향방을 논하고. 마도병기의 위험성과 기사의 위험성을 비교하는 의미 없는 논쟁을 하고. 그가 아는 모든 것들을 기록하려 하고. 담청색 기린으로서 맡았던 업무들을 어떻게 분배해야 할지 고민하기도 하고. 기부가 끊길 것이라 보육원에 전하고. 죽음 이후를, 준비하고. 그러면서도 죽음도 불명예도 알리지 않고. 마땅히 후회 따위도 하지 않고.

누군가의 말마따나 무책임한 새끼는 되지 않도록.

그러다가는 새까만 닭의 근황과 위치를 묻는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와론의 향방이 필요할 때엔 그를 찾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된 것은 언제부터였더라. 그라면 당연히 알 것이라는 확신을 담아. 다만 이번만큼은,

“모릅니다.”

“대충 어디에 있을 거라는 것도 늘 잘 맞췄잖아. 느낌 오는 거 없어? 추리든 뭐든 아무튼.”

“정말 모릅니다.”

특유의 그 건조한 눈에 유난히 생기가 없었기 때문이었을지. 혹은 평소보다도 단호한 어조 때문이었을지. 그들은 몇 번 턱을 문지르다가도 금세 물러선다. 이런 날도 다 있다며 놀리던 그들이 덧붙인다.

“닭을 숨겨야 할 일이라도 있는 건가?”

“그럴 리가요. 저는 정말 모릅니다.”

어쩌면 아무것도.

그들을 떠나보내고서 올려다본 하늘은 지나치게 맑았다.

그렇게 밤을 새운 지 이틀째에는 사슴마저 눈치를 챘던 것도 같다. 익숙한 헤드락이 그를 반긴다. 잠이나 자라며, 대충 이렇게 저렇게 치면 병상으로 돌아가게 될 텐데. 라는 농담에는 지우스마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농담 맞겠지? 두 손을 자신의 허리에 당당하게 붙인 파디얀이 찡긋 웃는다. 힘든 일 있으면 말해. 얼마든지 도와줄 거라는 거, 너도 알지? 그리고 그녀가 덧붙인 말은,

“우리는 동료잖아.”

지우스는 웃었다.

“그리고 기사지.”

그 이상의 말은 필요치 않았다. 파디얀 또한 침묵으로 애정을 증명했으므로. 그러나 결코 그 애정의 깊이가 얄팍하지 않다는 것을 담청색 기린은 안다. 때문에 그는 웃었다. 기사답게.

“미안해.”

기사답게도 명확하며 어둡지도 맑지도 않도록 그는 사과했다. 아주 오래전의 일에서부터 오늘날까지의 그 모든 것들을.

지우스가 내뱉은 말에 그러나 파디얀은 웃지 못했다.


“징한 새끼.”

“뭐가 또.”

이제는 와론의 깡! 소리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게 되었다. 론누와 와론의 투구가 부딪히는 소리. 기린이라 해서 흔히 정의하는 ‘평범……, 아니, 멀쩡한 사람’인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의 비정상은 각각 결이 다르다. 어쩌면 내 담력 지분의 5% 정도는 네가 차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네 담력의 지분 역시 내게 조금쯤은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어쭈, 딴생각을 하시겠다?”

지우스가 빠르게 눈을 몇 번 깜박인다.

“자살은 명예롭지 못한 일이니까.”

“진짜 딴생각 한 게 맞는데, 이 자식? 대화의 흐름이 아주 널을 뛰어? 일부러 그러냐?”

“너야말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잖아.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니면서.”

“내 머리가 좀 좋아야지. 그래도 말은 정확하게 해.”

나는 너에 대한 것만큼은 모르겠다. 새까만 닭은 그런 말을 했다. 사흘을 주겠다던 와론에게 지우스가 부연 설명을 요구했던 것처럼.

휘영청 뜬 보름달 아래. 여름밤의 습하고도 서늘한 바람이 마주 선 두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간다. 숨을 길게 내쉰 지우스가 눈을 꾹 감았다가 뜬다. 늘상 그렇듯 자켓의 주머니에 찔러넣은 손으로, 보이지 않도록 주먹을 쥐고선,

“무서웠……, 아니, 네 표현을 빌리자면 쫄았다고.”

말이 끝맺어지기 무섭게 아하하, 으하핫. 와론이 소리 내어 웃는다. 그렇다면 허가 없이 사상지평을 사용한 그 판단이 자살 행위라는 자각조차 없었던 것인가? 그 맑은 듯 새까만 소리가 변두리의 공터를 가득 채운다. 그러고서 어느 순간 돌연 잦아든다.

직전의 소란 탓에 침묵이 유난히도 날카롭다. 이어지는 와론의 어조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옆에 선 나무를 와론이 툭, 건드린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와론의 관점으로, 한 대 얻어맞은 나무는 그 짧은 충격으로도 열매를 우수수 떨어뜨려야 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냥, 그렇다고. 나는 정확하게 말했을 뿐이야.”

“허.”

“네가 원했듯이.”

와론이 론누의 끝을 흙바닥에 팍 처박는다. 아득한 어둠, 그녀의 투구 너머 역시 그만큼이나 아득함에도 지우스는 그녀의 가늘게 뜬 눈을 본 것도 같았다. 그것도 잠시, 와론의 고개가 좌우로 저인다.

“진짜 징한 새끼. 도망도 안 갔네.”

“내가 이럴 거라는 건 너도 알고 있었을 텐데, 새까만 닭. 사냥의 재미가 덜해 아쉽게 됐겠군.”

“혀가 길다? 주도권이 내게 있다는 걸 잊…….”

“곧 죽을 텐데 무슨 말을 못 하겠어.”

그러니 동시에 솔직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싸가지 없는 자식이라 중얼거리던 닭이 기린의 목에 론누의 끝을 들이댄다. 어둠 아래서도 그날만은 희게 빛난다. 그녀의 눈이 투구 속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것처럼.

“무서웠다면서. 너무 당당하다, 너?”

“후회하지 않으니까.”

정확히 설명되는 말에는 그것만의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정확하게 맞아들어가는 톱니바퀴 또한 그만큼의 무게는 가질 것이다. 저는 미래를 위한 톱니바퀴로써 기능했으니 목숨값은 다한 것이라고. 사람 하나의 목숨으로 사람 몇은 구했다면 이만한 남는 장사가 어디 있겠나. 그 아이들이 살아남음으로 구해질 더 많은 사람들까지 계산한다면…….

지우스의 눈앞에 이번에는 다섯 개의 손가락이 들이밀어진다. 그런 희미한 그림자가 그를 덮는다. 그러나 지우스는 역시 물러서지도 눈을 감지도 않았다. 그는 분명 ‘무언가’를 두려워하나 그 대상이 와론이었던 적은 없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퍽, 소리와 함께 나무에 지우스의 머리가 처박힌다. 신음조차 내지 않은 그가 눈만 데굴 굴려 와론을 돌아본다. 선명한 금안이다.

“와론, 너는 내가 살려달라 비는 꼴이라도 보고 싶다는 것처럼 굴어.”

“그러겠냐, 내가?”

“그래. 나는 네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와론의 손으로부터 느리게 힘이 빠져나간다. 마침내 그녀의 손이 지우스의 머리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갔을 때 즈음엔 그가 제 어깨를 툭툭 턴다. 그리고 와론을 마주한다. 어깨는 펴고 허리는 곧추세운 당당한 모습으로. 기사답게.

“아프긴 하지만 어디 지장이 갈 정도로 친 것도 아니고.”

“네가 멀쩡할 때 죽여야 하니 당연한 거야.”

와론이 제 뒷목을 벅벅 긁는다. 곧 죽을 것이기 때문에 솔직할 수 있다면,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에 솔직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녀가 난데없이 고개를 숙였다. 곧 차고도 딱딱한 감촉이 지우스의 이마에 닿는다. 와론이 투구를 그의 이마에 가져다 댄 것이다. 어쩌면 꼭, 서로 이마라도 맞대는 듯.

“야, 담청색 기린. 지우스.”

“그래.”

그녀의 손이 지우스의 머리에 다시 한번 올려놓아진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딘가에 처박지도, 부슬한 그 머리카락을 더듬지도, 툭툭거리며 낮잡아 보지도 않으면서. 다만 제 손이 놓일 자리란 그곳이 마땅하다는 것처럼 가만 그의 머리 위를 차지하고 앉았을 뿐이다. 긴 숨을 뱉은 그녀가 짧게 그 머리에 놓인 손을 움찔거린다. 그러고서도 한참을 침묵했다가,

“나도 무서웠어.”

지우스는 그제야 몸을 뒤로 물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기사답지 못하게도 그러했다. 그러나 발 한 짝을 뒤로 빼기가 무섭게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두 손이 지우스의 등 뒤를 파고들었으므로.

그러니까, 끌어안았으므로.

짧은 간극도 잠시. 지우스의 어색한 손이 와론의 등을 향해 느리게 옮겨진다. 두 사람의 팔에도 손에도 힘 따위는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서로의 온기는 확실히 얽혀든다.

새까만 밤이었다.

지우스가 속삭였다. 애매한 자세 탓에 닭의 귀에 바로 파고드는 바로 그 목소리.

“나는 명예를 지켰다.”

맹세를 어김으로 명예를 지켰다.

“그러니 너는 네 명예를 지켜.”

기사답게. 명예를 어긴 기사를 살해함으로.

“다만 한 가지 물어야 할 것이 있어.”

“뭔데? 대답하고 아니고는 내 마음이다?”

“네가 내 힘으로 하려 했던 일은 뭐였지?”

“협상이라도 해보겠다고?”

새까만 닭은 웃었다. 진짜 웃긴 놈이야. 드디어 두 사람의 몸이 떨어진다. 그래, 어디 할 테면 해 봐. 그녀가 고개를 기울인다. 그녀는 언제고 지우스에게 말할 기회도 변명할 기회도, 때로는 사과할 기회마저 주었으므로. 물론 그가 그것을 실행했는지의 여부는 차지하고서라도 여하튼 그랬다.

떨어지고서야 지우스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선다. 와론과의 거리가 다시 가까워진다.

“실은, 사용처 따위는 없었던 거다.”

와론은 답하지 않았다.

“너는 그저, 그런 맹세라는 형태가 필요했을 뿐이야.”

와론은 답하지 않았다.

“나를 네 옆에 묶어둘 장치가 필요했던 것이고.”

와론은 답하지 않음으로 긍정했다.

“기어스를 어기게 해 기사를 사냥한다던 그 방식을 고려하면, 아마 너는 내가 맹세를 어기도록 유도할 생각이었…….”

“――아니야.”

마침내 그녀는 부정했다. 기린의 멱살을 잡아챈 손이 지나치게 단단하다.

“그런 의도가 아주 없었다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그것뿐일 수는 없어. 내가 고작 그런 이유로 너와 소꿉질을 했겠느냐고. 4년이라는 그 긴 시간을 견뎠겠냔 말이야. 너 나를 아주 그렇게 보고 있었단 말이지?”

분노보다는 짜증을 담은 어조가 지우스에게 틀어박힌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멱살을 쥐어 잡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그런데도 형형했던 눈은 온데간데없이, 그녀는 어쩌면 지우스의 그것을 닮은 건조한 눈으로. 혹은 ■다운 서늘한 눈으로.

“모르겠어.”

지우스의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느리게, 그렇지만 확실하게.

“다행이다.”

그러니까, 무엇이?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죽는 일에 대해? 네게 내 힘을 빌려주지 못하게 된 일에 대해? 또는…….

지우스조차 그 답을 알지 못했다.

말과 감정은 정확한 자리에 놓여야 한다. 지우스도 ■도 때로 사실로부터 진실이 도출되기도 한다는 것 또한 이해한다. 그럼에도 지금 이 자리에서라면 어떤 말을 뱉어야 ‘정확한 자리’가 될까.

입을 다문 그녀를 향해, 지우스는 단지 사과했다. 그것이 정확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래야만 했다.

“미안해.”

그런 그는 웃고 있었다. 여느 때보다도 편안하게 웃었다. 너는 그렇게도 웃을 줄 아는 녀석이었구나. 와론은 아래로 늘어뜨렸던 론누를 힘주어 잡는다. 그리고 옆을 향해 들어 올리듯 기울였다가, 금세 앞을 향해 겨눈다. 그녀 또한 웃었다. 어쩌면 머리라도 얻어맞은 것은, 정신이 나간 것은 그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지우스가 사상지평을 사용해야만 했던 것처럼.

하늘을 올려다 본다. 역시 지나치게 맑다.

새까맣기만 해야 했을 밤을 샛노란 달빛이 감히 밝히려 드는 풍경이 그곳에 있다.

――두 사람은 이제 같은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새까만 닭은.

아니, ■는…….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HL
#Non-CP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