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몬 이모저모고모
외전 짜집기 (이어지는 내용 X) | 24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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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바다."
"뭐래."
"가기로 했잖아."
"그래. '셋이서' 가기로 했지. 한 명이 빠졌으니 무효."
"무슨 소리야. '나진'이 멀쩡히 학교 다니고 있는데?"
"야 그건"
"가자고."
눈에 보이는 것도 두려운 것도 없는 수능 끝난 고3, 마지막 십 대, 열혈 청춘이라고 예쁘게 포장해놓은 그냥 미친 바다 광인의 압박에 와론은 고개를 살짝 돌려 복도를 지나가는 아무에게나 모스부호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왜 그렇게 눈을 깜빡여?"
"안구건조증."
"아 눈이 건조했구나아. 이리 와봐. 내가 빼서 물에 담가둘게."
"아니야 인공눈물 넣고 깨끗하고 맑고 촉촉한 눈으로 숙소를 예약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와 정말? 안 그래도 되는데. 하지만 네가 그렇게 원하니까 맡길게. 그럼 나는 '나진'한테 말해주러 가야겠다."
"어 그래."
와론은 어린 놈한테 진 자신이 너무나도 수치스러웠다. 그러나
'저 새끼 눈이 돌아있었어……. 진짜 뽑혔을지도.'
시각을 잃는 것보다는 나았다.
바다에 가게 되어 행복한 피도란스는 예비 고2를 찾아가 통보했다.
"바다 갈 거야."
'나진'과 이야기를 나누던 예비 고3과 눈이 마주치자 그에게도 권유했다.
"너도 갈래?"
만인의 첫사랑 피도란스 선배의 눈을 본 둘은 거절하려던 입을 굳게 닫고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사이 와론은 숙소를 잡고 있었다. 사람들은 미치지 않아서 비수기인 겨울에 바다를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바다에 가기로 한 건 새해 전야. 고로 숙소 찾기 개빡셌다는 뜻이다.
하지만 돈으로 안 되는 건 없었다.
개같은 12월. 더 개같은 1월. 눈도 그지같이 와. 올 거면 차라리 함박눈이나 펑펑 내리던가 진눈깨비가 뭐냐.
존나 추워. 추워 뒤지겠다.
한겨울에 바다 가자고 한 저 놈이 등신이고 좋다고 가자 한 네가 등신이고 숙소며 차며 돈 다 대주고 따라가겠다 한 내가 등신이다. 쓰벌 세 얼간이도 겨울엔 바다 안 왔다.
가장 먼저 가자고 한 새끼는 뻘은 볼 거 없다고 숙소에 틀어박혔고, 좋다던 너는 여기 없고, 숙소 예약하고 운전까지 다 한 나는 왜 여기서 손해 보고 있는 거지?
네 그 대~단하신 형님은 왜 여기까지 와서 청승 떨고 앉았고, 지우스 저 새끼는 또 왜 데리고 온 거냐? 저 새끼 얼어 죽는 거야 한 번쯤은 보고 싶긴 했는데 같이 죽고 싶진 않았어.
그리고 여긴 바다지 염전이 아닌데 내가 왜 저 새끼들 염장질까지 봐야 하냐? 옆구리가 시린 게 겨울바람 때문인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이젠.
나오기만 해.
피해보상청구할 거다,
개새끼야.
————
나는 나견. 쌍둥이 동생 나진의 가출 후 동생을 대신해 학교에 다니고 있다. 연락이 안 된지도 1년. 수많은 방법을 동원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종업식 일주일 전, 담임선생님을 찾았다.
"쌤, 아니 선생님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어… 그래. 여기 앉으렴. 음 마실게 녹차밖에 없구나. 녹차 마실래?"
"아뇨.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그래. 혹시 누가 괴롭히거나"
"전 사실 나진이 아닙니다. …네? 아뇨. 교우관계는 원만해요."
"그래 다행… 음?"
나는 혼란스러워 하시는 선생님께 그간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냥 녹차 마신다고 할 걸 그랬다. 많이 말했더니 목 아프네.
"그러니까, 1학기 중간고사까지는 나진이 맞고 그 이후는 나…견이다? 그게 너고?"
"네."
"…하아. 너는 이게 아니, 아니다. 그래서 이걸 내게 말해주는 이유가 뭐니?"
"저는… 학교를 계속 다니고 싶어요. …나견으로."
"으음. 이건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구나."
"아… 역시 그렇죠? 죄송해요. 그러면 나진으로 계속 다니는 건"
"아니. 내가 교장 선생님과 이사장님을 설득해보마. 그동안 속앓이하느라 고생 많았다. 나견."
"…선생님."
아 해진 쌤. 그저 빛. 눈부셔요. 후광이 막, 아 형광등이구나. 앉아주셨으면.
빛 때문에 눈을 게슴츠레 떴더니 우는 줄 아셨나보다. 토닥여주시네. 괜찮은데. 앉아주셨으면.
그렇게 나는 나견으로 졸업했다. 내 이름 박힌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으리라고 상상조차 안 해봤는데. 졸업식도 끝났겠다 점심은 뭘 먹을까 고민하며 나오는데 눈앞에 꽃이 있었다. 아, 진짜 생화, 꽃다발. 그거 든 사람 말고.
"…뭐예요?"
"반응 참 한결같아. 뭐긴 뭐야. 꽃이지."
"그걸 누가 몰라ㅅ"
"졸업 축하해. 어차피 너 올 사람 없잖아. 나라도 축하해줘야지."
"말 참 예쁘게 하세요."
"흠흠. 뭐 먹을래?"
"글쎄요. …무슨 일 났나?"
한 손엔 졸업장과 졸업앨범, 다른 한 손엔 꽃다발을 들고 지우스 선배랑 같이 내려온 계단 끝 1층 중앙현관엔 사람들이 우글우글 몰려있었다. 익숙한 얼굴이 꽤 보이니 졸업생이랑 학부모들, 혹은 가족들인 듯한데… 왜 안 나가지?
"어? 나견이다!"
"야!! 밖에 미쳤어!"
"얼른 나가! 얼른!!"
"뭐? 아니 뭐가? 밀지 마!"
친구들에게 밀리고 밀려 밖으로 나와 본 운동장엔, 고급 스포츠카 한 대가 주차되어있었다.
여기까진 그럴 수 있었다. 수능 끝나자마자 면허 딴 부자 놈들이 저기 바글바글하니 그놈들 차 중 하나든 부모차든 뭐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아! 견아아아!!! 졸업 축하한드아!!!!!"
뚜껑 열린 차에서 폴짝 뛰어나와 양손으로 고이 받친 뽀얀 백설기 같은 두부 한 모에 초 하나 꽂고 방방 뛰며 축하한다고 소리 지르는 저 몸만 큰 똥강아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러면 안 됐다.
무슨 정신으로 운동장까지 뛰어갔는지 모르겠다. 약간 퓨즈가 끊겼었다랄까?
선배에 의해 연행되고 정신 차리고 나서 전해 들은 바로는,
내가 뛰어가서 꽃다발로 나진을 죽도록 팼고, 그 과정에서 두부와 그 애가 딥키스를 했고, 불은 꺼졌지만 촛농은 덜 굳어서 오른쪽 뺨에 연지곤지가 생겼고, 차주인 와론은 행복하게 즐겼지만 찍은 영상에 웃음소리가 너무 커서 아쉽다는 평을 남겼다고 한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이 있다만 그래도 앨범으로 안 친 게 어디인가 싶었다.
오랜만에 본 나진은… 음
"나진, 너 수염 되게 빨리 자라는구나?"
"헉. 벌써 올라왔어? 아침에 싹 밀었는데?!"
룸미러로 요리조리 살피는 게 한두 번 타본 솜씨가 아니다. 근 2년 만에 보는 운전석에 앉아 지문 묻는다고 애 손등을 찰싹 때리는 인간에게로 눈을 돌렸다.
"당신은 또 왜 여기 있어요?"
"아 이 자식 말본새 보게? 안 되겠어. 택시비도 받는다."
"엥? 아 뭐래! 안 받는다며!"
"아아 안 들려 안 들려~ 나 기분 잡쳤어."
"나견, 점심에 잡채 먹을래?"
내 동생이지만 어쩜 저럴까?
"새꺄 두부전골 먹는다며! 내가 거기 예약을 어떻게 했는데!!"
"에이~ 쯧. 어쩔 수 없다. 두부전골 먹자. 뒤에 타."
나진의 선배가 맞긴 하구나. 지금 그게 중요하냐고….
타기 싫어서 머뭇대고 있으니 나진이 손수 문까지 열어줬다. 셋이 먹다 체할 거 같아서 동지를 끌고 탔다. 선배가 있다고 해서 내가 체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나만 고통 받을 수는 없으니까. 조수석은 이방인이 추가되어서, 운전석은 돈이 더 나가게 되어서 앞좌석 둘 다 입이 삐쭉 나왔지만 뭐 내 알 반가? 그러게 누가 그렇게 갑자기 오래?
먹기 전부터 체할 것 같은 상태에서 먹은 두부전골은 무척 맛있었다. 확실히 고급 한정식집은 뭐가 다르긴 한가보다.
————
대명문 사립고등학교.
우스운 말이다. 재벌 2, 3세 집합소지 명문은 무슨. 뭐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하다만. 그래도 수석 입학인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1학년. 노란색 명찰. 병아리도 아니고.
입학하자마자 불려갈 건 또 뭔가. 물론 학생회에 들어갈 거긴 했지만, 자원해서 들어가는 거랑 불려가는 건 완전히 다르지 않겠는가?
"-해서 이게 우리 학생회가 할 일들이야. 원래 회장은 3학년 선배가 1학기까지 맡고 부회장인 2학년에게 물려주는 게 전통이긴 한데, 걔가 워낙 뛰어나서 그냥 바로 회장 됐어. 그러니까 2학년이 학생회장이라고 놀라지도 말고 무시하지도 마. 그러다 큰일 나는 수가 있다. 아 맞다, 걔도 너랑 같은 수석 입학이었어. 잘해봐. 어쩌면 너도 내년에 바로 회장직 달지 누가 아냐?"
"…네."
말 진짜 많네. 2학년이라… 이 사람도 2학년이랬으니까 초록색 명찰이겠네. 그럼 아까 본 검은색은 3학년인가 보다. 아니 한 학년 정도는 하얀색이어야 하는 거 아니야? 진짜 구려.
"다 왔다. 여기가 학생회실. 좀 숨겨져 있지? 자 들어가기 전에, 옷매무새 좀 가다듬어. 우리 회장님 여간 빡빡하신 게 아니거든?"
"아, 네."
똑똑-
노크한 선배를 뒤따라 들어간 학생회실은 굉장히 좁았다. 아니 공간 자체는 넓은데 수많은 파일철, 사람들, 인쇄물… 이 정도면 시험 기간 교무실 아닌가? 아니 학생회가 일을 하면 뭐 얼마나 한다고…….
"아. 1학년?"
"예엡."
"고마워. 그리고, 내가 뭐가 빡빡하냐?"
"어이쿠. 방음이 안 좋네."
"동아리 서류 네가 다 정리해."
"아악! 잘못했어요 회장님!"
장난치는 거 보면 그리 권위적이지는 않나? …장난 맞겠지?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네가 수석 입학이라며? 뭐 틀렸어?"
"네? 어… 39번이요."
초면에 다짜고짜 뭐 틀렸냐고 묻네? 자기는 뭐 다 맞았나.
"음 역시 그건가……. 나, 도 그거 틀렸는데. 이름이… 지우스? 만나서 반가워. 일손이 부족해서 부른 거긴 한데 들어오기 싫으면 안 들어와도 돼. 여기까지 불러놓고 너무한가?"
"…아뇨. 원래 학생회 들어오려고 했어요."
와 사람 불러놓고 명찰만 쓱 보고 쳐다보지도 않는 거봐. 싸가지 없어.
"그래? 다행이네. 다음 주에 면접 봐서 다른 애들도 다 뽑히면 그때부터 활동 시작이라 지금은 뭐 할 거 없어. 그리고 추천하지는 않지만 방송부나 선도부 같은 다른 부서 들어가고 싶으면 중복 지원 가능하긴 해. 시간 뺏어서 미안하고 다시 반으로 돌아가도 좋아. 맞다. 갈 때 저것 좀 들고 가서 반마다 하나씩 나눠줄래? 학생회 홍보지인데 지금 애들이 시간이 없어서."
"…이거 7장 맞죠?"
"어 맞아."
끝까지 보지도 않네. 내가 지 부하직원이야 뭐야? 초록색 명찰. 이름이…
"예, 나.진. 선배님."
"…허."
이제야 고개 드는 것 봐라. 지만 꼬장 부릴 줄 아나. 오전 수업 들어보니 선생들도 다 꼰대라 점심시간 지난 지가 언젠데 지금 오냐고 또 지랄할 거 같아서 짜증 나는데.
"선생이 첫날부터 지각이냐고 지랄하면 내가 불렀다 해. 그럼 아무 말 안 할 테니까, 지우스 후배님. 그리고 그냥 편하게 선배라고 불러."
"아뇨 이게 편해서요."
너무 막 질렀나? 조금 욱하긴 했는데… 괜찮겠지? 화나서 웃는 건 아닌 거 같긴 한데…….
"선배. …졸업 축하드려요."
"하나도 축하하는 표정이 아닌데? 왜 울려고 그래? 누가 보면 네가 졸업하는 줄 알겠다."
"학생회 그 망나니들을 이제 혼자 케어해야 하는 게 억울해서 그런다. 왜요? 누가, 누가 아쉬워할 것 같아요?"
"큽 그래. 하나도 안 그래 보이지만 그렇다 치자."
"아니라니까요?"
인기는 많아서 여기저기서 받은 꽃다발 서너개를 양팔로 안은 '나진 선배님'은 아니라는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지나가는 대부분의 졸업생과 후배들이랑 인사를 나눴다. 나한테 폭탄처리반장직을 덤터기 씌우고 혼자서 빠져나가다니…!
"흐음… 눈물 뚝 그칠 비밀 하나 알려줄까?"
"비밀은 무슨. 그리고 안 울거든요?"
"진짜로. 사실 나 나진 아니야."
"예?"
반 친구인지 뭔지 다들 하나씩 꽃다발과 앨범을 든 3학년들과 잠깐 얘기하다가 내가 있는 운동장 구석으로 돌아온 선배는 지금 날씨만큼이나 건조한 내 눈은 보이지도 않는지 날 울보로 만들었다. 그리고 반박하려고 뗀 입에서 이상한 소리만 나오게 하는 기막힌 비밀을 속삭였다.
"나견. 내 진짜 이름. 너만 알고 있어라."
"나견이면… 만점자?"
"응."
"…어떻게, 39번 어떻게 맞추셨어요?"
"넌 그 와중에 그게 알고 싶어?"
"당연하죠."
다른 문제는 다 난이도 높은 사설 모의고사류였으면서 그것만 사고력 / 추론력 관련된 문제면 어쩌자는 거냐고, 출제자 누구냐고 내가 입학시험 보면서 얼마나 욕했는데! 39번만 두 시간 내내 풀게 했어도 못 풀었을 거다. 끝나고 집에 가서 계속 생각해 봤지만 뭔가 작은 거라도 하나만 알아내면 쭉 풀릴 거 같은데 그 하나를 모르겠어서 얼마나 머리를 굴렸던지. 중간이며 기말이며, 수행, 모고 준비하면서 점점 뒷순위로 밀려나긴 했지만 여전히 답이 뭘까 간간이 들여다보던 문제를 푼 사람이 나타났는데 당연히 답을 물어보는 게 먼저 아닌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작게 흔든 나견 선배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으음 맨입으론 안 되고… 그래, 이렇게 하자. 네가 내 후배가 되면 알려줄게."
"네? 지금도 후배잖아요. 뭐 졸업했다고 후배가 아닌 게 되나."
소리내어 웃은 선배는 올해 -이제 1월이다.- 들은 말 중 두 번째로 기가 막힌 말을 했다.
"아니. 나진 말고, 나. 나견의 후배. 나 수능 내 이름으로 봤거든."
"…진짜 너무한 거 아시죠?"
"왜? 어차피 너도 □□대 지망한다며."
"그렇긴 하지만…."
못 붙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너무한 거 아닌가? 나는 물려줄 후배도 없는데! 작년 1학년 전교 1등은 어디에 두고 없다고 하냐고? 아무리 학생회 돌아가는 꼬라지만 봐도 탈주가 간절하다지만 어떻게 와론한테 맡기겠는가? 걔는 전교 1등이라는 애가 수행 날, 시험 날, 모고 날 빼고는 등교라는 걸 안 하는데!!
이런 내 고뇌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마 알 확률이 98.7%지만) 선배는 짓궂게 빙긋 웃으며 힘겹게 손을 빼내 내 어깨를 두드렸다.
"기대할게 후배."
"하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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