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일신의 영달
룬기린 현대AU
*잔불의 기사 라우룬+지우스
一身的腾达
1
터널의 매캐한 어둠. 열차는 두 팔 간격의 협궤를 타고 미끄러져 들어가 승객들의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진동하며 실외로 빠져나갔다. 객차가 구간을 통과할 때마다 공책에 연필을 댄다면 지진파를 수신하는 지진계처럼 파형을 그렸을 것이다. 두 눈의 시야각을 좁혀 아이폰 액정에 모으려고 노력하던 지우스는 포기하고 바깥을 내다본다. 백색 반광에 눈이 시렸다. 금속 선반위에 올린 짐들이 머리 위에서 뛰어내릴 듯이 짐칸에 몸을 맞부딪히고 있었다. 차차 흰 화산재가 덮으면서 두께를 더해가고 온 세상의 소음을 다물게 하는 침묵 속으로 기찻칸을 가라앉혔다. 지우스는 조용히 설산이 불러 일으키는 경이에 경탄했다. 그의 집이 있는 도시에서라면 아직 제대로 된 한파가 덧창의 절반을 채우지도 못하는 시기였다. 이쯤 되면 도착해서 무엇을 봐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살아오면서 반응이 좋은 사람이었던 적은 없지만 해의 대부분을 일과 일상으로 짜여진 도회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노선을 바꾼다면 누구라도 안색이 달라진다. 바깥의 풍경은 그림처럼 고고히 연장되던 산악에서 점점히 집락과 밭이 뒤설킨 설원지대로 내려왔다. 왕래가 가장 어려워지는 계절 산간으로 자신을 불러낸 이에 대해서 추리하기 전까지 지우스는 언제나 무릎을 접어 넣고 앉아있던 사무실 책상으로부터 수백 킬로 바깥에 와있다는 비현실적인 표지들을 돌아보았다.
같은 직장에서 그들은 보잘것 없는 별 관측동호회였다. 멤버는 고작 셋. 그것도 서정성이라곤 한 스푼도 없는 엔지니어와 이론물리학에 미친 아마추어 과학자와 관찰자 하나. 동호회 사상지평. 관측할리 없는 것을 관측하겠다고 매번 10키로그램이 넘는 텐트와 야영장비를 지고 외지를 돌아다니는 그들에게 걸맞은 이름이었다. 그만큼 열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정체성을 확정하기도 어려운 집합이었기 때문이다. 룬은 야전 캠프의 달인이었고 군면제인 한 사람은 손을 쓰는 일은 도통 재주가 없었으므로 말뚝은 자연스레 지우스의 담당이었다.
유일하게 동호회의 목적를 이룬다는 구실은 매번 무거운 관측 장비가 든 짐을 이고 올라와 가끔 알람에 맞춰 들여다보는 데에 있었다. 망원경을 다루는 멤버가 캠프 가장자리로 불러내면 한담을 나누던 텐트 근처에서 벗어나 옆에서 들려오는 조언에 따라 잠시 대물경의 접안렌즈가 굴곡하여 눈 앞에 가져온 거시의 세계를 들여다 보는 정도였다. 지우스와 룬은 그마저도 취미가 없어 천체망원경을 조립하는 것을 내버려둔 채로 해가 지기 전에 저녁을 만들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분담된 각자의 일에 몰두했기에 야전준비는 수월하게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음식 냄새가 퍼지자 수풀에서 기어나와 야영지를 기웃대던 고양이 몇 마리가 다가왔다. 불기운이 닿는 방향으로 늘어진 털뭉치를 보며 버너 옆에 바람막이를 세우던 룬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벌렸다.
ㅡ아. 나비 밥 주고 온다는 걸 깜빡했네. 주말이라 아무도 건물에 안나올 텐데.
ㅡ나비?
ㅡ회사 주변 고양이말인가.
망원렌즈를 조정하는 곳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ㅡ고양이에게 밥을 줘? 그런 취미도 있어?
다른 켠에서는 아예 고양이를 기른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지우스는 회사 앞을 지나다니는 회색 얼룩의 고양이에게 밥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상상조차 해본적 없었다. 룬은 이 사람 저 사람 거두는 성격이었다. 기억자쇠를 박아넣으며 자신을 뺀 이들의 공통점에 생각외로 고양이를 돌보는 것이 보편적인 취미인가 하는 고찰에 몰두하던 참이었다.
ㅡ전부터 생각했는데, 그거 고양이 아니지? 누구야?
ㅡ내 고양이.
ㅡ사람이잖아.
룬은 딱 잘라 말했다. 그럼 그렇지. 지우스는 다시 신경을 돌려 평탄한 바위 위로 천장의 지지대를 곧추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도 둘의 취미는 비슷한 구석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남쪽 하늘의 기상은 전례없이 청정하다. 버너에서 피어오르는 희연 김이 시커먼 연기라도 되는 것처럼 어둠이 텐트 둘레를 채우자 불을 끄고 세 사람이 기다리지 않아도 시작되는 밤을 기다렸다.
첫번째 행방불명은 그 시기에 일어났다. 룬은 잡다하게 사라져 다음이 되면 다시 아무렇지 않게 나타나곤 했기에 그렇게 단정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잊혀지다가도 구석에 돌아다니던 양말 한쪽의 빨랫감처럼 생각치 못한 순간에 불쑥 그의 공백에 대한 궁금증이 들기도 했다. 주말이나 퇴근 후에 사라진 일상은 어쩌면 망실에 대한 가장 쉬운 단서였다. 각자의 삶이 그리는 변곡은 달랐으며 지우스와 그의 것은 그다지 겹치지 않았기에 꼭 집어 말할 수 없었을 뿐 종적을 감춰진 동안 지우스가 보지 못하는 어느 일상의 골짜기에서 알지 못하는 라우룬이 되어가고 있었다. 같은 동호회의 그에게 룬의 안부를 물었을 때 자신과 비슷한 대답을 하는 그를 지우스는 식당의 테이블 밑으로 걷어찼다. 사람이 어떻게 그리 무심하냐는 면박이었다. 이중적이게도 사람이 그다지 좋지 못하기에 지우스가 해봐야 효과 좋은 언사는 아니었다. 주위 사람을 한대 걷어차주는 일도 읽음 표시가 뜬 채로 좀처럼 답이 돌아올 줄 모르는 한 두 줄의 화면을 확인하는 일도 심심해졌을 때즈음 평일이 돌아오고 룬은 다시 출근했다.
번듯한 휴가와 함께 내밀어진 연락두절이 길어졌을 때도 그럴만한 사정의 일환으로 여겨졌다. 휴가에 대해 인사과에서 짧게 이야기를 하고 나온 안색이 몹쓸 빛을 띄었다. 잠시 일신상의 사정이 있었으므로, 곧 복귀할 거라는 태도였기에 그 건에 관한 내용은 대화에서 함구 되었던 것이다. 셋은 어제도 그러했다는 듯이 짧은 점심시간을 함께하며 건조한 이야기들을 늘어 놓았다. 밝아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는 여전히 온화하고 어딘가 삐쳐 있었고, 바쁘다는 말을 한 수저마다 내어놓는 동료의 후식까지 야무지게 손에 챙겨주는 사람이었다. 입가로 손을 가져가며 빈그릇을 앞에 두고 맨눈으로 겉보기 등급을 때려 맞출 때처럼 그의 안색을 관찰하며 지우스는 테이블 아래로 습관처럼 다리를 두들겼다. 늘상 그렇듯 오른 무릎에 이따금 시큰한 통증이 뼈를 뚫고 들어왔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머리 맡에서 웅웅대는 소리를 들으며 깨어난 지우스는 팔을 들어 이불을 더듬으며 아이폰을 찾아쥐었다. 수신표시화 함께 표기된 시각은 세 시에 다가서고 있다. 잠깐 망설이다가 받아들자 신호음이 멎으며 핸드폰 너머에서 음성이 들렸다. 후에 디스플레이 위로는 짧은 부고 문자가 떠올라 있었다.
전광판에 띄워진 이름을 따라가니 그는 검은 정장을 빼입고 조문객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검은 일색으로 도열한 그들은 전부 친척인지 외양이 서로 닮아있었다. 한세대는 가고 한세대는 오리라는 헤밍웨이 소설의 한 구절처럼 라우룬의 얼굴에서 시계를 열 바퀴쯤 돌린 듯한 중년에서부터 갓 성인을 넘긴 다양한 나잇대의 사람들이 하나 같은 풍모를 지니고서는 진중한 낯빛으로 열을 토하는 중이었다. 상주에게 지나치다시피 붙어있는 친족들의 참견에 불편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수염과 흉터가 잦은 험악한 이들이 유난히 많아 룬의 일가가 폭력과 연루된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스쳤다. 룬이 말한 일가의 몸 쓰는 사업 설마 그런 것인가 했다. 룬은 설득하려는 듯이 둘러싼 무리를 간신히 참아내려는 것처럼 심각하게 미간을 내린 채 잔뜩 몰려있다가 지우스와 일행을 발견하곤 다가왔다. 수염이 간간히 돋은 혈색 없는 얼굴은 초췌한 빛을 띄었다. 조의를 표하고서 조객들에게 밥이나 챙겨 먹으라는 말을 하고 그는 한숨을 돌리자며 바깥으로 나왔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었다. 식장 건물의 입구를 벗어날 때 현관에서 눈물 자국이 길게 난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룬과는 누나 동생 지간이라 해도 좋을 만큼 닮은 외모를 보니 같은 일가의 친척 중 하나겠거니 하는 새에 룬은 문을 지나쳐갔다.
중지와 검지사이에 장초를 물리고 긴 연기를 입 밖으로 내빼자 멘솔향과 함께 푸욱 가라앉아 곧 부연한 증기만 세 사람 사이를 부유했다. 장례식이 있기 며칠 전부터 그는 출근하지 않았다. 언뜻 걷혀진 왼팔뚝 안쪽으로 문신 자국이 소매 안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감옥이라도 다녀온 건 아니겠지. 지우스의 은은한 경악은 아는지 몰랐으나 장소가 그런 걸 나누기 여의치 않았다.
ㅡ가업을 물려받게 됐어.
그저 조금 수척한 정도였던 연기는 종적을 감추고 그는 절망에 철저하게 녹아 든 얼굴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전에도 가끔 그 주제를 입에 올리며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수심했지만 지금 룬을 불행하게 하는 건 다른 무언가다. 룬은 어느샌가 목을 덮을 정도로 길어진 뒷머리를 쪽지어 틀어맸고 온화함이 배어들던 입가가 경직된 채로 끝머리에서 비린 맛을 풍겼다. 개비를 지키던 손가락은 틈새를 하들거리며 움켜쥐었고 주차장의 캐노피 아래에서 잘 타지 않는 장초를 태워가며 장래나 경황에 대해 짧은 대화를 주고 받았다.
ㅡ지우스, 낚시 하러 갈래?
ㅡ좋아. 언제?
ㅡ내일. 여기서 봐.
지우스는 불현듯 그의 말을 수락했다. 같이 온 동료는 내일 빠질 수 없는 출장이 있어 거절했으나 어째 당장이라도 일을 벌일 사람 같은 망상이 들었다. 불안지심하던 상갓집의 분위기에서 룬에게는 상을 당한 사람의 추모보다 탈출이 절박해 보였다. 이튿날 룬은 친척에게 밴을 빌려 해가 뜨기 전 네 시에 장례식장 앞에 나와있던 지우스를 태우고 근교의 하천으로 차를 운전했다. 적당히 몇 마리를 잡고 매운탕을 끓여 먹다보니 해가 뜰 시간이 되어 있었다. 그를 내려주고 나서 룬은 다시 빈소로 돌아갔다. 오후가 입관식이었지만 평일인 데다가 인척들이 많다며 살짝 경직된 얼굴로 사양했다.
ㅡ그냥 갈 줄 알았는데,
룬은 거절 아닌 말투로 덧붙였다. 그의 곁에 남아있었던 건 심성이 좋아서도 친분이 깊어서도 아닌 데다가 도운 것도 딱히 없는데 인사를 듣자 무안했다.
ㅡ와 줘서 고마웠다.
집안에서 난 칼부림으로 인한 것이란 소식은 나중에 다른 이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라우룬은 휴직계가 끝나고 소리 소문 없이 퇴사했다. 그 가업이라는 건 꽤 위험한 냄새가 나는 일임에는 분명했지만 가능하다면 돌아가기 전에 한번 봐야 겠다는 미지근한 궁리를 하며 지우스는 며칠 동안은 퇴근길에 룬이 살던 이층짜리 멘션에 들러보기도 했다. 복도형 멘션은 베란다를 살피거나 문을 두드려도 안쪽에서 인기척은 없었다. 간헐적으로 센서등을 점등하는 건 지우스의 헛걸음이나 다른 이웃들이었다. 창 없이 뚫린 복도의 타일에 뒷머리가 싸늘했다.
몇 번 전화 끝에 돌아오던 부재중은 며칠 뒤 전화는 없는 번호로 뒤집혀 있었다.
4년은 긴 기간 이었다. 지우스도 남은 동료는 얼마지나지 않아 각자 다른 시기에 회사를 관두고 다른 곳으로 흩어졌다. 그와는 비슷한 업계에서 근무하며 간혹 얼굴을 마주치거나 만나기도 했으나 이전처럼 사이가 좋지는 못했다. 지우스는 간혹 생각에서 라우룬을 찾고는 했다. 그들이 만난 회사는 곧 없어졌다.
그리고 몇 년만에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이에게서 두서없이 연락이 온 것이다. 모르는 번호에 지우스는 송화기를 들고 확인을 눌렀다. 여보세요. 순서에 조금 어긋나게 제 이름을 밝힌 카이잔이라는 남자는 룬의 이종사촌이었다. 지우스는 한참을 하얀 공책에 제 필적으로 쓰인 주소를 내려다 보았다. 정리되지 않은 사무실의 책상에는 여러자료가 한데 쌓여 원하는 것을 단번에 찾아내기는 어려운 탑들이 아무렇게나 몸을 겹치고 있었으나 개인적인 잡다한 것이라고는 없다시피 했다. 깔끔하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는 꼴이었다. 캘린더에는 마침 다음주에 일주일 정도의 유급휴가가 녹색 형광선이 어떤 한계처럼 평행하게 그어져 있었다. 같은 표시가 회의실 벽의 화이트보드에도 무를 수 없는 약속처럼 죽 긁혀 있었다. 매해 이참에 그만두어야 겠다는 생각을 할 때즈음 찾아오는 줄 연차 였다. 지우스는 이마를 숙이고서 눈그늘 속에서 캘린더를 치켜본다. 약간 숨을 뱉고 나서 몇 개월전 정해둔 머물 도시의 숙소와 낚시터에 연이어 취소전화를 돌렸다. 그는 기차편을 예매 하기 위해 다시 수화기를 주어들었다. 빠르게 처리하면 표를 해결하고 나서 점심을 먹으러 갈 수 있으리라.
캘린더용 화이트보드에는 나직하게 휴가라는 명목의 녹색 매직으로 그은 일주일 짜리의 굵은 한계선이 끄덕거리고 있었다. 제가 나고 자란 고장의 역사조차 잘 알지 못하는 지우스에게 이 동네가 어떤 인프라를 갖추고 있는 지에 대한 사전조사를 할리 만무하다. 집에는 가지 않은 지가 삼 년정도 되어 고향의 노선 조차 찾아가는 길이 가물거리는 그는 광역철도에서 재래선으로 갈아타 네 시간 가량을 달려서야 차표에 적힌 곳에 종착했다. 운행빈도가 하루에 한번 밖에 되지 않는 셔틀 노선만이 그 역을 사용하고 있었다. 경보처럼 낯선 지명과 함께 운행 종료를 알린 기차는 사람 없는 4량 사이즈의 짧은 승강장에 그를 내려주고서는 그날의 운행을 마치고 철로를 향해 삐그덕 거리며 빠져나갔다.
역사 바깥에는 그 흔한 테이크 아웃 커피숍 하나 없다. 지우스는 차가운 역사로부터 외면 당한 채로 서서 겨울옷을 침투하는 추위로 바들바들 떨었다. 고철로 컨테이너를 이방향 저방향으로 덧댄 렌터카 사업체 하나가 거리 건너편에 덩그러니 선 채 설각을 입어가고 있었다. 가게는 저리보여도 영업 중일 가능성이 높다는 데에 운전을 즐기지는 않지만 그에게도 면허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폭설에 의한 지연 예보가 있었는데도 제시간에 도착한 탓에 추위에 동사해가는 워치가 약속시간에 반시간 앞서 나온 성실함을 나무라고 있었다. 기실 지우스는 추위에 죽어가는 중이었다.
그는 자신이 장소를 잘못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있기에 자신은 지나치게 추위를 타는 체질이어서 였다. 게다가 그는 추운 지방에 익숙치 않다. 군인으로 복무할 때 전선에서 두 번 겨울을 맞은 것이 다였다.지우스는 입대 시절 눈밭에서 총을 맞았던 기억을 도려냈다. 그에게 이른 전역을 선사할 수도 있었던 기억이었다. 선임에 대한 신뢰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제발로 걸어들어오지 않았을 곳이었다. 늘 적당히 온후하고 쾌적한 도심 사무실에서 아이스 음료를 마시던 사람이었음은 설상가상이다. 상대가 불러낼 상대를 착각한 것이다. 그가 알기론 이런 설원에 잘 어울리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머리가 갓 헤친 구름타래처럼 새하얀 사람. 어쨌든 지우스는 그 무엇도 아니었다. 어느 쪽인가 하면, 그는 도시의 인간이었다. 철저히 문명화되고 이기적일 정도로 기술에 익숙한 사람이다. 분 단위로 들여다 보는 워치의 배터리가 빠르게 닳아가고서야 기기를 재촉하는 일을 멈추었다. 한참을 그렇게 벙찐 채로 바보가 된 기분으로 눈을 맞았으나 그런 그를 이상하게 여겨줄 행인조차 없다는 게 개중 가장 떨떠름한 일이었다.
가방을 맨 어깨가 찢어질듯 고통을 호소할 때쯤 속에 넣어둔 아이폰이 울렸다. 피아가 식별되지 않는 전방에서 검은 스타렉스 한 대가 빠르게 일차선을 밟았다. 스노우 체인을 감은 사륜구동차가 곧 바깥 차선으로 빠져나와 그의 앞에 바퀴를 댄다. 검은 머리칼에 단단한 직선을 가진 얼굴이 나와 그를 반겼다. 운전석 쪽의 도로로 차에 올라타고 문이 닫힌다. 탈상을 하고 나서는 처음, 얼굴을 본 것은 간만인데도 놀라울 정도로 소회가 적다.
ㅡ지우스.
목소리를 듣자 한참 만이라는 것이 실감났다.
ㅡ라우룬.
ㅡ룬이라고 불러. 하던대로. 이젠 너한테 담배 냄새가 나는데.
룬은 담배를 끊어 냄새를 덧입은 건 지우스 뿐이었다. 룬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
ㅡ오래 참진 못했지.
기억 속의 것보다는 인간다운 감흥이 선명한 눈코입에 어린 채로 그를 이끌었다. 그는 전과 같이 홀쭉 한 뺨에 절망에 절어있는 미소를 입고 있지도 않았다. 핫팩을 달고 주머니 안에 귀중품을 넣어둔 사람처럼 손을 빼지 않았으나 여전히 끊임없이 추워오며 한기가 점점 더 깊이 뼈를 파고 들었다. 룬은 뒷자리로 손을 뻗어 겉이 억센 모포 같은 것을 찾아 건네 주었다. 조수석은 밑으로도 냉기가 그대로 통과했고 방한처리가 준수한 신발 속에서 굳은 발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눈에 젖은 가방은 가죽 냄새가 고약한 뒷자석으로 넘겨 잡다한 짐 사이에 묻혔다.
ㅡ날씨가 너를 별로 환영하지 않는 가봐.
ㅡ굳이 이 날짜를 고른 사람이 누군데.
ㅡ오늘이 아니면 보통 며칠씩 여기 머무르지는 않거든.
ㅡ보통?
ㅡ뭐, 보다시피 아무것도 없고 춥기만한 동네니까.
지우스는 그의 말을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ㅡ춥지? 저녁부터 먹는 편이 좋겠어.
안개의 영령이 낀듯이 자욱히 내리던 눈은 치워도 치워도 대시보드를 덮어와 어느덧 도로가 커다랗고 뿌연 화덕이 되어 눈보라가 화마처럼 일어섰다. 악천후를 덮은 차창으로 보이는 풍경에서는 날씨와 개인을 연결지으며 신경을 쓰는 걸 바보들의 이야기로 취급하는 누군가가 떠올랐다. 설파에 반쯤 파묻힌 군청색 푯말에 비스듬히 지탱하여 간신히 드러난 흰 글씨의 지명이 이 지역이 책이나 환상에나 나올 법한 나라가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라고 표시하고 있었다. 대뜸 끊은 기차표의 안내 방송 대로 내린 역사 바깥의 먼 곳으로 불을 지피고 있던 인가들을 생각하며 지우스는 낯선 지명을 더듬거렸다. 누군가 행방불명이 되어도 그 소식을 알아채는 데에만 한참이 걸릴 동네다. 잃어버린 것조차 모를, 그런 행방불명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눈이 사방을 에워쌌다.
차체는 눈이 잔뜩 낀 노면을 으깨며 달려갔고 전신주를 따라 줄이 쭉 이어지더니 도시와 도로는 실종되고 군이라고 이름 붙기가 어려운 낮은 읍의 중심지가 어렴풋이 형곽을 드러냈다. 눈. 눈. 눈. 계절 내내 눈이 온다는 이곳은 도시에서는 실종되고 이미 죽음을 맞이한 그런 한겨울이었다. 옴폭히 담겨진 읍내는 바퀴가 구르는 소리마저 죽어있었다.
불 켜진 음식점이 지나온 길 전체를 통틀어 눈에 띄지 않았지만 바깥을 면밀히 보아오던 지우스가 시야에서 놓친 것은 아니였다. 보이지 않는 벽들 너머의 집에 사람들은 틀어박혀 저녁을 보내고, 간간히 불이 켜진 노점 술집을 제외하고는 한산했다. 룬은 작은 마트를 들러 식재료를 샀다. 뒷좌석의 한켠을 처넣어진 봉투를 설핏 보았을 때 온통 녹색채소에 두부, 그리고 술 한병을 본 지우스는 약간 화색이 돋우면서도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고기 없는 소찬이라도 즐길 셈인가. 식재료의 선은 그가 익히 아는 입맛에서 벗어나 있었다. 도시에서 반쯤 보랏빛이던 주광이 없이 찾아온 어둠에 백색의 황혼은 낮고 힘없이 수그러든다. 이전에는 당이 모자란 환자처럼 가끔 심하게 떨곤 하던 손은 말끔히 기어를 쥐고 당겼다. 그들은 고고하게 밭과 논을 덮은 눈 안개 사이를 몇 분 가량 달려 이내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지면에서 등을 옹송그리고 눈썹 위에 눈을 올린 집채들이 골목을 따라 늘어졌다. 인가가 추수할 시기에 거두어둔 작은 슬픔을 겨울 내내 간직하는 마을이었다. 배기연 대신 찹쌀 같은 눈가루를 휘휘 날려대며 잘 분간되지도 않은 아스팔트 위를 미끄러져간 차는 이윽고 누구나 넘기 좋은 돌담 사이에 내들린 쇠문을 지나고 작은 주택 앞에 정차했다.
사냥견 종의 두툼한 털을 입은 개 두 마리가 뛰쳐나와 낯선 이의 등장을 반기며 겨우 얼음을 털어낸 바지 위로 다시 긴 털을 흘리는 환영회를 했다. 집안에는 바깥과 유리된 온기가 스며있었다. 늦은 저녁이 불러 일으킨 조마조마한 기분을 감추며 둘은 식탁에 둘러앉았다. 룬이 만들어낸 사천요리는 적당히 짜고 청경채를 듬뿍 넣어 그의 입맛에도 나쁘지 않았다.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돼지고기로 고추와 산초를 가득 더해 매운 기름을 낸 것이 이따금씩 내보이던 요리실력 그대로 였다. 더부룩한 포식감에 붙들려 자리를 보전 하자 경직되었던 사지에 서서히 원기가 회복 되었다. 시험 삼아 녹은 손을 움켜쥐는 지우스의 건너편에서 룬은 물을 따라 마시며 입가심을 했다.
ㅡ추운 지방이라 그런지 역시 기름지군.
ㅡ오랜만에 먹는 거였지.
ㅡ그 녀석에게 입맛이 옮은 걸지도 몰라.
자세한 이야기는 하루가 내일 아침까지 이어진대도 모자랄 터라 그에 대한 주제는 간단한 근황에서 그쳤다.보지 못한새 장발이 되어 묶은 머리가 어깨 앞으로 끌려 내려오자 지우스는 앞에 앉은 이의 낯선 윤곽을 잠시 체감하는 시간을 가졌다. 모피나 흑단같이 새까만 머리칼과 홍채는 잿빛으로 조금 새었고 성질이 곧어 다른 속이 없었던 이전과 달리 많은 것을 감추인 얼굴이었다. 말하자면 촉감으로 남은 시간의 흔적이 그를 어루었다. 그에게서도 풍겼을 그 낯설음을 반가워 하던 룬은 변한 게 자기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꺼워 하는 것처럼 보였다. 거뭇하고 관록 어린 얼굴은 온화함 대신 갓 출소하고 나온 사람처럼 삼엄한 긴장이 어렸고, 손끝과 이목구비의 모서리는 휘어진 구석이 없어 잘 깎인 흑연필처럼 뭉툭하게 끝났다. 이전에 라우룬이 해외에서 군에 있었단 말을 짧게 들었을 때는 믿지 않았는데 오늘 보니 그럴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탄을 뒤집어 씌운 듯 침침한 조명 아래서 이야기하던 둘은 허기가 가시고 찾아온 노곤한 기운에 발끝을 녹이며 화제를 옮겨갔다.
ㅡ그런가… 이제 다른 직장으로 갔다고?
ㅡ낡은 회사의 별볼일 없는 회사원이지.
ㅡ녀석도?
담배를 그만두었다는 건 사실인지 룬은 생각이 없어보여 지우스는 지포를 긁어 개피의 끄트머리에 불을 놓고 연기를 빨아들였다. 불빛은 바람막이로 웅그린 손 앞에 온기를 끼얹었다. 콧대 앞으로 붉게 타들어가는 점멸을 보며 눈을 내리 깔았다.
ㅡ그래. 너 가고 나서 금방이었어. 녀석이 옮기고 나서 나도 얼마 안돼서 이직했지. 내 번호는 어떻게 안거야?
ㅡ바뀌었더군.
ㅡ전사무실에 연락했어?
ㅡ그러기엔 좀….
매캐한 연기가 그의 말꼬리를 따라 부연히 상승해 버섯의 갓등처럼 천장을 뒤덮었다. 룬이 말을 꺼냈다.
ㅡ전화로 부탁했던 건 말이다. 역시 곤란할까?
내내 코 앞에서 피어오르던 연기를 바라보던 지우스는 한모금을 빨아내며 삐딱하게 꽂혀 어물거리던 개피를 빼든다.
ㅡ아냐. 해줄게….
바깥으로는 눈보라가 집의 사면을 때려가며 휘몰아쳤다. 누군가를 찾아 부르는 것처럼 이따금 창이 덜컹이고 밤이 수많은 말을 실종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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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이 무척 고요하다. 정적이 집집마다 창문으로 안을 살피며 돌아다니기에 밖은 실내보다 한층 가라앉았다. 눈과 빗줄기를 비교했던 일이 떠올랐다. 얇은 빗줄기도 한번 스치고 가면 빗줄기가 지붕과 창과 길을 때리는 소리가 다발적으로 쌓여 명쾌한 표음을 만들어내고는 했다. 빗줄기 하나로는 낼 만한 소리가 그다지 요란하지 않았지만 모이면 상당한 데시벨이 지글거렸다. 하지만 눈송이는 내려앉을 때에도 서로를 겹치며 입을 다물게 하고 나중에는 다른 소음들까지 빨아들였고 그것은 어쩌면 지면에 강하하는 속력의 차이로 인한 건지도 모른다. 얼음덩이가 육각 결정으로 변화하며 낙하산을 펼치듯이 천천히 다가온다.
우천은 자잘한 백색 노이즈로 주변의 소리를 상대적으로 줄여준다면 호설은 실제로 잡음들을 매몰시킨다, 라며 눈만큼이나 머리가 새하얀 연구자이자 전동료는 딱딱하게 말했을 것이다. 실로 눈의 운치와 닮지 않은 사람이었으나 어느 인간미에도 무너지지 않는 냉엄한 면만큼은 닮아있었다. 고개를 젖힌 모자틈으로 이미 붉어진 코끝에 다시 눈이 내려앉아 지우스는 눈사람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그는 허허하고 시린 기운을 느끼며 눈을 떴다. 철골이 채워진 곳이 난 자리처럼 뻐근한 통증이 있었고 정돈된 이불 틈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을 때 밤새 돌아가던 난방은 한풀 죽어 있었다. 체온으로 몸은 식지 않았기에 외피에 닿는 찬 공기만이 추위로 인식됐다. 갓 세탁한 이불의 냄새와 오래된 집 냄새가 한겹처럼 겹치는 가운데 전반적으로 지우스의 멘션보다는 확실히 깔끔한 방 안이 한눈에 들어온다. 찾아올 때는 나름의 각오는 생각보다 맥이 빠지는 적막에 느슨함과 여유를 갖추고 있었다. 룬이 쓰는 안방을 제외하고 그에게 내어준 작은 방은 이전 룬이 쓰던 방처럼 보였다. 벽을 도르르 둘러선 가구들에서는 손님방의 구색이 아니라 이전 주인의 사용감이 얼마간 묻어 났고 길게 이은 콘센트에서 발치까지 전기난로 코드가 꽂혀 있었다. 창문 맡으로는 침대를 붙여 놓았다.
요즘 같은 세대에 벽촌의 고립은 거짓된 것이라 고하고는 하지만 단절된 세계란 존재한다. 막막히 겨울빛을 가리던 커튼을 걷히자 드러나는 평야와 민가는 눈밭의 끝까지 걸어가 끝내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늘어서 그를 건드렸다. 찬 공기가 전부 차음제처럼 모든 소리를 먹어치웠다.
ㅡ잠자리는 괜찮았나?
ㅡ좀 추웠어.
지우스는 수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낯선 곳에서는 마음 놓고 자본 일이 없는 데다가 휴가 직전까지 그를 괴롭히던 업무들이 찾아와 밤새 산만했던 탓이었다. 네 칸의 전자시계가 느지막한 오전을 가르키는 걸 보니 휴일은 휴일이다. 녹색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뻗친 까치집을 향해 눈을 까닥이는 룬에게 그는 가는 눈을 흘기는 것으로 답한다. 두터운 푸른색 톤다운의 맨투맨은 즐겨 입는 옷으로 잠옷용으로 챙겨온 것은 아니지만 이불로 내려오는 한기를 막아주느라 자는 동안 덧입었다. 괜찮았나 보군. 룬은 혼잣말을 읊는 사이 둔한 움직임으로 지우스는 화장실에 들어섰다. 추위가 몸의 생기를 잠궈두어 아직은 피부에 닿는 모든 온도가 적당하지 못했다. 면도기를 자주 쓰지 않는 걸 알아서 가져왔건만 세면대를 보니 그것은 기우였다. 지우스는 손에 쥐었던 제것과 검은 몸체를 번갈아 보았다.
ㅡ제대로 있네.
ㅡ있지. 아버지가 쓰던 건데.
치약과 세면도구에 나란히 놓인 전동면도기를 빤히 누여보다가 세안을 마친 얼굴께로 집어들고서 전원버튼을 올렸다. 삼 년이라면 이젠 저의 집이라고 부를만도 한데. 룬 본인의 고집이라면 가까운 사이라도 굳이 헤집고 싶지 않은 영역이었다. 다만 아버지를 타인처럼 발음하는 그의 톤에 해소되지 않을 의아함을 품고 황색의 시선이 언뜻 보이는 룬의 너른 등을 따라붙었다.
큼직한 냉동칸을 따로 열어 젖히자 축산점에서나 보일듯한 고기뼈가 통으로 잘린 채로 들어있었다. 마을에서 직접 잡은 돼지를 집에 보관해두고 먹는 것이 틀림없었고 그제야 룬이 굳이 고기를 사오지 않은 까닭을 알아차렸다. 룬은 안쪽에서 세로로 채워진 건어포들을 꺼내어들었다. 좋은 냄새에 죽어있던 후각이 순간에 싹이 나는 것처럼 후각이 기민해진다. 냄새는 평범한 라면이나 레토르트 북엇국이 아니라ㅡ그런 것도 가리는 편은 아니었지만ㅡ 그것만으로도 쓰린 속이 풀릴 것 같았다. 룬은 익숙한듯이 앞치마를 입고 간보기를 마친 국을 두 그릇에 나누어 담는다.
ㅡ이렇게 신경 쓸 필요 없는데.
ㅡ딱히 신경 쓴 건 아니고.
지우스는 이 먼지방까지 오게 한 전 동료의 대접을 누리며 한술을 들었다. 생선국은 북국에서 만든 탕이라 두툼한 바닷고기가 올라왔고 맑은 국물은 대체로 지우스의 입맛에 맞춰져 있었다. 라우룬은 요리를 위해 묶어 맨 머리는 그대로 두고 앞치마만 풀어내며 건넛편에 앉았다. 혼자 사는 미혼자 치고는 살림을 돌보는데 익숙한 티가 무척이다. 식사가 끝난 뒤 창고를 검증하기로 했다. 특이한 맛의 국 위로 젓가락을 두어번 딱딱거리며 물었다. 룬은 리모델링을 하며 물건을 전부 그곳으로 옮겼다고 했다. 최근에도 스스로 한번 전부 창고를 뒤집어 엎었다고 했지만 그 얘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이곳은 두 번 발걸음 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내 눈으로 직접 보려고 온 거니까. 귀찮을까봐 그랬다는 룬의 어설픈 배려에 지우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시작점을 정했다. 국은 깨끗하게 바닥을 비웠다.
대가족의 생활에 익숙한가. 지금은 그렇다 하더라도 이 집도 이전에는 가족들과 함께 살았을 것이 분명하다.원래는 거실을 중심해 전체가 하나의 방처럼 이어진 구조를 가졌던 옛날 집을 개조해서 미닫이문을 뜯고 벽과 문을 만들어서 공간은 휑하지 않게 구획되어있다. 목재였던 내력벽을 현대식으로 갈고 형광 전등을 달아 구식 양옥의 느낌은 주방에만 남아있었다. 식탁을 벽에 붙여놓은 목이 주방마루와 거실의 경계였다. 빛이 바랜 개인의 살림살이는 눈에 보이는 데마다 우겨놓아 다소 복잡했다. 지우스는 세트장에 들어간 관객처럼 묘하게 손때 묻은 컵을 쥐고 있었다. 도시에서 룬이 쓰던 세간 등이나 어느새 늘어난 모르는 잡동사니들도 그에게 말을 걸었다. 눈이 오지 않았다면 이보다 더 큰 추위에 짓눌렸을지도 모른다고 감상을 남기며 지우스는 다시 따듯한 커피를 한모금 내켰다.
첫날의 매서운 눈보라가 산악으로 올라가 잠시 숨을 고른 때를 기해서 두 사람은 작업을 시작했다. 지우스는 길게 손목을 덮은 소매를 걷으며 장갑을 꼈다. 무릎까지 쌓인 눈을 난폭하게 밀어붙이고서 이런 날씨라도 겨우내 이어지는 일상이라는 룬을 따라 창고 앞까지 길을 냈다. 슬레이트 지붕의 창고는 위쪽으로도 눈이 희옇고 두텁게 쌓여 빗장을 치우자 양켠으로 다구니를 하며 쏟아졌다. 창고에는 계절별 비품을 비롯하여 갖은 생활 도구들이 까마귀 행렬을 하고 있었다. 바깥에서 흘쩍 보니 창고에는 선반 아래에 목공 도구가 당연하다는 듯이 기대어 서있고 정원도구와 제사용품을 비롯해 용도조차 알기 어려운 꾸러미들이 있다. 몇 대의 걸친 집안의 물건들이 그 안에 가득했다. 해외생활을 자주 했다던 룬의 아버지의 물건에선 이국적인 것이 툭 튀어나왔다. 룬은 짐짓 호쾌한 태도로 대강의 분류들은 되어있으니 공사가 크지 않을 거라며 막막한 지우스를 북돋았다. 쓰이진 얼마 되지 않은 갈퀴를 비롯해 전지가위, 물통, 야구 방망이, 구식 회중전등, 모기향의 자질구레한 것들이 흥건히 차오른 그 틈바구니를 헤이며 둘은 서류를 담은 박스들을 날랐다.
ㅡ오래되긴 했지만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낚시나 한번 갈까.
ㅡ낚시를? 이 날씨에?
룬은 긴 낚시대 두 개를 말아올리며 말했다. 빙어 낚시라도 하는 건가 싶어 들여다 보는 지우스는 잠시 텐트와 깃발천이 나부끼는 가운데 바구니로 풀어준 송어를 구멍으로 되건지는 축제의 광경을 머리에서 휘휘 몰아냈다. 어디선가 바람이 자꾸 새어드는 운동화는 밑창이 빠진 모양이었다.
ㅡ그러려면 두꺼운 양말이 좀 필요해. 신발이 간 모양이야.
ㅡ그 신발은 눈에서 신기엔 시릴 텐데. 이거 미리 봐줄 걸 그랬군.
ㅡ집 안도 살펴봐야 하지?
ㅡ뒷방에 몇 개가 남아 있는데… 여기 있는게 거진이야. 리모델링 할 때 나온 건 전부 옮겨 뒀어.
밝은 색의 운동화를 고심하며 보던 룬은 현관의 붙박이 신발장을 뒤적거리고는 목이 긴 부츠 한켤레를 가져왔다. 신어보니 발목의 조임새가 남 아돌았다. 룬의 것은 무엇이든지 그의 것보다 한 사이즈가 컸다. 두꺼운 등산 양말을 신고 끈을 꼼꼼히 쥐어 당기자 그런대로 발에 맞았고 내친김에 지우스의 복장을 전체적으로 검토했다. 예나 지금이나 추위에 금방 몸이 석석해지는 탓에 오버스펙으로 유명한 스포츠 패딩을 껴입은 채로 코끝까지 목도리를 끌어올린 데에는 만족한 룬은 그 이상으로 말은 않았다. 적색의 후리스만 걸친 그의 가벼운 차림은 도저히 겨울용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안쪽으로도 패스츄리의 껍질처럼 이너웨어 위로 목티를 덧입은 건 좀 과했다고 생각하며, 바지도 빌려주느냐 물어보는 걸 지우스는 목도리에 반쯤 먹히는 목소리로 거절했다.
수염처럼 군데군데에 재가 남은 풍로는 더 이상 불을 지필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기실 대부분이 몇 년 이상 쓰인 적이 없는 물건들 틈에 한참 갇혀있던 지우스는 숙였던 허리를 빠드득 켜내며 가쁜 숨을 털어놓았다. 가옥을 빙 둘러서고는 여러 정원수가 심겨 있었다. 철쭉과 같은 다년초를 비롯해 월귤과 산사나무가 자라고, 마가목도 한그루를 포함해 내한성 좋은 목본식물들이 움트막히 식재되었다. 정원 변두리에서 희미한 나무 내음이 풍겨왔다. 몇몇 그루들은 관리가 어려웠는지 계절을 넘지 못했는지 발목까지 잘려 둥치만 남긴 채 위가 비어있었다. 높낮이가 듬성듬성한 틈으로 피라칸타들이 용케 소설이 지나도록 떨어트리지 않은 붉은 열매 다발에 사철 내내 지역에 사는 산새들이 몰려와 시끄러이 고개를 파묻고 열매를 쪼았다. 지우스는 몸을 휘둘렀던 두꺼운 포장을 반쯤 까내린채 콘크리트 턱에 걸터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이동하는 사람들의 발을 묶는 엄폐가 뻗쳐 풍경은 구경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화산재가 내리듯이 칙칙하고 두터운 눈송이가 떨어져 내렸고 종말을 맞은 거주구처럼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사실상 마을은 고립이었다.
ㅡ이렇게 눈발이 날리는데 실외활동은 사양이야.
ㅡ집에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데도. 답답할 거다.
체인을 감은 차는 한 대이기 때문에 외출하는 룬을 따라나서지 않는다면 꼼짝없이 집에 틀어박힐 판이었다. 할 일 없이 머뭇거릴 생각을 하니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마음이 기울었지만 혼자 박스를 열어 정리한다해도 제대로 내용물을 살필 수 있을지 의문이라 곧 단념했다.
ㅡ답답한 게 문제냐. 날씨가 괜찮은 날 해도 될 텐데. 눈이 심하게 쌓였어.
ㅡ겨울엔 항상 날씨가 나쁘지.
룬은 이정도는 한겨울에 오는 폭풍에 비하면 심각한 것도 아니라 했다.
ㅡ내일이면 더 잠잠해질 테니까. 운전할 수 있나?
ㅡ가끔.
ㅡ여전히 아프고?
ㅡ몰라….
추위 따위에 예민해진 신경을 곤두세우며 지우스는 뒤엣말을 얼버무렸다. 룬은 한숨처럼 들리는 소리를 내며 시동을 걸었고 지우스는 바지에 닿는 조수석의 차가운 시트를 질색하고는 안전벨트 끈을 잡아당겼다. 둘은 마구간이 있는 부지를 같이 돌아보고서 누수된 곳이 없는 걸 확인했다. 고드름을 헤치고 한계절을 닫혀있던 두꺼비집이 잘카닥 바스라지는 소리를 내며 어렵사리 주둥이를 열었다. 이미 겨울이 오기 전 방한준비를 한다며 법썩을 떨며 보강을 했던 터라 크게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없었다. 단지 며칠 간 대설이 내렸기 때문에 오후에는 마을을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했다.
집집을 들어설 때마다 관례처럼 치르는 커다랗고 두꺼운 털의 개들의 마중과 설옹의 어른들이 가끔 룬의 유년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주어삼기면서 룬의 손은 보온재가 부족하고 차에 문제가 생기고 보일러에 가스가 샌다던가 눈에 나무가 부러질 것 같다는 자질구레한 민원을 처리했다. 지우스는 별로 좋아하지 않을 작업들이었지만 집에 혼자 있는 것도 뭣하여 현관의 길게 튀어나온 포치 아래 맹꽁이처럼 플라스틱 의자를 차지하고 각양의 시골집과 그런 룬을 감시하듯 구경했다. 한기에 점점 몸이며 어깨가 움츠러 들었다.
ㅡ가만히 앉아있으니 춥지. 자,
연장을 쥐고 작업하던 룬은 그런 그를 일으키려는 듯이 다가왔다. 그래서 지우스는 그를 거들었다.
이곳은 그가 태어나서 와본 곳 중 가장 북쪽이었다. 항공기를 타고 반영구의 백색 산맥을 구경하며 상공을 지나가는 게 아니라 발을 디디는 곳으로는 최초였다. 눈은 녹일 틈을 주지 않고 서로를 잡아 세상을 얼음으로 붙여가고 있었고 겨울은 극적으로 다가와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차갑게 결빙되어 치워도 치워도 표정에는 살얼음이 끼었다. 장례식장에서 곁눈질로 보았던 인척들의 거멓게 튀어나온 문신들은 겨울의 무늬보다 더 선명한 흉터를 가리기 위한 가죽의 일종이었다. 인척이 가득한 동네였지만 상갓집에서 보았던 문중 어른들은 거의 보이지 않음에 내심 신경을 곤두세웠던 허무가 끼어들었다. 역의 지척에서 폐선로가 잠긴 반대 방향으로 하염없이 기차를 타고 달리면 지우스가 떠나온 곳보다 조금 더 남쪽에 도시와 수도가 있다. 자동차로도 하루 정도면 도달하는 가까운 거리였다. 축적이 말도 안되게 짧아진 시대임에도 그곳에 다른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들이 바스라질 정도로 불분명하고 위태로웠다.
연료와 부대를 나르고 한집에 걸러 한집을 방문하다 보니 가뜬한 소일거리의 수준은 아니었다. 몸을 움직이며 근육을 풀고 약한 몰려온 더위가 뒷덜미에 걸렸다. 모자를 벗어 쌓인 가루를 털고 머리를 숙이자 윤기가 도는 푸른 머리에 퍼석하게 눈이 떨어졌다. 골목 끝에서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담장 위로 소리가 솟아다더니 곧 반쯤 걸친 현관문을 완전히 밀어 젖힌 검은 뭉치들이 비비탄 총알이 튕기듯이 지그재그로 질주했다. 이내 사다리를 타고 하우스 지붕에 올라간 둘을 발견했다.
하루에 한바퀴 마을을 도는게 전부인 버스는 등하교 하는 아이들이나 어르신네가 이용하는 전부였는데, 마침 주변 정류장에 차를 대놓고 있었다. 버스는 이내 몸체을 떨고 뒷바퀴를 한번 뒤채고서는 빠져나가 로터리 없는 작은 도로 위를 꽁무니를 보이며 돌아갔다. 잔뜩 밟힌 눈 위로 짝을 이루는 발자국들과 납작한 두 선이 남았다. 담 너머가 병아리 부화장이 되어버리더니 활기는 순식간에 해일처럼 담장을 넘고 얼음판 같은 적막을 깨어버렸다. 잠시 적응하지 못하던 지우스가 사다리를 디디는 동안 룬은 이말 저말에 소리를 치며 대꾸해주었다. 겨울옷을 껴입은 아이들은 도시에서 흔히 보는 모양과 별다르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차림새에는 묘한 통일성이 있었다. 하나 같이 비슷한 분위기를 풍겨서 더 저들끼리의 도드라짐이 있었다. 담장을 디뎌올라 간신히 머리가 닿는 소녀가 어린아이 답지않은 철두철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와드릴까요, 삼촌. 어딘가 격식 있게 묻는 모습은 그 나이 때의 아이답지 않게 덤덤했다.
ㅡ괜찮아, 리아민.
구경하던 그에게도 찰나에 제것으로 서늘한 시선이 되쏘아지는 사이 룬은 리아민이라는 소녀에게 웃는 얼굴로 사양했다. 모자와 장화를 쓰고 눈밭을 가다가 툭 밀치는 아이들의 성화에 바로 앞으로 코를 막고 넘어지고 놀랄 새도 없이 툭툭 털고 일어나서 다시 동무에게 달겨든다. 푹신한 눈이 무적의 방어처럼 쌓여서 무엇이 쳐들어와도 두렵지 않은 요새가 되어있었다. 놀이터가 있는 멘션단지에서 살아온 지우스에게는 생경한 소란이었다.
ㅡ아이들이 유독 많군. 부모는?
ㅡ일을 하러 갔지.
둘은 한켠이 무너내린 하우스의 눈을 털어내고 보강타이를 꾹 죄며 입이 한가해진 틈을 타 지우스가 물었다.
ㅡ그럼 거의 마을을 돌보는 일을 하나? 여기서?
ㅡ그건 아니고.... 대대로 용역업을 조금해.
ㅡ혼자서?
난폭하게 불어온 바람이 제멋대로 남동풍으로 풍향을 틀었다. 옆머리가 반대쪽으로 사정 없이 내쳐졌다.
ㅡ가업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잖아.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친척이라서.
ㅡ그때봤던 그 사람들?
ㅡ그렇지 뭐....
읍에 속한 동네들은 몇몇 성씨의 근친들이 모여사는 이른바 집성촌으로 이곳을 대대로 살아온 그네들이 먼옛날에는 사냥꾼이 아니었나 싶었다. 가면을 쓴 것처럼 얼굴에 나뭇결의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들은 피부가 하얗고 눈썹이 짙었다. 근친들의 얼굴은 서로 닮은 데다가 한번 보면 잊기 어려운 굵직한 기미가 있었기에 도시에서 같은 외양의 행인을 보면 그는 룬을 생각하고 그의 일가를 생각했었다.
ㅡ외로울 일은 없겠어.
ㅡ왜 없겠어,
그 말에 룬은 특유의 처연한 눈매를 하며 웃어보인다. 반은 나무라는 기색이었고, 반은 포기했다는 기색을 하며 그는 서로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는 두 나뭇가지를 힘으로 분리했다.
빈 성채를 경비하는 병처럼 이집 저집 경계하고 다니는 연유가 그런 것일까. 도시에서 늘 이방인 차림이었던 룬의 표정에는 고요가 깃들어 있었다. 지금이야 무력하고 지난하며 전통이라는 구식의 틀에 갇혀, 호소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효용이 없는 행위일지도 모르겠으나 룬의 가업이라는 건 말하던 것과 다르게 스스로도 썩 나쁜 기색은 아니었다. 종부님이라 불린 노인은 설발을 짧게 다듬어 한기에 그대로 내놓고 파충류 같이 겉껍데기가 뭉쳐 짙은 주름이 이목구비를 무겁게 덮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이 늙은 겉모습으로는 나이가 아주 많다는 것만 알 수 있었는데 집밖으로 나오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눈윗주름 속으로 간간히 드러나는 눈빛만이 또렷하다. 가옥을 떠나기 전 종부는 룬을 붙들고 주섬주섬 이야기를 꺼냈고 룬은 무언가를 받아다가 트렁크에 실었다. 동네를 떠나온지 오래된 사람치고 퍽 익숙한 기미였다. 이런 생활들은 이전에는 라우룬을 즐겁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담장 바깥에서 아이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다시 썰물처럼 밀려나갔다. 지우스는 사다리를 내려오며 부츠발에 시척이며 엉기는 얼음을 발끼리 긁었다. 눈이 많이 왔으니 산에 가지 마라, 심심찮게 노쇠한 문중들이 떠들며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당부했다. 이곳의 추위와 거친 업에도 불구하고 동질감을 느끼는 것처럼 가늘은 목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ㅡ설산에는 들어가지 말거라. 무서운 게 잡아간다.
열성 어리면서도 의례에 지나지 않는 가벼운 대꾸들이 조잘이며 종부의 앞을 지나쳐갔다. 하나같이 길다란 현관 포치의 끝까지 나와 마치 교통정비를 하는 신호 같은 몸짓으로 길목을 내다보는 가옹에게는 묵언의 불안이 서려 지우스는 거기에 약간의 동정심을 품었다. 국경 귀퉁이에 우뚝한 이 벽촌에는 천만부당한 전설이라도 존재의 일임을 지니고서 계절을 타고 내려와 있다. 따스함과 추위가 조화를 이루듯이 설산에 나타나는 미신은 토막토막 회자되어, 어딘가에 보이지 않는 위협들만은 산 아래를 버려두지 않고 이곳을 방문했다. 그네들은 그것들을 기억하고 마을은 그 토대 위에 인력이나 안온을 배제하며 살아갔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두려움이 없었다. 생명을 연명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 이곳의 무정한 이치가 그들의 얼굴에도 스며 있었지만 그러한 시기이른 체득도 심각하지 않은 기질들을 난파시키진 못했다. 기실 누구나 자신 혹은 타인의 생명을 연소해가고 있었으므로 다정하지 못한 삶을 아이들은 나름대로 통달해간다.
집집들이 돌아다니다 보니 낮이 금방 소진되어 거대한 산악도 도시의 굉음도 빨갛게 얼어붙은 귓머리 뒤로 아스라히 쌓여간다. 하얀 연탄재를 눈더미처럼 수북히 내놓은 몇몇 가옥을 더 오간 뒤에 둘은 도드라지는 설파를 뒤집어 쓰고서 중앙시장 앞을 걸어 지났다. 어물전에서 털모자와 장갑을 챙겨 쓴 주인들이 안쪽에서 난로를 쐬거나 바깥에 나와 호객을 하며 날씨에 저조했을 그날의 상행을 접지 못하고 있었다. 어제 들린 식료품 점과 달리 규모는 조그만 해도 이 읍의 중심을 차지한 시장이 따로 있는 것이다. 바람이 다시 자세를 낮추어 시린 발을 쓸어 나가고, 주변의 풍광은 어둠을 빨아들인 만처럼 변해 있었다. 밤엔 다시 날씨가 나쁘겠는걸. 그의 말이 맞는지 시장에는 행인이 적어보였고 그들처럼 눈을 피해가려는 이들이 처마 아래에서 바깥을 보았다. 빙어 낚시를 뒷날로 미루고 돌아가던 중 시장 언저리에 몰려 이야기를 나누던 무리를 마주쳤다. 사내들이 고개를 돌리더니 룬을 보고 알은 체를 했다.
ㅡ나한테 전화를 걸었던 사람인가?
ㅡ카이잔은 지금 도시에 내려가있지.
들어본 이름인가 착각할 만큼 이곳 인척들이 대부분 돌림자를 쓰는데다가 성씨가 비슷했다. 표정에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가 일순간 짙어졌다.
ㅡ룬님, 잠시….
한 사람이 은밀한 태도로 그를 불렀다. 룬은 지우스를 향해 괜찮다는 모양새를 해보이며 잠시 이야기를 하고 오겠다며 그들의 쪽으로 걸어갔고 지우스는 잠시 골목에 서서 그네들이 이야기를 마치는 걸 기다렸다. 룬의 반응에 기분이 무척 묘했다. 눈에 잠긴 시전의 슬레이트 지붕들의 귀퉁이로 수증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상인들은 화톳불에 겉옷과 신발을 걸어 데워놓여 사방이 몹시 추운데도 따뜻하고 붉은 불꽃이 눈에 띄었고 시커먼 화마에서는 역청냄새가 났다. 장 파는 집이나 그릇집들은 거둔지 오래였고 천으로 덮어 끈으로 동여매 두었으며 처마 바깥으로 내리는 눈이 그런 소음들을 아득히 뭉개고 있었다. 접을 때가 된 시전판은 어수선 할 법도 했으나 눈길을 걸어 귀가할 생각이 상인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낮에 보이던 아이들 몇이 어울리며 앞을 지나쳐가고 지우스는 제 입에 피어오르는 김을 보다가 눈을 감아 흰 빛 속에 시큰했던 눈가를 다졌다. 가판대의 물건을 걷고 옷을 꿰어입는 일련 속에 암묵적으로 고고히 자리하는 법칙과 순번이 그에게도 미력히 나마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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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가 죽어가는 아이폰 옆구리의 버튼을 두 어번 달각인다. 입구에 널어놓은 외투가 바닥까지 축 쳐저 진액처럼 물기를 흘리며 말라가고 있었다. 잡일을 마무리 짓고 나서 몸도 녹일 겸 목욕탕으로 향했다. 몸에 남은 총상의 흔적 중 가장 흉하게 들어간 오금을 따라 강줄기 같이 물이 미끄러져내렸다. 군대에서의 경력은 곧 인간 관계의 단절을 의미했다. 직장에서의 삶은 지우스의 기대만큼 괜찮지는 않았으나 견디지 못하고 박차고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전환이 되었을 때는 오른 다리에 총을 맞았을 때였다. 재건 수술의 고통은 지우스의 정신을 역시 말렸던터라 당시의 기억을 꺼낸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다. 복귀는 최종적으로 그의 의사에 달렸다고 했지만 정작 은퇴를 결정한건 지우스 자신이라기 보다는 조각난 무릎이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고 성을 내는 탓이었다. 환기구로 번잡하게 연기가 빠져나가고 창밖으로 고드름이 폭포처럼 맺혀 있어 증기를 쇠고 녹고 다시 바깥의 냉기로 얼어붙었다. 마을 욕탕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소름이 돋은 등 위로 물 바가지를 끼얹을 때마다 멍처럼 들었던 추위가 아물고 땀이 흠뻑 흘러나오자 지우스는 한숨을 지었다.
룬의 등에는 커다란 동물이 새겨져 있었다. 후두부의 검은 머리카락 안에 걸쳐져 시작된 유연한 동물은 목이며 몸통의 구분 없이 척추 주위를 리본처럼 꼬이며 내려갔다. 언젠가 삽화로 열차 위를 덧그린 천문 지도에서 본 별자리처럼 큼직했는데 셋이서 어렵사리 그 별들을 관측하려 시도했었다. 지금 생각으로는, 전문장비가 k2 주포처럼 안전하게 동봉되어 있는 천문대를 찾아간다면 대중적인 설명과 함께 좀더 깨끗한 관측자료를 얻을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국토 안의 어딜가나 비슷하다지만 관측의 성공률도 근소하게 그 측이 더 나을지 몰랐으나 가본 적이 없으니 결국 이렇다 저렇다 할 만한 거리는 없었다. 그들은 일단 동료가 한장 요약본의 A4을 주며 관측할 거리를 정하면 야영지를 살피기 시작했다. 먼저 펼치곤 하던 지도처럼 너른 등판에 타월을 휘감고서 룬은 때를 밀었다. 안전벨트를 매는 짧은 순간에 목적지가 바뀌거나 기상 예보 없이 찾아가 낭패를 본 것까지 포함하면 진지한 마음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표면상의 목표과 실제 목적이 동떨어진 채로 야숙을 하곤 했다.
같은 얘기를 룬에게 설명했을 때 그는 가볍게 미소를 터트렸다.
ㅡ그래도 한명은 제법 진심이었을걸?
ㅡ그 나이가 되어서 용 같은 게 보고 싶나….
지우스는 룬의 등에 크게 새겨진 몸체를 흘끗 보고 입을 다물었다. 꽃잎처럼 화려하고도 굽이치는 비늘이 등판을 시커멓게 덮고 있었다.
ㅡ아까는 동생인가? 피가 섞인 것 처럼 닮았던데.
ㅡ친동생이나 다름 없긴 하지.
마을 전체에 그런 아이들이 몇 있다고 했다. 이 부락에서 지내는 아이들은 거의 도시로 학교를 보내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런 일을 해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다고 했으나 룬의 경우가 특이한 전례였다. 지우스는 적신 손으로 얼굴을 닦았다.
ㅡ이맘때에는 부모들이 다 나가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네 일은?
ㅡ빨리도 묻는 군. 휴가 썼어.
ㅡ새 회사는 비슷한가? 너야 어디를 가던 마찬가지로 바쁘겠지.
ㅡ글쎄…. 이젠 새 회사라 부르긴 뭣해. 일복이야 넘쳐날 정도야.
실로 오랜만에 쉬어보는 그였다. 샤워기가 온 탕을 울리는 소리를 내며 시원하게 거품의 포말들을 밀고 내려갔다. 그는 고갯짓을 하며 물었다.
ㅡ그건?
ㅡ아아, 기원하는 거지. 미신 같아도 아무래도 위험한 일이 있다보니 말이야.
ㅡ동네에서 그 미신 이야기를 하던데.
ㅡ당연하지 않나. 위험하니까. 나름의 군기고.
ㅡ설마 다들 등에 그런 걸 달고 다닌다고?
ㅡ보이지도 않는데 뭐 어때.
성인식이라는 습속이 남아있었지만 그것도 간단한 표식으로 대체된지 오래였다. 설산이 어느정도로 위험한지는 몇 번을 겪어도 생소했으나 군기라는 건 여전히 지우스를 몸서리치게 했다. 질색하는 건 문신도 다르지 않았다. 룬의 위화감은 어딘가 그시절의 지우스처럼 도구 같은 태도에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추위에 바짝 시달리던 몸이 열이 올라오니 조금 더운 탓에 지우스는 젖어 달라붙은 머리를 이마 뒤로 쓸어넘겼다. 눈가를 덮던 우중근한 음영이 사라져서 인지 작은 동작에도 상쾌함이 몰려들었다.
룬은 생사의 기로를 넘어본 사람처럼 겪지 않을 일들을 겪어와서 인지 또렷한 눈에는 푸른색이 전부 타버린 들처럼 적막한 피로가 도사렸다. 그가 겪은 등락에 대해서는 분해할 수 없는 부분이 컸다. 처음 보았을 때의 그들의 모습은 대개 원숙한 단계에 접어들어 있었지만 여전히 어떤 부분은 지도처럼 이름 없는 과거를 표시했다. 매캐하게 태운 흔적들과 몸에는 알지 못할 흉터를 보고도 군대까지 다녀온 그가 그게 그냥 맞고 자라서는 아닐까 한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한주먹하는 험악한 낌새를 내던 그의 인척들은 룬과 달리 드세었고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운 의수나 의족을 달고 다니는 주민들도 많이 목격할 수 있었다.
ㅡ투덜대던 것 치고는 적성에 맞아 보여. 완전히 이곳 사람이더군. 답답하지도 않냐?
ㅡ음….
후끈한 훈기 속에서 용이 구불거리며 등을 올라가는 걸 보다가 한순간 시야에서 사라지고 검은 눈이 마주친다. 수증기가 심한 탓에 지우스는 그의 표정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동네 주민 몇이 들어와 인사를 건냈다.
평온하고 사람 좋은 얼굴은 이십대를 넘겨가며 룬이 구매한 성격 중 하나로 지우스는 그 이전의 룬이 잘 알고 지낸 사람 같이 고스란했다. 고집스러운 눈썹이나 대조적으로 유순하고 우수 어린 검은 눈은 넉살이라고는 전혀 없는, 지우스와 지극히도 비슷한 숫기 없는 십대소년을 지나 혼란과 방황의 눈에 한참을 서있는 소위 문제아까지. 그래도 사람은 좋아, 라고 두둔해주는 주위사람은 한 둘씩 있을 그런 사람이었다. 라우룬의 불 같은 성미에 몇 번 당하고 나면 그것도 그의 반항심을 가려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보니 본래의 성미가 그러했다는 느낌이 났다. 인내심이나 사람을 잘 이끄는 기질이 룬에게 밴 것은 그 자신도 의식하기 이전의 오래된 일이라 도리어 욱하는 편이 그에게는 어색할지도 몰랐다. 룬은 발을 집어 넣으며 열탕에 가까운 온탕으로 들어왔다. 큰 덩치가 잠겨 파문이 크게 일어나자 얼굴에는 장난기 있는 웃음이 돌았고, 지우스는 희미한 괴리감을 맡았다.
ㅡ하여간 이건 네가 회사에 느꼈던 염증이나 비슷한 거야. 호불호를 떠나서 누구나 앓는 염증 같은 거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거야. 움직임이 과했거나, 무리했거나, 몸이 약했거나. 어디 한군데가 잠시 문제가 생겼던 거지.
그 염증 때문에 넌 여기 눌러앉았냐, 그 고리타분함은 신념과 순명의 경계에 있었고 꽤 아저씨 같은 말을 한다 싶었다. 호의의 정의가 어디까지인지는 몰랐다. 나름 완만한 애정이긴 하지만 그런 애정을 긍정할 도리는 지우스에게는 없다. 그는 누근해진 얼굴로 드렁거리는 감탄을 내더니 이내 눈이 살짝 감겼다. 움직일 때마다 물살이 휘적대며 여운이 전해져왔다. 애매한 시간대의 목욕탕은 한적하기 그지 없었다. 온도를 제대로 느낄 때즘에는 피부가 붉게 달으며 살짝 현기증이 일어나 지우스는 먼저 나가보겠다며 탕을 정리하고 나왔다.
열두갑이 꽉 찬 담배가 만족스럽게 쥐여쥐고 열기가 찬 몸은 개운해졌다. 창고 정리의 전리품은 그외에도 여럿이었다. 묵혀두었던 밀소주를 난로 위에 데우고 마을 어르신이 나누어 준 팥죽을 쑤어 늦은 저녁을 들었다. 새알이나 밥은 들어있지 않고서 다른 무언가가 혀끝에서 뭉개지는 고운 죽이 괜찮은 별미였다. 납일이 엊그제여서, 룬이 말을 얹었다. 나중에 보니 간혹 물린 것은 율밤이었는데 매년 직접 산에서 거둔다는 걸 보니 혀를 내두를 정도의 부지런함이다. 살짝 온수에 담근 술이 미지근하니 쓴 맛보다 홧홧함이 돌았다. 그의 뇌는 이런 종류의 방탕에 오래 저항할 수 있을 정도로 도수 높은 알코올에 익숙하지 않았다. 알싸한 가향은 룬의 취향이었다. 뇌가 아니라 간이지, 누군가 뇟속에서 으름장이 들렸다. 조용히 해, 넌. 오지도 않았으면서. 술병이 나려는 지 속이 미식거렸다. 거북(龜)이 새겨진 각성냥이 붉은 배를 툭 까놓았고 지우스는 한참이나 상자 윗면의 한자를 눈에 새기다가 겨우 읽어냈다. 사포처럼 소름 끼치는 촉감을 내며 옆등에 칠해둔 주홍색 인이 긁히고 벗겨져 불꽃놀이처럼 도흔 되어있었다. 장작난로도, 흡연자도 없는 이 구석에서 성냥이 쓰일만한 유일한 일은 그렇게 지우스의 무용함에 어울리는 정도가 다였다. 화약이 발린 끄트머리가 오래되어 눅눅해졌는지 점화하는 일에 몇 번은 실패했지만 결국 지우스는 상 위에 얹혀진 등롱에 불을 붙여 파수꾼처럼 세웠다. 색채들이 낙엽처럼 죽어내린 관경에서 오랜만에 맞이한 빛깔을 눈이 말라가는 줄도 모른채 만끽했다. 룬은 대체 무슨 지랄이냐는 눈으로 그를 보았지만 이내 잠자코 있다가 한참을 불길을 살피고는 그 등의 존재를 잊은 듯 했으나 자기 전에 끄는 것은 빼놓지 않았다.
눈보라는 잦아들어 메아리를 남겼다. 겨레붙이인 이 일가의 인척들의 흰 피부와 짙은 눈썹처럼 나아가도 나아가도 막힘없어 뚫린 벌판에서는 갈곳을 잃은 눈이 한껏 정박했고 일차선의 도로에는 가로수가 전깃줄에 손을 잘리는 일 없이 몸을 온존하고 있었다. 전지 해놓은 줄기는 사방으로 신경질적으로 뻗은 여린 가지들과 달랐다. 나무가 가시로 변화하는 지대처럼 겨울이 마주 바라보았다. 잎도 맺지 못하는 그저 산발하는 가시나무들로 가득했던 도시의 상을 떠올리며 멘션에서보다 두 겹은 더 되는 이불 아래에서 지우스는 아침을 맞았다. 골목대장들이 행차 중인지 시끄러운 말소리가 저들끼리 잔뜩 신이나 골목 어귀를 푹푹 찔렀다. 오래된 집의 외풍만은 어쩔 도리가 없는 데다가 창에 서리가 붙을 정도의 매서운 날씨에 문제는 무릎이었다. 손님방이라며 보일러만 훈훈한 바닥으로 허벅다리에서 벗어나 말을 듣지 않으려 삐그덕 대는 정강이를 돌려 놓았다. 복무하던 시기에 다녔던 추운 지역들이 발끝에서부터 정수리까지 탄산음료의 기포처럼 우르르 돋았다. 잊어버렸다고 한들 기억은 여건만 주어지면 꽤나 구체적인 정보들을 던져주었다.
베란다의 한 옆을 차지한 책상은 직접 만든 것인지 시중에 파는 것과 달리 짜임새가 유별나고 햇빛을 받아 연식이 도드라졌다. 몇몇 갈라진 틈과 벗겨진 칠을 손으로 짚자 목재는 낯설게도 온도를 지니고 있다. 근방의 숲에서 베어왔을 재료에서는 방금 잘린 듯이 숲냄새가 은은히 끼치는 착각을 일게 했다.
ㅡ나뭇가지가 부러져서 내렸을 것 같군.
룬은 잘 보이지 않는 바깥을 계속 살피며 차를 신경을 썼다. 그 연식의 집 답게 단열재를 붙여둔 창 너머로 언뜻 와이퍼가 더듬이처럼 올라와 있었다. 거실에는 커다란 파노라마가 걸려있었는데 룬의 트렁크에 늘 자리하던 오래된 소닉의 구경 카메라를 떠올리게 하는 물건이었다. 룬에게는 그들 중에 유일히 예술적인 면이 있어서 별을 촬영하러 가면 카메라를 들고 오곤 했다. 룬은 삼각대를 세워두는 곳은 대개 풍경이 아니었다. 추측컨대 그는 풍광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 했고 이따금 긴 궤도를 그리는 천랑성이 지나가는 아래와 나무와 사람의 말단을 향해 등대처럼 카메라를 세웠다. 셋이서 사진을 찍곤 하면 전부 웃는 모습을 담는 건 무리였다. 룬은 얼마든지 사람 답게 웃을 수 있었지만 나머지 둘은 그렇지 못했다. 만사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던 동료나 지우스나 카메라를 돌보듯이 바라보고 선 앞에서 종내에는 단체사진 같은 건 포기한 채 단편적인 인물 사진들만을 남기곤 했지만 그것도 모아보니 양이 적지 않아서 현상 비용도 꽤 들여 뽑아두었다. 사진 속에서 지우스는 가끔 웃고 있었다.
ㅡ그때 카메라는?
ㅡ팔았는데.
룬은 식탁의 그릇을 닥닥 걷으며 성의없이 대답한다.
ㅡ트렁크에 아버지가 쓰던 게 남아있을 지도.
이 고장의 풍경이었다. 집에 들리는 손님마다 보란듯이 잘 보이는 벽을 차지한 것치고는 가보라 해도 좋을 만한 작품은 눈에 가라앉은 고장의 일부를 네 모서리의 프레임으로 단정히 깎았다. 담묵화에 가까운 굵고 무채한 픽셀들에서 은은하고도 맑은 다정이 배어나 세밀한 가장자리와 하늘의 경계가 눈길을 끌었다. 다만 감성은 룬의 것이 아니었을 뿐이다. 닮으면서도 룬의 것은 이것보다 시리다. 시선을 받아온 그의 것이 도검과 닮았다면 이건 둔기에 쓰이는 철같이 적묵해 낮은 저음을 길게 깔았다. 인쇄지의 검정이 꽉 채우고 칠한 진공에서는 인공 착색이 아닌 먹먹한 창윤이 돌았다.
ㅡ이것도 아버지가 찍으셨나?
ㅡ눈치는 여전히 빠른데. 어떻게 안거지… 아, 실력이 달랐겠군. 나도 참.
ㅡ실력 같은 건 알바 아냐. 사진 보는 눈은 없으니까.
ㅡ기계냐고. 감별이라도 하는 건가.
감별이라. 부탁한 건 그쪽이 아니던가 싶은 상념이 주의를 흐트러 트렸다. 시선을 가로로 옮겨 장식장을 두르자 B5 종이 보다 조금 작은 액자 두 개가 받침에 등을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네 사람이 찍힌 액자가 동시의 기록처럼 도열되었고 각기 다른 두 인물이 찍힌 두 개의 액자가 나란히 사진을 담고 이어졌다. 주변에는 얇은 먼지 눈이 내려있었다. 가족사진이 있는 건 미혼남성의 집 답지는 않다는 감상이 얼핏 그를 스쳤다. 세피아톤으로 바랜 오래된 사진에서 칼라의 선명한 사진으로, 환히 웃고 있는 여자에서 그들과 꼭 닮은 인상을 지닌 어린 남자아이로 가닿았다. 거칠고 선명한 턱선을 하고 검은 눈의 남성은 룬과 같은 피가 흐르는 것 같아보였다. 친부가 아니라던 룬에게 다시 생각해보라고 제의하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세세한 이목구비에 담긴 것은 그보다 더 무뚝뚝했다. 여리고 곧은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어 엄중하고도 어딘가 벌컥 기세가 오를 듯한 거친 얼굴이었다. 발출하게 미간을 에는 주름은 나이가 들어가는 룬에게서도 같은 것이 도다졌다. 장례식장에서 귀퉁이를 검게 도장한 영정사진보다 훨씬 인간미 있는 사진이었다. 룬에게서 가끔 배어나오는 처연스러운 온화함은 그 옆의 여성과 숫제 닮아있었다. 그는 양부모의 외관을 고르게 따온 셈이다.
ㅡ어머니는 언제 돌아가셨지?
ㅡ십 오, 아니 십 륙년 전에.
그 어머니에게서도 허술하지 않고 여무진 구석 있었다. 마지막 남은 사진에서 말끔한 인상의 어린 소년이 웃으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ㅡ… 그 애가 준이야.
룬은 장남이었다. 차남의 이름은 라우준.
준은 팔 년 전 겨울 이곳에서 실종되었다.
준이 행방불명 된 것은 룬이 도시로 떠나있을 때였다. 가족과 소원했던 그가 그 사실을 제대로 알게 된 건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치고 난 이후였다. 마을 어른들은 준이 설산으로 들어가 아무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숲 속에서 잠들었을 거라고 했지만 룬이야 아버지의 입으로 확언을 듣지 않고서 목격자도 없는 소식을 믿을 수 없었다. 당시에 마을은 상당히 소란했기 때문에 준에 대한 수색은 마을 어른들과 지구대, 나중에는 관할서에서 까지 동원했으나 어린 아이는 커녕 라고 진위라고 할 만한 것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어른도 집어 삼킬 듯한 눈보라가 굉음을 내지르며 숲을 넘어오는 자들을 쫓아내는 동한이었다.
준이 숲을 향해 떠나는 모습은 아무도 목격하지 못했다고 한다. 형이었던 룬과 함께 다니던 겨울 산로도 마찬가지였다. 겨울철의 일감을 찾아 마을을 비울 때였기에 남아있는 일가 어른은 거의 없었고 룬의 아버지만은 일가의 거의 전체가 살아가는 유서 깊은 집성촌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불행한 사고라고, 어떤 이들은 다 뜻이 있는 일이라고 말했지만 월동을 끝낸 숲은 과묵히 말이 없었다.
준의 방은 집에서 가장 작은 방이었다. 잠기다시피 한 문을 열고 들어간 쪽방은 창고 못지 않은 살림살이가 응집했다. 간소하다 해도 한사람 분의 옷장과 오래된 물건이 분명한 재래식 옷장에서 좀약 냄새가 코로 들이차고 밝게 채색된 낮은 책상과 책꽂이에서 룬은 잡다구니를 내어놓는다. 눅눅한 냄새가 지우스의 옷에도 스미어 울을 낡아지게 했다. 감정을 죽인 황색의 눈이 빠르게 유실물을 이리저리 훑는 새에 말수가 적어져 가끔 대화만이 오갔다. 창고에서는 꺼낸 태반이 양부모의 유품이었는데 방안의 물건들은 그보다 더 자질구레했다. 일기 같아 보이는 노트를 들고 건조한 페이지와 페이지를 분리하듯 넘기던 손짓이 차차 속도를 잃었다. 정해진 시간 안에 밀어붙일 필요가 없다는 애매한 자유가 눈을 멎게 하고 작은 동작에 거창한 시간을 들였다.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본 세상은 하나하나가 의문이고 체험의 연속이었다. 상상과 초견에 의해서 좁은 세계는 몇 배는 부풀려져 있었다. 오래된 압지가 지저분해진 채 체크무늬처럼 종잇장 앞에 끼워져 있었다. 경이와 의문과 공포와 활기로 가득찬 페이지들을 좀처럼 넘어가지 않아 지우스는 문득 이 일이 힘겹다는 과분한 감상이 들었다. 스스로가 직접 남긴 소지품에는 간소하게나마 기록이 붙어있고 한 때의 생기는 오래되어 묵은 티가 덧났다. 그가 찾고 있는 이 아이에게 형은 더없이 좋았던 모양인지 군데군데에 룬이 등장했다. 얇은 가죽 옷을 입고 설산에 몇 번이고 찾아가거나 부친과 다투는 내용이 고명처럼 섞여 있었다.
ㅡ네 일기인지 동생건지 모르겠어.
지우스는 눌러 쓴 흑필이 여기저기로 뻗쳐 상형문자처럼 보이는 장을 펼쳐 건넸다. 룬의 얼굴에 가벼운 감흥이 도는 것을 느리게 지켜봤다.
ㅡ아,
룬은 잠시 노력하듯이 말문을 열었다.
ㅡ나온 건 내가 맞지만… 내 일기는 아냐. 어렸을 때 마을 사람들과는 거의 말섞지 않았거든. 산에 가는 걸 혼내지 않아 좋았다고 할지.
그것은 룬이 거론한 유일한 저의 어린 시절이었다. 도처사방에 그런 기억이 널린 곳에 살며 겨우 끄집어져나온 그 생물은 보잘 것 없는 털옷을 웅그렸다. 순서 없이 섞인 기록에서 룬은 도시로 떠나고 그런 룬은 집안에서도 마을에서도 삭제되어갔지만 동생의 일기에서는 언젠가 돌아올 사람으로 확연했다. 이 방을 유지해온 풍경은 증거를 인멸하지 않으려는 시도 같아 형의 의견은 다른 모양이었다. 그가 이해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실종이란 건 생사가 모호한 일이었으므로. 룬에게 직접 의견을 따져 묻는 건 잔인한 일이었다. 지문에서 한참 만에야 눈을 떼어낸 지우스는 잠시 휴식을 겸해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간만에 보는 이름에 제 눈을 의심하면서 화면을 멍하니 보았다. 연결음이 금새 상대에게 가닿는다.
ㅡ어. 살아있었네.
어디야?
ㅡ출장.
출장은. 사무실에 없던데.
ㅡ휴가야.
그으래?
ㅡ난데 없이 연락을 다하네.
네가 원하던 단서를 발견해서. 지질학계 최근 논문인데… 연구지가 북쪽이더라고. 걔 가끔 고향얘길 했었잖아.
지우스는 눈을 찌푸렸다. 동료에게 룬의 행방에 대해 귀띔을 했던 건 벌써 몇 년전의 이야기였기에 잊어버렸을 거라 여겨 아예 기대조차 없었다. 타이밍은 우연치고는 과했다.
메일 확인해봐.
벽돌처럼 균일하게 쌓이고 곱게 다져졌던 설각들이 무더기가 되었고, 월귤나무 옆에는 눈덩이를 뭉쳐 머리를 세우고 코와 눈을 꽂아 놓았다. 눈을 덧입혀 섬세하고 희었던 정원의 조경이 아이들의 손에 한번 뒤집어지고 여분의 눈마저 룬이 차가 빠져나가는 길을 위해 넉가래로 도랑가를 향해 밀쳐 놓았다. 가지가 부러지지 않는 이상 몇 번의 폭설이 덮어도 날씨가 풀릴 때까지 눈사람이 파묻히는 일은 없을 것 같아 보였는데 그게 또 막상 기상이 나빠지면 사정이 다르다고 룬이 무던하게 말했다. 그래봤자 넉살 좋게도 새 눈이 이만치 재차 내리기에 며칠이 지나면 전부 원상복귀 되리라는 게 자명하다고. 백지로 뒤덮이는 것이다. 태생이 북부 고장 출신인 룬은 눈 사이에서 한결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도시 생활에서 때처럼 붙어있던 수염을 밀어버려서인지는 몰라도 꾀죄죄한 모습으로 추위에 시달리는 게 아니라 추위에서 생력을 얻는 것 같이 작은 불기운이 피어나 있었다.
ㅡ장화는… 한 켤레가 더 있을 거야.
곧 창고를 마저 뒤적인 룬이 그의 것보다 약간 사이즈가 작은 성인용 장화를 찾아냈다. 지우스는 발을 헛딛지 않으려고 걸음마다 저도모르게 성큼성큼 체중을 싣고서 중심을 잡으며 긴 장화를 갈아신었다. 현지조달한 장화가 기상에는 제격이었으나 발이 남는 탓에 자연히 팔자로 발끝이 돌아갔다.
ㅡ사슴떼를 본 적 있나?
장식장 위로 뿔과 털을 단 것이라면 지우스는 그렇다고 대답했다가 이윽고 룬의 가벼운 면박이 주어진다. 제법 짖궃은 얼굴로 검은 사냥총을 들어보이는 그에게 자신이 기본적으로 동물을 사랑하는 평화주의자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심지어 파출소의 눈을 피한다고 해도 범법인 건 매한가지였다.
ㅡ…수렵도 하나?
ㅡ불법이야.
지우스의 태도와 달리 룬은 가볍게 웃으며 공기총을 챙겨 넣었다. 만약 겨울잠을 자지 않은 맹수가 둘을 반기며 제 삶에 이바지 해주게 할 요량이라면 그 경우는 수렵하지 않아도 겁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지우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도로 설득 되어주는 건 순전히 지우스는 이 고장에서 외지인이라는 이유였다. 폐광이 되기 전까지 희소자원이 발굴되던 지역이었다. 요새야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겠지만 당시에는 발굴에 들어가는 기회비용과 마을을 개방해 져야할 부담에 비해 재화의 가치를 그리 높게 치지 않았다. 그 자원을 알고 왕왕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고 거절하는 것이 룬의 분담 중의 하나였다. 민간용역이라는 그들의 가업에도 뒷받침할 자본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 처음에는 그다지 나쁜 반응이 아니었다는 설명을 했다.
ㅡ땅을 팔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정도의 광물은 또 아니라서. 이제와서는 어른들의 마음이 떠버린 거지.
제 동네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지우스는 고향이 그렇게 유일무이한 입장인지 재고해볼 것 같았다. 룬에게도 마을을 개발하는 방향에 대해서는 여기저기 생각해온 바가 없을 수 없다. 고향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야 어린애 다운 투정이다. 받아들이는 쪽을 설득할 능력을 갖추는 것에 고민의 무게가 실렸으리라.
정원 한켠에 장작을 패는 도끼가 기대 서있다. 집엔 화목난로가 없으니 룬이 스스로 쓰려는 용도로 나무를 하는 건 아니었다. 산이 위험하다는 데에는 짐승들도 한 몫을 하고 있으니 입산이 쉽지 않았을 뿐이었다. 밀렵은 아니라고 했지만 지우스는 잘 알지 못하는 산골의 사정들이 어떻게 편리하게 끼워 맞춰질지도 모른다는 우려였다.
ㅡ곰을 본다는 거였나? 사슴이 아니라?
ㅡ운이 좋기를 기도해보던지.
ㅡ산에서 나무를 하는 행위는 삼림법 위반이다.
ㅡ공무원처럼 굴지마. 여기엔 여기 나름의 규칙이 있다고.
룬이 얼어붙은 시선을 피해 차고를 차지하던 캠핑장비를 꺼내놓는 동안 지우스는 집안에서 보온병과 낚시 도구, 담요 몇 겹을 더 챙겨 넣은 다음 차에 올랐다. 트렁크 뚜껑 아래에서 드러난 빙어용 낚시대와 빈 바께스 통 같은 것에는 생활감이 수도 없이 묻어있다. 종부의 집에서 실어온 물건의 정체는 풍로로 드러났다. 염려가 무색하게도 차는 구릉 거리며 금새 간밤의 눈귀신을 떨쳐내고 반나절의 월동에서 몸을 일으켰다. 흔한 염화칼슘 대신에 밤사이 제설차가 돌았는지 조금 큰 도로의 눈은 다 쓴 소스통처럼 가장자리로 나앉았다. 골목은 사람 하나가 간신히 지나갈 자리가 있었고 차에는 스노우체인이 있었다. 그들은 무난히 담장 사이를 빠져나갔다.
마을에 몇 없는 평지붕 양식의 콘크리트 건물은 좋은 길목을 차지하고 있었다. 동사무소를 제외하고는 거의 유일하여서 일종의 집회소 같아 보이기도 하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도장으로도 쓰인다고 하는 말은 사실인지 이층에는 넓은 공간의 마룻장이 칠십 평은 족히 되어보이는 공간이 있었고 조그마하게 달린 사무실이 있었다. 온기가 일체 없는 서늘한 사무실에 난로를 켜며 둘은 자료를 꺼내어놓고 이것저것 뒤져읽기 시작했다.
어설픈 난방기기에 선뜻 주머니 밖으로 손을 내놓기에는 공기가 시렸다. 지우스는 한손을 옷 속에 꽂은 채 자료를 뒤적여가며 읽다가 결국 자료를 전량 모아오는 일은 룬에게 일임한채 난로 앞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광산의 채굴량이 바닥 나면서 산업은 멈췄지만 일대의 채굴량을 조사하고 싶다는 요청이 여럿 있었다. 적힌 시기에 따르면 그것도 팔 년 전. 한참 지난 이야기였다.
ㅡ어른들은 반반이었지. 비즈니스라면 상관 없다는 파와 굳이 새로운 산업을 벌이지 말고 본래의 일에 자본을 쏟자는 파로 나뉘었다. 보다시피 어깨가 있는 가계라 평화롭게 해결되진 않았지만.
준의 실종에는 여러 사건이 시기와 시기가 맞물렸다.
ㅡ 최근에 교류한 적은? 그들이 준을 데려갔을 가능성도 있나?
ㅡ…아닐거야. 아버지는 누구보다 전통을 고수하자는 주의셨으니.
ㅡ납치했을 가능성은?
ㅡ그럴지도. 당시에 경황이 전혀 없었다는 말을 들었으니까. …네가 보기엔 어떤데?
ㅡ…그랬다면 실패한 협상이었겠군.
지우스는 룬의 눈치를 살폈으나 그는 같은 얼굴로 흰종이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희미한 옛일들을 골몰하는 사이 차는 시내의 중심을 지나 트랙처럼 휘어진 좁은 차폭을 따라 낮은 시립학교를 돌고 농산물 마트를 돌고 공원을 돌았다. 먼 산하로는 맨눈으로 분간할 수 없는 구 탄광의 골짝이 파여있고 둔덕에 낮은 발전소가 마을 하나만큼의 동력을 공급했다. 면으로도 나뉠 필요 없는 이 동네에 전기철물점, 횡단보도, 컴퓨터방, 인가들의 블록은 유목민처럼 나타나고 짧게 끊기며 약한 호흡을 이어갔다. 이런 시골 복판에 도시로 직통하는 열차는 커녕 산간역도 있을리 만무하다고 여겼는데, 보아하니 이 십 여년 정도 전에는 외부에서 이곳에도 오가는 사람들도 꽤나 있던 모양이었다. 룬의 2대조 즈음 전에는 이곳을 개방하는 걸 긍정적으로 생각했다고 하니 마을 곳곳에 외지인을 대상으로 환객하는 시설에 지나간 시대의 활기가 어룽졌다. 산간을 후비고 들어온 터널을 보며 사십 년 전의 그의 일가 어른들은 코앞까지 다가올 신기원을 결행했을까.
일전 큰 화재가 난 적이 있는 동네 구석의 극장이 그 잔재였다. 철길이 들어오고 사람들이 오갈 수단이 생기고 나서 극장은 방문하는 이들의 유흥거리였다. 화재 이후로 극장은 문을 닫았고, 더 편하고 접근하기 좋은 여행지들이 생기면서 외지인들의 발길이 끊어졌다. 마을은 폐쇄하다시피 다른 생계의 수단으로 발길을 돌렸다. 개중에는 광산 산업도 있었지만 의견이 가세한 쪽은 장기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용역업이었다. 다 깨진 창문의 흉물이 되어버린 건물의 틈새로 룬은 그런 역사를 읊었고 색색의 무늬였을 벽은 검게 그슬린 자국만이 스쳐 지나갔다. 결국 일가들은 원래의 일로, 더 깊은 곳으로 유동했다. 룬이 이곳을 떠나고 싶어한 이유도 알만했다. 마을에 만연한 기성과 역청의 냄새. 용역업. 사회규범과 동떨어진 전통. 가업. 지우스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복잡해 보이는 그들의 가계가 마치 겨울 나무의 가지 같이 이곳의 수형을 붙들고 있었다. 숨쉴 틈 없는 엄중함과 좁은 가두리의 뒤로 쌓이는 무게에 도시로 도망쳐 나왔던 룬은 담배연기와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고향에는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지진하게 이어져내려온 전통에는 반항이 압살당한다. 압도적인 역사에 언제까지 숨을 조이는 기분이 든다.
곁에 앉은 룬의 목소리가 내렸다. 격노하게 몰아치는 눈폭풍이 그가 하고픈 말도 전부 전하여서, 거대한 순리 앞에 자신이란 건 내세울 이유조차 없이 묵념만이 여실했다. 그는 질식한 시체처럼 담담히 입을 다물고 눈 쌓인 거리 위를 운전해간다. 흐릿한 빛이 들어와 모아 묶은 머리칼과 턱밑까지 올라오는 자줏빛의 방한복에 잠긴 목선의 윤곽을 가로질렀다. 무리들 틈의 룬은 장례식에서 보아온 압력을 받아들인 사람 같았다. 도리어 그들을 이끄는 듯 평안하게 이들은 가업을 사랑했다고 변호하는 룬은 그 두 어절의 단어를 무슨 의미로 읊었던 것일까. 침묵을 동의의 의미로 쓰는 것으로 초래되는 모순조차도 좋다는 것인지. 말을 않을 뿐이라는 건 다만 암시적인 경고이자 유예된 부정일 뿐 서로를 겹치고 묵묵하게 자기를 함몰하는 것이 과연 생존의 유일한 방법이었을까.
마을은 어디를 가나 개가 컹컹 연달아 우는 소리가, 자꾸 연기 냄새가 났다.
와이퍼가 석면처럼 딱딱하게 굳은 앞유리를 쓸었다. 묵연하게 서있는 장승이 감히 쓸쓸히 지키는 다리를 접어들어 강둑을 따라 달렸다. 차체 옆으로 주민 한 명이 좁은 인도에 들어가지 않는 쇠수레를 밀고 나갔다. 크랭크 축처럼 열을 맞춘 길벗 나무가 주욱 벽을 세웠다. 두번째 교량이 나올 때즈음 미루나무 그루 주위에 주차를 해두고서 하천의 넓은 부지에서 그들은 얼음을 뚫기 시작했다. 여러모로 천혜의 낚시터를 상상했던 지우스 였지만 도시 외곽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교량을 건설한 뒤로 수량이 줄어든 물은 가엣변 둔지가 뭍에 드러나 있었다. 다리가 물살을 가두어놓은 이전의 낚시터보다 수량이 적었지만 폭은 비교되지 않게 넓어 호수라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둔지 위의 물 때가 하아얀 염전 같이 백화되어 눈이 만조를 이루었다. 간혹 불티처럼 까만 새떼들이 날아오른다. 룬은 얼음끌을 건네 받은 지우스는 소금 갈이를 하듯이 빙판을 속아주고 주먹 두 개를 들이밀 구멍을 뚫었다. 지우스는 장갑을 손에 끼고 가끔 다리를 떨며 의자에 앉아 신호를 기다렸다. 손의 신경과 움직임이 무디어지는 느낌이라 즐기지 않았지만 도시에서 챙겨온 몇 안되는 쓸모 있는 옷가지였다. 휴대용 난로가 덩치에 비해 나름의 효용을 뽐내는 가운데 두꺼운 동결 아래 잠들어있던 준어 몇 마리가 걸려 빙판으로 내쳐졌다. 미동 없이 의자에 쭈그린 그의 등에 대고 의젓해졌는걸, 하고 룬은 칭찬하듯 말했다. 천문대를 볼 때 함께 야영하곤 하면 산의 새벽은 한여름이 아니고서야 늘 두통이 올 정도의 추위를 동반했다. 그럴 때를 방비하던 행동들을 거론하며 룬은 그를 골리는 것이다.
ㅡ그거 몇 년 전이잖아.
지우스는 가볍게 툴툴 댔다. 룬은 보온컵을 대고 액체를 빨아들이는 소리를 크게 내며 데운 물을 마셨다. 얼어붙은 속눈썹처럼 보이는 모든 곳을 덮은 한파가 그러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날씨였다. 늑대를 만나지 않았다는 다행인지 실망일지 모를 생각들은 족히 고패질을 하며 망각되었다. 탈수증에 걸린 것처럼 꼼짝 않는 하천은 몇 십센티를 뚫고 내려가서야 수맥처럼 보이지 않는 강물이 초릿대 끝을 적셨다. 심해 같은 구덩이 아래 깊은 암청색을 띄며 흐르는 물길 속으로 시추공이 들어갔다가 수면을 뚫고 올라왔다. 실이 얼음에 붙어버리지 않으려면 낚시대를 내려놓고 살얼음을 자주 긁어 주어야 했다. 빙원 아래에서 영하의 맑은 부동액을 휘젓고 다니던 고기들이 지느러미를 바싹 접은 채로 어안이 벙벙해 바늘에 달려나왔다. 유목처럼 섪은 억새들이 겇피를 태워 불충분한 연료처럼 연기를 내며 타오르고 폐어선 같이 이리저리 민가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일을 하러 떠났다는 이들도 조만간 이 마을로 돌아올 터였다. 마을의 대대로 내려오는 조산이 있었지만 자리는 점점 부족해져가 납골을 하는 경우가 흔해졌다. 룬도 이장을 하고 싶다고 했다. 주어 없이 못박힌 듯한 소리가 목 안쪽의 울대를 긁혀 나오다가 머리 없는 빙어처럼 얼음 위를 맴돈다.
호수 위로 깊고 두터운 바닥을 만든 얼음은 며칠 사이의 맹렬한 추위로 인해 표면으로부터 빙결 뿌리가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있다. 이따금 쩌적하고 큰 소리로 얼음 얼어붙는 우레가 서늘하고 크게 빙원을 메웠다. 대설이 내린 뒤 공기층은 한층 뾰족해졌다. 이런 설원에도 산불이 있을까. 겨울은 이같이 만연하고도 덧없게 사라지는 것일까? 아니라면 떠나오는 걸까. 괜한 참견이라며 불어오는 산바람이 녹빛 머리칼을 어지럽힌다. 산간이 갈퀴질 당한 살을 드러내며 짙어졌다. 이론적으로만 가능한 그 망상에 대해 칼날을 뺨에 붙이듯이 타고 돌았다. 지우스는 그토록 원시(遠視)적인 풍관을 제공하는 대설원을 바라다보았다.
기슭에 풍로를 세워두고 구운 빙어의 고슬거리는 살을 벌리고 끓는 라면에 넣는다. 구름은 가끔 연기가 피어나는 것처럼 가로로 긴 무늬를 지고서 배경의 산세와 절벽을 둘러쳤다. 칼날처럼 콧등을 베어가는 손끝도 발끝도 얼어 더이상 버티지 못할 때즈음 자리를 걷기 시작했다. 짧은 직경을 그린 태양이 떨어지고 먼곳에서 시야의 왜곡으로 높이 솟아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것처럼 둥글어지던 지면은 황혼 없이 어두워진다. 아. 장갑. 언제 잃어버렸지. 주차해둔 곳에 다다랐을 때에 지우스는 벗어둔 한 손의 장갑을 어딘가에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찾으러 되돌아가기에는 열 걸음 앞도 보이지 않았고 오직 두껍고 광활한 빙원이 그를 만류했다.
4
밤이 되기 전 손님이 찾아왔다. 어둠을 뚫고 걸어온 이는 시장 어귀에서 보았던 무리 중 하나로 키 크고 머리를 제식으로 깎은 남자였다.
ㅡ외숙부님,
외숙부라고 불린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했다. 눈에 젖은 검은 장갑을 털고서 문턱을 밟자 높은 신장이 솟아나듯이 올라왔다. 검은 옷에서 온도 때문에 김이 오르는 모양새와 달리 피부가 바람에 핏기 없이 질려있었다. 옷에 붙은 눈자국으로 보아 오래 걸어온 것 같지는 않았다.
ㅡ저녁은 드셨습니까?
ㅡ그래, 와있을 때라도 아이들하고 지내야지.
ㅡ리아민은 요즘 다시 학교에 나가나 봅니다. 본인은 싫어하지만요. 일하는 쪽이 적성에 맞는 거겠죠…. 여러모로 숙부를 닮은 거예요.
ㅡ그럴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현장을 겪는 게 실질적이지. 본인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학교라니… 나중을 생각하면 지금하고 있는 시간낭비가 걱정이구나. 어쨌든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하러 온 건 아니니.
짐작컨데 전에 본 소녀의 아비인 남자는 살짝 단호한 낯빛으로 대꾸했다. 각진 얼굴과 짧은 흑발 덕에 드러난 눈썹과 이마가 한층 젊은 인상을 풍겼으나 보기보다 나이가 있는 셈이었다. 고개를 숙여 목도리를 풀어내는 가운데 창백한 기가 가시자 눈가에서 옅은 주름이 형광등에 번들거렸다. 셋은 등유 난로로 발치를 녹이며 둘러 앉았다. 온도가 발끝에서부터 위를 향해 천천히 상승했다.
ㅡ말했다시피 이렇다 얘기할 만한 건 없어.
차분한 목소리가 작게 불을 지폈다. 룬의 부친은 마을 지도부 간의 다툼으로 작고했다는 이야기로 시작해 남자는 과거에 있던 일들을 어른댔다. 근척끼리의 그다지도 잔혹한 사건을 일으킨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그때의 여파로 룬은 이 고장으로 귀향했다. 준이 사라진건 그보다 몇 년 앞서 종중 간의 지도권 계승을 두고 다툼이 있던 시기였다. 문중과 문외로 갈라져 정쟁을 치러오던 당시 그는 정황을 그나마 가까이에서 본 인물로 부친의 측근이었다. 불꽃 같은 바람이 그안에서 몰아치며 난로에서 데워진 얼굴들이 반영됐다. 좁은 동네인데도 이 일대의 돌아가는 가계는 복잡하기 그지 없는 모양이다. 준을 낳으며 산욕열로 세상을 떠난 모친은 애석하게도 준은 어떤 소란도 없이 그저 어느 순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따금 이런 이야기들이 재차 섞여들며 그네들만의 사정이 눈처마처럼 높고 복잡한 둥지를 이루고 투명하게 주위를 널뛰었다. 룬은 그 집에서도 오지 않을 사람들을 대신하려 애쓰고는 결핍된 모든 과거를 바로 잡으려는 지도 몰랐다. 이세상 사람이 아닐 지도 모를 준이 돌아오길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 룬을 보는 다른 친척들의 시선은 어딘가 곱지 못한 것이다.
술도 깰 겸 잠시 화장실에 다녀와야겠다며 룬이 자리를 떴고 두 손을 무릎팍에서 맞대며 앉아있던 지우스는 복잡하게 귀를 떠돌아갔던 얘기를 정리했다. 구식 화장실은 대개 집과 떨어져 있었으나 공사를 하고 난 지금 집의 것은 집안에 있어서 일을 보는 소리가 여과없이 거실로 파고 들었다. 그외에는 시간이 멈춘 듯 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주인 일가가 곧 돌아올 만한 곳. 집안에는 누군가 다녀간 기미라고는 도통 없었따. 이제는 장남인 룬을 제외한 일가족의 흔적은 흩어지다 못해 소멸해갔지만 긴 시간이 대체하지 못한 공백이 눈 녹은 비린내와 함께 공기 중에 머물러 있었다. 멈춰 놓은 망자들의 시간은 깜빡하는 새에 달려 앞지르거나 언제든지 되살아 날 수 있는 것들이었다.
ㅡ의심하는 건 매형이 왜 그때까지 실종 신고를 하지 않았냐는 겁니다. 매형이 준을 데리고 산에 가는 걸 본 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룬은 이 이야길 싫어하지만.
상념에 젖어가던 의식을 불러 일으키며 남자의 표정이 난로불 너머로 음침한 빛으로 가라앉는다. 지우스는 천장과 벽면의 이어지는 몰딩에서 남자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가까이에서 본 그는 지우스가 생각하는 용병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로이드 부작용이나 비정상적인 거구는 아니었으나 눈꺼풀이 우묵 들어간 녹빛이 놀라울정도로 깊었다. 투명한 인간의 것이라기 보다는 오랜시간을 열과 압력에 노출된 광석의 단면에 가까워 마치 무언가에 맹세를 하고 살아가는 엄숙함이 모든 기색에 배어있었다. 이곳에서는 살아가려면 갖추어야 하는 건 그런 강인함인지도 몰랐다. 그가 말을 고르는 동안 하나 온정 없이 벼려진 눈에 깊이를 가늠키 어려운 수심이 떠올랐다.
ㅡ오히려 의심가는 쪽은 따로 있었지요.
ㅡ부친을 살해한 쪽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ㅡ준은 건드릴 만한 사유가 적었어요. 룬이라면 모를까….. 시신은 엄폐해봤자 들통나기 쉬운데다 심문에서 이렇다 할 기미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심문은 심문이지요. 심증은 물론이고.
ㅡ외숙부님. 그쪽은 아니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는 돌아오는 룬의 쪽을 힐끔 돌아보고는 말을 이었다.
ㅡ몇 번을 말하지만 넌 그때 외지에 나가 있어서 마을 사정을 잘 몰라. 칸 매형하고 백부가 얼마나 사이가 나빴는지…. 개발 만이 아니라도 외부에서 일을 중개하는 건에 대해서도 치열하게 대립하는 중이었고요.
룬은 찬 복도를 걸어나오며 반문했다. 준의 등본을 떼고 나올 때의 동사무소 안의 시선이 오싹하더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네들은 그저 불안할 뿐이라며 높음이 배어나오는 가짐으로 고개를 치세우며 말을 이어나갔다. 전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래봤자 라고. 대화로부터 흘러나온 근원을 알 수 없는 열기가 단호하게 이어가는 대화를 달구었다. 지우스는 황색 눈을 침착하게 내리 깔며 대꾸했다.
ㅡ그쪽을 만날 순 없습니까?
ㅡ지금은 돌아가신 분들이 대부분이야.
ㅡ사람들은 네가 동생을 찾는 다는 걸 모르나?
ㅡ너도 네 옛동료라고 했으니 따로 탐문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믿는 거겠지. 다만 그래도 네가 사립 탐정이나 채굴 조사원 같은 게 아닌가 의심은 하고 있어. 외부인에 대한 경계가 높거든. 내가 준에 대해 조사하는 게 탐탁치 않은 거죠.
진짜 연구자가 오지 않아서 다행이군. 지우스는 혼자 생각했다. 숙부는 부러진 어조로 대꾸했다.
ㅡ또 그런 식으로 말하느냐? 룬. 넌 잘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구나. 네게 수장직을 강요한 사람은 없어.
ㅡ숙부님도 마을이 원래대로 돌아가길 바라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군요. 준이 돌아오면 막상 제일 곤란한 건 마을의 어른들이겠지요. 약속한 책임이 있으니 말이죠. 저는 그애를 찾아올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ㅡ일에는 시효가 있다. 이제와서 그런 식으로 증명하기라도 바랄 것 같으냐? 지금 같은 때에 필요한 건 그런 마음 가짐이 아니라….
예의 까듯한 녹색의 눈이 시선을 가열하듯이 지긋하게 압박했다. 룬의 우스워하던 냉소가 변하자 낯설게도 냉엄함이 비쳐들었다. 일견 그런 모습은 지우스로서도 처음 보는 태도였다. 그는 동생의 실종을 방관하고 방치한 가계가 가타부타 말을 얹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숙부는 룬이 준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한 걸 아는 몇 안되는 인물이었지만 적극적으로 도울 마음은 내키지 않을 뿐더러 룬이 마음을 굳히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에 반해 룬은 다른 마음을 품은 사람처럼 여전히 속모르는 태도로 그를 대했다. 숙부라는 남자를 어느 켠으로 들여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다는 듯한 무척 모호한 어조였다.
ㅡ맞는 걸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법인 걸요. 돌아오면 다들 말이 바뀌겠죠.
룬은 엄숙함을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한 표정을 띄고 공연히 벽을 응시했다. 한기가 도는 거실 어디에서 새어오는 바람에 찬공기에 데였던 살갗에서 열이 올라왔다. 시효라는 말은 데일 정도로 시린 그 모습을 노출하며 막이 오른 뒤 모두가 기다려 온 주연배우 같은 존재감을 가졌다. 룬도 자신을 안위하여 살아갈 거라 여겼다. 그렇게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데 성공한 것 같기도 해서 마치 그 자리를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온 사람, 야망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스스로가 사라지는 걸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혈연이 없는 이 마을을 뛰쳐 나간 그도 부채감을 절연할 수는 없었으리라. 전부 떠나고 난 뒤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한 냉소를 입속에서 짓씹고 있었다.
남자가 돌아간 뒤 꺼낸 술은 오목히 올라온 병바닥까지 거의 내려갔고 강직하게 서있던 것들이 흐드러있다. 창고에서 꺼낸 오래된 루저우라오자오는 그의 부친이 중국에서 가져온 백주였다. 어쨌거나 룬이 제 피 섞이지 않은 근척들을 알듯이 그네들도 룬을 알았고 적어도 그를 설득할 필요까지는 없었는지 숙부는 별말 없이 돌아갔다. 그의 방문은 지우스에게 구체적인 정황을 설명해주려 함이었으리라는 것은 이해했으나 룬은 지우스가 쓰던 담뱃재를 털어 비웠을 뿐이지 무엇도 끝내 덧붙이지 않았다. 무게까지 가늠하지 못할 높은 침묵에 가로막혀 설벽처럼 투명한 잔에 술이 차올랐다. 그들은 차분히 건배사를 고르고 잔을 부딫혔다.
ㅡ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유리는 미녀린 소리를 내며 진동을 일으켰다. 빠진 한 사람을 의식하는 건배에 룬이 기분이 이상하다고 하자 지우스는 쓰린 혀를 가누며 가볍게 디스플레이를 밝혀 연락기록을 보인다.
ㅡ오라고 한 사람은 나지만… 솔직히 거절할 줄 알았어.
ㅡ그러면서 잘도 연락 할 생각을 했네. 원래는 따뜻한 남쪽에서 휴일을 즐길 참이었어.
ㅡ팔자도 좋아졌네.
ㅡ모른 척 할까도 생각했지만,
지우스는 바닥을 비운 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ㅡ한번 들리겠다고 약속이었으니까.
그 말에 라우룬은 바보 같이 얼이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에 누군가 약속을 파토낸다면 그건 지우스였기 때문이다. 직전 연락이라도 준다면 차라리 나은 편으로 나머지 둘은 약속장소에서 한참을 기다리곤 하다 참다 못한 한 사람이 휴대폰을 들었다. 전화하면 근무 중이라는 딱딱한 대답은 기계의 자동응답과 다를 바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짐작해오다가 무엇으로부터 정해졌는지도 모를 거리감에 묶여 말미에는 돌연 상황들이 바뀌어 간다는 걸 눈치로 일관했다.
ㅡ... 네 실종신고를 한건 나였다. 직장에서 가능했지.
룬은 실종신고가 되어있어 잠시 애를 먹었다. 누가 자신을 위해 그런 일을 할거라는 생각도 못했다고 하였다.
ㅡ군대라도 다녀왔다기엔 긴 기간인데.
어디를 갔을까 하고. 이곳에서 그를 보니 맥이 풀렸다. 그제야 지우스는 그를 보고 싶어 해왔다는 내심이 기억에서 떠올랐다. 어딘가에 잘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뒤끝은 여전히 털어내지 못했다.
그것이 그의 완벽한 실종이자 두 번째 실종이었다. 그 시효는 단호한 숫자로 표기된 수사조항처럼 길지도 명확하지도 않았지만 칼을 꽂고 사는 부재의 느낌만은 또렷히 살에 박혀있다. 그맘때의 지우스는 지내던 멘션에서 구형아파트로 집을 옮길까 고민하며 실제로 적당한 곳을 구하러 다니며 원치 않게 바빠졌다. 결국은 어디나 집은 비슷할 거라는 지인들의 말에 따라 단념했지만. 룬이 설국에 홀로 있기 때문에 고독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도시에 홀로 버려두고 갔기 때문에 남겨졌던 지우스는 내내 고독했다. 잊히는 듯하면서도 다시 떠오르기에 실효를 잃기까지의 기간은 몇 년으로 결판 지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피하지 마라. 피하지 마라하고, 머릿속의 화면에는 그런 문자를 보내는 게 떠오르곤 했다. 룬의 행방이 지우스에게 잔인해서 였는지 그 자신에게 모질어서였는지 정확한 까닭은 헤아려지지 않았다.
얼굴에 오르는 열에 차가운 공기가 필요했다. 지우스는 두꺼운 패딩에 한팔을 끼워넣으며 테라스의 문을 열고 나갔다. 안에서 피워도 되는 데. 외치는 목소리에 됐어, 머리 좀 식히려고. 하고 사양했다. 브래킷과 들보가 노출된 집의 전면 테라스는 구식은 아니었지만 어딘가 별장 같은 느낌을 풍겼다. 담배를 붙이려 해도 불이 바람에 날아갈 것 같았고 손을 밖으로 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당 너머로는 들판이 뻗어나갔다. 망망함을 맞닥뜨릴 만한 장소였다. 녹색 머리가 북풍에 부풀어 달아올랐던 살갗이 텄다. 칼바람이 이마를 짚자 폐호흡처럼 알코올이 도진다. 결심도 책임도 없는 것이었지만 지우스는 그것들이 묻어나오게 입을 열고 서있었다. 소리 없는 냉소가 입에서 빠져나와 공기를 얼렸다. 영도 아래로 얼어붙어 열이 사라진 세상. 물이 굳기 위해서는 방출해야 하는 그 열들은 금세 어디론가 사라져있다. 아프지만 여기에는 분명 통각을 마비시키는 힘이 있었다. 상처가 더이상 멍들지 않도록 환부를 붙들고 얼려버렸다.
너, 어떻게 살았냐, 예나 지금이나 그 한마디가 풀처럼 들러붙은 입술에서 좀처럼 내기 어렵다.
다시 문이 열렸을 때 룬이 바깥으로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룬의 눈가는 벌개져 있었다. 모를 일이었다. 장례식장에서는 좀더 대놓고 울상이던 새끼가 왜 갑자기 숨기길 작정했는지. 먼지처럼 사방에서 일어난 눈이 내리는 눈에 더해져 긴 채찍처럼 다리를 일으키는 눈보라가 장관이었다. 그들이 있는 지역은 마실 나온 사람 하나 보기 어렵고 인구분포는 연해지다 못해 산발한 타점처럼 동떨어진 곳. 가느다란 글씨로 지도에 간신히 그 존재나 표현하는 읍이었던 것이다. 벽처럼 둘러싸인 동네의 풍광은 어쩌면 화산활동이 끝나고 굳어진 상곳적에도 같은 풍경을 지녀왔다. 자처한 고립이라기 보다는 타고난 고독이 지경을 이루었다.
막연히 불안히 흩어진 미소는 두려워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다시 고장에 돌아오는 것을. 이따금씩 애들처럼 부닥거리를 하던 그들의 동호회가 날선 신경전을 벌일 때 그들을 떼어놓는 역할을 도맡는 것 룬이었다. 여행이 중구난방이 되어버리면 리더십을 부려 운전석에 앉아 선생님처럼 방향을 잡아나가곤 했다. 독단의 화신 같은 사람 셋이 모여 도저히 잡아지지 않는 갈피를 허탈하게 놓아버리는 룬은 꽤 그런 무질서들을 선망하고 즐기는 탕아의 기질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종내 손쓸 도리가 없을 정도로 계획을 탈피해버리면 그는 단호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과정은 어릴 적부터 몸에 익힌 훈련이었을 것이다.
지우스는 아직 온열이 남은 시선으로 그 눈을 보고 있었다. 아이들이 들판에 남은 재로 모래성 쌓이를 하듯이 남겨진 일을 이어나가는 걸 지켜보았다. 불모의 재가 하얗게 덮은 대지를 퍼내고 뒤집어 손금에 흰 굳은 살이 곳곳 배기고 손톱 아래로 눈이 파고 들어간다. 외부의 것이 뿌리를 내린 형태가 그의 눈에는 부자연스럽다. 인간의 기억은 선조의 유전자로부터 물려받는데 토박이일 지언정 마을 태생이 아닌 그는 냉혹한 겨울에서 생존할 방벽을 쌓고 있었다. 허례하고 지쳐보이던 미소들이 지우스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 마을의 균열을 핥기라도 하는 모양새로 주분주분 어지러운 머리로 생각을 밟아가다보니 속에서 치고 올라오는 열이 느껴졌다. 주머니 속에서 아직 시리지 않은 두 손이 여무져 지우스는 주머니에 한층 깊이 찔러 넣었다. 해결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이렇게 뭣같이 굴 수는 없는 법이다. 급하게 처리한다고 해서 대강 넘어가는 태도에도 답답함이 메였다. 만사에는 시효란게 있었다. 시체도 썩고 파면 싹이 나있듯이 시효가 정해진 약속은 독한 화주의 뒷맛처럼 가시지 않았다. 지우스는 한기 속에서 가시지 않는 체온을 뿌리치듯이 말을 내놓았다.
ㅡ나라고 해서 모든 걸 다 할 수 있지도 않아. 네가 이런 얘기들을 터놓는다고 해서 같이 휘말려주지도 않을 거다. 그래도 뭐라도 말을 해야될 거 아냐.
테라스의 옆 난간에 매달려 있던 룬이 옆을 돌아보았다. 흘러들어오는 빛이 맺힌 곡면은 미세하게 혈색이 돌았다. 어둠에 갈가리 찢긴 반면이 창백한 채로 남는다.
ㅡ말을 할 마음이 없다면 때려치던가. 협조하지 않을 거라면 나도 도울 이유가 없어.
ㅡ돌아온 건 아버지의 뜻이었다. 진즉 그러길 바라셨어.
ㅡ뜻?
베이스에 가까운 톤으로 지우스는 한 어절의 단어를 되묻는다. 너무나 편리하고도 잔인하게 축약되는 응집이 외투의 위를 두드렸다. 어려운 분이었다. 언제나 룬이 아버지에 대해 하는 말은 그 한마디로 종결됐다. 어머니의 대한 건 그의 인생에서도 기억하기 가장 힘든 부분이었다. 시커먼 눈동자 안에서 연명하던 슬픔이 분노의 빛을 머금었다.
ㅡ넌 준이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ㅡ준이 혼자서 숲에 갔을 리가 없어. 아버지던 누구던. 준을 데려간 사람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아버지가 알았겠지.
ㅡ죽었을 리 없다는 거냐…. 이런 곳에 오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 않았어? 이제 와서 찾고 싶은 생각이 든 건?
ㅡ십년 가까이 행방을 모르고 살았다. 찾을 수 있다면 이번이 마지막이겠지.
그것도 역시 룬의 의지였을까? 고개를 내리는 그는 바깥 세상에서 어딘가에서 살아갈 차남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경을 치듯이 난동을 부리는 바람이 겉옷을 파고 들었다. 룬은 추위를 느끼는 듯이 떨었다. 준이 사라지고 나서 아버지는 곧장 그를 불러들여 알리지도 않았다고 했다. 직계라고는 룬밖에는 없었던 그 험악하던 상갓집의 분위기가 떠올렸다. 지우스는 문득 룬을 보고 울고 있었지만 마을 어디에서도 보기는 커녕 얘기도 듣지 못했던 청초한 인척의 여성을 떠올렸다. 그에게도 무시할 수 밖에 없는 궁한 사정이란게 존재하나 싶었다.
ㅡ전부 빌린 것에 불과한지도 몰라. 나는 그냥 도구나 다름없다, 지우스. 아침에 일어나면 전부 헛수고로 돌아가버렸구나, 결국 그런 날이 올 거란 생각이 든다.
지우스가 인연 하나 없는 망국을 찾은 것도 비슷했다. 여기까지 이르르면서 무슨 괘를 얻고자 했는지는 까닭은 몰라도 그리 깊은 뜻은 아닌게 분명했다. 와본 적 없는 설원의 살풍경 속에서 왜인지 안쪽으로부터 지독한 향수가 비집고 올라왔다. 그것이 취기로 인해 벌려진 틈이라기에는 너무나 광막하고 빽빽한 어둠이었다. 난간 너머로 열걸음이 채 닿지 못하는 가시거리가 주는 노스텔지어에서는 이십대의 초반의 단발적인 여행들과 같은 순간을 전하고 있었다. 지우스는 그것들이 자신을 울렸음을 인정했다. 끝내 녹지 않을 듯이 그들을 고립시키는 설악에서 죽지 않았다는 위무로만 살아가기엔 지독히도 가볍게 느껴졌다.
그는 마음 속의 허무를 다 비워버리려는 사람처럼 술잔을 들었다. 모든 것이 주어졌다면 그 까닭이라는 데에 룬은 매달리는 것이다. 그의 속에 죽은 사람들의 몸과 그네들이 남긴 말들, 가계에 대한 무게, 그럼에도 살아가야 할 가업에 대한 외로움들이 숨쉬거나 숨을 틈없이 들어찼다. 눈 내린 반사광 정도가 그들이 함께 앉은 거실의 베란다 바깥에서 반사되고 있었다. 지우스는 자신의 얼마 되지 않는 심연을 털어 이 밤을 전부 사고 싶어, 입속으로 술을 털어넣었다. 룬은 바깥을 보고 있었다. 기차를 타고 갈 사람이 육안에 없는 목적지를 보는 것처럼,
멀리를.
더위를 물리려 얼음통에 가득 채워온 눈이 금세 녹아 흘렀다. 감상에 젖어 룬이 이런 저런 잡담을 늘어놓는데 귀를 기울여 들으려 해도 소리가 천정부지로 갈라졌다. 지방술은 대개가 독하기 마련이었고 룬처럼 지우스는 술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우량예 한병을 더 꺼내오는 룬에게서 그는 맥주를 찾았다. 머리가 연속 뒤로 넘어가는 가운데 세 캔째를 들고서 기댄 팔 너머로 이야기를 떠드는 룬은 지켜보았다. 누구에게라도 좋다는 듯 꽉 봉재한 틈에서 묶어둔 내용물이 쏟아져 가고 맑은 눈동자가 흐릿했다. 한곡을 뽑아보라는 얘기에 지우스는 반주도 없이 기억나는 곡 하나를 끄집어냈다. 기차 연기가 목을 매캐하게 해 이전 만큼 노래를 잘 하지 못했다. 목소리가 터널을 빠져나오는 사람처럼 길고, 깊고, 걸었다. 울리지는 않았다. 들은 대로 부른 노래였을 뿐이다. 룬은 제 목을 가다듬고는 낮은 목소리로 집게 끝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때 너와난 일렬로 서있었고
나는 네 그림자를 밟고 있었지
그리움은 몰랐지만 네가 돌아오길 바랐어
왜냐면 나 하나만으론 보스턴 바에 들여보내주지 않았거든...
ㅡ제기랄, 잘 부르면서 왜 나를 시킨 거야,
ㅡ진짜로 부를 줄은 몰랐지.
얼지 않으려 반쯤 열어둔 수도에서 물의 희미한 소리가 귀를 긁으며 흘러갔다. 지우스가 물고 있는 담배는, 가르친 것은 룬이었다. 사서 단명하는 녀석들이라고 멀리서 연기를 맡는 것도 싫어하던 동료와 달리 지우스는 거절하지 않았다. 야영까지의 긴 밤을 기다리며 시간을 채우는 일은 그들에게 한없이 익숙한 일이었다. 같이 본 영화가 떠올랐다. 천체사진처럼 긴 노출이 장외타처럼 흔들리는 필름영화였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여자배우가 흑백의 화면 아래 희게 탄 금발을 하고 나와서 긴 마스카라를 치켜떴다.
ㅡ저런 여자가 이상형이긴 하지만... 현실에는 없는 사람이지.
ㅡ그럼?
룬의 대답은 심플했다.
ㅡ가슴 큰 사람이 좋군.
ㅡ나도 비슷한가. 아니 목소리가 좀 더 좋으려나,
ㅡ그래도 실제로 저런 여자를 만나면 아마 아무 저항도 못하겠지...
ㅡ사랑할 것 같나?
ㅡ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모시고라도 살 것 같군. 신을 보면 인간은 그러기 마련이니까.
허접한 회상에서 떠오른 대로 지우스는 실제의 룬에게 물었다. 애인은 없다는 대답에 룬은 답지 않은 한탄을 섞었으며 눈꼬리를 내려트렸다.
ㅡ마음에 드는 사람은 있었지….
ㅡ평생 혼자 지내기라도 할 셈이냐?
ㅡ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고.
ㅡ너 후회한다….
하하, 술이 넘어가듯 잠시 웃고는 그는 태도를 달리했다. 서로의 깊은 바닥을 보고나서도 그런식으로 말하는 건 정말이지 우스운 일이었다. 밤새 별다른 이야깃거리도 없었는데 왜인지 웃을 일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어디로부터 룬이 행했던 그 모든 전과들이 기인한 건지는 곁에 있던 지우스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바깥의 기온, 밤의 기온이 집안으로 눅눅히 침범하고 있었다. 끝없는 자괴와 타성의 조수처럼 밀려들고 시커먼 화마처럼 천천히 마을을 지나 그들의 집을 넘어 산으로 들어갔다. 연기와 웃음이 타다남은 재가 중독할 것처럼 공기를 감싸았다.
앉은 자리로 서서히 밀려드는 죽음을 보며 지우스는 흐릿한 도시의 냄새를 맡았다. 왜 사람들은 삶에 중독되곤 하나. 희망 속에서 약을 하듯이. 룬이 내일 죽는다 해도 오늘 당장 그 답을 내기엔 역부족이라는 사실이 문득 미안해졌다. 그들은 이미 각자의 세상에 뿌리를 내린지 오래였다. 마음을 전하기에 겨울의 하루 날은 너무도 빨리 산화해 버린다 하여도 지우스는 그의 마비되지 않은 이성에 호소하고 싶었다. 손끝으로 깃털 하나가 더 떨어졌다. 흰 약봉지의 가루처럼, 천사의 빠진 날개처럼 가루가 펄펄 나리는 곳에 유폐의 삶을 살아가는 집안들이 바깥 어딘가에 묻혀있었다. 설원의 고립만이 절망과 낙천을 가르치려는 듯이 숙연했다. 경계 없는 밤을 넘어가며 담배 연기가 기차처럼 화적을 내뿜는다.
종국에는 룬도 지우스도 얼큰하게 취한 채 지우스는 소파에 뻗어누웠다가 춥고 허리가 배겨 안방으로 기어들어갔다. 저가 덮던 담요는 바닥에 누워있던 룬의 위에 걸어두고 왔다. 겨울철 거실에 우풍이 쉽게 스며들고 지우스는 추위를 잘 타는 생물이었다. 열지은 백주와 아사히 맥주의 병은 북국에 다녀온 나머지 속이 차가웠다. 새벽에 룬이 화장실을 오가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지만 지우스는 따뜻한 이불 속에서 나갈 생각이 전연 들지 않은채로 느릿하게 잠 속을 헤멨다. 집주인마저 주인 노릇의 저의를 저버리는 깜깜한 시간이 되고 날이 새었다.
룬은 새벽 일찍 외출을 했다. 지우스는 이날 소원했던 대로 머물렀다. 숙취와 잠기운에 절은 몸으로 반투명한 창의 나지막한 서광이 덕지덕지 묻었다. 집에는 한산하고 가시지 않는 음울함만이 감돌고 있었다. 사무실에 가볼까. 거실로 나가 두꺼운 바람막이 커튼을 걷고 베란다로 이어지는 큰 창을 열자 아연해질 정도의 살풍경한 눈더미에 이내 저밖을 걷는 다는 생각을 거두고 집에서 나머지를 뒤적이기로 계획을 정했다. 룬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키는 등유 난로 옆에는 긴 장화가 말라가고 있었다. 불당번처럼 난롯가를 차지하고 누운 개를 치워내고 지우스는 어제 녹취한 대화를 들었다. 룬은 몰랐을 테지만 그에게는 오랜 습관이었다. 뎁힌 아침을 먹다보니 뽀드득거리며 바깥의 날씨가 유동하는 소음이 간간히 귀에 들렸다. 삼 일을 지내며 이곳에선 도통 날이 밝지 않았다. 룬의 말대로 겨우내 이런 날씨가 계속 되는지 일조량이라곤 빛줄기 없이 퍼지던 아침의 잠깐이 다였다.
입구에 걸린 두꺼운 목줄 두 개를 사슬에 단단히 채우고서 지우스는 산책을 다녀왔다. 주머니에서 흘레 집을 나온 장갑은 왼쪽 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그는 현관문의 신발과 창고키가 걸린 옆에서 큰 장갑 하나를 주워들었다. 개들의 털이 사람이 털옷을 입은 것처럼 두꺼워 사냥견을 기르는 건지 개만한 덩치의 곰인지 품종도 용도도 분간할 수 없었다. 모자 둘레에 둥그렇게 털이 박힌 겨울옷을 감치면서 펼쳐진 뒤란으로 으슴프레하게 그을린 외곽을 한바퀴 돌았다.
발이 미끄러지는 탓에 같은 곳을 두 세번 디디다가 현관의 내리막길에선 눈 위을 바퀴처럼 굴렀다. 그는 둥글게 가래를 뿌리며 극적으로 멈추어 서자 무릎이 찡하고 울린다. 며칠을 쌓인 눈이 매끄럽게 얼어있었다. 바깥에 차가 들어오며 눈이 뽀드득 갈리는 소리가 났다. 룬은 나무라도 다듬고 왔는지 찻칸에는 전지가위와 톱을 비롯한 것들이 수선스러웠다. 무슨 까닭이길래 야생에 식목을 관리하고 온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지우스는 따로 묻지 않았다. 정원 모양내기는 대강대강 하면서도 눈에 부러질까봐 따로 봐줄 나무가 있다면 묘지나 마을 어른의 부탁이라도 받았을 것이 뻔했다. 마른 나무 가지들을 종부의 집에 실어다 놓고서 둘은 점심을 먹었다.
룬은 아마 동생이 도시에 있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준이 행방불명 되던 시기에 들어온 수주를 다시 훑어봐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그 이후 룬이 이곳의 일을 맡은 뒤의 몇 년 것 까지도. 워낙 이전의 일들이었고 룬의 부친이 기록을 남기는 일을 최소로 줄여 찾는 다는 건 쉽지 않았다. 룬이 은행에 들러 떼왔다는 자료들을 읽으며 지우스는 거실 한켠의 책상에 앉았다. 아침의 집중력은 희미해지고 난 뒤였다.
책상 옆에는 글이라는 책은 탄광이나 도시에 관련된 사무적인 서류를 제하고나면 소설 몇 권이 꽂혀있었다. 대하소설과 영문 소설과 손대지 않은 <총,균,쇠>가 있었다. 읽은 것과 읽지 않은 것, 선호하는 것과 아닌 것이 눈으로도 구분이 갔다. 칼 세이건이 성서처럼 꽂혀있던 과거 자신의 사무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사진집 몇 개가 있었다. 개중에 시간을 떼우는 용도를 넘어 소유인의 의의를 부여받은 유일한 물건이었다. 이 곳에는 딱히 할 일이란 게 없다. 룬은 일이 없을 때만 여기에서 지낸다고 했지만, 아마 그마저도 실내에서 보낸 다는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도시에서 향유할 수 있는 삶의 다채성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일들이며 한 세기 안에 간단히 몰락할 징조도 없는 일을 계속 해나간다는 건 여기에 평생을 돌아온다는 의미였다. 그를 무겁게 하는 것들의 곁에서. 어려운 짐들의 아래에서. 몇 년새 왜 황폐한 삶을 자처하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스러웠다. 아마 그 이상의 이해를 추구할 생각도 사그라든 채였지만. 남의 사정에 깊은 참견이라는 건 알았지만 지우스는 지난 몇 년간 그를 채워온 의문들에 물을 주듯이 손끝으로 갈증을 해소했다.
집안을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들었다. 지우스는 머릿속에 짚이는 대로 가족들의 얼굴이 담긴 액자로 다가가 잠금을 열고 뒷판을 뒤집어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역시, 주변을 말끔하게 청소한 걸 보면 이것들은 평소에도 룬의 손이 닿는 것들이라 이상이 있더라면 진즉 그가 알아차렸을 것이다. 액자를 치우고 이곳저곳을 달칵여 보던 지우스는 거실의 걸린 장액자에서 일말의 기대를 했으나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식탁이나 가구는 직접 목재를 베어 맞추고 칠을 해 만든 물건들이었고, 그가 앉은 책상도 그런 물건이었다. 특역한 양식의 미닫이 장은 검은 칠을 한 것으로 동네의 전업목장에게 선대의 누군가가 직접 선물 받은 것이었다. 목소리의 기미에서는 냉담한 것 이상도 이하도 없어 특별히 아끼는 모양새는 없어 룬은 사물로서 실용적이라는 이유로 그 가구들을 쓰고 있는 듯 하였다. 창고의 니스와 망치를 보면 간단한 목공은 스스로 하는지도 모른다. 부드럽게 빠져나오는 서랍은 뒤켠이 헐거워서 툭툭 내려앉은 판자가 걸렸다. 윗칸에 물건을 과하게 집어 넣은 것이다. 윗칸을 열자 잡다한 우편과 소지품들 아래로 손톱이 들어갈 만한 홈이 따로 나있었다. 지우스는 물건을 책상으로 덜어내고서 이중창으로 된 아랫면을 들추었다.
안쪽에서 색이 바라고 납작히 펴진 사진과 통장이 드러났다. 모르는 명의를 눈으로 읽으며 룬을 불렀다.
5
짧은 설국행을 끝내고 도시로 복귀했다. 떠나오는 날까지도 하늘은 못내 빛이 흐렸다.
ㅡ돌아가나?
ㅡ그래.
호칭을 덜어내고 난 뒤 둘의 사이는 한결 가벼워진 채였다. 돌아올때의 열차가 승강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예상컨대 승객은 그뿐일 듯했다. 룬은 막 나서려던 참이었다.
ㅡ룬.
가끔 소식이라도 전해.
라우룬은 답게 웃어보이곤 그의 넓직한 스타밴에 올라탔다. 지우스는 거의 기능하지 못하는 방한신발로 눈쌓인 보도를 제쳤다. 눈은 온갖 것을 파묻는다. 지나간 이들의 불확실한 모습에서는 실체가 잊혀지고 그 속에 속한 이들은 오직 그네들에게만 온전히 기억된다. 칸차가 말안장처럼 중대부가 함박 내려 앉은 습곡 몇 개를 지나자 산자락을 천천히 들어올리던 습기가 떨어져 나가며 다시 마을은 이전처럼 가라앉는다. 이 설선의 형태는 변화를 수용하는 것 처럼 보여도 결코 단번에 받아들이는 일은 없다. 차가운 창 밖으로 몇 겹의 풍경이 지나갔다. 기차가 이음새를 밟을 때마다 짐이 들썩거렸다. 돌아가면 회살 때려칠까. 좌석받이에 등을 기대며 떠올린 생각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기억을 되꺼내는 일은 마음 먹기에 따라 간단한 일이었다. 지우스는 사람이 간절히 떠올리고자 하면 어디까지 세밀하게 떠올릴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놀랄 지경이었다. 준에게로 매달 송금되던 계좌는 해지되어 있었고 마지막으로 잔액을 수령해간 해외계좌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조사는 골치 아파지며 더뎌져갔다. 룬과는 몇 번의 연락이 오가다가 끊어졌다. 그러는 동안 지우스는 대기업으로 이직하였다가 다시 새 일자리를 구했다. 육일 남짓 유급휴가를 보내고 와서 일상을 수복하지 못해서는 아니었지만 가끔 언젠가는 이렇게 될 일이었다는 말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역시 룬에게는 아저씨 같은 구석이 있었다. 그나 자신이나 그렇단 걸 부정하는 건 아니었지만 가끔 채널을 돌리며 튀어나오는 블랙누아르나 대하드라마에 관찰하듯이 몇 분을 할애햇다. 지우스는 새 사무실에 적응하고, 직무에 적응해갔다. 바쁜 것은 어디서나 매한가지였다.
사람 찾는 일을 하고 있던 중에 사무실 신입동료의 갤러리를 구경한 건 정말 우연이었다. 고등학교를 갓졸업하고 입사한 동료와는 사수를 맡으며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가 졸업한 학교는 이 도시에 위치했으며 지우스와 같은 생활권에 들었고 자주 교통으로 지나치던 곳이었다. 지류로만 보던 얼굴을 동료의 핸드폰 갤러리에서 발견했을 때에는 실제 살아있는 사람을 대면하는 기묘한 감각이 들었다. 가까운 이들 중에 지인이 있었다니, 등잔 밑에서 등불을 찾아낸 격이었다. 사진과 연락처를 받아와 신변을 대조하는 데에는 금방이었고 지우스는 마지막 날짜가 한참 전인 번호에 연락을 남겼다. 그러나 그 소식에 답신이 오는 일은 없었다.
회사 인근의 카페에서 전동료를 만나곤 했다. 그는 지우스와 같은 도시에서 일했고 다른 사사건건도 적지 않았기에 대강의 대화의 흐름은 굴러갔다. 가끔 찾아오는 단골도 아닌 이가 매번 트집을 잡는 건 카페에 민폐였으나 동료의 취향에 맞는 메뉴를 찾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ㅡ이거 시럽 들어간 거네.
당분을 질색하는 그는 몹쓸 표정을 지으며 음료를 내려놓는다.
ㅡ그래서? 연락은 받았어?
ㅡ몇 달까진 안 걸렸는데. 안 올 셈인가.
ㅡ연락처도 보냈다며. 알아서 하겠지. 아마 올 것 같진 않지만.
훑어 디스플레이를 띄운 아이폰을 내밀며 지우스는 제몫의 커피를 마셨다. 화면에 띄워진 지도를 읽는 동료에게 그는 설명하듯이 말했다.
ㅡ관측하러 갈 건데.
ㅡ사진 찍게?
ㅡ가끔 안하면 잊어버리더라고.
지우스는 어색한 손놀림으로 무게균형을 맞추고 대물간을 삽입하고 고정나사를 돌렸다. 이곳에 오기 전 연락하여 이전에 쓰던 가대장비를 받아온 것이었다. 셋의 자금이 차출된 망원경은 모임이 흐지부지 되는 사이 맡아두고 있던 것을 기억해내고 집안에서 끌어내 먼지를 털었다. 계절이 돌았을 때 찾아간 월동의 숲은 잠잠히 침묵하고 있었다. 멀리의 별이 촛불처럼 아스라했다.
그들은 야산으로 전몰성을 보러갔었다. 몇 십년에 한번 관측되는 천체행사는 전몰성을 관측하는 희귀한 기회를 동반하고 있었다. 막상 적당한 시간이 되고 나자 별무리 중에서 눈에 띄는 항성은 저각기 달랐다.
ㅡ씨 서팬트.
ㅡ그건 분명히 용골 자리였지.
ㅡ천랑성이라고.
전파가 없는 산등성이에서 후레시 랜턴을 번갈아 들며 다시 지도를 대조하며 소란을 피웠다. 룬의 등짝에 새겨진 써펜트의 꼬리가 어떤지에 대한 기억을 그는 떨쳐내려 했으나 그만큼 기억에 새겨지기도 했다.
북쪽지면으로 걸리는 천체열도가 느릿하게 숨을 쉬듯 추운 지방을 향해 기어갔다. 어슴푸레 기억 속에서 몇 개의 행성과 항성명을 담아올리던 입으로는 같은 위를 보던 테라스가 떠올랐다. 영하에 처박혀 내내 고개를 들 줄 모르는 습기와 광해 없는 대기의 몇 층 위에서는 천체들의 흔들림 없는 흔적이 있을 것이다. 눈이 혜성처럼 기인 꼬리를 내리며 검은 사방을 맴돌았다.
그림자와 빛이 8:2를 이루는 거무께한 밤하늘에서 흰 눈티들이 도드라졌다. 밤하늘을 가득 메운 축축한 검정을 보며 지우스는 거실에 걸린 파노라마를 연상했다. 불타면서 한없이 불멸에 가까운 불덩어리임을 알아도 저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것처럼 번쩍이다가 흰 빛을 넘어 창윤한 색상들이 그의 이마께까지 떨려 내려오고 있었다. 송별을 보내는 듯이 기나긴 느낌이 전송했다. 그렇게까지 둘러싸인 빛은 경건하게 까지 느껴지고 까만 어둠들은 잔요를 떤다. 성간물질들은 눈으로는 분간할 수 없는 세밀한 밀도차를 저들끼리 지니고 있는 것이다.
지우스는 별이 벗어나지 않는지 접안부를 확인하며 손으로 나사를 풀고 서쪽으로 모터를 돌렸다. 밤낮으로 밝은 곳에 살다보니 장비를 조작하는 법도, 이 위의 아득하단 사실을 잊곤 한다. 셋은 언제 다시 만날까. 눈 속에서, 도시에서, 아니면 다른 곳에서? 룬이 마을을 떠났을 수도 있다는 해동되지 않을 상념을 떠올리기도 했다. 이보다 남방에서는 선연하게 보일 뱀자리가 어렵사리 고개를 든 천구 위로는 에리다누스 강이 푸른 첨탑을 지나치고, 지평의 처마에 걸린 아카마에 보이지 않을 아케르나르까지 이어진다.
ㅡ그건 천랑성이라고. 내가 말했잖아.
짜증과 거만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무들의 잔가시가 뻗쳐 시야를 적신다. 지우스는 관측 기사를 몇 가지를 살펴보고는 커피를 홀짝였다.
겨울의 말로는 생각치도 않은 곳에서 날아들었다. 고장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역사가 되어있었고 그들이 머문 계절은 마지막 겨울이 되어 얼어붙는다. 준의 소식보다 룬의 것이 먼저 전파를 타고 몰려들었다. 눈이 녹은 뒤에는 구경거리도 모양조차도 되지 못하지만 비보는 눈이라기보다는 얼음이었다. 시효라던가 실종이라던가, 잊었던 계절에 쓰이던 말이 거슬러왔다. 너, 어떻게 살았냐, 예나 지금이나 그 한마디가 좀처럼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종결되지 않을 시효였다.
작업 bg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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