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의 기사/기린닭] 협박
새까만 닭은 제 악명을 공작새의 꽁지깃처럼 펼쳐놓고 히죽거렸다.
* 플랫폼 이사로 인한 재업(펜슬 내 기능 업데이트 되는 것 봐가면서 서서히 업로드하겠지요)
* 경고 : 신체적 고문 및 부상, 유혈에 관한 묘사가 있습니다. 세세하지는 않음.
* 캐해도 겸해서 쓴 짧은 글(해당 건은 처음 썼던 그대로 글 하단에 붙여둠)
* 이 글은 유료분이 88화였던 쓴 시점에서 쓰였습니다. 배경적으로는 4년치 사상지평 쓴 이래~동대륙 가기 전. 어딘가 설정 오류가 있다면 스무스하게 넘어가주세요()
* 논CP로 썼으나, 원하시면 CP로 보셔도 무관.
* 때때로 사소하게 수정할 수 있음.
깜깜한 새벽, 그믐이라 빛도 들지 않는 숲속에서 굉음이 터졌다. 험준한 산을 끼고 있어 산지기조차 없는 이곳은 가장 가까운 마을도 20km는 나아가야 있다.
‘그래서 여기까지 유인했지.’
햇병아리 견습들은 여우와 승냥이에게 맡기고 왔다. 저희 가운데서 애들의 신뢰를 가장 많이 얻은 승냥이에 기강 하나는 빡세게 잡는 여우까지 있으면 몰래 따라오는 놈은 없을 테다. 아니, 딱 한 놈, 의구심에 쫓아올 놈이 있기는 한데 새까만 닭과 움직였으니 도중에 포기했을 확률이 높았다.
지우스는 숨을 고르면서 와론이 저희 뒤를 졸졸 쫓아오던 끄나풀 셋을 몰아붙이는 모양새를 살폈다. 복면을 쓰고 있어 구분이 어렵지만, 몸놀림을 보아서는 기사가 맞는다. 말토 같은 놈들이 있기야 하지만 몇 년 전에 세력이 팍 죽었으니 그쪽일 것 같지는 않고, 자유기사가 아닐까 슬그머니 짐작해본다. 아무리 그래도 격기사 중에서 복면까지 써가며 정식 임무를 하달받은 이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건 명예롭지 못한 일이니까. 단순히 그렇게 믿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아냐, 격기사 중 켕기는 게 있는 놈이 있는지는 달잔 님이 확인하시기로 했다. 그건 내 몫이 아냐.’
“고개 숙여~.”
사고의 타래가 다물리기 직전에 태평한 목소리가 끼어들었고, 지우스는 대번에 몸을 낮췄다. 론누다. 머리 위로 쌔액 하는 소리가 멀어지기가 무섭게 땅에 손을 짚은 그대로 몸을 뒤집어, 뒤에서 접근하던 놈의 턱주가리를 걷어차 날렸다. 휘유-. 짧은 휘파람 소리. 어금니가 꽉 다물렸다. 저 미친 쌈닭. 알면서도 저랬을 거다.
“서서 조는 줄 알았다네, 기린.”
“헛소리할 틈 있으면 마저 정리해.”
“해?”
“…해줘.”
“예이예이~. 하여튼 예나 지금이나 싸가지 없기는 똑같지.”
자유기사의 전투력은 격기사에 비해 들쑥날쑥한 편이다. 실제로도 그렇고 지금 이 셋도 그냥저냥 평균적인 정도에 그친다. 그러니 멀찍이서 척후만 맡았겠지. 거기까지 예측했지만 굳이 부득불 닭을 끌고 왔다. 첫째, 아무리 만만해도 저 혼자서는 다 대 일 전투가 벌어지면 상처 하나 없이 멀쩡히 되돌아갈 수 있을 확률은 백 퍼센트가 아니다. 둘째, 기동성에서의 문제가 있다. 최소 수면시간 확보가 절실한 판국이니, 저 녀석의 론누라도 써먹어야 했다. 셋째, 슬슬 새까만 닭의 성질머리를 풀어주지 않으면 엉뚱한 데에서 폭발할 위험이 있었다.
그를 데리고 온 것은 분명 옳은 선택이었다. 복면의 셋은 어쨌거나 와론을 상대로 치명상은 입지 않은 채 대치하고 있으니까. 전력이 아니긴 하지만 저 정도면 나쁘지 않은 솜씨다. 그러니 저희 쌈닭도 희희낙락 합을 주고받고 있지 않나. 아니, 이건 너무 교관으로서의 생각이다. 특수 2기를 맡으면서 자꾸 이런 쪽으로 생각이 튄다.
숨도 심박도 얼추 돌아왔다. 지우스 역시 자세를 잡고 와론의 등을 맞대고 섰다. 뒤에서 쿡쿡 웃는 소리가 투구 안쪽에서 반향을 일으키며 울렸다.
“죽여도 괜찮나?”
“아니.”
처음부터 죽일 생각도 없던 주제에 저리 묻는다. 두통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꽉 채워서 4년을 알고 지내며, 새까만 닭의 ‘기사사냥’에는 모종의 판단 근거가 있음을 확신했다. 아무 기사나 닥치고 죽이는 놈이었다면 벌써 토벌대상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고, 무엇보다―.
‘누군가의 유품을 그렇게 품고 다니는 놈이 쾌락주의자 살인귀이긴 어렵지.’
복수심을 가지되 거기에 파먹히지 않는 정신은 가히 기사의 귀감이기까지하다. 당사자에겐 죽어도 말할 일이 없는 생각을 구겨 접으며, 눈앞에 짓쳐들어온 공격에 집중한다.
지금 여기, 서 있는 이는 교관이 아니고 한 사람의 기사.
숲 한 귀퉁이를 날려 먹고서 전투가 끝났다. 결과는 말할 것도 없었다. 세 놈을 묶어놓는 와중에 옆에서 새까만 닭이 조잘거리는 걸 듣는 게 오히려 더 곤욕이었다.
“굳이 그렇게 번거롭게 묶지 않아도 내 창대에 팔다리를 끼워서 부러뜨리면 그만이지 않겠나? 그게 더 쉬워.”
“제발 입 좀 다물어...주지 그래.”
투구 안쪽에서 쏘아보는 기색이 느껴져 어미를 수정한 지우스는 묶여있는 한 놈의 나이프 홀더에서 단검을 꺼냈다. 복면 위로 드러난 시선들에서 엷은 두려움이 읽혔다.
“왼발, 왼발, 오른발. 맞지?”
진각을 내디딜 때 쓰던 발이 순서대로 나왔다. 아킬레스건부터 자르고 가자. 이건 안 죽어. 제가 툭 내뱉은 말을 들은 와론이 유쾌하게 웃었다.
“이래서 네가 재밌다는 거야, 기린.”
지루하지는 않겠네. 그 뒤로 이어진 흥얼거림을 배경음 삼아 심문이 시작됐다.
기사급이 되면 회복력도 괴물 같아서 고문으로 정보를 토하게 만들 때는 무력화는 시키되 죽지 않는 선을 잘 알아야 했다. 행인지 불행인지 담청색 기린의 기어스는 ‘직접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해서는 안 된다’―불살不殺의 맹세이기 때문에 죽이지 않고 무력화시키는 방법에 관해서는 빠삭했다. 그렇지만,
“어휴, 그렇게 칠 거면 내가 치게 하는 건 어떤가? 벽공 정말 약하게 하면 죽진 않아. 갈비뼈는 좀 나가겠지만? 숨이 붙으면 되잖아? 나 그런 거 잘해.”
“거길? 굳이? 1mm라도 잘못 가르면 죽는 곳을? 야, 기린. 거긴 내가 막타 칠 때 찌르는 데다?”
“나서지 말라고 ‘부탁’까지 해줘서 꼼짝도 안 하고 있지만, 기린 넌 정말 무르다네. 거기선 과감하게 찔렀어도 괜찮네만. 2cm쯤 날붙이 들어가도 안 죽어. 내가 해봤어. 정 불안하면 꽂아놓던가.”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문 놈들을 부러뜨리고 패고 가를 때마다 오만 훈수가 쏟아졌다. 겁박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해도, 저놈의 혀 차는 소리며 태평한 톤으로 그렇지 못한 내용을 내뱉는 새까만 닭 덕에 포로들은 저보다도 ‘기사사냥’의 새까만 닭에게 단단히 겁을 먹었다.
별수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타인이 기감으로 느끼는 저는 사상 지평으로 힘을 봉인 당한 덕에 와론보다 몇 단계 아래일 테니.
윽박지르던 것을 멈추고 몸을 돌려 와론을 보았다. 투구 아래에서도 느껴지는 비릿한 미소. 뭔가 일을 치긴 하겠지만, 사고는 아닐 것 같다. 지우스는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됐어, 기린. 그거 아나? 내가 이런 꽉 막힌 놈들을 좀 잘 아는데―”
헐겁게 쥐고 있던 론누가 기사의 동체 시력으로도 따라잡는 게 고작인 속도로 휘둘리며 한 놈의 옆구리에 박혔다. 절묘하게 주요 장기는 피한 위치였다. 딱 옆구리만 뚫린 녀석이 억, 억 죽는 소리를 냈지만 새까만 닭은 제 악명을 공작새의 꽁지깃처럼 펼쳐놓고 히죽거렸다.
“―이렇게 아작내놓으면 그 무거운 아가리를 열더라고. 열이면 열, 스물이면 스물.”
“그러다 죽으면.”
“정말 날 못 믿는구먼. 내가 기사 한둘 죽여본 줄 알아?”
그래도 정보 뽑아내는 일은 안 해봤겠지. 지우스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꾹꾹 삼켜가며 옆구리에서 피를 쏟는 놈 바로 앞에 다가가 상처를 눌러 쥐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에 상정한 분위기는 아니지만, 어쨌건 저놈들도 슬슬 사태 파악은 했겠지.
“정보 안 내놓으면 가장 고통스럽게 죽게 될 거다.”
뭐, 내놓더라도 어쨌든 죽겠지만. 마지막 말은 입안으로 씹어 삼켰다. 어쨌거나 저의 기어스는 ‘직접적으로’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니까. 병아리들을 인솔하는 중인데, 굳이 위험한 불씨를 남길 이유는 없다. 새까만 닭이 오늘 새벽을 함께한 가장 큰 이유는 지금 이런 제 꼴을 구경하고 싶다는 거겠지. 이 정도의 먹이로 한동안 얌전해진다면 남는 장사다.
(사족)
불살의 기어스이기 때문에 오히려 무력화 및 제압에는 통달했을 것 같은 지우스, 기사사냥으로 다져진(...) 여기까지 하면 사람이 간당간당하게 살더라~하는 와론. 둘이서 합심해서 고문해서 정보 털면 쩔겠다; 하는 단순한 발상에서 시작한 글.
별개로, 담청색 기린의 기어스가 '직접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해서는 안 된다, 이기 때문에... 지우스가 죽이지만 않으면 뭐든 해도 된다는 해석을 하고 있다면, 이 친구가 곧잘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일에 필요할 시, 정말 지체없이 고문이고 뭐고 죽지만 않는 선에서 뭐든 해낼 것 같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가끔 보면 급발진 하는 게 보여서...
특수1기 이후 2기 창설하게 된 이유가 견습을 끼우니까 기사들이 좀 신중해지더라~ 였던만큼, 인솔기사들도 지금 어딘가 본인 성질머리 죽이고 눌러둔 구석이 있지 않을까 싶고... 지우스도 거기까지 사상지평 각 세우는 애가 아녔을 텐데, 병아리들 목숨 달리니까 냅다 안전패 꺼내려고 하는 거 아닌가...싶고.
와론 역시 이것저것 좀 쓰고 싶은 게 있어서 여기에는 말을 아끼지만, 호전적이고 강자와의 싸움을 즐기는 건 사실이지만 기사사냥 그 자체에는 나름의 룰이(아마도 목걸이의 주인 씨가 관계된) 있다고밖엔 생각이 안 되다보니...이렇게 흘러갔음. 지우스를 재미있어 하기는 할 것 같고? 너 싸우는 거 안 좋아한담서 기사는 왜 했대? 하면서 조잘거리는 닭과 옆에서 시끄러.oO(시끄러) 하는 기린 같은...구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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