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의 기사&애늙은이

[잔불의 기사/기린닭] 역전

"지금!"을 돌려주는 와론.

* 잔불의 기사 146편 이후의 어느 시점을 멋대로 날조(휴재 기간 중에 쓰임)

* 대사 돌려주기는 오타쿠 국룰 아닌가요

* 이 글의 설정은 싸그리 팬피셜입니다

* 논컾 기린닭을 상정하고 쓰였으나, CP탈부착은 자유롭게 해서 읽으셔도 됩니다.


무대 위에서 사라지는 것은 거시적인 영향력을 포기한다는 선언이었지만, 동시에 다음 수를 노리기 위해 판 자체를 갈아엎으려는 밑작업을 물밑에서 해내겠다는 무언의 선택이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읽어 전달하지 못한 내용을 받아들여 줬을 것이며 또 누군가는 무지 안에서 탄식했을 거다.

실패라는 딱지를 움켜쥔 무대 위는 초토화 되어 너덜너덜한 폐허가 되었다. 그 자체가 노림수이며 도박이다. 이미 모든 상황이 상대가 상정해 잘 얽어놓은 덫 안이었으므로, 저희가 다시금 승기를 잡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얼마 없었다.

아주 작은 불씨라도 살아만 있으면 되살아나 거대한 화염이 될 수 있다. 그렇게 타오른 불길은 늘, 걷잡을 수가 없기 마련이다. 역사를 보아도 몇 번이고 반복된 일 아닌가.

담청색 기린은 몸을 숨기는 사이 새까만 닭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사상지평 실험 건을 비롯한 여러 이유에서 지우스는 기사 서임 후 중앙을 떠날 일이 거의 없는, 어찌보면 현장과는 동떨어진 경력을 쌓아왔었다. 그런 그가 철저하게 중앙의 지원이 끊겨 오로지 몸뚱어리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칠 일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새까만 닭은 이론과 실전은 다르다며 이죽이면서도 의외로 인내심 있게 이것저것 가르쳤고(비록 냅다 절벽 아래로 던지는 식이었지만), 더는 그의 상사 역이 아니게 된 지우스는 기싸움 하는 일 없이 순순히 제게 없는 것을 배워나갔다. 덕에 괘씸하단 말은 배로 들었다. 이럴 수도 있으면서 저를 그렇게 구박했던 거냐고.

새까만 닭은 여전히 기사라는 작자를 믿지 않는다. 저에게도 결단코 온전한 신뢰를 보내는 것은 아닐 테다. 제가 격기사인 한에야. 그렇다면, 어쩌면 그는 그 자신도 한 구석으론 믿지 않는 건 아닐까. 지우스는 그렇게 짐작은 하되, 판단은 미룬다.

새까만 닭이 툭툭 던지는 말 모서리는 이제 윤곽이 둥그름해져 그의 론누처럼 마구 찔러대지 않게 되었다. 그 변화를 눈치챘을 때, 표정을 숨길 이유가 없어 고스란히 드러낸 감정을 읽은 그가 어이없어하며 던진 말이 있다.

“어디의 괘씸한 새끼가 내 눈 안 닿는 데서 함부로 약속을 깨려나, 하고 맘 안 졸여도 되잖아. 너 지금 나 없으면 닷새 안에 죽는다에 한 표.”

“그건 그렇지. 그 점은 늘 감사하고 있다.”

“아, 아아―. 재미없어.”

너무 순순해져서 재미없다고, 모닥불에 잔가지 몇 개를 더 집어넣고 불을 뒤섞는 새까만 닭은 그대로 침묵했다. 편안하게 녹는 고요함 속에서 담청색 기린은 생각한다. 현 시점에서 새까만 닭이 어느 정도 테를 터놓은 사람이 있다면 그건 검붉은 하마님과 저일 거라고. 자만이라기보다는 건조한 사실로써.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까만 닭은 여전히 그가 요구해온 사상지평의 사용처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직구로 물어도 슬며시 떠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여서 기린은 각각 한 번씩만 시도하고 바로 캐묻기를 포기했다. 어차피 약속했던 처음부터 제가 짐작한 새까만 닭을 믿고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게 아니었나. 그 점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가까워져도 거기까지는 아닌 거다. 바뀌지 않는 부분에 매달려야 소용이 없다. 중요한 것은 담청색 기린에게 새까만 닭은 여전히 믿을 수 있는 기사라는 점이다. 그는 여전히 새까만 닭이 그 자신에게 부여한 긍지를 스스로 지키고 있음을, 그리하여 명예로운 자임을 안다. 그것으로 충분한 거다. 동기들에게 거는 기대와 신뢰하고는 또 다른 믿음으로.

소식이 닿지 않아도 그들은 의도를 헤아려줄 것이며, 무엇보다 이 도박의 핵심 중추가 무엇이든 해내리라고 믿는다. 그 녀석은 우리 기사들에게 필요한 인재다. 기사의 틀에서는 할 수 없는 것을 해낸다. 새로운 판을 짜 맞추는 건 그 애의 몫이었다. 그걸 위해서는 기꺼이 판 위의 말로 행동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여기, 새까만 닭과 담청색 기린은 판세를 뒤집기 위해 전장에 난입했다. 단 한 사람만 어림짐작했을 등장이다. 경악과 놀라움, 기쁨과 반가움. 아는 면면에 다양한 감정이 스치는 것은 한순간으로, 숨넘어가게 바쁜 전황은 해후할 틈을 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망설이지 않고 전장에 섞여 들어갔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야, 지금!”

새까만 닭이 외쳤다. 평소에도 혹은 다른 전투에서 등을 맞댈 때도 흔히 들었던 말이었으나, 지우스는 단박에 깨닫는다. 지금, 약조의 순간이 왔노라고. 이성은 아직 사상지평을 켤 만큼 몰리지 않았다고 판단했으나, 담청색 기린 지우스는 망설이지 않고 들어오는 공격을 무시하고서(예상대로 등 뒤에서 론누가 날아와 엄호했다) 손을 마주쳐 비틀었다. 끼리릭, 시간의 틈이 벌어져 법칙이 뒤집힌다.

지금, 여기서.

단 한 번도 실제로는 보지 못한 새까만 닭의 올라간 입꼬리가 보인 듯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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