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오월의 비
하마닭 힌셔와론
230820
*핏빛거미+힌셔+와론
*애늙은이 힌셔외전 스포
와론이 500년 전 핏빛거미의 제자로 나옵니다
힌셔가 무사히 수도 니젤로 귀환함
잔인한 묘사가 있습니다
오월의 비(吳越的雨)
스승의 피가 손에 가득했다. 핏빛이었다.
아직도 손의 감촉이 끔찍하다. 스승의 다리를 베어낸 것은 손이 아니라 손에 들린 하마턱이었으나 그노제스가 만들어 준 무기로 무언가 끔찍한 일을 해냈다는 감각이 도사렸다. 우리가 만났을 때 스승은 살아있었는데도 이미 수명을 다한 스승의 육체를 욕보인 듯한 기분이 들었고 실제로도 처형을 기다리던 사형수를 제대로 참수하지 못했다. 그건 마치 잡은 곤충의 사지를 하나씩 뜯어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수도로 돌아온 날 기사나 이름난 정치인과 지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사저에 모여 응접실과 거실을 가득 메우고 심지어는 열린 창문 너머까지 다들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승전보를 전했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얼굴은 더러는 새파랗게 질리기도 했다. 그들 사이로 사라지는 빨간 투구깃을 보았다. 와론은 사람들 틈에 섞여 이야기를 듣다가 환호와 충격에 휩싸인 이들 사이로 건물을 빠져나갔다.
가져온 스승의 머리는 광장에 걸렸다. 토벌전에 참여하지 않은 기사도 많았고 핏빛거미가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수도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지금의 기사들의 업적을 확실히 보여주는 일이었다. 작은 수국같은 머리통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간헐적으로 혈전이 흘러내렸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어차피 수도의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핏빛거미의 비뚤어진 표정 밖에는 보지 못한지 오래되어 그의 표정은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말 그대로 최후를 맞은 표정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온화한 날씨에 시든 수국 같이 그것은 상하기 시작했다. 늦은 오후 태양이 내리 쬐는 광장에 머리통 주변으로 파리가 날아다녔다. 도살된 가축의 고깃덩이나 다름 없었다. 광장 앞을 피해 다녔다.
와론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도시를 돌아다니다 저녁이 되어서야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가 멱살을 붙들고 울분을 토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담지 못하는 감정들이 소용돌이 쳐 바닥에서부터 서서히 목을 옥죄었다. 바깥에서는 불지 못할 폭풍이었다.
- 지금 네가 무슨 일을 한 건지 아냐? 스승을 베고 돌아오다니 제정신이냐고.
와론이 말했다. 그건 나 역시 같은 생각이기에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와론은 내가 스승과 함께 돌아올 줄 알았나 보다. 나는 끝끝내 와론에게 이렇게 말했다.
- 와론 우리가 이제 할 일은 이것이다. 너 역시 같이 감당해줘야 한다.
밤새 비오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차마 스승이 스스로를 사형대로 내몰았노라고 말하지 못했다. 스승이 와론 같은 기사들을 위해 악마기사가 되었다면 와론은 토벌전에 참여한 모두를 처단하려 할 것이 분명했다. 함께 밑바닥에 처박히더라도 와론마저 잃을 수는 없었다.
악마기사의 토벌로 기사들은 기실 황제에게 철퇴를 맞은 것이었다. 수도에 머무는 수많은 기사들이 싸우고 단련하고 생활하는데 쓰는 모든 비용은 여전히 황성에서 지원했다. 우리가 머무르는 집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기사들은 어느샌가 수도 안팎에서 수시로 결투를 벌여대는 폭력배가 되어갔다. 그들은 모험담과 영웅담과 같은 동화에 빠져 전장을 찾아다니는 광기 어린 집단이었다. 황제가 하사하는 녹을 수도 한복판에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마음대로 싸움을 벌여대며 낭비하는 모습이 시전싸움 같이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었다. 서로 강함을 겨루는 것이 젊은 기사들 사이에서는 유행처럼 번졌다. 스승은 그런 소동에 쉽게 스스로를 휘말렸다. 그러나 스승이 벌인 사건으로 수도에서 날뛰는 기사들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동을 걸 시기를 놓치지 않았다.
검붉은 하마라는 새로운 색을 받았다. 황제는 어느날 전령을 통해 이명과 그 이유만 느닷없이 보내왔다. 만나는 기사마다 축하를 보내왔다. ‘힌셔, 이명이 바뀌는 건 드문 일이라지.’ 그들에게 대꾸하고 싶었다. ‘이명이 사라지는 것이 더 드문 일이라네.’ 그러나 이젠 싸움을 거는 자들에겐 말을 삼갔다. 그 날 이후로 전혀 말을 걸지 않던 와론도 그 때만은 말을 걸었다.
- 검붉은 하마? 너 같은 새끼한텐 어떤 이명도 과분해. 너야말로 악마기사가 아닌가?
투구 너머로 경멸이 흘러 넘쳐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밤은 산지옥이었다. 저녁마다 산 끝이 주홍빛으로 붉게 물들어 활활 타올랐다. 짧은 일몰의 시간이 지나가면 밤이 되었다. 니젤의 밤기온은 그렇게 높지 않아 찬 몸에 습기가 달라붙어 끈적했다. 밤은 유일하게 스승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루 간 숨겨온 번뇌가 꺼질 줄 모르고 속을 지직대며 긁었다. 결국 떠난 것에 대한 고통이란 꺼트려지는 것이 아니었다. 천리의 죽음이라며 잊히는 것도 아니었다. 남은 이는 그 무게를 어떻게 짊어맬지 궁리하면서도 그에 대한 추모를 치르느라 번뇌를 버리지 못했다.
우기의 니젤은 높은 첨탑을 시작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어간다. 색색깔의 창문이며 지붕과 벽돌이 물빛 아래 감싸였다. 사방으로 산맥이 둘러싼 분지는 스승의 유지와 남은 이들의 기대로 잠겨 숨이 막혀왔다. 바랜 색의 벽돌로 지은 사저는 내내 공기가 밀폐되어 습하고 축축했다. 돌무덤 같은 건물에는 하늘이라고 부를 수 없는 비 온 뒤의 잿빛이 어디에도 있었고 어두운 낮에도 사람의 소리는 일체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밤이면 돌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와론의 악받은 소리를 들었다.
수도에도 스승의 묘지에도 스승을 추억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광장에 악마기사의 초상을 그린 경고문만이 마치 수배서 같이 붙어있을 뿐이다. 악마기사의 여덟개의 팔다리는 멀리 남쪽 왕국에 제각각 떨어져 무덤에 묻혀있었다. 그 중 무엇 하나도 들고 올 수 없었다. 황성에서 사람이 나와 사저관을 정리하도록 했다. 스승의 것으로 보이는 흔적들을 지우면서 또 손으로 죄를 짓는 구나 했다. 마치 스승의 무덤을 도굴하는 기분이었다. 그가 읽던 몇몇 귀중한 고서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스승은 병법서 같은 걸 좋아하곤 했다. 어렸을 때 와론이 나이에 맞지 않은 현학적인 책을 들고 신이 나 그를 따라다니곤 했다.
다시 입을 일 없는 옷가지들이 집 한켠에 쌓였다. 옷을 태우기로 한 날 뒷방을 보니 와론이 옷 하나를 만지작 대고 있었다. 적막하고 쓰라린 손짓이었다. 품이 내 것보다 큰 빨간색의 훈련복 한 벌은 차마 버리지 못했다.
와론은 어렸을 적에는 내게 라이벌 의식을 느꼈던 것 같다. 그건 와론의 상당히 개구진 구석으로 나를 이기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애정을 숨기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스승은 그런 와론과 닮아있었다. 그래서인지 둘은 사제라기 보다는 가족같은 사이였다. 어린 아이에게 어른의 다정함이란 참 잔인하다. 그들은 마음 가장 깊은 구석이 가장 가까운 이에게조차 내어주지 못할 정도로 어두워질 때, 그런 저녁에 어린아이를 찾는다. 그 다정이란 아이에게 뒷날 아침에 다가올 쓰라림의 전조 같은 것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아픔에 절여저 그것까지는 생각해주지 못한다. 그러나 어린 아이의 마음에는 의외로 넉넉하게 기댈 만한 공간이 있다는 걸 기대어 보면 안다. 조용히 그 품에 안겨서 훌쩍인 밤을 보내보면. 그 작은 가슴에 물이 고일 만한 공간이 있다는 것을. 와론이 스승에게 해준 역할이 그것과 비슷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언질도 없이 뒷모습으로도 자신이 할 일을 말해주지 않고 홀로 남쪽으로 내려가던 스승을 배웅한 것도 와론이었다. 지금도 와론이 없었다면 나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하루는 와론이 창문가에 앉아 있었다. 대로의 반댓편으로 난 삼층 창가는 스승이 즐겨 밖을 내다보던 자리였다. 그날 이후 와론은 투구를 벗지 않았다. 와론의 등 너머로 떠있는 청록의 별들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꺼질 듯한 별이 밝은 것들 사이에 존재해 무수히 많은 별이 떠 있었다. 그것들은 빛이 희미하더라도 먼저 지지 않고 밝더라도 나중에 지지 않을 듯 싶다. 와론의 너른 어깨 너머로 어두운 마을과 멀리 왕성이 펼쳐지고 끝에 자리잡은 밤의 산맥이 윤곽을 드러냈다. 수도의 입성하는 기사들에겐 성산으로 여겨지는 산이었다. 돌풍이 세차게 비구름을 산맥 저편으로 날려버렸다. 코 끝으로 밤의 공기가 들어와 와론의 투구 끈이 공중에 들렸다 떨어졌다. 조금만 더 자연광이 밝았더라면 사저 안도 밤의 푸른 색깔로 물들었을 좋은 날이다. 달이 없어 별이 잘 보이는 그런 밤이었다.
끝끝내 와론에게 이렇게 말했다.
- 우리는 슬퍼해선 안된다, 와론. 반역자가 죽은 건 기쁜 일이므로.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그러나 우리는 알았다. 수도의 모든 기사들이 기뻐하는 날은 우리의 장례일이었다는 걸. 우리 셋만은 저택에 틀어박혀 우리만의 나날을 보냈고 일과의 훈련 따위에 보람을 느꼈고, 우리보다 약했던 기사들을 지켜주는 일에 보람을 느끼며, 기사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에 보람을 느꼈다. 스승은 해가 지고 연인에게로 달려가는 나의 뒷모습을 기쁨으로 여기고, 와론은 어느 지붕 위에 올라 앉아 새까만 하늘과 하나가 되어 수도를 보며 어둠과 별들 사이에 묻히곤 했다는 것을. 그것이 우리의 축제였고 우리의 추모였고 평안이었으며, 내일 다시 목숨을 베러 갈지도 모르는 자들이 치르는 의식이었다. 그것이 있기에 우리는 살인자가 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생활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비탄을 품었다. 기사가 내일의 일을 잊는 날 우리는 그들의 몫까지 대신 슬퍼 해주곤 했다.
그러나 통곡은 하지 않는 돌벽 같은 우리의 감성과 달리 스승은 홀로 그 자리에 앉아서 내일은 기사를 구할 수 있겠지 하며 미소를 지어보이는 것이다.
그 미소만큼은 나는 늘 기억에 남는다. 스승의 핏빛 머리칼도 눈가에 진 흉터도 아닌. 오직 그런 미소를 짓는 자는 지금이라도 누구든지 내 스승이 될 수 있을 테지만
스승이여, 그 미소는 당신 밖에는 지을 수 없는 것이었소.
와론의 앞에서 스승의 이름을 꺼내는 건 허락 되지 않았으나 우리는 다시 말을 텄다. 와론의 속은 여전히 썩은 과일에서 새어 나오는 물 같이 부패해 있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통은 얇은 실 같이 흘러 감겨 심장이 뛸 때마다 안으로 파고들었다. 스승이 살아있다는 꿈과 그를 죽이는 기억이 반복됐다. 와론은 멍하니 깨어있던 내 옆에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스승은 오체가 분시되어 남부의 어느 왕국에 버려졌다. 잘린 머리는 광장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장터의 고기처럼 썩어갔다. 그건 무엇으로도 치유되지 않는 상실이었다. 우리는 아무 대화도 하지 않았다. 입 밖으로 먼저 말을 내는 사람이 지는 것이다. 실로 서로 겨누던 어느 대련보다도 숨막히는 대치였다.
황제는 사저에 감시를 붙였다. 하마와 핏빛거미 사이의 오고 간 수작(酬酌)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둘 뿐이 아닌 듯 하다. 결국 감내해야 하는 것들은 이런 것이었다.
일주기( 一週忌)를 기리기 위해 새벽 안개에 덮인 수도를 와론과 도망치듯 떠났다. 며칠 전부터 계속 되던 미행이 붙기도 전인 이른 아침이었다. 아마도 일년 전 같은 날 악마기사가 탄생했을 것이다.
스승이 묻힌 곳에는 가지 않기로 했다. 누구나 예측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승의 고향인 남부 도시로 가기로 했다. 기실 오랜 만에 둘이서 떠나는 여행이었다. 단단한 직물로 짠 망토는 밖에서 밤을 지내기에 적당했고 새벽녘에 내리는 찬 이슬을 막아주었다. 좀 더 어렸을 때는 야숙을 하면 와론과 편하게 엉겨붙어 잠들곤 했으나 이제는 나도 그도 추위에는 연연하지 않는 몸이 됐다. 수 년간 창과 쇠 따위에 혹독한 담금질을 해댔기 때문에 구석구석이 단단했다.
스승의 고향은 철이 나는 지역이었다. 쇠벽으로 온통 붉게 만든 도시는 소도시라 불리기엔 규모가 크다. 곳곳의 제철소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산은 푸르렀지만 심장에는 작은 철광산을 품고 있다. 광맥의 줄기가 뻗어나와 드러난 대지가 붉은 빛을 띄었다. 풍족하고 음울한 도시였다. 서풍에서 풀무질 냄새와 철냄새가 났다. 스승과 한 번 이곳에 같이 온 기억이 났다. 도시는 제철에 알맞은 곳은 아니었다. 척박한 북부와 달리 남부지역은 강수가 잦아, 이 부근은 하루에 한 번은 비가 내렸다. 우리는 산 속에 위치한 수도원에 스승의 영정을 맡겼다. 제대로 된 것은 아니었지만 수도에 걸려있는 전단지 보다는 백배 나았다. 그 순간에는 할 말을 잃었다. 그저 스승도 우리도 평안을 얻기를 염원할 뿐이다.
그 날은 스승이자 악마기사이자 핏빛거미의 기일이었다. 그의 넋을 기리는 건 내가 해야 할 일도 와론이 해야 할 일도 아니었다. 내년에는 이곳을 찾지 못할 것이다. 수도원의 대문을 나오는 한 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등 뒤로 저승이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스승과는 영별이었다.
스승은 분명 혼자서 몇 사람 몫의 불행을 담당했다. 처음에는 스승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종내에 나는 스승을 이해했기에 스승을 베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드밀어진 모함과 음모가 그를 해하려 해댔다. 그것 또한 겪어보니 알아졌다.
- 기사들은 뒤 따르는 것을 좋아하지. 앞에 서는 자에 대해서는 별로 알고 싶어 하지 않아 해.
스승의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우리 셋은 세상에서 사랑 받을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와론도 스승도 기사를 싫어했다. 기사들은 우리를 두려워 했다. 악마기사, 스승은 결국 기사들의 적이 맞았다. 기어스는 수많은 기사들을 살해했다. 기어스는 악마기사였다. 스승은 마지막까지 와론을 걱정했다. 와론은 기어스를 맹세하지 않고 버텼다. 그러나 그도 언제까지고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날 내가 스승과 나눈 건 또 한 번의 가벼운 대련이었다. 그러나 늘 필사적으로 스승의 앞수를 꿰뚫어보았던 모든 대련 중에서 유일하게 그의 눈을 마주보지 못한 날이기도 했다. 마지막 대련임을 알면서도.
잘라낸 사지와 시체가 널부러진 광경은 등 뒤로 서있는 기사들의 무리와 다를 것이 없었다. 왕성에서부터 함께 간 기사들은 그들의 위세와 위압감에 비해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이야 말로 스승이 거느린 군대였고 스승과 나 두 사람의 우군이었으며 누구보다 나의 사기를 북돋았다. 그들은 죽은 시체로 된 군대로 산 사람과 달리 이미 피의 값을 치른 전사들이었다. 스승은 제자보다 미리 남부로 내려가 목숨을 앗은 모든 자들을 자기의 편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핏빛거미는 혼자서 싸운 것도 기사들은 일대 다수의 싸움으로 명예를 어긴 것도 아니었다. 토벌전은 군대와 군대가 부딪힌 섬멸전으로 누구보다 명예로운 싸움이었고, 그 참상이야 말로 우리의 아군인 것을 둘 모두 알고 있었다.
스승이 떠나기 전 그 때는 정말 루놀에게 사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싸움에서 진 사람들은 모두 약자였고 나는 그들을 내팽겨 칠 수 없었다. 나야말로 모든 것을 힘으로 해결하는 지도 모른다. 나와 닮은 스승이 악행을 저질렀듯이. 어쩌면 내가 아니라 와론이 그 날 갔더라면 다른 길이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항상 마음이 쉽게 꺾이고 쉽게 나부꼈다. 그러나 무엇이고 일은 행한 뒤엔 돌이킬 수 없었다.
도시의 경계를 벗어나면서 한두방울 씩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멀리 가지 않아 빗줄기는 굵어져 소나기가 되었다. 은신할 곳이 없어 잔뜩 내리는 빗속에서 나무 아래에 섰다. 와론은 조금 떨어져서 비가 내리는 하늘 밑에 조용히 몸을 의탁했다. 와론은 눈물이 다 말라버린 자였다. 그는 지독한 일년을 보내면서도 끝내 눈물 한번을 보이지 않았다. 떨어지는 빗줄기가 와론의 얼굴을 적셨다. 와론은 투구를 벗어 가만히 하늘을 우러렀다. 실로 오랜만에 얼굴을 봤다. 그는 고스란히 비를 맞았다.
손에 들이치는 소나기가 차디찼다. 와론의 발치에 빗물이 고인다. 스승의 팔다리는 여전히 먼 곳에 있다. 와론은 마음껏 스승을 추모할 자격이 있었다. 그의 손에는 스승의 피가 묻어있지 않았기에.
와론은 어쩌면 몇 백년 뒤에 태어났어야 하는 지도 모른다. 혼란이 가라앉고 시대의 어려움이 잠잠한 곳. 그런 곳에서라면 와론도 행복하게 기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와론도 이렇게 빗속에서 통곡을 하며 기사가 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우리가 사는 흙탕물은 결코 가라앉을 수 없는 세속과 번뇌의 삶이었다. 잠깐은 투명해졌어도 시대는 다시 탁하고 혼란해진다. 기사들조차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 순간 이 세상에 그만이 나를 이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장에서는 세상을 고여버릴 듯이 비가 쏟아내렸다.
스승이여, 당신의 뜻이 너무 멀고 깊어 나는 가끔 이렇게 잠겨 죽소
나에게 맡긴 당신의 미소가 떠오르오 나에게 당신은 너무 많은 걸 걸었소
제자가 되어 스승을 행복하게 해준다면 그만인 줄로 알았건만 당신은 아니었나 보오
상승과 낙하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샌가 중심이 잡힐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흘러 이치로 갈 것인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것은 희생의 연속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이미 기사들이 밟고 선 땅은 당신의 색으로 물들어 이곳의 어디로 나아가도 여전히 그 안을 맴돌 뿐인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새로운 시대는 있다고 믿어야 한다. 스승의 가르침 중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었다.
힌셔는 돌아왔다. 그러나 거미는 함께 돌아오지 않은 채였다.
며칠 전까지도 함께 있던 스승은 그의 자리에 없었다. 기실 그의 자리조차 사라졌다. 힌셔는 그의 머리까지 들고 왔는데 그가 없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대체 넌 무엇을 하고 온 거냐, 힌셔.
- 이것은 너와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그는 내 어깨를 쥐고 들어본 적 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명예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힌셔가 들고 온 건 거미의 잘라낸 한 쪽 다리 같은 거였다.
그는 스승을 구하러 가기 이전에도 영웅이었다. 어디든 앞장서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스승을 구해오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승을 어느 이름 모를 곳에 묻어야 했다. 다녀오리라 하던 애상의 미소 그대로 스승은 죽어 매장되었다.
우기의 수도는 검은 불이 타오르는 지옥이었다. 늘 수도 밖에서 우기를 보내오던 내게는 몇 번 겪어보지 않은 계절이다. 돌로 된 벽은 비의 습기를 머금고 집안은 죽어버린 정적만 도사렸다. 그토록 즐기던 훈련은 재미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서야 그것들이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갈 데 없는 고역한 감정들을 풀어내기 위한 일이란 걸 깨달았다. 창대를 휘둘러 훈련장의 돌바닥이 조각 났다. 목숨을 건 대련은 한 때 정말 재미가 있던 것이었다.
대련장에 억지로 끌고 온 힌셔는 아무리 때려도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다. 힌셔는 이제 말하지 않은 자와는 싸울 수 없다고 했다. 해칠 수 없다고 하던가. 그러나 힌셔는 상대를 해치지 않는 명예 없는 싸움은 한 적이 없었다. 그날 이후 힌셔도 수도도 변해버렸다.
그딴 건 개나 줘 라고 속삭였다. 그 말에도 힌셔는 대답하지 않았다. 창대에 얻어맞은 머리에서 피가 흐를 뿐이었다. 나도 투구 속에서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어떻게 된 모양이다. 우리는 싸우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인데, 싸움을 하는 자들인데 기어스를 지키기로 결심했다니 수도의 모든 기사들도 다들 하루 아침에 돌아버린 모양이었다.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건 모든 일이 당연하게 여겨진다는 사실이다. 오늘 이곳에 스승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건 나 혼자 뿐이었다. 거리에는 스승이 걸던 문양이 여전히 걸려있고 훈련장에는 스승이 베어놓은 바닥이 여전히 패여있고 창턱에는 스승이 좋아하는 자리가 여전히 평평하게 닳아있고 스승이 읽다가 고민하듯 입가에 대곤 하다가 얼굴에 얹어놓고 자던 책의 끄트머리가 여전히 그의 입이 닿았던 부분이 구겨져 있는데 말이다. 어제까지 없던 악마기사만 탄생했다. 그러나 스승에겐 아무 명예도 남지 않았다. 저녁에 광장에 가 스승의 마지막 얼굴을 보았다. 스승은 웃음기가 사라져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힌셔는 그 후로 명예의 귀신이 되었다. 사람들은 힌셔를 외경했다. 더러는 힌셔를 이용하려 들었지만 그건 기사들은 아니었다. 수도의 기사들은 내가 본 것들 중 가장 더러운 족속이었다. 그들은 힌셔를 축하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우러러 마지않는 존재와 같이 살고 있었으므로 그가 신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기어스의 얘기를 듣고 나서야 대강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알 것 같았다. 바람이 거센 밤 창가에 앉아 그것을 생각해보았다.
나는 영악해 기어스를 맹세하지도 않았다. 기어스를 맹세하는 건 스승이 악마기사라고 시인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나는 힌셔 역시 영악하기를 바랐다. 이곳에서 살아남기를. 우리의 스승이 제단 앞에 불려가 도살 당할 운명인 것은 진즉 알 수도 있었다. 스승이 그것을 원했는가도. 힌셔는 스승의 제단 반댓자리에 자신을 올려놓으려 했다. 일개 기사의 반란을 제압한 자가 아니라 스승을 죽이고 명예를 세운 자를 자처하고 있었다.
결국 힌셔를 통해 전해들은 스승의 유지는 짧았다. 이것을 어찌하라 저것을 어찌하라 정치나 황성에서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말해주지 않고 오직 기사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마음이 좀 더 넓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모든 일을 다 끌어안을 수 있을 정도로. 기사는 비를 맞는 사람들이었고 내 속에서도 언제나 타닥대는 비가 내리다가 곧 장대비가 되곤 했다. 누군가는 시대의 물살에 떠밀려 간다고 하였지만 우리는 떠내려 가는 것은 아니었다. 셋이 지내며 비를 막아주던 방주의 한 편이 부숴져 이제 우리가 풍랑을 막아야 했다. 어느 누가 되었든 악마기사는 필요했다. 그러나 스승 외에는 그 자리를 맡을 자가 없어 스승은 물살에 떠밀려갔다. 비가 흘러가는 대로 그저 흘러갈 수 밖에 없었다. 먼 곳에 걸친 밤하늘을 보며 나는 스승의 복수를 다짐했다. 그러나 아직은 시기가 아니었다.
어떤 일이 어느정도 걸릴 지 정확한 기간을 가늠하고 나면 감내하는 일은 훨씬 쉽다. 딱 일년동안은 스승을 추모하기로 했다.
스승이 남기고 간 병법서를 뒤적거리다 한 페이지를 펼쳐보았다. 스승이 직접 전한 유언은 별 의미가 없었다. 의식하지 못한 새 그는 곁에 많은 것을 남겨두었다. 스승의 목소리도 그가 마음을 다해 우리에게 주고 가려 했던 것도 모두 기억에 남았다. 기실 기사가 되기 이전에 배운 것들은 전부 스승에게서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곳에는 남쪽에 자리한 두 왕국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한 왕국에서 이웃나라의 반역자를 도와준 왕족에게 반역자는 그의 친족이었던 왕을 죽임으로서 왕위를 선물했다. 그는 자신의 나라에서 아버지와 형제가 죽임 당한 자였다. 떠나온 조국의 왕이 죽었을 때 그는 복수할 시신이 없어 하루종일 통곡했다. 이후에 왕은 그를 위해 그의 조국으로 쳐들어갔고, 둘은 그 시신을 꺼내 시체가 썩지 않았음을 기뻐했다. 시신의 눈알을 빼내고 300번이 넘도록 채찍질을 하여 원한을 풀었다.
대국이 사라지자 이웃나라와 늘 전쟁을 벌였다. 원수지간인 두 나라 사람들은 같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폭풍을 마주치곤 했다. 그럴 때만은 그들도 살기 위해 힘을 합쳤다. 그것을 읽고 스승이 항상 읊어주던 병법을 떠올렸다. 사지에 몰린 군대가 이기는 방법이었다. '방법은 이것 뿐이다' 하는 마음가짐이다.
종종 대련을 할 때 힌셔는 멍하니 하마턱을 보곤 했는데 눈빛이 잠기어 어느 자하 속에 계속 머물렀다. 명예라는 괴물은 힌셔를 좀먹고 있었다.
약속한 일년이 지나고 스승의 기일이 다가왔다. 기일이라고 스승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힌셔는 예전에 스승의 고향에 간 일이 있다고 말했고 우리는 은밀하게 채비를 했다. 그곳의 흙에는 붉은 쇠가 섞여 있었다.
도시에는 조그마한 수도원이 있었다. 수도승들은 친절하고도 낯에는 현기가 어려있다. 이전에 힌셔는 수도승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현실과 한 겹 떨어져 사는 이들은 이 세상의 번뇌도 괴로움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힌셔는 그 곳에서 돌아온 뒤로 많은 면이 달라졌다. 정말 사람들이 말하는 영웅이라도 되어가는 양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곤 했다. 우리는 수도원에 스승의 넋을 빌어주기를 부탁했다. 부탁할 수 있는 건 넋 뿐이었다. 둘에게 남은 처절한 것들은 누구도 도맡아 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잔재가 우리 외에 세상 어디에라도 존재하길 원했다.
수도원을 빠져나와 한참을 걷던 발걸음이 한 걸음씩 서서히 멈춰섰다. 비가 오고 있었다. 어느샌가 뒤를 따라온 비구름이 소나기를 내리며 사방이 잠겨가는 소리가 들린다.
스승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런 비가 오는 밤이야 말로 기사들은 다 숨을 죽여 우는 법이라고.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날이라고. 비가 오는 모든 날에는 기사의 장례를 치러도 된다고 말했다. 아직 죽지 않은 기사들을 위한 제의의 날이라고 했다.
- 언젠가 기사를 그만 둘 건가, 스승?
그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너나 나나 태어나면서 부터 기사로 태어난 존재라고 했다.
싸늘한 빗줄기가 오랜만에 뼈를 시리게 했다. 투구를 벗어 한 손에 들었다. 스승의 기일이다. 스승에게 명복을 빌어줄 필요는 없다. 그는 이미 살아있는 동안 내가 자신에게 명복을 빌어준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스승의 눈은 그의 갑옷에 그려진 태양과도 같은 것을 담고 있었다. 그 원색들을 보며 나는 스승에게 위로를 받았고 그가 살아있는 것을 위로했다.
오늘 당신이 잠든 곳은 영원히 비가 내릴 것이다. 갑옷에서 핏빛의 물이 슬어 내릴 것이다. 발치에 고인 빗물이 흙에 녹물과 같은 붉은 색을 띄었다. 스승, 무쇠와 갑옷으로 된 우리가 비를 맞는다면 그보다 바보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 무쇠는 빗속에서 닳아버리니까. 그러나 당신도 힌셔도 나도, 우리 어느 누구도 검거나 붉기만 하고 푸르른 생명은 가지지 못하고,
스승은 이 마을에서 태어났고 비를 사랑했고 나는 스승을 사랑했으며 힌셔는 스승의 명예를 사모하므로, 비가 내리는 이 곳에 끝없이 유폐될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흐린 비구름 아래에 있는 무엇도 그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비는 결국 땅에만 존재한다. 구름 아래, 비가 오는 공간만이 우리 같은 인간들이 호흡하는 곳이다. 스승, 기사들은 저 높은 곳에 있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낮은 곳만을 찾아서 흘러가는 빗줄기는 핏기어린 땅바닥 아래로 가라앉았다. 스승은 말년에 오직 우리 앞에서만 미소를 지었다. 그 안에 담긴 애정을 이해했다. 스승이 짊어져야 할 숙명의 무게를 이해했다. 스승은 언젠가 스스로 도살장에 걸어갈 가여운 운명이었다. 엹은 미소를 지을 때면 사실 우리를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숙명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지독한 마음도 허공에 연무가 되어 하얗게 흩어질 뿐이다.
'방법은 이것 뿐이다' 하던 스승의 목소리가 또 다시 들린다. 그 소리가 사무치고 끊어져 온 숲을 울리고 산을 타고 넘으며 계속 됐다.
결국 스승은 우리와 같은 시대에 살고 있지 않았다. 같은 공간을 공유했어도 스승은 다른 시간을 살았다. 청출어람은 우리 중 누구의 소원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스승의 소망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방법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때는 알지 못하고 지금에야 때리는 빗줄기 같이 그 말이 귓전을 맴도는 거였다.
- 어디가?
- 죽으러 간다.
임무를 나갈 때면 우리끼리 종종 하던 농담이었다. 등 뒤로 손을 올려보이면 힌셔가 뒤에서 못마땅하게 바라보는게 느껴졌다. 스승은 그저 킬킬 웃으며 내가 멀어지게 내버려두었다.
마지막 날에 스승은 그런 농담 대신 굳은 얼굴로 나갔다.
걸음걸이마다 철커덕거리며 사라지던 핏빛거미의 뒷모습.
더 이상 스승이 아니어도 좋으니 영웅이 아니어도 좋으니 그 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이 마음 속에 맺혀 흘러내렸다.
OST - Samidare(五月雨)
*오월(吳越)
오나라와 월나라. 서로 적의를 품고 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10 원근계절
청춘학원물 와론지우 와론힌셔
12 Careless confort contact from one another 02
지와지. 눈을 감는 것은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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