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원근계절

청춘학원물 와론지우 와론힌셔

230815


하얀 손목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 시야에 담긴 세 걸음 앞을 걷는 사람. 아스팔트 위 아이스크림 자국.

한 여름 태양의 열기가 학교의 철문을 녹여버릴 듯이 이글댔다. 창문 밖으로 운동장의 골대는 누군가 찬 축구공과 아지랑이와 함께 흔들거린다. 에어컨을 튼 교실은 흰 반팔의 교복을 입기엔 지나친 냉기가 감돌지만 아무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한낮의 자습시간에는 종이를 넘기고 연필이 사각대는 소음이 교실을 채우고 이따금씩 하품 소리만 들려온다. 지우스는 졸음이 오는 몸을 세우고 기지개를 켠다. 풀고 있는 문제집은 진도가 나가지 않아 지루했다. 창밖의 하얗게 타는 풍경과 피부에 닿는 온도는 전혀 다른 것이어서 지우스는 멍하니 운동장을 보며 밖은 얼마나 더울지 가늠해본다. 아마 숨쉬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덥겠지. 1분도 지나지 않아 교실로 들여 보내달라며 후회할 것이다. 그러니 나가고 싶다는 의욕도 적극적이진 않았다. 교실을 감도는 느긋함은 천국이라고 하기에는 다들 식곤증에 빠져 넋이 나갔으니 참 어중간한 여름을 보내고 있구나, 지우스는 스스로의 별 일 없을 예정인 여름방학을 생각해보았다. 아니면 자신의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 손끝으로 잘못 건드린 샤프가 책상 밑으로 떨어져 교실 바닥을 굴렀다. 

도르륵 굴러 앞자리 의자 밑으로 들어가 버린 샤프에 지우스는 한숨을 내쉰다. 펜도 없으니 이제 뭘로 공부를 해야 하나. 아니, 필통에 하나가 남아 있던가? 사실 공부는 펜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일 것이다. 필통을 열 의욕조차 없어 고민하는 그의 옆으로 풉, 웃는 소리가 들린다.

지우스는 그게 누가 낸 소리인지 뻔히 알지만 굳이 옆을 보지 않았다. 반응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는 말이 더 적절할까. 당연하다, 같은 반이고 옆자리에는 한 명 밖에 없었지만 그와는 말을 섞은 적도 없으니까. 어쩌면 그는 자신 때문에 웃은 게 아닐 지도 모른다. 

샤프가 떨어지고 학생들이 끄덕거리며 조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교실에서도 별달리 웃을 일이 있을 수도 있지. 

누군가 쳐다보는 듯한 느낌은 자신의 자의식 과잉으로 여기기로 한다. 그는 소음을 무시한 채 결국 필통을 열었다. 비어있는 필통을 보며 몇 교시전 친구에게 볼펜마저 빌려줬던 것을 기억해낸다. 고작 샤프 하나에 볼펜 하나라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빈곤한 필통사정이다. 쉬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더라. 그냥 주워 달라고 할까. 학급친구라 해도 민폐를 끼치는 건 불편한 일이다.

따끔한 것이 팔을 찌르는 감각에 옆을 보니 샤프 한 자루가 내밀어져 있다. 끝이 금속으로 된 검은 샤프였다. 이번에는 누가봐도 지우스에게 내밀어진 것이지만, 그는 옆자리에 앉은 상대와 짝꿍이 된 그 날 부터 철저하게 무관심 원칙을 적용해오는 중이다. 그러나 샤프는 계속해서 팔꿈치를 쿡쿡 찌른다. 펜 끝은 무시하기에는 의외로 아팠다.   

지끈, 결국 지우스는 원칙을 깨고 팔을 찔러대는 샤프를 받았다. 옆자리를 쳐다보고 어색하게 고개를 숙인다. 호리한 체격에 하얀 교복 상의를 걸친 그는 펜을 내민 채로 자신을 보지도 않는다. 은회색 앞머리가 드리워져 눈을 가리고 무심하게 손에 쥔 책을 들여다 보는 중이었다. 역시 자의식 과잉이 맞다니까. 그럼 그렇지, 샤프 하나 빌려 쓰는 일은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다. 핑계도 사라져 지우스는 다시금 공부해 몰두해보려 노력했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샤프를 줍기 위해 몸을 숙였다. 이것 때문에 오늘 평탄한 학교 생활을 위한 원칙을 깨야 했지만 여름이라 그랬거니, 하며 자신을 용서한다. 저도 모르게 시야 끝에 걸리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책상 아래로 유달리 흰 두 다리가 보인다. 한번도 햇빛에 그을린 적이 없을 것 같은 하얀 피부가 적당한 곡선을 그리는 종아리와 얇은 발목을 감싸고 있다. 흉터 없이 매끈한 맨 다리 위로 둥근 무릎뼈가 튀어나왔다.  

그것에 넋을 놓던 지우스는 문득 자신이 너무 오래 책상 밑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급하게 몸을 일으키다가 몸을 살짝 부딪혀 덜거덕 거렸다. 아픈 옆구리에 손을 대어보는데 앉아있는 다리의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눈이 지우스를 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르는게 느껴진다. 그의 눈을 본 것은 처음이다. 

뭘 봐? 어딜 봐? 그는 별다른 말도 표정도 없다. 자신을 계속 보고 있던 걸까? 지우스는 그 곳을 벗어나 교실 밖으로 나갔다. 도망친거나 다름 없는 꼴이다.

이대로 영원히 자리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지만 지우스는 어쨌거나 다시 교실로 돌아갔다. 그는 쉬는 시간 내내 꼼짝하지 않은 듯 하다. 그건 드문 일이지만, 갑자기 옆자리의 존재감이 크게 느껴져 지우스는 애써 무시한다. 하지만 지우스의 시선이 어디를 향했는지 그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가 볼 수 있었던 건 지우스의 덥수룩한 정수리 뿐이다. 반응을 보아하니 그는 아무 관심도 없었는데 지우스 혼자 제 발을 저린 것이다. 창피함은 남았지만 거기까지 판단을 세우자 지우스는 약간의 침착함을 되찾았다. 나른했던 앞전 시간들과 달리 나머지 수업들은 어떻게 흘러간 건지도 모르게 지나가 어느덧 하교 시간을 알렸다. 그 때 즈음엔 지우스도 긴장을 풀고 주섬대며 가방을 챙겼다.  

[이봐,] 

옆자리에서 그를 부른다. 지우스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쳐다봤다. 순간 무관심 원칙이 머리를 스쳤으나 대답은 하지 않았으니 괜찮다. 왜 말을 거느냐는 표정으로 보니 그가 지우스의 책상을 가리킨다.

[그건 돌려줘야지.] 

아, 그가 일방적으로 빌려 준 펜이 아직 책상 위에 있다. 지우스는 그것을 건네며 짧게 고민했다. 고맙다고 할까?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펜을 받았다. 다행히 감사 인사는 필요하지 않은 듯 했다. 다시 무응답으로 일관. 서늘한 손이 서로 스치는 감각에 소름이 일었다.

그는 샤프를 대충 서랍 안에 챙겨놓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교복의 치마 자락에 덮인 두 다리가 드러났다 가려진다. 지우스가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그가 다시 말을 걸었다. 

[아, 그리고]

뭐지. 둘 사이에 할 말이 더 있을 리 없는데.

[구경은 즐거웠나?] 

그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지우스도 무시로 일관하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에 지우스는 잠에서 깨어난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부터 학교 가는 일이 꽤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아침의 저혈압은 그닥 건강하지 않은 그에게 흔한 일이라 그러려니 하지만 오늘은 심리적인 요인이 더해져 한층 피곤하다. 밤새 틀어놓은 에어컨에 코가 먹먹하다. 거울 속에 자신은 다크써클이 가득 내려와 초췌하고 기분이 정말 좋지 않아 보인다. 지우스는 여기저기로 뻗친 숲색 머리를 정리하며 방법을 모색한다. 학교가 아니라 병원에 간다면 어떨까. 결석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어쩌겠는가. 1학기가 일주일도 채 안 남았다. 

지금 다니는 집 근처의 고등학교는 다니던 중학교와는 꽤 떨어져 있다. 중학생 때 아버지와 이 동네로 이사 온 지우스는 남은 학교 생활 동안 버스로 통학하다가 고등학교는 집과 가까운 곳으로 다니기로 결정했다. 친구들과도 헤어져 거의 전학을 온 것과도 같았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고등학교는 막상 첫 학기가 시작되고 나서 큰 불편함은 없다. 그러나 별 일 없는 일상에 약간 심심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마을에서 학교로 가는 대로의 먼 곳으로 바다가 보인다. 아침부터 햇빛이 뜨겁게 달궈 열기가 가득한 도로를 느릿하게 걸었다.  

지우스는 등교하자마자 옆 반으로 향했다. 교실에는 이미 몇 명의 학생들이 무리지어 얘기 하는 중이다. 들어서는 교실 안은 에어컨 바람이 빵빵해 추웠다. 방학을 앞두고 학교에서도 모든 걸 풀어주는 군. 오늘은 어제의 교실을 교훈 삼아 파란색의 긴팔 후드 집업을 챙겼다. 방학을 앞둔 학생들에게서는 들뜬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 상황에 들뜨지 않는 건 자신 밖에 없다. 남은 방학이 조용히 다가오는 것만이 지우스가 유일하게 바라는 일이다. 지우스는 어느 무리에게 다가가 한 학생의 등을 툭 쳤다. 

[볼펜 내 놔, 나견.] 

[지우스? 아, 어제 빌려 갔지.] 

뒤를 돌아본 이는 노란 꽁지머리를 한 나견이다. 둘은 동아리에서 알게 된 사이다.

어라, 잃어버렸나. 

나견은 책가방과 책상서랍 안을 뒤져보다 옆에 앉은 나진에게 펜의 행방을 묻는다. 볼펜은 나진이 사용하고 있었다. 지우스는 한껏 귀찮다는 표정으로 펜을 받아든다. 

[빌려 갔으면 제때 줘.]

[왜? 무슨 일 있어?]

[하... 별 일은 아니다.]

[뭐야, 왜 저래.]

돌려줬으면 된 거 아냐, 나진이 지우스의 등 뒤에서 궁시렁 댄다. 나견이 느끼기에도 오늘따라 지우스가 유독 까칠하다. 그럴 만한 이유도 딱히 짚이는 구석이 없다. 지우스는 그대로 인사를 하고 자신의 반으로 가버린다. 그러고 보니 요즘 소문이 자자한 유급생하고 짝이 됐다고 하던가, 나견은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별 일이 아니라는 그의 말은 믿을 게 못 되지만 정말 무슨 일이 있다면 지우스가 먼저 찾아올 것이다. 나견은 복도로 비척비척 사라지는 그의 머리카락을 보다 고개를 돌린다. 

한편 펜 하나 때문에 어제 겪은 일들을 설명하는 것조차 끔찍해 자신의 반으로 도망친 지우스는 자신의 옆자리를 확인한다. 비어있지 않았다. 

의자를 꺼내 자리에 앉는 동안 신경은 온통 옆자리에 가있다. 방학을 앞두고 평소보다 비어있는 교실,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창가 자리의 햇빛이 눈부시다. 그에게 인사를 할까? 말을 건다면 사과가 먼저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자꾸 곁눈질 하는 지우스가 신경 쓰일 법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읽고 있는 책에 푹 빠져 지우스에게는 관심도 없는 것 같다. 

그의 옆자리에 앉는 와론은 한 살 위의 동급생으로 몇 주 전부터 학교에 나오기 시작했다. 여름 교복의 앞섬을 풀고 얼굴을 가린 채로 어느 날 부터 교실에 앉아있는 키 큰 학생에 대해서 당연히 학생들 사이에서 이런 저런 말이 돌았다. 그가 직접 밝힌 사실은 1년을 유급했으며 작년에도 이 학교에 다녔다는 것이고, 소문은 대부분 그가 남다르게 불량한 일을 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자리를 바꾼지 2주 가까이 되도록 지우스는 그와 한 마디도 나눠본 적이 없었다. 그는 성실하게 학교에 나왔고 수업시간에는 자리를 지켰으나 제대로 집중해서 듣는 것 같지는 않다. 지우스는 딱히 조용한 학교 생활을 바라는 소망을 가진 건 아니었으나 그가 와론와 엮이지 않기 위해 몇 가지 원칙을 세운 것도 사실이다. 그 이유는 소문보다는 구체적인 것이었지만, 어쨌든 와론은 소문 속의 무시무시한 양아치는 아니었다. 옆자리에 앉아본 소감으로는 그다지 신경을 거스를 것도 없이 평범한 학생이다. 

지우스는 옆을 흘끔 보았다. 그는 여전히 독서에 빠져있다. 이제까지 관심을 주지 않았는데 그는 매일 무언가를 읽고 있던 것도 같다. 궁금증이 일어 책의 표지를 본다. 

그가 읽는 건 책이 아니었다. 요즘 연재 중인 만화책이다. 

지우스는 쉬는 시간에 매점에서 나견을 발견했다. 복도에서 서서 그들치고는 꽤 오래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었다. 

[너 또 그거 마셔?]

[... 요즘 편의점에서 잘 안 팔더라고.]

[그래도 그렇지, 차라리 밤에 잠을 자라니까.]

[방에 에어컨이 고장났어.]

언제 쯤 고쳐지려나, 지우스는 손에 들린 고카페인 커피우유를 홀짝였다. 학교 매점에서는 종종 학업에 과도하게 시달린 학생들을 위해 이런 식으로 커피를 들여오는 편법을 부린다. 당분과 카페인의 절묘한 조합은 오늘 같은 날 더욱 달게 느껴진다. 불면증은 지우스와 나견의 쌍둥이인 나진의 고질병이다. 나견은 집에서도 야행성의 생활패턴을 가진 나진에 대해 투덜댄다. 종이 울릴 때가 되어서야 둘은 헤어져 각자의 교실로 돌아갔다.

돌아와 보니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교실에서 하기로 예정되었던 체육수업의 장소가 바뀐 모양이다. 지우스는 머쓱한 기분이 들어 체육복으로 갈아 입고 체육관으로 향한다. 학생들은 나무로 된 체육관의 마룻바닥을 삐걱대면서 반으로 갈라놓은 코트에서 농구와 탁구를 즐기고 있었다. 평소라면 농구하는 무리에 꼈을 테지만, 지우스는 오늘 컨디션에 땀까지 흘리고 싶지는 않았기에 한 구석에 앉아있다가 양호실에 가겠다며 체육관을 빠져나온다. 교실로 향하는 복도는 적막하고 지우스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다. 차가운 시멘트바닥을 걷는 신발소리가 타닥대며 울린다. 간간히 교실 안에서 교사들의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북적거리는 체육관을 빠져나온 것 만으로도 울렁대는 속이 조금 가라앉는다. 

교실 문은 안쪽에서 자물쇠가 걸려 열리지 않는다. 아까까지는 열려 있었는데, 그냥 양호실로 가봐야 하나ㅡ지우스는 무의식적으로 안을 들여다 보았다. 

교실 안에는 누군가 창가에 서 있다. 와론이다. 

열린 창문으로 반투명의 흰색 커튼이 그의 뒤로 흔들렸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저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체육관에서 보이지 않았다. 창문을 타고 넘어 온 바람에 와론의 은색 머리카락이 어깨 너머로 사락댔다. 아래로 살짝 기울어 있는 콧대와 턱이 보였다.

역시 양아치라는 말과는 거리가 있다고, 그런 감상이 든다. 그가 왜 거기에 서 있는지는 알 수 없어도 말이다. 지우스는 교실에 들어가기를 주저했다. 인기척을 내자 와론이 뒤를 돌았다. 왠지 그를 방해한 듯한 기분이다.

그는 지우스가 서 있는 문으로 다가와 자물쇠를 풀어준다. 교실 문의 작은 창으로는 잠시 와론의 어깨 아래만 보이고 이윽고 드르륵 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그와 열린 문을 사이에 두고 마주쳤다. 와론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또 엿보기인가?]

[...엿보다니.]

[아닌가?]

[교실이잖아.]

그는 문을 막아섰다. 지우스는 비켜줘, 하는 제스쳐를 취한다.  

[뭐, 반은 농담이고.]

와론은 그가 들어갈 수 있게 몸을 옆으로 비켜선다. 교실로 들어가는 지우스의 뒤로 문을 밀어 닫았다.

[수업은 체육관으로 바뀌었는데. 못 들었나?]

그렇게 묻는 와론은 체육복조차 갈아 입지 않았다.

[...아니, 너야말로 교실에서 혼자 뭐해.]

그냥, 대답하는 목소리가 가볍다. 지우스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양호실로 갈 걸 그랬다. 와론은 창턱에 반쯤 걸터 앉아 엎드리려 하는 지우스에게 말을 이었다.  

[어짜피 빠진다고 찾지도 않거든. 그 체육.]

[뭐 하나 물어봐도 돼?]

그는 그러라는 듯이 턱을 추켜올린다. 지우스는 내심 궁금했던 것을 묻는다.

[학교는 왜 이제서야 나온 거야? 1학기 내내 결석이었잖아.]

[슬슬 출석일수가 빠듯해서.]

[그럼 2학기에는 계속 나오는 건가?]

[뭐, 그렇지. 왜? 자리가 불만이라면 담임한테 가서 말해보지 그래. 옆자리가 무서워서 공부를 못하겠다고 징징대면 바꿔줄 듯.]

그건 와론식의 농담인지 말하고 나서 웃는다. 

[됐어, 별로 무섭지도 않고.]

[그런 것치곤 아무 말도 안하지 않았나? 성격인가 했더니 다른 학생들하곤 잘만 이야기하고. 난 나한테 쫄아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너야말로 불편한 거 아냐? 어쨌든 다들 너보다 어리잖아.]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그러나 무언가를 잘못 말했는지 와론이 멈칫한다. 

[혹시 모르나 했는데 역시 아니었네. 나, 너보다 한 살 많은데.]

[...들었어.]

와론의 말투는 뻐기기 보다는 약간 어이 없다는 투다. 하긴 지우스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에게 반말을 하지 않는다. 그를 빤히 보는 시선에 지우스가 마지못해 말한다.

[...존댓말로 하라고?]

와론은 고개를 젓고는 반대편으로 돌린다. 

[아니. 이거 웃기는 놈이네, 됐다.]

창문 밖에서 부는 바람은 후덥지근 했다. 창가에 구부정하게 선 와론의 주변이 온통 옅은 색에 감긴다. 지우스는 왜인지 심박수가 올랐다. 

하늘은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선명한 파랑이다. 방학식 날은 물 흐르듯 다가왔다. 그 날 이후 와론은 수시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지우스는 지난 몇 주간 고수했던 무관심을 버리고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수업시간에도 상관않고 걸어오는 장난들은 초등학생 같이 유치한 것들이다. 와론은 수업시간에도 거의 교과서 뒤에 만화책을 펴고 읽고 혼자 킥킥 댔다. 도중에 웃기는 부분이 있으면 지우스를 건드려 보여주기도 했다. 유일하게 듣는 수업은 역사인 것 같다. 제일 재미없는 수업을 좋아하다니, 지우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매번 심심해 하며 놀자고 꼬드기는 와론에게 그는 무대응 원칙이라는 걸 새로 세운다. 그가 진심으로 귀찮게 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와론이 지우스가 상대해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아서 인지 지우스 역시 방학을 앞두고 마음이 풀어져서 인지 이 원칙은 거의 지켜지지 못했다. 시원하고 선생님의 편안한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오는 교실에서도 와론은 절대 졸거나 자는 법이 없다. 오후의 식곤으로 초토화되어 잠잠해진 학생들을 둘러보던 지우스는 거의 유일하게 깨어있는 와론과 눈이 마주치곤 했다. 그럴 때면 와론은 가끔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아 묘하게 느껴졌다. 

와론은 딱히 학교 안의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넌 2학년들 하곤 안 놀아? 원래라면 같은 학년이었을 거 아냐.]

[알긴 아는 군. 너무 스스럼 없이 대하길래 모르는 줄 알았지. 아니면 내가 너무 만만하던가.] 

말은 그렇게 해도 와론은 지우스의 태도를 이미 포기했다. 그는 2학년들의 틈바구니에서 몇 번 농구한 적이 있었는데 친한 사이는 아닌 듯 했다. 그 외에는 2학년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고 매점에서 마주치는 몇 명과도 인사정도만 나눈다. 그렇다고 1학년과 친하게 지내는 건 더더욱 아니다. 다들 와론이 무서운지 호기심으로도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활달한 편인 와론도 딱히 그런 벽을 허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반면 3학년에는 아는 사람이 있었다. 와론은 그를 가끔 찾아가는데 그게 작년까지 학생회장을 맡았던 힌셔였다.

[힌셔!]

[선배라고 불러라, 와론.]

힌셔와 만난 와론은 약간 들떠있었다. 와론의 그런 반응은 처음이라 전교생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는 유명인사와 꽤 가까운 사이 같았다. 

여름방학이다. 일주일 간의 짧은 휴식 후 보충수업이 시작됐다. 처음 며칠은 보이지 않던 와론도 이내 학교를 나왔다. 어느날 지우스가 등교했더니 오랜만에 옆자리가 채워져 있다. 그는 담임선생님에게 한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앞으로 보충이고 수업이고 빠진다면 또 유급하게 될 거라는 으름장을 놓았다는 얘기다. 공백은 언제 있었냐는 듯이 이미 지우스는 와론의 화법에 익숙해졌다. 

[쉬는 동안 뭐 했는데?]

[그냥.. 이것 저것? 놀러다니고, 넌 조금 탄 것 같은데.]

얼굴에 닿는 시선이 그를 구석구석 살핀다. 그럴 리가 있나. 지우스도 옛날 동네에서 중학교 친구들을 만나고 왔지만 그들은 더운 날씨에 거의 실내에 틀어박혀 있었다. 지우스의 동네에 있는 바다에 가자는 말은 서로의 방학이 끝나버려 계획으로 그쳤다. 일주일 간의 방학은 집안에서 쉬기에도 모자라다. 못 본 사이 달라진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하는 그와 오래 눈을 맞추는 건 어쩐지 어색해 슬쩍 눈을 피한다. 그의 피부야말로 어디서 여름을 보냈는지 모르게 여전히 잡티 없이 희기만 하다.  

학교에 나와봤자 와론은 성실하게 공부를 하는 것도 자리를 지키는 것도 아니다. 수업 종이 치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쉬는 시간만 되면 귀신같이 나타난다. 지우스는 그에게 끌려 매점에 갔다. 지우스도 그가 어디로 사라지는지 궁금했다. 아마 옥상이나 건물 뒤가 아닐까, 그러나 어디든 날씨는 밖에 머무르기에는 너무 더웠다. 방학 보충은 저녁 자습이 따로 없다. 둘은 서로가 사는 곳을 대강 알게 되었고, 방향이 같아 자연스레 함께 하교했다. 

잠깐, 이거 하루 종일 붙어 있는거 아닌가? 

홀로 고요히 자습에 빠져 있던 지우스는 문득 자각했다. 요 근래에도 심심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던가?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때 조차도 옆에서 얼러대는 와론이 있어 별로 그럴 틈이 없다. 이대로라면 방학 내내 그와 제일 많이 붙어 다니고 이야기를 한 사람은 누가봐도 와론이다. 지우스는 현사태의 심각함을 감지했다. 처음의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자신의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그가 와론을 멀리 했던 이유는 비단 소문 따위가 아니었다. 

와론이 학교를 나온지 얼마 안 될 무렵, 지우스는 밤에 시내를 지나다니는 무리 사이에서 그를 봤다. 학교에서 고작 몇 번 보았어도 그건 분명히 와론이었다. 같이 있던 이들은 지우스도 알고 있는 이 동네의 유명한 폭주족들이다. 훤칠한 은발의 체구가 눈에 띄었다. 그들 사이에서 와론은 검은 나시를 입고 있었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확 올라가는 입꼬리가 기분 좋게 웃었다. 지우스는 그들을 피해 후드를 쓰고 가다가 코너에서 다음 블럭으로 들어가버렸다. 

이야기 하는 모습이 퍽 편안해 보였지, 그들은 험한 짓을 즐기는 무리였으나 멀리서 지켜보기에는 좋은 모습이더라는 감상이 들었다. 그러나 그 후 와론과 옆자리가 되었을 때 지우스는 속으로 비속어를 삼켰다. 그가 자신의 학교 생활에 끼어드는 건 또 다른 일이다. 와론이 폭주족과 어울리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그를 그렇게 무시했을까? 답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보는 그는 성가시지만 참을 수 있는 정도고 나름 말이 통하는 구석도 있다. 그러나 그건 시내에서 보던 와론과는 다른 모습이고 그마저도 지우스가 우연히 목격한 일부에 불과하다. 말을 튼 후로도 종종 그런 속삭임이 억지로 올라왔다. 지우스는 가슴이 갑갑해져 교실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오며 물기를 털었다. 학교 건물은 ㄴ자로 꺾여있어 복도에서는 반댓편 건물을 볼 수 있다. 방학을 맞은 후에도 수능을 앞둔 3학년들이 각진 창문 안의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다. 와론은 요즘 힌셔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아마도 방학을 보내고 와서부터다. 몇 안되는 친구와 싸우기라도 한 건지. 지우스는 찬찬히 복도를 걸으며 와론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다. 그도 이렇게 복도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봐?] 

[아, 뭐어... 고양이?] 

의문문으로 말하는 게 누가 들어도 헛소리다. 와론식 농담. 그러고는 지우스를 두고 가버린다. 지우스는 정말 무언가 있나하고 바깥을 내다본다. 건물 밖으로 땅에는 몇몇 학생들이 걸어가고 있다. 지우스는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금발을 찾아낸다. 와론이 보고 있을 만한 사람은 한 명 뿐이다. 

말하면 복도 온다고 하던가? 지우스는 생각치도 못하게 창 밖으로 와론을 발견했다. 교사 옆에 붙은 작은 부속건물의 옥상 그늘 속에 와론이 드러누워있다. 복은 아니군. 호랑이였던 것 같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우연으로는 발견하기 어려운 장소다. 그는 혼자서 심심하지도 않은지 나무로 드리워진 그늘을 즐기고 있다. 흰 다리를 꼬아 까딱이는 모습이 여유롭다. 그저 주변의 풍경과 어우러져 여름의 일부인 것 같았다. 지우스는 건물의 창문 안쪽에 서서 그를 지켜봤다. 그것이 자신에게는 없는 모습이라 부러웠다.

쉬는 시간에 와론은 자리에 돌아오지 않았다. 집중할 수 없는 공부는 한층 더 지루했고 머릿 속에서는 계속 누워있던 와론의 모습이 반복된다. 지우스는 애꿏은 교복 셔츠를 벗어 편한 반팔 차림을 했다. 집중할 수 없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하지? 결국 집 앞 바다는 가보지도 못했다. 와론과 거리를 두고 지내던 태도를 이제와서 버린 이유는 자신에게 있었다. 그가 있어 여름방학은 생각보다 활기찼지만 그렇다고 해서 별 일이 일어나지도 아예 없지도 않다. 답답함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무언가 심장을 누르는 감각이 심했다. 지우스는 눈 앞의 문제집과 밖을 번갈아 보았다. 핸드폰을 들어 그에게 메세지를 보낸다. 

어디야.

보내자마자 1이 사라진다. 답변이 빠르다.

- 왜? 담임이 찾아?

나도 가도 돼?

- 어딘 줄 알고? 

그냥.

- ㅋㅋㅋㅋ 

- 와보던가.

지우스는 책상 위에 벗어뒀던 교복을 들고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너 선배들한테는 존댓말 잘하더라.] 

동아리 사람들과 있는 걸 본 모양이었다. 

[너야말로 힌셔 선배한테 반말하던걸.] 

너? 와론은 입가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뱉는다. 얇은 눈썹이 입꼬리와 함께 찡그려진다. 옥상의 회색의 콘크리트는 더웠지만 나무와 건물로 그늘이 져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매미들이 주우욱 늘어진 울음을 내었다. 둘은 벽에 기대앉아서 얼음을 까먹으며 빈둥거렸다. 말을 돌릴 줄 알았는데 그는 이 대화를 끊지 않았다. 

[힌셔는... 원래 알던 사이지. 어렸을 때 부터. 동네에서 매일 같이 놀던 친구라. 나도 힌셔도 외동이거든. 중학교 때까지는 가족 같이 지낸 듯?]

낮은 미성은 소년과 어른의 어느 중간이다. 

[그럼 지금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터는 예전 같지 않지. 보다시피 내가 이 모양이라서.]

와론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자라면서 멀어지는 건 많이들 그러지 않나.]

지우스는 다른 말은 붙이지 않고 그렇게 말한다. 그는 비어버린 말은 하지 않는다.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마치 누구의 눈 색이 더 진한가 가늠하듯이 들여다 본다. 그렇게 교실을 박차고 나간 이후로 며칠이 지났다. 하루의 반나절이 넘게 와론과 농땡이를 깠다.

솔직히 지우스는 와론이 왜 그렇게 까지 힌셔에게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고등학교에 와서도 어렸을 때 친구를 찾는 것도, 만사에 초연한 듯 구는 와론이 친구에 연연하는 것도. 사실 그와 가까워졌다고 해도 지우스는 그의 심리를 파악하는 시도는 관뒀다. 와론 같은 이를 이해하려 드는 건 바보 같은 일이다. 

담임에게 불려가 몇 번 잔소리를 들은 이후로도 지우스는 수업의 절반은 빠지고 있다. 어짜피 여름방학은 얼마 남지도 않았다. 오후의 볕은 따가웠다. 교무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는 건물 사이에서 힌셔와 붙어 얘기하고 있는 와론을 보았다. 둘은 어두운 건물 그림자에 반쯤 묻혀있어 남들 눈을 피하는 것 처럼 보인다. 무슨 대화를 하는 건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고 와론은 고개를 숙였다. 그가 거리를 두려고 하자 힌셔가 와론의 팔목을 잡아챈다. 그 뒤로는 건물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자리로 돌아온 와론의 입가는 약간 찢어져 있었다.

밤새도록 이어진 무더위에는 거의 잠을 못 이룬다. 

[솔직히 말이다, 나견.] 

지우스는 진지하게 말을 꺼낸다.

[이거 진짜 맛없다.]

그의 손에는 여느 때와 달리 초코우유가 들려있다. 커피우유는 단종이었다.

[뭐야, 좋아해서 마신 거 아니었어?]

[그냥 단 거는 별로 안 좋아하거든.]

그들 앞으로 와론이 지나간다. 지우스는 남은 우유곽 채로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견에게 인사한다.

[간다, 나견. 나중에 보자.]

나중에 언제 말인가? 늘 냉정하던 지우스치고는 서두르며 가버린다. 피해다니는 것 같던 유급생의 뒤로 달려가는 친구의 모습은 나견이 알던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매점에서 사이좋게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들고 둘은 1층으로 내려간다. 지우스는 아이스크림 봉지를 입에 물고 신발장에서 신발을 꺼내 신었다. 학교의 정문 밖을 나서기도 전에 이미 등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더위에 약간 현기증 마저 느꼈다. 그만큼 무더운 날이었다. 쨍한 색의 하늘에는 멀리 뭉게구름 몇 개가 켜켜이 쌓여있다. 뎁혀진 아스팔트에서 여름의 냄새가 난다. 바다가 보이는 대로를 지나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와론은 그의 앞을 걷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이 녹은 국물이 흰 손목을 타고 흐른다. 와론은 그것을 닦지 않고 거의 흘러내리기 시작한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걷던 지우스는 순간 그 손목을 잡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다가간다면 둘의 거리를 한없이 좁힐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손목에 흐르는 아이스크림을 핥으면 여전히 단맛이 날까? 아이스크림을 먹는 와론의 입 안은 이곳에서 유일하게 차가울 것 같다. 

와론이 고개를 들어 멈춰 서있는 그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고 와론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괜찮냐, 너?]

지우스는 망설였다. 와론에게로 두 걸음을 걷는 마지막까지 고민했지만 결국 손은 크로스백을 열어 그에게 휴지를 건넸다. 집까지 걸어가며 지우스는 얼이 빠져 자신의 아이스크림이 다 녹은 것도 몰랐다. 와론도 갑자기 정신이 나간 그가 더위를 먹은 건 아닌지 걱정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들은 지우스의 집 앞에서 별 말 없이 헤어졌고 지우스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날 저녁은 불안감이 머리끝까지 올라와 견딜 수 없었다. 지우스는 몸을 뒤척거리며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느낌에 이불을 걷어찼다. 자신은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놓쳐버린 건 아닐까? 아니면 그의 말대로 더위를 먹어 이상해진걸까? 

이제와서 인정해보려 직면한 감정이 혼돈 그 자체다. 시내에서 와론을 마주 쳤을 때, 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감정 하나를 속에서 끄집어낸다. 솔직히 와론은 그의 흥미를 끌고 있었다. 그가 웃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리고 처음 얘기를 나눈 날도 그래왔다. 그러나 그런 순간들에 감정이 섞인 건 언제였는지 지우스도 정확히 짚어내기가 난감하다. 아마 와론이 힌셔를 내려다 보고 있던 날. 그의 눈빛을 본 날이었을 것이다. 와론의 눈은 복잡한 감정에 가득 차있었다. 창가를 짚은 손이 와론답지 않았다. 말없이 힌셔를 부르지 않고 보기만 하는게 그 답지 않았다. 지우스도 그 때부터 와론이 학생들 사이에서 어떤 말이 돌고 어떤 친구들과 어울리는지 상관 없어진 것 같다. 더 이상 남들의 말이나 자신의 논리적인 판단에도 귀 기울이지 못할 정도로 와론이란 사람이 그에게 깊어져버린 것 같다. 

그 옆 얼굴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밖에 없었다. 와론의 맨 눈을 봤을 때만큼이나 보아서는 안 될 걸 본 기분이다. 집착이 아니었다 그건, 그 눈이 진득하게 담고 있던 건. 자신이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친구를 보는 눈빛이 아니라...

밤새 에어컨을 껐다 켜다가 지우스는 결국 리모컨을 집어 던진다. 비속어가 절로 나왔다. 도대체가 뭐가 되는 일이 없다. 그는 여름밤이 너무 싫어져 이제는 이가 갈릴 정도다. 춥던지 덥던지 하나만 하라고. 어중간한 여름 날씨에 화를 낸다. 

그와 와론은 일정한 간격을 지켜왔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에서 거리를 의식하는 건 지우스 뿐이었다. 그걸 지킨 것도 넘어버린 것도 혼자서 한 일이다. 둘의 관계가 증명해주는 보이지 않는 거리. 뭐가 됐든 마찬가지다. 이제 그를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없을 것이다. 숨길 자신도 되돌아갈 자신도 없다. 

모든 게 어려웠다. 지우스는 자꾸 애꿎은 머리만 헤집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뒷 날은 오후에 행사가 있어 학교가 어수선 했다. 

며칠 째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확실히 피곤했나 보다. 지우스는 오전 수업 시간 내내 졸았다. 와론은 오랜만에 교실에서 수업을 들었다. 오늘따라 그도 말을 걸지 않았지만 지우스는 그를 보는 것도 고통스러워 옆으로 향하는 시선을 차단했다. 쉬는 시간에 깨어보니 옆자리는 비어있다. 어깨 위에는 그가 덮은 적 없는 자신의 파란 후드집업이 걸쳐져 있다. 

오후에는 다들 운동장으로 향했다. 지우스는 학생들이 나간 교실에 한 박자 늦게 들어왔다. 와론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뒷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그는 자신의 실수를 두 가지 깨달았다. 하나는 와론은 남들이 다 가는 행사에 빠지는 습성이 있다는 거였고, 다른 하나는 그가 그렇게 교실에 남아 체육복을 교복으로 갈아입던 중이라는 것이다. 점심시간의 농구를 마치고 체육복을 벗은 검은 나시가 드러나, 넓은 어깨 위에 걸린 검은 나시끈과 체구보다 한참 오목히 들어간 허리선이 보였다. 지우스가 뒤를 돌아야 할까 고민하는데 그는 별다른 반응없이 태연했다. 셔츠를 걸치고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내려가며 단추를 잠근다. 

그는 교복 치마 밑으로 체육복 반바지를 빼내며 말했다.

[한 번은 실수였다 쳐도, 두 번은 좀 심하지 않나?] 

무엇을 말하는 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대놓고 볼 줄이야. 그러려고 책상 아래로 기어 들어간 거 아니었나?]

[샤프 주운 거였거든.]

와론은 눈썹을 까딱 치켜올렸다. 도발하는 듯한 말투에 지우스는 아니라고 딱딱하게 변명 했다. 그러나 그보다 하지 못한 말이 있다. 

[...미안. 고의는 아니었어.]

[고의인지 아닌지는 모르는 거지.]

[미안해.] 

우연이긴 하지만 사실 첫번째는 고의였고 두 번째는 실수다. 여튼 그런 건 지우스 혼자만 알면 된다. 와론의 도발은 정면으로 응수하지 않는 편이 낫기도 하고, 어쨌든 지우스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와론은 그가 순순하게 사과하는 게 의외라는 듯 복잡한 기색을 띄더니 그에게서 몸을 돌려 벗어놓은 옷을 정리한다. 

숙인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지우스는 또 다시 그 때와 같은 기분이다. 혼자 교실에 서 있던 와론을 보았던 날. 시내에서 웃던 그를 보았던 날. 창문 밖으로 힌셔를 내다보던 그의 얼굴이 겹쳤다... 지우스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바닥으로 내렸다. 와론이 지금 그를 볼 수 없는 게 차라리 다행이다. 

[사과는 됐고,] 

와론은 그렇게 말하면서 지우스에게로 돌아섰다. 심장이 눈치없이 두근댔다. 

[난 누가 날 보는 건 별로 안 좋아해서 말이야.]

그대로 그를 지나쳐 교실의 뒷문 밖으로 나가버릴 것 같다. 눈 앞으로 와론이 그에게 성큼 가까워졌다. 

그러나 와론은 계속 다가왔다. 앞머리에 가린 눈이 살짝 드러났다. 얼굴이 가까워지고 크게 뜬 지우스의 눈 위를 손이 덮는다. 입술 끝에 무언가 와닿았다. 

무의식적으로 내빼려는 몸을 억센 팔이 붙잡는다. 교복 셔츠 위로 보았을 땐 그의 팔 근육이 그렇게 강한지 몰랐으나 바이크 복의 흔적대로 희미하게 탄 자국이 있었으니 그것 때문인듯 하다. 그의 피부도 타긴 타는 구나, 했다. 입술에 닿는 감촉은 상상 이상으로 부드럽다. 얼어있던 지우스는 그 감촉을 따라 입술을 겹친다. 천천히 입술을 문대던 와론이 그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입술을 간지럽히며 혀가 타고 들어왔다. 그 후로는 약하게나마 어깨를 밀던 지우스의 손도 와론의 숙인 뒷목을 잡는다. 지우스가 어제 와론을 보며 느꼈던 그 충동을 와론도 눈치챘을까? 그때의 감정이 지우스에게는 너무 강렬해서 전해지지 않았다는 게 이상했다. 그러나 몰랐더라도 오늘 느낀 감정은 닿을 것이다. 와론은 눈을 감기던 손을 치운다. 그 온기가 눈가에 남았다.   

 

길었던 방학은 끝을 보인다. 남은 보충 동안 와론은 나오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은 그가 현장체험학습을 갔다고 대답한다. 성실하기도 하지, 무단 결석도 아니라니. 아마 그 바이크 동호회 친구들이나 만나러 갔을 것이다. 방학 동안 체험학습을 내고 쉴 수 있었다면 왜 굳이 보충 수업을 나왔는지 의문이다. 아니, 짐작가는 바는 있다. 

와론과 키스한 날 지우스는 밤까지도 붕 떠있었다. 아침이 되어서야 다시 학교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워 당황한 채로 집을 나섰다. 그러나 지우스의 걱정이 무색하게 다음날 옆자리는 비어있었다. 그 다음날도, 다다음날도. 방의 에어컨은 여전히 고치지 못했지만 의외로 더 이상 짜증은 나지 않았다. 잠을 자고 안 자고 하는 것도 거의 의식하지 않았다. 모든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게 남 일 같이 느껴진다. 일과는 딱히 쓸데 없는 감상도 들지 않았고 평탄하다. 와론에게 그가 먼저 연락을 할 수도 있었으나 그의 손에 맡기기로 했다. 그저 그 간의 일들을 파악해 보았다. 마음에는 남은 감정이 앙금 같이 바닥에서 잠잠히 맴돌았다. 어떤 기억들은 조용히 되짚지는 못했다. 그는 와론에게서 느껴지던 감정을 떠올린다. 그걸 무어라 이름 붙여야 할지 모르겠다. 

2학기가 시작되는 날이다. 정점을 찍었던 더위는 한 풀 숙여 초가을의 느낌을 내고 있다. 지우스는 와론이 이대로 영영 나오지 않는 건 아닌가 하는 골칫거리를 마음 한구석에 안고 방학을 마쳤다. 나 때문에? 힌셔 때문에? 무엇이 되었든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댄다. 신발장에서 만난 나진은 방학이 끝나고 민트색으로 염색했다. 나견이 얼마나 속을 썩었을지는 상상도 안 간다. 아무 위화감도 없이 교실에 앉아있는 와론은 긴 팔의 춘추복을 입고 왔다. 흰 셔츠와 담황색의 얕게 퍼지는 스커트가 그와 꽤 잘 어울린다. 그 날 이후 처음 보는 데도 와론의 태도는 이전과 변한게 없었다. 수업 전까지 비는 시간이 길어 둘은 다시 건물 옥상을 찾았다. 서쪽에서부터 부는 바람은 서늘하고 조금은 쾌적하다. 튀어나온 턱에 나란히 앉아 얘기를 나누었다. 분위기에 살짝 긴장이 감돌아도 역시나 와론은 그것을 무시했다. 평범하기까지 한 그들의 대화에 지우스는 살짝 안도했다. 와론은 문득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연애하자.]

[뭐?]

와론의 말은 뜬금없고 뜻 밖이다. 

[사귀자고.]

그 말은 지우스가 그의 입에서 나올 거라곤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것이다. 

[... 너, 근데... ] 

지우스는 차마 말로 그를 화나게 할 수 없어 끝을 흐린다. 적어도 와론의 말이 지우스에게 향하는 걸 이해할 수 없다. 와론이 그를 뚫어져라 보았다. 

[... 역시 그때 봤나?]

지우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이제 신경 안 써도 될 듯, 와론은 한마디로 일축하지만 어딘가 상처 받은 표정이다.

[그냥 내가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너 같은 녀석도 참 드물거든.]

솔직히 와론은 이 자식이 와론의 속내에 대해 반의 반이라도 이해하는지 모르겠다. 그는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와론에게 반말을 한 간 큰 녀석이다. 늘 한 손은 입가에, 한 손은 펜을 돌려대며 조그만 책을 붙잡고 머리통을 굴리고 있다. 그가 하는 어느 것도 그에게 항상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표현 방식이었다. 담담한 감정은 미숙하지만 깊고 색이 진했다. 그에 대한 감정이란 와론 자신조차도 애매하다. 자신의 솔직한 속내란건 무슨 수를 써도 다 들여다 볼 수 없지 않나. 다만 그 중 몇 가지가 확실할 뿐이다. 그 날 오전 수업 내내 끄덕대던 고개가 어깨에 닿아 와론은 옆을 보았다. 잠든 그는 아예 기울어져 자신의 어깨로 기대고 있다. 샴푸 냄새인가? 유연제 향기인가? 잘 모르겠다. 코 끝에 무언가 향긋한 냄새가 걸렸다. 와론은 그를 잠시보다가 책상에 엎드리게 해주었다. 감겨있는 눈 위의 속눈썹이 짙다. 눈가가 파랗게 질려 안색이 피로했다. 와론은 내리 보기만 하던 그것을 가만히 손끝으로 건드려보았다. 주변 학생들이 본다면 둘에 대한 말이 돌겠지만 그러면 어떤가, 

상관 없었다, 타인의 시선 같은 건,  

와론은 잠시 감았던 눈을 뜨고 그를 살짝 내려다 본다. 바람이 앞머리를 휘저어 이마가 드러난다.

[그래서, 대답은?]

지우스는 입술을 깨물고 말을 골랐다. 와론이 한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리는 없다. 솔직하고, 간단하고, 그라도 알아들을 수 있게 말했다. 

 

[...와론,] 

지우스가 입을 뗐다. 대답을 들은 와론이 낮게 웃는다. 

지우스는 그 미소를 바라보며 같이 초가을의 바다를 보러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아니 그러고 싶다고 생각한다. 

여름여름한 ost 잘 찾아들으시겠죠

작업곡인 소년만화 ost 두 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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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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