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의 기사/눌니아] 은하수
영원히 그 애의 그림자로 살겠다고.
* 투비로그에서 이전하며 재업
* 눌진X율니아, 눌니아 CP 글
* 은하류 및 율니아의 집안, 눌진의 과거사에 대하여 전폭적이고 적극적인 날조가 있음
!경고! : 정서적인 학대에 관련된 언급이 있음(직접적인 언행이 드러나지는 않음)
* 이 글은 최신유료화가 92화일 때 쓰여졌습니다(추후 뭔가 풀릴까봐 기록)
* 너희는 제발 엔딩까지 무사하길 바라,,,
* 글 맨 밑에는 사족이 붙어있습니다(쑻)
눌진이 은하수를, 밤하늘을 올려다본 것은 율니아의 부하가 된 이후, 그러니까 그 집에 숙식하는 문하생이 된 후의 일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나무꾼에게 있어 몸은 가장 큰 자산이었고, 산은 해가 빨리 떨어진다. 삽시간에 어둠에 잠긴 산은 위험하기 짝이 없으므로 눌진은 해가 가라앉는다 싶으면 발길을 재우쳐 마을로 내려가곤 했다. 하늘이 깜깜할 때는 불을 밝히고 도끼날을 확인하고 무뎌지면 다시 가는 등 내일을 준비했기 때문에 별을 볼 생각 따위는 하지 못했다. 더 정확히는 하늘을 올려다볼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는 게 옳다.
은하류의 문하생이 되면서 생계의 걱정을 꽤 덜었다. 문하생이라는 이유로 숙식마저 받은 것만으로도 남는 장사였는데, 해온 나무를 정기적으로 사들이기까지 해주었다. 거기에 그 은하류의 집안과 연이 닿았다는 것만으로 눌진 자신에게 보장되는 것도 있었다. 신원이 확실하다는 것은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어쨌든 이 모든 것은 눌진에게 있어서 부수적인 사건이었다. 제 키의 세 배는 될 직한 곰이 돌연 저를 덮쳐서 죽음이 목전이었던 공포마저 깊숙한 감사로 탈바꿈하는 만남이 거기 있었으니.
맥없이 저항을 포기한 순간에 번개처럼 제 앞을 가로막으며 주먹을 내지르던 등, 곰을 완전히 쓰러뜨리고 태세를 풀며 숨을 갈무리하던 어깨, 당돌한 말과 함께 마주쳤던 그 얼굴. 같은 마을에 사는 은하류의 정통후계자 율니아가 저의 은인으로 탈바꿈한 그 순간은 여전히 선명하다. 눈을 감는 날까지 이 순간의 빛이 바래는 일은 없으리라고 눌진은 감히 믿는다.
오가는 길에 봤던 담장 너머에는 막연한 상상을 넘은, 실존하는 이야기가 있다. 은하류의 정수를 잇는 것은 율니아 뿐이지만, 문하생 역시 은하류의 기초 정도는 함께 수학할 수 있었다. 어르신이 제게 손짓으로 나가라 명하면, 거기부터는 장문인과 후계자의 장이었다.
은하류의 문하생에서 본래 생업인 나무꾼으로 돌아가 일을 마치고 돌아온 저녁이면 율니아는 때로 조잘거리며 자기 이야기를 할 때가 있었다. 그건 생각보다 드문 일이었다. 강자가 약자를 보듬는다. 은하류의 신조 안에서 저는 율니아의 부하이며 약자이므로 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니.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율니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을 토해내며 당당하려고 애썼던 것도 같았다.
어머니는 율니아를 낳고 오래지 않아 돌아가셨다는 것, 그러므로 외동인 제가 유일무이한 후계자라며 어깨를 쫙 폈던 모습. 그날 장지문을 닫고 나가며 들었던 것은 율니아를 향해 네게 재능이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어르신의 탄식이었다.
무어라고 꺼낼 말이 없어 우물쭈물하던 저에게 율니아는 그냥 웃어 보이더니 갑자기 하늘을 가리켰다. 날이 맑은 여름밤, 새까만 하늘에 달이 떠 있고, 그 애가 가리킨 자리에는 별의 강이 너르게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별이 되어서 저 하늘에서 날 지켜주고 계시니까 괜찮아.”
아마도 그날부터였을 테다. 눌진은 가끔 밤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은하류라는 이름의 시초가 되었다는 저 은하수를. 뵌 적도 없는 율니아의 어머니께 조심스레 말을 건넨 적도 있었다. 저는 영원히 율니아의 편이겠다고. 먼 하늘에서는 기도밖에는 할 수 없으니, 그 애 곁에는 제가 있겠다고.
담장 안의 사람이 되고서 새로이 알게 된 바가 있다. 웃사람을 나쁘게 말하는 것은 틀림없이 예의에 어긋나겠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어르신의 언어습관은 폭력에 가깝다고 눌진은 생각했다. 밖에서 타인에게 예의를 차리던, 정갈하기만 하던 언어를 들었던 그는 때때로 날것의 말에 속으로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시정잡배의 것과는 확실히 다르지만, 모양새만 멀끔하다고 폭력이 폭력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다. 당돌하고 되바라진 구석이 있던 율니아는 제게 쏟아지는 언어 앞에서 계속 깎여나갔다. 그렇게 율니아는 저 자신의 욕구를 제 것으로 뱉는 일이 없어졌다. 은하류를 위해 율니아 개인은 입을 틀어막힌다고, 눌진은 때로 제 속이 갑갑해짐을 느꼈다.
어르신은 율니아의 노력을 도무지 돌아보지를 않았다. 재능이 없다면 노력으로 채워 보이겠노라고 손가락 첫마디가 전부 너덜너덜해져 피가 날 때까지 정권지르기를 연습해, 교본은커녕 당신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동작을 해낼 수 있게 되었을 때도 그랬다. 해낸다면 후계자로서 당연한 일이 되었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재능이 없는 적자 취급이다.
적자, 피를 이은 후계자란 대체 무엇인가. 율니아에게 평생 밝힐 수 없는 비밀이 생긴 이후의 일이었다. 부려둔 나무를 정리하고 장작을 팰까 하던 중에 조금 열린 문지방을 통해 어르신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흘러나왔다.
“둘째자식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결국 재능이 없으면 한계가 빨리 찾아오는 법인데.”
손님이 계신 건지는 관심이 없어 모르겠고, 저것이 어느 문장의 토막이지만 저의는 분명했다. 안주인께서 타천하지 않고 살아계셨으면 율니아에게도 형제가 더 있었을지 모르고, 그중에 재능이 있는 아이가 있다면 당연히 장자인 율니아를 제치고 그 애를 정통후계자로 삼았을 거라는 말 아닌가. 어찔했다. 개인수련을 하려고 율니아가 뒷산에 올라가 있어서 다행이다. 핑 도는 머리와 더불어 안도감이 스쳤다. 그리고 동시에 스멀스멀 끓어오르는 분노. 그렇다면 당신은 내게 재능이 있음을 알면 어떻게 나올 건가. 율니아를 버리는가? 막연한 상상이지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워 그만뒀다. 또다시 속으로 묻어야 할 일이 늘었다.
언제부터인가 어르신은 제가 있는 자리에서도 율니아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저를 자리에서 비키게 하던 체면치레조차 없이, 제가 낯부끄러워질 정도로 날것의 언어가 구타할 때도 있다.
꾸지람 후 어르신은 등을 돌리고 나가고, 그 등을 율니아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본다. 신비한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 속에는 갈증으로 쩍쩍 팬 자국이 보일 법도 하다. 한 번도 채워지지 않은 인정욕구. 그리고, 아마도 영원히 채워질 일이 없을. 제삼자로 지켜보는 저도 알아차리고 말 일을 당사자가 모를 리가 없었다. 눌진은 조심스레 율니아를 부른다.
“도장 정리 끝내고 저녁 먹으러 갈까, 율니아? 내가, 배고파.”
“…응! 눌진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
잠시의 침묵이 지나면 그 눈동자 안은 여전히 맑게 빛나고 있을 뿐이다. 잠긴 것인가, 씻겨나간 것인가. 오로지 시간이 그 답을 말할 거라고, 눌진은 어스름하게나마 율니아가 가출을 선언한다면 따위로 시작하는 몽상을 계획으로 가다듬는 날이 늘었다.
그러나 율니아는 정말로 단 한 번도 어르신을 향해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그 애의 안에는 분노나 시기라거나 질투 혹은 증오 따위의 것이 도무지 쌓이지 않는 것 같았다. 저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그냥 그렇게 말갛게 빛나는.
그러므로 더더욱, 눌진은 율니아의 곁에서 끊임없이 말한다.
“역시 율니아야.”
너는 최고라고. 몇 번이라도.
갉아 먹힌 자존감의 실금을, 혹 그 애 안에 실제로는 남아있지 않을지라도, 조금이나마 보듬어본다. 그런 때에 물밀듯이 차오르는 반짝임은 기껍고 소중하다. 저는 겨우 버팀목이고 자그마한 숨통 트임에 지나지 않을 거다. 율니아의 타고난 성정이 구김 없고 밝았기 때문에 그 애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남을 수 있음을 안다.
그러므로 더더욱, 눌진은 혹여 율니아에게 어떠한 좌절이, 절망이, 돌이킬 수 없는 쐐기가 되어 제가 올려다보았던 은하수가 새까만 밤하늘에서 지워지는 것이 두렵다. 특히나 그 마지막 쐐기가 제가 되는 악몽은 여전히 시시때때로 밤을 좀먹었다.
그렇게 두벌잠을 못 드는 때면 눌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이 흐리지 않으면 하늘에는 별이 떠 있고, 그 폭은 변할지언정 은하수가 흐르고 있다. 그 한결같은 별의 강에다 대고 다시금 결심하곤 하는 거다. 율니아가 저를 놓지 않는 한, 영원히 그 애의 그림자로 살겠다고.
1. 눌진의 율니아어 해설부터 착안된 이야기.
이번에도 저와 같이 떠들어주신 트친 깜님 덕에 탄생한 글. 날조와 이것저것을 덕지덕지 발랐습니다.
눌진 회상 씬을 보면서 율니아 자존감 완전 너덜너덜한 상태 아닌가, 했다가 이 애가 태생적으로(실제로 그럴지는 차치하고서) 분노나 시기심 같은 걸 품에 안고 살아가는 타입의 애는 아닌...어떤 의미로 긍정왕으로 태어나서 망정이지...안 그러면 벌써 사달나도 사달이 났지.
더해서, 먹보 속성이 있지만 초기에는 그걸 자기 욕구로 말하는 게 아니고 눌진을 통해서 욕구주체자를 바꾸려고 드는 것 때문에...(뒤로 갈수록 이 점은 나아지지만...) 이거 집에서 직접적인 자기표현이 꽤 억눌려있던 거 아닌가- 싶어졌고....애들의 어휘선택은 대체로 주변 어른에게서 영향을 받기 마련+눌진이 한치의 의심도 없이 발화내용을 순화해서 전달->이거 그냥 눌진은 율니아의 화법출처를 알고 있고, 이 애의 성정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닌가...생각이 들면서...그냥 복잡해진 마음이 되었음.
개인적으로는 저렇게 자존감 잡아먹힐 환경 속에서 튼튼히 서 있는 건...눌진의 케어가 확실히 작용했다고 생각하는 편. 암만 긍정왕이어도 자길 긍정하는 존재가 없으면 역시 꺾이기 마련이니...
겸에 재능재능거리는 어르신을 보아하니까...율니아는 외동일 거 같다고 추측. 아래로 형제가 있는데 재능이 있어봰다 했으면...맏이여도 가차없이 내쳤을 것 같음. 정말로. 그리고 그걸 율니아가 모를까? 사부이자 아버지가 저한테 만족 못하는 걸, 진짜 전혀 모를까? 절대 아니라고 봄... 아이는 부모의 그런 걸 생각보다 훨씬 예민하게 감지하니까...눌진이 있어서 정말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2. 은하류는 역시 은하수에서 왔겠지~ 했던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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