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의 기사&애늙은이

[잔불의 기사&애늙은이/하마닭코끼리] 언니 언니 우리 언니

그렇게 부르면 뭐 닳기라도 하냐?

So Here We Are by 가온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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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습기사 님 생일 리퀘스트로 받은 "와론 입에서 구우우욷이 언니 소리 들으려는 힌셔와 죽어도 언니 소리는 안 하려고 이리저리 내빼는 와론의 유치한 내기 내지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 코끼리가 얹어진.

* 기사명은 조합명. 논커플링 글이지만, 대놓고 그노힌셔가 언급되고, 목와가 은은하게 함께합니다

* 리퀘스트 내용의 얼만큼이 충족되었을런지 조금 걱정은 되지만, 일단은 유쾌하고 유치한 분위기를 최대한 노렸습니다

* 전작 <애늙은이>에 관계된 언급이 종종 나옵니다. 모르시더라도 그럭저럭 넘기실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그래도 봐주세요, 애늙은이)

* 원작에서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모든 설정(eg. 론누 관련, 칸덴티아와 힌셔 관계성 등)은 개인적인 팬피셜입니다. 귀엽게 봐주십사...

* 글 배경은 잔불의 기사가 시작되기 이전의 적당한 시공입니다

* 아마도 미래의 제가 오탈자 비문을 발견하면 종종 고치러 올 것 같습니다...


“이게 다 무슨….”

군청색 거북이 달잔은 이마를 부여잡고 탄식했다. 얼굴 퍼렇게 질린 사병 하나가 달려와 어떻게 좀 해달라고 호소해오기에 거의 다 읽어나가던 서류 하나를 내동댕이치고 안내하라고 한 것이 겨우 수 분 전. 몇 년 만에 겪는 대형 참사 앞에서 그는 오만 생각이 스쳐 가는 것을 내버려 둔다. 이 사고를 일으킨 게 칸덴티아 하나였다면(요즘은 그럴 일도 많이 줄긴 했다만) 이야기가 쉬웠겠으나 지금 앞에는 기사 둘이 더 있다. 어느 쪽이라도 제가 손을 쓰기엔 까다로운 둘이.

영웅 검붉은 하마 힌셔와 기사사냥꾼 새까만 닭 와론. 그나마도 저 중 가장 번듯한 영웅께서 새까만 닭과 순백의 코끼리를 당신 곁에 시립 시키고 계신다만, 그들 뒤에 펼쳐진 참상의 흔적을 미루어 짐작건대 원인은 저분이 틀림없다. 수도 니젤에 영웅을 가둬둔 자각이 있는 거북이는 잠시간 마을에서 종종 보곤 하는 대형견 산책을 떠올렸으나, 곧바로 털어냈다. 활동량이 부족해 날뛰고만 대형견을 영웅에 빗대다니, 썩 불경스러운 생각이다. 그러나 통찰의 눈이 있는 하마가 씁쓸하게 웃은 것으로 보아 한발 늦은 듯했다.

어쨌거나 이 와중에도 칸덴티아가 와론에게 말로나마 대거리를 하고 있다. 그것도 힌셔의 앞에서. 저 자신도 이 시대에 내로라하는 기사인지라 칸덴티아는 저 둘의 위명에 쫄아드는 편은 아니나, 지금처럼 지나치게 허물없는 건 또 어떤가 싶다. 아니지, 애시당초 그는 정쟁과 영 어울리지 않기에 제가 고삐를 걸고 거기서 한 발 물려 둔 게 아니었던가. 전에 비하면 성질머리도 많이 나아졌다지만 칸덴티아는 여전히 복잡한 인과는 질색이다. 켕기거나 기분 나쁜 게 있다면 그자리에서 면 대 면으로 맞부닥쳐 털어내자는 파다.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간다. 수도에는 영웅이 거주하는 걸 대다수 국민이 안다. 그런 그가 실력에 녹이 슬지 않고자 대련했다가 흥을 타는 바람에 이런 난리가 났다고 공표하면 온갖 괴상한 추측이며 공포심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거다. 그나마도 여기가 황궁에선 꽤 떨어진 공터(땅 주인이 민간인인지는 이제부터 확인해야 한다. 제발 국가 소유 토지이길 바랄 뿐이다)라서 통할 변명이다. 이게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졌다면 끔찍했겠지. 파괴된 토지의 넓이가 어마무시해서 그렇지, 관계된 사안은 수습할 수 있는 부류의 것으로 판단한 거북이는 지금쯤 저 대신 집무실에서 이것저것 서류를 처리하고 있을 신진기사에게 키톤으로 여기는 제가 정리할 테니 업무를 마저 보고 있으라고 명령하고 고개를 들었다. 이제 셋의 말을 들을 때다. 검붉은 하마는 제가 이것저것 수습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먼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옆에서 깐족거리던 새까만 닭이 그의 손아귀에 잡혀 똑같이 고개를 숙인 것은, 강제성이 있다지만 꽤 의외였다. 거기에 덤으로 칸덴티아 역시 머뭇대면서 그 동작을 따라 한 것까지. 달잔은 두 사람의 그런 행동을 놀랍게 여겼지만, 힌셔는 다른 듯했다. 그는 오히려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이 시대에도 예의범절이 중요한 건 변하지 않지. 안 그런가, 아우들?”

뭐? 달잔이 뭔가를 더 생각하기도 전에 말끝을 물어뜯은 건 새까만 닭이었다.

“나 아직 당신 동생 하겠다고 한 적 없거든, 힌셔 씨? 그렇게 하려면 얘가 날 언니라고 부르게 하라니까!”

“야, 내가 미쳤다고 새까만 닭 너를 언니라고 부르겠냐?! 힌셔 님이면 몰라!”

이 대화의 흐름을 전혀 따라가지 못한 군청색 거북이는 금방이라도 다시 한 판 맞붙을 듯해진 사이로 끼어들어 손사래를 쳤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칸덴티아.”

이건 의외로 영웅께 물어야 제대로 된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 냅다 오랜 연하의 짝꿍을 부르니 칸덴티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언니라고 부르냐 마냐의 문제야.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너무 호쾌하게 요약정리한 내용은 당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전말을 파악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사이 제풀에 지친 듯한 새까만 닭이 손끝으로 힌셔를 가리키며 말을 툭 뱉었다.

“그냥 힌셔한테 들으면? 어차피 얘가 시작한 일이야. 난 휘말렸을 뿐이라고.”

“…설명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하마 님?”

“그러지. 내 사매는 아무래도 단단히 토라진 것 같으니.”

“하마 너 진짜….”

그 새까만 닭이 음산하게 읊조렸지만, 애초에 이 정도 으름장이 먹힐 상대가 아니었다. 힌셔는 눈썹 한 번 꿈틀했을 뿐 그 말을 간단히 무시하고, 잠시간 눈 감은 채 몇 시간 전의 일을 돌이켜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쾌청한 날이다. 성 외곽의 망루 꼭대기에 올라선 힌셔는 잘 닦인 거울처럼 매끈하게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가 나누어 내뱉었다. 하늘은 모양과 색이 결코 고정되지는 않으나,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가 올려다봤던 것과 똑같은 하늘로 자리한다. 반면 그 아래에 펼쳐진 땅은 전혀 다르다. 기사가 맘을 먹고 싸우면 지형지물 따위는 삽시간에 허물어진다고는 하나 시간의 지층에 깔려 형태를 달리하는 이것이야말로 더더욱 두려운 방식으로 지형을 부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가 아는 골목 골목은 벽돌 하나 남기지 않고 잘 닦인 대로가 되었으며, 곧잘 찾곤 했던 가게는 건물조차 남지 않았거나 부수고 다시 지어 기억과는 멀어져 있는 게 부지기수였다. 그가 알던 것과 차이 없이 서 있는 건 황성을 제외하면 그노제스의 대장간이 전부다. 피는 섞이지 않았으나 그노제스의 가르침을 이어온 후예들이 당신이 돌아올 곳을 지키라고 했던 그의 유언을 전해주었으니, 힌셔는 이런 날이면 매번 제 정인의 섬세한 배려심과 깊이 모를 지혜에 감복했다. 구체적인 상을 떠올리지는 못했을지언정 그는 틀림없이 이러한 먼 훗날을 예견했으리라. 후회는 분명히 그 설원에서 떨쳐냈으나 시시때때로 발목 주위를 넘실대는 이 연하고 부드러운 우울감은 강인한 영혼을 몇 번이고 끌어내렸다. 한숨을 푹 내쉰 힌셔는 곧 외기에 굳은 어깨를 휘휘 돌려 풀어주었다. 마음이 가라앉으면 몸을 움직이는 것이 좋다. 스승께 훈련받던 견습 시절부터 줄곧 마음의 부진을 그렇게 다뤄왔더랬다.

게다가 어차피 슬슬 내려가야 했다. 허락 같은 것 없이(물론 그는 명목상 분명히 자유의 몸이다. 수도를 되도록 떠나지 말아 주십사 하는 부탁이자 족쇄를 아량껏 듣고 있을 뿐이지) 멋대로 올라오긴 했지만 망보기를 담당하는 건 대체로 병사이고 가뜩 기사 앞에선 위축되는 그들이 영웅이란 말로 금칠이 된 저를 앞에 두면 차마 보고 있기 미안할 정도로 덜덜 떠는 것을 십수 번 목격했다. 교대하러 온 혹은 교대하고 나가는 병사가 저와 마주쳤다간 또 그 사달이 날 거다. 그건 이 시대에 뚝 떨어져 겪은 불편한 일 중 하나였다. 저 자신은 변한 게 없는데, 저를 보는 시선과 온 세상이 전부 갈음하여 탈바꿈했다는 걸 절감하는 순간마다 항상 그랬다.

‘그래도 수도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선택은 없었지.’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그노제스 본인이 저를 맞이했을 리는 없지만, 그가 저를 기다렸다는 흔적은 남아있을 것이며 무엇보다 저 자신이 그에게 그대 곁으로 돌아오겠노라고 약조했으니. 그 결과가 이것이므로 힌셔는 모든 것을 가만히 삼켜 잠잠히 있기를 선택했다. 스승의 진의를 혼자 속에 품은 것처럼.

산책이라도 해야겠다고 그것도 아니면 그자를 찾아가(무슨 변덕이 분 건지 요 몇 주간은 수도에 남아있는 것으로 안다) 대련이라도 신청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아래에 발 디딜 곳을 훑던 찰나였다.

“언니이! 거기 서!”

“아하하, 술래는 너잖아. 약 오르면 잡아 봐!”

“씨이-! 꼭 잡을 거야!”

자매가 술래잡기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장면 하나를 도려내 일부러 눈앞에 들이민 것 같이. 어떤 풍광은 결단코 바뀌지 않는 법이로군. 탄식과도 같은 깨달음이 습하게 물러있던 마음에 부조浮彫를 일으킨다. 아이 둘이 뺨을 발갛게 상기해가며 뛰어노는 모습은 아직 제 손에 채 굳은살이 배기 전부터 있었다. 장난감 거리가 마땅하지 않았던 시절은 맨몸으로 노는 것이 당연했고 가장 쉬운 것이 술래잡기였더랬다. 저 역시 동네 친구들과 곧잘 뛰어놀곤 했으니까.

그때야 성별에 따른 제약이 지금에 비하면 꽤 있던 시절이었지만, 열 손가락으로 나이를 셀 수 있는 애들끼리는 그런 게 없었다. 떼를 지어 노는 놀이는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즐거운 법이고, 어른들도 애들끼리 모여 놀면 지켜보기 편하기도 해서 마을 공터는 꼭 아이들 몫이었다. 그렇게 모인 아이들은 대부분 또래지만, 아래로 두셋쯤 차이 나는 꼬마도 종종 꼈다. 누군가의 동생이었다는 뜻이다. 그렇게 형제자매가 낀 날에는 왁자지껄 이름을 떠드는 사이로 독특한 질감의 호칭이 도드라졌다. 언니야! 형아! 처음엔 제 형제에게만 부르던 그것은 웃고 뛰고 노는 사이에 누구 언니, 누구 형 하면서 퍼져서 맨 마지막에는 서로가 너나 할 것 없이 그 꼬마애에게 누가 제일 형이고 언니 같으냐고 지목해달라고 생떼를 부리는 것으로 끝나곤 했다. 물론 강요된 지목 요구에 견디지 못한 동생애가 얼굴이 벌겋게 되도록 울어서 어른이 달려와 해산시키는 형태로였지만.

이제는 형태도 색감도 다 헤진 어렴풋한 기억인데도 이전과 별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마주한 순간 색채가 덧입혀지며 그날 날씨며 촉감이나 온도마저 되살아났다. 끌어당겨진 먼 추억은 형제자매 없이 외동이던 어린 힌셔를 불러낸다. 힌셔 언니! 다섯 집 떨어진, 마당 한 켠에 커다란 감나무 세 그루를 키우던 집에 살던 애의 동생이 저를 그렇게 불렀을 때 느꼈던 이유 모를 뿌듯함. 아직 덜 여물어 마음의 단단함도 몸의 튼튼함도 얻기 전의 향수였다. 그랬다. 이후엔 스승님께 발탁되고 견습 기사로서 훈련에 매진하는 나날이 이어져 쭉 묻혀있었으나, 그즈음의 힌셔는 여동생이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 적이 있었다. 어린 맘에 그랬겠지만, 분명히, 틀림없이 그런 적이 있었다.

그걸 자각하자, 마음이 지독하게 수런거렸다.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음식 냄새를 맡고서 배고픔을 자각한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다른 욕망이었다면 잠시 내버려 두는 것으로 스러졌을 테지만, 하필 조금 전에 저를 언니로 부를 수 있을 법한 인물을 떠올렸던 것도 있고 그 당사자가 벽공을 이어받은 걸 가지고서 저희가 사매사저가 아니냐고 농담(분명 농담이었고 힌셔도 그걸 알며 오히려 그때는 진저리를 냈는데)을 했던 기억까지 연쇄적으로 떠오르는 바람에 언니로 호명되고 싶다는 애 같은 생떼는 구체적인 모양을 하고서 힌셔를 부추겼다. 스스로 애 같이 유치하게 구는 걸 알았지만 한편으론 이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고 들을 이도 없는 변명인지 투정인지도 함께 따라온다.

힌셔는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예전부터 아주 오래 골몰하여 생각만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시대의 남들은 저를 사려 깊고 원숙한 영웅으로 여기나, 오히려 그렇게 고민하는 자는 따로 있다는 게 제 의견이자 보아온 사실이다. 어쩌면 그자는 저를 금칠하지 않음으로 이 어처구니없는 생떼를 어떻게든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몰랐지만.

 

그런 연유로 모종의 건으로 잠시 수도에 묶여있던 새까만 닭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거였다.

“여기 있었군, 새까만 닭.”

“뭐야, 설마 낮술 하자고 날 찾은 건 아니지?”

꽤 흥미로운 녀석이 있어 그 치고는 드물게 니젤에 오래 머물고 있었고, 덕택에 수도에 내도록 묶여있던 힌셔와도 심심찮게 잔을 부딪쳤기에 검붉은 하마가 저를 찾아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 자체는 놀랍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번엔 뒷목을 타고 쌔한 예감이 스치는 거다. 풀썩 앉아있던 와론은 아무 말이나 일단 주워섬기면서 몸을 일으켜 언제라도 내뺄 준비를 했다. 이런 직감을 무시해서 나쁠 건 없었으니. 아니, 사실 직감이고 생존본능이고 거창한 걸 붙일 것도 없었다. 늘 굳은 얼굴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힌셔가 술이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눈을 빛내며 잰걸음을 하고 있으면 긴장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트루디아 일행과 잠시 함께해본 적도 있고 사석에서 그를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닭은 검붉은 하마 힌셔가 얼마나 엉뚱한 사람인지 알았다. 진지해서 오히려 이상한 데로 튀어버린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런 엉뚱함은 대체로 성가시고 귀찮은 일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설마. 오늘은 다른 이유로 그대를 찾아왔네.”

“뭔데.”

묘하게 들뜬 힌셔의 얼굴은 차라리 저잣거리에서 뛰노는 어린애를 연상케 했다. 그 탓으로 새까만 닭은 아주 마음이 조금 물러졌고(돌이켜 생각하면 와론은 제 머리를 마구 내려찍고 싶었다. 저건 그 힌셔라고! 네프렌이 아니라!) 십 분의 일로 쪼개진 초로 승패가 가름하곤 하는 기사의 세계에서는 치명적인 빈틈이었다.

“언니라고 불러보게.”

그 결과, 냅다 양손을 꽉 잡힌 닭은 아예 함박웃음까지 내걸며 쏟아진 힌셔의 부탁에 덜걱 굳고야 말았다. 내가 지금 뭘 들었지. 누가 누구를 언니라고 부르라고…? 들은 내용이 채 처리가 안 되는 바람에 꼼짝도 않고 손을 잡힌 채로 가만히 서 있는 닭이 혹시 제 말을 듣지 못한 건가 싶어진 힌셔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 일전에 나더러 사저라지 않았나. 그러면 닭 그대는 내 사매일 테고, 그러니 언니라고 불러보게.”

“그때 내가 사매라니까 진저리친 게 당신 아녔어? 무슨 뒷북이야, 이거!”

“스스로 동생으로 지칭하는 건 괜찮지만 언니라고 부르는 건 쑥스러운 건가, 그대는.”

“아니, 말이 안 통하네! 겠냐고!”

하필 좀 전에 양손을 잡히면서 론누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손 쓰임은 고사하고 론누를 움직이는 것조차 여의치가 않았다. 아니, 이 인간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제정신이 아닌가 해서 혹시나 하는 맘에 발을 걸어서 빠져나가려고 했더니 아주 간단하게 막혔다. 아, 그럼 그러시겠지! 원래부터 발재간으로 뿌리칠 수 있는 상대가 아니긴 했지만, 이건 기세로도 밀린다. 언니라니, 언니라니! 힌셔가 언급한 사매 발언은 정말 반쯤은 농담으로 던진 게 맞다. 왜 반이냐면, 야사까지 뒤져가며 스스로 벽공을 복원시켰는데 이쯤은 쳐줘도 되지 않느냐는 맘이었다. 게다가 그 후로 힌셔가 직접 교정까지 해주었으니 객관적으로 보아 사저와 사매가 맞긴 할 거다. 그렇지만 언니라고 부르는 건 완전히 별개의 일이지 않나!

‘내가 그 호칭을 입에 담은 게 언제적인데!’

하필 이런 때에 힌셔는 굳이 투구를 비껴 들여다보아서 그 잘나신 통찰의 눈도 쓰지 않는다. 죽으라고 부딪히던 중에 검붉은 하마가 저를 명예를 아는 자라고 멋대로 읽어낸(판단이라기엔 통찰의 눈을 통했다면 별수 없지 싶다) 건 약이 오르는데, 왜 그런 우격다짐을 이런 때는 하지 않는 걸까. 절대 결단코 제 입으론 꺼내지 않을 이유는 지금 제 망토 아래에 다소곳이 가려진 목걸이의 주인, 제가 이름을 빌려온 자 때문이다.

‘내가 걔를 딱 한 번 언니로 부르고 다시는 그렇게 안 불렀는데, 다른 사람을 언니라고 부르겠냐고.’

고집이라면 고집이다. 스스로 알지만, 역시 곧 죽어도 언니라는 호칭으론 부르고 싶지 않았다. 백번 양보해서 사저면 모르겠지만 지금 힌셔가 꽂힌 건 그런 명명이 아니니까. 좀 불러봐라, 부르면 뭐가 닳기라도 하냐, 아니 난 안 부른다. 생산성도 없고 유치하기만 한 말이 몇 번을 오갔다.

와론의 구조선은 꽤 엉뚱한 데에서 왔다. 여기 외진 성곽을 순백의 코끼리 칸덴티아가 찾은 거다. 망루지기가 저희 둘을 발견해서 보고했건, 아니면 그냥 단순한 우연이건 저만치서 눈에 익은 금발이 보이기가 무섭게 닭이 소리쳤다.

“쟤가 날 언니라고 부르면 언니라고 불러줄게!”

“뭐?”

“엉?”

아주 쩌렁쩌렁했다. 들으라고 한 소리니 당연했다. 조건부 허가가 나와 아귀심이 약해진 틈을 타 와론은 손을 빼고 론누를 그러쥐었고, 난데없이 이상한 소리를 들은 칸덴티아만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삼, 이, 일. 뒤늦게 말을 곱씹은 코끼리가 곧 눈을 부라린 채 이쪽으로 걸어왔다. 발길마다 쿵쿵 울리는 것이 성질이 확 뻗친 듯해서 와론은 내심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렇게 된 거 화제를 아주 뒤섞어버리면 된다. 김에 주먹다짐으로 발전하면 언니의 ㅇ도 꺼낼 일이 없어지겠지. 애초에 코끼리는 저를 달가워하지 않으므로 이대로 시비가 붙을 거고, 칸덴티아를 상대하는 건 나름대로 재밌는 일인더러 이 최강의 기사가 성벽 안에서 날뛰고 있으면 그 짝지인 거북이가 출동해 연행해갈 건 뻔한 수순이다. 그놈에게 우리 영웅님까지 맡겨서 보내면 전부 해결 아닌가.

그렇게 성큼성큼 찾아와서는 칸덴티아가 한 말은 다음과 같았다.

“이게 미쳤나! 야, 닭! 언니라고 불릴 만해야 그렇게 부르지! 그렇죠, 힌셔 언니?!”

“어?”

“허 참….”

닭은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 가까이서 보니 칸덴티아의 눈이 지나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까 제게 헛소리를 내뱉은 힌셔처럼. 그제야 와론은 제가 실책을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그래, 궁성에 왔을 무렵의 칸덴티아는 붉은 반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여기 이 영웅 님의 망토를 연상케 하는 그걸. 얘도 힌셔 추종자였어? 아니다, 그거랑은 조금 다르지. 얘가 스승 대신으로 삼았던 게 검붉은 하마의 영웅담이라고 했던가. 군청색 거북이와 짝을 이루고서 그런 기색이 줄어들어서 잊고 있었다. 여타 맹목적인 추종자와는 다르지만 어쨌건 코끼리로선 제 우상을 언니라고 부를 기회를 놓치진 않을 테지. 집요하고 대쪽 같고 앞만 보는 성격을 한 저 애라면 힌셔를 친밀하게 따를 만도 하다. 비록 지금까지 공적 자리에서 코끼리가 하마에게 저렇게 살갑게 구는 건 본 적이 없었지만.

어쨌건 이번엔 손아래 기사에게 순순히 언니 소리를 들었으니 하마의 맘도 풀리지 않았을까, 하며 와론은 흘끔 고개를 돌려 힌셔를 일별했다. 그리고 시선이 딱 마주쳤다. 동시에 든 생각이란.

‘아, 망했다. 오늘은 재수가 없으려니….’

그냥 동생이 둘 생겼다고 신이 나는 표정이 거기 있었다. 아무래도 단순히 연하(여기서 와론은 문득 고개를 갸웃한다. 얼음에 갇혔던 햇수를 빼고 나이를 맞추면 제가 위일 수도 있지 않나?)에게 언니 소리를 듣는 게 아니고, 제게서 듣는 게 목적인 모양이다. 꽤 복잡하게 됐다. 이걸 어떻게 빠져나가나 머리를 굴리고 있으려니, 이 폭탄을 떨군 당사자가 또 다른 폭격을 날렸다.

“그럼 자매들끼리 사이좋게 밖에서 대련이나 해보는 건 어떤가? 이왕이면 진 쪽이 이긴 쪽을 언니라고 부르는 내기까지 겸해서. 혹시 닭 그대가 순순히 언니라고 부른다면 내가 아우들과 대련 한 판씩 하는 걸로 하고. 그게 아니어도 서로 난전으로 싸우는 것도 재밌겠지.”

명백하게 도발이었다. 투구 안쪽으로 눈썹을 꿈틀한 와론을 알아본 것인지 힌셔가 여유롭게 웃는 것이 괘씸했다. 칸덴티아는 합법적으로 그 새까만 닭을 팰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과 어쨌건 성 밖이라면 이 정도 급의 기사가 대련하는 건 제 짝지가 신신당부한 ‘난리’에는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한 듯 자기가 빈터를 안다며 의욕 만만하게 앞장섰다. 그 뒤를 하마가 척척 따라갔고 닭은 마지못해 미적미적 걸음을 옮겨 힌셔를 따라잡고선 옆에서 읊조렸다.

“진짜 치사하게 구네. 나한테서 그렇게 언니 소리가 듣고 싶어? 당신한텐 새파랗게 어린 애를 앞세워다가?”

“그대야말로 뭘 그리 인색하게 구나. 언니 소리 좀 한다고 뭐가 닳는 것도 아닐진대.”

“허이구, 내 언니 소리는 닳거든요.”

“흐음. 뭐, 저 기사는 확실히 강하니 그대도 즐겁겠지.”

“그게 자발적이었으면 말이지. 내가 여기서 도망치려고 하면 어떻게든 붙들어 맬 작정이잖아.”

“잘 아는군. 그럼 힘내보시게, 아우님. 잘못하면 그 새파랗게 어린 애한테 언니 소리 하게 생겼으니.”

“와 미친. 힌셔가 어쩌다가 이렇게 남 잘 긁는 사람이 됐지?”

“참 좋은 사매를 둔 덕이지.”

왜 이렇게 능글맞아졌대. 처음에 놀려먹기 좋던 하마 어디 갔어. 입엣말로 투덜거리고 있자 힌셔는 더는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이 그대로 보폭을 넓혀 앞으로 치고 나갔다. 와론은 각 시대가 자랑하는 최강 두 사람의 등을 보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 여기까지 도발 당했는데 내빼는 것도 새까만 닭이 할 짓은 아니지. 무엇보다 이렇게 된 이상, 힌셔의 저 유치찬란한 계획 따위는 어그러뜨려 버려야겠다는 의지만 활활 불타올랐다. 어디 맘대로 되나 보자. 론누를 고쳐 쥔 그가 성큼성큼 둘에게 따라붙었다.

그 후는 간단했다.

처음에는 닭과 코끼리가 거의 생사결을 낼 기세로 부닥치다가, 그 와중에 끝까지 입을 털고 있던 닭이 기어코 그렇게 내 입으로 언니 소리가 듣고 싶으면 너도 와서 쟁취하라고 고래고래 소리친 끝에 아무래도 그게 더 빠를 거로 생각한 하마가 어차피 처음부터 말하기를 일대일 대련도 아니었으니 괜찮을 거라 여기며 참전했고, 그 모습에 코끼리는 힌셔가 제가 저 자식을 때려눕히지 못할 거로 생각했다고 속단해서 닭과 하마 둘 다에게 화가 나 덤벼들기 시작했다는 거다. 그리하여 멋지게 일 대 일 대 일의 혼전이 되었고―,

“―그래서 이렇게 화려하게 주변을 부수신 거라고요….”

“아니, 나 지금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이딴 봉변을 겪은 거라고? 진짜로?”

“아, 그러게. 힌셔 언니는 그때 일대일 대련이라곤 안 했구나? 아니, 그런데 달잔! 내가 이기고 있었는데!! 저 닭의 콧대를 아주 꺾어 뭉개버릴 기회였다고!”

도중에 닭이 보충 설명을 끼워준 앞뒤를 들으니 더더욱 가관이어서 달잔은 관자놀이만 꾹꾹 눌러댔다. 하나는 보통 비꼬는 측인 것에 비해 드물게 나는 피해자라며 드러누우려고 들고, 제 짝지는 그가 불에 부어진 등유 꼴을 냈다는 걸 전혀 깨닫지 못했으며, 따지고 들었을 때 모든 원흉인 영웅께서는 간만에 땀 좀 빼고 아래로 언니, 언니하고 부르는 동생들(이라고 주장하는데, 달잔이 보기엔 칸덴티아 하나뿐이다)이 생겨 신나셨지 이 정도는 사고 축에도 들지 않는다는 태도시다. 총체적 난국이군. 이래서야 집무실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보는 게 훨씬 낫겠다 싶어, 군청색 거북이는 말없이 다시 키톤을 꺼내 들었다.

신진기사 담청색 기린에게 짬처리가 맡겨지기까지 앞으로 십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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