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의 기사/피도란스] 어느 날의 이야기
“피도란스 님! 견습 시절 이야기해 주세요!!”
* 포타->투비로그에서 그대로 이전해옴(최초 작성일 : 22.11.04)
* 유료 90화 나와있는 시점에서 쓰인 글(유료분 89화 내용의 극히 일부가 들어가있긴 함)
* 글 자체의 시점은 나륜에게서 나진 탈환 후의 어드메? 3차 전 이전.
* 피도란스 과거에 대한 전폭적인 날조가 있습니다. 그 외 날조 다수. 논CP글.
* 맞춤법 검사를 돌리지 않은 채 올리기 때문에, 때때로 오타 및 비문이 수정됩니다.
기초체력은 중요하다. 피도란스는 이걸 굳이 저의 지론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애초에 이건 기사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며, 민간인도 포함되지 않는가. 체력이 있어야 뭐든 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견습기사라면 남들보다 더더욱 단련을 해왔으니 최소한 체력에서는 엔간한 사람들에게 지면 안 된다. 아마 저희 병아리들도 자기가 어디서 체력으로 꿀릴 거라곤 생각한 적이 없겠지.
그는 연병장을 헉헉거리며 뛰는 아이들에게 “좋아, 마지막 한 바퀴! 다 돌면 삼 분 쉬고 마저 뛰자~.”라고 외친다. 어깨를 들썩여가며 숨을 긁어 마시는 애들에게서 비명소리가 튀어나온다. 아직 팔팔하구만. 병아리들이 들었으면 그냥 죽여달라고 애원했을 생각이나 하며 푸른 승냥이는 시원스레 웃었다.
견습기사라도 한 번 돋움 하면 기사다. 어딜 민간인하고 비교해서 만족하려고. 그렇게 만족했다간 길거리의 시정잡배와 무슨 차이가 있나. ‘기사’를 지망하고 있으면 당연히 비교할 대상은 같은 ‘기사’여야 한다. 특수2기의 특수성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단순히 훈련병으로 교육받는 게 아니라 실제로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하는 점에서 특수 기수는 결과적으로 특별채용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그러니 조금이라도 평화로운 한때에, 기초체력을 기르고 기본기를 탄탄하게 다져야 한다. 직접 몸으로 구르고 부딪쳐가며 쌓아 올린 체력과 근력은 결단코 사람을 배신하지 않으니까.
‘차라리 이게 견습기사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기사단이었으면 맘이라도 편했을 텐데….’
아까와는 모순될지라도 견습기사는 그럼에도 기사는 아니다. 아직 성년도 안 된 애들을 사지로 골라 보내야 하는 맘은 언제나 편하지 않다. 어쩌다보니 병아리들 기초훈련 교육을 담당하게 되어가지곤. 아니, 원래도 기초체력이며 그런 쪽으로는 맡기로 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떠맡은 건 역시 그 해골바가지 놈하고 첫 접전에서 부상을 입는 바람에 2차 전에서 밀려난 게 컸던 거 같다. 할 것도 없겠다, 애들―특히나 루지안―이 자기 땜에 다친 것처럼 굴고 있어서(정말 기가 찼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우선 달리기부터 시켰더니 그냥 자연스럽게 그리되었다.
그러려니 하는 것은 반은 천성이고 반은 십 년에 가까워져 가는 경력 덕이다. 원래 특수2기 인솔기사끼리도 두루뭉술하게나마 역할을 정하긴 했는데, 그 대강 정해둔 일조차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확률은 늘 상정하고 있었다. 실전에 들어가면 원래 뭐 하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당장 기린만 봐도 그렇다. 애들 앞에서는 멀쩡한 척을 하다가 저희끼리만 있으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앓는 소리를 낸 게 어디 한두 번인가. 두통이 그렇게 심한데도 참는 걸 보면 참 독기 있는 녀석이다 싶다.
병아리들이 마지막 바퀴를 마치고 차례차례 풀썩 엎어졌다. 발라당 드러눕고 숨을 몰아쉬는 녀석, 무릎 위를 잡고 몸을 숙인 채 숨을 고르는 녀석. 그래도 아주 처음보다는 헐떡임이 가볍다. 헛게우는 녀석도 이제는 없고, 정도는 달라도 체력은 다들 착실히 붙고 있다.
이제 삼 분을 재야겠지, 하는데 의외롭게도 회적색 여우가 휴식령을 내렸다.
“견습들, 이대로 한 시간 휴식. 수분 보충 충분히 하고, 어지러운 녀석 있으면 소금 받아가. 거기 누워있는 놈 셋, 지금 몸 풀어.”
“웬일이야, 여우 네가 먼저 휴식 선언을 다 하고?”
“곧 소나기 내릴 거라더라.”
“아하.”
별다른 설명이 없지만 너구리 아니면 닭이 말했겠지, 싶었다. 전자야 야생의 직감을 가졌고 후자도 만만치 않으니, 믿을 만한 예보다. 의식하고 숨을 마시면 아침보다 확실히 공기에 습기가 느껴진다. 이왕이면 악천후에서도 몸 움직이는 법을 알았으면 싶지만, 그건 욕심임을 안다. 단순 달리기를 빗속에서 시키는 건 부상 확률이 커지니까. 차라리 우천에 대련시키는 건 생각해볼 만했다.
‘오후 훈련은 그럼 기사론하고 집단전 전술 수업이 되려나?’
이번 기사론 수업 주최는 한 바퀴 다 돌아서 다시 기린이고, 집단 전 전술은 원래 기린과 여우가 주도다. 저 둘은 집단전 전문가라던 기수 출신답게 장난이 없었다. 저 역시 기사 중에서 드물게 협력전이 가능한 사람이라지만, 아예 견습시절부터 손발을 맞춰왔다는 이들에게는 명함도 못 내밀겠더라. 그러니까 동기라던 두 사람의 말을 빌리자면, 저는 잘해야 덧셈으로 작용하는 기사고, 기린과 여우의 동기들은 모이면 제곱이란다. 우디온에 있다던 흰 사슴과 우리 쪽 여우의 조합이 그렇게 환상적이라던데, 직접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뭔가 문제가 있어 인선을 뽑지 못한 모양이라 피도란스는 굳이 캐묻지 않았었다. 찰나나마 보였던 두 사람의 망연한 표정이란. 여하튼 저도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어쨌든 특수 기수는 연계력 강화에 특화를 두고 있다 보니, 다른 기사단과는 이런 점이 달랐다. 덕분에 이쪽도 팔자에 없는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듣고 있다 보면 역시 이미 자기만의 습관이 굳어진 기사에게 적용하기는 어렵지, 싶다.
밖에는 예감했던 것처럼 비가 내린다. 근처에서 동굴을 발견한 덕에 거기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수업을 시작했다. 제 일 아니다 싶으면 어디로 사라지기 일쑤인 새까만 닭도 기사론 수업이나 전술 이야기는 멀찍이서 얌전히 듣는다. 너구리는 역시 탁상공론은 듣다 보면 졸린다고, 기사론 때만 열심히 경청하고 집단전 전술 때는 주변 경계를 서는 편이다.
병아리들은 이제 열심히 자기 머리를 굴려 가며 기사론 수업에 참여한다. 자기 생각이라고 믿었던 사회화된 지식이나 신념을 체로 고르고, 다른 의견에 부딪혀가며 깎고 다듬어서, 이제야 겨우 사금파리 같은 조각이나마 손에 쥘까 말까다. 그래도 그런 분투하는 모습은 퍽 기껍다. 천방지축이었던 저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더더욱 그렇다. 여전히 목숨을 건다는 말을 쉽게 내뱉는 점이 걸리지만, 그건 결국 경험해야 할 문제인가 싶다. 저 역시 마찬가지의 철 없던 시절이 있었으므로.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
“아니, 그렇지만 암만 생각해도!”
아, 결국 오늘도 말싸움이 터졌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도 잘 이해하는 애가 있나 하면, 구체적인 예시를 들어야 간신히 이해할까 말까 하는 애도 있어서 기사론 수업 중에는 꼭 한 번씩은 이렇게 정면충돌이 일어나곤 했다. 이조차도 수업의 일환이기는 한데, 기린은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늘 이마부터 짚었다.
“하아…. 쟤들은 언제쯤 되어야 기사론 수업을 좀 기사론답게 하려나.”
“에이~. 그걸 가르쳐주려고 지금 이러는 거잖아? 나 견습 때보단 나은 것 같은데.”
갑자기 동굴 안에 왱알왱알 울리던 목소리가 딱 그쳤다.
“엥? 내가 뭐 말 잘못했어?”
너무 짜고 치듯이 조용해져서 머쓱해진 피도란스가 살살 웃다가, 열 몇의 시선이 이쪽을 향해 반짝반짝하게 호기심으로 빛나는 것을 보고 이번에야말로 덜그럭 굳었다. 아, 이거 설마. 그러거나 말거나 직감이 발동하지 않았을 때는 눈치라곤 어디에 팔아먹은 편인 루지안이 힘차게 손을 들고 외쳤다.
“피도란스 님! 견습 시절 이야기해 주세요!!”
아이고. 견습기사도 학생이라, 선생 뻘 되는 사람의 옛날이야기에 당연히 엄청나게 매우 흥미가 있으리란 걸 까맣게 잊었다. 아니, 그야, 이제 견습이었던 때를 되짚으면 대체 몇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냔 말이다. 기억이 날 리가 있는가.
피도란스는 동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길로 주변을 돌아봤지만, 배신감이나 진하게 느꼈다. 새까만 닭이야 원래 재밌게 굴러가는 상황에는 사족을 못 쓰고, 다랑은 이런 때에 애들하고 같이 분위기에 휩쓸리는 편이라 처음부터 기대를 안 했지만(그래도 애들 사이에서 똑같은 표정으로 눈을 빛내는 건 관둬줬으면 했다. 정말 너무하지 않나), 기린과 여우마저 피식 웃으면서 강 건너 불 구경할 줄은!
아이들에게 난처하게 웃어 보여봤자 사태는 진전되지 않았다. 평소에 그렇게 어른스럽게 굴던 나진조차 호기심 어린 시선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 이쯤되니 피하는 것도 능사는 아니지 싶었다. 솔직히 이야기 못 할 것도 없었고. 일단 지금이 기사론 수업 시간인 만큼 뭔가 도움 좀 될 만한 일화였으면 싶은데.
아, 그렇지. 하나 생각났다.
“좋아, 그럼 한 가지 일화나 풀어볼까?”
견습들을 지도하는 입장이 되고서 돌이켜보면, 참 저도 골칫덩어리였겠구나라고 다시금 생각하면서 피도란스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릴 적, 피도란스는 소위 말하는 골목대장이었다. 또래 애 중에서도 유독 힘이 좋아서 웬만한 쌈박질에서 져본 적이 없고, 그렇다고 누구 약한 애를 괴롭히는 꼴을 못 봐서, 어디서 누가 괴롭힘당한다고 듣기만 하면 한달음에 달려가 괴롭히던 애한테 먼저 달겨들곤 하는 그런 애. 거기에 타고나길 수더분한 성격이라서, 먼저 시비 털리지만 않는다면 살천스럽게 구는 일이 없다 보니 저절로 따르는 애들이 많았다.
근처 마을끼리 하는 축제에서 아이들끼리 전쟁놀이 같은 걸 하면, 평소에 저를 고깝게 보던 애조차도 대장은 무조건 피도란스라면서 만장일치로 표를 던졌다. 그렇게 앞장서서 승리를 따내던, 마을 아이들의 든든한 대장이었던 어린 시절이었다. 세상이 제 것처럼 맘대로 될 거라고 믿었던, 정말로 철없던 한때.
그리고서는 견습기사가 됐다. 특별한 사명감 때문은 아니었다. 그 나이 애들이 그러하듯이, 기사는 영웅이었고 동경이다. 인생에 별 구김 없이 살았던 애라면 선뜻 손을 뻗곤 하는 길인 거다. 특히나 명예를, 올바름을 추구한다는 점이 좋았다. 정의의 사도라도 된 것 같았으니까.
그런 맘을 가지고 있었으니, 기사론 수업 때면 교관님이 앓는 소리를 내기 일쑤였다.
“정의로운 사람이란 무어 같으냐?”
“정의로운 사람이요? 나쁜 놈들 쥐어패는 사람 아닌가요.”
“하아….”
이걸 어디부터 이해시켜야 하는지 막막한 표정은 쉬이 떠나질 않았다. 기사론 수업 자체가 자신의 주장을 남에게 설득해봐라, 자신의 주장이 타인의 설명에 상충한다면 과연 꺾이지 않는지도 시험해봐라, 를 위함이라고 설명한 탓에 피도란스는 아주 단순하게 정의定義한 자신의 정의正義를 확고하게 지키고 있었다. 세상의 자잘하고 복잡한 규칙에 비해, 모든 것을 만능으로 해결할 진리는 단순하리라고 믿은 탓이었다.
논리와 이론으로 생각을 고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험하고 체득하여야만 생각이 바뀌는 사람이 있다. 피도란스는 명백하게 후자였다. 그리고 결국, 그런 계기가 찾아오고 만다.
원정 훈련으로 들렀던 어느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교관님이 야전 상황도 아닌데 굳이 뒷산에 나가서 산나물을 캐올 필요는 없다고 하면서, 마을에서 야채 좀 사서 오라고 피도란스를 보냈다. 다른 애들은 아직 훈련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기도 했고, 그 혼자 보내더라도 수레를 빌리면 두 번, 그냥 상자째 들더라도 네 번 왕복하면 될 일이라 그랬다. 거기까진 정말 평범한 심부름이었다. 간만에 민가 있는 곳에 야영지를 폈으니 집밥 비스무레한 거라도 먹이자 했던 교관의 판단은 엉뚱한 곳으로 굴러갔다.
산자락을 끼고 있는 마을이었지만, 큰 도시가 걸어서 나흘 떨어진 곳에 있고 길을 잘 닦아놓기도 해서 나름대로 규모는 있는 축에 속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런 행정력이 덜 닿으면서도 돈이 도는 곳이 으레 그렇듯이, 호랑이도 못 되는 것이 으스대며 살아가는 곳이기도 했다.
시정잡배가 야채가게 사장님 내외한테서 자릿세를 뜯고 있었다. 큰소리로 윽박지르고 칼을 들이대며 으르대던 놈들과 피도란스의 눈이 딱 마주쳤다. 약 일 초의 침묵. 피도란스는 들고 왔던 지갑을 옆에 행인한테 아무렇게나 맡기고, 그대로 연습용 검을 검집째로 휘둘러가며 시정잡배를 마구 내갈겼다.
혼자, 그것도 덜 여문 몸집으로 보아 성인이 아닌 애가 성난 사자처럼 날뛰며 성인 다섯을 두들겨 팬 소동은 당연히 빠르게 퍼져나갔고, 교관이 달려왔을 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시정잡배라고 해봐야 그냥 칼밥 좀 먹던 사병급 아닌가. 남들보다 한 뼘은 더 기사에 가까운 자가 못 이길 이유가 없는 거다. 교관은 거의 비명처럼 외쳤다.
“피도란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저잣거리에서 폭력을 행사해?”
“아니 근데, 교관님. 들어보세요. 야채가게에 왔는데 저놈 자식들이 자릿세 어쩌고 하면서 민간인한테 칼을 먼저 들이댔다니까요? 그걸 어떻게 두고 보나요.”
노끈으로 굴비처럼 둘둘 말아둔 다섯을 발로 툭툭 차대며 피도란스는 저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감정이 실려서 그랬는지 아니면 아까 흠씬 들때리면서 어디 뼈라도 부러졌는지 놈들이 앓는 소리를 냈지만, 피도란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교관님이 왜 저런 반응인지가 이해가 안 가 부루퉁해질 뿐이었다.
“그래서 지금 남의 칼은 다 분지르고, 검집을 몽둥이처럼 써서 다 후려패놨다, 이거냐?”
“네. 인명 피해는 안 냈잖아요. 어, 검집이 안 되는 거면, 그럼 가판대를 휘두를 걸 그랬나요. 하지만 그건 좀...”
“그런 의미가 아니잖나! 사람이 안 죽었다고 인명피해가 안 난 건 아닐 텐데, 피도란스!―쯧.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주변을 보고서, 야영지로 돌아가서 마저 이야기하도록 하지. 뒤처리는 내가 할 테니 복귀하도록.”
쳇, 입안으로 볼멘소리를 낸 그는 교관의 말에 따라 주변을 슬그머니 훑었다. 보나 마나 나쁜 놈들 때려잡은 나한테―,
“어?”
저잣거리의 상인들도, 그 주변에 몰려들었던 행인들이며 구경꾼들도 저를 공포에 찬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그 외의 다른 감정도 섞여 있긴 했지만, 작건 크건 이쪽을 향한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어려있다.
그러다가 어떤 아이와 덜컥 시선이 맞았다. 야채가게 사장님의 아이였을 거다. 불량배 놈이 칼을 들고 다가올 때, 엄마 아빠 하면서 사장님 내외의 뒤로 숨는 걸 봤었다. 그 애는 흠칫 떨면서 또다시 엄마 아빠의 등 뒤로 숨었다.
그 사실에 피도란스는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등줄기가 차게 식는다. 왜, 어째서. 저 불량배들을 보던 것과 동류의 시선이 제게 향하는가.
첫 깨달음이었다. 명예를 갖추지 않은 ‘힘’은 그저 폭력일 뿐이며, 기사나 칼 든 용병이나 불량배나 힘을 가졌다는 점에서 결국 남들 보기에 본질은 같다는 것을. 그러므로,
“―너희도 너희 ‘힘’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잘 생각해봐야 해. 열심히 고민하라고 있는 견습 기간이니까 말이지. 어쨌든간, 그런 막무가내도 지금은 이렇게 멀쩡히 격기사 하고 있으니, 너희도 할 수 있을 거야. 이야기는 끝. 질문 있는 사람?”
이야기를 마쳤다는 뜻에서 짧게 손뼉을 친 피도란스는 곧 손을 든 두 사람, 뮤사와 루지안을 보고서 말했다.
“그래, 뮤사. 먼저 말해봐.”
“그래서 교관님께는 혼났나요?”
“아니, 물어도 뭘 그런걸. 당연히 엄청나게 혼났지. 반성문도 썼어. 루지안은?”
“어, 저도 같은 질문이었어요….”
“그러냐. 그럼 이제 진짜 끝! 아이고, 내가 너무 시간 잡아먹었는데? 전술 수업까지 할 수 있나?”
동굴 밖으로 해가 꽤 많이 기운 것이 보였다. 어느새 비도 그쳤던 모양이다. 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날이 저물 것 같았다. 남의 수업 시간을 까먹은 게 미안해서 머리를 긁적이고 있자, 지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꽤 괜찮은 기사론 수업이었으니 됐다. 승냥이 네 차례는 한 것으로 치자.”
“기린 말대로. 정말 전술 수업을 해야 했으면 도중에 끊었어.”
담당 교관 둘이서 그렇게 말했으니 됐다 싶었다. 거기에 덤으로 다음 타자도 때웠으니 꽤 수지가 맞지 않나. 다랑이 곧 사태를 파악하고선 “어, 그럼 제 차례가 한 사람만큼 더 빨리 온다는 거예요?”라며 다음은 뭘 준비해놔야 하냐고 허둥댔다.
시간이 어정쩡하게 비는데. 기린과 눈이 마주친다. 알아서 하라는 듯이 까닥이는 고개. 그렇다면 할 일은 하나지. 이야기 듣느라 몸도 굳었을 건데.
“그러면 저녁 먹기 전에 가볍게 뛸까?”
견습 병아리들한테는 완전히 폭탄이었다. 땡그래진 눈들이 우르르 피도란스를 향했고, 개중에서 누가 빼액 외쳤다. 억울함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목소리였다. 한둘은 아니었는데 굳이 구분할 의욕도 안 났다.
“왜 매번 우리만 뛰어요! 다른 기사님은요. 아니, 적어도 우리한테 뛰라고 하는 피도란스님은 안 뛰어요?!”
제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게 있다면 도발은 사양하지 않는다는 점. 피도란스는 한쪽 입가만 빼죽 올려서 웃었다.
“호오, 그러면 같이 뛰어볼까? 나랑 끝까지 달릴 수 있는 녀석은 앞으로 기초체력 훈련 면제. 나는 너희 선두 속도에 맞추는 걸로.”
“좋아요!”
“어디 한번 해보자고!”
“오우!”
들불처럼 일어난 아이들의 의기투합을 다른 기사들은 어이없어했다. 다섯 바퀴쯤 뛸 것을 자진해서 무한달리기로 바꾸다니.
“…쟤들은 명예롭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고, 그냥 위기감지 능력이 없는데?”
루디카가 말했고, 지우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닥불을 나눠서 저녁식사 만드는 데에 옮기고 있던 너구리 역시 ‘저런, 가엾게도….’하는 표정으로 이미 연병장으로 뛰쳐나간 병아리들을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오늘 내도록 조용했던 새까만 닭이 거기서 한술 더 떴다.
“승냥이, 그럼 그 선두라는 건 너 말고 나머지 뛰는 사람 중에서 맨 앞이란 뜻이 맞는가?”
“그렇지. 왜?”
“좋아. 무르기 없기지? 그럼 나도 뛴다!”
“허. 거 재밌네. 승부, 받는다.”
그리고 병아리 가운데 유일하게 밖으로 달려가지 않았던 나진이 싫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은 채 손을 들고 질문했다.
“…승냥이님, 저는 빠져도 되나요.”
“아니. 너도 네 한계는 한번 보고 싶지 않니? 도중 기권이라도 해, 나진.”
“네에….”
씨알도 안 먹히는 물음이었다. 아니, 애시당초 현직 기사에게 맞춰서 달릴 수 있다면 기초체력이 필요 없는 건 당연하지 않나. 이런 말장난에 홀랑 넘어간, 바보 같은 동기놈들 같으니라고! 저 녀석들은 돌아버린 게 분명하다. 머리를 굴릴 여력도 없이 벌써 탈력감이 장난 없었다. 연병장 쪽을 보니, 저만치서 준과 루지안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견은 에라 모르겠다, 하며 터덜터덜 걸었다.
결과적으로 기초체력 훈련을 면제받은 견습은 아무도 없었고, 푸른 승냥이와 새까만 닭 사이의 체력 승부가 되었다는 그런 어느 날의 이야기다.
1. 맨 마지막 장면을 쓰고싶어서(무한달리기) 쓰다보니 이전에 풀어댔던 썰까지 한데 뭉뚱그려져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2. 피도란스도 견습 시절 교관 속 좀 썩였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편.
그치만 보세요. 견습 평가전 직후 회의 때, 기린이 싸가지는 둘째치고 명예롭지 못하다며 짜증을 내는데, 거따대고 그건 우리가 가르치면 되고~라는 반응이었잖아요? 자기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거잖아요??
3. 골목대장과 덧셈으로 작용하는 기사
이거는 뭣 좀 찾아보다가, 승냥이가 원래 무리사냥에 능하며 집단생활을 하고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별로 신경 안 쓰는 부분이지만) 리더인 암컷만이 교미할 권리를 지닌다고 하는 것에...피도란스는 현 시대의 기사 중 드물게 덧셈으로 기능하는 기사이지 아늘까..싶었고, 나륜 최종 전에서 닭하고 태그가 됐다는 점에서 증명된 거 아닌지.
2와 3을 통틀어서...최애가 따로인 것과는 완전히 별개로, 특수2기 인솔기사 중 제일 사람됨됨이가 좋은 건 피도란스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대체로 다들 괜찮은 어른들이긴 하지만!! 알고 지내고 싶은 사람은 피도란스야...
4. 왜 뮤사가 저 질문을 했느냐면, 1) 피도란스 분대 소속이었고 2) 조금 많이 의외로운 이야기를 듣고 당황해서(승냥이 님을 꽤 온화한 축이라고 생각했을 것) 툭 튀어나온 질문. 더해서 1) 해당 의견을 제시해주신 트친 깜님께 압도적 감사
5. 견습 시절 피도에게 반성문 벌칙은...연병장 뛰는 건 이 친구한테 썩 벌칙이 아닐 것 같아서...+교관님도 이번엔 얘도 뭔가 깨달은 게 있겠지 하고 생각 좀 해라, 하고 내주신 것.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