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서약

기어스를 맹세하는 새까만닭 와론

230701

* 애늙은이 내용기반(외전까지), 잔불 조금

* 와론 투구 벗음. 캐붕 주의, 그리고 황제에 대한 날조 있습니다

* 와론과 나견과 황제와 악마기사

이것은 와론의 이름 앞에 새까만 닭이 붙던 날의 이야기이다. 

"기사, 와론. 그대의 차례이니 들어가라."

문지기가 호명하며 문을 열어주자 와론은 입구를 지나 넓은 홀로 들어선다. 높은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창문마저도 홀 전체가 흰 색에 가깝게 꾸며져있고 황제의 알현실치고는 소박하다. 와론은 왜인지 더 부드럽게 느껴지는 공기를 투구 사이로 호흡한다. 홀의 끝에 있는 흰 돌로 만든 단에는, 거의 움직임이 없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의자에 앉아있다. 와론은 그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는 은과 빨간 보석으로 장식된 관을 쓰고 그다지 위엄을 세우는 낌새도 없이 다만 가만히 와론이 그에게 나아오기를 기다린다. 

와론이 황제에게 나아가며 그의 새까만 망토가 그를 뒤따라 펄럭거린다. 성큼한 걸음소리가 홀을 울리는 동안 긴 로비를 금세 지나 단 앞에 도달한다. 그가 투구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자 그는 주름이 자글하고 비닐 같은 손을 약간 들어 올려 와론을 부른다. 

"이리로 가까이 오게."

와론은 황제의 앞으로 단을 오른다.

"투구를 벗어 줄 수 있는가? 와론이여."

그는 잠시 망설이다 투구를 벗어 한 손으로 옆구리에 끼워들었다. 투구에서 어깨를 넘는 길이의 옅은 회색 머리가 흘러내리고 몇 가닥이 얼굴 앞으로 떨어진다. 아무도 본 적 없다는 그의 맨 얼굴을 황제는 잠시 응시하며 놀라운 빛을 띈다. 흰 얼굴에 자리 잡은 눈은 차분하고 선명한 인상을 지녀 그 위를 숱 있는 속눈썹과 쌍꺼풀이 내려와 덮었고, 그 끝에 이어진 시선이 아래를 응시하며 황제에게 무심하게 가 닿았다. 젊은 얼굴에는 날카로움과 무인 특유의 정제된 느낌이 서려, 무표정한 얼굴에 어떤 숭고함과 투명함을 주었다. 일말의 미소 없이 약간 올라간 입꼬리가 여유를 담고 있었다. 황제는 그것을 마음에 들어하며 천천히 그를 뜯어본다. 자신에게 닿는 시선을 받아내는 와론의 눈빛이 마치 오랜 친구를 바라보는 듯하면서 저편에 어둠을 담고 있다. 검은색 옷차림과 이 무채색의 청년을 바라보던 황제는 어떤 빛깔의 이명을 떠올린다. 

그의 표정은 이미 기사의 길을 걷고 있는 자의 것인지라, 황제는 그와 익히 닮은 오래전의 누군가를 기억해내려다 길어지는 생각을 털어낸다. 늙은 황제는 눈 앞의 기사에게 명령을 내린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게."

와론이 투구를 안은 채로 한 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춘다. 검은 망토 자락은 그의 등을 따라서 바닥에 떨어져 펼쳐진다. 황제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몸을 앞으로 숙인다. 긴 백발을 뒤로 늘어뜨리고 왕관의 밑으로 반 묶어 쪽지어 둔 것에서 군데 군데 남은 자색의 머리칼이 보였다. 와론은 고개를 숙이고 두 눈을 감는다. 황제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한다. 

"와론이여, 자네는 이미 이 맹약의 무게를 알고 있다."

그 목소리가 서약을 주는 것 같지 않아 와론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다. 

"이 맹약을 지키는 동안 자네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네. 그 힘으로 기사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게. 이제 막 기사가 되었지만 자네라면 할 수 있으니, 내 이렇게 부탁하네. 그리고," 

황제의 진지하던 눈동자에 빛이 서린다. 

"부디 맹약을 어기지 않도록 명심하게나. 그때는 힘을 잃게 될 걸세."

그리고 황제는 익숙하게 엄숙하고 낮은 목소리로 목을 다듬는다. 서약을 주려는 것이다. 와론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그의 옅은 색의 머리칼과 목걸이가 앞으로 쏠린다.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눈을 감는다.

"그대는 앞으로 기사, 새까만 닭이다. 이름에 걸맞는 명예를 행하여 업적을 쌓을 것을 맹세하는가?"

"예."

"그대는 그대의 명예에 따르는 한 황제를 배반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 가?" 

"예."

"기어스는 그대에게 치명적인 족쇄. 그대는 기어스를 감내할 것을 맹세하는가?" 

"예."

"그대는 스스로가 악마기사와 같이 되지 않으며, 그 같이 명예를 저버린 자들을 처단할 것을 맹세하는가?"

"...예."

이 명예의 서약은 몇 백년 간 토씨 하나 다름 없이 백색의 홀을 울려 온 것이다. 어느 때는 힘차게. 어느 때는 고요하게. 어느 때는 고결함으로. 어느 때는 눈물로. 수많은 기사와 수많은 황제에 의해서 같은 문답이 반복되고 사그라든다. 황제는 한 때 이 서약을 자신의 것으로 여긴 적도 있었으나, 이제는 그저 서약을 치르는 기사를 매개하는 역할일 뿐임을 안다. 기사의 서약은 스스로를 기사로 존재시키는 것이다.  

황제는 고저 없는 와론의 대답에서 무언의 무게를 읽어낸다. 고개를 드는 실루엣이 희게 빛을 받는다. 빛에 저물어가는 눈매가 속눈썹을 내리깐다. 그의 눈이 무언가를 계산해보듯 황제의 옷자락을 지긋이 응시한다. 마음 깊이 품어 온 의문마저도 이 순간에는 그에게 연연하지 못한다. 

와론, 그는 이제,

"기사, 새까만 닭. 

그대의 기어스는...."

이명을 들은 와론의 몸이 순간 움찔한 것에 황제는 내심 웃는다. 오랫동안 살아온 황제가 보기에 기사라는 존재들은 초월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때때로 일반인보다도 순진했다. 황제는 잠시 젊은 기사의 손을 달라한다. 희고 기다란 손가락 위에 살가죽이 바싹 마른 손을 얹는다. 

"혹시나 말씀드리지만 호위는 안합니다."

황제의 친근한 행동에 와론이 뜬금없이 내뱉는다. 황제의 표정이 물에 탄 설탕처럼 풀어진다. 살 날이 길지 않은 황제에겐 차라리 친구가 필요할 터이다. 그러나 이 와론이라는 기사는 오랜만에 황제의 그리움을 채워준 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허허, 그 마음도 없다고는 못하겠네만. 한창 자유로울 젊은 기사를 묶어 두어야 쓰나. 가서 용하고도 싸우는 업적이라도 세워야지. 호위가 아니어도 왕궁에는 기사가 많다네."

그는 잠시 혈기가 왕성하다고 하기에는 다소 창백한 와론을 쳐다보다가 눈꼬리를 접으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요즘에는 기사들이 할 일 없이 이 늙은이가 뭔가를 시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네. 내 착각이겠지만은... 나이가 들으니 나도 한물갈 때가 됐지."

이미 간 게 아닌가, 그것까지 소리 내어서 말할 위인은 아니었다. 아마 평소에는 꽤 대담한 성격이리라. 와론은 갸우뚱한 표정을 짓고 황제는 그 손을 놓아준다. 황제가 되어 몇 세월을 보내오며 그 간의 영화와 아득한 현명과 수많은 기사의 맹세를 얻었어도 이제는 왕성 한 구석에 있는 그의 자리만을 지킬 뿐이다. 그러나 말년, 오늘에서야 본 그 눈빛이 오래 남을 것 같아 황제는 투구 속으로 감춰질 때까지 지켜본다. 

"황제께서 승하하셨네, 새까만 닭!"

누군가 나무 위에 올라 앉은 와론에게도 그 소식을 알렸다. 수도는 며칠 전부터 전체가 검은 기로 물들어 있었다. 

"그 양반. 오늘 내일 하더니 결국 가셨구만."

와론은 창에 기대어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긴다. 기어스를 맹세한 날 이후로도 그는 늘상 이명인 닭처럼 고개를 갸웃대고 목걸이를 건드리며 의문에 빠져왔다. 와론은 백색의 홀에 앉아 바스라져가던 존재를 떠올린다. 그 날 유일하게 자신의 맹세를 지켜보던 그는 와론에게는 드물게 우호적이고 어딘가 만족스러워 보였다. 

"뭔지는 안 알려주고 서약만 하라더니.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네."

말을 거는 것은 그가 추모하는 방식이다.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은 어려웠기에. 와론은 하늘을 올려다 본다. 

+

"그대는 이미 맹약을 치뤘군. 기사가 될 수 없네."

"예?"

"그대에겐 쌍둥이가 있지 않았나? 그도 마찬가지네."

황제는 안타까운 듯 웃으며 말한다. 나견은 멍하니 알현실을 나온다. 기사가 될 수 없다니? 그가 기어스를 맹세할 수 없다는 말인가? 나견은 그의 보호자로 함께 니젤로 올라온 새까만 닭을 찾으러 갔다. 

"아, 황제? 원래 좀 싸가지가 없더라고. 왜 그렇게 말했는지 다시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나견의 말을 전해 들은 와론 역시 의문스럽다는 반응이다. 기사 시험을 통과한 자가 기사의 자격이 없다니 대체 무슨 말인가. 와론은 새로운 황제가 즉위 한지 한참 지나고 나서 처음 보았는데, 기사가 황제를 알현할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이름이 라흐 뭐던가. 할아버님은 자네의 역할에 거는 기대가 크셨지, 하고 자기보다 한참 어린 놈이 초면에 그리 말하던 게 기억난다. 아마 나견과 함께 오랜만에 찾아가봐야 할 듯 하다. 

++

기사는 죽는 날까지 기사로 죽는다.

그들은 기어스를 어기지 않는 한 힘을 잃지 않는다. 이명 또한 그와 같다.

첫번째로 황제 앞에 울린 서약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그 기사의 이름에 관하여서는 딱히 전해지는 바가 없고, 다만 그의 제자가 스승에 대해 통찰한 내용만 남아있다. 이 제자는 후에 두 번째로 서약을 맹세한 기사가 되었다.

그는 최초로 기어스를 서약하여 그 힘을 받아 차원이 다른 강함을 가진 기사가 되어, 주변의 시기와 부러움을 샀다. 그는 황제가 직위하기 전부터 매우 가까웠던 사이로 알려져 있고, 기어스는 그들이 기사와 황제가 된 후에, 그와 황제 간의 행해진 충성의 맹약이었다. 오래 전, 황위에 올랐어도 강력한 기사와 봉건왕국들 사이에서 황제라는 것은 참으로 약한 지위였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그 때의 황족은 용이었고, 그와의 맹세는 세계의 법칙을 깨는 힘을 부여했다고 한다. 이 영혼에 새겨진 서약은 땅의 속한 것을 포기한 대신 한 차원 너머의 힘을 여는 선물이 되어준다.

"기사들은 위험하지. 하지만 그들을 죽여서는 안되네. 그들은 앞으로 올 세상에 중요한 존재. 나를 비롯하여 세상의 용은 줄어 들어가고, 기사들은 그 힘을 나눠가지고 있네. 그들의 힘은 갈 수록 강력해질 거야. "

" 좋아. 약속한, 아니 맹세합니다. 저는 스스로 그들을 옭아맬 수 있는 고삐가 되겠습니다."

황제의 얼굴에 걱정스러움이 서린다. 그는 황제에게 자신의 계획을 고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앞으로 네가 기억되는 한 사라지지 않는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단순히 황제의 명령만으로 기사들은 맹세를 하지 않아. 기사인 네가 필요하다. 그러나 너는 기억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려면 제게는 힘이 필요합니다. 이야기를 완성시킬 자는..."

"그 힘은 내 이름으로 행해주겠다. 너는 그를 찾도록 해."

기사가 기어스를 맹세하는 대신 황제는 그에게 자신과 자신의 후대 황제들이 대대로 한 가지를 해주기로 약속했다. 그것은 바로...

"....당신께 바친 이 약속은 때가 오면 지키겠습니다. "

"그때가 되면 남쪽으로 가, ooo. 머지않아 그곳에 있는 자들은 반란을 일으킬 거다."

어느 날, 그의 소식을 전해 들은 황제는 자신 역시 약속을 이행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역할은 마쳤노라고, 그는 황제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메세지를 보냈다. 황제는 우선 그의 이명을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자신이 약속대로 맞이하여 그에게로 보낸 그의 제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발행한 지 하루 지나 주저리 추가합니다. 안 읽으셔도 무방

  제 2의 악마기사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애늙에서 총량 보존 법칙이 있듯이 악마기사가 500년 후에도 살아있다고 가정했습니다. 악마기사에게 황제들이 한 약속은 그의 목숨을 반영구적으로 지속시켜줄 것. 원래의 기어스는 족쇄의 의미가 강해서, 황제와 악마기사 사이의 기어스는 힘과 금기(맹세)의 교환이 아닌 서약와 서약의 교환이라고 쳤습니다. 

작업곡이자 OST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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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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