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배계.

목주와론. 내 몫의 편지의 이름을 지우고

1.  

 

배계 열 아홉 살의 당신께.

 

 

극한의 공포 속에 홀로 남고서야 항상 방법을 찾게 되는 것 같아. 그래. 나도 이제서야 너에게 답장을 쓸 마음이 났다. 전부터 마음 먹던 것치고는 문득. 갑작스레 떠오른 결심이었어.

 

날지 못하는 새가 되기에 그는 너무 가벼웠다. 폭풍에 간단하게 휩쓸려가버리는 것이다. 검은 새는 망토를 우비처럼 뒤집어 쓰고 있었다.

그는 부리 뒤로 표정을 지었다. 역병의 뒤에서 창을 지팡이처럼 짚고 죽음을 고하듯 그렇게 엄숙하게 서있었다. 죽음이 병의 뒤로 반드시 와야할 것이듯이 앞으로 벌어질 일들도 그렇다고 체념한 채로.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잿빛 짐승에게 피냄새가 많은 것을 희석해주었다. 검게 주름진 악우가 모든 것을 가리고 과거의 편린 하나만을 들췄다. 슬픔과 분노가 어긋난 태피처럼 번갈아 수를 놓고 있는 얼굴이었다. 무심은 둘 사이로 커다란 벽을 그리고 있었다. 푸른 꽃이 듬새듬새 피어난 벽화로 가로 막혀있었다.

와론은 그것을 지켜보다 문득 참을 수 없이 괴로워 몸부림치고, 바닥 없는 속을 헤엄치는 밤을 보냈다. 절망이 그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은 내게 차라리 기사 따위는 잊으라고 말하는 편이 나았을 거야. 기사와 무관한 삶을 살으라고 얘기 해주었다면 우리가 이토록 괴로울 필요가 있었을까? 진정으로 말하자면 나 역시 그렇게 살 수는 없었지. 당신도 나도 고된 굴레를 나눠 지고 있어. 당신이 고난을 자초했다는 건 아니야. 그저 당신은 기사로, 나는 그들의 적으로 서로를 만났기 때문에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었지. 온전히 당신만의 것이 아닌 고뇌였지만…. 당신이라도 부정해주었다면. 이 고뇌를 혼자 견뎌야 할 내 마음을 단 한번이라도 헤아려 주었다면.

  

마치 허락된 제 몫의 시간을 전부 써버린 사람 같았다. 의사에게 약을 구하는 중독자처럼 허덕이다가도 어느 밤에는 두 손을 간절히 모으고 기도를 올렸다. 인간으로 지내지 못하는 밤은 괴로움으로 꾸려져 있다. 무엇도 와론의 죽음보다는 거대하지 않았다. 아가리를 다물고 필사적으로 숨을 죽인 기척이 결국 울음이 되어 새어났다. 사연 먼 곳에서부터 검은 것들이 절여져 밤의 껍질을 만들어 낸다. 어려움을 헤쳐나가기에 그는 너무나 제정신이 번뜩인 채로 각성했고, 몸을 일으키기 위해 손톱을 세워 흙이라도 치긁었지만 곧 손가락과 함께 부자연하게 꺾이어 버리고 말았다. 괴성이 목구멍에서부터 포효했다. 인간이 되지 못한 어느 설화의 괴조처럼. 갈가리 찢어진 노호가.

기도가 손 끝에서 으스러졌다.

 

 

 2.

방향을 잃은 분노가 마치 도마뱀의 제 꼬리 물기, 코끼리의 코잡기. 아무 이동도 없이 그저 같은 곳에서 내내 뱅글뱅글...어떻게 이렇게 세상이 차가울 수 있을까? 투구를 쓰고 난 첫 번째의 감각인 후각이 그에게 외쳤다. 난 너무 좁은 것 같아. 더 이상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아서 그래. 두번째 시각이 외쳤다.

다리가 없어. 감각들의 지각이 세 번째로 외쳤다. 그럼에도 날아갈 수 있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하던 일의 흉내 속에선 그의 잔영이 보였다. 그들은 날개가 없어도 바람을 탔고, 그는 감각을 통하지 않고도 이 순간의 와론을 불렀음이 느껴졌다. 딱딱하고도 유연한 흑화를 거친 껍데기를 지닌 그를. 닦아내리는 갑옷 뚫은 구멍의 품으로 이질적인 물건만이 드러난다.

 

생일 축하해, 와론.


그는 자신의 생일은 알지 못했으나 와론이 세상에 태어난 날은 알았다. 심상하니 또 심상찮게 적어 놓은 말이 겉면을 펼치자 툭 털어졌다. 한 생을 살고난 뒤에 만날 일이런가. 이제에 이르기까지 결국 헤어짐을 반복해야 했다. 함께 지내온 짧은 세월이 회답처럼 어두커니 와론의 발목을 붙잡는다. 그와 함께 보았던 산하는 십년이 지나도록 무엇하나, 여전하였음에도.

와론은 외로운 밤에 붓을 들었을 것이다. 황도에나 있다는 기사들에게 보낼 서신을 하얀 손 끝으로 정갈히 써내려간다. 어두운 등불 아래에서 밝은 화선지 위로 어둑한 나뭇빛의 머리칼이 기운다. 너도 하나 맡아줄까. 여기 우리는 평생 갇혀오는 상상을 한다. 불도 제대로 피울 수 없는 너와집에 둘이서. 일반적이고 평범한 삶의 행복감이란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와론은 불도에 대해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으면서 혼자 실없이 대염한다. 보내지 않고 남겨둔 편지는 그의 갑옷 안쪽 품에 들어 있었다. 피에 약간 젖은 그 갈색 봉투는 차곡히 접힌 종이 쪼가리가 들어있었다. 그는 결국 무슨 마음을 품었던가.

너도 이런게 필요할 날이 올 거야.

맨 손이 봉투를 따라 손톱을 긋고 장지 끝으로 되누르며 뜻모르게 웃는다.

나이 밖에 모르더라도, 네게도 곧 네 것이 생기겠지.

즐거이 웃는 소리가 귓속으로 밀착한다.

결국 너도 내가 지어준 이름에 만족했으니.

가장 가까이 있는 이에게조차 고하지 않고 홀로만 작용하던 생각들이 거기에 적혀있다.

긴긴 연서의 끝은 한마디의 보잘 것 없는 맹세로 맺어지는 것이다. 너의 친애하는 벗으로부터. 그것은 두 손 안에서 뭉쳐지고 구겨지고 찢겼다. 그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으니 불을 훑어와 두엄 속으로 타들어갔다.

불길이 낼름 기어오르며 화선지의 겉면을 훑는다.

 

모진 성격의 그는 작별에도 칼같은 사람이라고.

 

이 종이가 잘린 단면 같이 끊어낼 정이라고.

사사롭게 손끝으로 이어지는 가느란 연기에 종이 뭉치가 비에 젖어 뭉글하게 장작 아래로 꺼져 내린다. 둥글게 비추는 불빛의 모서리 바깥으로 와론은 땅거미가 유독 불긋불긋하던 그 날과 닮아있었다. 야생화의 수술이 설경처럼 덮고 있는 들판으로 가며 기억은 서서히 하얘져가, 실타래를 도로 누에의 고치로 감고 다시 풀어해치듯이 구름의 모양으로 되돌려 둔다. 울분 섞인 울음이 까만 재처럼 묻어나왔다. 바람이 은실의 머리를 흐트러트린다. 

나, 새까만 닭 와론은 이 증서를 가진 이가 성인이 될 때 그에게 가진 유산과 그것에 대한 모든 권리를 양도하며…

 

우리가 만나지 않아도 될 어느 세상에서도, 당신의 우는 모습만은 떠오르지 않아

나는 웃는 연습을 했다.

네가 떠나도 네 이름만은 떠나지 않아, 배계, O O 에게, 라고 쓰인 내 몫의 편지의 이름을 지우고...

3.

별이 우는 밤 사실 이미 오래 전 남기고 사라져간 말들이 전해지곤 했다.

여름의 청령 같던 손을 놀리며 다가와 거친 목소리로 흉강을 찢어놓고 간 소리가.

 

나무들의 틈새로 밀려오는 아침. 그 위로 덮히는 밤. 지평으로 깔리는 땅거미. 신념 어린 채로 모여 밤을 지새던 풀무치들. 염일의 태양도 결코 물들이지 못하던 암야....

그리고 새벽의 연호와 함께 일출보다도 이르게 찾아오던 족쇄와 망연. 밤잠을 설쳐가며 당신에게 기도하던 날.

그곳에서 숲의 진정한 모습을 보았지. 녹나무의 밑에서...

수백만의 일주 속에서... 

 

무엇에도 끝은 있다는 건 바람직한 일이었다. 검은 상복을 보던 새까만 닭이 중얼댔다.

검은 색도 이젠 질려. 그만 둘 때가 온 거겠지, 와론...

천천히, 아주 느리게 노름쇠를 푼 그는 금속의 반구가 오목하니 들어간 부분에 손가락을 넣었다. 일영의 미세한 틈으로 색 없는 중단발이 내려앉았다. 날것의 바람은 한낫 메마른 풀줄기가 된 이를 거칠게 휘저어놓고 갔다. 머리칼이 가벼운 것이 되어 바람을 따라 사방팔방으로 들렸다. 너무나 긴 시간을 홀로 보냈다는 사실이 문득 내려앉았다. 편지의 수신인은 어디에도 없어, 평원을 이구석 저구석 떠돌고 날리다가 어느 순간 사라질 것이다. 마음은 낱장의 종이로 되돌아가 흙에 묻히고 썩고 나서야 당신에게 가겠지. 그로부터 시작되어 이곳 와론의 발치에서 종결짓고 그의 손으로 종결 지을 흐름이었다.

무엇에도 끝은 있었다.

...

ㅡㅡ.

다만 잊을 수 없을 뿐이다. 금새 다른 것을 연속하는 파도를 보았던 처음의 순간은 물벽 같은 울렁임으로 손끝이 덜덜 떨리었다는 사실을. 

당신이 이런 내 마음을 모르실리 없다.

모든 연유들의 시작을 당신의 이름에 걸어놓고 가셨으므로.

저 땅거미에 흔들거리는 완연한 일구보다도 더 뜨겁게 당신에게 가 닿았을 것이다.

나는 두서도 종결도 없이 당신을 떠올리고

당신의 마음을 지평의 가녘보다도 더 헤아리건만

당신은 평생 턱을 괴고 앉아 고민해보라는 듯 말미를 흐려버리는 것이다…

 

 

숫자를 적은 잉크가 나무의 벌레 갉아먹은 잎처럼 둥그렇게 지져졌다. 밀랍은 먹인 종이는 비에 잘 젖지 않았다.

아니야, 와론은 알면서도 진흙 펄을 두 발로 서 누른 채 머리카락이 엉키도록 찬찬히 쓸어 넘겼다. 이런 것으로 무뎌질 감정이 못되었다. 너와 내가 같은 공간을 주행하지 못하는 건 참으로 잔인한 행성의 안배이자 뒤엉킨 시간들의 타래이지. 오늘은 아마도 당신이 설프게 정한 내 생일인 탓에. 내 이름도 태어난 날도 정한 당신을 친족이라고는 생각한 적 없었다. 현재에도 당신께 눈 멀어있던 내게 언제나 불안을 구름처럼 몰고 왔더라고.

닭이 울며 시야를 알리고 있었다. 폭풍은 괴조와도 같이 제 몸집을 부풀렸다. 여기에는 그 어떤 축하도 자리 할 수 없었다.

와론. 너와 내가 같은 기사로 나란히 선다는 건...

 

 

4


그는 자신의 발이 기어이 오리지널의 선을 밟고 넘어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제야 그의 벗은 이곳을 벗어나 광대한 은해의 공주에 뛰쳐들듯 섞여드는 걸 보았다ㅡ 눈물이 등차를 타고 미끄러졌다. 와론은 어두운 절벽에서 몸을 던져 밤의 어둠에 휘말리듯 뛰어들고 그의 론누와 하나가 되었다. 검은 창과 그는 입자 단위로 분해되어 일개의 개체로 합해진다. 구름과 공중의 단절된 틈을 부수며 반댓편으로 날아올랐다. 검은 폭풍이 되어 날아가는 자신이 보였다.

은하가 그와 같이 달려주었다. 공전의 궤도를 잃고 추락하는 행성이 유성이 되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글에 대한 주저리와 연성근황. 자유로운 해석을 좋아하신다면 읽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극성팬인 가수 CocoRosie의 가사에서는 죽음을 경험한 이의 본인이나 주위에 늘 동물이 등장합니다. 목주라는 죽은 존재와 늘 공존해 사는 와론이 이런 느낌. 인간을 동물로 묘사하는 그 심정이 어떤 건지 떠올려 보게되네요. 목주라는 테두리를 벗어나고 더이상 모방할 존재를 찾지 못한 와론은 괴조가 되어 가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와론은 성인을 지나서 어느덧 목주의 나이를 넘어서는 생일을 맞게 되었고 목주는 일찍이 와론을 위해 기사들에게 줄 추천장이자 증여장을 남겼다는 내용. 목주가 와론에게 써준 서한의 제 나이와 이름 부분을 몇 번이고 고치다가 결국 자신의 쓴 답신과 함께 태워버립니다.



목주와론은 계속 그만 연성하겠다 하다가도 또 쓰고 있습니다. 벗이나 친구 같은 몇글자로 정의되지 않는 관계이기 때문에 더 생각하게 되는 조합인듯합니다. CocoRosie의 노래 animals를 같이 추천합니다.

다음연성은 기린닭 단편들과 칸와를 쓰고 있습니다. 칸와가 현재 5만자 정도 썼는데 소재가 워낙 취향 타는 거라 어떨지 모르겠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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