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경야

거미살쾡이 검힌

*연쇄살인을 수사하는 힌셔.

*애늙은이 스포 有

*등장하는 종교는 가상의 종교입니다. 


일가가 몰살을 당했다며 ㅡ 들려오기만 해도 흉측하고 고적스런 소문이 마을 사람들의 눈동자 속을 소리를 낮춘 채 누비고 있었다. 독불장군의 가을 바람이라도 되는 양 활주하던 대화가 니젤로 달려가던 중 마주한 기사 앞에서 그 힘을 잃고 추풍처럼 추욱 고개를 내리 깔았다. 

기사?

글쎄... 잘 모르는 이야기라.. 

괴담 아니겠소, 

기사라는 관등과 동시에 기세를 잃은 대담이 식어버린 눈빛에서 맴돈다. 그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안색을 살피었다. 주민들은 그 기사에 대해 이미 알고 있어 고하는 말은 평범했으나 윽박이라도 들은 양 시선들이 바닥으로 나앉거나 그를 외면하며 이리저리 분산했다. 

용의 피가 섞였다던데... 

요정 아니었어? 

북부에서 왔다고 들었어... 

저이를 믿어도 되는 거요?

- 안내하겠소, 따라오시오. 

그나마 주민 하나가 겨우 기사를 마을 안의 어느 구석지로 데려가주어 임무에 대한 단서를 얻어 내었다. 뒤로 멀어지는 수군거림을 내버려둔 채로 기사는 제보자를 뒤따라 갔다. 주민들은 필시 그가 범인을 색출하러온 징벌자라고 생각하는 양이다. 그래서 그는 정체를 밝힌 것을 약간 후회하고 있었다. 창문을 안쪽에서 가리운 집에 도달해 그들은 컴컴한 실내로 들어갔다. 짧은 현관을 지나자 넓은 공간으로 이어지고 사람의 것인지 짐승의 것인지 모를 피가 흥건하게 집안을 적시며 오만 구석으로 튀어 있었다. 인간에게서 이만한 양의 피가 흐르다니, 그런 광경에 퍽 익숙한 편에 속하는 무인에게조차 쇠 냄새가 진해 그는 후드 아래로 얼굴을 찌푸린다. 유혈의 현장에 뚜렷하게 남은 건 무엇보다 잔학성. 피해자가 죽기까지 무슨 수를 썼는지 오래 고통 속에 숨이 붙어 있었던 흔적이 가늘게 벽으로 피부림으로 일어 있다. 유체 또한 성치 않다고 동행한 이가 전하는 말을 흘려들으며 특유의 날카로운 관찰력이 끈적하게 들러붙은 사건의 몇몇 전황들을 읽어낸다. 다수의 핏자국과 일련의 행위들을 파악하고 나서야 한참만에 둘은 신발이 더러워진 채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사건 당시 부터 이미 가려져 있던 창문은 밤시간대였음에도 무언갈 감추려고 안에서 내려진 것이다. 갓 전쟁터를 뒤로 하고 온 젊은 기사, 검붉은 하마가 담갈색 후드 자락을 넘기고 나자 소문이 자자하던 금발이 갈대 같이 얼굴 앞으로 떨어졌다. 촌장은 피해자들의 시신을 수습하길 원하느냐고 물었으나 하마는 고개를 저었다. 장례는 마을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치러질 것이다. 조사가 끝났으니 장례를 진행해도 괜찮다는 말을 절차상 전한다고 해서 그에게 시신들에 대한 무슨 권한이라도 있는 건 아니었고, 민간인들의 방식에 참견할 이유도 없다. 장례라는 절차는 그가 속한 무리의 속성상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을 뿐이었다. 현장을 둘러보는 일만 해도 괜시리 눈치가 보였다. 수도로 어서 복귀해야 한다고 대답한 하마는 짧은 묵념조차 없이 타고 온 말 하나 없는 숲으로 파고 들었다. 

1

성 이그니스의 축일이었다. 납골당으로는 조용한 망자의 예에 따라 처서의 미풍이 긴 자락을 드리우며 지나간다. 미풍은 안식이 거한 이들의 비석과 묘석를 감싸 안았고 교회 앞마당에는 새벽마다 이슬이 축축히 깔렸다. 축일을 앞두고는 대미사 이외에 모든 행사는 금지되었다. 개개인만이 조촐한 예배를 드릴 수 있어 성화 앞에 봉헌한 촛불만 이따금 흔들릴 뿐 예배당 안은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하였다. 뻐꾸기와 같이 밤을 순례하는 객들이 조촐하고 미녀린 그 속내들을 터놓으면 찬송처럼 호적한 바람에 묻히곤 했다. 

괴이한 소문이 고원을 건너 이곳까지 찾아온 탓일까. 감히 발을 들이도록 허락치 않았음에도 성도의 앞마당인 어귀 마을까지도 흉흉함이 끼치고 있었다. 그러나 무어라 해명할 수 없는 어두운 연무는 예배당마저 가리우지는 못했다. 몇 백년 전 세상을 뜬 이들에 대해 새겨진 비문와 말 없는 추도만이 적막하게 배회할 뿐이었다. 신도나 사제를 대신해 빈 성전에 자리한 침묵은 그 의미를 누그러트리는 법이 없었다. 기사는 두 손을 합쳐 이마께로 가져 올린다. 아홉개의 촛불이 은촛대의 위에서 양 옆으로 가지런히 달아오른다. 석벽으로 습기가 차오르며 무덤과 비슷한 냄새가 짙어진다. 

촛불이나 창문의 여명은 낮아 단상의 중앙 십자가가 걸린 꼭대기까지 빛이 닿지는 못했다. 암흑 속에 십자가의 머리에 쓰인 로마자가 파묻혀 있다. 교회 첨탑의 높은 부분은 어두운 밤공기가 가져가며 달그락 종을 건드렸다. 저절로 종이 쳐 울리는 소리가 마치 말소리처럼 들려왔다. 짧은 순간이 길어지다 못해 그 흐름마저 잊힐 때 즈음 밤은 누군가 수레에 담아 가지고 가듯 희물해져가고 있었다. 상처가 아물듯 끄트머리가 번져오는 것을 석상이 온화하고도 안타까운 인상으로 내려다 보았다. 

캄캄한 가운데 올려지던 기도소리가 멎는다.


새벽은 견디기 괴로울 정도로 한없이 차가워지는 가운데에 서있었다. 어린 수련사가 이른 시간부터 담색의 법의를 걸치고 모여 기본적인 식을 암송한다. 유리 잔의 물을 더하는 기초적인 수련이다. 합장을 거쳐 제 앞의 땅을 가르치는 손길이 섬세하고 깨끗했다. 불목하니와 수사들이 아침식사를 준비하며 분주한 가운데 파욘은 짧은 회랑의 기둥을 벗어나다가 마당의 선 아이를 보았다. 파욘이나 어린 수도사가 두른 어두운 적색의 망토는 수도사들의 법의와는 다른 종류였으나 그들의 신분이나 몸짓을 가려주었다. 제각기 수련에 몰두하는 초보 수련사의 낯빛이 사심없이 맑고 순백한 빛을 냈다. 그는 가만히 허릿춤에 꽂힌 장검 자루에 손을 올린다.

그의 현 임무는 호위라고 일컬을 수도 있었다. 이동이 많고 남는 시간이 많다는 점에서도 그러했다. 그들의 무리는 계절마다 양떼를 모는 목자처럼 대륙을 시계 방향으로 저으며 남하하는 중이었다. 지평에서 태양이 가까워지면서 기온은 비례하듯 추워져만 갔다. 어린 수도승들은 이른 겨울의 추위를 견디지 못했고 니젤에 가까워져 감에 따라 순례가 끝난다는 사실에 묻혀가며 이제는 마당도 적적해졌다. 그들은 수도에 입성하지 않겠지만 어귀 마을에서 머무는 시간은 귀중한 휴식이 될 터다. 어수선함이 기승을 부리는 수도에 복귀하면 수도사의 무리에 섞이기 위해 가장했던 망토를 벗을 날도 얼마남지 않았다.  요즈음 한 사제가 한참 몰두하던 교리책의 번역서 한 권을 주어 파욘은 잠잠한 묵상에 잠겼다. 교리는 커녕 이곳 벽화에 그린 기형의 괴수나 천사들에 대해 그는 하나하나조차 알지 못했다. 불빛이 일렁일 때마다 형상이 요동하면 다만 그 빛의 신비에 매혹되고 혹은 밤에 농락에 젖어 성체의 신비가 절로 주해되곤 했다. 그러한 순간은 짧고 또한 환영적이라 파욘에게 그것을 글로 표현할 능력은 없었다. 손에 들린 검날, 은색의 날붙이가 우물과도 같이 깊어지는 이유를 깨닫고는 다만 홀로 간직할 뿐이었다. 

삭발을 하던 날의 새벽은 참회를 드리는 마음이 되었다. 온전하였으면 머금을 것들이 바깥의 자극으로 식도로부터 걸려 입 밖으로 토해졌다. 후드를 덮어쓰고도 파욘은 한참을 지하당에서 나오지 않았다. 길게 법의를 늘어트리고 하염없이 성인의 시해를 모신 지하에서 지내는 기사를 사제들은 조용히 입을 모아 칭찬한 것이었다. 이 시대에 그 같은 기사는 드물다고. 전쟁이 격해지며 기사의 수도 많이 늘었다. 개나 소나 기사가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근성부터가 그른 녀석들이 시험을 치러 오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들, 기사 된지가 오랜 그가 마땅히 견디어야 할 것인지는 불명했다. 식은 몸과 고뇌의 끝은 체념이었다. 

어귀마을에 머물던 수도사들의 무리는 니젤로 난 서쪽의 갈림길로 다시 내륙길에 접어드는 동안 수장은 예의바른 태도로 그들에게 감사와 작별인사를 전한다. 

- 일전에 말씀 드렸지만 저희는 이곳에서 여정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 그러면 앞으로는 어디로 가나요, 형제여?

- 일행을 정비하고 나면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야 지요.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말입니다. 그간 묵는 수도원에 거처도 내주시고 동행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 무슨 말씀을. 형제들을 만남이 더없는 기쁨이었습니다. 

- 가시는 곳에 무사히 닿으시길.

- 내년 프리마베라에 다시 봅시다, 두 날개를 단 형제여!

법의를 뒤집어 쓴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여 답례한다. 무리가 국경을 넘어간 뒤 더이상 순례자의 행세를 할 필요가 없자 남은 마법사들은 저각기 긴장을 놓았다. 찌뿌둥 하다며 기지개를 켜거나 저들끼리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 받았고 행렬의 가장 뒷편에 서있던 파욘은 살짝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크로넬 성채로 향하는 이들의 발걸음은 성무의 인도를 떠나 어리석음 본연의 인도를 받았다. 그들이 주교에 속한 교단을 가칭하는 일도 삼 년째였고, 이번에도 수도회 하나가 별 의심없이 무리에 받아들여 주었다. 순례를 따라다니느라 지쳐있던 마법사들은 이곳에서 당분간 머무를 예정이었다. 파욘은 무리 속의 고등법사를 찾아 뒤에 따라 붙어 속삭였다. 

- ...며칠 수도에 다녀와야 합니다. 

- 감시를 따로 붙이지는 않는다.

그럼. 파욘은 짧게 대꾸해보이고 숲 속으로 접어들었다. 숲을 잘라낼듯 이동하는 소리가 바스럭바스럭 후드 속을 파고 들어 귓가를 스치었다. 

간만에 오른 수도는 그다지 바뀐 것이 없었다. 

근위부의 사무실을 늘 차지하고 있는 두루미는 한창 그날 오후에 있었던 수재해 복구 건에 대해 들여다 보는 중이었다. 설핏 들어온 그를 일별했을 때 힌셔는 그와 가볍게 눈을 맞추었다. 무심하게 뻗은 딱딱한 눈길과 젊은 기사의 군기가 든 눈빛이 교차했다. 하마군. 그의 머릿속은 침수로 엉망이 된 서쪽 지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빠보이는 두루미가 자신을 반기지 않는 다는 걸 알았기에 붉은 기사는 조금 풀이 죽었으나 이내 턱을 바로 들었다. 황제로부터 정식으로 인가 받은 서찰을 가지고 있었기에 거절당할 가능성은 낮았으므로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돌아온 부정에 암울해진다. 

- 지금 뭐라 하셨소?

- 기사의 배치는 대륙의 군사기밀. 안되는 게 당연하잖소. 

두루미는 공연히 시간을 낭비했다며 무심히 눈을 내리깐다. 무어라 토로 해봤자 도와줄 마음이 없다는 의지가 읽혀온다. 힌셔가 계획하던 추적 경로의 제 1 방법은 보기 좋게 빗나간 셈이다. 팔랑, 두루미의 손에서 다시 방책에 대한 보고서가 한 장 넘어간다. 힌셔의 초조함 따위야 그의 알바가 아니라는 듯 서서히 탁상 위의 깃발 모빌이 돌아간다. 그러나 힌셔도 섣불리 감정을 드러내어 대화를 종결할 정도로 어리숙하지는 않았다. 

- 그럼 보고 드리는 건에 해당되는 부분만 좀 추려주시구려. 혹은 파견을 총괄을 하는 이를 만나게 해주거나.

 

기밀이라 안 된단다. 보안이라 유출할 수 없단다. 면담에 대한 허가는 그로서는 장담하기 어렵단다. 그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서류만 빤히 들여다 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 이보게. 황제 칙령의 수사라 해도 군권이고 행정권이고 아무것이나 전적으로 자네에게 일임한 것은 아닐테지? 그 허락인지 낙장인지 받았다는 구체적인 서한에 기사들에 대해 조사해도 된다고 명시되어 있으면 가져오시게. 

- 서한이라면 이미 보여드린 게 다요.

- 그럼 더 말할 것도 없군. 

검은 눈이 차분하게 응시하는 시야 속에서 순간 두루미의 입가가 뒤틀린다. 기껏해야 배치된 기사들의 정보 정도를 관리하는 일개 서류직인 두루미가 황제의 서한을 무시할 권한 따윈 없으나 힌셔는 다른 기미를 읽어내고 양 미간을 굳힌다. 거미? 그를 여기서 왜 거론한단 ㅡ 생각에서 끄집어낸단 ㅡ말인가.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야 말로 거기서 비롯되어있었다. 모반이라도 일으킬 거라 여기는가. 그는 살짝 두통이 이는 것을 느꼈다. 

- ...그리고 서쪽 지구라면 이미 임시 방책을 세웠더군. 배수도 필요 없을 거요.

일을 크게 키우고 싶지 않다는 태도로 그는 바쁘니 가보라며 손짓으로 힌셔를 내쫓았다. 어투는 정중했으나 제스쳐는 그와 거리가 먼 것이었다. 불과 수 여분 전 성문을 통과한 그는 결국 못참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사무실에서 쫒겨나 등 뒤로 문을 닫고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근위대 측의 도움은 기대하기 어려울 듯 했다. 

- 스승님. 다녀왔습니다.

- 어땠어?

힌셔는 약간 풀이 죽어 현관문을 지났다. 두 달 여만에 귀가였다. 거미는 거실의 소파 한켠에 팔다리를 길게 내어 꼬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스승의 얼굴은 여전히 희고, 특유의 눈의 색이 유달리 옅었음에도 오히려 그로 인해 두려움을 주는 인상이었다. 힌셔는 왕국을 떠나면서 그에게 서신을 했고 스승은 얼굴을 보기도 전에 힌셔의 목소리를 듣고 다소 정황을 읽어내었다. 수사가 생각만큼 쉽게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 ...악마소환이라도 한 것 같던데요. 인간이 벌일 만한 일이 아닌 현장이었어도 범인도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자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어디의 어중떠중한 병사라고 해도 무력만으로 그런 짓을 할 수 있을지도... 여튼 괴이하더군요. 

- 그래서 그런 소문이 돌았군.

 

거미는 다시 화두의 악마소환을 끄집어 낸다. 힌셔는 동의를 표했다. 그가 리틴시아까지 내려가서 보고 온 현장 중에는 사지가 찢어져 정육처럼 걸린 괴랄하기 짝이 없는 것도 있었다. 어느 정신 나간 작자가 그토록 대륙을 빠른 속도로 돌며 연발적인 일가 살해를 저지른단 말인가. 초기에는 여느 강도 살인과 구분 되지 않았으나 빈도가 잦아지고 수법이 잔학해지면서 이야기는 급물살을 탔고 황성까지 전해졌다. 

어스름이 창 밖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스승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다. 흉터가 얼굴을 일그러 트려 놓긴 했어도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릴 때 그는 꽤나 미남이었다. 시종일관 날카로운 눈매가 휘면서 부드러운 인상 일때의 얼굴은 다정함 마저 일미에 담겼다. 무슨 고통이 거미의 심장에 그토록 철저히 뿌리내렸건 간에 힌셔가 존경하며 친애하는 얼굴이었다. 그는 기사가 보아 온 무술가 중 유일하게 천재라고 이름 할 수 있는 기사였으며, 그에게 수많은 것들을 가르친 훌륭한 스승이었으므로.

콧날이 되똑한 얼굴에선 그간 힌셔의 부재를 찾을 수 없이 기색이 평온했으나 그는 제자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불가에 다리를 꼬아 앉아있었고 손에는 새로 읽기 시작한 책이 들려 있었다. 소설이라던가, 최근 수도에는 이야기 책이 돌기 시작했다. 길게 편찬된 글이 몇 백 페이지에 달하도록 쭉 이어진 물건이라니, 과연 그의 스승이 좋아할 만하다. 거미는 실체가 눈 앞에 없는 것들을 애정했다. 종교의 경전도 황제에 대한 사랑스러움을 부추기는 내용도 아니건만 책은 겸양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이전 스승이 보던 것은 두께가 얇았으나, 지금은 비교할 수 없이 두꺼운 데다가 손에 쥐기에도 버거워 보이는 것이 한 손 위에 가볍게 들려있다. 힌셔가 짧은 교훈집을 들춰보았을 땐 아는 내용도 있었다. 들어본 이야기도 있고 처음보는 것도 있었다. 아마도 대륙 여기저기의 전래들을 긁어온 모양이다. 몇 개월 사이에 이만큼이나 수도는 달라지고 있다. 

책은 약하고 섬세한 물건이었다. 화기에 약하고 물과 습기에 못쓰게 되어 집 밖에 둘 수도 없었고 습한 날이 오래 되면 곰팡이가 피어 따로 수납장을 두어 관리해줘야 했다. 누구에게 빌려주고자 해도 꼭 만나서 손으로 전해줘야 했고 필기사의 실수로 잉크가 번진 구석도 눈에 들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종이라는 자료가 그다지도 약하고 수정할 수 없어 쓰기도 좋지 못한데 이것으로 수백페이지나 되는 이야기나 기록물을 남기는 일에 적절하지 않은 물건이었다. 그 앞 뒤에 단단한 합판을 대고 양피지로 한겹 덮는 것으로 책을 보호한 것이 스승의 손에 들려있고 거실의 건조한 장소에 이리저리 쌓인 것이었다. 귀하게 구한 물건임과는 별개로 스승은 그다지 자주 정리하지 않는 성미였다.

힌셔는 책에서 눈길을 거두었다. 기사의 업무는 발령이 아닌 이상 기밀이 기본이었으나 임무 자체가 거미를 통해 하달 된 것이라 그에게는 편한 마음으로 조언을 구할 수 있었다. 옷가지와 짐들을 내려놓으며 비로소 돌아온 기분이었다. 

- 스승님. 혹시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전선에 있다가 최근 수도의 동쪽 주변으로 발령받은 기사가 누구인지 말입니다. 

- 글쎄다... 

- 몇 가지 미심쩍인 부분이 있어서요. 이동 속도라던가 은폐 방식이라던가. 기사가 개입한 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으나...

- 호오, 네가? 

알아 봐달라고 부탁하는 거냐 힌셔?

거미는 약간 이죽대며 말했다. 

- ...그 부분은 제가 다시 처리 해보겠습니다. 그나저나 중요한 건 수사가 아닙니다, 스승님.

- 그렇군. 두루미를 팬지 좀 오래 되긴 했지.

이야기를 듣고도 거미의 표정은 자못 그대로 였다. 힌셔는 그럭저럭 속으로 긍정한다. 두루미가 직접적으로 시비를 걸던 것은 그가 기사가 되기 전, 적어도 10년은 되었으니 오래된 일이었다.   

- 사실 근위대도 기사들과 그다지 사이가 좋지는 못해. 둘다 황제 직속이지만 하나는 수도의 방위군에 다른 하나는 군에 소속되지 않은 어중간한 위치. 근래는 기사들이 많아져 부딫히는 일이 잦으니 원… 이곳도 뒤숭숭해.

귀족도 평민도 제국인이라면 누구나 시험을 치러 자신을 입증하면 작위를 받을 수 있는 기사제도… 군인으로서의 명성과 황제가 그 명예를 보장하는 자리. 하지만 다들 상상이상으로 통제 불능이야. 기사 서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어둠에 눈이 반쯤 가려 거미가 진심으로 말하고 있는지 분간이 어려웠다. 의도적으로 속내를 위장한 스승에게 몇 번 속고난 뒤 힌셔는 눈으로 그를 간파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현장에서 기사의 개입을 특정한 이유, 정말 의심가는 건 따로 있지만 증거 없이 말하기엔 별난 그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예상할 수는 없었다. 아직까지도ㅡ 어쩌면 힌셔가 그의 제자인 동안은 평생 그럴 것이었다. 조만간 적절히 물을 만한 기회가 올 것이다. 거미는 심각한 이야기는 끝났다는 듯이 가벼운 기색으로 묻는다.   

- 오랜만에 저녁이나 같이 어떠냐. 약속도 없앤 참인데. 

- ...죄송합니다. 들를 곳이 있어,

난롯가에 약간 거리를 두고 정적으로 앉아있다가 힌셔가 스스럼 없이 제안을 거절하고선 몸을 일으켰다. 불가를 스치는 그림자가 거미의 위로 덮듯이 지나갔다. 

- 그래, 보고 싶은 사람이 따로 있을 텐데. 붙잡는 것도 미안하군. 

- 그, 그런 거 아닙니다. 식사는 내일 같이 하시지요. 

놀림조에 뒤따르는 힌셔의 말이 빨라졌다. 그는 들어올 때와 같은 짧은 인사를 올리고 외투를 챙겨 도로 집 밖을 나섰다. 

주해자의 십자가라는 게 있다. 신학을 해석하는 학자에게 있어서 해석의 중의성에서 파생되어, 언어로 나타낸 글을 번역 하는 데 있어서 필연스런 일이었다. 신학은 인간의 능력 외의 결과라 한들 결국은 번역서의 마지막 몫은 오롯히 주해자에게 달린 것이었다. 살인사건의 해결에도 그러한 고난이 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친 힌셔는 설프게 타닥타닥 내리는 비를 맞으며 사제관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최근 들어 이런 일가가 의문의 사고를 겪는 일들이 늘었다. 그 마을에서 하나의 일가만. 조야하게 늘린 사실들 뒤로 어딘가에는 공통점이 있을 거란 직감이 강하게 이어졌다. 어떤 정체 모를 광신집단이 대륙 폐부에 은밀하게 기생하는 지도 몰랐다. 그 뒤로 거미가 쭉 이어낸 이야기들이 마음에 걸려 저녁 내내 맴돌았다.

- 일가족 살해는 사실 꽤 자주 있는 일이야. 대개는 단순 강도지만.

거미는 잠시 고심어린 표정을 짓더니 벽 너머에 시선을 두면서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십 여년 전에 어떤 일가가 미라로 발견되는 사건이 있었지….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시신 주변의 토사물이며 상태를 보고 사인은 음독, 누군가 그 집 뜰에 있는 우물에 독을 푼 것이 아닌가 했어. 그러나 복수에나 쓰이는 원한이 서린 현장은 아니었지. 범인은 면식범이 아니었을 거란 정황이 여럿 나왔어. 수사는 독살로 종결 지었지만, 그 집 어디에서도 독은 찾을 수 없었어. 무엇보다 우물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거든.

- 범인은 잡지 못했군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건의 현장이 기사인 그에게 마저 꽤나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았다.  

독살로 마무리 지어졌다고. 그 이후의 수사는? 어쩌면 이 사건도 힌셔가 맡고 있지만 윗선에서 손을 대는 순간 그는 놓아줘야 할 지도 모른다. 그들이 사는 세계는 끊임 없이 살인이 일어나 비극이 반복되고 악은 영원히 척결될 수 없는 것인가. 장례를 준비하던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매주 나고 지는 생명을 치러내는 그들의 장례는 묵묵하고도 담담할 테지만 살인 현장의 뒷모습엔 언제나 애석과 비극이 있었다. 전쟁에서는 누구도 죽인 자를 찾아가 대가를 묻지 않았다. 그것은 서로에게 잔인한 일이 될 터였다. 나라와 마을, 가족에 대한 명분이 그들을 죽인 즉시 용서했기에 그들에겐 괴로움이 덜했다. 민간의 마을이 불타고 난 폐허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하고 비참한 종류였다. 채 꺼지지 않은 불씨에서 간밤의 아우성이 들려오고, 바람에서 살타는 냄새가 고약했다. 시체는 너무나 많아 채 셀 수 없었다. 하룻밤새 고향을 잃은 병사는 까맣게 타고 빻인 뼛가루에서 친족을 분간할 수 없었지만 구태여 찾을 이유도 없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하나도 빠짐 없이 몰살 당했으므로. 

그러나 이 사건에는 전쟁터와는 다르게 힌셔를 찌르는 가시가 있었다. 돈도 목적도 없이 일가를 살해하고 다니는 치들이 있군. 손이 살짝은 바르르 떨려왔다. 힌셔는 조용히 분노하며 도둑질한 아이가 손을 감추는 것처럼 후드 안으로 이마를 깊이 묻는다. 어둠 속의 반댓편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비의 싸한 소리를 뚫고 묵직한 발걸음이 기사나 병사의 것인터라 잠시 후드 너머로 시선을 두었다. 마주 오는 이는 힌셔와 엇비슷하게 신장이 크고 축축한 날씨에 천으로 감싸 겉을 칭칭 동여맸으나 장검을 지닌 것이 분명한 걸음새였다. 망토는 행인의 것과 힌셔의 것 둘 다 검게 젖어 신분을 알아볼 수 없었으나 체구로 보나 소지품으로 보나 무인이다.

그토록 호리하게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검사는 수도에서 드물었다. 힌셔가 아는 사람일지도 몰랐으나 서로 외투를 우비처럼 여며 누구인지 알아보기는 어려웠고 멈추어서 대화를 나누기엔 날씨가 좋지 못했다. 그는 비 맞은 고양이 꼴의 행인과 엇갈려 지나갔다. 등 뒤로 빗소리가 달라지는 걸 들으며 잠깐 사이에 힌셔의 집중은 행인에게서 다시 그날 거미와 나눈 대화로 옮겨가 있었다.

- 그 집, 사건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 막내아이가 실종 됐었지. 네다섯살 배기의 어린 아이였고, 일가가 그렇게 되고 나서 그 아일 찾을 사람도 없었을 거다. 그런데 평범한 가정에 흔적조차 남지 않을 독이라면, 무언가 다른 연결고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 사건으로 끝이었단 말이지.

스승은 어렵사리 그 말을 매듭지었다.

- 누가 우물에 독을 풀었겠어?

그의 음성에 어딘가 탁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2

이튿날 조사의 방향을 바꾼 힌셔는 도로 성채 밖으로 발을 디뎠다. 비가 덜 개어 해뜰녘의 안개가 유독 자욱했다. 말을 타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환한 일출과 더불어 미세한 안개비가 뿌옇게 색을 돋구는 숲로를 달려가다 보니 몸에 훈기가 돌았다. 서쪽 끝으로 새벽의 추위가 서서히 가시었다. 절벽과 바위로만 이루어진 지대로 접어들자 사건이 있던 마을에서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제1 관문소가 암반 사이로 보였다. 북쪽 경계의 관문소는 수도와 마을로 진입하는 길목 중에 하나로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바로 어제도 만났던 그들은 힌셔를 알아보아 따로 인사가 필요치 않았다.  주변을 지나다니는 외부인의 무리가 있었는지 물었다. 혹은 평소와 다른 점이라거나. 낯선 자들이야 수없이 이곳을 통과해갔지만 상단이나 여행자나 의외로 험준한 지대에 위치한 관문소를 우회하는 일이 많았고, 아니라면 힌셔 같은 기사들이나 이곳을 통해 다녔다. 

- 최근에 다녀간 기사는 이정도 입니다.

힌셔가 그들이 짚어주는 방명록을 일람하는 동안 지친 당직병과 근무병이 교대를 했다. 양피지에는 최근 며칠의 통행기록이 있었다. 거기에 그의 눈에 띄는 이는 없었다. 

-....그럼 이것 외에 다른 일은 없었소? 특별한 일이 아니어도,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이 있었다거나…

어제 근무병들은 최근 이 부근에는 수상한 낌새도 없었다고 답한 것이었다. 교대로 와 장비를 꾸리던 병사 하나가 대답했다.

- ...어린 수도사들?

- 매년 이곳을 거쳐가는 무리일세.

그는 건조한 공기에 몇 차례 기침하며 다른 두루마리를 끄집어내더니 기사의 앞에 펼쳐 놓았다.

- 고작해야 머리를 민 수도사들이 몇 지나갔을 뿐이지만.

나이 많은 병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힌셔의 표정이 생각에 잠겨 어두워졌다. 기사는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입을 열었다. 

- 그거 혹시 어느 교단인지 알 수 있나?

북쪽 경계에 주교구는 주변으로 소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북부에서 내려온 강이 갈라놓은 양단을 따라 동서로 나뉜 마을은 상업과 공업으로 살아가는 곳이었다. 기사의 눈에 도시는 마치 조그마한 니젤 같이 비추었다. 대성당은 살짝 솟아오른 커다란 광장부지의 근처에 있었고, 마을은 수확철의 농작물과 더 서쪽의 빙해에서 들여온 어류로 벌인 판이 한창이었다. 시정은 겨울나기로 활기를 띄고 있었다. 

그는 쭉 이어진 번화가를 따라 언덕으로 올라갔다. 대성당은 도시의 중앙을 차지하지 못하고 손으로 쭉 밀어낸듯 물러나 있었다. 황성 안에는 조그마한 예배당이 있었으나 민간인은 들어갈 수 없었고 은밀하고 조용한 공간이었다. 분지 밖으로 나가는 길을 면한 이곳은 출입을 제하거나 스스로 고립을 택하기 보다는 도시라는 둥지가 품은 새처럼 검소히 웅크린 느낌이었다. 검은 예복을 입은 수사들이 예배당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제들은 황도 근위대 보다 몇 배는 더 협조적이었다. 온건한 태도로 기사를 맞이한 사제는 힌셔가 가져온 통행서의 수도사들의 목록을 검토하고는 그들이 같은 교단이며 며칠 전 이곳을 방문했노라 말했다. 그러나 별다른 점은 없었다며 못박았다. 그들의 교단은 원래는 리틴시아 지방에 자리한 수도원을 본원으로 매년 서원을 앞둔 수도사들과 어린 수련사들은 순례와 선교을 위해 남방을 향해 회국했다. 이곳도 그 길로에 속해 순례단을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 이번에는 총 열 네 명의 이들이 다녀갔지요. 

초소를 통과한 수도사와 같은 숫자였다. 어리둥절하던 힌셔를 사제가 사무실 밖으로 이끌어냈다. 언덕 가장자리에 시내의 전망이 보이는 석단에서 서서 단출한 정례복만큼이나 표정 없던 사제는 좋게 말하면 초연했고 무례히 말하면 심드렁했다.

- 최근 외부에서 다녀간 객은 없었소?

- 그것이 말씀드리기엔 내부 사정에 가까운 지라….

글로라도 적어두었는지 줄줄이 대답을 강송하던 사제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 ... 아. 

그러고 보니 저희 교단은 아니지만 극동쪽의 수도회에서 수도사 몇이 함께 다니긴 했습니다만... 인원이 대략 여섯에 수련사 아이가 하나 있었지요. 그들과 같이 왔던 것 같습니다. 황도 근방까지는 동행한다 했지요.

사제는 생각을 더듬으며 잠시 표정을 찡그렸다가 이내 온화하고 무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 그것이 다입니다.  

단호하고도 자애로운 명령과도 같은 확언을 떠안고 힌셔는 교단에 대해 몇 가지를 더 물어보고선 그곳을 나왔다. 내리막을 끼고 좁은 골목 두 어개를 미처 돌자 그 자리에 오래 붙박은 듯한 치안지구대가 있었다. 작고 꾀죄죄한 구식 가옥이 지구대라기 보다는 동사무소에 근저해 보였다. 문을 밀고 들어가자 오래된 놋쇠 차임이 흔들렸다.

- 누군데 이러는 거요, 

턱수염의 노쇠한 경관이 언짢은 듯이 고개를 주억였다. 박대는 예상 안에 드는 일이었으나 힌셔는 이런 곳에서 정보를 얻는 방법에 대해 잘 몰랐다. 전일 마을 사람들의 반응과 남자의 경계심으로 어쩌면 기사인 것을 밝히는 게 도움이 될지를 고민하던 찰나였다.

- 소개가 필요할 것 같군. 그는 힌셔. 기사요.

- …선객이 있었군.

안 쪽에서 기척 없이 초면의 청년이 모습을 내보였다. 막 소녀에서 성인이 되어가는 이는 가벼운 서민의 차림을 했으나 작은 단검집이나 단련된 몸에 선명하고 날렵스런 구석이 있었다. 경관은 이곳에 늘 오는 아이이니 신경 쓰지 말라며 기사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 힌셔? 검붉은 하마?

- 그렇소. 이 사건에 대해 조사하고 있고, 그에 관련된 정보가 필요하오.

경관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되물었다. 힌셔는 속으로 긴장을 삼키고 있었으나 정중하고 묵직한 무인의 기색은 숨길 수 없었다. 힌셔로서는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작은 한탄이 이어졌다. 경관이 포기한 듯이 이야기를 시작하자 뒤에 서있던 청년이 호방한 미소를 띄었다. 장안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화제가 되는 이야기는 굳이 오래된 일을 들춰볼 것까지도 없었다. 광범위하게 분포된 살해는 대담해져 벽지에서 시작된 것이 황도에서 머잖은 곳으로도 접근했기 때문이다. 떠도는 풍문과 근방에 전해지는 상황에서 부터 마지못해 이야기를 시작한 경관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이윽고 수다에 재미를 느꼈는지 내용에 살을 붙여갔다.

- 그리고 그 집이라면 오래 전 의절한 아들 내미가 하나 있을 거요. 소식이 끊긴지 좀 되어서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며 그는 말을 맺었다는 듯이 턱을 문질렀다.

 

- 이봐요, 기사님. 연쇄 살해에 대한 용의자를 찾으시는 거지요? 이 도시에도 하나 있었어요. 미장이집 이층에 살던 늙은 홀어미와 그 아들이 변고를 당했죠. 저도 그 현장을 봤지만, 지독하단 말로는 설명이 안돼요. 

- 인간의 마음이 있는 자들이라면 그런 범행을 할 수는 없는 법이오.

같은 연장선의 사건들을 추리는 기준이란 주관적이었으나 대체로 의문 모를 잔인한 살해로 세간에서는 실을 꿰었다. 모자 역시 살해당할 만한 동기를 특정할 수 없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은 두려움이 경관의 망막에 맺혀 어른댔다. 혐오인지 공포인지 모를 것으로 동요한듯 음성이 떨렸다.

-...고맙소. 달리 기억에 남는 것이 있소? 사건 기록을 좀더 자세히 구하고 싶은데.

- 거길 보고 싶은 거라면 같이 가서 설명하는 편이 낫겠군. 

- 그럼 위치를 알려주시오. 한 시간 뒤에 그리로 가겠소.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힌셔는 타고 온 말을 마구간에 맡기고서 가게를 나서 척척 걷기 시작한다. 

- 기사님? 뭘 찾으세요?

- 서신을 보내야 하는데. 

- 그럼 이쪽으로. 

힌셔는 삐끗 방향을 틀어 청년이 있는 편으로 좇아왔다. 청년의 눈에서 당황의 빛이 잠시 스쳤다. 기사가 모자란 방향감각에 대한 사정까지 설명하진 않았으나 말없는 안내가 자연스레 시작됐다. 지금은 바로 보낼 수 있는 파발마가 없다는 말을 듣고는 잠시 주춤거렸으나 둘은 우편 교환소로 향했다. 힌셔는 서신을 휘갈겨 작성하고는 빠르게 전해줄 것을 당부했다. 

두 번째 현장은 돌로 만든 교각을 건너자 곧이었다. 경관은 가게 입구에서 연초를 물고 있었다. 괴랄할 것이 분명하여 마음을 먹고 현장에 들어선 힌셔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폐쇄된 문을 열자 보이는 방안은 멀끔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 거의 치워 놓았군. 

- 지금으로부터 반 년 전의 일이라니까. 

경관은 연초향이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현장을 발견한 당시 시체를 도열한 방식이 특이 했기 때문에 석탄으로 피해자들의 위치를 표시해둔 게 인상적이라면 인상적이었다. 마치 일부러 치운 모양새로 첫번째 피해자 ㅡ아들ㅡ 은 한쪽 모서리에 내버려졌고, 두번째 피해자의 유체를 그린 선은 옆면 하나를 통채로 차지하고 있었다.

- 피가 많이 흘러내렸소. 마룻바닥 사이에 거뭇한 자국을 전부 지우진 못했지…. 시체 안치소에는 있는 부검 결과도 내가 알려준 것 외에 정보는 없을 거요. 의학적인 지식이 있다기에는 섬세하지 못한 개복과 서로 다른 부위를 이어놓은 봉합…. 희생자가 거의 사건 내내 생존해있는 게 이들의 특징이지. 다만 저항의 흔적은 거의 없었소.

- 당신은 특이한 눈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소. 달리 보이는 건 없소?

노인은 그런 희망을 품고 기사를 현장으로 이끈 듯 했다. 힌셔는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 내가 볼 수 있는 건 이런 종류가 아니오. 나라고 한들....

그러고 보니 이곳에도 교회가 있었군. 창가로 다가간 힌셔는 눈으로 주욱 도시를 훑으며 내다 보이는 첨탑을 곁눈질 한다. 한참을 곰곰히 뜸을 들이던 기사가 입을 연다.

- 범인에겐 최소 하나 이상의 공범이 있소.

사실 이 범행은 단독범의 범행으로 여기지 않소. 이곳의 시체는 하나지만… 여기보다 남부에서 벌어진 사건은 희생자가 좀더 많은, 경우였는데 훼손된 시체의 절단면이 전부 미세하게 달라서 같은 흉기를 여럿이 나눠쓴 정황이었소. 나는 이들이 어떤 무리일 거라 생각한다오. 그리고 이 현장에서도…

기사의 고갯짓을 따라 노경관이 막아선 방문까지 시선들이 함께 돌아간다.

-입구나 복도를 지키는 이가 있었던 게 분명하지. 살해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공범은 아마 살인범이 함부로 대하는 위치의 인물은 아닌 듯 하오. 시체를 문의 정면이 아니라 방의 옆면에 늘어놓은 것도 그를 의식해서지. 동행인에게 살인의 정황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엔 꺼리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오.

-… 둘이나 죽어나가도록 목격자는 없었는데.

- 있었다해도 두 번째 인물에 의해 살해당했을 가능성도 있소. 어쨌든 이들의 범행은 모종의 목적성까지 가지고 있군. 살인이 이것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소.

방의 어느 구석의 틈새가 벌어져 있었다. 그는 말을 멈추고 가까이 다가갔다. 물건은 원래도 그 방안에 있었던 것 같으면서도, 이질적이었다. 

- 이건.... 

- 약이오. 의료에 쓰이는. 아들이 오래 병을 앓았거든. 

다가온 노직원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집어들었다. 현장을 청소하는 일에 노력을 들였음에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독 같은 건 없었다는 거미의 말이 떠올랐다. 

직원이 집주인과 이야기 하는 동안 힌셔는 건물 옆의 마구간을 구경했다. 이 지역에서 길러낸 이 삼 년생의 갈색 말들은 몸체에서 윤기가 흘렀다. 내내 얼굴을 가리던 모자를 내리고 말을 구경하는 그에게 옆에 있던 말꾼은 끈주머니를 열어 귀리를 조금 나누어주었다. 말이 그의 손에 든 귀리를 먹는 동안 부드럽게 빗질된 갈색의 갈기와 따뜻하고 속아오른 귀를 만졌다. 검기만한 눈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이 다만 그에게 큰 경계를 가지지 않은 것이었다. 겁이 많은 동물이라고 들었지만 유순하게 낯선 사람에게 다가오는 따듯한 털동물의 체온이 안심을 주었다. 힌셔는 대개 말을 탈 일이 없었으나 그런 동물이 싫은 건 아니었다. 누군가 저를 부르는 소리에 힌셔는 손을 멈추었다. 석양에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주위를 보던 청년이 그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힌셔는 그를 향해 인사를 건넨다.

- 덕분에 크게 도움을 받았소. 이 일을 하면서 그다지 누군가의 도움을 기대할 수는 없는 법이었건만.... 나를 어찌 알고 있었소?

- 일보에 간단한 삽화가 실려있었거든요. 지금보다 두 배는 눈썹이 두껍고 우락부락하셨지만….

반듯하게 드러난 이마로 진한 색의 일광이 물들었다. 기사는 그쯤해서 시원하고 보기 좋은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청년의 눈에선 일간에서 이야기하는 사자의 황금빛 갈기 같은 금발까지 함께 비췄기 때문이다. 주춤하던 청년은 기사의 반응에 용기를 얻었는지 되물어온다.

- 처음부터 밝히셨어도 저 영감이 순순히 답해주진 않았겠지만, 왜 숨기신 거예요?

- 나도 모르게 망설이고 있더군. 기사의 신분이 수사를 하기엔 적절치 않소. 경계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니 말이오….

- 그래도 저는 기사들이 멋지다고 생각해요.

청년은 그렇게 말하며 노을을 직시했다. 솔직하게 고백하는 그 마음이 미워보일 리 없었다.

- 기사님, 기사님은 저의 희망이세요. 당신에 대한 소식은 그저 재능있는 수련생에 불과하던 저를 바꿔놓았죠. 저도 언젠가 당신을 이어서 기사가 될 거예요.

스승님의 말대로 그가 이 아이를 비롯한 이들에게 미래를 심어준 거라면. 그의 눈에 서린 건 한낮 꿈이나 근거 없는 포부 따위가 아니었다. 정말 세상을 바꾸는 건 누구이던가? 손을 피로 잔뜩 적시는 게 일상인 그들이었으나 주어진 일인 이상 도망치지는 않았다. 힌셔는 악수를 건네며 그의 나이와 이름을 물었다.

- 고맙다는 인사는 이쪽에서 해야겠소. 부디 좋은 기사가 되어 주시오.

청년는 수도에서 다시 만나자고 인사한다. 그 꿈은 감히 저의 것이 아니었으나, 조금은 힘차게 등차에 발을 걸어 말 위로 올랐다. 

- 여, 두루미. 

끝이 연미복 같이 길게 떨어지는 검고 붉은 색의 무복은 수도의 누구나가 알며 두려워하는 색이었다. 일단 그 옷이 눈에 들어오면 멀리서 부터 길을 트는 기사들이 한 둘이 아니었던 터라, 두루미는 난데 없이 제가 앉은 사무실의 문이 벌컥 열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즉각 수용했다. 그는 서류에 고정하던 냉정한 눈을 들어 문가를 응시했고 책상 위에 쌓인 군비 사용 내역서 같은 자잘한 서류들 너머로 한 눈에도 신장이 높고 체격 있는 기사가 걸어들어온다. 위병들이 허수아비 같이 서있는 것 외에는 아무 반응도 하지못한 사정 또한 이해되었다. 그들을 징계하는 건 급선무가 아니었다.

- 이 구석에 자리 차지를 하는 건 여전하군. 넌 이전부터 내근직을 탐냈지. 

- 어쩐 일이십니까.

- 나를 오게 한 게 뭔지는 지금부터 네가 생각해야지.

두루미는 저도 모르게 긴장한 한쪽 입꼬리를 경련하듯 비틀었다. 목덜미가 따끔따끔했다.

자료를 쌓는 것만큼 편한 일은 드물었고 설령 바쁘더라도 잠깐이다. 한번 자리를 꿰찬 다음에는 기사로서의 임무는 아예 놓아버려 사각의 사무실 밖을 벗어날 일 없는 두루미였다. 나름의 고충이 있겠으나 그는 자신의 업무에 불만은 없었다. 군사들이 그걸 달가워 할리는 없었으나 기사들의 서류일에 기사가 적임이라는 논리에 제대로 이견을 내지 못한다. 불편한 한쪽 팔을 책상 위에 두고서 허리를 곧추세운 두루미는 어제 다녀간 기사의 모습을 머리에 떠올렸다. 과연 제자는 제자인지라 행동거지 하나에서도 거미의 흔적이 자리했으나 그건 껍데기에 불과했다. 핏빛거미가 주는 존재감은 기사로서의 혐오감이며 기사 이전에 본능의 차원에서 경계심을 사는 것이었다.

- 수도가 시끄러운데 이런 데에 잘도 틀어박혀있군.

- 적어도 어떤 소식도 제 귀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한은. 조용히 지내는 건 모양 뿐이죠.

- 굳이 얼굴 볼 일을 만드는 이유를 모르겠구나. 다 늙은 기사를 발걸음 하게 한 것도 괘씸하고. 힌셔에게 맡겨버리는 편이 편했을 것을.

- 강도치사라면 기사가 해결 못할 일은 아니지요. 하마의 명성에 비하면 무리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기사들에 대한 정보 없이도요.

- 몸이 굳으니 머리도 굳었나? 누구의 편을 들고 싶은지는 몰라도 단순 강도로 말할 수 있다니 속도 편하군 그래.

- 오해될 만한 말을 하시는 군요. 다만 여기에 기사가 연루 되었다는 증거도 없이 도와드릴 이유는 없다는 말입니다. 확실하지 않은 얘기로 분란을 일으키는 건 그만 두시지요.

- 변명으로 무마할 시점은 지난 것 같은데. 애초에 은퇴하지 않았더라도 일선에서 물러난 네가 참견할 만한 사안이 아니야.

두루미는 그말에 속으로 울컥했으나 밖으로 동요를 내보일 정도로 어리숙하지는 않았다.

- 실무란 겁니까. 유감이지만 그런 비난은 지겹군요. 

- 정말 명예 같은 거 따지고서 수사할 수 있을 것 같나? 

거미가 흉터가 없는 쪽의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두루미는 다시 읽던 서류로 눈을 내렸으나 잠시의 무언상태 후에 대답했다. 

- 파욘이 복귀 했더군요. 그자가 수도에 돌아온 건 꽤나 오랜만이 아닙니까? 

- 뭐?

거미는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표정을 지었다. 

- 살쾡이는 원래도 전선을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으니. 좀처럼 수도에 붙어있는 법이 없었지요. 한번 나가면 바로 다음, 나가면 다음, 감감 무소식일 때도 많으니...

그리고 최근 복귀한 기사가 황색 수달, 진회색 올빼미, 은빛 지빠귀....

거미는 의자 뒤로 돌아가 두루미의 손에 들려있는 서류를 낚아챈다.

- 아무래도 마음이 없는 망령의 무리들이 대륙을 배회하나 봅니다. 문제 일으키길 좋아하는 성격은 여전하시군요. 당신과 폐하 사이에 있을 때 정말이지 가끔은...

기밀이라고 엄숙한 수필로 적힌 서류는 동부에 배치된 기사와 현재 수도에서 머무르는 기사들의 이명과 진명이 적혀있었다. 서류를 들여다 보는 거미를 두 팔을 꼬고 빤히 보다가 물었다.

 

- 당신 이름은 매번 맨 위에 있군요. 발령 소식을 못 받은 건 아닐 텐데요. 저야 책상 신세가 된지 오래라지만, 이렇게 보모 노릇을 하시다니요.

- 너도 이 나이 먹고 제자 하나 키워 봐. 보통 일이 아니거든. 이제야 좀 쉬는 것 같다.

반응 없이 대꾸하는 거미를 빤히 바라보던 두루미는 무의식적으로 갑옷의 소매 안으로 흉하게 패인 팔 위로 다른 팔을 겹친다.

- 매번 이렇게 수도에 붙박혀 있는 이유가 뭡니까?

더이상 전선에 서지 않고 맡은 내근직을 두고 많은 이들은 전락이라고 수근대었다. 그럼에도 두루미는 끝내 은퇴하지 않고 기사로 남았다. 구석에 앉아서 시시한 일만 도맡으며 허황된 망상에 젖은 건 자신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것이 자신의 기우이길 바랐다. 거미는 그를 보다가 서류를 팔랑 떨어트리며 창문가로 다가섰다. 피식대는 얼굴에 가볍고 속모를 웃음을 띈 채였다.

야트막한 이층 창 아래로 연병장이 보였다. 위병들이 더운 낮과 아침에 훈련을 하는 너른 공터가 있었고 모래 먼지 뒤로는 고운 황색 규암으로 지은 숙소와 사령부 건물 여러채가 황무하고 지루한 담을 쌓았다. 수도의 풍경과도 동떨어져 기사나 평민들은 커녕 새 한마리 이곳을 잘못 찾아올 일 없었다. 거미는 사방형으로 뭉친 철제의 창살 문양 뒤로 멀리를 응시하며 전쟁터를 떠돌기 좋아하던 어느 기사들을 생각해냈다. 어른을 따르기 좋아하던 아이들은 금새 자라고 어느덧 전쟁을 거쳐 화마를 덧입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실로 터울이 별로 나지 않았음에도 기사가 되기 전부터 봐온 이들은 느껴지는게 다른 법이었다. 특출나는 편은 아니었으나 또래의 많은 이들이 곧이어 목숨을 잃는 가운데에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그들 중 누구보다 나은 기사가 될 거라는 말을 듣곤 했다. 그게 정말로 나은 건지, 다행인지는 알 수 없었다. 죽은 기사의 시신 대부분은 수도로 되돌아왔다.

더이상 기사가 아니라면 그들은 죽어서도 이곳으로 되돌아오지 못할까. 낮의 아지랑이가 시야를 흔들었다.

3

기사가 된 햇수가 무의미해질 무렵 두 기사는 전투를 마치고 일몰에 피로한 무구를 적시고 있었다. 전장터를 거치면서 익숙해진 건 단 하나였다. 새로 임무를 파견나간 왕국은 유독 피를 많이 보는 격전지였다. 어린 시절 부터 내내 함께 해온 두 친우는 이제 서로의 가족이었다. 기사가 기침을 쿨럭이자 내상을 입은듯 입에서 피가 쏟아진다. 옷으로 입가를 닦고 무기를 손질하던 기사는 낙조만큼이나 선명한 그 모습을 유심히 본다.

- 수도로 어서 복귀해야 겠군. 

- 뭐 감추어 둔 거라도 있나? 애인이라거나.

- 그냥 이곳을 떠나는게 좋을 뿐이야.

기사가 황폐해진 영지의 경계를 보며 말했다. 전쟁을 종식한지 얼마 되지 않은 폐허에는 들꽃마저 필 자리를 잃어 있었다. 오염되고 마모된 갑옷이 망토 틈으로 간간히 드러났다. 황도로 돌아가면 전쟁터에서 병을 얻은 기사는 요양할 수 있을 것이고, 어쩌면 은퇴를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설령 그렇더라도 큰 걱정이 되는 건 아니었다. 홀로 전쟁터를 전전하면 그를 부양할 수 있을 터다.

- 저주병입니다.

의사의 말은 각인처럼 날아들었다. 당황한 표정의 기사의 옆으로 체념과 절망 어린 친구는 이미 고개를 떨군다. 어깨에 피멍처럼 남은 문양이 현실답지 않게 선명해 부정할 요량도 들지 않았다. 차마 무엇을 먼저 물어야 할 지 모르는 그에게 의사는 어두운 표정으로 그의 물음에 대신 답해주었다. 

- 이 병에 걸리고 살아난 사람은 없습니다. 

치료법도 일반적으로 병세를 완화할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 병. 그저 병이라고 이름 붙일 뿐이지 실체는 저주에 가까우며 남은 기간은 길지 못하다. 그는 멍하니 오고가는 대화를 주워섬기며 바닥으로 흐른 자국을 보았다. 피는 검었다. 병자가 된 친우는 결핵 환자처럼 각혈을 하고 섬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기사에게 남은 시간은 길지 않았으나 둘은 다시 대륙을 이동했다. 병을 고친다면 의사며 약이며 사제나 마법사들 까지 찾아보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번번이 실망을 안겨줄 뿐이었다. 수소문 끝에 한발 먼저 도달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구제를 약속하는 이들이었다.

말토. 마법사로 이루어진 비밀 결사.

뛰어난 치유술을 보유한 그들은 인체에 대한 마법을 무수히 가지고 있었다. 처음 시도한 몇 개의 마법은 병의 증세를 잊게 해주었으나 진행을 늦추거나 막지는 못했다. 기사는 실망했으나 그들은 좌절하지 않고 다음 방안을 내놓았다. 그들의 무리는 불멸자를 추적하고 있었다. 대륙 어딘가를 활보하는 불멸자. 생명의 원천이나 다름 없이 무한한 그의 재생력. 이치를 벗어난 존재.

그의 존재가 지척에 있었기에 기사는 이곳에 봉사를 맹세했다. 그는 병상에 누운 기사의 옆에 자세를 낮추었다. 그의 퉁퉁 부은 손등을 잡아 이마에 대며 그 사실을 고백했다. 잡힌 손이 그의 손 안에서 동요로 움찔 거렸다.

- 이들이라고 고친다는 보장조차…. 이봐 파욘,  

내가 죽으면 이곳을 떠나.

친우는 갈라진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보냐 엘런이 운영하는 술집은 니젤의 번화가 중 하나인 3번지의 어느 다층 건물 1층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 건물은 한층을 여러 상점이 나누어 썼고, 술집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골목을 통과해 뒷편의 별도의 문으로 돌아 들어가야 한다. 옆집 양조장의 오크 간판이 문에서 바람이 빠져나올 때마다 덩달아 덜렁인다. 문은 안쪽을 들여다 볼 창 하나 없는 노송으로 만들었으나 귀를 대어보니 안쪽에서 가게의 소리가 들린다. 보냐 엘런은 가게를 물려받은 스물 두 살 무렵에 바로 자신의 이름으로 간판을 뜯어 고칠 정도로 성미 있는 여자였고 자신도 맥주를 꽤나 좋아했으며 스물 여섯 살 무렵엔 이미 니젤의 건축가 무리 중 하나인 미장이와 결혼 했고 아이도 둘이나 있었다. 가게에선 무언가를 잊을 정도의 강한 알코올이 든 술을 팔았고 포커판을 올려 둘 테이블과 거기 둘러 앉을 권리를 팔았으며 위로보다 다른 걸 원하는 자들을 위해 가끔은 다른 걸 팔았다. 그런데도 그 남편은 일을 돕지 않았고, 퇴근 후엔 가끔 아이들을 돌보지 않고 나가버리곤 했다. 힌셔는 대충 가게에 대한 정보를 떠오르는 대로 머리 속으로 우겨넣으며 문을 밀었다. 무거운 문이 저절로 닫히며 그제서야 딸랑 거리는 작은 소리가 그가 들어왔음을 알렸고 조용히 들어올 생각이었던 그는 후드의 앞자락을 한층 잡아늘렸다.

가게의 안은 바깥에서 보는 것 만큼 폐쇄적이지 않았으나 맥아 냄새는 비극이 깔린 정취를 물씬 머금었다. 힌셔는 익숙찮은 태도로 주인에게 사람의 이름을 찾아물었다. 힌셔가 만나러 온 건 일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행방 모를 첫째 아들이었다. 그자는 딱보아도 알코올에 머릿속은 물론이고 머리털 끝까지 절어있었다. 검을 쓰는 자의 팔다리, 운신에 걸맞지 않게 앉음새가 치우쳤고 잔을 흘려 테이블 밑으로 술 몇 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마주 앉은 낯선 이를 보고도 전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남이 일러준 말만 듣고 찾아오는 일에 고생하던 힌셔는 자리에 앉아 그에게 이름을 물었다. 몇 번 그를 흔들어 대답할 만큼의 정신을 차리게 한 뒤에야 제대로 사람을 찾아낸 것을 알 수 있었다.

- 잔인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대의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시오?

힌셔는 잠시 갈등에 휩싸였다. 가족이라는 말에 사내의 눈에 취기가 순식간에 물러난다. 기사 신분과 본명을 밝히려 했으나 사람들의 적개적인 태도가 그의 혀끝을 다시 붙잡고 있었다. 수도에서는 그렇게나 존중을 받는 것도 무늬 뿐일지 모른다. 기사임을 알린다고 순순히 입을 여는 사람들은 적었다. 특히나 이런 구석지의 퇴폐적인 술집에 처박혀서 삶을 놓아버릴 듯이 위장에 술을 퍼붓는 이들에겐. 주변의 왈패들의 시선도 한몫을 한다. 

- …뭐예요? 당신.

- ...이 일에 대해 조사하고 있는 자요. 왜 자신이 살아남았다고 생각하지?

- 꺼져요. 해줄 말 없으니까.

힌셔는 그에게 돈을 던져주지 않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 ...수도사?

폭력과 명예를 동시에 논하는 기사들처럼, 간혹 있다. 악마적 소행을 일컬어 신앙이라 하는 자들이. 

- 아니, 아니라니까요. 그들은 병을 고쳐주겠다고 했어요. 따지고 보면 의사겠죠. 그러고 보니 자기들끼리 대화에서… 무슨 존칭을 썼는데,

- 존칭? 어떤 것이었소?

기사인가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번뜩 스쳤다.

- ... 무슨 자님? 무슨 무슨 자라고 그러던 데요. 그리고 지팡이로 제 머리를 후려쳤습니다.

- 지팡이…. 다른 무기는 없었소?

- 망토를 써서 그건 잘….

- 가족을 건들만한 이유는….

그는 그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을 빚졌다고 했다. 수련 기사가 받는 푼돈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돈들을 처음에는 빌렸으나, 갚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대가로 그들은 이것저것을 요구했다. 주로 용병의 역, 그중에서도 질낮은 일들을 떠맡았으나 일의 경중에 비해 세뇌에 가까운 함구를 명했다. 살해 당한 미장이 집도 아들이 비슷한 일을 한다고 들었다. 따지고 보면 무술적인 지식 없는 이들의 범행이었음에도 어디에나 무인이 연루되어 있었다.

여섯명이나 되는 일행을 단신으로 호위한다면 그건 기사일 가능성이 높았다. 지팡이… 교단 소속의 치유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 저를 찾고 있을 지도 몰라요.

- 사실 제가 그들에게 실수를 해서….

그는 눈빛이 갑자기 난타하듯이 흔들리더니 책상 위로 허물어졌다. 고의로 이마를 찧는다기 보다는 자학을 하는 모양새에 힌셔는 빠르게 그를 멈춰 세웠으나 이미 아까까지의 술집의 감미로운 분위기는 모두 사라져 있었다. 주인인 보냐가 그들에게 다가왔고, 그를 일으키고 윗층에 재우겠노라고 했다.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 모자라 힌셔는 그의 몫까지 술값과 숙소비를 지불해주는 수 밖에 없었다.

좁은 여관 위에는 의외로 더 많은 이들이 거처할 공간들이 있었다. 보냐 엘런이 미혼 여성들이나 혼자 아이를 기르는 여성들을 거둔다는 걸 한편으로 기억해냈다. 보아하니 술집의 객들은 이런 일에 익숙한 듯 했다. 그러나 시선이 몰리자 힌셔는 빠르게 가게를 벗어났다. 기사들이 드나들 만한 장소는 확실히 아니었다.

애초에 민간인 일가를 살해하는데 기사의 무력을 투입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지...? 습관적으로 엄한 표정을 짓던 그는 물결처럼 가로로 일어난 이마 주름을 손으로 눌렀다. 문간에서 잠시 뜸을 들이다가 바깥의 거리로 걸음을 옮긴다. 힌셔는 역시 이 험한 밤 속에 자신이 혼자 남겨진 듯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버려둔 단상과 직감과 모자란 인내 뒤로. 안개와 같은 천을 둘러쓰고 조용히 사람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기사는 황제의 검. 그러나 사람들의 두려움에 찬 시선이 그를 두텁게 눌러왔다. 모두가 모의를 원한다면 어느 샌가 그것이 사실이 되는 것이 아닌가. 물결처럼 파도치는 군중의 소리가 언젠가는 사실이 될지 모른다는 건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속의 의지란 이미 실제와 다를 바 없는 말이자 현실이 된다. 

말먹이를 주며 파욘은 먼 곳을 보았다. 말토는 마법 이외의 지식이나 기술이 부족해 의료적인 치료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로인해 생긴 병환을 다시 고치기 위한 마법을 쓴다는 모순을 품고 있었으므로 그는 그저 친우에게 요양을 붙여주었다. 말을 타는 건 기사의 수치였다. 산을 넘어갈 때 말은 효율적인 교통수단도 못되었으나 그것조차 아무런 후회도 없었다. 그가 여기에 몸담은 까닭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몰라서가 아니다. 헛된 희망을 걸어서도 아니고. 병사의 죽음이 저주병이라는 사실은 선고의 순간부터 쭉 그를 참을 수 없이 괴롭혔다.

말토가 불멸자를 찾아내어도 파욘을 이 굴레로부터 씻겨주진 못할 것이다. 더이상 이세상 사람이 아닌 친우조차도. 파욘은 투구를 벗어던지고 고삐를 한차례 풀어 나무로 감는다. 새벽 운해에 어스름이 이슬로 젖어있었다. 말은 그와 비슷한 처지였다. 명예를 행하는 기사는 사실 파괴를 일삼았다. 진리는 탐구하는 마도학자들은, 그들이 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파욘은 보고도 보지 못한 척 도로 눈을 감았을 뿐이다.

- 또 피바다를 만들어놨군. 


앞으로 얼마나 많은 후배기사들이 말토에서 고통을 받을까? 파욘은 그것까지는 신경쓰지 않았다. 기사도, 마법사도 희생을 갉아먹고 자라는 것처럼 병과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말토는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무리가 일으키는 신유의 기적은 수도승들의 무리에 섞여들만한 것이었고, 한 세기즈음 지나면 불치병을 고쳐낼 수도 있다. 말토에겐 무인이 필요했고 무인이라면 그 각자가 짊어져야 할 의무가 있다. 퍼져 내리는 안개비도 한데 모이면 폭포 같이 굵어져 버텨낼 수 없는 폭우가 되는 것을 유념했다. 그러나 폭우의 무게는 그에게 아직 버겁지 않다. 그는 대충 빗물이 고이자 그것으로 얼굴을 씻어낸다. 짧은 섬광 사이에서 빛살에 씻긴 얼굴이 이따금씩 보였다. 젖은 건틀렛으로 닦는 얼굴이 마르지 않아 수도복도 기사의 것도 아닌 망토 자락으로 얼굴을 훔치고 바닥에 끌릴 듯 젖은 자락을 다시 미끄러트린다. 비에 젖어 있는 산들이 고오한 메아리를 울리었다. 저 너머에는 니젤이 근방이었다. 그곳에 있음을 보지 않아도 그의 어딘가에 양각 되어 어두운 눈빛이 산세를 지나쳐 도시를 향했다. 수많은 기사들이 밟고 거쳐간 성도의 땅. 닫힌 전경 너머의 곳이야말로 산맥들의 품새에 안겨들어 그들이 아는 그 어떤 산맥보다도 드높았다.

- 희생자?

법사는 거의 비웃음을 터트리는 듯한 모양새로 입꼬리를 뒤튼다.

- 그들은 희생자 같은 게 아닙니다. 살쾡이. 

저녁에는 날이 흐렸다. 검은 살쾡이ㅡ파욘ㅡ은 조용히 혼자 지낼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스산한 언덕배기를 오르다 보면 공동묘지가 끝나고 어느샌가 어둠 속에서 교회가 모습을 드러냈다. 끼익ㅡ 차갑게 식은 놋쇠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법의 모자를 머리 위에서 치워내리고 장의자를 스쳐 지나 불이 켜진 제단 앞으로 조용한 발걸음이 바닥을 두드렸다. 은은한 촛불들이 스테인글라스를 엷게 물들이며 바깥에서 오는 찬바람을 미적지근하게 잠재웠다. 눈을 감고 두 손을 맞붙인 기사는 제단이 놓인 단상의 마지막 계단 앞에 무릎을 꿇고서는 적막을 깨어내는 길고 차가운 한숨을 뱉는 것이었다. 바깥에서 가져온 입김이 조용히 흰 무리를 내며 첫마디를 틔웠다. 

Han Tek Ikkje Glansen Av Livet….

그들이 부여받은 권능이 무력 따위라면 신은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아주 긴 시간의 미래를 들여다 보았다.

한가지 믿는 것은 필연이자 뜻으로 기사는 세워진 것이란 것을. 신은 결코, 세상을 파괴하길 원하지 않았다고….

말토의 종용으로 자신을 베려가면서 뜨거운 절규가 영혼으로부터 달아올랐다. 타당치 않아도 신은 기도를 들어주는 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스스로의 구원을 구하지 못하는 그는 다만 어느 자비와 진정한 정의를 지닌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나직히 흐느꼈다.

짐승의 이명을 간직한다 해서 인간성마저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인간이길 포기하고 짐승이 될 수는 없었다….

인간으로 빚어진 그가 짐승의 이명을 덮어쓴다고 해서 그 어떤 금수의 행동도 허용되는 건 아니었다. 동족과 나약한 이들을 피식하기를 반복하면서도 끝내 용서는 없었다. 그들의 손을 멈출 수도 들어줄 수도 없었다. 목소리만 남을 때까지 그를 위해 기도한다고 해도 그 기도는 고통만 더해 줄 뿐이었으나,

파욘은 깊은, 깊은 속죄라면 닿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4

만종. 싸늘한 저녁의 종소리에 농부들은 하나둘 일을 마치고 돌아가고 있었다. 농가의 이곳 저곳에 불이 켜질 무렵이 되고 이윽고 완연하게 내리깔린 어둠이 수도를 덮는다. 밤의 지붕은 함부로 개키기엔 공기마저 무거울 정도의 정적과 어둠이었다. 이른 저녁을 마치고 일찌감치 자러간 힌셔가 사제관의 불을 모두 꺼두어 일층엔 밤이 채운 적막이 가득했다. 거미는 조용히 건물을 빠져나왔다. 성당 바깥 비석들이 울고 있었다. 무덤 같은 긴긴 그림자들이 어스름에 찬 바람에 물결처럼 세었다.

사람의 키의 두 배가 족히 넘는 음각의 문 뒤로는 좁은 합각 지붕에 회청색 기와를 얹었다. 지붕과 벽이 잇닿는 틈새에 시옷모양으로 옅은 부조를 했다. 이곳은 문과 벽의 윗틈의 공간이 좁아 화려한 팀파눔 대신 구멍을 이중으로 내어 서쪽을 면하게 했다. 부조들이 띠를 이루어 지붕을 받치고 있었으나 그 정교한 형상도 분간하기엔 빛이 충분치 않았다. 성탑은 마치 감시자 같이, 교회의 등허리에서 솟아올라 마을 위에 서있었으며 어선들이 간절히 찾는 지표에 선 등대 같기도 하였다. 첨예하게 하늘 위로 올라선 끝은 붉은 타일로 덮인 계단 같았다. 그것은 오르기엔 너무나 가파르고 폭좁으며 매끄런 디딤대였다.

빠르게 중얼대는 낮은 기도문이 탄식에 가깝게 입 밖으로 나왔다. 얼음장 같은 수도원 내에도 불구하고 파욘은 잠시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이마에 검집을 가져다 대자 살아있는 듯 소스라치는 검장식의 울림이 웅웅대며 돌 사이로 스며들고,

이윽고 판금이 서로 접히고 맞부딫히는 소리가 나고 그는 굽혔던 무릎을 일으켜 머리 위로 후드를 씌운다. 지팡이처럼 세워 이마를 기대던 검을 뽑아들어 검집을 채운다. 벽에는 가고일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는 문을 앞두고 서서 그것을 오래 보았다. 

달의 플레어가 녹아내려가 은처럼 흐르며 지상에서 차츰 사라지고 있었다. 습기 어린 돌현관을 빠져나와서 밤안개를 발로 걷었다. 망토를 쓴 인영이 어린 아이들의 그림자 인형처럼 절그럭대다가 이윽고 밤을 문안하러 온 하나의 객을 더 맞이한다. 성당을 빠져나오던 파욘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입구의 부조 곁에 돌로 조각한 석상 같은 인영이 서있었다.


- 여, 살쾡이. 수도에 올라온 건 간만이지? 오래 걸린 걸 보니 관광이라도 한 거냐?

- ... 거미님.

간만의 재회였다. 황제를 빼다박은 모습에 조금 더 선이 굵은 예의 그 얼굴로 벽에 기대 있던 거미가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황제에게 종종 드러나던 표정이 측은함에 가까웠다면 무표정을 일그러트린 거미에게선 웃음기가 묻어나곤 했다. 파욘의 모습은 종전에 보았을 적과는 많이 달라져 거미는 칼날 같이 감정 없는 시선으로 가만히 그를 보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홀로 다니긴 매한가지 였지만 심상찮은 그늘이 드리우고 있었다. 그를 살피던 달빛 아래 색 옅은 얼굴과 안개 같은 회안은 한층 차가워지며 여러 겹으로 또렷하게 나뉘었다.

- 최근 이유없는 변사체가 발견되는 일이 잦아지고 있어. 수도 근방에서. 네가 넘어온 인근에서 일가가 살해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는데, 오면서 뭐 본 건 없었어? 

- 글쎄요.... 수도를 오래 비워서 이제 이런 저런 얘기도 모르겠습니다. 딱히 수상한 점은 느끼지 못했습니다만. 제가 넘어온 쪽과는 다른 방향일지도 모르겠군요...

- 수도 생활이 따분했나?

- 저와는 잘 맞지 않는 군요. 이런 활달한 소란들은.

- 많이 변했구나. 이런 곳엘 다 오다니.

거미는 예배당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며 까닥여 보였다. 파욘은 묵묵히 긍정했다. 명예는 그들에게 산의 정상에 비견되었고 니젤은 기사들의 성도로 불리는 곳이었다. 하지만 파욘은 원래도 그런 것과 거리가 먼 자였다. 명예나 불명예나 하는 것들로 그의 행동을 책잡기에는 자의와 타의를 분간하지 못한지 오래였다.

- 왜 이런 곳을 기웃거리는 거냐. 너 같은 녀석이 발을 들일 만한 곳이 아니지 않나? 장례도 못치르는 신세면서. 더더욱 떠난 사람들을 기리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테지.

- 그렇기 때문이겠지요. 적어도 제 발로 걸어왔으니까요. 하지만 추모를 위해서라면 그건 아닙니다... 그런 일은 그들에 대한 모독이고요.

- 모독?

- 저를 추궁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사도, 수도의 삶, 정쟁과 전쟁…. 저희는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낼 뿐.

검은 살쾡이가 무엇이냐 묻는 다면 다른 이들의 검이라 답하리라. 파욘에게선 금속을 울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인간성의 끄트머리야말로 신을 찾는다, 는 것일지도 모른다. 같은 종에게서 거절 당하고 종을 넘어서 버렸으나 그런 이에게도 굴복은 있었다. 파욘에겐 거미가 여타의 누구와도 달랐다. 그 역시 같은 경지에 도다르고 싶다는 열망에 잠식되던 때가 있었다. 그는 예기할 수 없는 결정들을 곧잘 내리곤 했다. 파욘도 어렸을 때에는 한참 어른이었던 기사의 결정에 대해 그리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고, 어쩌면 그럴 만한 편의가 늘 뒤따랐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뒤늦게 머리가 여물고 나서 온 것이었다. 제 몸으로 직접 세월을 꿰뚫어 보니 거미의 행보는 확실히 보통의 기사들의 궤적과는 확연히 다른 것으로, 어디까지가 기사로 여겨져야 하는가 싶은 것이었다. 아니라면 기사라는 건 그런 그들의 사소한 결정이나 사건들과는 관계없이 정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운명이나 의지의 흐름 따위는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영웅도, 악마도 될 수 있는 존재라고. 

당신이라면 이 갈림길의 속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명징함이 필요할 때 파욘은 그를 떠올렸다. 거미는 자유, 마음 가는 대로 곧 명예고 길이 되었던 기사와 달리 철저히 속박되어 갔다. 그러나 그는 미래를 보고 있었다. 바로 지금 이 때를. 목숨이야 이미 오래 전에 닳아버린 것이 아니던가? 그는 제자를 들였고 더이상 수도를 떠나지 않게 되었다. 거미는 누구보다 지독하게 황제를 사랑해왔다. 가히 헌신의 형태를 이루는 그만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황제를 배신하지 않으리라. 파욘은 그의 진정을 육안으로 확인한 몇 안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제자를 두고 난 뒤로 무뎌졌다고 생각한 기세도 이런 방식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기사도라는 것이 그러했다. 귀부인처럼 구체적인 열애상대라도 있고서 바치라고 하는 것이 아니며 한창 때의 혈기가 끓는 무인들에게 스스로의 판결과 고귀함을 요구했다. 바치겠다고 해서 바쳐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 무리함이 희망의 품 안으로 다가선 많은 이들과 부딫히기 시작했다.

- 길에서 힌셔를 마주쳤습니다만… 유명인사가 되었더군요. 갈매기. 그가 하마를 괴롭히는 것 같던데요.

- 루놀? 아니야. 같은 기사이더라도 저는 피래미. 힌셔는 역사를 바꿀 기사야. 저가 어떻게 범을 건들겠어.

- ...제자 사랑이 대단하시군요. 냉정히 말해서 검붉은 하마가 획을 그은 기사인건 맞지만 아직까지는 강하다는 것 이외에 딱히 스스로 세운 공적이 있는 건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확신을 하시는 겁니까.

- 뭐 잠자코 보면 알 거다. 이 세기에 있는 모든 기사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할거야 . 녀석이 이번 일의 범인도 잡아줄 테지. 짐승이나 악마 따위의 짓이 아니란 건… 피차,

그러나 지금 와서는 어째서인지 거꾸로 든 창의 모양이 앙크 십자가와 같이 비추었다. 그의 시선이 문득 먼곳을 보는 듯 투명하고 커졌다. 그는 습관처럼 소리 없이 웃었다. 사람의 일이었다. 소문이 조용히 고개를 떨구고 돌아다니며 공포를 조성했으나 모두 쉬쉬했을 뿐인 것이다. 

파욘은 이 건실치 못하고 어느 누구에도 비견되지 못하며 경건스럽다기엔 다소 경악스러울 업적을 세우며 대륙을 지탱해온 기사가 제자 자랑에 빠져있다는 말을 들어도, 마냥 팔이 안으로 굽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렸을 적부터 통찰력이 비범하던 이를 떠올리면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말토에 뒤에 기사가 붙고 그게 힌셔였다니. 파욘은 그제서야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바닥을 내려다보던 기사는 침묵 속에서 물었다.

- 지금의 힌셔와 저. 어느 정도 차이입니까?

- 루놀은 어렵겠지만...너라면 열 번에 한번 정도는 이길지도. 왜? 

- 가능성의 이야기이군요... 그렇다면 부딪힐 일 자체가 없었으면 하는데요.

- 호승심이 없구만. 아직 얼마든지 더 싸울 일이 있는데 그러면 안되지.

- 그다지 젊지도 않습니다만, 만약 정말로 맞붙으면 물러서진 않을 작정입니다.

- 나무랄데 없는 기사가 됐구나, 너도.

거미는 이해할 수 없는 회안으로 그를 응시해온다. 찬기운이 파욘의 얼굴을 보여줄 듯 망토 자락을 뒤흔들었다.

- 너에게서는 그런말이 나오지 않길 원했다만.

- …각자에게 역할이 있는 법. 누가 대신 해주겠습니까?

- ...당신은 죽은 이들을 기억합니까? 

- 십 년 전에, 일가가 독살되는 사건이 있었죠. 그러나 끝내 아이 하나는 발견치 못했습니다. 하등 중요치 않아 외면하다가도 저는 가끔 그런 것을 고민합니다….

- 그런가. 나는 가끔 누가 나를 위해서 기려주었으면 하는걸.

희미한 빛을 반사하는 손을 펴 내려다 보았다.

- 내가 해온 일들을 보면, 내 모자람으론 한계가 있거든...

무릎을 꿇고 진정으로 용서를 구할 기회조차 오지 않는 시대였다. 기사는 면죄부가 아니었으나 무엇이든 그들의 의지는 아니었다. 인간으로서는 명예보다는 자비를 바랐다. 기사가 되기로 한 그들의 운명을 신의 너른 손 안에 맡아두길 바랐다. 그들에게도 안식이 주어지길 바랐다. 결국은 파욘도, 그도 기사였다. 한편으로 파욘에게 수도에서의 기사의 삶은 아주 일부일 뿐이고, 그가 수도에나 바깥에서 어떤 존재였는지는 마법사들에게 중요하지 않았으며 검을 쥐고 휘둘러야 할 때가 오곤 했다. 그 모든 것들이 경멸스러울 따름이더라도. 파욘은 비난하는 듯이 낮게 대답했다.

- 우리는 결국 다 꼭두각시의 삶을 사는 거겠지요. 

어쩌면 기사가 아니었다면 좋았으리란 건 그들에게 의미없는 가정이었다.

- 파욘, 네겐 삶이 고되구나.

거미는 고단한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 그러면 나를 위해서는 기도해다오. 네 말대로 나는 바닥까지 떨어질 기사이니. 내가 낮에서 떨어질 때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며칠 뒤엔 무리로의 복귀였다. 

- 사실 명예라는 건 줫도 못되는 거 아냐? 이렇게 금방 굽히는 걸 보면. 큭큭.

법사에겐 그 사실이 대단한 유희거리라도 되는 양으로 보인다. 섞여있는 마법사 무리 가운데 이질적인 검사의 두드러짐이 마치 뱁새들 사이에 끼어 앉은 독수리라도 되는 모양이라고. 독수리라기 보다 검은 그는 솔개였음이요, 다른 이의 것을 호시탐탐 채가는 까마귀 무리가 서성이며 시체를 부르는 소리로 새벽을 즐기고 있었다. 어린 수련법사는 찬 공기에 얼굴이 드러나지 않도록 망토로 제몸을 둘둘 감은 채였다. 과연 천성 전투에서 몸을 써오는 그에게도 이슬은 서슬퍼렇게 겨울의 초입을 경건히 고하고 다소 눅눅히 관절을 끌어내리곤 했다. 신은 과연 있는가? 그는 간밤에 문득 그런 잡념을 떠올리다 무겁게 가슴 밖으로 덜어낸다. 존재론적으로 치자면 기사라 해도, 한순간을 살다가는 그가 무엇을 그리 꿰뚫어 본다는 것이며. 그런 헛된 공상은 다만 밤사이 어느 한적한 인가에 울린 단말마가 기사인 그로서도 끔찍스러워 다소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비가 내려 새벽이 제시간에 밝아오지 않고 나뭇잎을 타고 흐르는 물이 바위 위로 똑똑 떨어졌다. 후드를 쓴 이들은 저들끼리의 대화에 고양되어 나무를 털어 물을 모아 음식을 끓여먹고는 출발을 위해 비가 멎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잠시 빗속을 정찰하며 거닐었다. 

- 아, 참. 핏자국 없애는 걸 잊었군. 

마법사는 자신의 망토자락에 몇 번 식을 중얼중얼 외며 지팡이를 휘두르더니 파욘에게도 다가와 같은 것을 반복했다. 지독히 풍기던 피냄새가 사라지고 옷은 순식간에 멀끔해졌다. 그 장면을 둘러싼 물안개가 새벽을 흐려주었다.

파욘은 이로 인해서 어느 기사들의 목숨을 희생하는지도 몰랐다. 이 단체가 존속하는 한, 몇 세기 동안이고.

물가에 자라는 식생에 기생하는 물겅퀴는 버거웠으나 그는 아직까지 버틸 수 있었다. 호흡기관으로 숨을 쉴 부레도 있었으며 손 한켠엔 그를 끊어버릴 만한 검도 힘도 남아 있었다. 가족이나 소중한 이들을 손에 잡힌 이들은 결코 해내지 못할, 고발과 폭로, 파괴를 그는 자행할 수 있을 것이다. 머지않아 말토는 기사를 복속할 시스템을 더욱 완전히 갖춘 성충이 되어 벌레잡이풀처럼 수많은 이들을 수렁으로 꾀어낼 것이다. 만일 스스로 구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파욘도 힌셔의 스승과 기사로의 거미도 이곳에 필요치 않은 이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눈 먼 장인처럼 앞을 헤매고 서로 결집치 못하며 작은 혼돈에도 산산히 부서질 것이다. 고삐 없는 말과 같이 어느 속박 없는 것들이 모두 그러하듯. 머지 않은 미래는 확정이었다. 다른 경우는 있을 수 없다 라고.

그러나 파욘은 설령 이들이 악이라 해도 손들었을 것이다. 후대의 수많은 기사들이 이로 인해 고통 받는다 해도, 그로 인해 피가 여전히 제손을 적신다 해도. 그는 거미의 제자를 죽일 지도 모르고 그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되었든 원망은 말기를 그들에게 당부했다.

기사던, 천민이던, 노예던, 견습기사던, 

말토던, 

하잘 것 없는 삶을 살려고 살아가는 건 아닐 거라고.

제 그릇과 분수를 넘어서는 마법사들은 이미 폭주의 일보 앞에서 발을 내밀어 딛고 있다. 날붙이 끝의 피는 성수에 담그더라도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기사가 되는 건 오래 시간이 지날 수록 역설적으로 칼끝을 더욱 더럽히는 일이다. 결국 또 다시 계단을 올라야 하는가.

힌셔에게는 조금 잔인한 이야기가 되겠으나, 파욘은 한편으론 속을 깊이 파고드는 한기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연인도, 스승도 있고 자신과는 평생 다른 양지를 걷겠지. 무슨 일이 있다해도 그 둘은 힌셔를 위해 목숨을 걸 테고. 그러니 조금은 부러워도 괜찮을 터였다. 그에겐 이곳이 막다른 길이었으나 조금의 이성이라도 남아있는 행세를 할 때나마 그와 겨루어 보고 싶었다. 살인자의 눈이니 뭐니, 그런 것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로이 칼을 맞대길 원했다. 그의 친우 역시도 다시 어깨를 맞대고 볼 수 있다면 좋으리라. 그는 병사였으나 인간을 해치진 않았으니까. 그게 그에게는 의의였을지도 모른다. 그토록 수많은 동료의 죽음을 밟고서 말년을 병상 위에서 보내고도 빛낼 수 있었던 썩어빠진 정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거미는 기사의 성지에 묻히지 못할까. 거미가 타락하면 파욘은 저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5

힌셔는 그간의 행적, 이곳에 대해 알려진 유명세, 그리고 가끔 사람들의 머릿속을 떠돌던 이야기에 대해 납득했다. 남들에게는 환상이나 추측에 불과한 사람들의 속내가 그에겐 감각이며 진상이었다. 그런 힌셔에게 사람과 현상에 대한 이해란 털끝 보다도 쉬운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럼에도 인식이나 수용의 문제는 다른 이야기라고 답할 것이다.

사저의 서탁 위에는 긴 양피지가 놓여 있었다. 흑색 필로 그은 고민의 흔적이 여기저기 긁혀있다. 인상 쓰는 건 물려받은 버릇이었다. 수도에서 당시 외부로 파견을 나갔거나 행적이 모호한 기사... 임무지를 특정할 수 없는 기사들까지도 한 둘이 아닐 테지만 최근엔 전쟁 지역으로 빠져나간 기사들이 많으니 꽤 추려내졌다. 이중에 다른 사건과도 겹치는 자가 있는지.. 아니지, 범행을 저지른 건 개인이 아니라 단체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애초에 기사라는 가정도 확실치 않았으나 힌셔는 제 감과 부스러기 같이 남겨진 단서들을 믿었다.

극동부에서 돌아온 답장은 비슷했다. 다만 수도회는 수도사 일곱으로 이루어진 무리는 보지 못했고, 그들이 파견한 적도 없다는 것이었다. 교단 사칭은 종종 있는 일이라며 그들의 대처는 조금 더 안일했다. 그들이 누구이기에 수도자를 자칭했을까? 황도에서 나고 자라며 대륙을 순회하는 수많은 상단과 순례자 무리를 보아온 힌셔에게 마저 낯선 이들이었다. 술집에서 장남이 왜 두려움에 젖었는지까지는 떠올리지 않았으니 알 수 없었으나 촉이 그를 자극해왔다. 스스로가 신의 사자를 지칭하다 보면 어느샌가 주위의 사람들도 홀려버리는 모양이라고. 그러나 그 껍질을 벗겨내고도 본래의 모양마저 감출 수는 없는 것이다.

더이상의 조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장부의 기록이 필요했다. 하다못해 지방으로 파견 나간 이들의 명단이라도 받아야 했으나 지난하게도 허가는 떨어지지 않았다. 허가를 기다리던 그는 지금까지 제가 받아온 가르침과 쌓아온 덕망을 거의 어기고서 ㅡ 황성에 침입하려는 충동을 몇 번이나 억눌러야 했다.

어떤 이들에겐 별거 아닌 작은 사건인가. 전쟁이라는 괴물 따위가 활개를 치고 역병처럼 대륙을 잠식하는 이때에도 감기로도 환자는 죽는 법이었다. 그게 무엇이든 지금 그들 주위를 배회하고 있을 것이었다. 어딘가에서 불안이 스멀히 기어나와 힌셔는 진실이 별것이 아니길 바랐다. 기사의 입장에선 조사할 것도 없는 대수로울 사건이었고 그를 파견한 것이 그들의 착각이었다면 말이다.

- 전운이 다가오고 있어. 일촉이 민감한 시기다, 힌셔.

스승은 더이상 제자를 돕지 않았다. 전쟁의 기미가 농후한 수도를 함부러 떠나게 두지 않아 힌셔는 한동안 니젤에 발이 묶인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에겐 명령에 수긍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제자가 가진 혜안은 결코 그에게 가닿지 못하곤 했다. 그를 재어보는 듯이 들여다보는 거미의 검은 눈이 문득 자신의 것과 꽤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간혹 스승의 혈연과 자신의 혈연은 어느 고대에서 부턴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이한 발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치 특이한 색의 머리칼 처럼, 많은 기사들 중 그 둘에게만 뚝 떼어놓듯이 이런 능력이 발현 될리 없지 않나. 마치 그 둘만은 대륙의 유일하게 다른, 별종들임을 입증하는 것처럼.

짧은 휴가를 얻고 그는 홀로 분지로 나가는 관문의 땅을 밟았다. 이름 모를 브랜디가 기사의 초라한 행낭에 들려있었다. 제주祭酒에 일가견이 없는 힌셔가 거실장 위에 놓인 것을 적당히 들고 온 것이다. 장례식을 마친 마을에 인사를 하고 그는 고지에 세워진 마을 공동 묘지로 향했다. 차근차근 오르는 석계는 짙은 화강암으로 얼룩덜룩했다. 짧게 묵념을 마치고 공동묘지에서 내려가는 길목에 고요를 그려낸 듯한 마을이 양털 같은 안개에 감싸여 있었다. 어디선가 양떼 목에서 방울 치는 소리가 울린다 . 불타오르던 산은 언제 그랬냐는듯 온전한 빛을 벗어버리고 사라져간다. 건너편의 산이 흐릿하게 거인처럼 서서 그를 지켜보았다.

형제여. 

모든 악의 길에는 반드시 샛길이 있다 하셨소?

나 역시 당신의 말이 부디 옳았기를 바라오. 내가 벌인 모든 일에는 속죄할 시간 또한 주어지길 기도하고 있는 것이라오...  왜냐하면 하나의 길을 선택하고 그것의 명암이 가려지기에는, 부득이 선택의 시간은 짧고 미래는 통찰 할 수 없기 때문이라오. 우리 기사들에게 조차...

한철의 짧은 무수한 생명들과 마찬가지로 붉고도 짧은 것이 그들의 삶일 것이다. 시대의 일부를 살아가는 그들은 제손으로 만든 다음 세대를 결코 마주하지 못할 것이다. 제국의 전역을 떠들썩하게 하는 소식은 그의 귀에도 낙엽처럼 굴러들어갔다. 

- 불멸자의 단서를 발견했다. 법사들이 집결 중이다. 속히 합류하도록.

소식을 들은 파욘이 채비를 하는 동안에 그들이 머물던 마을에도 축배의 분위기가 번연했다. 심장 박동 같은 환호 소리가 돌연 바깥을 메우곤 했다.

힌셔님이 돌아오셨대!

아니, 기사분들이 돌아오셨대! 힌셔님도 조만간 돌아오시겠지!

역사가 기릴 명예로운 업적이다, 기사들이 제국을 위한 충성을 맹세한다!

암실에 낮의 빛이 껌뻑껌뻑 들어 문치에서 서성대는 바람 고리 같은 발들이 멀어져갔다. 쇠로 된 검장식의 무디은 소리가 정감이라고는 없이 터덕이다가 그가 머무는 지하실을 열고 들어온다. 수도로부터의 파발이었다.

- 황제가 기사들에게 새로운 맹세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붉은 서탁 위에 엎드린 고개는 미동이 없었다. 다물어진 입이 열리고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 ...그분은.

- 거미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새벽에 읊는 기도문이 차가웠다. 장례와 장송 없는 연도였다. 

bgm 추천



발행한지 좀 지나 추가하는 주저리

파욘 - 힌셔 - 거미는 힌셔를 매개로 애늙은이 전체 작품에서 가장 긴 호흡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 관계입니다. 힌셔외전에서 하마와 거미의 관계가 밝혀지면서 그제야 힌셔의 의문스러운 점이 풀려 힌셔라는 캐릭터가 완성 되었으니까요. 거미와 파욘이 서로 면식이 있다는 건 순전한 날조이지만 500년 전의 시간대를 공유한 기사라는데 의의를 둡니다. 거미-파욘의 조합이 좋아서 소소한 일상대화 부분은 뺐지만 대강 마지막 힌셔가 들고 간 브랜디는 파욘이 거미에게 준 출장선물이라는 내용. 그냥 잊혀질 수도 있는 파욘을 발굴하게 된 건 파욘이 하마에게 ‘그대는 충분히 기사였다’ 라고 했던 말과 비슷한 말을 하마가 팅크의 마지막 순간에 ‘기사로서 그대가 존경스럽다’라고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파욘의 입장에서 드러나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더군요. 힌셔가 파욘의 마지막 말을 혹시 들었을까 하는 의심도 듭니다

추천음악은 글쓰면서 계속 들었던 곡이고 eg veit i himmerik ei borg도 함께 들었습니다. 두 곡 다 skruk 의 1995년 앨범인 Landskap av stemmer의 수록곡이고 정말 좋아하는 음반.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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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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