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밤으로의 긴 여로
외 1편. 비가 오면 그는 세계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목주와론 + 기린닭
캐해 제공 및 연성 하라고 말씀해주셨던 기사님께 헌정합니다. 기사님의 캐해가 정말 좋습니다
밤으로의 긴 여로
1.
유속은 서서히 거세지고 하천을 빠져나가는 강물이 점차 불어나고 있었다. 황도의 옆을 지나는 강이 화를 내며 통제불능 상태가 되어서 표면에 이는 물거품이 소용돌이가 되었다. 도시는 비에 잠겨가는 중이었다. 급히 달음박질치는 물줄기들이 홍수를 이루어 물에 잠긴 벽돌길이 수 여 개의 배수로가 되어간다. 밤은 으레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그러했고 하루에 반나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의 얼굴을 제대로 들여다 보는 건 그다지 평범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 밤은 사라지지 않았고 고대의 사람들은 그런 일은 곧 멸망의 징조라고 믿었다. 마족들은 마왕에게, 동대륙의 사람들은 용에게 각자 제례를 지냈고 결국은 다시 아침을 찾아낼 수 있었다. 중앙대륙의 사람들은 그것이 천재지변과 같이 때가 되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주기를 가진 자연현상이라고 믿었다. 밤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일은 사람들을 두렵게 하거나 적어도 불쾌하고 불안한 느낌을 가져다 주었기에 누구도 그런 천재지변이 아니라면 굳이 밤을 기억해내지 않았다. 홍수가 도시의 경계인 성벽을 범람하고 침수가 도시 안을 적신다면 도시는 억지로 깨어나 밤의 소동을 목도할 터였지만 이 맘때의 비는 그정도의 수량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거친, 그리고 시끄러운 소낙비가 잠시 간격을 두고 연이어 내렸을 뿐이며 날씨의 여건이 거주민들을 이른 시간에 집 안에 들어가게 했고 거리의 조명을 모두 지워 도시를 암전과 같은 상태로 만드는 것이 다였다. 거주구역과 상업가의 경계에 어느 주인 모를 집의 옥상 하나에 미동없이 앉은 인영은 시커먼 장대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비구름에 반사된 미세한 빛에 번들거리는 망토자락 위를 빗방울이 쉴 새 없이 미끄러지고 옆에 놓인 검은 창대로도 비가 타내려 그 형태가 아니었다면 사람이 아닌 물건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빗속에서 그를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행인이고, 인적이고 없는 높은 곳에 저홀로 앉아서도 무구를 쓴 그대로인 까닭은 그곳이 니젤이었고 기사 새까만 닭은 그래야 했기 때문이다. 기사들의 성지. 투구를 쓰고 나서야 그가 처음으로 밟아본 땅. 그러나 닭은 딱히 그 사실을 경계하지도 소란이 가중해도 아무도 그를 찾지도 호출하지도 못할 것을 알면서 폭우에 애를 태우지도 않았다. 무겁게 푹 절어버린 옷은 말할 것도 없이 뼛속까지 습기가 채운다. 새까만 닭에게 어떤 밤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과 달리 닭이 깨어서 마주하는 것은 대개 낮이 아닌 밤이라 그는 고대의 사람들이 왜 밤을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잘 알았다. 젖은 옷과 같이 눅눅한 과거가 그에게 달라 붙는다. 사실 그때가 정말로 밤이었는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쏴아아ㅡ 나무 사이로 비는 숲을 부술 듯이 퍼붓는다. 잎사귀를 거칠게 밀어내고 빗줄기가 떨어지고 질퍽이는 진흙이 깨져 무릎까지 튀어오른다. 이윽고 숲이 심각하게 파헤쳐진 곳에 도달하자 창을 쥐고 선 기사 하나가 비스듬히 서 이미 그가 달려오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료를 죽인 게 너야, 와론? 기사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왜…”
희게 질리고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이 론누 위에 얹힌 차가운 완갑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한 뼘에 다 잡히지 않는 팔을 거칠게 쥐는 그 손짓에 예의나 거리감이라고는 묻어 있지 않았고 그는 얼굴까지 서늘하게 굳힌 채 기사를 올려다본다. 기사의 몸은 간단히 딸려오지 않고 감정 없는 시선이 그를 내리 깔아본다. 비가 흘러내리며 갑옷과 투구의 틈새로 스며들었다.
“…너도 석호에 대해 알지? 호수로 유입되는 물에는 좋은 성분도 있고, 나쁘게 썩어 건져내야 할 것들도 있지. 강제적인 정화작용을 하는 자연은 늘 물이 순환하며 자정하겠지만… 어떤 경우엔 자연스러운 작용 대신 당장 건져내는 게 필요한 일이란 거, 내 말, 이해해 줄 수 있어?”
“당신 정말 미쳤구나.”
그는 혼잣말을 하듯 땅을 보며 읊조린다. 빗물에 희석되어 흰 손을 적시는 모양이 계속해서 번져간다. 그건 팔의 주인의 피였고 일몰과 같이 붉은 피는 보는 이에게도 섬뜩함을 주었는데도 그는 아무 고통도 없다는 양 태연한 태도였다. 그래,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살아있다고 해를 끼치는 존재라고? 차라리 죽여버리는 쪽이 전체를 위해 더 이득일 수도 있다고? 회색의 머리카락 틈새로 빗물이 흘러내리고 비는 피가 돌지 않은 것처럼 딱딱한 갑옷의 기사와 여기저기가 검게 젖은 망토를 걸친 두 사람을 적셔갔지만 기사는 만족스레 창을 잡고 있었다. 그에게는 와론도 와론의 정의도 비와 강의 석호도 지독히 일방향적으로 흘러가는 것들에 불과했다.
“작작해. 와론. 현실을 봐. 네가 저지른 일이 어떤 걸지 생각을 해. 이게 네가 말하는 기사야? 내가 네가 무슨 일을 하던지 상관하지 않을 줄 알았어? 얘네들은 늑대 무리 같은 자들이야. 하나를 죽이면 다른 무리가 복수를 갚을 때까지 쫓아온다고. 저들이 널 추적하면 그때는 더 이상 한 명이 아닐 거야. 네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겠지.”
유쾌함이라고는 전혀 남지 않은 어조에는 떨림마저 배어있어 갑옷의 기사ㅡ와론은 다소 차갑게 가라앉은 소리로 대꾸했다.
“그때는 싸우면 그만이야, oo.”
“모든 기사가 너를 쫓게 만들기라도 하려고?”
그는 완갑을 뿌리치듯 놓아버렸다.
“난 네가 차라리 내 앞에서 꺼졌으면 좋겠어. 와론. 나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네 방식은 어딘가 이상해…! 널 버리고 가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네가 적어도 얘네들 손에 뒈져버릴 것 같아서라고!”
“ 너까지 그럴 필요는 없잖아. … 기사들을 미워하지만 않으려 노력해봐. 그들은 나라고 생각해보면 조금은 동정할 수 있을 지도 모르지. 나는 너라면 어쩌면 이들도… 아니다, ”
기사임에도 기사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와론은 답답한 마음으로 기사들을 동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간인의 눈으로 볼 때 정의란게 어느정도로 허울스럽고 명분에 불과한지 기사인 와론에게 보다 적나라하게 보이곤 했다. 그게 사실이라고 해서 와론이 기사를 그만두고 그에게 의견을 구하는 건 아니었다. 와론은 여전히 기사들이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태도였지만 그들을 만날 생각까지는 없었기에 아량을 베풀었다.
“가자. 네 말대로면 곧 추격이 올 테니.”
“…묻어주지 않는 건가?”
“우리는 원래 장례 같은 거 안 치르거든. 운이 좋으면 누군가 수습은 해주겠지.”
“제정신이 아니야, 너도, 죽은 저 녀석도.”
들을 만한 사람이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음에도 비밀이라도 터놓듯 그의 목소리가 한없이 낮아졌다. 화난 투로 대꾸한 그는 머리 위로 후드를 걸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앞서 가버렸다. 어쩌자고 기사란 족속을 가까이 했는지. 그들은 가까이서 관찰할 수록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는데 하는 분노로 부츠 아래 진흙을 힘껏 철퍽였다. 후드를 쓴 얼굴로도 찬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아무리 앞서가도 금방 거리를 좁히던 와론은 뒤를 따라오지 않는다. 그는 다시 멈춰 서서 뒤를 보았다. 온전한 형체를 벗어나 쓰러진 사람 하나. 그 앞에 와론은 창을 걸치고 서있다. 마치 사신처럼. 찢어진 치마와 건틀렛의 틈으로 뚝뚝 떨어지는 피가 빗속에 지워지고 있다.
얼굴 없는 기사는 마치 사람들이 싫어하는 밤과 같은 미지를 띄어서 그 속을 들여다 보는 것은 몹시 불편한 일들 중에 하나였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투구를 보며 마치 제 안을 들여다 보는 듯한 섬뜩함을 느끼곤 했다. 투구 뿐만 아니라 몸통도, 팔도 다리도, 심지어는 손가락 끝까지 남김 없이 덮어 씌운 철갑이 그를 더 인간답지 않게 만들었다. 기사들에게 좋은 기억이라고는 없는 그에게 저희들을 사랑하고 동정해달라는 일방적인 고백은 아마 새까만 닭이 했던 모든 말 중에 가장 무뚝뚝하고 솔직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음이란건 타이른다고 타일러지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이미 정화조차 어려운 자기들만의 사상과 정의에 오염된 게 뻔한 이들을 그가 좋아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와론이 그토록 좋아한다는 기사는 현세대에는 없을지도 모른단 게 그의 생각이었다. 괜찮은 이들도 많다고 말하는 와론부터가 모범이 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와론이 아니었다 해도 자신이 평범한 삶을 지속하지 못했으리란 건 알고 있다. 그러나 축이 부러진 채 굴러가는 전차의 바퀴처럼 기이하게 굴러가던 그의 행동들이 그것으로 변명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는 가끔 다정했으나 둘 사이의 대련은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잔혹했고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전투에서 지는 모습은 단 한번도 보이지 않았다.
네가 이렇게까지 강함에 집착하는 이유는 뭐야, 와론? 그도 기사들이 서로를 대항해 그렇게 치열하게 맞붙은 이유를 본 적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기사는 자기 사정을 입 밖으로 내는 일도 없어 와론과 그들 중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기사에게 대항할 세력 없는 대륙에서 대의명분을 잃은 이들인지도 몰랐다. 와론은 자신이 싸우는 이유를 그에게조차 이해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와론을 이해해주는 걸 포기하지 않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인지 모른다. 결코 언어의 형태로 발성하지 않는 빗줄기들처럼. 그토록 기사를 싫어하는 그가, 와론을 이해할 거라고.
...
쏴아아ㅡ
비가. 쏟아지는 비가.
소나기가 되어 내리는 큰물이
비어있는 와론의 갑주 한 구석에서 차오른다.
마찬가지로 비어버린 그의 속에서도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툭, 그 물 속에서도 눈가로 재차 물이 맺히고 있었다. 그는 대가를 알면서도 희생을 자처했다는 걸. 비에 맞은 창은 무거웠고 식물의 뿌리처럼 갑옷에서 뽑혀 나와 두 손에 온전히 들렸다. 큰 빗소리가 비명을 묻어버린다. 아가리가 닫혀 있는 투구는 다시 빗소리를 묻어버린다. 어린 풀들은 내리는 비에 눌려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숨이 죽었다.
누워있는 그의 위로 비가 끝도 없이 무겁게
검게
무겁게
검게 내려서
진한 머리칼과 창백한 피부가 드러난 기사는 더는 말이 없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비정상스런 시야는 그저 한 쪽 눈을 감고 보던 평소의 광경과 다를 바가 없다고. 재차 눈을 깜빡이며 그는 여러 번이고 그 부자연스러운 감각을 떨쳐버리려다가 결국 와론을 떠올리고 깨닫고 말았다. 그에게 창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온 건, 이걸 위해서 였나?
…
쏴아아. 강물은 원래부터도 그 심장부에 깊이 머물러있던 탁한 색으로부터 변할 도리가 없어 탁류가 진흙과 바위를 퍼나르고 흙을 뒤섞었다. 차고 습한 기운이 목 위까지 덮고 깊은 회한에 정수리 끝까지 잠긴다. 하루를 더 그를 일찍 떠나지 않았던 것을. 기사들은 교만하다. 감히 이치의 선을 넘나드는 이들에게 법칙이란 예외를 두지 않는 법이다. 그의 댓가는 와론을 바닥으로 묻는 일이었다. 아무도 그를 발견하지 못하고 장마가 와 산의 흙들이 개어내리더라도 드러나지 못하게.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지하까지 손이 닿는 가장 깊은 곳으로 생몰되는 와론의 죽은 육체와 함께 자신의 바닥에서도 그를 매장했다. 투구를, 아무도 그것을 감히 함부로 건드릴 수 없게. 아무도 두 번 다시 그 틈 속을 들여다 볼 수 없게 흙 속으로 갑옷과 그의 얼굴이 사라진다. 기억에도 몇 번 되지 않던 미소를 묻고, 검푸르게 젖어 말없어진 땅을 내버려둔 채로 창을 집어든다. 그는 편평해진 땅을 향해 조용한 작별을 고했다.
우리의 이별이 언제까지일까, 와론? 사실은 기사였다고 해도 너를 미워할 수 없었다. 해가 닿지 않는 것이 일상이 되고 녹은 채로 굳어버린 밀랍과 암반들처럼 너(새까만 닭)와 너의 죽음은 하나로 용해되어 떼어내지지 않는다. 그러나 너를 다시 그곳으로부터 불러내는 일이 있다면 그때는 세상에 다시 네 존재를 드러내겠지.
유일한 나의 벗. 너는 여전히 평안히 잠들어 있는가?
그 일이 없었다면 제 스스로 기사가 되는 날은 죽어도 오지 않았으리라고, 기사는 저를 빗물에 묻어버리며 생각했다. 투구를 공명하는 빗소리가 시끄러워져간다. 결국 와론은 기사들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계기는 그것이었다. 그들과 그의 정의에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그로서는 알지 못한다. 죽음도 함께하는 이야기 속의 인물들처럼 그들은 일심동체가 아니었으므로. 같은 결말을 맞지 못하고 이제까지도 살아남아 결국 그토록 치를 떨던 기사가 되어버린 제 모습이 어색할 정도로 서글픈 탓에.
론누는 그의 손 안에 있고 기사사냥으로 행하던 정의는 누구 하나에게도 온전한 이해를 기대할 수 없었다. 최근에서야 그도 그렇지 않은 이들을 조금은 발견했지만 와론이 가졌던 체념은 옳았다는 게 드러났다. 그의 정의도 이렇게 부딪히고 닳아갔겠지. 그렇게도 입이 닳도록 이야기하던 기사란 그런 것이던가. 기사란 것에 대해 그도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는 크게 돌며 흐르는 물을 생각한다. 대기와 비와 바다로 변하는 순환 시스템의 일부, 그딴 것들에 걸리적거리는 바위처럼 거치적대고 있는 자신을. 그 안에 녹아들지도 부유하지도 못하는 걸림돌을. 해마다 찾아오는 날씨처럼 와론도 같은 일을 반복할 뿐이었다. 가지를 치듯이 불순물을 걸러내는 일은 새까만 닭의 역할이자 배역이다. 비가 오면 그 사람이, 와론이 떠난 날을 생각하며 언제까지나 끊이지 않을 추모를 이어가는 일은 그 자신의 것이었다. 그는 흐르고 흘러 원하던 기사가 되었노라고 잡히지 않는 이를 끝내 위로하듯 곱씹게 되었다. 비가 개인 어느 맑은 날엔 그 사람을 떠올리는 것이 괴롭지 않다가도 차갑게 젖은 옷이 그의 살갗을 따갑게 쓸어댔다.
기사를 죽인 게 와론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꽤 지나버린 뒤였다. 왜 아니라고 설명하지 않은 건지는 끝내 추리로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라 와론의 역할을 이어받고 어느 전투에서 론누를 휘두르던 중 어렴풋한 직감으로 아, 남의 오명을 덮어주는 것마저 와론에겐 명예였겠지. 하고 깨달아질 뿐이다. 그러나 역시 자신이 와론의 정의를 받아들이는 날이 오리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들은 고작 짧은 세계를 함께 했기에 이해할 수 없는 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서였다. 사랑이나 감정이 범람하여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겪어보지 않은 것마저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다.그는 자신이 와론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해온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제는 자신의 사랑은 일방적이었다는 사실에 단념하고 있었다. 그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명예였나. 와론은 알면서도 그에게 화인을 찍었다. 복수의 화인은 아닐지라도, 걷잡을 수 없는 혐오로부터 벗어날 구멍을 마련해준 것도 그였다. 그러나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고립과 고독을 겪으면서 그토록 싫어하던 그의 말이라도 의지하지 않고서는 버티지 못하는 수문을 세워 그를 몰아세웠다. 물이 차오르며 그는 자신이 어디까지 침식되었는지 궁금했다. 완전히 갈라지기까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를.
황제가 기사들에게 기어스를 내려주듯이 너는 내게 수여한 이 투구와 목걸이로 나를 너로 만들었지. 너와 같은 방식으로 사유하도록, 너를 이해하도록, 그리고 기사들에게서 배척 받도록. 새까만 닭은 기사들의 적대자였다. 와론은 그의 손을 빌어 기사들을 사냥하고 기사들의 시선에 깔린 적의는 무슨 설명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 영원히 합의 될 수 없을 지점은 이해가 아닌 동감의 문제라.
와론, 이제는 과거의 너를 벗어나야지. 지긋지긋하게 내리는 이 기억 속의 비를 그만 헤집을 수 있는 어딘가를 찾아봐야겠어. 차가운 칼날이 뼈마디를 녹진하게 만들 때까지 그렇게 앉아있다가 그는 일어섰다. 어쨌거나 와론은 죽은 사람이었다. 눈 앞으로 고만고만한 높이의 건물의 구획이 넓고 각지게 펼쳐져 있고 투구 속 생물의 내장을 끄집어내듯 헤집는 홍수가 그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잃어버린 것은 많았으나 찾을 곳은 없었다. 어느 건물 앞에 멈춰서 창가를 흘끗 올려다 본 닭은 불이 꺼진 집 안에는 사람이 없어보여 이곳을 대신해 불이 켜져 있을 별천지의 한 구석 방을 떠올린다. 이렇게 기상이 나빠서야 중간에 돌아올 리도 없을 테고. 혹 이미 호출을 받았다면 밤새 집은 비어있을 것이다. 그는 그대로 거리를 걸었다.
지, 지직. 어느 기사의 단말마가 소음이 되어 들려온다. 와론은 그들과 저는 뿌리부터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라...
“야, 너….”
“…잘래,”
한순간 어둡던 눈에 파란 불꽃이 튀어 오른 눈이 전투의 한가운데서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사상지평이 꺼지면서 불이 켜지듯 본래의 눈으로 돌아오고 정전기가 일어났던 녹색머리칼의 끝이 가라앉더니 기린은 털썩 쓰러져 버렸다. 피곤과 피로로 무거워진 그를 받쳐잡으며 닭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일순간 그에게서 분명히 보았다. 청색의 눈. 그 눈가에 맺힌 잔상.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그는 같은 색의 눈에 다시 생명의 징후가 돌기를 기다렸었다. 기사들이 무지막지하게 다가와 그를 그사람의 시체로부터 떼어내려 했고 안간힘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시체에 불과하였을지라도 새까만 닭의 죽음은 그들이 확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제 자신을 해칠 거란 사실도, 차갑게 떨어지는 비가 비수와 같이 꽂히는 통증도 상관 없었다. 다만 그의 말에는 아무런 대답이 없고 투구 안으로 비의 소리만 쏟아지는 것은 점점 불쾌해져 참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어린 기사에게 본 징후는 그것에 대해 이미 늦어버린 답신이었다. 물기를 얼룩덜룩하게 덧칠한 투구 안으로 침침한 안광이 생긴다. 마치 모기가 앵앵 댈 때처럼 귓가에서 차마 거슬려 거스를 수 없는 소리였다. 젖은 목걸이가 손에서 미끄러진다.
그는 검은 망토를 감고 어느 집의 난간으로 떨어진다. 난간 안의 창문은 잠겨 있고 테라스의 짧은 난간에 착지했다. 탁한 시선으로 응시한 유리창 너머 실내는 거리에서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기척은 없었다. 어떤 생물보다 조용히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이미 지독한 감정이 그를 잡아 누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내게서 너를 찾으면 내가 너를 찾을 때는 어떻게 하면 되지? 정상과는 정반대로 돌아가는 너라도 결국 그리워지면? 네가 사라지고 난 후에야 결국 네가 내 일부가 아닌 전부였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리면. 그 사람을 마주 볼 수 있었던 시절 세계는 아침을 거스르지 않았다. 그의 이명은 섬뜩해 맘에 들지 않았으나 좋은 날씨의 끝이라며 허탈한 웃음을 내던 투구는 그것과 어울렸다. 날지 못하는 새의 이명을 가졌던 와론은 그것에 비해 지나치게 자유했다. 제멋대로 떠나버렸으나 이런 밤이야 말로 그가 돌아오는 날이 아닌가. 김이 서린 창문 너머에 서있는 누군가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갑옷을 입고 창을 든 채로 처음 그를 보았던 날처럼 찾아와 주겠지. 그가 좋아하는 제철의 날씨를 찾아 와론에게 아무 상처도, 시간이 남긴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던 몽상 안에서 그를 깨워주겠지. 그는 가끔 닭에게 검정 아닌 다른 색이 잔뜩 섞여있는 걸 이해할 수 없었고 아무 미명 없는 밤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결국 와론이 옳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려웠다. 세계의 논리로 와론이 맞고 그가 틀리다는 것을 증명 받는 것이 몹시도 그를 위태롭게 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투구를 벗어버리고 비를 맞고 싶었다. 유리창에 가만히 고여 있는 모습이. 비가 내리는 광경이 아무리 비추어도 와론과 같은 색을 띄지 못하는 눈과 더 이상 젖지 못하는 자신을 홍수 속에 담구고 싶었다. 바람이 맞고 싶어서. 단지 곁에 있는 사람이 그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런 변명을 덧붙이며 결국 제 좋은대로 투구를 벗은 기사는 많은 것에 연연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투구 안으로만 그토록 다정한 미소를 짓는 사람이었다. 창문 속에서 갈색 머리의 단출한 얼굴이 보였다. 비 틈새에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흐린 안개 같던 얼굴에 미소가 나타나고 가슴을 문고리가 달린 창문처럼 젖히고 피부와 늑골을 간단히 뚫고 내려앉았다. 그의 심장으로부터 잠들어 있던 것들을 억지로 짜낸다. 옷을 입히고, 무장을 시키고, 무기를 손에 쥐어 들게 만들던 순간들을. 그러나 그는 새까만 닭이 아니었다. 몇 번을 생각해보아도 그가 새까만 닭이고 와론이 그였다면 마지막 순간에 와론에게 그런 식으로 먹칠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부자연스레 짊어진 무장이 주는 고통들이 익숙해진 지금도 눈 감을 수 없는 얘기였다. 그것을 묻어버리고자 기울여온 수많은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 해도. 견뎌내는 건 살아있는 것조차 아니었으므로.
하지만 습기로 축축해지는 오늘 같은 밤조차 사라지지 않는 유령이 네가 아닌 나라면.
새까만 닭이 죽는다면 사인은 분명 익사였다. 그는 비와 함께 태어났고 빗속에서 사산된 인간이었으므로. 기사들의 존재야말로 세계에는 멸망이나 다름 없었다. 마치 더이상 생명이 살 수 없는 물처럼, 식물이 숨 쉬지 못하는 밤처럼 멸망해가는 곳에 나타나는 말기이자 이변이었다. 차라리 장대비가 이곳을 전부 집어삼켜 사람도 도시도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면 했다. 집안의 천장이 그의 안으로 무너져 들어와 속을 산산조각 내기를 바랐다. 좋아하는 모든 것과 작별하던 새까만 닭의 웃음을 끝으로 머릿속은 정적이 감돌고 영영 웃음소리를 내는 법을 잊은 입이 뻣뻣해지고 말았다.
‘하하ㅡ 날씨 한번 멋지네. 안 그래?’
다치고서도 비를 맞고서도 웃던 그의 메아리만 지독하게 투구 속을 헤집고 있었다.
2.
누군가 창가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창문 앞으로 다가간 기린이 서둘러 잠긴 문을 푸는 동안 창 너머로 흐릿한 윤곽이 스스로를 반사하고 있었다. 창문을 열자 빗줄기가 나무널판 위로 들이친다. 하늘에 지진이 일어나듯이 이따금 내려친 번개에 집 안이 드문드문 밝아진다. 옷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 쓴 녹색 머리의 청년은 가늠할 수 없는 눈길로 바깥에 서있는 이를 보았다. 혼란에 찬 두 눈이 황금에 가까운 색으로 풀린 채로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나온 그는 새까만 닭을 맞닥뜨린 상황에 약간은 당황한 기색을 띄고 있었다. 빗소리가 닿지 않는 조용한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하던 기린은 그럼에도 시끄럽게 들려오는 우레에서 그의 능력, 사상지평을 떠올리며 뒤숭숭한 밤을 보내던 중이었다. 멎었던 비는 몇 시간 전부터 다시 내리기 시작해 빗발은 갈수록 더욱 거세어지고, 그 사이에 어떤 형용할 수 없는 다른 미세함을 감지해 창문가에서나마 밖을 살필 심산이었다. 창가에 거대한 괴물이나 잘못 날아온 쓰레기 봉투 같이 붙어있는 그림자를 보고 기린은 저에게도 인간을 넘어서는 육감이 생기는 과정을 밟고 있는 게 아닌가 했다. 바깥의 소음을 밀어내며 기린이 말했다.
“닭? 무슨 일이야?“
목이 그 순간 그렇게 잠기지 않았다면 닭도 무언가 대답을 했을 것이다. 막상 기린을 마주하고 선 닭은 바깥으로 돌아가지도 섣불리 창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은 채로 서서는 창 밖의 비를 집안으로 들여오고 있었다. 바싹 철갑을 대고 문틀을 잡은 닭이 상체를 기울이자 투구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창 안팎의 경계가 검게 젖기 시작했다.
“담청색 기린, 네 취약기간에 날 써먹겠다고 했나?”
“….”
“그렇다면 나도 네 신세 좀 지지.”
기린이 그제껏 들은 것 중 가장 낮은 목소리가 낯설게 갈라진다. 들여 보내주지 않을 듯이 문간에 서있는 그에게 기사는 다시 한번 묻는다. 안 들여보내줄 건가? 기린은 들어오라는 말과 함께 창문 앞에서 비켜섰다.
“…욕실은 저,”
쿵!
“…쪽이야.”
기린은 제 위로 대책 없이 쏟아져 버린 묵직하고 차가운 무게에 뒷머리를 찧으며 바닥으로 엎어진 채로 중얼거렸다. 조그마한 말맺음이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으나 그보다도 먼저 상황을 파악한다. 간신히 얼굴을 들자 마주보는 것은 천장이 아니라 자신을 똑바로 내려다보는 투구였다. 차가운 손가락이 그의 얼굴께로 천천히 내려앉더니 시선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했다. 기린의 눈빛이 요동쳤다. 길게 내려와 뺨에 닿은 것은 색이 어두웠으나 뒷통수에서 빼어 내려오던 투구깃으로 지나친 거리감을 증명하고 있다. 웅덩이를 들여다 보듯 자신을 응시하는 투구. 귀가 달린 듯 끝의 장식이 뒤로 젖혀진 금속의 모양과 익숙한 검은 실루엣. 새까만 닭의 진짜 모습을 고사하고도 이 사람은 분명 기린이 아는 새까만 닭이었는데 보통의 모습과는 다른 행동을 하고 있었다. 왜인지 닭은 지금 그를 낯선 사람을 보듯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며칠 째 아무리 찾아도 수도에서 감쪽 같이 자취를 감췄던 닭이 무슨 생각으로 지금에서야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이 만나지 않은 기간 다치거나 병이 들었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으나 피 냄새 하나 나지 않았고 기린의 위쪽에서 뚝뚝 떨어져 실내복을 축축히 물들이는 건 빗물이었다.
“…새까만 닭?”
닭은 머뭇대는 기린을 짓누르며 저의 홀딱 젖은 꼴이 이 건조한 기사에겐 우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새까만 닭조차 굽히고 들어가는 대단하신 기사님이라고 소문을 내도 좋아. 그래, 나에 대해선 뭔가 좀 알아냈어? 일러바칠 만한 거리를 찾도록 특별히 협조해줄까. 그러나 자조 섞인 한마디 조차 내지 못하던 닭은 그를 노려본다. 따뜻한 빛을 내는 노란 눈이 푸른색으로 뒤바뀌는 기적이라도 일어나길 바라는 양. 눈 앞의 유약하고 부서질듯한 기사에게서 다른 누군가의 흔적을 찾아 면밀히 살핀다. 확실이 닭이 기대하던 눈은 저런 식으로 깊게 잠기지 않는다. 이윽고 기대는 절망으로 뒤바뀌고 팔이 거두어지자 하루로 따지면 오후에 가까운 그 기사는 불편한 표정으로 엉거주춤히 털고 일어섰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 깨닫고만 닭은 잠시 정적을 흘리다가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가 욕실의 문을 열어젖힌다.
그림자처럼 바닥에 닿은 망토는 마루를 따라 욕실까지 기어가며 길고 음울한 물자국을 남겼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며 제 머리카락에 남아있는 물기를 수건으로 닦는 기린은 발로 수건을 밟아 적당히 흔적을 쓸어내는 청소까지 금새 마친다. 긴 소파에 몸을 구겨 누운 닭의 뒤로 빛 한 점 없던 실내에 탁자 위에 램프가 은은한 빛을 내었다. 맥없는 닭은 걸치고 있던 허세 이상의 무언가가 벗겨져 나간 듯해 잠겨있을 그림자를 필요로 했고, 최소한의 밝기만 남겨둔 채 기린은 불빛을 낮춘다. 그로부터 새어나오는 물 비린내와 생기 없는 흐느낌이 되어버린 빗소리를 관조했다. 철갑을 벗은 손은 투구의 구멍께를 덮고 얹혀져 침묵을 유지했고, 기린은 그것이 익숙하지 않은 데다가 너무나도 고요해 적막은 전투에 비해 닭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여겼다. 바깥에오래 있다 들어와서인지 닭의 얼굴이 열로 미약하게 달아올랐다. 실내로 들어서자 거짓말처럼 이명이 멎고 빗소리는 이제는 잡음에 가까웠으나 의지로 억누르거나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이 시기에 응당히 내리는 호우가 말없이 아무 정당함도 주장하지 않은 채 그저 내림으로서 그 존재 이유를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사정없이 인력에 이끌려 땅으로 내동댕이 쳐지며 웅덩이와 공명하고는 존재한 적 없는 것처럼 하수를 따라 사라진다. 타의로, 타악으로, 타념으로 물들어버린 거리를 비는 가락을 외며 쓸어내갔다. 와론은 그것이 싫었다. 그토록 무언가를 진정으로 증오하게 될 줄은 스스로도 알지 못할 정도였다. 이 도시 안의 모든 것과 어느 기사를 남김 없이 쓸어내겠다는 호우. 그것은 오래된 눈물로 기사를 꺾어 내리는, 아침 없는 성도의 아우성이라.
시야는 무력해 손으로 칠흑을 저은 기린은 툭 무모하게 암흑을 마주한다. 훅 다가온 기린은 옷의 치수가 맞지 않아 드러난 닭의 목에 가볍게 손등을 대었다.
“열이 있는데, 와론. 심하진 않지만.”
그제야 투구가 기린의 쪽으로 향해 미동하며 그를 알아차렸다. 철의 둥근 이마로 옅은 반사광이 맺힌다. 투구를 칼질하던 비는 더이상 닿지 않았으나 마모된 흔적이 눈으로도 설핏 분간된다. 기린은 아득하게 꺼진 구멍을 응시하면서 시선을 맞춰온다. 느닷없이 찾아와 무례하게 사람을 밀쳐 넘어트리고 복도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으나 기린에게 그를 다그칠 마음은 없었다.
“…내내 밖에 있었던 거냐. 무슨 일이야.”
그러나 자는 것은 아닌게 분명한 닭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늦자 그는 잠시 닭이 사실은 이 대화를 원하지 않는 것인가 고민했다. 이대로 와론과 램프만을 두고 가면 그는 잠들지 못할 것이었다. 새까만 닭은 이미 그날 밤 더할 수 없이 지쳐있었으나 그가 무방비할 수록 기린은 닭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못했다. 그는 대가 없는 파수꾼도 아니었는데 기린은 투구 속 갈가리 찢겨 있을 그의 생각에 궁금증을 느끼고 있었다. 닭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항상 종잡기 어려웠고 그런 무지들은 기린에게 낯설지 않은 것이었으므로 기린은 거의 언제나 미미한 징조들을 무시해왔다. 눈은 영혼의 창이자 마음의 매개체라던가. 닭의 시선의 시작점은 항상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어 기린은 결국 진실이란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둘 사이에서 모르는 척이 암묵적인 규칙이었고, 흥밋거리로 건들다가는 그들 사이를 덧나게 하기 마련이었다. 같이 한 세월의 말없는 진의는 그의 부재보다는 훨씬 낫다는 것이다. 들리는 게 있었으나 그 중 무엇도 와론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으니 무의미했고 죽은 자는 잠잠했기에 실제로 기사사냥을 겪은 이들의 경험담 같은 건 더더욱 없다. 다만 기린의 눈으로도 다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와론은 증거를 남기지 않는 철저한 기사였고 달리 친한 이들도 없었으며 몇 년을 붙어 다니는 그에게도 아무런 말도 없는 걸로 보아 아마도 와론은 혼자였다. 기린은 그 사실이 안타깝지는 않았다. 기사들은 대개 여유가 없었고 새까만 닭은 그나마 개중에선 유머감각을 지닌 편이었으나 그도 사람에게 무언가를 내어줄 정도로까지 여유가 많지는 않은게 당연했다. 그들은 무언가를 지키느라 필사적인 나머지 서로에겐 소홀한 집단이었다.
“내가 뭘 해주면 되는 거지?”
“뭐가,”
그제야 와론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보완해달라며.”
“그냥 이 빗소리가 조금, 잠잠해졌으면 좋겠군.“
잠시 생각하던 그가 대답했다.
“이 꼴로는 어디 쳐들어가는 것도 우습지 뭔가.”
닭의 목소리에는 티날 정도의 자조가 어려 의문과 긴장, 약간의 호기심마저 기린의 태도에서 드러났다. 기린에게 이것이 거래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런 밤에도 닭에게 적절한 말을 골라줄 수 없다는 건 유감스럽기까지 했다. 그는 어두운 형체를 흘기며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이런 날씨엔 아무 이유 없이 찾아와도 돼. 비를 맞고 있는 줄 알았다면 너를 찾았을 거야.”
“익숙한가봐. 사람을…격려하는 일. 네가 네 동료들에게도 이런 식으로 하는 걸 몇 번 본 적 있어.”
무미건조한 말투에서 타성적인 기색을 읽은 기린은 골치 아픈 표정을 지으며 부정한다.
“그런 거 아니야, …네 성격에 누굴 이 시간에 찾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뿐이야.”
“….”
나지막히 정적을 머금던 닭이 작게 대꾸했다.
“…넌 싸우는 게 싫다고 했으니까.”
그와 약속을 했던가. 그래, 그와 자신의 내기가 끝날 때까지 더 이상 기사를 사냥하지 않겠다고…. 그건 명예를 건 약속이 아니었다. 각자의 능력을 필요로 했을 뿐이다. 느린 오후의 햇살이 들던 뒷모습. 와론은 그가 그 손으로 무엇이고 해치는 것을 두 눈으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미래를 위해서라면 명예도 중요하지 않다던가, 그런 말도 했었다. 그것과 어느 누구도 해치지 않는 기린의 행동이 어느 관계가 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사슬처럼 연결된 그 모든 행동들은 이미 집어던진지 오래인 기린 개인의 명예와는 관련되지 않았다는 걸 닭은 어렴풋이 깨달았다. 새까만 닭의 감은 그것이 그의 기어스라고 여기고 있었으나 적잖이 놀란 건 사실이었다. 적어도 그는 대놓고 물을 정도로 맹약의 무게에 대해 무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린은 마치 기어스가 자신의 선택인양 직접 손에 피를 묻히기는 커녕 자신의 실수로 간접적인 목숨들이 사라질까봐 걱정했고 손에 닿지 않는 목숨들을 구명하려 발버둥쳤다. 그 역시 다른 기사들과 다를 바 없으리라 당연스레 마음을 접었던 닭은 뒷통수를 제대로 맞은 셈이었다. 재차 고민해도 전혀 다른 두 기사 사이에 흐릿하게라도 비슷한 점이 있을리가 없었다. 단단한 눈. 그건 너 역시 자기와 다르지 않은게 아니냐고 와론에게 묻고 있었다. 투구를 벗어내리고 뒤를 돌던 기사의 눈빛을 색이 다른 필름처럼 겹치던 와론은 정신이 아득해진다. 손에 쥐여있던 목걸이가 가슴팍으로 떨어졌다. 공중에서 검고 얇은 손목이 그에게 붙잡혔다. 갑작스럽지는 않았으나 도망가지 못하게 힘이 서리는 감각에 닭의 목 언저리에 놓여있던 기린의 손이 떨어졌다.
식어가는 램프가 창백하게 빛을 발한다. 늘 박제모형의 털처럼 뻣뻣하던 머리는 모자가 젖혀져 드러나고 덜 마른 습기에 축 처져 있었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나치게 많은 단서를 주는 닭을 훑어내리는 기린의 동공이 작아졌다.
“일이 이렇게 된 건 전부 네 탓이다, 기린. 사냥을 그만두라고 약속 시킨 건 너였어.”
“…최근에 눈에 띄는 기사는 별로 보지 못한 것 같은데. 거슬리는 녀석이 있는 건가?”
“명예롭지 못한 짓을 한 놈들은 한 둘이 아니지.”
“참는 게 잘 안 되어가나?”
“노력하고 있어. 하지만 그냥 전부 때려칠까 싶은 날도 있고.”
두 손으로 인내심을 꾹꾹 눌러 담아온 닭은 원망과 실의 어느 사이에 있었다. 드물게도 기린은 오늘 그 고의적인 무지를 깨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부주의한 닭을 그냥 넘길 정도로 성격이 좋지 못해서인지도 몰랐다. 기사는 닭의 명예를 대신할 만큼의 정의를 찾아나가고 있었으나 쉬지 않고 사냥을 해오던 새까만 닭이 기린을 재촉하는게 성급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때아닌 폭우가 온 성채를 다물게 만드는 이런 밤일수록 별 거 아닌 소음이 지저분하게 그의 신경을 거슬러 주었기 때문이다. 힘이 들어가 바싹 솟은 어깨와 둥글게 굽은 등이 소파를 짓누르고 있었다. 최근에 닭과 자꾸 부딪히는 그 기사는 기사회의에는 얼굴을 비추지 않았고 진짜 와론은 아직 그의 안에서 기사 사냥은 멈출 때가 아니라며 부추김을 더했다. 저들끼리 소리를 높이는 기사들의 무리는 트라우마를 신경질적으로 긁어내리고 있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주의를 돌리며 저도 모르게 다음으로 그 기사를 몰아세울 계획을 꾀하다가 방해를 받았다. 옆에 있는 기사가 그에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탓에 조그만 움직임에도 완갑을 툭툭 치며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호흡이 짙게 섞인 음성이 절박하게 기린의 귀에 달라붙었다. 기린은 어째서인지 그를 강하게 움켜진 손에서 뭇마을에서 기사들에게 도움을 청하던 아이들을 떠올렸다. 보호자 없이 남겨진 십대의 아이들.
“제정신이 아니야, 기사들은. ‘기사’라고 하는 그 가면 한꺼풀만 벗겨내면 너희 중 태반은 힘에 취한 무력집단일 뿐이라고. 자기들끼리 분열하고, 대의의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하고 칭송해. 대륙 전체가 기사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황제는 기어스를 하사하고는 기사에게 모든 걸 맡겨버리고 정세에는 아무 관심도 없어….
의회는 그들을 두려워하지만 쿠데타가 두려워 대놓고 찍어 누르지도 못하고, 서민들은 기사가 되려는 이유로 고통 받지. 악마 기사 같은 케케묵은 이야기로 서로를 단죄하고 그걸 정의라 이름 붙여.
나라고 모든 기사를 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 오히려 미움을 받으면 몰라. 하지만 두고 보려고 해도 수도에 계속 머무르는 이상은.“
와론은 대상을 특정하는 어리석은 말은 하지 않았고 기린은 어렴풋하게 닭의 사정을 짐작해낸다. 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집안은 적막 속에 음산해져가 비정상스럽게 심야가 길어진 듯 했다. 그건 오늘의 해질녘이 구름에 묻혀버렸고 이른 시간에 저녁이 찾아온 탓이라고 생각하며 기린은 생각을 돌렸다.
“딱히 모든 기사들이 널 싫어하는 것도 아니야.”
그는 나지막히 운을 떼고 말했다.
“그래도 난 네 덕에 사상지평도 벌써 4년이나 모았어.”
기린은 한번도 그에게 고마움을 표한 적이 없었고 그럴 필요도 존재하지 않았다. 닭은 그에게 이것저것 묻거나 따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럴 만한 여지를 주지 않았던 건 그의 쪽이었다. 마치 기린을 피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그저 기사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새까만 닭이고 싶어하는 것과 같았다. 어느 순간 기사명을 비롯한 그의 모든 명성을 그저 지키는 것만으로도 버거움을 느끼는 듯했다. 기사사냥꾼이 사냥을 재개하고 싶다는 건 아직까지는 본심이 아니었고,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을 찾아온 것이라는 게 기린의 생각이었다.
“닭, 너는 훈련소 출신이 아니지. 견습들은 대부분의 십대시절을 기사는 항상 명예롭게 싸워야 한다는 교육을 받으며 자라. 그곳은 단순히 전투기술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었어. 평생을 배워왔던 기사가 되지 않는 미래나 다른 가정이란 없었어. 싸움은 명예로운 일이라는 것 외엔.
보통은 열 넷에서 열다섯 정도. 더 어린 이들도 있어. 자기가 버티기 나름이고 재능과 타고남의 영역이지, 난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병사처럼 명령을 따르도록 훈련 받았다던가 그런 얘기는 아니야. 각자 준비해가는 기사론이란 수업도 있었고…. 하지만 힘을 쓰는 건 대부분 기사가 되는 자질을 부여받은 이들에겐, 숨쉬는 듯한 일이야.“
그는 눈을 감았다. 힘을 휘두를 때마다 두려움이 엿보이는 눈이었고 어느샌가 사라져있던 두려움은 닭에게로 전이되어 있었다. 그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기사란 마치 저를 죽이는 면역 체계처럼 저를 품어주고 사랑해준 대륙마저도 배척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감정이란 확실히 거추장스러운 종류였다. 기사는 정의를 박해하는 이를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자신의 이상을 지켜내기 위해 열변을 토하며 정의라는 허울과 대의를 향한 명분 밖에는 몰랐다. 힘을 취했다고 생각하는 기사들은 결국 스스로를, 잃게 되었는데 죽음으로 맞부딪힌 결과는 죽음 뿐이었고 그 현실을 훌륭한 것으로 왜곡해냈다.
“민간인을 마주할 일도 없고 친족과는 점점 멀어지고 애초에 그런 게 없는 자들도 많아. 어쩌면 민간인의 상식으로 보면 기사가 두려운 건 당연한지도. 이해할 수 없어도, 나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우리가 시스템이 되어있는 자체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르니까. 네 말대로면 우리는 이미 고장난 셈이군. 그게 딱히 기사의 탓인가.”
“돌이켜보려는 건 정신 나간 놈 뿐이야.”
“그런 기사가 있다면 나도 한 번쯤 만나고 싶은걸.”
와론은 그가 새까만 닭을 닮지 않은 것에 지독히도 안심했다. 그 사람을 닮은 흔적은 이제 제 목에 걸려있는 그것이 세상에 남은 전부라는 사실에. 한편으로는 아쉬움에 그 자신의 마음의 갈피를 정하지 못한다. 닭이 나약해진 틈을 타 그동안 숨긴 궁금증을 드러내는 그의 행동은 괘씸했으나 드물게도 화가 나지는 않았다. 기린이었기 망정이라는 감상은 필요 이상으로 와론에게 다가온 그에 대한 동의의 표식이던지, 동감의 표식이던지. 무엇이었던 간에. 그리고 기린은 후회하지 않을 기사였고 와론은 적어도 그가 현실을 더럽히는 이상은 내세우지 않는 다고 믿었다.
“명예, 라….”
지우스의 얼굴에는 일순간 가벼운 웃음의 기미가 서리고 닭은 의아서린 반문을 한다. 뭐가 우습냐는 듯한, 기린은 잠시 그가 자신을 사냥하러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금새 떨쳐냈다. 기린은 어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듯 손으로 투구를 건드린다.
“아니, 네가 의외로 기사다운 얘기를 하는 게 안 어울려서….”
노란 눈이 부드럽게 감겼다. 그는 기사라는 족속들을 잘 알았다. 그들은 평화로운 일상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 원한 적이 없기에 이해하지 못한다. 겪은 적이 없기에 가정하지 않는다. 그의 앞에서 좁은 소파에 몸을 뉘이고 호흡 하나 깊이 내쉬지 못하는 새까만 닭도 결코 휴식하지 않는 기사였다. 닭이 중얼댔다.
“기사가 아니었다면 너나 나나 평범한 삶을 살지는 못했을 것 같군.”
“넌 기사 아니었어도 조용히 지내진 않았을 것 같은데. 투구도 쓰지 않았을 테고. 그래도 넌 나를 찾아왔을까 싶기는 해.”
“…그런 생각도 하나?”
“가끔.”
“힘도 사상지평도 없는 녀석을 뭐하러 쫓아다녔겠어. 너도 나 만나서 고생 안하고 좋잖아.”
“그래도 난 너를 만나지 못하는 편이 심심했을 것 같군.”
투구에 습기가 차 숨마저 가쁜 채로 마치 방생된지 얼마 되지 않은 동물들이 으레 방충망을 찢고 창을 부수듯이 그의 집으로 기어들어온 닭에게선 결코 볼 거라 기대하지 않았던 무언가가 보였다. 그건 마치 와론, 새까만 닭 조차도 인간인 이상 투구의 숨구멍만큼의 틈을 내야 하는 것과 같다. 길이가 모자란 목티를 입은 그의 턱 밑으로 보이는 살갗처럼. 비에는 누구나 녹아내릴 수 있다고. 빗물이 아니어도, 눈물이 아니어도 투구는 쇳물이 되어 안쪽부터 어딘가가 녹아내린다고. 그토록 단단한 사람도 무표정한 얼굴로 허물어져 내릴 수도 있었다. 그 녹은 틈새로 보이는 게 의외로 인간적이고, 자주 다치고 생활을 걸어야 하는 기사들의 것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라는 것에 모순을 느꼈다. 기사가 되기 위해 와론이라는 인간이 어디까지 망가져 있었는지 그도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기린은 차라리 그날 밤 별천지의 기사들이 자신을 호출하는 걸 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수재해를 대비하는 데에는 그처럼 지켜줘야 할 기사들보다 괜찮은 기사들이 수도에 많다는 사실도, 닭이 그들 가운데 빠져있다는 사실도. 그의 집이 아무리 많은 비가 내리더라도 침수되지 않으며 물이 샐 염려도 적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기린은 건너지 못하는 강의 유역처럼 닭에게 거리를 두고 서있다가 방으로 들어가 제가 덮던 모포를 가져와 덮어주었다.거실은 잠잠했고 울이 조금 풀려 여러 갈래로 갈라진 깃의 끝이 뚝뚝 마룻바닥에 웅덩이를 만든다. 창문 너머에서 그를 응시해오던 그건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의 눈이었다고. 기린은 문득 그에게 닿았던 손등에 미지근한 물기가 남은 것을 알아채곤 얼굴로 가져가 닦아냈다. 고여버린 물. 흘러가지 못하는 감정. 무표정이 섞여든 빗물치고는 온도가 미온했다. 늘 둘 사이에 대해 기린이 생각하기론 론누는 무거웠고 사상지평은 가벼울 지도 몰랐다. 기린은 새까만 닭이 쓰러지는 것은 바라지 않았고,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망가지지 않기를 바랐으며, 그것도 어렵다면 적어도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하물며 그런 그들의 취약성 조차도 시스템의 일부라면 그들은 끝내 망가져야 할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끌어올려 구원으로 이끌어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죽여서라도 긴 밤을 나아가는 그들이….
어쨌거나 그도 와론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기린은 제 방으로 가서 누웠다. 거실은 닭을 위한 자리로 남겨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달칵 열리며 안쪽으로 밀렸다.
“자나?”
기린은 몸을 반쯤 일으켰다. 기다랗고 훤칠한 인영이 문가에 팔짱을 낀 채 기대있었다. 투구가 마치 음식의 토핑처럼 얹혀져 있었다.
“내가 어디까지 널 믿어도 되지. 담청색 기린?”
“…널 걱정해. 닭. 하지만… 뭘 들어보지도 않고 믿어줄 수는...”
“어련하시겠어. 기린. 고명하신 기사님.”
그즈음 기린의 목소리는 졸음에 잠겨 멍했고 닭 자신은 어쩌면 그 어련함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도 몰랐다. 그는 비를 맞으면 묽어져 버렸어도 사실은 무엇보다도 올곧은 기사들 특유의 눈을 꽤 좋아했다. 굽은 등을 펴고 흉터투성이의 손을 방 안으로 축 늘어트려 그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녹색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사락 감고 싶었다. 빠르게 지면에 닿는 비에 비해 느린 밤. 멎지 못하는 비와 같이 드물게 이어지는 순간들은 밤을 계속 제 곁에 붙들어 두고 싶어 했다. 그도 한번쯤은 자신에게 다정한 미소를 보이고 싶었던 걸까? 한번쯤은 속내를 터놓고 싶었던 적이 있었던게 아니었을까? 속삭임이 되어 가라앉는 빗소리를 멎게 해줄, 그런 기사가 있거나 혹은 있었다면, 그를 만나고 싶다는 말에 그 또한. 이라 답한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코의 끄트머리에서 뭉개지는 빗방울은 짙은 비구름으로 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었다. 흰 얼굴과 밝은 머리칼을 드러내고 비를 맞던 와론은 그것만으로도 그의 안에 고여있던 흐르지 못하던 감정들이 전부 씻겨나갈 것 같았다. 젖는 것을 막을 도리도 없었으며 그럴 생각마저 없었던 닭은 투구를 벗어들었다. 투구는 애초부터 우산이 아니었으므로. 비는 더이상 그를 적시지도 못했으나 귀를 드러내고 젖힌 이마 너머로 쏟아진 머리카락에 위로 떨어지는 따가운 빗줄기가 뜨겁게 회전하는 열을 식히는 걸 도와주었다. 품 안에 투구를 들어올린 모양새가 장례식에서나 으레 보는 우중충한 모습으로 서있던 와론은 결코 기분이 좋지 못했던 것이다.
떨어지는 비가 전부 스며들도록 그 자리에서 천천히 기다리던 닭의 뒤로 다가오는 인기척은 다소 뻔뻔하고도 그가 예측할 수 있는 종류의 발소리였다. 전투의 틈새로 빠져나간 닭을 따라온 기린이 양 발에 무게를 번갈아 싣지 못해 비틀거리는 걸음 뒤로 핏자국이 희미하게 흔적을 드러내고 있다. 그가 사상지평을 쓴 걸 알고 와론은 수도 인근의 숲으로 홀로 숨어 들었다. 발자국이건 진흙의 흔적이건 추적은 쉽지 않았을 텐데. 고집스럽게 따라왔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입매가 구겨졌다. 얼굴을 감싸던 안개 같은 머리칼의 끝이 갈라져 두 눈이 모습을 드러낸다. 풀 숲을 밟고 다가오는 부츠가 열 걸음을 채우기 전 그를 멈춰 세우는 신호가 울렸다.
“꺼져.”
허리를 옥죄는 흰 천이 답답했던 건 부상의 탓이라기 보단 폐 속에 희박한 산소의 탓이다. 와론은 산소 대신 물로 폐를 채우는 듯한 기분이었다. 무어라 물어봐도 자신의 속이 불투명하고 보이지 않았다. 실가닥 같은 빗줄기로 가득한 공기는 끝도 없이 지직거리며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와론은 제 손에 보이지 않는 칼자루 하나가 쥐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전쟁터도 아니고 천재지변도 아니었지만 그건 일종의 절망이었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기사들의 논리를 해독하기를 끝내 포기한, 어느 기사의 절망이라고.
“왜 따라왔냐.”
닭이 사라진 흔적이 남아 있는 숲이었음에도 기린은 눈 앞의 낯선이가 누구인가 생각하다가 본능적으로 와론이란 걸 깨닫고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 순간 기린은 가끔 제 것도 흰사슴의 것도 아닌 새치 가닥들이 간혹 숙소나 막사 내를 굴러다니던 전말을 알아챘다. 투구에 우겨넣기에는 반쯤 젖어든 그것의 기장이 생각보다 길었고 그 주인인 와론은 고개를 위로 젖혀 한층 더 그렇게 보였으며 무엇보다 기린은 평생 자신이 그런 광경을 목도할 거라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모든 반응이 평소보다 느리게 일어났다. 어쩌면 기린의 내심 어느 바닥에선 대강의 색깔이나 인상 정도는 유추해왔다는 걸 그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예상이 있었기에 현실 속 닭의 모습은 의외였고 침침한 색이란게 그가 느낀 감상이었다. 쑤셔오는 옆구리를 소매로 지혈하고 압박하는 기린의 얼굴에 한층 그늘이 더했다. 비틀거리며 옆의 나무에 몸을 기댄 기린은 나무 둥치에 자신을 숨기듯이 서서 앞을 바라봤다. 실빗줄기와 같은 가는 그 머리칼은 지금 하늘의 물빛과 퍽 어우러졌고 그 모든 일련의 인식들이 띄는 갑작스러움과 의외성이 기린의 대답이 없었던 이유였다. 걷히지 않는 그림자 같은 빗줄기들이 둘 사이의 짧은 정적을 메꾸었다.
“너, 다음번에는 약속을 지키는 거냐?”
“….”
“죽는 게 혹시 네 소원인가?”
너도, 라는 말이 따라붙으려는 걸 와론은 삼키고 있었다.
“…와론.”
닭이겠지. 대답이나 해.
그런 태도에 열을 받아온 그는 체념한듯 낮은 소리로 대꾸한다.
“그래, 너희 기사들에게 자기 목숨은 늘 그렇게 뒷전인데다가 걸레짝이지. 하나 같이 이기적인 놈들.”
기린은 왜인지 그게 자신이나 일반적인 기사를 두고 닭이 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개의 기사들은 무언가 가치를 위한 헌신을 하곤 했다.
“….”
“내 앞에서 죽겠다느니 그딴 소리 하지마. 그 손목에 사슬을 채워서라도 론누에 주렁주렁 달고 다닐 거니까.”
“그러니까 만약 다음 사상지평도,”
“됐으니까. 그딴 소리 입에 담지 마.”
간신히 말머리를 꺼낸 기린의 발언은 흙이 허물어지듯 막혀버렸다.
“…그럼 약속도 하지 말란 거냐? 새까만 닭.”
비가 쉬지 않고 내려 물이 그를 가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홀로 빗속에 갇힌 와론이 내뿜는 살기와 분노가 그 주변의 비구름을 더 성나게 해 숲 전체가 비에 가라앉고 있었다. 밀도 높은 빗줄기가 피로가 누적된 기린의 몸을 까마득하게 만들었다. 치명상을 빗겨갔으나 찢어진 옆구리에선 비가 멎지 않았다. 호흡이 거칠어지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우천에도 피냄새가 번졌는지 닭은 고개를 갸웃대는가 싶더니 말했다.
“어차피 네 자신조차 지키지 못하는 힘. 이런 식으로 소진할 거면 내가 힘들여 모아줄 필요도 없었군.”
약속과 맹세. 결국은 계약으로 수렴하는 조건들로 기린은 둘 사이의 앙금이 합의되었다고 여겼으나 닭에게 오늘 있었던 전투는 그것으로 해결될 수 없는 사건인듯했다. 기린은 흰색에 가깝게 부서지는 머리칼을 보며 그게 닭과 지극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고향 마을에 무덤가를 지키는 수호상이 저런 모양으로 서있었고, 그가 보기에 회색의 돌이 비가 오면 검은 색으로 물드는 광경은 썩어들어가는 것처럼 고독했다. 비가 오는 날엔 묘지를 찾는 이가 적어 그 안에 어떤 수호신이 깃들어 있다면 그 역시 분명 고독했을 것이다. 기사는 사람들에게 친절히 굴지 못했고 건넛편 자기만의 고유한 지대에 머물러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투구의 속을 들여다 보고, 새까만 닭에 대해 지금보다 더 많은 방식으로 알고 가까워지는 날이 오지 않아도 기린은 상관없었다. 이보다 더 먼 거리에서도 닭은 그를 지켜왔고 그는 닭을 달래고 제어했으니까. 침묵이 무거워질 수록 무거운 생각들은 점점 커져 아래로 탁 터져버리곤 하는 물풍선과 같이 부풀어 올라 그는 닭이 물이 고여가는 투구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칠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자신의 앞에서 껍질을 까듯이 격해진 감정들을 터트릴지도 모른다고. 이제는 보지 않아도 그의 잿빛 속눈썹에 빗방울이 맺히는 광경을 그려낼 수 있었다. 그리고 한번에 얼굴에 묻은 빗물과 함께 튀어오를 것이다. 그동안 쌓였던 감정들이.
“…떠날 건가?”
“곧 복귀하지.”
그러니 지금은 내버려둬,
그러나 닭은 조용히 고개를 내렸다. 검은 케이프 위로 옷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 썼고 이내 기린이 그 자리에 있는 것조차 잊은 듯했다. 아무리 맑은 날에도 마르지 않는 투구의 속은 늘 빗소리로 젖어있었다. 귀가 빠질 듯한 소음은 현재의 것이 아니고, 와론에게는 기억으로부터 바닥을 퉁퉁 깨부수고 두드리며 올라오는 둔탁한 가락이었다. 사상지평을 소진하고 하루가 지난 기린에게는 비를 멎게 할 힘이 있었다. 그러나 와론은 이곳이 아닌 과거 어딘가에 서서 비를 맞고 있었다. 그래도 역시 투구를 쓰는 편이 좋았다. 표정도 없이 아무런 말도, 설명도 하지 않는 닭에게는 그 역시 가끔 지긋지긋하던지 머리가 지끈대던지 했으나 투구는 닭과 잘 어우러졌고, 담천 아래 무방비하게 어떠한 보호구도 없이 비를 맞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숲에 다른 이들이 오기 전에 얼굴을 가리는 것이 좋겠다고, 할 수 있는 충고는 그것이 전부였다.
작업곡이자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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