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기사의 노래(下-1)

기린닭

전편:

오래된 기사의 노래(下-1)

기세 좋게 별천지를 박차고 나와 흔적을 추적하는 일은 기존의 기억들로 인해 발이 묶여 있었다. 자유분방하게 발 닿는 대로 가는 기사들의 수행과는 달리, 그와 닭이 다니던 수도에서 뻗어나가는 길목들은 지도 위에 잉크 없이 새겨져 추적은 쉽지 않았다. 닭이 남긴 좌표는 또 그와 같이 가본 적 없는 장소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우스는 달잔이 일컬은 애정이라는 지칭에 스스로에게 코웃음을 쳤다. 애정을 논하기에 이전 그가 취해온 행동은 대다수가 두려움에 기반했다. 신입기사 시절 다른 기사들은 자유롭게 임무를 수행하고 밖을 다니며 그간 쌓아온 기량을 발휘하고 싸우고 더러는 죽음을 맞이하였고 기린은 별천지에서 근속하며 임무를 구상하고 자원을 나누는 일부터 시작했다. 기사,라는 위치에서 멈춰서지 않고 이상을 맞부딪히며 그가 내내 품으며 생각했던 일을 현실에 내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기사 지망생에 불과한 견습기사들과 함께 하는 대형 작전의 총괄을 맡은 기점으로 죽음은, 다만 잃어야 한다는 건 기사에게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지우스에겐 자신이 구하지 못한 사람, 혹은 마을, 혹은 기사들을 회상할 때 와론의 이름도 늘 빼놓지 못한다. 존재만큼이나 미스테리한 죽음을 맞이한 기사, 새까만 닭은 마지막까지 고독한 기사였으나 그의 죽음은 지우스에게는 어떠한 원인의 결과로 자꾸만 와닿곤 했다.

담청색 기린은 별천지에 남들보다 그래, 그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다 자부한다. 갓 기사가 되었을 적 그를 기사로서 존재하게 한 그곳은 필요논리 이상의 장소다. 그 안에서는 힘과 파괴가 얼마나 강력한 것들인지를 자주 잊고 지내기도 했다. 그것이 그와 새까만 닭의 다른 점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유라는 말이 살갗을 문지르는 날 것의 세상은 생각보다 혼돈으로 이루어져 있다. 관습과 혈연과 지위에 얽매이는 오래된 왕국들, 그러나 수도 보다 낮은 밀도의 탓인지 공기는 서늘하고 언제나 황야로부터 도시를 향해 새로 불어온다. 생각 외의 여유를 누리게 돼도 애초에 자유란 격기사들의 본연의 영역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대륙이 넓고 새롭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가 그리는 이상은 전열의 최후방의 책상 위에 있었지만 한 편으로는 이 넓은 곳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두 기사는 다른 곳에서 서로 비슷한 광경을 보았던 것이다. 금안과 같은 빛깔의 바냐에일의 기포를 통해 녹아가던 세상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누구도 살지 않는 부농의 기울어진 저택 처마 아래에 여전히 섬세한 문양을 간직한 벽돌들을 알아보았다. 추수를 앞두고 며칠 뒤면 모조리 사라질 밀밭의 들녘에서 저녁 하늘이 울었다. 어째서 잃고 있는데도 생명은 이다지 아름다운 건지.

그리하여 파노라마 같이 이어진 모든 광경에 한 켠에는 항상 그가 서있는 그림자를 본다. 사실 가장 우선해서 찾아야 하는 투구가 여기 있으니 그가 찾아야 하는 모습의 실체는 무엇인지 몰랐으나, 만약 본다면 그를 어떻게든 알아보지 않을까. 지우스는 누구나에게 각자의 굴레가 있어서, 심지어 새까만 닭도 그 형태는 피해 달아날 수 없었다 믿기로 한다. 살아서 만난다면 그가 자신을 모른 체 하지는 않는다고 믿고 있는 것처럼.

그는 주머니에 손을 빼내어 웅크렸던 손을 펴보았다. 그 안에 마치 그가 구하는 수많은 의문들의 해답이라도 써있는 양, 혹은 그가 구해내지 못한 수 없는 후회들이 적혀있는 양…

시기가 뉘엿하게 저물어버린 지금까지도 닭을 찾는 일이야 말로 그가 기사가 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는 건 일종의 확신이다. 안을 향해 도망치던 그는 수도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하지 못한 모든 일들을 실현 시키던 사람. 지우스는 자신이 새까만 닭,

그 사람을 찾아야 함을 알았다.

달잔이 한숨이라기에는 꽤 많은 양의 숨을 한꺼번에 뱉자 지우스는 문득 그가 신입시절ㅡ그리고 기사시험을 치를 때에 잠깐 동안ㅡ부터 눈에 익게 봐온 기사가 이렇게 피로를 드러내는 사람이던가 고민한다. 뭐랄까, 그 시절의 그는 확실히 더 염세적인 사람이었다. 그마저도 달잔의 오랜 경력에 비하면 단면에 불과할 터였다. 달잔이 입을 열어 그들의 대치를 끝냈기 때문에 상념도 거기서 끊어진다.

“내가 뭐라고 말할지는 알겠지.”

“그와 약속을 했습니다. 어차피 여기 있는다고 해도 그를 찾아내기 전까진 아무 소용도 없겠죠.”

“죽었을 가능성이 높지 않나, 아니. 확실히 죽었네. 자네 입으로 말한 게 아니었나?”

달잔은 두통이 일어나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두번째 한숨을 쉰다.

“그랬다면 흔적을 찾을 가능성도 높죠. 찾는 대로 돌아오겠습니다.”

“자네가 이곳이 싫어서 떠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군. 그대로 도망이라도 가려는 건가?”

“과한 추측입니다. 그저 확인하고 싶을 뿐입니다. 저는.”

자기 명예에 어긋난다며 땡깡을 부릴 수도 있는 셈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지우스가 기사 본인의 명예를 내세운다면, 딱히 그를 말릴 수 없다는 얘기도 된다. 그것에 관련된 임무는 그들에게 무엇보다 우선하였다. 명예는 황제의 명령에도 견줄 수 없는 것이다.

“대외적인 명목으로는 ㅡ

ㅡ 라고 해두죠.”

최악의 기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히 발걸음이 산뜻해질 정도로 청명한 날이었다.

약기운에 숙취가 겹쳐 그들은 같은 숙소에서 하루를 더 지냈다. 와론이 어둠을 선호하는 탓에 해질녘을 기해 출발하기로 했다. 기사들에게, 특히 와론과 함께 있을 때 야간에 움직이는 데에 어려움은 없다. 그동안은 굳이 밤에 이동하는 부담을 질 필요가 없었으나 새까만 닭을 찾은 이상 휴식을 취하지 않는 일정쯤은 일과에 속했다. 와론은 마치 사람의 행세를 하러 마을로 내려온 호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눈가를 간신히 드러낸 터번을 목 아래의 어깨를 덮을 정도로 돌려 감고 편안한 무복 위로 후드가 달린 흰 망토를 걸쳤다. 숙소의 값을 치르고 작은 기사와 그보다 한뼘은 더 키 큰 여행자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마을을 벗어나 길로 접어든다.

하루종일 유성이 미끄러간 낮하늘의 자리 위로 수레 바퀴 자국 같은 은하수가 흘렀다. 고양이 수염같이 헤엄치는 들풀 줄기를 온몸으로 헤치고 나아가며 머리 위로는 천연 조명을 따라서 어두운 평원 위를 이동했다. 와론이나 론누의 시력도 필요하지 않는 기상이다. 놀라서 풀숲에서 뛰어나가는 여치나 풀무치의 소리들로 무릎 아래가 시끌시끌 하고 산을 타고 넘어온 시원한 서풍이 녹색머리와 터번에 가려진 이마 땀을 식힌다.

산 위로는 평원과 다른 세상 같은 물안개가 서려 지척에 습한 기운이 돌았다. 동행의 그림자 윤곽 정도만 간신히 분간할 정도로 사방으로 숲이 어둡다. 긴 팔 끝으로 이어진 창이 살짝 표시난 길의 초입을 막는 풀숲을 헤치자 푸른 불빛들이 마치 마력처럼 일제히 떠오른다. 바람이 쓸어가는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떠다니는 미세한 불빛들에 푸른 점박의 빛으로 시야가 물든다. 아름답군. 지우스는 표정을 갈무리하고서 속으로만 중얼댄다. 동행이 그의 말을 듣고서 감상이라도 빠졌다는 인상을 주는 건 곤란했으므로. 망토 군데 군데 내려앉은 불빛을 털어내는 와론이 몸을 숙이고 청각이 기민해진 그의 귓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묻는다.

“마력인가?”

“아니야, 푸른 나방이다. 날개에서 날리는 분진이 푸른 야광을 띄는 거지.”

낮게 울려대던 음성에서 굳은 기색이 풀어진다. 기다란 창대가 저어지는 듯하더니 슉하고 진로를 가로 막는 풀들이 눕는 소리가 난다. 앞선 초롱의 빛을 쫓고 쫓으며 곡선을 그리거나 천천히 밤공기를 부유하는 미세한 빛의 구체들이 마치 땅에 가까이 별이 박힌 형상과 닮은 모양이다. 산 생물이라기보다는 빛나는 연꽃 같은 광경이었다. 언젠가 연등 축제에 널려 있던 연등들처럼. 지우스의 망토를 툭툭 치고 지나가고 일전보다 어둠과 나방의 빛에 적응한 시야에 명도와 채도가 극히 내려간 주변의 환경을 어렴풋이 분간한다. 실타래처럼 늘어진 잡목들이 계곡을 둘러싸 깨끗한 물소리와 곁에 선 이의 존재감 밖에는 느껴지지 않는다. 머리의 양편으로 휘감아 내려온 천이 뚫려있는 눈가 부근에는 산그늘과 같은 꼴로 음영이 져 어둡고 불투명하다.  

산의 두 언덕 사이 골짜기에서 폭포가 하얗게 보여 먼데서 보니 산의 이빨 같았다. 밤은 살아있고, 그가 오래 찾아온 기대는 같은 흰 빛이어도 훨씬 검고도 곤하고 분명하게 서있었다.  

그러니까 지우스는,

이런 순간들을 위해 와론을 찾아온 것 같다고.

그는 무슨 표정을 짓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이를 넌지시 건너본다. 아직 한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은 본 다해도 감정에 대한 판단만은 미결일 것이다. 지금의 와론은 무엇을 생각 하는지. 그러나 지우스는 차마 물을 수 없었다. 그제까지 그러했듯. 이전에 그러했듯. 와론에 대한 많은 것들은 물어서는 안되는 것 투성이었다.

지우스는 몇 시간 째 반복되는 와론의 재미없는 농담들을 소음처럼 끼고 창고를 휘감고 있는 쇠사슬을 풀어낸다. 사라지지 않는 부시럭 대는 천이 시야의 한 켠에 걸린다. 숲가 외딴곳에 있는 창고는 최근까지도 사용한 기색이 역력하므로 둘의 발길을 자석처럼 끌어당겼던 것이다.

“무슨 술버릇을 그렇게 하나? 나를 무슨 전애인처럼 찾는데, 낯뜨거워서 이거.”

“그런 줄 알았으면 좀 어울려주지 그랬어. 혼자 그렇게 취하게 둘 줄이야.”

“내 잔까지 뺏어간 그 상황에서 무슨 수로,”

그러면서 터번 아래의 주름은 거의 바뀌지도 않는 웃음소리를 낸다. 그가 좁은 구석의 선반들을 들추며 살피는 동안 출입문에 등을 기대고 선 와론은 창고 안으로 들어오는 약간의 빛마저 막고 있었다. 지우스는 먼지가 두텁게 깔린 바닥에 무릎을 대고 손이 닿지 않은 낮은 틈을 살피면서 대답했다.

“애인 행세도 나쁘지 않지.”

“그러려면 네가 좀더 머리가 길어야지.”

아, 그런가. 지우스는 목덜미 옆으로 내려온 짧은 꽁지를 의식하며 짧은 부동의 순간을 가졌다. 그쪽이겠지. 둘의 체격차를 생각하면 그의 능청을 자연스레 넘겨내는 닭의 지적이 옳다. 목재 마루에 내려앉은 톱밥 하나까지 살피고 난 다음 자리 뜨자는 선언을 한다.

“여긴 꽝인 것 같아.”

바닥의 선반을 살피느라 쓸린 망토 자락을 손으로 툭툭 털어내고 문간에 서있는 이와 합류한다. 와론은 나가서려는 그에게 가벼운 말투로 툭 내뱉는다.

“그래서 그 가벼운 발걸음으로 별천지를 박차고 나왔다고?

미친놈ㅡ”

어이없어 하는 기색으로 길게 끈 말꼬리가 그의 뺨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서 늘어진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어제는 생각보다 조용히 넘어간 편이지만 기린은 다시 이 주제를 마주할 것을 알고 있어, 닭을 보며 기꺼이 대화에 응한다.  

“좀 됐어.”

“하여간 달잔은 애를 아끼는 건지 망치는 건지 모르겠네. 어차피 관등이 의미 없는 기사들 사이에서 애가 하겠다는 걸 말릴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난 처음에 네가 이상한 단체라도 가입한 줄 알았다고. 못 알아볼 정도로 후드나 눌러쓰고 다니고.”

“이상한 단체?”

얜 날 찾아다녔다면서 아직도 다 캐지 못한 게 있구만. 와론은 그의 반응에서 몇 사실을 유추해내고는 입을 다문 채로 어깨를 으쓱인다. 지우스는 선뜻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고민하며 입술을 깨물다가 말을 던졌다.

“그러는 넌 뭘하고 지냈어? 고향에라도 다녀왔나?”

“고향? 내가?”

“기사가 되기 전에 머물던 곳 쯤은 있을 거 아냐. 아는 사람도.”

“고향은 아니고, 글쎄. 딱히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렇게 말하며 살짝 팔을 거둔 망토와 나무문 사이의 밝은 공간으로 지우스는 몸을 비틀어 빠져나간다. 보고 싶은 사람이 없다, 와론의 말에 이리저리 방점을 돌려 찍어보다 그는 가볍다 못해 거의 든 것이 없는 자신의 행장과 와론의 것을 번갈아 보았다. 그간 머물 성채나 마을이 있으면 굳이 유숙을 즐기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들이 가는 행로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견습의 솜씨로 염장을 한 채로 들고 다니던 산양 베이컨은 와론이 두고 온 그의 짐 안에 함께 들어있다. 역참에서 쓰이는 신분패인 코인은 물론이고 덧붙여 그간 귀히 모은 희귀약초들도ㅡ그의 유일한 취미이자 취미 이상의 의미였다 ㅡ 거기에 있다.

“돈은 좀 있나 와론?”

“가진 건 여관비 치르는데 거의 썼는데.”

그 며칠이나 기름칠한 식사를 해왔다고 벌써 위장에서 쓰린 공복이 올라왔다.

“…누군가 여기 있었군. 흔적을 지웠어. 이정도면 반나절 거리인가.”

“이제껏 안 마주친 걸 보니 그쪽에서 우리를 경계하는 군. 위장 솜씨가 괜찮은데. 그래도 기사 치고는 어설퍼.”

“상인들은?”

“그런 방식이 아니야. 아마 그 견습의 흔적을 찾은 건지도.”

와론이 고개를 절레 흔들며 지우스에게 손을 들어보였다. 금안의 초점이 톤이 고르지 못한 흰 손가락에 머물렀다가 다시 말하는 이의 얼굴로 돌아간다. 근방을 한번 둘러볼까. 가볍게 공중으로 투척한 론누를 두고 와론의 시선이 눈꺼풀에 덮여 사라진다. 그는 한다리로 비딱하게 서서 눈을 감은 채로 지우스에게 물었다. 

“서쪽 방벽에…. 병사들이 생활하는 걸 본적 있나?”

“…한번.”

견습을 졸업하자 마자 지우스가 가장 먼저 제발로 들린 곳이 서쪽 다리 인근의 나라였다. 장홧발이 흙을 걷어 돌 사이의 탄자국을 보여주며 말을 잇는다. 보이지도 않는 데 잘도 찾는군. 지우스는 와론의 감각을 파악하는 일은 어느정도 포기한 바였다. 

“그 방식과 비슷해. 견습은 기사 훈련을 받았잖아.”

“…병사로 지냈다고 했어. 잠깐 새까만 닭. 그렇다고 내가 확신한다는 건 아냐. 전부 추측이잖아. 일단 기억에는 두지. 추적하는 방향은 그대로 두고.”

“왜? 여전히 답답하게 구네, 기린. 좀 더 직감적으로 볼 순 없나?”

그 말을 한 사람이 새까만 닭이 아니라면 그도 울컥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러고나서 두 기사 사이에는 다시 짧은 실랑이가 오고간다. 머지 않아 론누를 회수하고 어렵사리 예정대로 에파나를 향해 북상하는 것이 결정난다. 지우스는 모처럼 만들어 놓은 화덕을 이용하기로 했다. 근방에는 수량이 많은 하천도 있었다.

기사들은 추적할 때가 아니면 불을 피웠다. 유숙 중에는 불을 피우지 않는 것이 원칙에 맞았으나 기사쯤 되는 강자들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창에서 작살로 변모한 날붙이에 걸려든 물고기가 꼬챙이에 입부터 꿰인 채 익어간다. 와론은 제 꾸러미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벌어진 고깃살에 짭짤할 정도로 간을 친다. 지우스는 식사를 위해 귓가에 걸린 터번의 하관 묶음이 살짝 느슨해진 것을 넌지시 본다. 서로에게 방심하며 밥을 먹는 건 퍽 즐거운 일이었다. 적당한 화력에서도, 그 안에서 익는 인근의 강에서 사냥해온 양식에서도 여유가 감돈다. 죽은 지 2-3년 이상 된 고기를 절여 만든 보존식은 맛은 둘째 치고 한동안 턱뼈가 제자리를 못 찾도록 하는 경도를 자랑해 기사들도 몸서리를 치며 먹곤 한다.

“그 안에 염장고기도..”

뭔가 중요한 건 없었냐는 와론의 말에, 고기를 씹으며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다보니 대화의 초점이 흐려지는 게 문득 느껴진다. 와론은 그 맛이 떠올랐는지 몸서리를 친다.

“보급품은 이제 정말이지 지긋지긋해.”

“마실 건 좀 있나?”

“아니?”

지우스가 들고 다니던 도수 높은 술은 사라진 견습이 고기를 씻는데 사용한다며 빌려간 지 오래다. 음영이 내려온 검은 눈가가 안쓰럽게 저녁식사를 바라본다.

“짐이 있었다면 좋았을 걸.”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

지우스ㅡ기린ㅡ의 기준에서 기사가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보따리 정도는 건져줘야 감사인사를 전할 터였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지금 에파나로 가고 있는 건 아니지?”

“원래는 너를 찾으러 간 거였어.”

“아직도 내가 필요한가? 넌 이제 약하지도 않잖아.”

“생사 정도는 알려줄 수 있잖아. 적어도 나한테는…”

“이래서 내가 좀 쉬어보려고 해도, 내가 없으면ㅡ”

닭은 명백하게 그 말을 듣고도 못 들은 척 끊어낸다. 그는 대화를 몇 년 간 쌓인 많은 주제 중 하나로 돌려낸다. 

“달잔 이 자식은 알았을 텐데, 애를 잡지도 않고 뭘 한 거야. 젊은 놈이 무모한 일을 하면 좀 말리지도 않고. 그래서 그 임무에 몇 년을 썼다고?”

와론은 능숙하게 공기그릇에 담긴 음식을 집어들던 젓가락의 끝을 놀려 그를 가리킨다. 

“둘은 서쪽다리에서 처음 본 게 아니지? 이전부터 달잔님을 별로 안 좋아하는 군.”

“거북이 사람 귀찮게 하는 재주가 있단 말이지.”

와론은 그 주제도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마음에도 없는 말은 하기도 싫다는 그 태도를 빤히 보던 지우스는 입으로 컵을 가져가 대는 팔뚝을 잡아 붙들었다.

“앗, 뭐하는 거냐. 음식이 다 흐르잖아.”

지우스도 이전에는 그런 그를 기다려주길 택했으나 이젠 안 될 일이다. 누구던 간에 그의 앞에 있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일은 무슨,”

그는 잡힌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으나 거친 말투로 답한다. 노란 눈이 시선을 붙들어 두려는 듯 응시해왔다.

“알려줘,”

“뭐야, 적어도 내가 사라진 건 거북이랑 아무 관계 없어.”

익숙한 체향, 익숙한 체격. 쇠를 제외하고 드러나던 눈에 익은 길게 솟은 목선과 구부정하고 단단한 자세. 아는 목소리. 근거리에서 마주치는 눈이 불빛으로 한층 투명하다. 좁히고 들어간 만큼 가까이에서 와론의 육성이 울린다. 놔라, 손에 잡히는 건 완갑이 아닌 맨손목으로 지우스는 닭의 말에 흠칫 팔을 놓았다.

“…끝까지 나한텐 아무 말도 없으시던데. 네가 죽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기는 했지만.”

“너도 거북한테 딱히 보고하고 다니지 않잖아. 내가 뭘 하고 다니는지 일일히 네게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어. 오히려 몇 년 전 네가 내게 내건 조건을 생각하면 반대에 가깝지."

“네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 없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

“그런 게 너 답지가 않다고. 네 손 안에 들어온 이들이야 전부 짊어지고 싶어하는 네 성격은 알겠는데, 그건 특수기수를 해체할 때 이미 버린 거 아냐?”

“내 의지는 아니었던 걸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차라리 이유라도 알았으면…”

“안 쫒아 왔을 거라고? 너한테 따박따박 보고를 올렸으면?”

“네가 없으면 난 어떡하라고.”

“그게 본심이지? 이기적인 새끼.”

“너였기 때문에 믿은 거다.”

“네가 날?”

몇 마디를 붙이려던 기린은 닭의 날카로운 살기가 목주변을 쭈뼛하게 만드는 것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감히,”

성에 차는 대답은 아니었으나 와론이 식사를 이어가도록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더 이상 중요한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와론이 그가 시선을 흘겨도 구태여 모른 척하며 눈을 돌리는 게 투구가 없으니 더욱 잘 보였다. 여운처럼 핏줄 속을 감도는 숙취에 국물 요리가 어쩐지 간절해진다.

잘 자리를 고르게 정리하던 중 와론이 먼저 불침번의 이야기를 꺼낸다.

“…굳이? 그냥 자면 안되는 건가.”

“혼자라면 그냥 자겠지만 둘이니까 한 명씩 번갈아 서면 되잖아.”

“며칠이 될 지 모르는데 계속 밤을 샐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흐음?

“…그럼 내가 먼저. 중간에 깨기 싫은데.”

“이거야 원. 이런 얘한테 목숨을 맡기고 자야 돼?”

와론이 창을 닦으며 나른하게 불평을 이어갔다. 그럴 거면 그냥 잠을 자지 말라는 얘기가 나올 때즈음 지우스는 그의 말을 자른다.

“…그럼 니가 서던가.”

“진작 그럴 것이지.”

냉큼 대답을 뱉은 그는 나무 위로 뛰어 올라 몸을 숨겼고, 육안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보초를 서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우스는 그렇다고 깨우지 말라는 말은 아니었다는 소리를 덧붙이려다가, 잔소리가 많은 사람은 하나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외면은 변했어도, 기사명을 거부해도 그는 여전히 새까만 닭인 걸까? 지우스는 자꾸만 파고드는 의심을 떨궈낸다. 생각보다 잠은 이르게 찾아온다.

“국경 검문소는 기사라면 몰라도 쉽게 넘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추적하다 보면 만나겠지.”

그것이 와론의 제안이었으나 지우스는 이견을 표했다. 과거에 전쟁이 잦았던 대륙 동부에는 마치 산맥처럼 국경을 표시한 장성이 끝없이 이어진다. 백 년전, 휴전 이전 까지만 하더라도 기사가 국경을 지나는 일은 극도의 경계, 긴장이었다. 그들이 잠재적인 침략이나 황제 대신 사찰을 하는 풍경이 왕국의 입장에서는 연쇄적으로 연상되었다. 그것이 전쟁의 억제 보다는 왕국 간의 경계심을 자극하는 데에 영향을 미친 건 지우스가 볼 때 사실이었다. 근년 새에 그 시절의 극도의 경계를 반복해온 지금도 빠르지만 제약이 많은 ‘기사’보다, 오히려 자유롭고 그래서 통행에 간섭 없이 이동할 수 있는 전령의 신분이 편리했다. 그러나 낙후된 이 변방의 국경에서는 그런 경계를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인 요새나 다름없는 성채 몇과 하천 중간을 가로지는 댐과 경계에 놓인 숲을 여러 번 지나갔다. 쉴 새 없이 걷다가 가끔 이야기 속도가 발걸음 마저 넘을 때에 간혹 멈추어서 휴식인지 싸움인지 모를 시간을 보냈다. 의견을 충돌하는 일이 계속 됐다.

국경이 맞물리는 지대에서 발을 멈추고는 다시 의논이 오갔다. 둘이 동행할 것이냐의 문제다. 

"같이 통과해도 돼. 난 지금 서류상 견습이랑 동행 하는 중이거든." 

"그정도로 세밀하게 보고를 하나?"

어린아이들이 하는 구슬치기의 구슬이 맞부딪히는 것처럼 두 기사의 눈이 마주친다. 그는 와론의 밝은 망토를 보았다. 흰색. 이걸 견습망토랑 착각할 위인은 없을 터다. 

"내 망토는 너한테 짧을까?"

"굳이 그래야 돼? 내가 날아서 가면 해결 될 일인데."

"...위병들이 까다롭게 굴지 않을지도 몰라."

"너도 참 대책없어," 

시골의 작은 접경을 넘는 일은 기사에게는 그다지 까다로운 일이 아니지만 만약 새까만 닭 정도의 네임드 기사가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지우스는 다시 넓찍한 어깨 위에 놓인 금속의 창끝에 시선을 준다. 병사들이 론누를 알아보지 않기를... 다른 기사와 마주칠 수 있는 기사들의 보급소는 더이상 이용할 수 없었다. 파이멜에게 연락을 취할 방법을 생각하니 카톤이 아쉬워지는 건 사실이다.  결국 패널티를 받는 기사들은 여러 방면에서 더더욱 무력의 방식 밖에 선택지가 남지 않는다. 상대는 쉬이 그물 사이를 빠져나갈 수 있는데 그들은 아니었으며 손에 닿지 않는 이들을 자꾸 놓치곤 했다. 이번 역시 추격의 간격이 벌어지는 게 견습이 어찌저찌 잘 피해다닌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와 닭이 자꾸만 충돌하는 데에서도 꽤 지체했다. 

북쪽으로 국경을 하나 넘자 풍경이 미묘하게 변화한다. 청담색의 반석으로 만든 성벽이 계속되었다. 대륙은 혼자 여행하기엔 너무나 크고 광대하고 인적은 드물었다. 몇몇 성채 도시들을 제외하고 대륙 전역에서 구역당 인구는 한나절을 걸어도 한 명 만나기 어렵고, 마을은 그보다 더 드물게 분포해있다.

해질 무렵이 되어 성둑 너머에서 송아지들을 불러모으는 청랑한 방울 소리가 반복해서 울린다. 가축들을 제 집으로 불러들이는 신호였다. 석양과 더불어 딸랑이는 소리가 들판을 가득 메운다. 객기처럼 서로에게 덤비는 싸움 끝에 둘 다 지쳐 말이 없었다. 지우스는 일부러 몇 백 년 간 변함 없는 성둑의 풍경에 시선을 돌리고 반석길의 끄트머리로 천천히 걸었다. 지우스가 별천지 서고에 앉아 그린 바깥은 어쩌면 태양마저 물 밑으로 가라앉아 사라지는 자유로운 세상이었다. 오르막이 구릉 위로 길게 이어졌다. 역광으로 살짝 그늘이 드리운 기린의 태도는 의견 충돌을 빙자한 일종의 시위였다. 혹은 그와 기린 양측 다 패를 물리지 않는 대치이거나. 새까만 닭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불안 속에서 발걸음이 느려진다. 닭을 추적에 이끌어가거나 수도로 데려가기 위해 부드러운 말로 설득해도 모자랄 판이었지만 하루 내내 삐끄덕 거리는 것이 그를 처음 보았던 때 같았다. 그저 이용하기만 하는 관계였다고? 지우스에게 그 명제는 분명 거짓이었다. 기사의 흔적을 찾아 대륙의 수없는 곳을 밟아온 내내. 그가 떠나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면서도 입을 열지 않던 베테랑 기사들의 모습이 있었다. 거친 풀숲이나 다름없는 머리칼들은 길이가 자라 뒤로 쪽지어 묶었음에도 불구하고 옆으로 채 다 잡히지 않아 걸을 때마다 기린의 뺨을 툭툭 거스른다. 말수가 부쩍 적어진 기린에 자기 생각에 빠져있던 와론은 어깨 위에 올린 창대에 기대듯이 걸으며 그의 잔머리로 시선을 돌리다가 건넛편의 일몰에 눈가가 시큰해 습관적으로 눈을 감는다.

‘허, 진짜로 사람 불안하게 하는 게 누군데,’ 

서편으로 내려가 거의 기운 태양빛이 성곽과, 연속된 들판이 두 기사의 사이를 배경처럼 메꾼다. 달군 쇠처럼 주홍으로 물드는 빛에 기온이 오르고 검은 티셔츠가 목 둘레를 감겨 왔다. 문득 뒤에서 걷던 와론이 그에게 다시 말을 건다.

"내가 기사를 그만둔 걸 네 책임이라고 생각하나?"

"...그래서 그냥 사라져버려도 된다는 건가?“

“그걸 찾는건 네 의지이고? 고맙다고 감사인사라도 해야겠군.”

와론은 목소리를 낮추며 혼잣말처럼 중얼댄다.

“어차피 수도엔 내가 있어야 할 이유도 없다니까. 거긴 딱히 내 자리도 아녔어.”

“역으로 너였으면 가만히 있었겠어?”

지우스가 순간 목소리를 높였다.

장화의 발걸음이 화를 내듯 둔탁하게 정지했으나 와론의 뒷말이 쏘아붙이듯 따라붙지 않은 것은 그것이 앞서 그날 내내 그들에게 반복되어 온 패턴이기 때문이다. 지우스도 그의 뒷말을 짐작하였기에 포장된 돌바닥을 내리 보며 성곽 위를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호기심이나 흥밋거리가 없어서 대충 방랑하고 다닐 시기는 지났어. 널 책임져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고. 적어도 나는 내 발로 거길 떠났고, 돌아가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와론, 난 네가 아니면…”

와론에게로 몸을 틀자 긴 망토 자락이 바람을 따라 몸에서 멀리 떨어진다. 와론은 어느새 지우스의 바로 뒤까지 따라와 있다. 입술을 깨물고 눈가로 다시 머리가 날려 더한 음영을 드리우며 한차례 기린의 얼굴과 시야를 가린다. 반동 없이 멈춘 흰 망토자락이 성곽의 반댓편으로 휘날린다. 지우스는 차마 그 존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기사명 대신 부르기 시작한 이름이 미련처럼 혀에서 느리게 미끄러진 까닭은 그것이었다. 뒤편에 선 기사와 눈이 마주치자 금안이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두어 걸음을 띄운 채 감기고 가린 시선이 높은 곳에서 지우스에게로 떨어지고 있었다.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그만큼 간격을 좁혀온 건 다시 만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터번 아래의 눈이 닿아 시선끼리 맞물려 돌아간다. 표정에서 무엇이고 티가 나던 미숙한 신입기사는 이제 없다. 많은 이들을 책임지고 자기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에는 목숨을 저당 잡던 의욕과 협의가 앞선 사령탑도 없다. 그러나 그에게서 꼭 어린 시절의 자신이 보이는 것 같아 와론은 아무 대답도 재촉하지 못했다. 그들은 어쩌면 잃는 게 두려워 많은 걸 숨겨온 건지도 모른다. 더이상 검지 않은 새까만 닭의 손이 결국 무심한 척ㅡ무심하게ㅡ 맨 손을 뻗어와 눈가를 가려버린 옆머리를 건드려 치운다. 손가락은 머리를 지나 뺨을 스치고 그를 놓아준다. 지우스의 떨떠름함과 함께 눈을 감아 시선을 피해버린다. 그러나 다음 순간 와론의 말에 다시 드러난 두 눈이 노란 석양을 받고 있다.

“안심하고 싶나? 기린.”

머리부터 발 끝까지 무장 대신 망토와 긴 치마의 천자락으로 자신을 싸매고, 전보다 여유가 생긴 편이라해도 여전히 별로 여지 없는 얼굴을 하는 기린이 꾹꾹 눌러둔 인간성이 그 하나로 밖으로 흘러버리는 빛이었다. 그가 와론으로 부터 구명과 약속을 구하는 이상 지우스는 와론을 자유롭게 해줄 수 없었고, 그건 지우스에게 와론도 마찬가지였다. 와론은 그가 일부러 힘을 축적한다는 핑계로 시간을 벌기 위해 사상지평을 썼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달잔도 아마 입 밖에 내지 않았어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 일터. 그 냉혈이 인간성을 압도하고 있는 거북이라면. 고작해야 사상지평을 이런 곳에서 묵히고 있다고ㅡ 그리고 그 모든 행동의 어느 방향을 향해 있는지를 짚어 보려다가 자꾸 황금빛으로 기울어진 들판이 그를 압도할 듯이 너르게 느껴져서, 자칫 한마디로 이 기사에게 다시 헛된 희망을 줄 것 같아서 잠시 머뭇대던 와론은 최선으로 가벼운 말을 골라하곤, 무게 없이 지우스를 툭 쳐낸다.

“…확정하지는 마. 너 어디 가서 머리 좋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겠다.”

돌담을 몇 걸음 나아가던 와론은 어느 새인가 그가 따라오지 않고 몇 걸음 뒤에 멈춰있다는 걸 알아챈다. 지우스의 낌새는 달라져 있었다. 모자와 음영 아래로 노을빛에 입꼬리가 어느방향으로 포물선을 그리는지 애매 했으나 와론은 그가 터트리듯 웃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마치 와론이 그곳에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듯한 모양이다.

“그래서?”

와론이 모닥불을 옆으로 두고 팔에 이마ㅡ터번에 반쯤 가렸어도 눈썹 위로 각진 모양을 알아볼 수 있는ㅡ를 댄 채로 이쪽을 넌지시 건너 본다.

“... 뭐가.”

“어떻게 생각해. 들었잖아. 내 얘기.”

동대륙에 바할라 옆의 땅이 솟아오른 80년 전으로 이후 대륙의 많은 곳의 역할이 뒤바뀌고 변해왔다. 길어진 국경 사이에 공백들도 그 중 하나였으며 그들 세대는 이미 야숙에 익숙해졌다. 회색이 진하여 지면에 축적되면 어느새 붉은 색이 되어 온기를 품는다. 작물 몇가지를 채집하여 뜨거운 국물을 낸 스프로 배를 채우고 진한 노곤함이 찾아온 뒤였다. 와론은 구부정하게 불을 들여다 본다. 망토와 그림자가 하나가 되어 밤에 한층 커다란 체구는 이전부터 꽤나 많이 보아온 익숙한 모양이나 그 위에 고개를 숙이고 불을 쑥덕이는 옅은 무색의 머리와 혼자만의 상념에서 빠져나온 눈은 처음으로 마주한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덤덤하고 굵게 울린다. 처음으로 남에게 와론ㅡ닭이 아닌 자신ㅡ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그 소감이라도 궁금한 모양이다. 눈은 별다른 위협을 띄지 않았지만, 지우스는 어제의 살기를 떠올리며 와론이 평가에 따라 서슴없이 그의 생명을 위협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럴 거라면 애초에 말하지도 않았겠지, 그 역시 무어라 말할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할 말을 고르기 전 홍수같이 밀려든 이야기와 그로 인한 생각때문에 잠시 두통이 그의 뒷통수를 치고 기승을 부렸다.

“별다른 것도 없는데. 누구나 자라온 얘기지.”

“흐~음.”

“그런 방식으로도 기사가 될 수 있다는 건 조금 놀랐지만. 중앙은 이 일을 알고 있나?”

“제대로 말한 건 지금이 전부.”

그것은 어쩌면 와론의 이야기가 옳았다. 지우스가 새까만 닭에 대해 책임을 질 수는 없었다. 몇 년 전, 혹은 그 보다 더 이전부터 타인을 위하는 일이 일상이었던 지우스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방임인지도 몰랐다. 왜 도망쳤냐고 물었지만 지우스는 지금에는 그에게 왜 도망치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어진다. 기사가 아니라면 누구에게라도 달려가 설득할 수는 없었으냐고. 이것저것 따져보아도 그에게 남은 선택지가 기사 새까만 닭 밖에는 없었다는 그것은 정해진 흐름을 부수어온 새까만 닭마저도 부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뜻인가 고민했다. 그런 걸 정의 내리면 그야말로 법칙이 아닌가, 혹은 그것이 법칙이 부리는 그들을 떠미는 간교한 방식인가 싶어 지우스는 갈비뼈 속이 먹먹하게 깎여 들어갔다. 그러나 여기까지 거치고 떼어온 수만의 발걸음이 있기에 간신히 입을 다문채 그를 내버려 둘 수 있었다. 수만의 물음들을 다시 땅 밑으로 가라앉혔다. 그의 눈 안에서 불이 일고 있다. 오래 타오르며 쉽사리 잡히지 않는 불길.

이내 와론은 눈을 감싼 옅은 빛깔의 열은 대부분 그를 만나기 이전, 혹은 그가 없을 때의 알지 못하는 과거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지우스로서는 유추할 수 없는 그 범위의 색을 들여다 보길 별로 좋아한 적이 없었다. 그가 보통의 사람들보다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것과 별개로 그가 와론의 표정을 남들보다는 한가지 더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론누를 조종할 때는 눈을 감고 있다. 단순히 궁리에 빠지거나 자는 것과 달라 지우스로서는 쉽게 구분할 수 있었고 투구 안으로 생각에 빠져있을 때에도 어느정도 알아채게 되었다. 그런 때의 모습을 간파하고 난 뒤 지우스는 굳이 그 안에 어떤 얼굴이 있는지 알아야할 필요는 느끼지 않았으며, 그걸 안다고 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애초부터 벽보다는 뭉그런 비밀에 쌓인 기사가 론누의 패널티에 관한 한가지를 지우스에게 드러낸 것이 지독히 예외스런 일이다. 그리고 오늘의 이야기는 기린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새까만 닭을 다시 보게 한다. 그가 알아야 하거나, 또는 그러지 못하게 하는 무언가가 아직도 남아있는가. 그는 피곤하지 않았지만 불가에 마른 손으로 이마를 한차례 쓸어낸다. 잠은 오지 않았고 서로에게서 도망갈 곳도 그럴 만한 장소도 마땅치 않은 저녁이다. 드문드문 오가는 목소리들이 누가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연히 평소보다 한두톤 내려간다.

와론은 덮고 있던 터번 위로 다시 후드를 두르며 미리 그날의 불침번을 선언했다.

“잠깐,”

지우스는 당장이라도 뛰어오르려는 그를 멈춰 세우고 자신의 남은 짐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낸다.

“버리던지, 팔던지. 네거니까 네 마음대로 해.”

아무렇지 않은 듯 물건을 넘긴 지우스는 그제야 쇳덩이가 줄어 짐이 가벼워졌다는 듯 두 어깨를 힘껏 늘려 기지개를 켜보인다. 개운한 표정으로 그는 조금 떨어진 자리를 펴둔 나무 밑에 몸을 기대고 망토로 몸을 덮었다. 맨손 위에 투구를 받아든 와론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지우스가 흘리듯 넘긴 말을 받지 않고 다시 자신의 손으로 넘겨진 것을 바라보았다. 머리를 대자 지우스는 금새 눈을 붙이고 잠들었다.

닭은 그가 교육하듯 기린을 훈계하던 때가 떠올랐다. 임무 나오면 아무데서나 긴장 풀고 잠들지 말라고. 특히 바닥에서는, 불침번을 같은 거에 맹신하지 말라며 설교를 늘어놓곤 했다. 간혹 와론이 깨우지 않으면 제 시간을 잊고 새벽까지 자버리곤 하던 기린은 와론의 그런 행동들이 오히려 더 나쁜 게 아니냐고 반문을 펼쳤다. 동료를 믿지 않아서 잠을 자지 않는 편이 그러면 맞느냐는 얘기였고, 와론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자꾸 신뢰가 가게 하는 네 행동이 더 나빠.

투구안으로 얼빠진 턱이 열리고 억, 하고 뒷목을 절로 잡게 하는 소리였다. 너 나를 믿지 않는다고 네 입으로 시인했잖아? 그러니까 네 행동도 문제라고. 말하고 다르잖아. 그런 대꾸 속에서 와론은 절대 그에게 손을 올릴 수는 없었다. 절대. 그 생각을 스스로 하지 않았다면 넘길 수 없는 고비도 몇 차례 있었다. 타인을 돌보는 건 와론이 하지 않으리라 예상했던 경험이었으나 생각보다 보람있고 보답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와론의 후배라거나, 어린 기사도 아니었음을 선명한 사실이다. 기어스 때문에 제몫을 할 수 없는 것은 담청색 기린이 격기사였기 때문이었고 무언가에 메어있다는 흔적이다. 와론으로 말하자면 기어스란 상흔이나 흉터와 더 유사하다. 와론의 몸에 새겨진 그것들이야말로 시간이 순행한다는 증표로 새까만 닭으로 살아온 나날이 나이테처럼 늘어갔다.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이 있었다. 낙인은 벗어버리거나 깨트릴 수 없는 종류다. 기사들의 기어스는 바늘을 되돌릴 수 있으나 그의 것은 영구했다. 처음의 새겨진 자국 그대로 였다. 그걸 들을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이놈은. 와론에게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언젠가는 와론이 그에게 무슨 말이던지 털어내준다고 해도, 그들은 그 언젠가를 보장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기린은 아마 그 조바심을 내왔던 것이다. 아직까지도. 그리고 이제와서, 라는게 닭의 입장이다. 어느샌가 누가 보아도 도움이 필요치 않은 경험 많은 기사는 어두운 미간으로 좀 더 쉽게 주름이 졌다.

와론은 손 안에 든 투구의 작은 숨구멍 안을 들여다 본다. 이마등이 깨진 부분에서 부터 그가 모르는 흠집과 패인 부분이 몇 개 늘어난 투구는 이렇게 보니 사람이 쓰기에는 묵직하고 딱딱하고 틈이 좁아 그 안이 전혀 들여다 보이지 않는 금속 보관함 같기도 하다. 텅 빈 안에서는 당연히 어떤 안광이나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나린기의 능력을 가리려 그리고 얼굴을 가리려고 했던 무장이지만 오히려 그 시야 때문에 론누로 더 많은 것을 보곤 했어도, 이 투구를 눈에 담던 나날을 기억한다. 철판의 좁은 틈 너머로부터 떨어져 앉은 기사에게로 시선이 꽂히던 날을 기억한다. 와론이 그날 보았던 지독하도록 올곧게 앞만을 바라보던 담청색 기린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또렷해서, 그의 손에 들린 투구와 함께 와론은 다시 한번 그 판금갑을 쓰고서 같은 빛이 비치던 때로 돌아간다. 좁은 투구 안으로도 볕이 드는 광경에 목이 졸릴 것 같다. 무구의 답답함 때문이 아니었다.

어두운 금안이 니젤의 지하에서 반짝이는 어느 광석이나 금속 보다도 밝은 크로뮴의 광택을 일으키며, 한낮의 노란 태양을 닮은 커다란 그ㅡ와론ㅡ의 이상이 맺히는 걸 발견해버리고 나서는 무엇이든 얼마든지 괜찮아지는 것이다. 희뿌연 현실이 갈라지기 전까지 자신의 두 발로 서있어야 하는 곳을 그는 그려두었다. 새까만 닭은 아니라 해도 그 안에 아무도 모르게 존재하는 그를 가차없이 흔들던 광경이었다.

자는 줄 알았던 지우스에게서 문득 말소리가 들려온다. 잎사귀 같은 머리를 나무 몸통에 기대고서 그가 물었다.

“있잖아.

아직도 기사가 싫나?”

“뭐야,”

“…잘자, 새까만 닭.”

졸음이 깔린 눈이 그를 응시하다가 이내 밤인사를 전하고 감긴다.

잠시 뒤에 옆에서 고른 숨소리를 내며 피곤을 감추지 못하고 스물스물 올라오는 잡념을 멈추며 금세 의식을 잃고 잠에 빠져있었다. 그러니까 밖에서 그렇게 깊이 잠들지 말라니까. 와론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와론으로서도 잘 아는 하마라는 기사는 행방불명이라는 최후가 역으로 그의 꺾을 수 없는 산으로 장식했다. 존재의 성숙을 이루어야 하는 건 용뿐만이 아니었다. 기사란 끊임없이 나아가는 자. 끊임없이 무기의 날을 벼리듯 정의를 부딪혀 오는 자. 정의와 질서에 맞서 대항하는 자. 와론은 그 정의를 부딪히고 깨트리다가 어느 날은 결국 그 자신이라는 창이 부러져버렸다. 와론에게 기사란 이미 완벽한 창이었고, 기사사냥꾼으로서 완벽한 정의를 세운 그에게는 삶은 더이상 의미도 필요도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던 그대로 사라져 버린 것은, 존재의 성숙을 이루었다기 보다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꺾어 버린 창이 이와 비슷한 마음이었으려나.

머무는 것은 무엇보다 두려운 일이었지만 정말로 두려워한 것은 잃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를 놓는 것이 아니었던가. 물 위로 너울져 남아 있는 것이 잔상이라도 괜찮았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이 거처할 곳을 찾아내면서, 그것에 의지해 답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녀석도 주제 넘게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에 자신과 같이 아무 의미 없는 사람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ㅡ 분에 넘치는 일이었다. 와론의 깊은 속 어딘가에서 그렇다면 자신을 원하는 이 녀석의 필요에 응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꿈틀거렸다. 오랜만에 피어오른 열망이었다.

와론은 잠든 지우스의 어두운 이마를 내려다보았다. 숙인 그의 목은 마치 이명이 그 기린이라도 되는 양 길고 가늘다. 그는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그림자가 진 방향으로 얼굴을 돌려 잠에 들어 있다. 그 얼굴 어디에도 완전한 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린은 그것을 한번 부인하였는데도.

그에게는 사실 원래 이름이 없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이름 없던 시절의 그를 부르던 야, 얘, 너 따위의 명명이 더 오래 각인으로 남는 법이다. 와론은 흔하디 흔한 그의 진명들이 불릴 때마다 길에서도 심장이 뒤흔들려 그가 아닌가 몸을 돌려보게 만든다. 기억의 매개만이 남은 와론은 작은 호명만으로도 금세 그를 되새길 수 있다. 기사로서의 원래의 존재가 희미해지고, 이제는 그 기사의 모습마저 희석하듯 사라지면서도, 아무리 오래되어도 잊히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론누는 기사를 사냥하기 위해 벼려진 무기였고 새까만 닭은 언제나 그와 함께 하는 창이었다. 어둠에서 태어나 빛을 내는 새였다. 분노를 잃은 나침반의 끝은 겨울 햇살처럼 머리를 은은하게 맴돈다. 터번의 옅은 빛깔은 쌓일 수록 진한 홰의 색에서 불의 빛으로 번져나간다. 와론은 론누를 껴안고서 드물게 그 앞을 떠나지 않고 지킨다. 산맥에서 보내는 밤은 조그마한 화톳불을 잃어버리고 난 이후로는 암흑천지다. 인적 없는 밤은 채도를 잃고 지평선을 찢고 선 산맥 아래로 깜깜히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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