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는 산 사람을 위한 것
2022.7.30 / 기린닭 (+목와 한 꼬집)
*2024.1.1 수정
묘지기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며 들어선 지우스는 망설임 없이 한 곳으로 나아갔다. 지우스가 가까이 다가와도 와론은 미동도 없이 옆에 세워둔 론누를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새까만 닭. 기사명을 불러도 그는 작은 반응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번 전쟁, 능력을 사용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지우스와 이곳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에 그러했듯 한 묘비 앞에 주저앉아 쉬고 있던 와론이 고개를 들었다. 사나운 투기가 느껴졌다. 투구의 작은 틈 너머로 그의 눈이 형형하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한 마디라도 잘못 하면 곧장 목숨을 거둬갈 것처럼 날카로운 살기였다. 지우스는 그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직 그것만이 그의 용무였기에. 무심한 정적이 흐르고 이내 와론이 자리에서 일어나 론누를 고쳐 쥐었다.
“그래서, 허락해주길 바라고 온 거냐?”
분노가 느껴지는 어조에 지우스는 대답을 하는 대신 그저 눈을 감았다. 혹시 모를 도박일 뿐이었다. 성공해도 실패해도 실보다 득이 큰 도박. 1%의 가능성을 보고 온 것이었으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이제 그는 눈을 감은 채 작전에서 자신을 전력 외로 고려하고 있었다.
담청색 기린. 아까의 분노 어린 어조와 달리 덤덤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잠시 머릿속 작전 지도를 접어둔 지우스가 눈을 뜨니 와론이 한 손으로는 목걸이를 매만지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숨을 길게 뱉어냈다.
“너에게 맹세란 가벼운 것인가?”
지우스를 똑바로 내려다보는 투구 너머로는 조금 지친 듯한 눈동자가 보였다. 잠시 그 너머를 보며 답변을 고민했다. 당연히 가볍지 않다. 그렇기에 기어스를 맹세하고 격기사가 되었다. 하지만 기사를 싫어하는 새까만 닭에게 격기사이기에 맹세는 가볍지 않다고 한다 한들 설득력이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짧게 한숨을 쉰 지우스가 답했다.
“가볍지 않으니까 여기에 온 거다.”
진위를 판단하듯 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 지우스를 보던 와론은 이내 흥미를 잃은 듯 먼저 등을 돌려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잠시 보던 지우스는 와론이 있던 묘비를 보았다. 이름 하나 적히지 않은 투박한 묘비. 애당초 이곳에 이런 형식의 묘가 달리 있던가? 피어오른 의문점을 한 곳에 모아둔 채 그 또한 걸음을 옮겼다. 사상지평은 전력이 될 수 없다. 이것으로 충분했다.
-
전쟁이 끝났다. 어느 한 쪽이 이겼다고 볼 수 없는 난전이 결국은 종전 선언으로 끝을 맺었다. 이제는 대륙 곳곳에 흩어진 시신을 수습할 때였다. 살아남은 기사 또한 적었던 탓에 그 중 한 곳이 와론의 몫이 되었다. 기사를 싫어하는 기사. 그렇기에 그는 투덜대면서도 맡은 지역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주어진 지역은 북동쪽 전선. 전쟁이 한창일 때에 그가 싸웠던 지역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곳에 누구의 시체가, 몇 구의 시체가 있을 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기어스는 적을 직접 죽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지. 이를 증명하듯 주위에는 동료 기사의 시신 뿐이었다. 다만 온전치 않은 몸의 일부는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적을 직접 죽이지 않는 선에서 전투불능으로 만들기 위해서였겠지. 빤히 보이는 상황에 괜히 바닥에 굴러다니던 팔 한쪽을 발로 툭 찼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자신의 명예를, 맹세를 지켰다.
퍽 가지런히 눕혀져 있는 시신은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다. 창백한 피부가 그렇지 않음을 증명했으나, 시신을 니젤에 데려간 이후 종종 그가 특유의 덤덤한 목소리로 부르는 게 들렸다. 한 번 시작된 환청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미 수년 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둘이나 데리고 다니는 건 좀 힘든데. 홀로 장난스레 중얼거려도 달라지지 않는다.
언젠가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장례는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그 사람이 정말 떠났다고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다시 한 번 그 말을 실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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