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외눈박이

목주와론

서녘에서부터 서서히 등불이 점등해간다. 지평 가까이에서 길고 낮게 타오르는 옅은 쥐불에 익숙해져서 어스름과 더불어 시야 저편의 사각이 짙어져 간다. 깊이 머금은 심연의 가락이 뱃속에서 짙어져 간다. 늪이 다가오고 있다. 

늪에 고인 물은 차츰 흔들히며 탁한 수면에 남인 등불이 유영해서 유일하게 어딘가 바닥이 있다는 소식을 알린다. 이 빛은 세상에서 자취를 둔적한 천정을 향해 끝없이 이어진 거대한 괴물의 위벽으로 퍼져나가 상공과 대지의 깊은 틈을 벌리었다. 허공을 흡입하듯이 턱을 젖히자 긴 뱀처럼 논개가 피어나 자신의 실체가 그 즈음의 고도에 존재함을 깨닫는 것이다. 어두운 밤의 해일을 부표처럼 부유하는 눈이 괴물의 뱃속을 느적지근하게 휘저으며 헤아린다. 발언저리를 안안하며 부패하고 물이 찬 구덩이가 족적처럼 널린 늪은 으스스하며 끔찍한 아름다움이 감돌아, 회발의 광인이 여기서 새벽을 밝힐 적까지 등불을 들고 서있을 것 같지만 찰나의 방랑자에 불과했다. 밤이 보여주는 암흑 속에서 순순히 길을 잃어가며 점점 보이지 않는 늪지 안쪽을 향해 묻혀간다. 

세상을 보이지 않게 감싸는 모든 명제들이야말로 늪 속에서 산소처럼 주유하는 것이다. 끝없이 깊고 컴컴한 뱃속으로 삼켜져 있다. 기사. 명예. 대륙. 황제. 와론. 개인이 정의를 실현하는 현실의 이상과 삶의 끔찍한 괴리. 법치 없는 세계에서 자유라는 이름이 쥐어가는 수많은 존재들. 손에 잡히면 모래 같이 흘러버리는 소중한 것들의 덧없음. 왕국과 권력과 군대와 법치가 이루어진 세계와 자멸한 세계. 길고 긴 국가의 늙은 숨을 지켜봐온 대륙. 있어왔고 있었으며 지금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수만의 인간 성쇠의 이야기들....

습지의 웅덩이 안에는 물풀과 더불어 썩고 죽은 것들은 긴 악몽에 들어있다. 탁하고 척척해진 언어들을 들고 식은 땀을 흘려. 끝이 더러운 창을 들고 너의 앞에 서있는 기분이 들어 자괴하듯 고한다. 싫어할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을. 마음과 말의 미숙한 형태가 두 빗장뼈 사이에 갇히지 못하고 들썩여 아프다. 헤이던 시간을 되물어내듯이 전부 토해버리고 그걸로 아물수 있다면 좋을 것을. 더러운 물의 수면은 기름이 반사되며 흘러가고, 결말을 폭력으로 밖에 해결할 수 없는 진부할 정도로 극단적인 세계에 머리가 아플 정도 격정에 시달리고 그런 나의 증오와 미움으로 인해 곧 질려버리곤 한다. 극렬한 사랑과 증오는 마찬가지여서 어딘가에 이르기도 전에 사그라들어 버렸다.

 너의 목을 벅차게 껴안아 입을 맞추고 새기는 것만이 유일한 언어였다. 머금어 버린 언어가 흐려 사라져 버리지 않고 그리고서 네게 부드러이 희석되길 소원했다. 살아가는 것이 두려웠다. 잃어버렸는지 흘러가는 지 모를 시간이 쌓일 수록 두려움은 바닥의 개흙으로 잔잔히 개어내리지 못하고 늪으로 밀려가는 것이 말이다. 살아올 날들이 길어질 수록 기나긴 족적을 남기며 더욱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공포이기 때문에 언어화 하지 못하는 감정들을 받아줘. 공포의 금제는 말을 삼키는 것이었으므로. 다문 모습들이 차차 눈 속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더이상 같은 날일을 맞이 하지 않는다. 침묵하고 죽어간 그는 망각 속에 잠겨들었고 나는 여전히 철렁철렁 등불을 흔든다. 깊은 눈꺼풀은 영구히 못에 잠겨 입구를 닫고 사라진 것들의 족적은 개흙으로는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다. 

가혹하고 거친 사람이었으나 속을 섬세하게 절단해놓은 건 다정함이었다. 기억은 물방울처럼 단속적이고 숨이 넘어가는 것들을 함께 보자고 다짐했기에 무딘 계절이 더이상 변해가기를 거부했다. 문을 두드리는 기척처럼 이따금 어두운 평원에서 정체모를 소리처럼 별자리처럼 너는 머리맡을 찾아와 눈 앞을 흐려놓았다. 모질지 못했다. 멈추어버리던 창날과 망설임은 너를 상기시켜. 등허리에 매달려 말을 나누고 애정을 나누며 우리는 눈물을 지우곤 했다. 열기가 도사린 푸른 눈이 아름답기에 그 안에 비친 나를 아름답게 여기게 해 아픈 몸을 녹였다. 너를 그렇게 잃고 난 후로 백치가 된 나는 늪을 헤메이고 있다. 하나뿐인 눈으로 물 안개 속에 색 잃은 숲과 일방향으로 유적히 흐르는 강변만을 적시한다. 서서히 꺼져가는 세계. 불이 점등해가는 저녁. 

너의 정의는 거의 완벽한 구의 비견되었기에 나는 외로웠다. 말의 뜻은 알았지만 시리고 냉혹한 어조에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어리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이었다면 무치는 고통을 삼켜가며 한걸음 물러났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약해지는 것은 시대는 너마저 울리고 만 탓이리라. 무겁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내팽겨치는 타의가 그러했다. 미천한 정의를 가진 이들은 제 발치 밖에는 살필 줄 모른다. 보잘 것 없는 정의는 단정이 정의가 된다. 발등에 변천하여 굴러가는 그 사람의 무게. 하늘이 어둠으로 젖는 날은 애상하기 그지 없더군. 차마 내리칠 수 밖에 없는 분은 몇 번을 쳐도 풀리지 않았노라고. 물에 젖으면 갈라지곤 하는 갈색의 줄기에도 다물린 입술만은 도저히 열리지 않아 무슨 말을 머금어도 싹을 틔우지 않았다. 시간을 뜨인 눈으로 목도하고 있었다. 언젠가 찬탄하던 세계를 놓치고, 마지막으로 폐를 빠져나온 숨이 시체에 고여있던 찬 기체에 지나지 않더라고. 잔뜩 우그러들어 비에 염색되어서 판갑은 가냘프고 무르게 갈라져 있었다.

이를 수 없는 시간이 지나간 지금도 새까만 닭은 기사다. 그들은 네 목숨은 앗았지만 너를 파괴하지는 못했으며 기사가 되기를 원하던 너의 소원은 내가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네가 원하던 목표도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이루어졌고 손에 묻은 피도 나의 분노도 일말도 식지 않았다. 아직은 앞에 남은 밤이 길다. 

그래도 좋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 사람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원해서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돌고 돌아 그를 원망하다가, 결국은 자정에서 만나는 시계의 바늘들처럼 모든 원망이 나의 품으로 돌아와 버리는 것은 이 세계에 그토록 복잡하고 미묘한 허상들이 뒤얽긴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 어딘가에 사람이 존재하고 ,선함과 사랑이 존재하고, 변천과 간직이 있고 하늘에는 늘 북쪽을 가르키는 눈이 있기 때문이다. 네가 마음에 품은 세계. 너의 어릴 적꿈이자 현재이자 소원. 하지만 이제는 미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마음속에 불구덩이가 떨어진 것 같이 깊은 크레이터가 여기저기 패여가며 보잘 것 없고 모난 마음을 만들어 갔다. 항성 같이 떠있는 괴로움의 존재와 살아있는 것의 독기가 지독히, 지독히 나를….

개인의 말과 존재들은 너무도 크게 압도해 괴물로 태어나 괴물로 죽어가는 돌연변이는 보이지 않는 것을 더듬는다. 세계에 작은 구멍을 뚫어 그 틈으로 내려다 본다. 네 조각으로 사분된 말. 세마디로 분절된 손가락. 두 줄기로 뺨에 갈라진 눈물. 그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붙치고 떼어 발음한 평화가 너무도 아름다웠지만 현실의 고통은 늘 입술의 거리보다 멀었다. 하나로 수렴하는 악몽은 긴 꼬리를 나부끼며 웅덩이 위로 몸을 숙인다. 말라가는 흙같아 보이는 것을 손을 내려 더듬으면 질퍽한 느낌이 전해져온다. 썩어가는 이끼의 냄새 속에 희미한 연기의 냄새가 나고 있다. 멀리 머리맡에 헤일로의 울부짖음이 들린다. 

겨울의 끝을 넘어가고 있어.... 

얼마 남지 않은 웅덩이로 잔뜩 불은 투구가 얼굴의 형상처럼 일렁이며 수면 너머에 초상화를 그려간다. 어느 고사에서는 나비의 꿈을 꾸며 꿈과 현실의 세계가 뒤집어지곤 했다. 그곳에서는 천정이 바닥이, 바닥이 천정이 되어 고인 석호가 전부 천구 밖으로 낙하했다. 멀었던 그 사람은 가까워지고 슬픔을 견디다 못해 결국 그 사람이 되어버리는 곳. 마치 중력처럼 서로에게 이끌려 만날 것이다. 전투와 진통의 종점에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투구의 양면을 목도한다. 한 창의 유리를 열어 내다보듯이 창이 눈이 되어 불을 켜듯 보았다. 기사사냥꾼의 정의를 이해하나? 판단하고 못박아내리는, 단절하는 세계를 긍정하나? 직면할 수 없는 건 과거에 불과했다. 거대한 허와 맞서며 영원히 승패를 가를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나? 

그렇지 않다. 이 창을 쥔 자는 누구나 일으켜 세울 것이 아니라 넘어지지 않을 것이 있다. 벗이라는 언어에 당신을 가두었을 때 당신이 살아가면서 나를 잊어버리게 될까 두려웠다. 사실 네가 어디서든 나를 잊지 않기를 원했다. 놓치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마음을 저며와, 당신의 숨결로 이루어진 한마디를 유일한 산소처럼 호흡한다. 그런 미천한 것이 사랑이더라도. 너를 박탈당한 괴물은 외눈으로도 이곳에 천정을 똑바로 향하고 있어. 제대로 보이지도 설명할 수도 없는 빈 허공, 그러나 멀어지지 않는 그곳에 피뢰탑을 세우고 네게서 나에게로, 저 위를 향해 흘러가고 있어. 

너는 하나의 삶을, 사랑을 펼치고 죽어갔으며 시대의 격랑 속에 뒤얽혀 살아가는 것이 너의 정의겠지. 보잘 것 없는 사랑이 지치더라도 바로 서서 살아가던 그 사람은 지탱점이 되어주었다. 너는 무거운 세계를 떠받치고 있어…. 세계는 너로 인해 죽지 않는다. 

자유나 자존이 끝이 남는 나선처럼 꽁무니를 좇으며 회전하며 가닿는 일은 세계의 이치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네가 북극성처럼 자석을 끌어당기는 극성으로 시리기도 뜨겁기도 하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오늘도 손에서 놓지 못한 잔상의 꼬리가 너를 향해 끊임없이 안부의 끈을 당기기 때문이다. 너의 존재가 이 공기를 흔들고 있다. 늪의 아래. 바다의 아래. 하늘의 아래. 세상을 구하는 법을 알게 되어도 너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 방법만은 모르게 될 것이다.

시대는 어지런하고, 부조리한 소문이 팽배하다. 네가 말한 희망처럼 시대를 구원할 수 있는 기원 같은 건 없다. 내겐. 와론, 네가 살아있었다면 분명 내일을 펼치는 것이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과는 또다른 무수한 가능성으로. 나는 가끔 볼 수 없을 그 세계를 늪 천장을 비추며 혼자 무한히 상상하곤 한다…. 

청보라색 여명이 가득 부풀어 오르고 밤은 새벽을 지새던 기도에 박무를 더한다. 진득하게 고인 뭍의 공기가 코앞으로 떠올라 바람에 실려간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세계와 기적과 변혁 없는 세계에도 아침은 온다. 그가 수없이 울어오던 평평한 새벽과 그의 위로는 두 번 다시 떠오르지 않는 금성이 밀려온다. 발을 단단히 감싼 부츠를 딛으면서 비를 맞는 고행승처럼 못내 눈꺼풀을 닫는다. 눈을 뜬 새벽에도 이것이 후회함 없는 선택이길. 쪽빛 여명이 눈을 멀것처럼 시리게 내려 서리처럼 얼굴을 칠한다. 간밤 너른 소호에 새겨진 발자국은 사위어 가고 한줄기의 염원이 뺨을 적시며 갓난 아기처럼 호흡을 틔우기 시작한다.

그 세계에서 당신은 어느 곳에서도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 

다시 한번 아침이여. 너는 나에게로 등불을 나른다. 

泥中に咲く진흙 속에 피는_HarryP(ft. Wolpis Car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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