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간빙기
파이아민
231225
*리아민 약 멘헤 요소 있습니다.(자해 등 유혈 소재 주의)
*파이멜 형제 날조 있음.
*리아민에게 글자 가르치는 파이멜
간빙기(间冰期)
리아민.
나는 끊임없이 생각해.
"이건 무슨 뜻이야?"
"제국(帝國). 나라랑 비슷한 말이야."
"그럼 이건?"
"온도(溫度)."
그리고 나서는 일어서서 출입문에 인접한 벽에 걸린 온도계를 들고 와서 당신에게 보여주던 것을. 빨간 선 옆에 쓰인 숫자와 눈금을 설명하다가 손 끝으로 관을 쥐자 수은이 섞인 액체가 민감하게 오르내린다. 겨울의 푸른 주목보다도 시린 녹색의 두 눈이 그걸 뚫어져라 보다가 곧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검은 단발이 두어번 찰랑이던 것을.
나는 석판에 백묵으로 다음 글자를 쓰고는 눈치를 살피며 물었지.
"덥다(熱)에 대해서 알고 있었어?"
"덥다(很热)는 알아."
부모가 난리를 겪으며 미처 챙기지 못했는지, 혹은 어려운 형편에 어린 아이 입 하나를 덧붙이는 것조차 견딜 수 없었는지는 몰라도 당신은 마을 인근을 둘러싼 숲 속에서 헤매다가 구조되었어. 처음 발견 당시 기억하는 거라고는 이름 밖에 없는지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여서 마을어른들은 충격에 기억 상실증이나 실어증을 겪는 게 아닌가 말했지만, 어른들이 말하는 사정은 당신에게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았어. 다만 추운 기후에는 익숙치 않은지 나를 포함한 또래들이 눈밭을 뒹굴며 뛰어다니는 걸 건물 입구에 출입문에 반쯤 나와서서 지켜보곤 했지. 몇 번 놀자는 동네아이들의 제안을 거절하자 그 뒤론 아무도 당신에게 말을 걸지 않았어. 나는 간혹 덧창 뒤에서 빤히 이쪽을 보는 시선을 느끼곤 했지만 휙 돌려 보았을땐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어.
땅이 풀리고 겨우내 경사진 지붕에 달린 두꺼운 고드름들이 떨어져 내릴 때즈음 웬일로 바깥에 나와앉은 아이가 작은 석판에 백묵으로 무언갈 툭툭 긁어내고 있다. 얼핏 보니 조그마한 학교에서 배운 문자와 전혀 다른 형태의 글씨가 산발적으로 적혀있다.
"너...!"
백묵이 뚝, 소리를 내며 부러진다. 다음 순간에 천장이 뒤집히고 매섭게 녹안이 해체할 것처럼 노려온다. 이제껏 반쯤은 지루한 듯 졸린 듯 띄었던 차분한 식물의 색과는 다른 맹렬한 초록을 띄고 어느 틈에 턱 밑으로 밭게 들어온 단검이 경동맥을 향한다. 정수리가 바닥에 닿을 듯 턱끝을 올리며 녹안을 마주 보았다. 생존본능은 필사적으로 방금 본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연기를 하라고 나를 닦달한다.
"그..글자를 모르는 거야? 아님 까먹었어?"
아무 대답이 없는 게 당신은 아마 망설이는 거라고 판단했다.
"내가 가르쳐 줄게. 거절해도 어른들에겐 말하지 않을게."
목에 겨누어진 단검이 금방이라도 날을 틀어 찔러올 듯 누르다가 곧 무거운 살기에서 풀려났다. 꽉 잡혀 얼얼한 손목을 돌리면서 흘끗보자 단검은 어느 곳에서 나왔는지 모르게 사라지고 두 눈이 나를 응시한다. 손가락 두 개를 들어보이고 방금까지 내가 뒹굴어 엉망이 된 흙바닥을 가리킨다.
"매일 두 시. 여기로 와."
말은 할 수 있는 거구나. 나는 그런 당신을 보며 조금 우습다고 생각한 것 같아.
글자를 가르치면서 간혹 내 지식으로 닿지 않는 것도 있을까 걱정했지만 당신은 궁금증이 많은 학생도 아니었어. 어딘가 부자연한 발음으로 글을 따라읽고 뜻을 물어오는데 일상적인 어휘 중에 낯설어 하는 것도 있는 것으로 보아 문화권이 아닌 문명 자체가 분리된 곳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 내일(聽日)은 당신에게 내일(明天)이었고 배고픔(肚餓)은 배고픔(饿)이었지. 정숙(靜肅). 당신은 새로 배운 말 중 그 가볍고 짧은 단어를 좋아했어.
여름이 찾아오면 짧은 계절이 지나가기 전 이때는 들에서 야영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날이었다. 추운 고산지방에서 여름을 맞기 위해 찾아온 동물들을 사냥하러 며칠씩 숲에 나가서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곤 했다. 고산동물은 고지대로 올라갔지만 우리는 사냥개를 따라 산틈의 협곡 사이를 빠져나간 무리의 흔적을 발견하곤 멈춰서서 흙을 발로 채며 살폈다.
"이동하고 있어."
손가락 세 개를 원으로 말아쥐는 건 정북쪽을 가리키는 당신의 습관이었다. 대화보다는 지시의 목적을 가진 특이한 수어로 전쟁터에서 군인들이나 쓸 법하면서도 친밀한 사이 같이 느껴지기도 해서 그 부분에 대해선 적절히 표현할 말이 거의 없었다. 순록은 무리로 잡는 편이 덫을 치고 기다려야 하는 수고도 적게 들었지만 특히나 무리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골라 죽이는 편이 죄책감을 덜어 주었다. 우리는 순록 무리를 앞지르기 위해 굽을 가진 동물이 오르지 못하는 가파른 능선을 넘어 영구빙과 목초지가 만나는 곳으로 향했고, 높은 식물이 자라지 못하고 지형이 바뀌는 이행대에서 얼음이 풀린 빙하호를 둘러싸고 미리 진을 치고 기다리곤 했다.
집에 와보니 외지에서 지내는 형이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야. 너 요새 바쁘다며?"
"바쁘기는 무슨. 미리 말이라도 좀 하고 오지."
"맨날 산으로 들로 나다닌다면서? 나중에 사냥꾼이라도 되게?"
형은 이를 드러내며 못된 장난기를 품은 비소를 지었는데 그건 우리 형제의 습관이었다.
"아니, 기사 시험 볼 건데. 견습 시험도 얼마 안 남았어."
"기사? 그래, 너한테 그거라도 있어야 되지 않겠냐. 아니 그래도..."
형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으며 작게 중얼거린다. 그게 생각보다 편한 일이 아닐텐데.
"아, 됐다. 넌 그냥 하고 싶은 거 해라. 아무 생각 말고."
"형은 형 일이나 돌봐."
그는 가업을 이어받아 어렸을 때부터 이곳을 떠나 일을 했다. 늘 뭔가를 배워대고 어느 연고 없는 지방에 한참을 틀어박히고 몇 년간 소식이 없어 죽었나 싶을 때즈음 이곳으로 돌아왔다. 형이 기사에 대해서 뜬소문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아는 게 있어 저런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만 뜯어말린다 해도 나는 이해했을 것이다.
지축의 기우는 일과 함께 계절은 흰색에서 연노랑으로, 그리고 갈색과 지의류의 녹색으로 덮혔다가 내 머리 같은 시든 풍경을 지나 다시 하얗게 바뀌었다. 겨울이 초입에 들어서면 우리는 사냥감을 찾아 대륙 깊은 곳까지 본격적인 사냥을 나서곤 했다.
레툰의 해안선을 향해 서쪽으로 깊숙히 이동한다면 거대한 빙해와 대륙 극단의 빙붕이 만나 만들어내는 장관을 볼 수 있고 운이 좋은 날에는 기상이 맑아 서쪽 다리나 그 건너편의 대륙까지 관찰할 수도 있었지. 장벽을 이루는 산맥은 정착빙과 눈에 의해 수 백년에 거쳐 서서히 해체되고 있었어. 빙하가 토혈을 뱉으며 몇 만년을 그 자리를 고고히 지키고 있던 산들의 등성이를 쓸어내렸지. 그날 우리는 산맥에 가까운 빙원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가기로 결정했지. 냉기를 들이마셔 폐를 식히는 건 익숙했고 당신은 내 머리를 불만스런 눈으로 훑으며 말했어.
"...네 머리는 눈밭에서 너무 잘 보여."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래. 근데 검은 머리도 눈에 잘 띄긴 마찬가지야."
"어차피 폭풍 속에선 아무것도 안보여."
"..."
"잘 띄면 육안으로 찾기 쉬우니 그것대로 괜찮잖아."
"리아민..."
표정은 냉담했지만 이것으로 됐냐는 듯이 묻는 태도엔 관용이 묻어 있었어.
순록은 한대림 속에선 그렇게까지 무리짓지 않았어. 산맥에 파묻히듯 자란 작은 나무들의 사이로 높이 쌓인 눈무덤을 헤치며 적설에 나무가 자라지 못할 정도로 깊은 폐쇄림 속을 찾아 들어갔어. 얇고 거무죽죽한 가문비의 그림자들이 옅은 창살의 모양을 만들어 우리를 가두어 내려다 보고 쌓인 눈에 발이 푹푹 빠져 이미 사냥감을 가지고 갈 수 없을 만큼 이동이 어려웠지. 등 뒤의 짐에선 그날 잡은 작은 눈짐승들에게서 피냄새가 나고 있었어. 우리가 같이 잡은 순록은 작살을 맞아 대퇴에 피를 흘리면서도 절뚝이면서 제 집이 있는 산으로 돌아가고 싶어했지.
그러면 당신은 쫓아가서 차라리 숨을 끊어주자고 했어. 제아무리 본래는 산짐승이어도, 얼어 죽을 것이 뻔하다고. 마치 동사(凍死)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할 것 같은 당신은 누구보다도 추위에 대해서, 고립에 대해서, 자연의 혹독함에 대해서 나보다 오래 겪어온 건 아닌가 하는 어렴풋함이 들었어. 냉정하게 나를 스쳐지나가 빙결 같은 상아 단도를 꺼내면 나는 그 동물에게 느끼는 질긴 연민 탓에 고개를 돌려 마지막 장면을 피하곤 했어. 얼어버린 주천 아래서 창백하고 검은 머리가 칼처럼 휘날려 어느 추위 보다도 더 몸서리치는 냉정을 품었지. 날카롭게 얼어붙은 당신의 검은 머리를 쥐었던 촉감은 아직도 내 손 안에 남아있어.
나는 시력이 좋아 어디서든 당신을 찾아내겠지만 내가 설원에 묻히면 당신은 나를 찾아줄까? 멀리 앞에서 빙원 위를 달리던 길고 단단한 두 다리는 순록이나 눈사슴보다 강인했어.
돌아가는 길엔 눈 안개가 심해져 곧 악천후가 되었고 변덕스런 산 기후야말로 레툰이 지닌 참모습이었어. 겨울처럼 짓누르는 얼음폭풍들 속에서 못견디듯이 한걸음씩 무겁게 설피를 떼며 순록을 질질 끌고 가는데 땅으로 고개를 숙인 채 걷는 나를 문득 앞에서 기다리던 당신이 있었지.
내가 숲에서 길을 잃는다면 언젠가 나를 깊고 날카로운 수림 가운데 버리고 갈 거라고 느껴왔지만
당신이라면 나를 베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그 냉혹한 친절이 극북의 어느 야생을 닮아
나는 평안 속에서 눈의 품에 안겨 평원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당신이 단도를 꺼내들어 자신의 팔뚝에 가져다 대자 나는 움츠러 들며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살갗에 칼을 박아 베어내고 힘줄을 끊는 소리가 들리자 황급히 눈을 뜨며 만류하려 했으나 입가에 대뜸 물려진 것은 부상을 입은 팔뚝이 아니라 아까 잡은 눈토끼의 절개된 뒷다리였다. 뜨거운 피가 쏟아지는 부위가 물려지자 입가에 벌건 핏물이 든다.
"빨아. 체온이 돌아올 거야."
당신은 가슴 위까지 내려오는 가죽과 늑대털로 만든 단단한 케이프를 벗어 내 옷 위로 덧입혀주고 옷에 달린 모자를 씌워주었다. 당황한 내가 옷을 돌려 주려했지만 당신은 망토에 달린 남색 후드를 머리 위로 쓰고 사양하듯 앞서 가버리고, 강풍으로 험난해진 비탈 속으로 날리는 망토자락이 숨어 들었다. 남은 날고기는 사냥개에게 던져주었다. 산의 흰뼈를 드러낸 눈사태가 빙원을 뭉개고, 어둠에 가라앉힐 때즈음 우리는 무사히 마을의 경계를 넘었다. 집집마다 기화한 수증기와 연소된 물질로 이루어진 백색 스모그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당신이 말한 세상의 환과는 다르게 왜 만남은 불연속적이고 이어지는 일은 실패하는 걸까.
절연과 단념 사이에서 나는 끊임없이 생각해.
휘파람을 혀 끝으로 빨아들이면서
당신이 말한 생의 의미는 뭐였어?
당신이 떠난 뒤에도 나는 계속 기사들 틈에 남아있었어. 견습에 불과한 우리의 목숨에 기사가 자신의 목숨을 건다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정말로 괜찮았던 걸까? 나는 언젠가 부터 마을을 나가 기사가 되고 싶었어. 그리고 기사가 되고 언젠가 다시 레툰으로 돌아가고 싶었어. 그걸 내 이유라고 부른다면 고작해야 기사를 포기하고 당신에게로 뛰쳐나가지 않은 우선순위는 참 어리숙한 결심이겠지. 그리고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기사들 곁에 있어야 했어.
그럼에도 당신이 첩자라는 말을 듣고 순간 흔들렸던 건 이곳에서 당신과 나는 절대 공생할 수 없을 것 같은 예견이 들어서였어. 기사가 되려던 내 마음이 고작 그 정도에서 비롯되어서 일까?
리아민. 나는 알 수 없어서 당신에게 내 마음을 물어보고 싶었어.
당신이 떠난 곳은 분명 이 대륙의 어느 나변일텐데도 난 어느새 당신이 이곳의 간빙을 깨고 다시 북부로 홀로 돌아가버린 듯해. 계절 속에서도 바람은 끊이지 않고 거푸 불어오다가 이따금씩 시린 극동풍에게 자리를 내주곤 해. 차가운 기단이 먼 지방을 품고 머리와 이마를 훑고 지나가면 그것 마저도 미적지근 했어. 이제서야 내가 깨닫게 된 건 당신은 추위를 잘 알고 있다는 건 사실이었지.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을 다시 불러오고 싶어.
설원에 묻히면 당신의 얇은 남색 망토를 찾아낼까?
당신은 지금 행복 가운데에 있는 거야?
아니면 나처럼 당신도
별볼일 없는 어둠에 숨어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다던가...
똑똑.
기사가 되고 나서는 자리를 발령받은 수도에서 지냈다. 수도의 광공해는 야간의 미세한 빛을 구분하는 예리한 시력을 흐리게 하여 밤하늘이 다른 곳과 비교하여 턱없이 밝고 불투명했다. 수도에서 머물던 이층 창가를 두드리는 누군가 소리가 났다.
그리고 푸르게 새벽이 다가오기 전에 당신은 다시 창가를 넘어 들어온 곳으로 사라지곤 했다. 돌아올 수만 있다면 국경과도 같은 선을 넘어와주는 건 언제나 당신이길 바랐다.
위장 속에서 무언가 꿈틀, 살아있는 생명의 기척을 느꼈다.
마치 눈 밭에 뿌리가 드러나 겨울이 가기 전에 얼어 죽어버리는 나무와 같이 들어내어 잘라버리고 싶은 충동과 도로 파묻어 살려주고 싶은 기분이 동시에 든다.
꿈 속에서 그것이 제 안에 들어있다는 걸 안 순간 부터 손톱을 납작하고 단단한 복부에 대고 갈아냈다. 아무리 해도 뱃속까지 파고 들 수는 없어 맥없이 손을 놓았다. 너더분한 살점이 달라붙은 손에서 피냄새가 난다. 색채가 분분하게 시야를 떠돌았다. 레툰의 가옥 지붕에 올린 형형 색색의 기왓장들은 마치 장난감과도 같아 마을 전체가 어느 집 개구장이들이 꾸며놓은 것 같기도 하였다. 머리 끝부터 거대한 껍질로 쌓여 물컹한 연육을 가진 파충류가 집어 삼키는 것 같았다. 일어난 피부 밑에서 피를 흘리는 근막이야말로 부패한 핏덩이처럼 검고 탁하다. 불에 타지 않는 키작은 유목들은 온 숲을 뒤덮은 산불 속에서도 살아남는다.
아. 그 날 나는 역시 불 속에서 죽었어야 했나봐.
맑지 못한 야광의 하늘은 눈물조차 흘리지 않아 별 하나 없었다.
녹지않는, 부패없는 냉기를 가진 한철과 함께 극지 속에 화장되어 숨을 막았어야 했는데.
그지없이 그립고 부러운 용의 후예들의 마을에서는 피어난 풀 한포기마저 태어난 그자리에서 생을 다했고 전쟁터에서 죽어간 용의 후예들은 주검은 그자리에 묻었지만 영혼은 마을로 함께 돌아간다고 믿어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같은 이름을 주었다. 둥글게 회귀선을 그리는 겨울이 돌아와도 이제는 장작을 나르고 순록을 잡고 겨울 나기를 준비하지 않아도 돼. 어떤 동물도 자신의 무리를 사냥꾼에게 던져주지 않아도 돼. 마치 사육되는 가축과 같이. 복막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은 중독과 같이 목을 졸라서 말단부터 괴사해가는 것이 느껴졌다.
순록의 털이 남쪽에서 차차 갈빛을 띄어가면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변화는 재앙이 되었고 화재와 빙하는 뒤섞여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용의 후예는 오래전 인간들 틈으로 숨어버린 용에 대한 신앙의 퇴적이고 눈사태와 토혈이 밀려와 수렁이 된 그들 궤도의 흔적에 불과한 나는 시체의 껍질 같은 거겠지. 언젠가 숨을 쉬었던 존재들의 잔여뿐인 화석. 썩어가는 상처의 고름.
타지 않은 부지목의 꼬지가 불이 옮겨붙은 창자를 갉고 아려내서 일직선으로 뱃가죽을 가른다.
나는 희박해져가는 산소를 홀로 헐떡이며 들이마신다.
생존은, 가끔, 너무나 버겁게 느껴져서,
때로는 생각건대 자비, 없는, 연명, 이, 아닌가, 하고...
집 안에선 불쾌한 쇠의 냄새가 가득 절어 나왔다. 창문으로부터 이어진 자취에 따라 어딘가 불편하게 상체를 웅크리고 어깨를 치켜올린 당신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손 끝 가득 부드러운 천을 흘러넘치도록 쥔 모습에 눈주변이 움푹 패어 어둠 속에서 한층 또렷한 형광의 홍채가 마치 사냥을 들킨 맹수 같기도 했고, 늑대에게 배를 뜯어 먹힌 채 피를 잃어가는 순록처럼 보이기도 했다.
"파이멜. 이건 무슨 뜻이야."
당신은 가슴팍에 옆 얼굴을 기대고 누운 채로 한 편으로 전체를 넘겨서 접은 책을 들고 묻는다. 나는 접어서 베고 있던 팔을 내리고 여린 손끝이 가리키는 글자를 훑어본다.
"레몬차(凍檸茶)."
"레몬차(柠檬茶)?"
"발음이 전혀 아닌데."
"원래 이런 거야."
이제와서 알았던 건 당신의 부족은 쓰는 말도 달랐다는 것일까. 감추지 않고 굴러가는 혀끝이 그제야 부자연스럽지 않게 제자리를 찾았다고 할까. 처음 보았을 때 하던 대륙의 말은 어릴 때 용병을 하면서 배운 걸 흉내냈을 뿐이었다. 어린아이 같이 지적하는 편이 훨씬 당신에게 어울렸다. 목을 덮은 긴 머리칼은 단단하고 푸스스해서 감촉이 좋았다.
"뭐. 하지마(不要)."
"..."
하지 말라는(勿做)뜻이거니 하면서도 슬그머니 풀었던 팔을 다시 감는다. 이번에는 야단이 돌아오지 않는다.
"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좋다. 네 머릿결."
"정신 차려."
옷의 솔기 위쪽을 터서 길게 말아올려 감은 붕대가 보였다. 손목의 맥은 당신치고는 조금 약하다.
"여기 사람들은 순록을 한번도 못 본 사람도 있대. 그리고 리틴시아에선 이렇게 부른다더라."
겨울이 되면 리틴시아의 목초지로 내려가 머물기도 하는 반가운 순록의 무리를 임무차 들렀을 때 마주했었다. 나는 희고 차가운 당신의 손을 끌어 손등 위로 글자를 쓴다. tonakai,
"토나카이?"
"응. 이것도 순록(馴鹿)이래."
"여기 순록들은 모피의 색이 짙어."
춥지 않아서 딱히 사냥을 즐길 이유도 없는데. 빙하가 사라지면 순록들은 어디로 가는 거지. 나른하게 비틀어 꼬아 동그랗게 솟은 어깨뼈 너머로 고요하던 당신의 표정은 딱 그런 생각에 잠겨있는 거겠지.
"파이멜.
만약 어느 날 레툰이 사라지면 넌 레툰으로 돌아갈 거야?"
나는 그 말에 잠시 망설이다가,
"리아민, 기억해?
백웅의 흰 털 모피를 사람들은 가지고 싶어해서, 자주 사냥을 나가곤 했잖아. 어느 집이나 사냥개를 길렀지. 레툰에서도 봤잖아. 그 왜, 털이 두 종류라 무척 따뜻한... 가죽보다 살아있는 동물이 더 따뜻해서 누구나 개를 사랑했지. 빙하가 사라지고 수목 한계가 올라가면 순록들은 남쪽에서부터 되돌아와."
지금은 부재한 저편의 세계를 울리는 향수는 끝내는 지울 수 없었어. 어느 벽화와 석판보다도 오랜 문명을 고아낸 암석에 새겨진 석화엔 5만년을 주기로 빙하기가 와. 세 번의 간빙기 끝에 풀려나듯 찾아오는 겨울을 보겠지. 누군가는 세상이 지수화풍의 네가지로 이루어졌다고 했지만 그곳엔 온통 빙하 밖에 남지 않겠지.
네가 용이라면 나는 너를 섬길 거야. 나도 용의 후예가 되겠지. 설신을 섬기듯 하늘을 우러르며 머리를 조아리던 마을의 무녀님 같이 배하는게 아니라 네가 천 일 지난 후 하늘로 되돌아갈 반룡이 될 수 있도록 차가운 네 비늘을 오래도록 뎁혀 줄게. 레툰의 곧은 가문비송을 베어다가 작은 나무용을 만들어 너를 생각할게. 제물의 피가 아니라 하얀 눈을 섞은 송분으로 장난하듯 너와 내 뺨에 낙서를 그리고 너를 기려 잊지 않도록 해줄게.
"괜찮아. 리아민.
이제 세 달이 지나면 다시 눈이 내릴 거고
그때가 되면 다시 너도 겨울이 무엇인지 생각날 거야..."
태양은 일년 내내 지평 가까이 머물렀고 밤과 야생의 국경은 언제나 흰빛이지. 백웅이 사냥법을 잊을리가 없듯이 솔직히 우리는 겨울이 무엇인지 잊어버릴 수는 없어. 생명이 잠잠해지던 광경을. 하지만 당신이 바라는 건 그런게 아니라 시린 북방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이 타오르는 설영이거니와 수목 없는 빙원과 축축한 자신의 피로 체온을 데우며 잠들고 깨어나지 못하는 사슴의 무리들이겠지...
몇 번째일지 모를 대지의 계절이 어느 설한의 동면을 견대내는 동물들처럼 당신을 바각바각 가물게 했다. 어두운 내 귀로는 끝내 다 들을 수 없는 거대한 공전의 굉음을 듣고 있었다.
"네 형."
"네가 우리 형을 만난 적이 있었나?"
"그때 한번."
그러고 보니 동네를 들렸을 때 당신이 형을 본 것 같기도 하다.
"무슨 일 해? 마법사 같던데."
"...글쎄. 연구한다고 이곳저곳 옮겨다니던데. 요즘은 어디서 지내는지 몰라."
"...그래."
마법사가 그렇게 쉽게 외관으로 알아볼 수 있는 존재던가? 문득 어둠 속에 녹색으로 빛나는 눈에서 까마득한 낭떠러지를 볼 때와 같은 느낌이 들어 얼버무리려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 먹는다.
"연락해 볼게. 뭐가 필요한 거야?"
"...
만나는 거면 충분해."
"그래. 소개해줄게."
당신은 그렇게 말했고 나는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듯이 당신의 머리에 얼굴을 묻는다.
여름이 녹듯이,
얼음이 녹듯이,
산맥이 내쉬는 한탄을 들었지. 산 위를 머물렀던 눈의 지붕이 무너져 유빙들이 협곡을 따라 시린 빙하호의 물을 넘치게 했어.
이 창틀을 넘고 뛰어내려 밖으로 달려가는 당신이 품었던 기이한 자유를 품을 수 있다면. 나 역시 다를 바 없이 갇힌 이 굴레 속에서 마을을 떠난 거야. 그리고 정반대의 방향으로 회전하는 당신의 말들과 기억을 그제야 되새기는 거야. 당신도 그저 파묻히는 존재라는 걸.
그렇게 부숴진 와륵같이 하찮아진 것들을 보면 나는 당신이 주었던 생을 다른 이에게 돌려주고, 언젠간 나도 되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물레를 끊임없이 돌려. 검은 물결 속으로 휩쓸려 가는 약속에서 찾고 싶은 계절에 도달하는 방법을 발견한다면,
당신은 그때와 같이 긴 머리칼을 단도로 베어내고 우리는 다시 설원 위에서 사냥을 즐기겠지.
ost 추천 _ 지구본(Spinning Globe.地球儀)
가사를 참고한 구절들이 있습니다.
와력, 와륵 瓦礫 「깨진 기와 조각 또는 기와와 자갈」이라는 뜻으로, 하찮은 것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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