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위난의 바다
견지우 견용
231211
*이어지지 않는 단편 두 편
*견지우cp 견용cp 약 와견 진견
1.
정찰이 한창인 시기, 인원의 절반이 흩어진 숙소는 평소보다 비어있다. 그믐의 밤이다. 숲 속의 거처는 풀무치가 우는 소리나 밤바람 특유의 숲소리 하나 없이 칠흑 속에 거하여 조용히 그늘에 숨어 망을 보는 견습기사들을 제외한다면 보이지 않는 비탄이 모든 소음을 삼키었다. 삭망은 달에 한 번은 되돌아와, 칠흑이 온 산을 제 것처럼 다스릴 적에 산행에 익숙한 기사들마저 시야확보를 포기하고 이동을 멈추곤 한다. 썩은 나무냄새가 나는 공용공간의 탁자 위에는 이곳의 유일한 시계가 째깍거리며 덩그러니 놓였고-대부분은 시계를 보지 않아도 시간을 알았다- 거처 전체가 숨을 죽이듯 피곤과 침묵에 묻힌다. 먹구름은 가냘픈 별빛을 빨아들이며 지붕을 덮는다. 복도랄 것 없이 방을 구분 짓는 방 밖의 좁은 나무마루 위를 누군가 끼익거리며 밟고 지나가는 소리가 난다. 침묵이 잠을, 악몽이 밤을 대신하는 날.
나견은 그를 놔주지 않는 베개 맡에 대고 머리를 좌우로 흔든다. 그는 돌연 죽은 형제의 목소리가 떠오르지 않는 꿈을 앓는다. 쌍둥이 동생은 그와 같은 얼굴에 다른 미소, 그리고 다른 음성을 지녔다. 나진의 사소한 습관이나 버릇은 모두 알았지만 나견과는 고유의 몸가짐부터 차이가 있고 성격 역시 그러했다. 그렇기에 나진의 형태는 그가 우디온을 벗어난 이후에도 상시 기억 속에 있었다. 그가 죽은 지 일 년이 다 되어 가도 여직껏 나진은 매일 아침마다 머리를 올려 묶으며 그와 함께 살아갔다. 그는 동생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어 부른다.
-나진?
다른 견습들과 어깨를 견주어 잠든 잠이 순식간에 달아난다. 그것이 조용한 방 안에 울려퍼진 소리임을 깨닫고 뒤늦게 입을 틀어 막는다.
우우, 우
그믐의 밤. 지우스는 며칠째 취침이 늦어지고 있었다. 일찌감치 저녁식사와 불침번을 정하고 흩어진 견습들은 거실의 정면으로 이어지는 넓은 방에서 잠에 들고, 그는 복도 끝에 따로 떨어져 비교적 조용한 빈 방을 썼다. 낮에 창가로 수도에서 소식을 물고 온 전서매를 돌려 보낸 뒤, 피봉을 뜯고 전서를 펼쳐 읽는다. 구겨진 종이가 손 안에서 팔락이며 펴진다. 오로지 정보의 전달만을 목적으로 한 내용을 노란 두 눈이 빠르게 읽었고 알릴 만한 소식이 없자 그대로 촛불로 옮겨 붙여 종이를 불에 사른다. 한 입에 불을 삼키고 타오르는 종이에서 기름 성분이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카키색 머리 끝에 드리운 검은 음영이 너울을 따라 속이 보일듯 흔들린다.
우풍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벽 사이로 스며들고 목재로 된 마룻바닥의 삐그덕댐이 불현듯 그의 방 복도에서 멈춘다. 퉁퉁, 이윽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지우스는 망설임 없이 방문 앞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당긴다.
-…나진?
-기린님.
-무슨 일이지.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지금 시간에 보초는 네가 아닐텐데.
-신세 좀 질 수 있어요?
물 속에 오래 있다 나온 사람 같은 안색을 한 나견이 복도의 어둠 속에 반쯤 묻혀있다.
-… 들어와.
끼이- 문이 작은 소음을 내며 마저 열리고 검은 신발 두 개가 문가를 지나 들어온다.
-혹시 제가 방해하는 건가요.
-…
나견의 시선이 차갑게 책상 위를 훑는다. 아니, 마침 자려던 참이었어. 한 박자 늦은 대답을 하며 책상 앞으로 다가선 지우스는 지도 위에 놓인 오닉스 바둑돌 몇 개를 걷어 함 속으로 자르르 쏟는다. 한 손은 주머니에 꽂고 허리부근이 얇게 들어가 길게 서있는 그의 실루엣이 어두운 조명과 만나며 이룬 대비가 문간으로 이어져 나견에게까지 닿는다. 그가 스스로의 발로 걸어 들어와 놓고도 머뭇대자 지우스는 턱짓으로 한켠에 놓인 허술한 침대를 가리킨다. 그제야 나견은 잔뜩 굳은 어깨를 풀고 주섬주섬 이불 안으로 들어가 누울 수 있었다. 지우스는 모자 대신 쓰고 있던 후드를 손으로 내리며 책상 앞을 서성인다. 기사들이 쓰도록 배정한 방의 침대는 기사들끼리 번갈아 가며 사용했다. 마침 숙소에 남아있는 건 그뿐이었고 체격이 크지 않은 둘이 쓰기에 침대는 원체 좁은 편이 아니었다. 두 시가 넘어 더욱 삭망이 짙어진 바깥 어딘가에서 새까만 닭이 주변을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녹은 촛농을 끼얹자 암전이 찾아온다.
-… 주무시나요?
일반적인 당혹과는 약간 궤를 달리하는 반응이 튀어 나온다. 표정이 보이지 않으니 오히려 감정이 잘 느껴진다. 아마 그 정도로 정상으로 굴러가지 않는 본인에 대한 감흥이려나. 지우스는 이불을 걷던 것을 멈추었다.
-며칠 잠을 설쳐서 말이야. 불편한가?
-…아뇨,
분명 보이지 않을 텐데도 멈칫하는 그의 두 동공이 확장되는 게 놀라울만치 느껴진다. 나견이 옆으로 비켜 누울 자리를 만들고. 따뜻하게 데운 자리에 몸을 뉘인다. 두 시간 정도는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진
나진
나진,
-나견.
마치 계단에서 발을 헛디딘 이를 잡듯이 손이 덜컥 어깨를 뺏어간다. 모로 누워 끙끙대며 악몽에 시달리던 나견의 고개가 홱하고 제껴진다. 칠흑 속에서 빨간 동공이 순간 밖으로 드러나며 나견은 자신을 내리 누른 손의 주인과 마주친다. 그는 눌린 숨이 가라앉을 때까지 여러 번 호흡을 뱉었다. 꿈이었고, 옆에 누운 이는 나진이 아니라 기린이었다. 그가 왜 이 밤을 기린과 함께 보내야 하던가. 나견은 찰나 동안 그 이유를 상기해내고 다소 놀란 기색을 띄면서도 그가 깨어난 것을 알자 성급하게 닿았던 손길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부정맥처럼 불안과 갑작스러움으로 덜덜 뛰논다.
-불.. 켜도 되나요.
나견은 잘 보이지 않는 얼굴에 대고 묻는다. 드물게 확신 없는 투로 성대를 타고 나오는 음성이 조금 떨고 있다. 의아가 서린 짧은 탄식을 내뱉던 기린이 곧 상황 파악을 마친다.
-내가 하지.
기린은 부스럭 대는 소리와 함께 잠에 잠긴 태도로 이불 밖으로 손을 뻗는다. 이윽고 성냥으로 갑을 긁어내리고, 방 안이 밝아진다. 은은한 주홍색으로 벽의 일부분이 변색되고 침대에도 지우스의 얼굴에도 다시 그림자가 진다. 나견의 목소리에서 읽어지던 미미한 감정의 단서들은 빛 속에 다시 사그라들어 더이상 자취를 찾을 수 없었고, 새벽녘의 퀭한 얼굴만 그 자리에 있었다. 양촛불이 소리없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다시 이불을 거둔 지우스가 적당히 몸을 띄우고 자리에 누웠으나 덩달아 놀라 잠이 달아난 뒤다.
-자꾸.. 이름을 불러요.
누구의?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되는 말. 들을 것도 없는 대답. 방금 본 그것을 일컫는 것이겠지. 자면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몽유증세. 천장을 향한 채로 누웠던 그는 옆에서 나견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마지못하는 척 한 눈을 떠 흘끔 바라본다. 나견은 그의 방향으로 몸을 틀어온다. 온난한 불빛이 지우스의 콧대와 얼굴을 주황색으로 적시고 흐린 금안이 빛난다. 표정 없이도 기척과 낌새로 사람을 읽는다고 했다. 한번 그림자 아래에서 그를 겪고 음성만으로 어렴풋하게 파악하고 나자 약간은 더 쉽게 그가 읽혀온다.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던가. 지금 이 얼굴과 꼭 닮았을,
-안심하고 자.
광원이 깨진 붉은 눈이 불과 꼭 닮아있다.
작고 희미한, 양초 하나만이 천장을 타고 방 안을 밝히운다.
-내가 볼 테니까.
나견이 잠들 때까지도 그는 촛불을 제때 끄기 위해 깨어있다. 두 시간, 수면시간과 같이 초의 높이가 줄어든다. 지우스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유유히 나견의 얼굴을 살핀다. 꿈이 다시 그에게 말을 거는지 미간에 걸친 주름은 채 펴지지 않는다. 그 날 밤 따라 숲 전체의 하나뿐인 광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그들 방 안의 불. 밤의 홍수에 잠긴 듯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밤을 밝혀주는 빛이다.
보잘 것 없을 지언정 그것이 잠든 이의 꿈 속을 비추어낼 수 있다면.
나견은 몇 밤을 더 그를 찾아갔다. 지우스는 하던 일을 접고 그의 곁에 누워서 자는 일이 갈 수록 허다해졌다.
-내가 너구리의 조에서 구를 걸 알고 있었지?
-…
아니라는 대답 대신 돌아오는 침묵은 나견이 느끼기엔 다소 뻔뻔한 것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쉬라고 뺀 건데.
전혀 그런 얼굴이 아니군..
훈련량이 줄었음에도 나견에게선 퍼석한 기색이 가시지 않고 밤마다 그를 찾아오는 것도 전혀 줄지 않았다. 그는 약간은 순수한 호기심에서 우러나와 묻는다.
-약하다는 건 알았지만, 난 정확히는 몰랐다고 했잖아…. 어떻게 너구리를 쫓아 다닌거지? 견습이고 상대를 유인하는 미끼이니 못 따라갈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끝까지 다닐 거라고는.
네가 나견인줄 몰랐으니까, 하는 사잇말은 삼켰다.
-그런데도 넣었단 말이야?
그걸로도 증명이 안됐다고 말하고? 당신이 돌려보낼까봐 나는…
나견이 고개를 푹 숙인다. 기린에겐 그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게 된 날이기도 했다. 정체를 들킨 걸로도 모자라 부상에도 싸우도록 밀어 붙였던 것이 내심 남아 있었나. 견습이나 기사들과는 다르다. 그의 행동도 마음이 작용하는 법도 그를 다루고 마음을 사는 방법도 전부. 어디까지 그를 받아줘야 하는 건지는 지우스에게도 모호해져 이불에 얼굴을 묻고 잠시 눈이 깊어진다.
-신입 시절에,
다정한 목소리. 과거를 더듬는 말투. 비슷하지도 이해할 수도 없는 나견과 지우스의 업은 같지 않다.
-막 기사가 되었을 때, 다친 걸 숨기는 버릇이 있었지. 힘은 약한데 사령관 노릇이라도 하려면 다치더라도 어떻게든 괜찮아야 했어.
-허세네요,
-뭐?
-아니, 말이 헛나왔..
-그때 숨긴 부상들은 대부분 흉이 졌지. 수도로 돌아간 뒤에 패혈증으로 두 번이나 죽을 뻔했고. 한 번은 옷 아래에 감췄는데 피냄새가 진동을 한다면서 동료가 붙잡더라고.
이불에 덮힌 그의 몸은 체격과 어우러지지 않게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단단하다. 그러나 나무의 튀어나온 수목이나 힘줄처럼 그에게도 몸에 새겨진 자국이 있었다.
-하도 통증을 참았더니 아픈 줄도 몰랐던 거야. 기사복 밑으로 피가 줄줄 흘러내렸는 데도. 그때 정말 기사일을 하다 언제든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실감이 났어. 이미 결단을 내렸는데도 새삼스러울 적이었던 것 같군.
그는 말을 멈추고 나견에게로 눈을 돌린다. 너는? 복수가 막상 부딪혀보니 네게 겹던가? 무언의 물음이 들려온다. 침구 위에서도 입는 검은 목티의 왼쪽 복부 부근에 무의식 중에 손을 올려둔 걸로 보아 그때 파열된 건 비장이었을 것이다. 회상에 잠긴 목이 나직이 소리를 덜어낸다.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 어딘가에 새겨진다면 그건 틀림없이 눈동자겠지. 나견, 네 눈은 평생을 기사와 단련해온 나진의 것과 같을 수 없어. 그래서 너는 나진을 완전히 흉내낼 수 없어. 너를 버리고 나진이 될 수도 없고.
-그럼 제가 대체 어쩌길 원하는 데요.
진지하게 깔린 말투였으나 야광의 번뜩임이 사라지지 않고 나견을 압박하며 주시해온다. 설령 누군가 대신 해준대도 나견은 스스로의 손으로 복수를 해야만 했다.
-나도 대신 해줄 마음은 없어. 그냥, 너도 알고 있으라는 얘기야ㅡ. 난 네 붉은 눈에서, 도저히 나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보니까.
형형한 금안과 마주치고 오래 눈싸움을 겨루다가 먼저 고개를 숙인 쪽은 나견이었다. 그러나 포기한 기색이 아니라 받힌 이마를 타고 내려온 머리칼 사이 눈은 날을 세우고 있다. 그 말들은 나견안에 침잠해있던 분노를 불러 일으킨다. 고리타분하다며 평소와 같이 넘기지 못한 것은 그가 원하던 말이 아니어서였나. 그의 눈빛을 저가 받는 것에 소년은 노기를 참을 수 없어서 분통을 터트린다.
-언제는 나약하다면서.
-그래,
-봐주지 않을 거라면서.
-그래, 그런 말도 했지.
-나보고 나약하게 굴라는 건가? 이제와서?
쏟아내어도 화는 풀리지 않았다. 물음의 상대가 잘못된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다.
-…나견.
누구보다 복수를 부추기던 그가 그런 말을 하다니. 갑자기 그를 말리고 싶기라도 했느냐고. 나견은 애먼 그의 목티를 잡고 늘어질까 하는 충동이 들었으나 관두고 돌아눕는다.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그 주 내내 찾아오던 나견의 발걸음은 그 밤을 기점으로 뚝 끊어졌다. 창문 옆에 기대 커튼을 살짝 젖히자 바깥에 잔뜩 배긴 어둠이 유리창을 통해 방 안으로 든다. 모든 것이 한 끗의 오차로 어긋나는 세계에서 지우스는 창유리 표면을 따라 손을 미끄러트린다. 마치 아구가 맞지 않는 부속처럼. 어째서 자꾸 어긋나기만 해야 하나. 불면과 악몽의 경계는 이토록 모호한데도 그들의 사이는 너무나 뚜렷하다.
불면을 옮겨 갈 수 있다면. 섬세하고 예리한 메스로 등분된 그의 악몽과 자신의 꿈 없는 잠을 합쳐 반씩 갈라서 가질 수 있다면. 달 그림자의 경계처럼 두 편으로 나누어 보이지 않는 부분이 보이는 부분을 잠식하는 상현으로 메울 수 있다면, 지우스는 기꺼이 자신의 불면을 그와 나눴을 것이다.
그 달은 그저 바라는 수 밖에 없도록 멀리에서 기우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라고. 검고 거친 위난의 바다가 고요하게 떠오를 때까지 함께 머물러 줄 수 있다고. 단순한 사실을 그가 알아주길 원하는 일방향의 바람이다.
똑똑,
나무문을 울리는 소리가 유독 선명하다. 내심 기다림에 보답이 반갑기라도 한 건지 지우스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침착히, 그러나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연다. 깨어계셨네요, 나견은 문간의 그를 스쳐지나가며 건조하고 사무적으로 중얼댄다. 불 하나 켜지 않은 어둠에서도 둘은 익숙하게 자리를 찾아 눕는다.
-…잠이 안 오나?
…
악몽은?
-요샌 잘 자는 데요.
생각보다 떨떠름하게 말이 나온다. 지우스는 모자가 없는 카키색 머리칼을 팔로 괴었고 나견은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애초에 매일 밤 같은 사정 때문에 그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말한 적도 없었지만 눈짓 하나까지 그를 알아채는 기린에게는 무언가를 고할 필요도 없다. 그가 나진이 아니란 걸 알아차린 순간도 마찬가지고, 정도가 지나친 관심과는 다른 것을 이미 관찰력 좋게 표정으로부터 읽어낸 뒤였다.
-그럼 왜 온거지?
-말했잖아요. 당신은 가끔 생각이 너무 많아.
그러고는 말이 끊긴다. 나견의 붉은 눈이 지우스와 마주친다. 시선이 공명하듯 울린 정적 속에서 지우스가 입을 맞춰온다. 따뜻한 숨이 겹치고 자신의 위로 올라타는 무게를 느끼며 금안이 감긴다.
+
진아… 진아…
…견,
-진,… 나진,
… 견… , 이봐, 견습,
실제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이 번뜩 든다. 나견은 어깨를 뒤흔드는 거친 손에 눈을 뜬다.
-눈 떠.
-… 닭님?
어두워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음성이 들리는 쪽을 향해 읊조린다.
-무슨 잠꼬대를 그렇게 해. 너 그러다 큰 일 나?
-….
몸을 일으키다 갑작스레 찾아온 현기증에 관자놀이를 짚는다. 시야가 서서히 주변에 적응한다. 망토까지 둘러맨 새까만 닭이 그무레한 암흑 속에서 그를 내려다 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알고 있었다. 이 사람.
-기린한테라도 가지. 얘들이랑 자느니 그 편이 낫다고 보는데.
-저도 그건 아는데요…
-아는데 왜?
-…갈게요.
토를 달던 나견은 군말을 덧붙이는 편이 복잡하리란 걸 깨달았고, 여기서 밤새 무시무시한 새까만 닭의 주시를 받는 것보다 그의 말이 옳다는 걸 인정한다. 찾아갈 곳이 있는 건 좋은 일이다. 칠흑 속을 돌아보니 새까만 닭은 천천히 일어나 걸어가는 그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있었다.
2.
상현의 반구가 낮은 곳에 걸려 비스듬이 하늘을 향해 차올라 그들이 머무는 동굴 주위를 밝힌다. 천장과 벽과 문을 대신하는 자연은 나견에게는 낯선 것이고 용에게는 어그러짐 없이 지극히 조화로운 환경이리라. 입구의 어른거리는 빛을 보던 나견은 약간의 추위를 느껴 옷자락을 여민다. 불침번은 필요하지 않았다. 잠도 필요하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도 주변에 다가오는 기척을 알아채는 용은 어느 의미론 유용한 존재다. 마른 모포를 두르고 적당히 잠잘 자리를 골라내던 나견은 문득 스친 의문을 카멜시아에게 묻는다. 바위에 비스듬히 기대고 누운 용은 그가 하는 양을 신기하다는 듯 관찰하던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잘 때도 들을 수 있나요?
내 꿈도 전부 볼 수 있는 건가? 불쾌한데.
-… 그래, 듣기도 한다네. 또렷하게 생각을 하지 않아도 뇌는 계속 돌아가니까. 예를 들면 꿈을 꾸는 게
-어느 정도 입니까?
-뭐?
예상 외로 돌아오는 관심에 카멜시아는 당황한 소리로 되묻는다. 멀리서 구슬프게 우는 산짐승의 소리가 울려온다.
-당신이 들을 수 있는 범위. 생각이 들리는 범위 말입니다.
하나하나 설명해줘야-
-그만.
절로 편두통이 지끈이는 관자놀이를 잡으며 카멜시아가 그의 생각을 멈춰 세운다. 나견이 그런 그를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쉰다. 나견의 독백들은 이토록 짧은 시간에 그가 보아온 어느 사람들보다도 그의 골치를 아프게 했고 인간들의 거짓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목적의 기류를 띠고 흐른다. 그러나 다음 물음은 드물게 주어진 직전의 관심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더욱 평소의 범주를 넘어서있다.
-시끄럽지는 않나요?
-뭐?
인간도 아니면서, 정작 자기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견은 속으로 또 그를 몰아세우면서도 딱히 대답을 구하지는 않는다. 마치 인간에게 아량을 베푸는 용의 태도를 흉내 내듯이 오랜만에 보여주는 관심이자 집중이었다. 초반의 그들 사이를 채우던 경계와 의심을 젖히고 나견은 그가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에 빠르게 익숙해져 갔다. 반면 수 백년을 살아온 그는 어째서 이런 보잘 것 없는 인간 하나에 연연해야 했고, 속을 알 수 없는 푸른 늪 같은 그의 머릿속에선 어떤 것들이 돌아가는지 종종 궁금했을 뿐이다. 당신. 인간을 싫어하잖아.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스스로 주박을 풀어달라며 낮은 입장을 자처했지만 카멜시아가 겪어본 관계란 내내 그런 식이었다. 위치를 빌미로 철처하게 굴욕을 주거나 길들여지기를 강요하는 이기적인 타산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을 곤란하게 하는 악의는 카멜시아가 하는 작은 복수였다. 짧은 세월을 사는 인간이 무한한 가능성이라는 기회를 마주한 순간 인간성을 드러내고 방만하게 구는 것은 우습기 짝이 없다. 그에게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어 안달하는 도깨비는 강력하고 무시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견이 그에게 주어진 우위를 휘두르는 방식은 도깨비와는 또 다른 것으로, 그는 그 기회를 무시해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존재라면 스스로 하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존재를 들여다보는 내 능력이 어느 정도의 소모를 동반하는 건 사실이지. 그러나 익숙해질 수 있는 종류의 소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소음이 있지. 보통 인간 군상의 소음은 내게는 전자에 속한다네. 완전한 고요같은 사치는 바라지도 않네. 그러나 후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카멜시아는 흘끔 나견을 바라본다. 자기에 관한 생각엔 유독 예민하다 하던가, 나견은 그를 놀리려는 듯이 고요하게 흔들리는 벽안에서 눈을 돌렸다. 언젠가 보았던 수정바다의 장면이 잔잔히 머리에서 맴돌며 문득 추위가 올라온다.
-본체로는 진짜 못 변하나요? 좀 추운데요.
반사적으로 생각을 읽던 카멜시아가 그 의도를 알아채 눈썹을 치켜올리고 멈칫한다. 동굴 안은 암석과 종유석의 응달이 내뿜는 서늘한 기운에 바깥보다 기온이 낮았고 나견은 변변한 망토 하나 가진 게 없었다. 추적을 경계해 불을 피우지 않았지만 카멜시아의 체온이라도 있다면 빌리고 싶은 밤이다.
-미안하군. 아마 언젠가는 되겠지만 지금은..
쓸모 없어.
거대하고 포근한 지상동물을ㅡ파충류인 용은 부드럽지도 따뜻하지도 않겠지만ㅡ 통해 체온을 보존했다면 좋으련만 따뜻한 수면을 취하기는 그른 셈이다. 용이 잃어버린 신뢰를 다시 찾는 여정은 험난하고 무능하다는 낙인은 이런 때조차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가까이 붙을 것을 물었지만 파충류의 체온은 실온과 별 차이가 나지 않으니 나견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수정바다를 떠올리는 중이다.
-뭐든지 청이 있다면 들어줄 테니 말해보게. 더 묻고 싶은 거라던가. 그대가 여행이라 부르는 건 동대륙이고 서대륙이고 가보지 못한 곳이 없네. 묶이기 전까지는 짧은 기간이나마 내게도 자유롭던 시절이 있었지.
용은 담담하고 내키는 대로 던져보라는 듯이 말한다. 원하는 때에 잠을 잘 수 있는 나견과 달리 죽 깨어 밤을 보내야 하는 그에게 담화라는 건 나쁘지 않기 때문인지 속내는 인간의 욕심을 또 재보며 나견을 흔드는 건지도 알 길이 없다. 그가 정말 원하는 게 있다면 죽은 동생을 살리는 것이고 차선은 이미 선택한 후였다.
-그대는 늘 그를 생각하지... ㅡ누가 참견해 달랬나ㅡ 쌍둥이를 잃은 것은 하나의 운명일세. 많은 갈림길 속에… 다른 누군가의 의지가 둘 사이를 개입하기를 선택했고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네. 그게 그대 것인지 그대의 쌍둥이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본래는 그대의 것이었을지도 모르지. 확실한 건 그가 그대의 운명을, 그대는 그의 운명을 대신 할 수 있다는 것이네.
유감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내는 용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은 미안스러워 나견은 도리어 어이가 없어진 채로 무슨 상관이냐고 묻고 싶었다. 평소라면 용은 그가 무슨 생각을 읽어내든 필요한 것이 아니면 티를 내온 적이 없던 터라 그동안 말하고 싶은 것을 참아온 모양이지만 그의 쌍둥이 운명론 따위는 참고할 거리도 되지 않았다.
그의 붉은 눈은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고 마지막 말은 또 흘려 들었다. 길어진 말 가운데 그의 폐부를 찌른 것은 나진이 그를 대신해서 칼에 맞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한 마디다. 카멜시아는 빤히 바라보아도 감정을 읽기 어려운 얼굴을 보며 그저 반쯤 비쳐든 월광을 지고 손 위에 턱을 괸 무표정에서 악의와는 또 다르게 아연질색스런 것을 포착할 뿐이다.
차라리 그 읽는 능력을 내가 가졌으면 좋겠군.
-뭣,
아. 이건 안되는 건가. 그럼 그렇지.
-그대는 친절을 받아들일 줄도 모르나?!
어지러운 반발 뒤로 나견은 꽁지머리에 묶고 자신을 꼭 닮은 얼굴을 떠올린다.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제안이 나견으로서는 진심으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불멸에 가까운 존재가 고작 들어주는 소원 치고는 소탈하다 못해 엉뚱하다. 그런 구석에서 나견은 그가 인간이 아니란 걸 실감한다. 시릴 정도의 사파이어 색의 눈이나 희고 고운 얼굴에 과연 그 역시 피도 푸른 색인 걸까 궁금함이 인다.
나견에게 흐르던 무수한 생각의 흐름들을 쫓아가던 용에게 이윽고 그가 입을 떼어 말한다.
-용은 재앙입니까?
-뭐?
-당신이 그때 그렇게 말했잖습니까. 정령들의 신음소리가 들린다고.
카멜시아가 보인 것은 나견이나 도깨비 개인을 향한 것이라기 보단 인간 전체를 향한 혐오와 불신이다.
-나 역시 인간에게 복수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 나를 최초로 도깨비에게 팔아넘긴 인간… 그러나 그는 이미 흙이 되어 돌아간지 오래. 세월이 흐른 만큼 내 감정도 무뎌졌네…. 왜. 내가 힘을 되찾으면 인간에게 복수를 할 것이 두려운 건가?
두렵긴 무슨.
자동적으로 들려오는 시비에 카멜시아는 잠잠히 말을 정정한다.
-걱정되는 건가?
걱정 같은 소리 하네.
그러나 그것은 나견이 품은 것과는 본질적으로 같지 않다. 용이 위해를 가하고 생명을 앗아가는 대상은 복수 같은 감정과는 무관하다. 그가 발로 밟은 것의 생명을 앗거나, 주거나, 생명에게 유달리 긴 삶을 부여하거나. 모든 행동들은 용들이 생각한 법칙 안에 있고 그들 자신 또한 그 속에 속한다. 마음을 읽는 권능을 가지고도 사람에게 속는 카멜시아는 나견이라면 취하지 않을 방식으로 사고해, 그가 인간에게 증오를 품은 용이며 그 면모가 악한 성향을 가지기까지 하더라도 결과가 대상에게 악으로 돌아올지, 선으로 돌아올지는 알 수 없다.
카멜시아가 차차 깊이 갈라진 틈새를 들여다 보듯 그에 대해 오가는 생각들이 자신에게 흘러 들도록 둔다. 나견은 강한 의지를 가진 인간이다. 그리고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꺼지지 않고 달아오르는 분노다. 애정, 우정, 연정, 희락, 슬픔, 비애, 분노, 증오, 공포, 욕망, 염려, 연민... 어떤 감정이던지 인간은 하나의 것을 마음에 품으면 죽음으로 이끄는 상황에서도 놓지 않을 정도로 강렬하게 집착할 수 있다. 또한 동시에 살아갈 동력이자 인간이 지닌 생명력의 원천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하였는데 음식과 물과 잠 없이도 살아가는 용은 자연의 생명력을 언제나 주고 받았지만 인간은 아니었다.
-인간의 감정이란 고약하군. 한없이 이어져 자신을 전부 연소할 때까지도 그렇게 감정에 매달릴 수 있는 존재는 인간 뿐일세.
… 이 복수는 나를 위한 것이니까.
용의 집착이란 나견의 것과는 달랐기에 그는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는다. 틈을 비집고 나오는 질척하고 음습한 사유들이 동굴 입구의 반댓편보다도 더 깊은 수렁을 가득 채운 냄새가 풍긴다.
-… 복수가 끝나면 그대는 무얼하고 싶나?
이 복수는 나와 너. 모두를 위한 것이니까.
그가 분노를 하는 순간까지도 쌍둥이인 나진의 연기가 아닌가. 카멜시아는 이따금 궁금했지만 그의 연기를 완전히 벗겨내는 건 역부족이다. 그건 용인 그조차도 간파 할 수 없는 진득하고 괴로운 바닥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가 이대로 죽으면 용은 어떻게 되는 걸까.
-자네도 나름 인간이라고 죽음이 두려운.. 아니, 그건 아닌가 보군.
카멜시아는 실수했다는 듯이 체념한 표정으로 바로 말을 정정한다. 표정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두려움 탓에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도깨비는 나견이 없다면 머지않아 그를 먹는 방법을 찾아낼 터였다. 그러나 나견의 단단한 내면이나 정신이란 어쩌면 카멜시아보다도 더 강한 것으로 쉬이 두려움을 품지 않은 까닭도 거기에 있음이 함께 한지 오래 되지 않은 카멜시아에게도 선명히 느껴졌다.
-글쎄. 몇 백년 만에 날 주박에서 풀어준 그대 같은 이를 금새 찾는 건 무리일테고. 도깨비가 원하는 바를 이루는데 앞으로 또 그만큼이나 걸릴 것 같진 않군. 결국 내 운명도 그대의 명운에 맡긴 셈이지. 그대가 목숨을 잃는 날엔 머잖아 나 또한 같은 일을 겪을 걸세.
-다른 방법은요.
-그를 피해 도망가느니 그대의 도움을 받는 편이 낫네.
-제가 죽는다고 해도요?
복수를 이루지 못한 채 죽는 것. 나견의 복잡한 사고 어딘가엔 항상 그 가능성에 대한 불안이 존재해왔다. 감정이 깊기에 인간은 서로 깊이 공감할 수 있고 다른 이와 이해를 이루기도 한다. 감정의 주파도 진폭도 훨씬 미미한 용으로서 그가 나견을 온전히 이해하거나 공감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두운 불확실 속을 헤치면서 이제껏 나아온 그가 혼자 스러진 자신의 시체를 상상한 일이 없지는 않을 테지. 그의 형제는 그 비참한 이를 묻어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디까지고 동반하는 자의 존재를, 목숨에 관하여선 그들이 하나로 묶여 있다는, 나견에게도 카멜시아에게도 이전에 자명해진 사실을 구태여 확인하려는 그 속내를 모르는 것도 아니다.
나견의 유일하게 인간적인 부분은 역설적이게도 용인 카멜시아 역시 이해하는 부분으로, 그런 면에서 그의 욕망이란 건 인간보다는 용을 담은 것이구나 싶다. 그는 여타의 인간과는 다른 무상함을 지니고 인과의 밖에 머물렀으니. 눈 앞에 자연의 장대함이나 위대한 진리를 품은 존재를 두고도 소박하기 짝이 없는 소명에 몰두하는 것은 그에게는 더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카멜시아와 함께 둘 모두의 삶을 연장하도록 이끄는 구나.
카멜시아는 눈을 접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눈을 피하지 않는 나견이 이번엔 진심으로 어이 없다는 듯이 그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걸 위로라고. 나진이 살아있다면 그도 이 밤 어딘가에서 자신을 애타게 찾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진아….
나견은 조용히 소리를 내어 동생의 이름을 부른다.
작은 구멍을 통해 안을 살피듯 천천히 돌아가는 나견의 사고를 읽던 카멜시아는 유래없이 깊이 그의 존재를 들여다 보는 중이었다. 그는 아까부터 읽히기 전에 몇몇 생각을 얼른 털어버리곤 했지만 아마도 이 환경이 그의 감수 어딘가를 자극한 것인지 계속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내용이 있다. 찰나의 순간을 잡아 채는 데 성공하자 그는 그 정체를 파악하고는 어느새 송곳니를 드러낼 수 밖에 없었다.
견이라고 불ㄹ…아니 됐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견,
-읽지 마세요. 못 들은 걸로 해.
싸늘한 지적과 함께 한 손이 카멜시아의 입을 턱, 덮는다.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닌데. 바보 같긴.
카멜시아가 손을 깨물려 입을 벌리자 바로 손이 치워진다.
-으, 더러워.
으, 더러워.
묻은 침을 대강 옷자락에 닦아내고 질색이 서린 입술이 양 옆으로 얇아진다. 아하, 그렇군. 카멜시아에게 짧은 생각이 다시 흘러들고 자잘한 무늬가 새겨진 눈꼬리가 휜다. 나견에게는 그 호명에 어떤 환청을 함께 들었다.
-견아.
그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고 멈추자 카멜시아는 표정을 보고자 가까이 다가간다.
-이거 맞… ㅈ…
-부르지 마요.
말을 맺을 새도 없이 카멜시아의 옷 앞자락을 힘을 준 손가락이 붙든다. 적어도 용이 들어줄 수 있는 소원 하나를 그도 이토록 가지고 있는 것은 묘하다. 카멜시아는 드물게 그가 표정을 짓고 있다는 직감에 얼굴을 살피고 싶은 마음이 인다. 그것은 욕망 비스무레한 것이다. 복수나 분노에 젖어낸 창백하게 질린 낯이 아닌 다른 감정을 담은 모습을 그는 본 적이 없다. 대체 얼마만에 불린 것인지는 그 자신도 알지 못할 호명의 감정은 늘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내 혈육이나 복수에 관한 일들 만큼이나 잊히지 않고 떠돌며 기억 한켠에서 놓아버릴 수 없는 미련이다. 밀어내지도 섣불리 놓지도 못한채 다만 그를 꽉 쥐고 있는 손과 같이. 간격 너머로 느껴지는 온기인 동시에 나견도 처음으로 알아챈 용이 가진, 아마도 한낮에 데워졌을 체온은 나견과 마찬가지로 밤과 함께 점점 식어 내려가고 있다. 그들이 머무는 동굴엔 여전히 얼음장 같이 벌어진 동공만큼이나 시린 한기가 들어차 있다. 그 추위 안에서 수정바다나 동생에 대한 생각들을 떨쳐낼 수 없는 밤. 그런 밤에는 이름이 도리어 존재를 붙잡기도 한다.
-견아.
이름 몇 글자를 내는 일이야 기실 어렵지 않아 망치로 두드리듯 정적이 깨어지는 소리가 굴의 벽을 타고 귓가를 울린다. 특히나 눈 앞에 두고도 찾을 수 없는 이의 것이라면 몇 번, 몇 십번이라도. 그것은 원하는 바를 들어주기로한 약속 이어서라기 보다는, 그 호명의 감각만은 카멜시아에게도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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