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의 기사/기린닭] 어떤 가능성의 이야기
“지금.”
** 투비로그에 23.06.07에 올렸던 글을 이전해옴.
* 잔불의 기사 최신유료분이 121화였을 때 쓰인 글입니다. 따라서, 온고잉과 충돌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 애늙은이 본편과 외전 <투구의 기사>의 내용이 일부 차용되어 있습니다. 모르더라도 읽는 데에 큰 지장이 있지는 않을 겁니다. 아마도...
* 논CP의 기린닭이라고 썼지만, 원하신다면 CP로 말아드셔도 무방합니다. CP탈부착가능(윙크)
* 본의 아니게 담청색 기린 지우스 그리고 새까만 닭 와론에 관한 새 캐해글이기도 합니다. 급발진은 기린이 먼저 했습니다.
* 때문에, 지우스 본인의 사상 등에 대한 팬설정이자 날조가 심합니다. 검토는 안 했지만, 본편 어느 장면과 정면충돌할 수도 있습니다(...)
* 사용된 헤드캐논 : 지우스가 특수2기 인솔기사 명단을 직접 꾸렸다. 선정기준은 힘을 합쳐 싸울 수 있는가. 즉, 사령탑의 지시를 받고 싸울 때 뺄셈으로 작용하지 않는 자들. 더해서 지시 없이 함께 싸울 때 최소한 덧셈으로는 작용할 줄 알아야 함.
* 이하의 툿 타래가 베이스이기도 합니다.
“뭐라고?”
와론은 지금 제가 들은 말을 곱씹어볼 생각을 하지도 못하고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지만 상황이 바뀌진 않는다. 눈앞에 모자를 눌러 쓴 이 발칙한 놈은 흔들림 없는 표정을 하고서 가만히 저를 들여다보고 있다. 이 순간 와론은 역지사지의 입장이 되어 검붉은 하마의 어떤 반응을 이해했다. 제가 허물없이 대하는 유일한 친구이자 선배를. 와, 힌셔, 미안. 내가 남 말할 때가 아니었나 봐. 저에게만 그러는 거지만, 힌셔가 때때로 정녕 요즘 시대의 격기사란 이런 법이냐고 경악할 때마다 그냥 낄낄거리면서 놀리기 바빴는데, 지금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은 당사자가 되어보니 마냥 웃을 일이 아니었다.
“특수 2기 인솔 기사 진에 합류해줬으면 해.”
“다시 말하라는 뜻 아니었다네. 게다가 말 놓으랬더니 재깍 놔버리고 말이야.”
“놓으라며. 그런 예의 차리는 성격은 아니지 않나.”
“와, 진짜 내 앞에서 이러는 애는 네가 처음이다. 아냐?”
“그걸 알아야 할 이유가 있나. 있던 없던 상관 없는데.”
“이거 진짜 한 마디를 안 지네.”
와론은 헛웃음을 뱉었다. 담청색 기린 지우스. 분명 첫 대련 직후에는 꽤 쭈삣거리는 소심한 녀석이었는데, 일 년쯤 알고 지내던 사이에 인상이 많이 변했다. 이건 대체 누굴 탓해야 하나. 눈가가 거뭇하게 가라앉은 걸 보면, 군청색 거북이 놈이 작작 뽑아먹고 있는 건가도 싶다. 기사는 대체로 몸이 좋아 머리를 안 쓰는 녀석들이 차고 넘치는데, 개중 유일하게 두뇌파여서 모든 잡무를 끌어안은 달잔이 써먹을 수 있는 인재를 놀게 뒀을 리가 없다. 심지어는 사상지평에 관한 실험조차 무기한 중지가 된 지금이면 더더욱 거리낌 없이 굴 만도 하지.
‘그리고 달잔 그놈의 직속으로 일한다는 건, 기사사냥꾼을 꽤 깊이 알게 됐다는 뜻인데 말이지.’
와론은 투구 안쪽으로 거리낌 없이 시선을 맞추는 새파란 자미 놈을 요모조모 뜯어본다. 아주 개인적인 사유를 이유로 수도를 떠났다가, 돌연 살아있는 전설(이 호칭을 와론은 대놓고 비웃었다) 검붉은 하마에다 그가 명예롭게 죽음을 맞이했노라고 확언한 회색 족제비 팅크의 시신과 돌아온 저를 보고서도 그 무엇도 캐묻지 않으며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녀석을. 소심한 것치고는 배짱이 있다고 해야 할지, 그냥 얘가 여느 기사처럼 또라이인 건지는 가늠이 가질 않았다. 그야, 제가 뭐, 다른 기사와 가까이 살갑게 지낸 적이 있나. 판단할 기준점이 도무지 없었다.
‘기사는, 싫으니까.’
격기사의 명단에 저 스스로가 있음에도 그 명제는 변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와론은 본인을 가장 싫어했으므로. 그날까지는 그랬다. 이미 제 안은 혼란스럽다. 지나간 모든 전장은 언제나 상처와 약간의 발돋움만을 남기고 미련 없이 훌훌 흘려보내기 마련인데, 와론은 벌써 삼 개월 전이나 된 그 현장을 때때로 되감아서 본다.
망가졌으나, 그럼에도 그 중심이 곧았던 어느 사람의, 기사의 죽음을. 여전히 기사는 싫었으나, 그를 싫어할 수는 없었다. 망가지고 뒤틀린 것은 마치 세상을 등진 목숨처럼 돌아오지 않는다고, 그리하여 ‘기사’가 현행범이 되는 순간 척결하는 것이 옳다고, 그렇게 십여 년이 가깝도록 불변하던 명제에 약간의 뒤틀림이 가해지고, 곧게 나아가던 증오의 선線은 비틀거린다.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있는가. 혹은, 내가 다른 길을 갈 수 있는가.
본래 망설임과 불분명함은 창끝을 무디게 하기에 지난 삼 개월간 와론은 얌전히 기사 회의에 참가한 외에는 웬만한 활동을 삼갔다. 그 사이에 종종 얼굴을 마주친 건 힌셔와 이 녀석뿐이다. 갑작스러운 칩거 선언을 듣고서도 별달리 캐묻지도 않고, 이제 제법 표정을 숨길 수 있게 된 뚱한 얼굴을 하고서 일에 필요하면 불러도 되느냐고 물어서 걷어차 돌려보냈던 게 그때였다.
그걸 멋대로 허락으로 해석한 것인지 뭔지. 뭔가의 준비로 바쁜데 조만간 찾아가겠다고 전갈이 온 게 어제였고, 시간조차 지정되지 않은 싸가지 말아먹은 내용에 얼척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던 게 어젯밤이다. 그리고 해 뜨기 무섭게 들이닥쳐서 대뜸 한 말이 처음의 그것이다. 특수 2기의 인솔 기사. 독불장군으로 한평생을 살아온 제게 누구를 이끄는 일을 해보자는 이 미친 녀석이, 무엇보다, 그 말을 단칼에 거절 못하고 있는 제가 우습다. 생사결을 자주 냈고 거의 모든 삶이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결정을 빠르게 내리지 못한 적은 정녕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회피책을 모르진 않지. 새까만 닭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숨기기 위해 슬금 한 발을 뺀다.
“특수 기수라면 기사에 견습 붙여둔 그 협동작전? 그걸 1기라고 부르나 보네. 정확히 뭘 하려는 건데?”
이걸 물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탓일까. 모자 아래의 그늘에서 지우스의 눈이 조금 동그랗게 뜨인다. 저 표정은 처음 봤을 때의 것과 꽤 닮았다. 곧 그가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내리깐다. 어깨가 조금 움츠러들었고, 사냥꾼이기도 한 새까만 닭은 그 모든 동작과 근육의 긴장을 읽어낸다. 전투의 고양감과는 아예 다른 류의 긴장이었고 꽤 아득한 기억에서나 저런 걸 봤던 듯하여 와론은 곰곰이 기억을 되짚는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기사론. 명예에 관한 집단토론이자 무기만 들지 않았다 뿐인, 어떤 사상적인 전투. 자신에게서 비롯한 말을 자아내는 이들이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기 전에 으레 긴장하곤 하는 모양새가 지금의 기린과 겹쳤다.
투구 안에서 그는 눈을 갸름하게 떴다. 제 물음의 어디가 가치관 싸움의 전조였나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격기사인 새까만 닭은 타인의 주장에 순순히 설득당하지 않기 위한 마음의 방비를 한다. 곧 지우스가 한 글자씩 꾹꾹 눌러대듯 말했다.
“특수 1기의 구조는 갖되, 좀 더 규모를 키울 거야. …그렇게 해서 바꾸고 싶은 게 있어.”
“대체 뭘?”
“오로지 강 대 강뿐인 세상을. 약자는 싸울 수가 없다고 뒤로 밀리는 현실을. 싸워야만 무엇이든 쟁취할 수 있다는 믿음을.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힘이 있음을 증명하고 싶은 거야. 그게 반드시 압도적인 힘일 필요는 없다고.”
와중에 와론은 지우스가 기존의 사고체계를 부수겠다는 대신 굳이 바꾸겠다는 단어를 선택했음에 주목하며 사상지평의 실험이랍시고 행했던 대련을 떠올리곤 속으로 웃었다. 엄청 복잡하게 생각하면서도 터무니없이 단순하게 투명한 놈이다. 동시에 이 녀석이 일반적인 견습의 길을 걸었다면 주변에서 얼마나 괴짜 취급당했을지도 뻔히 보였다. 바닥 모를 힘을 추구하는 기사가 되려고 모인 집단에서 바로 그 추구점을 부정한다? 너 기사 되려고 여기 온 거 아니냐는 소리나 듣겠지. 보면 볼수록 웃긴 놈이고 재밌는 놈이다. 이런 점은 꽤 맘에 든다. 심지가 있는 녀석들은 언제나 환영이지. 지금도 제 쪽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자신의 신념을 부끄러워하거나 무르려는 태도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말이 닿았는지를 확인하려는 기색만 보인다. 입가가 비죽 솟았다.
그리고 동시에, 지우스는 속으론 꽤 초조했다. 가장 밑바닥까지의 포부를 밝힌 것은 동기인 루디카나 파디얀을 제외하면 사실상 처음이다. 기사론 수업 때조차 겨우 빙산의 일각을 꺼내더라도 사방팔방에서 비난과 비웃음을 듣지 않았나. 물론 조금쯤 주눅 들었을지언정 이 길을 걷기로 마음먹은 동기는 결단코 꺾이지 않았다. 다만, 아직 친구들이 아닌, 중견급의 기사를 정녕 설득해낼 수 있을 것인가-그것이 궁금했다.
이미 제 직속상관인 달잔 님을 설득하지 못했음은 안다. 그래도 아주 실패는 아니었다. 특수 1기를 토대로 특수 2기 설립의 허가는 따냈으니까. 비록 논리적인 편법을 사용하긴 했다만, 결과를 내어볼 가능성을 얻었다는 점에서 부분적인 성공이라고 봐야 할 거다. 어쨌거나 신념은 결국 타인을 설득해내지 않으면 실현되지 않으니까. 그리고 모순적으로 그걸 현실에서 증명하는 길이 설득하는 길이기도 하다.
새까만 닭 와론에게 돌연 제 밑바닥을 밝힌 까닭은 다분히 충동적이었으나, 동시에 언젠가는 이럴 날이 왔으리라는 확신도 있었다. 세간에서 떠드는 것과 달리 새까만 닭은 타인의 신념을 함부로 비웃지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의 아주 꼿꼿한 기준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것을 폭력으로 휘두르지 않는다. 기사 사냥을 제외하고. 지우스는 그 기사사냥이란 것이 결국 와론의 어떤 신념에 맞닿아 있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내보인 신념을 그는 비웃지 않으며 진지하게 숙고하리라는 어떤 믿음이 있다. 선입견 없이, 이미 가치관의 싸움을 십 년도 넘게 해왔을 이에게 판단을 맡겨보고 싶은 거다. 내가 내건 깃발은 과연 그럴 가치가 충분히 있는가를. 혹은 이것이 정녕 치기인지를.
그리 오래지 않아, 새까만 닭의 어깨가 슬슬 들썩이다가 아예 몸을 반 접어가며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지우스는 그걸 망연하게 바라본다. 냉소 대신 폭소가 돌아오리라곤 생각을 못 했다. 게다가 투구 안쪽을 쨍쨍하게 울리는 웃음에는 즐거움이 가득하다. 그러니까, 일단, 부정적인 반응은 아닌 거겠지? 어정쩡하니 서 있으려니, 곧 와론이 힉힉 웃음으로 모자란 숨을 채우면서 말을 걸어왔다.
“하하―. 아, 너 진짜 재밌는 놈이야. 미쳐버린 이단아네. 그런데 난 꽤 맘에 든다. 동조할 수 있을 사상인지는 판단 유보하더라도. 네가 정말 그 신념을 지켜낼 수 있을지도 궁금하고.”
긍정적인 반응이다. 지우스는 저도 모르게 뻣뻣하게 굳었던 어깨에 힘을 풀었다. 친우를 제하고서도 누군가에게 닿는 목소리라는 첫 증명은 은근히 뿌듯한 데가 있었다. 그 여운에 젖어있는 동안, 이번에는 새까만 닭 쪽에서 재차 질문을 던졌다.
“하나 더 묻자. 견습 병아리들 데리고 다닐 인솔 기사, 그걸 왜 나한테 제안했냐? 좀 더 그림으로 그린 듯한 고전적인 기사도 있는데.”
“―검붉은 하마 님을 내가 어떻게 오라 가라 해.”
“어쭈? 난 되고? 뭐, 됐어. 근데 힌셔는 그렇게 대하는 거 싫어한다? 나중에 혼나지만 마라.”
지우스는 대충 고개를 주억이며 잔가지로 뻗은 대화를 흘렸다. 새까만 닭을 알아 온 이래, 저자의 화법에는 꽤 익숙해졌다. 본인이 진지한 걸 못 견디는 건지, 아니면 대외적인 모습을 가볍게 꾸미고 싶은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진정성 있게 굴면 그 두 배 세 배로 깃을 부풀리듯 시답잖은 소리를 곁들인다. 그러니까, 아까 대화에서 유의미한 것은 첫 질문이다. 꽤나 진심으로 물었을.
오히려 그건 대답하기 쉬웠다.
“인솔 기사를 고르는 기준은 함께 싸웠을 때 뺄셈으로 작용하지 않을 것. 이게 첫째고. 덧셈으로 작용하면 좋고, 곱셈이라면 가장 좋아. 당연히 어느 정도 이상으로 강해야 하고. 지키면서 싸우려면 웬만큼 강한 걸로는 안 돼.”
“그거 아까 네가 말한 거랑 어긋나잖아.”
“내 삶에서 내가 이루려는 게 아니야. 어떤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은 거지. 그건 이다음에 기사가 될 사람들이 이뤄낼 거고. 어쨌든, 나도 결국 이 시대의 기사니까.”
“허어. 아니, 근데, 기린. 방금 그 조건들, 내 질문에 대한 답이 안 되는 것 같은데? 그게 왜 나냐고. 내가 어떤 기사인지는 이미 알려지지 않았던가?”
지우스는 문득 와론이 그가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음을 부정해주길 바라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대체 왜? 물론 빠르게 흩어낸 문장이긴 했다. 그건 사생활의 영역 아닌가. 여하튼 그가 답지 않은 말로 반론의 꼬투리를 먼저 내밀었으니 기꺼이 물어뜯어 본다.
“남의 판단을 거부하는 게 너 아니던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쓸 위인도 아니면서. 뭐, 이것도 판단이라면 판단이지만, 내가 보기엔 새까만 닭 너는 타인과 함께 싸울 수 있는 부류의 기사다. 내 친구 중에선 곱셈으로 작용하는 애들도 있어서 잘 알아. 넌 함께 못 싸우는 게 아니라, 그냥 함께 안 싸워본 거야.”
“―아, 그래. 기억났다. 그게 너희였어? 괴팍한 견습 무리가 있다고 했는데. 같이 손발 맞춰서 싸우는 애들이 있다고.”
“우리 기수 이야기 맞을걸.”
“거기 머리 잘 돌아간다는 놈이 설마?”
“…아마도.”
“세상 참 좁네.”
곱셈으로 작용하는 기사. 하도 특이한 무리여서 입소문이 좀 났었더랬다. 그걸 새까만 닭마저 들었을 줄은 몰랐지만. 반응을 보아하니 이 말이 나올 때까지 연결을 못 했나 보다. 역시 와론은 사람을 부러 비껴가려고 드는 모양이지. 서로 소문으로 먼저 접했는데, 남의 소문이 잣대가 되지 않는 사람들끼리여서 이렇게 된 듯하다. 이야기가 자꾸 헛돌긴 했어도, 알맹이가 없는 건 아니었으니 담청색 기린은 마음을 좀 느긋하게 먹어본다. 새까만 닭의 성정상, 거절할 거면 애진작 단칼에 거절했을 거다. 스스로 심적으로 뭔가 걸리는 게 있어서 이리 빙빙 돌고 있는 거지, 그의 답은 정해져 있음이 틀림없다.
지우스의 생각처럼, 와론은 서서히 제 안에 추가 기우는 것을 느낀다. 누군가의 가능성을 보려고 하는 것, 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그 길을 닦으려는 것. 그러한 의지를 알게 되었다면 기실 제게 거부권은 없었다. 시간이 닳게 하여 서서히 좀먹힌 누군가의 모습이, 바람에 나부끼는 갈색 머리카락이, 맑은 목소리로 저를 부르며 손짓하던 웃음소리가 되살아난다.
나는 기사가 좋아.
그리고 나 역시 기사다. 그 애가 좋아했던. 이제 드디어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은 건가. 손에 묻은 피를 마냥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고, 그 애를 힘입어 다른 길을, 그 애가 걸었을 법한 미래를 선택해도 괜찮은가. 새까만 닭은 이미 길을 벗어났다가 다시금 되찾은 기사를 보았다. 저에게도 그것이 가능할는지―해봐야 알겠지. 기사사냥 때마다 저의 승리를 점치며 달겨든 게 아니었듯이.
새까만 닭 와론은 한껏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네 사상지평, 내가 원할 때 써주는 걸로 해. 그걸 거래조건으로 소꿉장난에 어울려주지.”
“위악적으로 말하는 버릇은 좀 어떻게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어쨌든 합류 결정은 고맙다.”
“내가 네 말에 머리 숙여줄 거니까 그 정도는 되어야 수지타산이 맞지.”
그 정도까지를 바란 건 아니었는지, 아니면 그 말을 제가 먼저 꺼내서인지 이번에야말로 지우스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와론은 유쾌하게 웃는다. 역시 놀리는 맛이 있어. 아무래도 반신반의하고 있는 모양새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타인의 판단에 기댄다는, 이전의 새까만 닭이라면 결단코 하지 않을 줄타기를 한다. 그 애와의 시절처럼. 이게 무슨 의미인지 세상의 그 누구도 모를 테지만, 와론은 어떤 한 가지 가능성에 걸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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