짱불) 애매하게 길어

저승사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온다면서?

나중에 다시 보자 | 240119


"...아. ...견. 나견."

"으응. 조금만... 아직 밤이잖아 진아."

그간의 일들은 전부 하룻밤 악몽이었다는 듯 언제나처럼 어깨를 가볍게 흔들며 깨우는 나진. 빼앗긴 작디작은 일상이 돌아왔다.

"어서 일어나. 시간 없어."

"왜... 무슨 일인데...... 근데 진아... 혹시 창문 열었어? 좀 추운데..."

"당연하지. 목덜미 훤히 드러내고 돌바닥에 누워있는데 안 춥고 배겨?"

"응...? 왜?"

"네가 머리를 묶고 있으니까."

"그거 말고 내가 왜 돌바닥에..."

눈을 비비며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본 방의 침대, 아니 검회색의 돌바닥.

시야 끝에서 살짝씩 움직이는,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린 그 애의 검은 머리끈.

"왜? 이건 네 거잖아. 나진...?"

혼란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들어 본 그 애는 기억 속 모습과 조금 달랐다. 어릴 적부터 질끈 묶고 다니던 머리는 전부 풀려 턱 끝에서 살랑였고, 밝게 빛나던 눈은 가라앉아 그를 무감하게 내려다보고 있었으며, 그와 이야기할 때만큼은 살짝 들떠있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

차림새 또한 미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검은 목티와 통이 좁은 짙은 흑색 바지, 발목까지 오는 굽이 있는 까만 부츠, 마지막으로 상의 위에 걸친, '도포'라 불리는 동대륙의 묵빛 겉옷.

그럼에도 그는 나진이었다. 나견의 하나뿐인 가족, 나진.

————

그는 나견이 정신을 차린 듯 하자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나견, 향년 스물하나, 아니 이제 스물둘인가? 그대는 782년 1월 19일 자시, 정확히는... 23시 59분. 명을 다했다. 사인은 과다출혈. 심판을 받아야 하니 따라오도록."

"...나진. 진아."

단꿈에서 깬 나견은 그의 도포 끝자락을 떨리는 손으로 붙잡았다. 신기루가 아니다. 손에 닿는, 살아있는 나진. 단 하나뿐인 동생, 나진.

"응. 견아. 괜찮아?"

그는 멈칫하더니 도포를 잡은 손을 맞잡곤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날처럼 나견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라고 할 줄 알았나? 네가 꾸물거리는 동안 지나버린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긴 해? 따라와. 갈 길이 멀다."

맞닿은 손은, 곧바로 떨어진 손은 너무 찼다. 겨울날 쌓인 눈을 치우며 얼어붙었던 그 손보다도 더. 너무나도 차가웠다.

그는 나진이었다. 그래, 그의 모습이었다. 메마른 눈물로 그리던, 매 순간 진실로 그립던.

아아, 언젠가 들은 적 있다. 동쪽의 어느 나라에서는 저승사자가 가장 사랑하는 이의 모습으로 죽은 이를 데리러 온다고 했던가? 어찌 안 따라갈 수가 있겠는가. 그 끝이 지옥의 불구덩이라도 감사히 널 따라야지.

"에휴. 걸음이 그리 느려서야. 가뜩이나 출발도 늦었는데, 하... 잡아."

"어?"

"잡으라고. 손. 네가 뭐 어린애도 아닌데 내가 안고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매 걸음마다 돌아볼 수도 없지 않겠어? 아직까진 없지만 조금만 더 가면 안개가 짙다. 거기서 네가 날 놓치고 막 나다니다가 악귀한테 걸려서 켁. 물어뜯겨 산산조각나면, 언제 그 쪼가리들 싹싹 긁어모아 꿰매고 다시 데려가겠어? 어? 우리 쉽게 쉽게 좀 가자고. 둘 중 하나 골라. 일, 손잡기. 이, 뒷덜미 잡혀서 질질 끌려가기."

"1번. 손잡기."

느닷없이 멈춰 서서 느려터졌네 뭐네 무슨 지랄을 하든 손가락 두 개를 폈다가 검지부터 접어 중지를 보여주든 나견은 좋았다. 얼음보다도 차가운 손을 붙잡는 것, 그것마저도 좋았다. 진짜 나진에게 닿을 수 있으니까. 가짜라도 이 손을 잡고 도착한 곳에서 곧 만날 테니까.

————

오랜만에 쌍둥이 형제와 손을 잡고 걷는 것은 그에게 자그마한 추억을 상기시켰다.

'어릴 때는 내가 먼저 손 잡고 앞장섰는데 이젠 반대네. 내 머리가 저거보다 좀 더 길긴 했지만 나진이 보던 게 이런 모습이었으려나? 가만, 저승사자는 키가 크고 빼빼 말랐다 하던데 진이는 별로 크진 않네? 나랑 비슷한... 조금 더 작나? 아니다 내가 키가 좀 커진 걸 수도'

"뭘 그렇게 혼자서 중얼거려? 정신 사납게."

"아. 들렸어? 하하."

"네 발조차도 안 보이는 거 안 보여? 안 넘어지게 딴생각하지 말고 제대로 걸어라."

"응."

잠깐 추억에 젖었을 뿐인데 어느새 온 사방이 뿌연 안개로 뒤덮여있었다. 이제 보니 키가 작은지 큰지 보면서 가늠할 정도로 뚜렷하던 게 거짓이었다는 듯이 두 발짝 앞도 흐리게 보였다.

'그래도 걱정해주는 거 보면 토라진 것도 조금은 풀렸나 보지? 여전히 틱틱대긴 하지만'

"딴생각하지 말라고."

"이번엔 진짜 입 안 열었는데?"

"...."

"알았어. 아무 생각도 안 할게."

나견은 옅은 한숨과 함께 빼내려는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이번에는 정말 놓칠 수 없었다.

————

조용히 아무 생각 않고 익숙한 듯 익숙지 않은 뒤통수만 따라가다 보니 작은 물소리와 함께 안개는 사라지고 검푸른 강에 다다랐다.

그는 안개가 걷히자마자 손을 탁 놔버렸다. 나견은 아쉬운 눈초리로 잡고 있던 손을 보다 그를 뒤따라갔다.

강 어귀에는 시커먼 나룻배 하나가 동동 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배를 타고 간다. 그전에, 노잣돈. 동전 두 닢이야."

"노잣돈? 난 돈 없는데..."

"아니 있어. 잘 찾아봐."

"이 옷은 주머니도 없는데 돈이 어디... 어?"

품을 뒤지니 있는 줄도 몰랐던 자그마한 주머니가 나왔다. 열어보라는 눈빛에 조심스레 묶인 끈을 푸니 엄지손톱만 한 사탕만 열댓개 들어있고 동전은 한 닢뿐이었다.

"어... 하나 밖에 없는데 어쩌지?"

"그것밖에 없어?"

"응. 동전 한 닢이랑 사탕밖에 없어."

"쯧, 어쩔 수 없지. 그럼 사탕이라도 한 알 줘봐. 동전은 탈 때 배에 던지면 돼."

"알았어."

배 앞에 다다르니 사공은 왜 이리 늦었냐는 듯 아무 말 없이 들고 있던 노로 배 옆면을 두어번 툭툭 두드렸다. 먼저 배에 올라탄 그는 사공의 불평을 무시하고 한손으로 나견을 끌어올려 배에 태웠다. 나견이 발을 디디며 동전 한 닢을 바닥에 던지자마자 닻 없이도 잘만 멈춰있던 배가 스르륵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사람 아니 사람은 아닌가? 저 분은 누구셔?"

저절로 움직이는 배가 신기한 것도 잠시 나견은 조용히 물었다. 그의 물음을 어찌 보면 타당했다. 그들이 타기 전부터 배 위에 노를 들고 서 있던 이는 키가 굉장히 크고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견이야 동대륙 복장을 잘 알지 못하니 그저 '진이가 걸친 옷이랑은 조금 다르게 생겼네. 모자도 신기하게 생겼다. 검은 로브는 왜 두르고 있는 거지?' 정도의 감상만 들었을 뿐이었으나 만약 나륜 님께서 그를 보셨다면 아주 크게 호통쳤으리라.

어디 뱃사공이 감히 소매를 단단히 묶은 철릭에 전대를 두른 무관 차림인 것도 모자라 머리엔 흑립, 그것도 새카만 너울이 달린 요사스러운 것을 쓰고 목에는 녹빛 옥반지를 꿴 은사를 걸며, 하다 하다 철릭 안에는 또 사특한 좌대륙의 목을 덮는 상의에 일자바지, 철로 된 신발, 두툼한 천때기를 두르고 있냐고 말이다. 그래도 본인께서도 전부 흑빛으로 다니셨으니 재수 없게 저승사자인 양 죄다 시커멓다고는 안 하셨을... 하셨으려나?

어쨌든 노를 이리저리 젓는 사공은 나견이 보기에도 사공 같은 차림새는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눈앞의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나진과 비슷했다. 그는 심장께와 발만 빼면 완전히 저승의 암흑과 동화된 사공을 흘긋 보더니 강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알 거 없어. 강물에나 집중해. 이건 '기억의 강'이다. 배를 타고 지나가는 동안 산 자들이 흔히 말하는 '주마등'이라는 현상을 겪게 되지. 네 기억을 내가 훑어보고 점수를 매기면 염라 님께서 그를 토대로 네가 배에서 내리자마자 심판을 내리실 거다."

"으음 검은 물 밖에 안 보이는데?"

"아직 시작을 안 했으니 당연히 아무것도 안 보이지. 너무 기대지 마. 고개 내빼고 있으면 물귀신이 잡아간다. 그럼 어디... 시간이 없으니 이쯤부터."

"그런 걸 마음대로 정해도 되는 거야?"

"군소리 말고 강에 떠오르는 네 기억이나 봐."

먹물을 탄 듯 검기만 하던 강물이 차츰 희끄무레해지더니 누군가의 초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진?"

이제 겨우 두 자릿수 나이가 된 듯한 어린 나진이었다. 밑동만 남긴 채 전부 베인 수십그루의 나무가 만들어낸 하늘의 끝선, 그 앞에 칼 한 자루 들고 서서 맑은 얼굴로 뒤돌아보던 동생, 나진이었다.

"아 이건 넘어가고."

불 타는 마을, 너를 위해서라며 흐리게 웃는 나진, 죄인 취급하는 마을 사람들, 루지안 패거리, 현관문을 여니 보였던 가면무리, 닫힌 문, 그리고.

"가여운 운명이군. 그래도 타인의 생을 훔쳐 살면 쓰나. 죄질이 아주 안 좋아. 감점이 심하게 들어가겠어. 조금 더 뒤로 당겨 보자고."

단단한 노가 그날의 기억을 휘젓는다. 일렁이는 물결이 잠잠해지자 다시 드러나는 새로운 기억. 다섯의 인솔 기사, 첫 대련, 특수 2기, 얼음사막, 수도, 해골, 수정바다, 용의 후예, 도깨비, 카멜시아.

"굉장한 모험담이야. 엄청난 영웅서사고. 자서전 한 편 출간했다면 돈 좀 만졌겠는걸? 더 보고 싶지만 도착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불필요한 부분은 건너뛰자고 어차피 다 아는 내용이잖아? 끝, 끝, 끝. 아 그래 여기다."

또다시 노가 물 속 깊이 들어갔다 나오자 이전보다 일렁임이 심한 기억이 나타났다. 전투 중인 기사들, 아니 그냥 전투가 아니다. ...전쟁?

"맞아. 전쟁 중이었어. 동대륙이 선전포고를 한 지도 반년이 넘어섰고, 해체한 특수 2기마저도 소년병으로 다시 불려왔어. 각기 다른 부대로 파견돼서 싸우다-"

"네가 죽었지. 어처구니가 최강의 방패더라도 모든 걸 막아줄 수는 없으니 말이야. 산탄총. 그래 총. 무서운 무기지. 창보다 멀리서 공격할 수 있고, 검보다 죄책감은 덜하고, 또 그 속도는 얼마나 빨라. 머리나 심장에 맞으면 독보다도 빠르게 죽일 수 있지. 물론 넌 급소에 맞지는 않았어. 그랬다면 과다출혈이 아니라 총기에 의한 즉사였을 테니까."

"진아 "

"거의 다 왔군. 꽉 붙잡아 여긴 바람이 세거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센 바람이 머리를 어지럽히며 지나갔다. 신기한 것은 눈도 못 뜰 만큼 세찬 바람에도 강물은 고요했다는 것이다. 잔물결 하나 일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 더. 폭풍처럼 지나가긴 했으나 언뜻 말소리가 들렸다. 그건 마치 널찍한 큰 광장에서 수십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작게 속삭인 듯한, 그런 작디작은 뭉친 소리였다.

"아까 그거... 그거 뭐야?"

"말했잖아, 바람."

"아니 바람이라기엔"

"바람 맞아. 바람, 소망, 염원. 죽은 것들도 바라는 게 여간 많은 게 아니거든. 한숨처럼 내뱉어진 바람은 너무 가벼워서 계속 떠오르기만 해. 여러 개가 엉킨 채로 말이야. 그리고 바람이 쉴새 없이 분다는 건, 저승에 도착했다는 뜻이지. 이제 진짜 심판을 받을 차례야."

————

배가 뭍에 닿아 멈춰 섰다. 나견은 다급해졌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이 남아있었다. 나진의 삶을 살았음에도 나견은 그들 사이에 조금씩 뿌리를 내렸다. 아무리 완강히 쳐내도 한두방울씩 스며들어 점차 정을 주어버렸다. 그리고 변명 같은 말일지라도 아직 나진의 복수를 끝마치지 못 했다. 나견은 내리려는 그를 붙잡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잠깐만. 안 돼. 안 돼 진아. 내가, 나만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남아있어.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진아 제발. 부탁할게."

"여기서 발만 내리면 바로 저승 땅이야. 그게 가능할 것 같아?"

"그렇지만"

"가능하지. 암 가능하고 말고."

말한마디 없이 노만 젓던 뱃사공이 입을 열었다. 조금 낮은 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왠지 익숙한 것도 같았다.

"원래는 안되지만 저승에도 법이 있지. 죽을 사람을 데리러 갔다가 음식, 옷, 신발 등의 대접을 받으면 대접한 사람의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 너 받았잖아, 음식."

"그럼 사탕이라도 한 알 줘봐."

"...사탕."

"그래 사탕. 사탕은 음식 아니야?"

어느새 나견의 옆까지 온 사공은 잘했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를 쏘아붙였다. 물론 그도 순순히 물러나진 않았다.

"얘는 죽은 사람이잖습니까."

"에이 아직 심판 안 받았잖아. 심판 받기 전이면 죽을 사람이지. 잘못 데려왔다가 심판 전에 돌려보낸 영이 몇인데 아직도 그런 구닥다리 같은 소리를 하고 그래?"

그는 지겹다는 듯 한숨을 푸욱 쉬고는 이어 말했다.

"아니. 하... 애초에 이게 어떻게 대접입니까. 고작 사탕 하나 받은 거 가지고."

"너, 저 사탕 줄 때 마음을 담아서, 너의 정성을 담아서 주지 않았어?"

"네? ...네. 맞아요."

말하는 모든 것이 억설이고 궤변이었지만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나견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그 손을 잡았다.

"봐봐. 마음이 담기고, 정성이 담기면 그게 대접이지 달리 뭐가 더 필요해?"

"아아 진짜.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리고 사공에게 비키라는 듯 턱짓했다.

짤랑-

"그 애한테 꼭 고맙다고 해. 너 때문에 꽤 큰 결심을 했거든."

"네?"

사공은 어깨를 두드려주곤 배에서 내렸다. 그는 바로 앞까지 걸어와 무릎을 굽혀 사공에 의해 앉혀진 나견과 눈높이를 맞췄다.

"하. 이승에 돌려보내 달라. 그게 네 부탁이야?"

"...응."

짜증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그는 돌연 픽 웃더니 이마를 살짝 부딪혔다.

"내가 언제까지 이런 조잡한 연극을 하고 널 돌려보내 줘야 하냐? 언제 제대로 올 거야?"

이마를 뗀 나진은 품 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나견을 빤히 바라보다가 그의 이름 위에 점을 하나 콕 찍었다.

"허 이런, 내가 잘못 봤네. 나견이 아니라 나젼이라고 쓰여 있잖아!"

"뭐 하는 거야?"

"원래 이렇게 해야 해. 보여주기식으로 뭐라도 해야지 덜 혼나거든."

어처구니 없어진 나견이 헛웃음 치자 과장된 손짓으로 이마를 짚던 나진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이제 진짜 시간 다 됐다. 슬슬 일어나, 나견."

"뭐? 그게 무슨 말"

동전을 주워 와 손에 쥐여주곤 배에서 폴짝 내린 나진은 양손으로 나룻배를 힘껏 밀었다.

짤랑-

"잘 가."

————

"허억"

폐가 뻐근할 정도의 들숨과 함께 나견은 눈을 번쩍 떴다.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여전히 영 익숙해지지를 않는 약품 냄새, 탁한 황갈색 천막, 움직이니 찌르르 아려오는 왼쪽 갈비뼈.

'꿈...인가? ...꿈? 무슨 꿈? 꿈을 꿨었나?'

"아."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하며 일어나려다가 아파 작게 신음 소리를 내며 칭칭 감긴 붕대 위를 오른손으로 살짝 잡는 그때,

"...나견?"

"아, 기린님."

천막의 입구를 열고 담청색 기린이 들어왔다. 그리고 나견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대로 주저앉았다.

"기린님!"

"움직이지 마. 괜찮,아. 괜찮으니까."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괜찮다고 웅얼대는 말에도 갑자기 털썩 주저앉을 정도면 아무리 기사라도 큰일이 난 게 아닐까 심각해진 나견이 일어나 앉아 바닥에 발을 내려놓았을 무렵, 다시 한번 천막 입구의 천이 활짝 열렸다. 천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들이닥치는 거친 겨울바람과 함께.

"나중에......보자.

————

나견."

"입 밖으로 새어 나온 간절한 바람은 새로운 흐름을 낳는다. 가느다란 실바람이 얽히고 엮여 긴 꼬리를 늘어뜨린 채 유영하다 두둥실 떠오르면 옥황궁 선녀들이 건져 올려 아리따운 두 여인에게 전한다. 이승의 것은 바리데기의 방울을 울려 저승 곳곳에 달랑 퍼지고, 저승의 것은 오늘이가 전하는 사계절에 묶여 이승 곳곳에 살랑 흐른다. 바람은 바람이 되어 새바람을 불러온다. 조용히 거센 변화 속 불변하는 한가지. 모든 것은 순환하고 언젠가는 흩어져 사라지며 새로이 창조한다. 모든 순간이, 모든 곳이, 모든 것이."

"...뭐해요?"

"의미심장한 장외 해설."

아련하게 떠나간 배를 지켜보던 나진은 자신 옆에 서서 이상한 말을 중얼대는 새까만 이를 짜게 식은 눈으로 흘겨보다 답변을 듣고 크게 한 발짝 떨어졌다.

"뭐라는 거야? 맨날 이상한 소리만 해."

"언젠가 너도 알게 될 날이 올 거야... 이 모든 게 다 헛소리라는 걸. 하핫!"

나진은 세상 모든 진지를 혼자 잡수셨는지 담담하게 말하더니 이내 헛소리라며 호탕하게 깔깔 웃는 그를 식다 못해 죽은 눈으로 쳐다보다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본인의 일거리를 넘겼다.

"심심하면 나 대신 시말ㅅ"

"좋아?"

는 실패했다. 나진은 매일 하는 생각-진짜 뭐 하는 인간이었을까?-을 되뇌며 입을 닫았다가 답을 재촉하는 은근한 시선에 다시 열었다.

"......좋죠. 오랜만에 본 건데. 그래도 덜 봤으면 좋겠어. 나중에. 응 나아중에 다시 딱 한 번만 봤으면 좋겠네요. 선배는 안 그래?"

"나는 강하게 키워서 볼 일 없어."

"나는 뭐 볼 일 있을 줄 알았나."

————

"뭐야? 기린! 뭐하냐? 얘 왜 이래?"

입구의 천을 들추며 들어온 이는 새까만 닭이었다. 그는 입구 바로 앞에 주저앉아 통행을 방해하는 기린을 콕콕 찔러댔다. 나견은 어딘가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 한...

"아. 저거다."

"뭐? 저거? 저어거? 야 내가 너 때문에 무슨"

"감사, 합니다."

"어?"

삿대질하던 닭은 곧바로 들려오는 감사 인사에 머쓱해졌다. 나견은 다시 한번 감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닭님."

"어. 뭐야. 기린이 벌써 말해준 거냐?"

"아뇨. 다른... 분이 알려주셨어요."

"...? 그래."

"좀 치우지?"

답지 않게 몽글몽글하던 분위기는 닭에게 깔려있던 기린이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비키라며 닭을 밀어내면서 곧바로 깨졌다.


외전 올렸습니다.

오늘이, 바리 : https://glph.to/nblmrw

'장외 해설'은 나레이션을 의미합니다. 최대한 외래어를 사용하지 않고자 노력을 해봤는데 아무도 못 알아 보실 듯하여..

↓ 이건 언제 지워질지 몰라요. 그냥 맘에 안 들면 아무도 모르게 없어지는 거임.

머리는 나견이 머리끈 가져가서 못 묶고 다닙니다.

댓글 1


  • 빽끼 창작자

    끝이 왜 저러냐고요? 그냥… 힘 빠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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