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상인가 잔상인가
231125
*잔불의 기사 136 스포
*기린닭 목주와론
1.
투명하고 고요하게 고여있는 호수의 중앙을 꿰뚫어 보기 위해 투구가 수면 가까이로 내리 기운다. 수심이 얕은 호숫가는 어느 지점에서부터 강바닥이 무겁게 가라앉더니 누군가 그 부근에 잉크를 풀어 놓고 간 듯 비취빛으로 물색이 진해진다. 멀리서 대충 구겨놓고 나온 이불의 모양으로 주름진 봉우리들로부터 이곳 물가에 쭈그리고 앉은 와론은 그의 발치까지 다가오는 담수호의 물을 모아 손에 담는다. 투명한 물과 달리 호수는 주변의 산수와 검은 숲들을 짙은 녹빛으로 반사한다. 까만 틈으로 수면에 굴절된 얕은 부근의 자갈 사이를 예리하게 훑다가 프리즘만큼이나 물을 닮은 옅은 오색의 송어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보이지 않은 방음벽이 쳐있는 것처럼 모든 소음이 입을 다물고 있는 호숫가에서 투구를 이고 있는 형상이 수면을 따라 얕게 요동한다.
인생의 무언가를 겪었다고 말하는 것조차 어려운, 너무나 짧은 삶을 영위한 벗. 요절한 이들은 저승을 흐르는 구천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해 반드시 귀신이 된다고 전해진다. 암분으로 인해 청록빛을 띄는 호수에 안개가 살아있는 생명처럼 피어나 어딘가의 민담처럼 허공을 날았다. 와론은 그가 보았어야 할 시야로 오랫동안 세상을 내다보며 그의 죽음을 곱씹다가, 그 역시 같은 광경을 보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다는 걸 심해 해낸다. 어쩌면 그는 죽음을 단지 흉내내고 있을지도 몰라,
그 때의 생을 잃은 것처럼 보였던 건 그가 단지 그의 모습을 버렸을 뿐인데 와론이 그 당시를 놓친 고로 지금도 주변 어딘가에 숨어있는 그를 찾아내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얼기설기 얽힌 투구의 붉은 깃, 달그락, 살아있는 듯 생명의 소리를 내는 판금갑, 혹은 그의 주변에 있던 자연물이나 날카롭게 그 끝이 하늘로 이어진 론누. 끝이 여러 갈래로 갈라진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하얀 머릿칼.
까득 부자연스럽게 도는 투구가 강변의 흙바닥에 바싹 붙어서 피어난 들꽃들을 내려다 본다. 어쩌면 지금 저 안에 깃들어 있을지도 몰라, 너는. 만약 와론이 이 들풀이 속삭이는 언어를 이해할 수 있거나 지금은 잠든 채로 단지 수면 위의 세상을 거울 같이 반사하는 녹색 호수에 낚싯줄을 던져 그 바닥부터 깨울 능력만 있다면, 이곳에 깃들어 있는 와론과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직감이었다.
그는 기억을 찬찬히 끄집어 올렸다. 된바람에 엉키지 않는 매끄러운 밤색 머리, 스치면 베일 듯이 뾰족한 금속으로 된 손가락들이 차례차례 접히던 움직임과 차가운 촉감, 들판에 뿌리를 내리고 단단히 서있던 두 다리.. 흰 금속의 윤택에서 퍼져나오던 그의 아우라가 생각났다. 재미있잖아,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이 금세 웃음을 내뱉곤 하던 투구의 벌어진 입을 떠올렸다. 금속의 이빨 사이로 보이던 또 하나의 눈. 휘릭- 창대를 경쾌하게 흔드는 손으로 창이 그와 한 몸인듯 몸을 휘감고 팔을 타넘던 광경이 생각났다.
와론은 눈을 뜨고 소호를 다시 바라보았다. 겉보기에 변화는 미미했지만 호수까지 밀려내려온 안개가 수면 위를 유영하며 어떤 형상을 만들어 냈다. 아무 인력이 없어 유지되지 않고 매초마다 원기를 잃고 되찾으며 찬찬히 대기를 거스른다. 그는 빠진 동물이 모조리 돌이 되어 밑바닥으로 침전한다는 어느 호수가 떠올랐다. 와론은 세계에게 잊힌 이름 하나와 은하수를 물 위로 건져냈다.
“새까만 닭-! 이동하자-”
멀리서 가야할 때를 알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부름에 다른 대답에 대한 일말의 기대로 몇 초간 굳어있던 새까만 닭 와론은, 미동 없는 담수호를 보고는 등을 돌리고 일어난다. 투구깃이 휙하고 저어지자 보이지 않는 파문을 따라 녹연이 흐트러진다. 약간은 함부로 불리는 이명이 낯설게 골짜기를 메아리친다.
"말해두는데, 이번에는 끼어들 생각 마라."
동행하는 기사는 항변이라도 하고 있는지 대답이 없다. 푸른 색의 옷감 위를 잎사귀를 모두 잃은 나무 그림자의 얼룩만 잇따라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와론은 그에게 기사사냥에 대해서 설명하려 하진 않았다. 약간 뒤에 쳐져서 달리는 기사가 아무 말도 없자 투구를 돌려 뒤를 본다.
"넌 딱히 이들이 어떻게 되던지 상관 없잖아. 도우라고 하지도 않을 테니 그 두 손은 주머니에 얌전히 꽂아 두라고."
그러나 와론이 힐끔 보았을 때 그들은 길 없는 숲의 한참 위를 내달리는 중이었기에 평소에 얌전히 포켓 속에 들어가있던 흰 손들도 막 밖으로 나온 참이었다. 와론은 조용한 그에게 입을 삐죽이며 다시 진지한 톤으로 말한다. 메마른 겨울 숲에 간혹 나뭇가지들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울린다.
“네 어줍잖은 태도를 내게 강요할 생각 마라 기린. 명예를 어긴 기사를 처단하는 게 너 같은 기사들에겐 좀 옛날 방식 같겠지. 하지만 나는 해야겠으니까."
"...여러 명의 기사를 혼자서 상대하겠다니 너는 너무 무모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내가 따라가는 거다."
만일의 무슨 사태. 그는 농담으로 받아칠 기력도 내지 못했다. 대화로 해결하는 거라면 이제 질색이었다.
2.
새까만 닭에게 그가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이유는 많지 않다. 적어도 대다수는 새까만 닭에게 의미 없는 이유들로 오히려 신중을 기하는 편을 높게 사주리라는 것은 지우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도발과도 같이 와론의 앞을 막아나선 기린의 두 손에 차가운 피가 돌며 손 안의 공기가 강하게 마찰한다. 검푸른 옷자락을 걸친 하얗고 기다란 손날이 예리하게 기운다.
“네가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면 내가 하도록 하지. 새까만 닭,”
와론이 기사에게 정면으로 얻어맞고 터진 옆구리를 붙잡으며 몸을 숙이자 투구 밖으로 점성을 띤 피가 지이익 길게 흐른다. 모여든 손으로 빨려 들어가는 바람이 치마를 잡아당기는 광경이 선명하다. 기대와는 달리 지우스의 검고 달라붙는 재질의 소매는 뒤에서 꽈아악 힘을 주어 붙드는 손아귀에 꺾일 듯이 잡힌다.
쿨럭, 한 차례 투구 밖으로 튀긴 피가 벌겋게 입가 부근의 구멍에서 넘쳐나와 하얀 목으로 타고 내린다.
"왜지. 너는 되고 나는 안되는 이유라도 있나?"
그들의 앞으로 군데 군데 날이 나간 대검에 기댄 청발의 기사는 금방이라도 무기와 함께 무너질 것 같았고, 뒤에 쓰러진 이는 이미 의식이 없는 건지 숨이 끊어져 움직이지 않는 건지 모호하다. 공기가 날선 긴장으로 얼어붙자 떨리는 기사의 호흡에서 흰 김이 새어나온다. 두 진영 사이의 기류가 죽음과도 같은 추위를 품고 점점 메마른 땅으로 떨어진다. 이윽고 땅에 닿았을 때 수증기가 하얀 눈송이가 되어 흩어진다. 그러나 온전치 못한 둘 외에 아직 멀쩡하게 서있는 기사가 상대편에도 있었고, 이 편 역시 마찬가지지만
그건 새까만 닭은 아니다. 그를 수세에 몰아넣은 상대가 벽과 같이 단단히 버티고 서서 부상을 입은 닭의 긴장이 풀리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내가 네 기어스를 눈치채지 못했을 것 같나, 기린?"
"그건 그냥 기어스일 뿐이야."
지우스를 떠미는 손은 무거웠으나 옆구리를 감싼 반댓손이 추위로 질린 것인지 그 와론조차 피가 모자라서인지 붉어도 여전히 희어 보인다. 투구의 양쪽 밖으로 뱉어낸 모든 숨이 빠르게 식는 추위 속에서도 열을 내듯 상처에서는 피를 점점 더 많이 쏟아낸다. 지우스는 와론이 싸울 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한다. 이 상황에서 싸우는 건 완전히 자살행위다.
"신입시절 네가 보여줬던 것들은 다 거짓인가? 아니면 너 역시 변해버렸나? 담청색 기린."
대답, 무거운 목소리가 거친 바닥을 쓸었다. 말투에는 지독할 정도의 자조와 어쩐지 애절함까지 어려있다. 지우스가 삐끗대자 악력을 겨루던 두 손이 비틀려 어긋진다.
"비켜, 넌 지금 내가 할 일을 방해하고 있어."
기사가 되기 이전의 기억은 온전치 못하게 군데군데가 지워져 있다. 애초에 뇌의 해마에서 기록 자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적잖은 충격을 받을 만한 사건을 겪었다기에 일상이나 임무는 데자뷰나 발작증세를 일으키는 일 없이 평탄하게 흘러간다. 특정 주제나 기간 등의 아무 법칙성이 없는 데도 먹물을 칠해놓은 달력 같이 그의 상황과 기억은 맞물리지 않는 톱니가 되어 돌아간다. 서임을 받은 이후로 차차 비워져 가는 그의 이전 기억들은 이제는 언제부터인지도 정확히 가늠할 수 없었고 조각조각난 파편들을 기워서 사용했다. 그라는 존재는 대부분이 가위질 되어 있었다. 지우스라 불리는 그가 확실하게 기억하는 건 그의 이명, 능력, 그리고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켜야 할 조건인 기어스 정도다. 스스로의 예리한 두뇌로 격기사 담청색 기린은 사라지지 않는 세 개의 사실을 붙잡으며 치밀하게 그가 기억하는 껍데기를 연기해내야 할 필요를 복기했으며, 치명적인 약점이나 다름없는 제약을 노출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기사들간의 암묵적인 태도에서 읽어낸 것이었다.
그는 약간의 계략을 부려 정면 승부에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두 손은 언제나 얌전히 기사복 포켓에 넣어두었다. 대다수의 상황에서 기사들은 자신이 한 발 더 나서야 하는 상황을 명예롭게 여기고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그의 지시를 받는다는 인식조차 거의 없었다. 그 틈에 지우스는 주머니 안의 손을 천천히 접어보며 기사들을 관찰했다. 그는 기억에 대한 위험부담을 스스로 감수하면서도 어떤 상황이 와도 남에게 기어스를 털어놓는 정신 나간 짓은 하지 않았는데, 말하자면 담청색 기린 지우스는 어느 누구도 진심으로는 믿지 않는다.
손가락의 틈새로 자꾸만 잃어가는 생기에 신경을 빼앗긴 찰나 와론이 그를 잡은 어깨를 크게 회전한다. 마지막 말은 귓바퀴를 쓸고 지나갈 정도로 낮게 속삭인다. 지우스가 그의 몸이 얼마나 투척에 최적화 되어 있는지를 실감하며 뒷편에 자리를 잡은 두 기사를 염두에 둘 때 사각의 궤도에서 날아온 론누가 시원하게 기사의 몸통으로 날아가 박힌다. 비스듬히 깊게 가슴팍을 뚫고 나온 창 끝을 보며 기사의 몸이 얼마나 단단한가로 생각이 옮겨갔을 때즈음 와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는 무시된 채 공수 자세를 취한 기사가 거리를 순식간에 좁힌다.
한 번의 합을 주고 받는 새 재빠르게 망토를 잡으려던 와론의 손을 벗어난 기사가 발차기에 정타를 맞고 비틀대며 검은 몸통에 등을 들이받는다. 그걸 피할 만큼 날래지 못해 와론이 뒤로 거세게 밀리자 동시에 기사가 무기를 고쳐 쥐고 앞으로 뛰었다. 검을 후리는 순간 둘 사이로 뛰어든 기린이 검신을 발로 차 검격의 방향이 휜다. 반사적으로 뒷편의 와론을 경계하며 몸을 물린 기사에게 별안간 검고 단단한 팔뚝이 다가와 목을 옥죈다.
"끄윽...컥,"
몸부림을 치며 저항하는 기사가 본능적으로 옆구리의 자상을 겨누었으나 두 팔은 그를 끈질기게 놓지 않는다. 기사의 눈이 뒤집히며 정신을 잃고 목이 꺾이려 할 때였다. 와론은 거칠게 떠미는 충격에 그대로 전력을 쏟았던 중심을 잃고 기사를 놓치고 만다. 기사는 가까스로 땅으로 몸을 날려 거리를 벌리고 벅차게 숨을 내쉰다. 검은 망토와 팔다리를 부둥켜 잡은 기사가 와론의 뒤에서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가!!"
당장이라도 묶인 두 팔을 풀어낼 것 같이 몸을 거세게 젓는 검고 투구를 쓴 기사가 내뿜는 활력은 도저히 치명상을 입은 이의 것이 아니어서 기사는 그 기세에 잠시 몸을 떨었다.
"가라고!!!"
그는 떨어진 검을 주워들며 쓰러진 기사들에게 시선을 던지며 주저하다가, 지우스가 다시 외치는 소리에 분한 표정으로 등을 돌리곤 숲을 향해 사라졌다.
와론은 뒤에서 끌어안은 손을 뿌리치고 론누를 주어들었다.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쓰러진 기사의 쪽으로 다가간다. 론누가 기사의 가슴을 찔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섬칫한 질척임이 쌓이기 시작한 눈 위로 튀었다.
기사의 죽음을 확실시한 와론이 낮췄던 몸을 떼고 피가 묻은 투구를 비틀어 제낀다. 단말마를 내던 육체에서 잔떨림이 멎고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상처 위로 눈이 떨어져 기사는 천천히 식어간다. 은발의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투구 안으로 양 뺨에 흐른 피를 닦던 그는 이미 장갑이 피로 더러워졌음을 깨닫는다.
지시에 불복하고 그 안에 숨은 도발을 걸어오는 기사 역시 존재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눈을 감은 대신 감이 예리한 와론은 물 흐르듯 그의 공백에 숨은 것을 알아냈음이 틀림없다. 언제였을까. 그가 기어스를 알아채고도 입을 다문 시점이.
"왜 말리는 거냐, 담청색 기린…!!"
낮은 목소리가 분노로 잔뜩 갈라지고 와론이 쓰러진 기사의 시신을 발로 차 뒤집어 엎는다. 지우스가 다가와 그를 밀치자 옥신각신한 끝에 둘은 눈밭으로 쓰러진다. 문득 아래에 내려다 본 얼굴이 젖어있다.
어느새 와론이라는 기사의 알 수 없음에 안정을 느끼듯 이 곁에 자리를 잡은 자신이.
그래서 더 너를 말릴 수 밖에 없는 거야. 지우스는 차마 뱉어내지 못한 말을 목 뒤로 넘긴다. 넌 단지 죽고 싶을 뿐이잖아. 처음 보는 그의 얼굴을 적신 물은 와론의 것이 아니었다. 지우스는 자신이 울고 있음을 알았다.
"지금 내게 이해를 바라는 거냐...? 감히 네가 뭐라고?"
오늘 죽음을 각오한 것은 과연 기린인지.
지독히 무표정한 투구의 기사인지.
동화 같은 일을 겪었다.
어렴풋한 기억에 따르면 옛날에 그와 비슷한 어느 동화가 하나 있었다. 어릴 적 스스로 걸어 들어간 숲에 외따로운 탑이 있었다. 고사목과 나무에 기생하는 이끼들이 즐비한 숲에 어두운 생명이 살았다. 아무도 오가지 않는 탑에는 계단이 없었고, 돌로 만든 오래된 창문의 턱을 밟고 그곳을 오른 사람은 탑에 갇혀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숲에서 지우스는 한 사람을 만났다.
지우스는 그 사람이 와론이라는 것을 알았다. 담갈색의 머리와 맑은 날의 하늘을 닮은 투명한 눈을 한 그 사람도 분명 와론이란 이름을 가졌다. 탑만은 살아있는 녹빛으로 이끼가 낀 벽돌로 쌓아올려 단단하면서도 다각의 기이한 형상을 띠고 있었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의 조각 같았으나 그 장소는 그렇게 부르는 수 밖에 없었다. 마른 숲은 이질적인 생명력을 품어 천장 없는 녹색이 어디까지고 뻗어나가 그 안의 사람들을 가두었다.
그는 와론과 함께 숲을 떠나고 싶었다.
당신은 자기는 더 이상 가지 않겠노라 했다.
[왜? 너무 오래 여기 갇혀 있으면 어떡해.]
울먹임이 배긴 어린 지우스의 목소리는 그를 걱정했다. 입구도, 계단도 없는 곳에 살고 있는 와론. 아무도 이곳에 갇힌 와론을 데리러 오지 않을까봐. 창턱에 말랐던 이끼가 다시 자라나 이번에는 영영 사라지지 않을까봐. 와론의 머리가 길게 늘어진다. 관목의 줄기 같이 뻗어 나가는 머리카락이 지우스의 가볍고 장대 같은 몸을 휘감는다. 혼자라는 건 너무 무거워 보여서, 내내 그 속에 머물러 있는 그 사람은 추워하고 있지 않을까. 가지들이 만들어낸 창 사이로 고개를 내민 사람을 마지막으로 일별한다. 와론은 젊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한다.
[괜찮아 지우스. 곧 ooo가 올 거 거든.]
그 숲에 있는 이, 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동명이인의 기사는 모종의 관계가 있을 수도, 어쩌면 그 본인인지도 몰랐으나 헤아릴 길이 없다. 유령 같은 어둠이 숲을 떠돌고 안개가 손발이 되어 떠돌이는 숲 밖으로 내쳐진다. 그러나 투구를 벗은 기사는 갈색머리도, 그때의 와론도 아니었다.
적력한 눈물이 피를 대신하였고, 한 방울씩 움푹 패인 눈가를 지나 튀어나온 눈물뼈의 굴곡을 타고 내려간 것은 뚝. 뚝. 와론의 눈가로 비처럼 떨어져 다시 뼈의 경사를 따라 물줄기를 그려낸다. 그 뺨 위의 신선한 혈흔에 어느샌가 투명하고 더 묽지만 무거운 액체가 섞여 핏자국을 씻어내렸다가, 이내 지우스의 이마를 비집고 나온 피가 다시 떨어져 얼룩이 퍼진다. 지우스는 쏟아질듯 녹색의 머리칼을 기울이고 어깨를 떤다.
기온은 자꾸만 떨어지고 있었다. 와론은 그저 영혼이 없는 것처럼 움직일 줄 모르는 사람처럼 자신의 멱살을 틀어 올리는 그를 보았다. 커다란 눈구름을 이리로 몰고오는 삭풍에 지우스는 자신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기를 바란다.
“와론. 내게서 누군가를 비춰보고 있나?”
네가 나에게서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겠어. 와론이 지우스에게 확인을 바라듯이 지우스는 와론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지극히 비논리적인 객기, 지우스의 치기에 불과하더라도,
어딘가의 한 명에게 마저도 그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기사들의 일을 이해하듯이 그 역시 이해 받지 못함이 가끔 참을 수 없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기린,”
와론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난 역시 가끔 너 때문에 죽고 싶다.”
3.
매초가 수십단위로 잘게 나뉘고 한없이 더뎌진 시간이 액체와 같이 뚜욱 뚜욱 떨어지며 느리게 흘러간다. 어두운 황혼의 색으로 흔들리는 물기 어린 빛을 보며 와론은 그와 함께 했을지도 모르는 미래를 생각해본다. 그와 자신이 결혼한다면 아이는 어떤 이름으로 했으려나. 그도 자신도 결혼을 할 수도 아이를 낳을 수도 없었을 테니 터무니 없는 공상이다.
와론은 아이에게 자신의 이름을 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이름이 너무 길어질 것이다.
그가 그렇게 빨리 내 곁을 떠나버리지 않고, 여전히 그를 볼 수 있었다면 어쩌면 시간이 지나며 그와 멀어졌을지도 모르지. 서로가 서로에게 죽고 못 사는 사이여도 평생을 살아가며 사람들은 많이 달라지는 법이니까. 와론은 변덕스런 가정들을 나열한다. 마치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는 듯이.
와론은 그에게서 떨어진다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양 길에서 마주친 그와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마치 평행세계에 서 있는 자신만큼이나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그와 와론이 다른 곳에서 늙어가는 세계.
투구를 뒤집어 쓰고 살아가던 그가 본래의 색 그대로 주름이 지고 햇살에 바랜 미소를 지으면, 와론은 이름도 의미도 없는 삶을 연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와론이 더 이상 그의 거울이 되어줄 필요가 없어 다른 자신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평범한 기사들처럼 동료를 만들고 눈 앞의 기사와도 잘 지낼 수 있었을 지도. 투구 없이 대륙의 곳곳을 떠돌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이곳에서 와론은 나이를 먹지 않고, 그는 어느 한 시점에 핀으로 박제되어 있다.
차라리 다른 길을 걸었다면, 차라리 네가 얼마나 바른 사람인지 몰랐더라면, 차라리 네가 살았더라면,
다시는 만나지 않는다고 해도 좋았을 텐데.
와론은 그의 잔상인가? 거울인가?
구름다리 너머는 다른 세상이었다. 와론은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러 건너편을 헤었다. 그를 만나지 않은 자신. 그들이 만나지 않은 세계. 목적이 없고 소리가 없는 곳. 혹은 어딘가에 만약, 만약 가능하다면...
이렇게 따뜻한 비가 있던가. 어차피 서로가 나아갈 꿈은 겹치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도 물이 괸 황금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은 마치 울고 있는 듯 하다...
두 명의 와론이 있는 듯한 기분이다. 이 편에, 울지 않는 와론과 그의 눈 안에서 울고 있는 와론.
눈이 내리는 소리가 잡음처럼 섞여든다. 구름 위로 먹물처럼 세상이 번졌다.
아니, 번지는 것은 와론의 눈가인지도 모른다.
와론은 그에게 기사사냥에 대해 설명한다. 어느 쪽이든 그래서 그렇게 되었다, 정도의 타당성. 단순한 기사들과는 달리 지우스는 말을 듣고 나서 더 날카롭게 눈매가 빛난다. 주저와 의심이 서린 눈이다. 그는 시선을 그대로 두면서 얼굴 앞으로는 두 손에 깍지를 껴 표정을 가린다. 와론은 그의 숨겨진 표정을 보더니 입술을 깨물고 잇새로 한숨을 내쉰다. 밖으론 기어이 악천후가 들이닥치고 어두운 청색 동굴의 벽면으로 깊은 그림자가 일렁인다. 우울하고 색없는 토로였다.
"난 기사가 싫다. 사실은 너도. 힌셔도. 싸우는 일도 말이지. 하지만 우리는 싸우지 않으면 안되잖아? 전투에 제약을 건다는 기어스는 사실상 기사를 사지로 부추기고 이성을 잃은 동물처럼 몰아댈 뿐이지."
그 기억은 마치 끈적한 습기를 머금은 악몽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땀은 식고 사방의 벽은 냉기를 뿜었으나 그의 몸에선 잔열이 올라온다. 와론은 이마를 짚는 손으로 따라오는 시선을 느끼곤 그를 매섭게 마주한다.
"가라. 지금 가면 보내줄 테니."
"지금 누가 더 차가운지는 알고 있나, 새까만 닭?"
"내가 널 죽게 할 것 같으니 가라고, 담청색 기린."
그는 살기 어린 목소리를 무시하고 턱을 받치던 무릎을 치우고 와론을 똑바로 본다.
"...그게 선의에서 나온 거라고 믿는 거야."
눈에는 비난의 빛과 올바름이 혼란하게 뒤섞인다.
"적어도 난 그걸 정의라고 믿어."
지우스는 기억이 없는 내내 남들은 모르는 사실들을 모았다. 혼자 있을 때 와론은 투구를 벗곤 한다. 그는 기린이 안다는 것조차 모를테지만. 의외로 와론은 화내지 않는다. 그는 글씨를 잘쓴다. 지우스는 와론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들을 차곡차곡 모아, 그의 기억에 있는 조각과 맞춰 보았다.
지우스도 상대가 다른 이였으면, 그가 처음 알던 시절의 새까만 닭만 되었어도 감히 마음을 놓을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하?”
피를 한바탕 쏟아내고 나자 참을 수 없는 오한에 입가가 잘게 떨린다. 추워, 그는 와론의 옆구리에 몸을 찰싹 붙이고 그 따뜻한 품 안으로 어린 짐승같이 하염없이 곰지락거리며 찾아든다. 와론이 다소 짜증과 기함이 섞인 감탄을 낸다. 제정신인가. 얜 진짜 내가 만만한가. 있는 힘을 다해 성질을 부리려고 하다가, 덥수룩한 머리에 가려진 얼굴을 보니 모닥불이 피워내는 붉은 기에도 불구하고 마르고 창백하게 질려 핏기가 전혀 없다. 그가 따뜻한 체온을 빼앗아 가는 것이 느껴진다. 이거 다 달아두는 빚이라고. 나중에 몇 배로 쳐서 갚아야 할 거라고. 그렇게 되내이면서도 와론은 약간은 평소의 그로 돌아오는 것을 느낀다. 이번에도였다. 이름 밑으로 무언가 잔뜩 꼬리를 다는 게 그인지 자신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과연 기린이 새까만 닭을 곤란하고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하다니. 와론은 반대쪽 손으로 불씨를 열성적으로 팍,팍, 뒤적이다가 달아오른 무쇠 보호대를 벗어 돌 위로 내려놓는다. 흘끗 보니 지우스는 어느새 그의 어깨에 기대 곤한 표정으로 잠에 빠져있다.
그가 내세나 신이나 다른 세계의 존재를 믿는다면 그건 분명히 와론을 위해서리라. 한번이라도, 혹은 그의 마지막 박동이 울리기 전에, 사자의 세계에 갇히기 전에 그에게 한 마디라도 전할 수 있다면 와론은 스스로가 어떤 말을 택할지 밤마다 꼬박 새며 고민해보았다. 이것을 전할까? 가벼운 농담을? 아니면 마음을 전할까. 와론이 진정 원한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다. 다만 그는 그곳에 이르는 길은 수많은 삶을 가정해보고도 찾지 못한다. 영원(永遠)이라는 말은 그의 발치에서 너무나 멀고 길게 느껴졌다. 그러나 어떤 의지할 방향이나 무언의 약속이 없다고 하더라도 언어가 그들을 이끌어 줄 수 있다면,
다시 만나자.
그 말은 그가 듣기에도 굉장히 좋을 것 같다.
이곳의 삶은 내던지지 못한다. 와론은 잠든 이가 깨지 않게 조심스레 팔을 들어 짙은 눈물이 새긴 자국를 손으로 비볐다. 어떤 냉기보다도 지금 그의 골수를 시리게 하는 것은 결국 그가 없는 다리의 이 편에 갇혀버린 일이다.
죽음이란건, 엄청 시끄럽고, 요란하고, 화려하고, 장엄할 것 같지만
그건 아니었다. 세상에서 하나의 존재가 지워지는 과정은. 그저 풀벌레 한 마리가 발자국에 바스라지듯이 무엇도 거스르지 않고 일어난다. 그러나 와론에게는 그 가벼운 물 한방울조차 전혀 다른 농도로 다가온다. 진정 무서운 건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로 현재라는 시점에서 그것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곳에 머무르는 한, 무로 되돌릴 수 없는 절대적인 사실이다. 죽음은 법칙이었다.
와론은 그것이 찾아오고 나서 수없는 갈래로 흩어져버린 자신의 삶을 상상한다. 어쩌면 기린을 만난 것은 그 결과의 한 가닥일 것이다. 한 번에 두 가지를 가질 수 없다는 걸 그는 너무나 잘 알았다.
밤 중 눈보라가 그의 잠을 방해한다. 와론은 문득 초록 머리의 기사를 보며, 정말 그러한 일들이 와론의 인생의 일어나지 않았을 조악한 사색에 잠겨 공상을 역순으로 되짚어가다가, 그를 만나지 못했으리라는 가정에 뜻밖에도 허무한 감상에 잠겨든 자신을 발견했다...
ost 추천
약간의 사족 추가. 자유로운 해석을 좋아하시면 안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세계관 설정- 원작 설정으로도 볼 수 있지만 if 물에 가깝습니다. 수많은 평행 세계중에 이곳은 여전히 와론은 목주(진와론)를 잃고 지우스는 기억이 없는 세계. 와론은 몇 번이나 죽으려 하지만 지우스가 그때마다 와론을 막아섭니다. 어렴풋하게 다른 세계의 진와론과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요. 지우스의 기억이 뒤죽박죽인 것은 많은 우주가 미친 영향 중 일부입니다.
평행우주론은 판타지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가설이니 이세계 트립은 아닙니다. 와론은 여전히 진와론의 흉내를 내기 때문에 원작 설정으로 봐도 별 영향은 없어서 따로 표기는 없습니다. 여튼 이런 내용들은 단순한 세계관 설정에 불과하고 주로 말하고픈 이야기는 글에 넣었습니다. 긴 글 즐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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