짱불) 애매하게 길어

[지우견] 지우스 가출 대소동

헹 | 230821

나견 자신도 본인 성정이 무르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인간에 대한 애정이 도저히 사라지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제 약점을 들키지 않으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높이 단단한 벽을 세우고 선을 덧칠하며 노력했다.

그 단단하던 벽을 뚫고 안까지 들어온 지우스 또한 나견의 노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나견이기에 머리카락이 잘리는 순간부터 텅 비어버린 그의 마음을 자신을 포함해 그 누구도 절대 다시 채우지 못 할 거라는 것도, 지우스는 잘 알고 있었다.

지우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나견이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애정을 꾸준히 그 구멍에 부어주는 것밖엔 없었다. 그는 자신이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기뻤고 한편으로는 나견이 강요라고 느낄까 조심스러웠다.

나진의 복수가 끝나지도 3여년이 지났지만 나견은 여전히 동생의 기일이 있는 주에는 일주일 내내 힘들어했다. 눈만 감아도 그 애가 보여 거의 뜬눈으로 지새웠고 어쩌다 선잠이라도 들면 10분도 채 안 되어 식은땀과 함께 깼다.

눈물은 마른지 오래였지만 아니 운 적이 없었고, 어떠한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모든 것이 선명히 느껴졌다. 그는 아래로 또 아래로 끝도 없이 가라앉았지만 어쩐지 붕 떠 있는 듯했고, 한 발자국 내딛는 것도 힘들 만큼 억센 비가 며칠째 내리고 있었으나 그가 지른 불은 꺼지지도 않고 자신을 제외한 모든 걸 불태우고 있었다.

지우스는 더 이상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이 나견 곁에 있는 것이 맞는가?

그는 나견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 그도 나견도 서로 힘들기만 한 이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옳을까?

지우스의 애정이 식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사랑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도 버거워하는 저 아이에게 점점 불어나는 짐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깨진 독에서 빠져나가지 않게 하나씩 넣어둔 자갈돌이 되려 실금을 더 키운 것은 아닌가 이러다 조만간 전부 깨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무서웠다.

그는 자갈을 전부 꺼내 들고 다시 선 밖으로, 벽 밖으로 나가기로 결정했다. 애초부터 그 벽을 억지로 뚫고 들어와서는 안 됐다. 나견의 노력을 잘 아는 자신이, 그 벽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자신이 그렇게 나만은 예외라며 당당히 들어와서는 안 됐다.

그는 꾹 잠긴 방문을 잠시 바라보고는 하나둘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집에 붙어있던 날보다 밖에서 자는 일이 훨씬 많아서인지 챙길 짐도 몇 없었다.

얼굴을 보면 굳은 결심이 무색하게 발이 떨어지지 않을 걸 알기에 그는 곧장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가 현관문을 열기 전, 잠겨있던 방문이 먼저 열렸다.

"...가는 거예요?"

평소 듣던 것과 주인이 같다는 걸 믿지 못할 만큼 갈라진 작은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등 뒤에서 들렸지만, 지우스는 당장이라도 뛰어가 껴안고 싶은 욕망을 참으며 바닥에 달라붙은 발을 떼기 위해 노력했다.

"......."

"진짜 가요?"

"......응."

지우스는 자신의 목소리가 평소와 같이 들렸길 바랐다.

"...왜?"

"...후. 이제 네 옆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왜."

목소리는 방금 전보다 더 가까이에서 들렸고 동시에 비쩍 마른 몸뚱이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도 들렸다.

놀란 지우스가 곧바로 넘어진 나견에게로 가 그를 일으켜 세우려 하자, 나견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소매를 부여잡고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시뻘겋게 충혈된 두 눈과 마주친 금안은 눈에 띄게 떨렸다.

"왜. 왜 나 버려? 네가 데려왔잖아."

"......."

"이제 싫증 났어? 재미없어? 지쳤어?"

"...나견"

"그렇게 붙잡더니 고작 3년? 왜, 상상한 거랑 너무 달랐어?"

"나견 그만해."

"나 버리지 마. 가지 마. 난 어떻게 살라고."

"너 쓰러질 것 같다. 진정하고 다시 얘기해. 지금 너무 흥분했어. 나는 나진이 아냐. 나진은"

"나진은 죽었어."

"...! 너, 너 뭐라고"

"나진은 죽었어. 뼛가루 한 줌 남기지도 않고 다 타버렸어. 내가 태웠어. 나진도, 집도. 꽃 한 송이 놓아둘 무덤도,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곳도 이제 더 이상 없다고! 근데 어떻게, 나를, 버려. 당신이. 다 알고 있으면서. 그렇게 애타게 붙잡았으면서. 왜! 나 버리지 마. 가지 마. 나만, 또 나만 혼자 두지 마. 제발."

지우스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소리 지르는 이를 말리지도, 그에게 대꾸하지도 못 했고, 메마른 자국을 다시 적시는 눈물을 닦아주지도, 무너지듯 제 어깨에 기대오는 이를 안아주지도 못했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이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가? 서로가 서로의 유일한 이해자라고 할 지라도 어떻게 제 생각이 그의 생각이 될 수 있겠는가.

그는, 나견은 언제나 자신이 얼마나 멍청했는지를 일깨워준다.

나견은 이미 나진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나진의 그늘 아래 갇혀있던 것은 바보 같은 지우스 그 자신뿐이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면서 제가 있는 곳에 시커먼 암흑밖에 없으니 상대 또한 그럴 것이라며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다니, 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오만한가.

"또 자기 멋대로 생각하지. 다른 거는 잘만 물어보면서 왜 항상 중요한 건 자기 맘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건데요."

감정을 가라앉힌 나견이 기대고 있던 어깨에서 이마를 떼며 지우스의 삽을 뺏어 던져 삽질을 멈추게 했다.

깊은 상념의 늪에서 멱살 잡혀 끌어올려진 지우스는 머뭇대다 입을 열었다.

"...내가 물어봐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

"물어봐, 물어보라고요!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듣지도 않을 거면 왜 데리고 사는데."

"내가, 나는... 그러니까. ...너는, 내가 좋아?"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역시 그렇구나."

"그렇긴 뭐가 그래요. 저는, 저도 당신이 좋아요. 물론, 지우스님이 주시는 것만큼 다 돌려드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잠깐. 정말? 진짜 날 좋아해?"

"...당연하죠. 제가 뭐 하러 싫어하는 사람이랑 같이 살겠습니까?"

"왜?"

"제가 뭐든 질문하라고는 했지만 진짜 아무거나 내뱉는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지우스 님은 절 왜 좋아하시는데요?"

"예쁘고, 똑똑하고, 귀엽고, 노력하고, 도전하고, 끈기 있고"

"그만! 무슨, 뭔, 아니, 하... 그런 말은 평소에 준비해두는 거예요? 어떻게 물어보자마자 바로 나와?"

"네가 내 앞에 있잖아."

"...! 아니,ㅁ뭐라는 거예요."

숨 쉬듯이 나오는 애정어린 말에 귀 끝까지 빨개진 나견은 할 말을 잃었다.

지우스는 도망가려고 벌떡 일어났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주저앉는 나견을 붙잡으며 말했다.

"다시 한번만 말해주면 안돼?"

"......제가 지우스를 좋아해요."

"나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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