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내기

무쇠 투구와 붉은 망토. 싸우는 하마닭

231225

*애늙은이 기반 연성(기사회의편 스포)

*그노힌셔 있음. 두 편은 이어지지 않습니다. 




1.

와론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그가 불편했고, 그는 와론에겐 죄책감의 산물이자 부정할 수 없는 기사의 어떤 상징이었다. 와론은 옳은 기사란 것들은 다 뒈져버렸다고 믿고 싶었다. 특히나 한 때에는. 

그는 다소 여러가지 일들로 심사가 뒤틀려 있었다. 기사들을 한데로 불러모으는 일에는 이 주의 시간이 소요되었고 대륙의 각지에서 귀소본능을 가진 것처럼 백여명이 넘는 기사 전원이 중앙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회의에 참여하라는 연락을 받기 직전까지 말토를 처리하고 니젤로 올라오는 길이었던 힌셔도, 족제비의 죽음 이후 마무리해야 할 일로 수도에 머물며 바삐 돌아다녔던 그도 기사들의 무리에 합류했다. 


와론은 싸움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힌셔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채였다. 안개비를 헤치는 사이 축축해진 망토를 털면서 건물로 들어설 때 달잔이나 다른 기사가 하마에게 자신에 대해 귀띔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했다. 이왕이면 거하게 욕이라도 해달라고. 엮이면 양쪽이 곤란한 처지였다. 기상이 나빠 몇 주째 이어지는 우천이 건물 밖으로 흐리게 드리워 있었다. 기사 측에서 족제비에 관련된 진실을 은폐할 것인지 혹은 명예롭게 치장할 것인지, 팅크 개인을 기사 집단에서 속아낼 것인지는 이미 결론을 내렸을 테고 오늘 힌셔를 통해 그 답을 가지고 왔을 터다. 회장은 도심에서 한켠 떨어진 황성 부속의 별천지 건물의 반지하에 위치해, 아래로 깊어지는 투박한 계단식 기단의 형태로 지어져 장내에 모여든 인원 전체를 입구에서 한눈에 살필 수 있다. 장식 없이 단순한 돌타일로 만든 천장은 그가 서있는 여닫이 문 위로도 한참을 높이 뻗어 어두운 자연광이 얼핏 보일 정도로 깊고 짙은 그림자 속에 흐릿하다. 마치 황성으로 부터 독립된 별도의 부서임을 자랑하듯이 비정기 회의에도 흔쾌히 회장을 내어준 별천지의 태도도 달갑지 않다. 그가 문 안으로 발을 내딛자 따끔한 시선이 모여와 망토를 찔러온다. 말토에 대해 어디까지 공개할 셈인지는 미지수지만 이곳에는 그가 연류된 것을 아는 기사들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 새까만 닭은 참고인의 역할로 필요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회장의 반응은 들어설 때부터도 적대적이다. 마치 피고인이라도 된 듯한 감상을 내놓으면서 그는 내심으로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한다. 미움 받는구만. 여전히.


회장의 날선 분위기는 불려온 것을 불평하거나 잠자코 시작을 기다리는 자들로 어수선하다. 기사들 외에는 출입도, 기록도 엄격하게 통제되는 철저한 비공개 회의인데다가 기사들 전체가 기감을 펼쳐둔 회장 주변을 얼쩡거리며 엿들으려하는 시도는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기사들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어 이 회장을 제외하고는 두 개의 층 전체를 비워둔 것 같다. 건물을 들어온 이후로는 다른 기척이 전혀 없이 복도 바깥은 더없이 조용하다. 유일하게 불편한 소음을 머금은 이곳에는 몇몇 자유기사를 제외하고 서쪽다리에 파견 나간 인원까지 모두가 출석한 터라 빈자리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오지 않았군. 와론은 회장을 슥 둘러보고는 익숙한 인영들을 향해 아래로 계단을 밟아 내려간다. 

추모하는 묵념 없이 짧은 개회 선언 이후 달잔이 당연하다는 듯이 바로 본론을 들고 나온다. 회의가 시작된 이후로 누구나 원하는 때에 발언할 수 있지만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는다. 수도며 기사들 사이에 알음알음 퍼진 풍설 뒤로 소집령과 함께 적힌 글귀가 뒤늦게 사실로 확정지은 족제비의 죽음은 평범한 부고가 아니었다. 어린 기사들이 순직하는 일이야 빈번할 따름이지만 그것이 기사들 전체가 머리를 맞댈 정도로 큰 문제로 번지는 일은 드물다 못해 전례 없이 악재에 악재가 겹친 일이리라. 이번 문제의 중심에 선 기사가 불과 이 년 전 기사로서의 서임과 함께 여기 앉은 많은 이들 전부의 기억 속에 각인된 회색 족제비인 건 아이러니였다. 옆의 앉은 기사의 숲색 머리를 보며 와론은 그날 일행을 떠나 홀로 수도로 복귀하던 길을 회상할 뿐이다. 이날 오전까지도 지긋하게 계속된 온난한 비가 내리기 시작하며 숲길 위를 덮었고 그는 무너진 왼반신을 질질 끌다시피 철퍽이는 숲속을 나아가고 있었다. 쏴아-하고 수많은 발걸음이 옆을 걷는 듯한 빗소리가 사방을 채우고 바지를 적시며 옆구리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빗물에 섞이던 핏물. 고행에 가까운 산행 속에서 갑작스레 들이붓는 빗속을 헤메던 그는 그날 자신은 이미 죽어버린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나뭇잎 끝에서 떠내려오는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목덜미가 선덕하다. 끈질기게 이어진 숲로에서 생을 증명해줄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동료기사. 하얀 개의 말이 퍼특 그를 현재의 장소로 불러낸다. 회의가 꽤 진행된 장내엔 어느새 혼란이 가중하고 있다. 중립을 표방하며 대부분이 방관 중이던 기사들이 동대륙이 거론된 순간부터 웅성거리기 시작하고, 혼란스럽게 관련자들에게로 썰물처럼 이목이 오가는 가운데 직접적인 당사자들은 침묵을 지키는 중이다. 말토에 연루된 기사 몇이 고개를 떨구거나 조용히 스스로를 사리는 게 시야에 들어온다. 넓은 중앙 바닥에 자리를 잡고 서서 진행을 맡은 달잔 역시 별다른 대책이 없는지 말수가 적었고, 초췌한 얼굴빛이 누적된 피로를 드러내 보여 팅크가 말토에 가담했다는 전말이 밝혀진 순간부터 몇 주간 비통과 배신감이 만연한 악천후 속에 어떤 등락을 겪었을지 눈에 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정의 고통 한 끗에 걸린 엄연스러움은 그가 보여줬던 희망을 놓지 못했던 게 분명하다. 저들끼리 떠드는 소음 속에서 팔짱을 끼고 상황을 주시하던 새까만 닭은 건넛편에서 시선 하나가 이리로 꽂혀오는 것을 느낀다. 눈짓만으로도 그에게 위압을 가하는 상대는 답지않게 차가운 분노를 내리 누르며 도발을 걸어와 와론은 순간 치미는 반항심을 억눌렀다. 기묘한 살기를 띈 적대감이 그를 풀어주고 나서야 투구 속으로 이를 빠득 갈아낸다. 그에게나 저에게나 일촉즉발의 감정들을 터트릴 때가 지금이 아니란 걸 알았어도, 다수의 적의들이 새까만 닭의 투기를 들쑤시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코끼리보다는 몇 배는 차갑게 이성을 발휘할 줄 알았다. 논의가 결국 족제비의 명예 문제로 넘어가며 범죄여부가 거론되자 주변에서 흥분한 기사들의 언성이 높아진다. 그냥 유체를 넘겨준다면. 새까만 닭은 족제비가 아닌 다른 기사의 주검이라면 고려해볼 의향도 있었으나 죽어서도 가족의 품으로 편히 돌아가지 못할 팅크를 생각하면 머리 어딘가에서 이성을 통제하는 전원이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넘겨줍시다. 까짓것."

기어코 닭의 머릿속을 맴돌던 발화를 누군가가 고조된 회의장에 터트린다. 통제되는 집단이 아닌 만큼 누군가는 그 생각을 했을 테지만 고인을 지칭하기엔 모욕에 가까운 언사에 장내가 삽시간에 얼어붙는다. 충격 어린 정적을 감히 깨부수는 오소리의 목소리가 격노로 떨고 있다. 흰까마귀도 그에 냉혹한 태도로 대꾸했다. 선홍앵무새가 화려하고 큰 목소리로 주변을 전염시키는 광기를 가졌다면 그건 냉기 속에서 피어난 광기다. 

"전쟁을 하면 산 사람들이 죽는다. 죽은 기사 한 명이 산 사람들보다 중요하다 할 수 있는가?"


전쟁이라는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그에 따른 희생이란 무엇인지 여기의 와론을 비롯하여 서쪽다리에 배치되었던 이들과 전투에 몸을 담그고 살아가는 기사들이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거기에 빗대어 주검을 저울질 하다니? 요구하는 대로 대가처럼 내어줄 수 있는 소모적인 목숨과 명예, 맹세, 무엇이 되건 기사라는 이름 하에 건 목숨의 용도가 같았다면 애초부터 이렇게 모여 합의 없는 논의를 거치진 않는다. 하물며 동료기사의 유해를 가져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모종의 두려움에 굴복하도록 유인하는 교묘한 발언은 양쪽에게 최악인 선택지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선명하다. 위장의 안쪽이 베베 꼬여드는 기분의 원인을 와론은 알고 있었다.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해 순직한 거잖아. 사방에서 떠넘긴 책임을 그는 죽어가면서도 지키려 했지. 정황을 아는 그가 한마디만 거들어 준다면ㅡ혹은 악역을 대신 해준다면ㅡ의견은 팅크에게 기울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죽은 게 기사가 아니었다면 전쟁이라는 대가를 피해 제국 측에서 일찍이 손을 놓고 시체를 주어버린다 하더라도, 정작 시험하듯 기사들에게 이 안건을 일임하는 심산을 모르는 거냐? 와론이 보기에 기사들이 내놓을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 회의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가 어떤 발언을 하거나, 힌셔가 어떤 입장을 가져왔던지 간에ㅡ너희가 정말 기사라는 자들이라면 말이다.

기사 몇이 회색 족제비를 변호했지만 족제비의 견습시절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며 그를 입증해주기엔 역부족이다. 그의 몇 년간 행적ㅡ특히 마지막 몇 달간ㅡ에 대해서 논해야 하는데 그 내용을 알고 증명해줄 만한 기사는 닭이 알기로는 세 명 밖에 없다. 전말부터는 아니더라도 사건을 직접 지켜본 셋 중 하나는 족제비 본인이고, 하나는 어쩔 수 없이 불려나온 닭이나 그는 이번에는 될 수 있으면 어떤 상황이 발생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켜보기로 결론을 내린 채다. 오늘은 그가 나설 차례도 아니거니와 이토록 공개적인 장소에서 나서는 건 적절한 선택도 아니었으므로 분노를 투구 안으로 수그러트렸다. 나머지 하나는 영웅이라 불리는 검붉은 하마다. 족제비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맡고 사건의 마무리를 지은 건 힌셔였으니 발언할 자격은 충분하다. 두 줄 뒤에서 힌셔가 일어서는 기척이 느껴진다. 그렇군. 네가 나설 차례다. 영웅.


"애초에 이 요구는 불합리하오. 

그런 시점에서 전쟁을 피하려는 건 무의미. 오히려 우리는 그런 때를 위해 존재하는 자들. ”


하마의 연설로 충돌을 매듭 지은 이후로 회의는 별다른 진전없이 흐지부지 마무리가 되었다. 기사 하나가 순직한 판에도 싸우는 거냐. 너네는. 새까만 닭은 투구 안으로 조용히 혀를 차곤 망토자락을 흐트러트리며 회장을 빠져나간다. 


그로서는 불쾌한 일이다마는 말토를 정리한 것은 깨어난 뒤 기사의 첫번째 업적으로 기록될 것이다. 힌셔가 팅크가 기사들 사이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알고 있다면ㅡ특히 근래 기사가 된 이들은 거의 모두 팅크에게 영향을 받았다해도 과언이 아니다ㅡ 그리고 그를 대신할 생각이라면 그러라고 할 작정이었다. 회의의 결론은 소집된 순간부터 넘칠 것이 자명한 찻물처럼 정해져, 하마가 없었어도 그들은 결국 팅크를 넘겨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을 막을 방안을 찾아내지 못한 오늘의 소집은 실패나 다름 없었고, 와론과 함께 있던 젊은 기사는 몇 년 내에 벌어질 전쟁에 대비책을 세우러 회의가 끝나자마자 달잔과 함께 쌩하니 돌아가버렸다. 결국 상의하는 것은 그들의 역할이고 싸우는 것이야말로 늘 선봉에 서는 와론이나 힌셔의 역할이라 하더라도,  힌셔의 말마따나 그들이 싸워야 할 상대는 서로가 아니란 말은 옳은 얘기다. 하마와 닭 두 기사 간에 결투를 할 이유도 남아있지 않다. 그가 지금의 동향을 꿰뚫어 보는데 얼마의 기간을 소요하던지 닭에 관한 것만큼은 이미 정리를 했고, 질나쁜 충고들을 듣기 이전에 그를 직접 만나 겨루어 버렸으니 무슨 말을 들어도 동요치 않는 강단이 있으리라는 데에는 동의한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강직한 힌셔를 살려보낸 실수가 뼈 아팠다. 당초에 와론은 팅크에게 위문이나 한번 해주러 갈까 했으나, 그는 회의가 끝나고 건물을 빠져나오는 길목에서 하마를 기다렸다. 인적없는 담벼락 아래는 몇 주만에 겨우 걷히기 시작한 하늘이 바닥에 고인 웅덩이 속에서 투명하게 드러났으나 그의 눈에는 그마저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팅크의 복수? 그런 의미 없는 화풀이를 할 도량은 못된다. 그건 새까만 닭의 역할이 아니었다. 그러나 투구 속에서, 애써 감고 있던 눈을 드러내게 만든 건 그쪽에서 걸어 온 싸움이다. 



한참 뒤 건물 밖으로 나온 힌셔를 짙은 그림자를 지고 서있는 기사가 맞이한다. 검은 망토를 어깨에 걸치듯 넘기고 걸어오며 오래 벽에 기대고 있던 옷자락을 털어낸다.

"안녕. 선배. 그동안 잘 지냈어?"

"...닭. 나를 기다렸나?"

역광으로 어두워진 투구의 형태가 삐딱하게 끄덕이며 넌지시 그를 향한다. 물끄러미 시선을 마주하던 힌셔가 중얼대듯 말한다. 어딘가 차분히 가라앉은 태도엔 그 기다림을 반기는 기색이 깔려있다. 

"...먼저 말을 섞다니 대담하기도 하지."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그만한 가치가 있었나?"

힌셔는 이내 표정을 풀고 짐짓 가벼운 태도로 기사에게 묻는다. 두 사람이 선 도로 외곽으로 낮은 오후의 볕이 하얗게 비산하며 도로의 물기와 만나 힌셔의 얼굴에도 흐릿한 반사광이 진다.

"그래. 뭐, 이 정도는 기다리는 축에도 들지 않지. 작별인사는 잘하고 왔지? 아직 우리 사이엔 갚을 빚이 있잖아." 


뒷편으로부터 갑작스레 날아온 론누가 그의 옆을 스쳐 날아간다. 아슬아슬하게 투창을 피한 적색 망토가 펄럭이며 등 뒤로 가라앉는다. 힌셔의 눈이 낮게 찌푸려지며 회의 내내 잠잠히 내려놓았던 둔기의 손잡이를 감싼 네 손가락에 차차 힘이 들어간다. 

전방을 가르고 돌아오는 창을 역수로 낚아챈 닭은 손 안에서 창을 돌리며 자세를 잡는다. 검붉은 하마는 걸어오는 싸움을 거절하는 법이 없이 하마턱을 쥔다. 힌셔의 몸 뒤로 숨었던 하마턱이 날아오자 와론은 머리를 숙이고, 무식하게 긴 사정거리를 가진 검이 공기를 훑고 지나간다. 힌셔가 서 있던 벽돌길 위로 며칠 동안 마르지 않고 고였던 웅덩이들에 물이 한차례 시원하게 튀긴다. 오른발을 긁어차 론누를 날려버리자 와론이 곧장 완갑을 두른 두 손을 몸 앞에 두고 들어오는 그를 기다리다가 다음합을 받아낸다. 

"대화로 해결하자는 말은 하지도 않는군."

"나를 바보로 아는 건가 새까만 닭?"

"하하. 아주 좋아. 입 터느라 고생할 필요는 줄이겠군. 가끔 대화를 시도하는 멍청이들이 있어서 말이야."

"회색 족제비 때문인가?"

"하, 그런 악당 녀석을 내가 뭐가 좋자고?"

와론은 이유가 무어라 명확히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하마의 어깨 밑으로 파고든 손이 딱딱한 팔뚝을 감고 들어가 손목을 부러질듯 쥔다. 

"악당이라고?"

"어차피 그 놈이 한 선택이란 말이야, 말토에 들어간 것도. 약한 놈들 밑에서 그놈들이 하라는 대로 기어댄 것도."

완갑에 맞물린 왼팔이 부러지기 전 힌셔는 하마턱을 종으로 휘두르며 와론에게서 벗어난다. 와론의 등 뒷편의 성곽에 순식간에 깊은 금이 갈라지며 주먹만한 돌 파편들이 튕겨 나온다. 거세게 밀쳐진 와론이 반대 방향으로 밀려나고 바닥에 닿은 하마턱을 지지대 삼아 도약한 힌셔의 머리 위로 들린 무기가 푸른 전격을 뿜기 시작한다. 

이게 꽤 까다로웠단 말이야. 둘 사이의 벌어진 거리를 좁히며 회전력을 더해 감아치는 하마턱이 바로 날아든다. 벽이 계속해서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마력으로 인해 일격의 궤도가 지나치게 변칙적이고 근거리에서 방향전환은 신속에 가깝다. 검의 무게로 인해 둔해지는 움직임마저 마력이 상쇄하여 오히려 기동력은 아까보다 올랐다. 론누와 비슷한 종류이기에 움직임을 더 쉽사리 파악했지만 통찰의 눈으로 다음 움직임을 읽혔다면 상대는 막다른 방향에서 날아드는 공격에 꼼짝없이 놀아나는 수밖에 없다. 그런 점을 이용해서 단시간에 승부를 내온 것이겠지. 상공에서 급작스레 떨어진 론누가 힌셔의 어깨를 겨누고 둘 사이를 파고 든다. 론누의 끈질긴 추격에도 불구하고 하마가 와론을 집요하게 벽으로 몰아붙인다. 와론에게서 한 끗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검격이 빗겨나간다. 곧이어 따라온 연격으로 하마턱의 측면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을 가드에 정면으로 맞고 와론이 벽으로 처박힌다.

"왜, 기사가 악당이 되는 건 당신한테 익숙한 일이 아닌가? 본인이 완전무결한 영웅이라서? 아. 트라우마라도 있으시던가."

"닥쳐라."

푸른 검신이 끝까지 뽑혀나오며 순간 빛을 발한다. 검이 휘둘러지는 동시에 날아온 론누가 가로로 날아온 검격을 막아내고 와론이 먼지 더미 속에서 흐릿하게 윤곽을 드러낸다.  


"쿨럭,"

욱씬, 골절된 늑골이 저려온다. 아직 금이 덜 붙은 부분이다. 큰 전투를 치르고도 연이어 추운 곳이나 사막을 횡단하며 쉬질 못했으니 회복이 더디기는 저쪽도 매한가지일 것인데 큰 반경을 그려야 하는 하마턱은 끄떡없이 거친 공격을 가해온다. 마력의 추진력에 얼마나 의존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와론은 새삼 상대가 누구인지를 되새기게 된다. 

"모르겠군. 새까만 닭."

힌셔가 그를 내려다 보듯이 바라보며 묻는다. 

"네가 결국 그를 해치지 못한 건 알고 있다. 그런 식으로 날 도발해서 악역이라도 자처하고 싶은 건가?"

그는 그런 기사였다. 악과 명예, 두 가지가 공존하던 기사들은 어느 정도 있었으나 그것이 정도를 넘어서 악이 명예를 삼켜대는 경지에서도 기사를 자처할 수 있는 건 그를 제외하곤 스승님 밖에 없었다. 


그토록... 

그토록. 악마기사가 조롱거리가 되었을 줄이야. 회의장에서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던 힌셔는 뒷골이 뻣뻣하게 굳을 정도로 살기가 오르는 게 느껴진다. 그런 식으로 대하고 있을 줄을 몰랐던 건 자신이 무지했던 탓이다. 이곳이 핏빛거미와 그의 연고를 아는 사람도, 그 이름을 감히 그의 앞에서 들먹이지 못하는 사람도 없는 오백년 후의 수도의 거리라는 걸 절실히 실감한다. 그때의 황제의 단상 앞으로 나아가 섰던, 기사들 앞에서 거미의 잘라낸 머리를 들고 섰던 힌셔의 분노는 이들에게는 모르는 이야기일 뿐이다. 회의장에서 그는 논의로부터 배척 받는 철저하고 무결한 영웅일 뿐이던가? 오히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저에게 덤벼드는 자가 있다는 점을 더없이 기꺼워 한다. 적어도 그것이 그에게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고 느꼈다.


부숴지지 않는 검날이라니. 그노제스란 장인은 빌어먹게 천재였던 것이 분명했다. 아직까지도 마력을 무기의 형태로 사용하는 마스터피스는 듣도 보도 못한 걸로 보아서는 동시대에 살았다면 몰라도 지금 그에겐 제 적수에게 끔찍하리만큼 재앙스런 무기를 쥐어 준 장본인에 불과하다. 제아무리 나린기라도 베어도 베어도 다시 검의 형태를 이루는 마력은 무기 자체를 부술 수 밖에 없다. 그러려면 한쪽 팔을 내줄 각오를 해야 하나. 그러나 하마턱의 단단한 몸체가 부숴지기나 할지조차 미지수였다. 

다가오는 힌셔의 반댓편으로 발을 빼낸 와론이 카가각- 창끝으로 돌바닥을 긁어 원을 그었다.

투구의 깃이 툭하고 떨어지기도 전 하마턱과 힌셔 사이에 짧은 틈을 파고든 와론이 힌셔에 손을 가격한다. 뒷편의 벽에 새빨간 초점이 잡히더니 이윽고 하마턱이 벽으로 날아가 둔기와 부딪히고 파손되는 건 석재로 지은 벽 쪽이다. 맨손에 둘러진 철완갑과 짧은 망토가 붉은 잔상만을 그리며 빠르고 강력한 연격을 주고 받는다.

와론이 턱끝을 몸 전체의 힘을 실은 검은 부츠로 찍어 차자 거대한 망치로 얻어 맞은 듯 힌셔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친다. 얼굴을 가리던 손을 치우자 붉은 코피가 흘러나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진다. 손등으로 코 밑을 쓸자 선명한 색이 얼굴로 번진다. 

"어때? 무기 없이 싸우는 내 기분을 조금은 느끼려나." 


그래,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이유가 대체 뭐냐? 

무엇을 물어도 알아서 생각하라는 식으로 되묻는 건?

햇빛을 받은 머리카락이 금사 같이 휘날린다. 분노로 눈앞이 새빨개진다는 건 아마도 이런 격정을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철저한 악. 힌셔가 느끼기에 와론 역시 그런 존재였다. 니젤의 대기에 만연한 명예라는 압력이  강하게 눌러올 수록 그 속에서 거칠게 자라난 악. 그건 어쩌면 새까만 닭 본인조차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누구의 멋대로도 할 수 없는 본능이었다. 무시. 무관심. 무딘 감각. 지독한 현실감에 사로잡혀서 전투감각을 길러오면서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가 그에게 같이 자라나 있었다. 그의 말을 듣지 않는 그 모든 본능이 제멋대로 자신을 휘둘러 더이상 대화란게 성립하지 않는다는 걸, 몇 번을 말해도 그에겐 아무 말도 전해지지 않는다는 걸.  뒷편에서 힌셔의 옆구리를 파고 들어오던 론누가 두 손에 잡혀 반댓편으로 멀리 내던져진다. 퍽, 오른손의 맨주먹이 투구가 찌그러질 정도로 치자 와론의 고개가 단박에 들어간다. 망토를 우악스레 붙들어 반동으로 제껴지지 못하도록 단단히 잡아내고 무거운 주먹이 투구를 연타한다. 고개가 되돌아갈 틈도 없이 꽂히는 주먹에 철갑으로 된 투구가 우그러들고 있었다. 힌셔에게 발을 걸어 함께 넘어질 듯 자세를 낮춘 와론의 손이 거꾸로 땅을 짚는다. 반장갑이 벽돌바닥을 둥글게 쓸고 순식간에 두 번의 발차기를 날리며 벗어나며 붙들린 망토가 거칠게 찢겨나간다. 무지막지한 악력에서 풀려난 와론이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모퉁이를 장식한 하얀 석상들이 그의 귀옆으로 날아와 뒷편에 부딫혀 산산조각으로 부숴진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섬세히 조각된 날개와 인간의 이목구비가 돌 파편이 되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네가 내 무엇을 안다고 해도, 고작 오 백년 전의 기록 정도나 들여다 봤을 터. 나나 악마기사에 대해서 대체 뭘 안다고 그렇게 떠들어 대는 거지? " 

더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투구 밖으로 한차례 피를 뿜어내고, 처맞은 옆구리를 쥐고 절룩거린 와론이 자세를 곧추 세운다. 힌셔는 하마턱을 걸치고 서서 무기를 주워드는 그를 냉정에 가까운 얼굴로 지켜본다. 와론이 투구를 고쳐쓰고 숨구멍 밖으로 피를 찍 뱉는다. 

"그만 쳐다보지? 투구 뚫리겠네."

퉁, 와론은 창끝을 겨눠 거리를 가늠했다. 전방에서 기사가 뛰어 들어왔다. 동시에 마치 중력으로 부터 떨어져 내리기를 거부하듯이 금속의 창날이 공중으로 솟구쳐 오른다. 

순식간 창날이 궤도를 바꾸며 처음으로 힌셔의 급소를 정확히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사나운 살기를 품은 창이 간담을 서늘케하며 스쳐간다. 

"고작 이정도로 쳐서 부숴지겠어? 기왕이면 목이랑 같이 그 잘난 검으로 베어달라고."

"그런 태도는 집어치우라고 했을 텐데."

"왜? 정의에 어긋나는 자를 베는 게 망설여지나 힌셔? 너는 약자를 지킨다고 했지. 그것이 명예니까? 하하, 명예롭지 못한 약자라면 넌 어떻게 했을까?"

완갑을 베어낼 듯 휘둘러진 검날이 론누와 맞부딪히며 충격음이 울린다. 와론은 힌셔를 어떻게든 수렁으로 몰아넣기 위하여 대답을 유도하고 있었다. 

"적군의 목숨 같은 건 어떻지? 네겐 가치가 없나?"

히죽 웃는 투구의 양끝이 소름끼치는 광소를 띠었다. 힌셔의 젖은 옆구리에선 붉은 피가 새어 떨어지고 있었다. 기사들이 서쪽다리에서 무슨 일을 벌여왔는지 안다면 네 표정도 아주 볼 만하겠지. 공식적으로 둘은 모르는 사이여야 했지만 비공식적으로 남은 닭과 하마의 전투 끝에 승자는 검붉은 하마였다. 하마턱이 그의 허리와 상체를 반대로 엮어 메치려는 순간 민첩하게 벗어난 와론의 허리를 힌셔가 다시 붙든다. 

"아무래도 네겐 기사가 뭔지 하나부터 다시 가르칠 필요가 있나보군."

론누가 공기를 휘가르는 소리를 내며 와론의 면갑을 긁어댈 정도로 가까이 스쳐 날아온다.

정직하게 싸우는 타입은 아니란 말이지. 저쪽도. 와론이 창을 수직으로 세우며 호흡을 길게 내쉰다. 투구 밖의 미소와 여유는 늘 가장할 수 있었으나 싸움에서의 흥분마저 숨길 필요는 없다.

"너희들은 기사라는 선악을 그어놓고 아무도 넘어오려고 하지 않아. 하지만 왜 그런 것에 얽매이는 거지?"

어차피 상대도 내일 쯤이면 숨을 쉬고 있지 않을 테고. 가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라서. 이 정도의 대화에도 얼마든지 흔들려주고, 내일이 되면 들은 적도 없다는 듯 귀 밖으로 흘려주마. 네가 그렇게 해서라도 그 태도를 고수하고 싶다면. 대항마를 기꺼이 필요로 한다면 말이다. 새까만 닭은 창대를 부여잡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습기가 잔류하는 수도의 높은 골목의 사이로 쇠붙이끼리 울리는 뚜렷한 소음이 퍼진다. 구름으로 멍든 듯한 하늘처럼 검은 부츠에 가격 당한 얼굴에 붉은 피멍이 오르기 시작한다.



기사라면 스스로 의지할 것을 찾아내는 법이다. 이 앞으로 일어날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에 의지해서 살아간다. 힌셔는 자신의 기사들의 손에 족쇄를 채웠다. 그 사슬로 인해 명예로운 결투라면 누구나 목숨을 걸 것이다. 누구라도 기어스를 함부로 어기지 못할 것이다. 

네가 그런 대단한 일을 해냈기 때문에 언젠가는 별 것도 아니게 되는 날이 올 거야. 그럼에도ㅡ 

창상을 움켜쥔 그에게 들리는 과거의 말이 정신을 거듭 삼켜온다. 그럼 대체 무엇이 남나? 대체 나에겐.. 

기사가 되라, 힌셔. 

그날 목숨까지 빼앗지 못한 건 그렇게까지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새까만 닭.  

재능이 있다느니 타고 났다느니, 결국 정말로 기사가 되는데 필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는 걸, 뼈저리게 알고 있는 자였기에 그를 끝장내지 않았다. 어린 기사는 힘과 강함을 양택해야 한다고 했지만 강해지는 일도 힘을 얻는 일도 그들에겐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네가 내 눈을 보면 무엇을 보게 될까. 새까만 닭. 너 역시 사선을 넘어오며 나 못지 않게 많은 걸 버려왔을 텐데. 그러니 그렇게 강해질 수 있었던 거겠지. 기사질이라 비웃으면서도, 둘은 거기에 모든 것을 바친 이들이기에. 기록되지 않는 그날의 전장은 사력을 다할 가치가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힌셔는 그곳에서 마저 기어스를 지켜내는 이를, 명예를 저버리고도 기사가 되었던 어떤 순간을 목격했다고 믿었다. 

그때의 타협을 종식시킨 건, 되돌릴 수 없는 어린 기사의 죽음이냐? 아니면 애초부터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던 거냐. 그러면서도 기사로서 네가 내게 요구하는 것들을 나는 참을 수가 없다. 그건 너무나 나의 스승을 닮아 생각나게 하기에....

벽돌로 포장한 수도 길바닥의 갈라진 오래된 틈들로 피가 고인다. 채 낫지 않은 늑골을 힌셔가 발로 차자 와론이 응답이라도 하듯 더욱 살아나 반격을 가하며 달려든다. 와론의 옆구리를 뚫을 듯이 나타난 론누가 힌셔의 목을 향해 날을 그었다. 높은 위치에서 하마턱이 공격을 제지하고 추진력 그대로 창날을 바닥에 내리 찍는다. 역류하듯이 동시에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린 두 기사의 공세가 다시 공중에서 깔끔하게 교차하고 떨어져 나간다.

그라는 존재 자체가 기사들의 실수였으므로 그로서는 도저히 기사를 좋아할 수 없다. 그리고 그와 창을 맞대는 이는 기사들의 척수 같은 자이므로, 와론이 진심으로 오늘 힌셔와 싸울 마음이 없었던 간에, 그들 사이에 남은 부채의 당사자가 그들이 아니건 간에, 애초부터 비뚤어질 수 밖에 없다. 금속끼리 부딪힐 때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감각이 극심해져 결국 폭발하고 만다. 내게 대체 무얼 바라지? 너와 같은 편이 되어 싸워주기라도 하라는 거냐. 힌셔? 

이보다 더할 나위 없을 정도의 최악의 적이다. 론누가 십자로 마주 돌며 마력으로 된 검날을 카각 거칠게 긁어 내리며 떨어져 나간다.

찰나 등을 보인 검은 망토가 빠르게 몸의 회전을 따라 휘감기며 붉은 깃이 잔상을 남기고, 힌셔를 사이에 두고 론누와 서로 반대방향으로 거세게 발차기가 뻗어온다. 산란하게 방향을 꺾은 창이 되돌아 오자 하마턱의 왼편으로 몸을 물린 힌셔에게 다시 완갑을 두른 팔뚝이 다가온다. 

와론은 참으로 오랜만에 그답지 않은 투기가 몸 속을 역류하는 게 느껴졌다. 늘 무겁게 뒤집어 쓰고 다니던 무쇠의 투구에서 목을 조르는 듯한 숨막힘이 느껴진 것은 오랜만이었다. 수도의 한복판. 기사와 싸워서도 안되고 사람의 눈을 피할 수 없는 장소. 높은 성곽이 한면을 지키고 있어 그보다는 상대에게 더 큰 유리함을 주는 지형. 

익숙한 투구의 시야가 유달리 좁은 건 그가 지쳐버린 탓은 아니다. 계획도 계책도 없이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게 달려드는 일은 기사사냥꾼의 스타일이 아닌 그가 처음으로 사냥했던 미숙한 날의 일을 떠올리게 한다. 그때의 자신은 포식자를 물어뜯기 위해 발악하는 새끼와 다름 없이 그저 맹렬한 분노에 휩싸였다. 오로지 목적 없는 순수한 싸움. 그 순간을 겪고 나서야 그는 깨달았다.

아. 그에게 기사가 어울린다는 와론의 말은

그야말로 적절했다는 것을.



힌셔에게 맞은 투구가 움푹 찌그러져 패인 와론이 먼지와 피를 뒤집어써 걸음을 비틀대면서도 고고하게 창대를 들어올린다. 론누의 끝이 그의 손에서 눕고 하마턱이 푸른 검격을 사선으로 치켜 올린다. 

큰 게 온다. 


"힌셔, 선배...." 

힌셔는 그에 대한 아주 비참한 동질감과 이해심에 사로잡힌다. 와론이라는 자가 기사들 틈에서 홀로 담수에 바닷물을 들이 붓듯이 분란을 일으켜오면서 그 자신은 어느 심해에 묻어버렸는지조차 알 수 없기에, 누군가 찾으려 해도 이미 늦어버렸을지 모른다. 힌셔와 세계 사이에 발생한 건 분명 비이성적인 이력이었다. 그와 자신은 지나치게 닮아있어 힌셔는 그를 지나치게 믿게 된다. 애초에 그와 자신 간에 벌어진 이 싸움은 불합리해, 견디기 힘든 수압이 그들에게 작용하고 있었다.



마치 큐브를 끼워 맞추듯 하마턱의 양쪽이 하나씩 불을 내뿜으며 이윽고 힌셔의 손 안에서 거대한 검이 푸른 덜미를 쳐들었다. 처음 저 광경을 보았을 때 일었던 고양감이 다시 와론를 덮어온다. 그 검붉은 하마를 이 지경까지 밀어 붙인 건 영광스럽기까지 하다. 


그노제스. 네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좋았을 텐데.


하, 과연. 망토자락을 젖히며 주변을 빨아들이는 마력에 정면으로 마주 선 와론이 작게 탄식하며 되내인다.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 네가 기사들을ㅡ

네게는 갚을 빚이 있다. 힌셔.

와론. 안심해라. 내 피의 남은 한방울까지도 네 것이다.



"결국 네가, 이런 세상을 만든 거다, 힌셔!"

절규하듯 메아리치는 고함과 함께 론누가 지면을 박차고 솟아올랐다.





2.


저도 모르게 하늘을 보며 비를 청했던 날, 저녁 늦게 쏟아 붓는 듯한 장대비가 몹시도 내렸다. 창밖이 검푸르게 물드는 소리를 듣고 힌셔는 우산을 챙겨 시가지로 나섰다.

500년이라는 긴 시간이 무상하게 두 눈에 담기는 니젤의 밤거리에는 암록의 안개 속에 모든 세월의 흔적이 흐려져 있었다. 돌로 만든 도로의 포장재 위를 지나는 걸음이 무엇도 밟지 않은 것처럼 헛돌면서도 힌셔는 그 주 내내 떨칠 수 없었던 어떤 감정에 빠져있다. 끈적하게 밑바닥에 고여 발목을 붙들어대는 미련이었다.


그러니까 자꾸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어차피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수명이 전부인 시간.

그대와 모두 나누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고.

 

만약  그날로 돌아가면 그에게 다시는 자신을 기다리지 말아달라고 말하려다가,

그가 없어도 빛나는 사람이니 부디 원하는 삶을 살아 달라고 등을 떠밀다가도,

어느새 우산을 벗어난 두 손을 얼굴에 겹치고 눈가를 빗물로 온통 적셨다. 그에게 받을 원망도, 곁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도 모두 피해 도망가려는 것 같은 모양이 꼴사나워서.

상념은 그치지 않는 비와 같이 흘러 어느덧 기사가 되지 않았을 것을 바라다가



…이내 그 생각을 털어냈다.




그노제스,


난 너에게 차가운 사람이었던가?

혹은 내가 없는 사이 너를 홀로 두어서 나를 차가운 사람으로 여기게 했던가.

가지지 말아야 할 후회임를 알면서도 가지게 되는 마음은 우천에 떨어져버린 나팔꽃의 꽃말과 같이 덧없다. 봉우리 채 버려진 가약이 가여웠다. 내가 아는 한 그대야말로 세계로부터 사랑을 받던 사람이었으니까. 약속 하나 제대로 지켜낼 수 없었던 나는 애초부터 그대 같지 않았소, 그노제스. 이곳의 그대는 소식을 듣고 홀로 무슨 상념에 잠겼소? 내가 내 손으로 어떤 일을 해야 했는지. 그대에게도 전해졌겠지. 

기사로서 타고난 힘은 때론 내게 저주와 같소. 이제와서 보니 기어스는 그런 우리를 붙드는 유일한 구명줄로서 고안해낸 것이나 다름 없다는 생각도 한다오. 그리고 나를 붙드는 것이 있다면 그건 지금 여기에는 없는 것이오.

그노제스. 나에게 너무 마음 쓰지 마시오. 나는 다시 깨어난 날 가장 먼저 그대를 떠올렸다오. 500년 전과 변함 없이,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면 그대는 여전히 나를 기다려 줄거라 믿었소. 

내가 그대를 어떻게 그리지 않겠어. 다정스런 그대를 사랑하지 않았겠소. 

그대가 나를 잊을 거라 의심하고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단 말이오. 이런 나조차 또한 그대에게 사랑을 받았다는 건 부인할 수 없이, 견딜 수 없이 사실이오.

홀로 남고서도 500년의 시간이 지나도록 남는 사랑의 형태를 전해주었던 나의 가련한 연인이여...

내게는 이 장마보다 그대의 사랑이 더욱 쏟아지곤 한다오.



이런 때에는 어찌 할 도리를 알지 못하는 힌셔로서는 불이 모두 꺼진 다층의 고택하나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결국 그를 닮아 맑게 비를 개어내는 영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원래의 약속을 주는 것이다. 설령 지켜지지 못함을 알아도.


그대는 나를 포기하지 않는 강한 사람이요. 그러니 나 또한 곁에 없어도 당신을 생각하며 잘 지내도록 노력하는 기사요. 굳은 결심을 담으며 거친 그대의 손에 뭉쳐 맞잡으며, 제대로 된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모든 연모의 마음을 담아서.

그가 사라진 500년 뒤에도 그에 대한 연모가 온통 마음 밖으로 내릴 수 있게 다정하고 다정한, 눈처럼 새하얀 그의 미소를 두 눈 속에 새겨 두는 것이다. 

다시 당신에게로 돌아가겠노라고. 나를 기다려주어서 고맙다고.



계절과 함께 밀려든 밤비가 끝을 보이지 않아 눅눅하고 음침한 날씨에 힌셔도 끝내는 어쩔 수 없는 갈애에 사로잡힌다. 힌셔가 그를 보지 않을 때에도 들여다 보았듯이 그도 힌셔를 들여다 보았겠지. 무엇도 상관없이 그노제스의 투명한 눈 속에는 그가 비추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계속 걱정했을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자신을 이런 날이면 더욱 걱정했을 그의 모습이 생각나서,

기다림이 비워둔 자리를 첨벙댈수록 어떤 마음은 더욱 다가와 짓이기곤 한다.

단순한 그는 곁에서 직접 애정을 건네는 방식 밖에는 알지 못한다. 그노제스가 해주었듯이 다른 시간에 떨어져있는 사람을 위로하는 건 그가 하지 못하는 일로, 그노제스도 저 밖을 표류하듯 떠돌았을 텐데, 그렇게 마음이 멈출 때마다 자신도 멈춰버릴 것 같았다. 500년이 지난 이곳에 자신을 매어주던 좌표를 잃고 표류할 지도 모른다.


…차라리 밖으로 나가지.

그래서 밤이 늦도록 등잔불도 제대로 붙지 않는 굵은 빗줄기 속에서 그와 함께 다녔던 곳을 헛돌았다. 흰 부츠가 철퍽이며 진흙과 빗물을 튀겼다.

그 역시 자신이 사라진 수도에서 버티지 못했던 것 같다.

손을 마주 잡을, 자기보다 한참 큰 어깨에 기대오는 그는 어디에도 없다. 눈 앞에 없다면 차라리 그를 찾아 박차고 나갈 수라도 있는 편이 좋으련만. 그저 없는 부재에 몸서리가 쳐오른다.

힌셔는 우산을 치운 허리께를 내려다 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자신이 없는 시간들을…


"어이-

영웅.

왜 혼자서 비를 맞고 있나?"

"500년 전에 사람들은 우산 쓰는 법도 모르나?

아니면 청승이라도 떨고 있던 건 아니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묻혀있던 기척이 그에게 말을 건다. 

눅눅하게 소나기를 뒤집어 쓴 힌셔는 조명 없는 그림자 속에서 걸어나오는 음영 없는 검은 망토를 빤히 보았다. 목 없는 저주스런 유령처럼 웅덩이를 찰박이며 다가온 기사는, 어둠 속에 있었다기 보다는 어둠이 그에게 머물르고 있었다. 그의 투구마저 무광의 흑탄 같이 검은 윤곽으로 어렴풋했다. 


"대련이라면 됐어. 오늘은 비를 좀 맞도록 하지."


그 미온한 반응에 검은 창대가 건방지게도 살기를 품고 까닥인다. 

"기사가 된 것을 후회하나. 힌셔? 

영웅의 자리가 벅차다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는데."

등 뒤에 위치한 론누의 창날이 남의 불운을 베어주기라도 할 양 반짝 금속성의 휘광을 발하며 인사를 한다. 빗줄기가 머리를 적셔 얼굴에도 달라붙고 턱을 따라서도 계속 흘러내린다. 힌셔는 잠시 창의 끄트머리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검은 망토는 푹 젖은지 오래였다.

"그 방법이라면 별 수 없어. 내가 이미 해봤다네. 이래봬도 500년 전에는 꽤 많은 일이 있었단 말이네…"

동으로 주조한 동전의 굳은 옆얼굴 형상 같이 무감한 눈이 고택 너머로 아득히 시선을 꺼트렸다.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을 찾아주지 그럼."

나도 비 맞는 건 전문이라서 말이야-. 어느덧 힌셔의 앞에 도달한 기사가 그의 손목을 잡아 올리고는 제편으로 이끈다.

비가 오는 날이야말로 구름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게 가리운다.




그는 비가 올 적 마다 유령을 보았다. 비가 오면 모든 게 전부 사라져서 그 무엇도 사라지지 않는다. 미끄러지듯 물수레를 기울여 퍼붓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감고 오직 빗소리에 귀를 모아 젖은 치맛자락을 잡고 그를 따라가곤 했다. 와론을 끌고 나선 유령과는 달랐지만 그는 오백년 전의 망령이 수도 구석을 떠돌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새까만 닭이 수도에서 머무르는 거처로 그를 데려오고 나서 와론은 방 안으로 들어가 수건으로 자신의 머리를 닦고 투구를 다시 쓰고 거실로 나온다. 그는 앉은 이에게 닦을 것 하나를 집어 던진다. 파랗게 질려 젖은 얼굴로 무릎 위에 던져진 천을 보던 힌셔의 머리카락 줄기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진다. 그는 앞에 놓인 따뜻한 잔을 손에 쥐고 입으로 기울였다.

와론은 복도에 난 방으로 들어가 잠시 뒤적이더니 나무판 하나를 꺼내온다. 맞은 편 소파에 털썩 앉고는 자르르 주머니 안에 든 돌을 쏟는다.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기대던 힌셔가 장방형의 목판 위에 십자선(十字線)로 겹쳐 파인 홈을 고개를 틀어 바라보더니 입을 연다. 

"단사(簞士)이로군."

"알아? 좋아. 그럼 얘기가 빠르겠군."

열 개의 가로선과 한 편당 기사 둘을 포함한 말이 16개. 판의 비어있는 상대의 진 아무 곳에나 새로 둘 수 있는 여분의 말이 10개로 총 52개의 말. 진영 마다 하나씩 궁(宮)이 두 채. 사이에 강(江)이 하나. 

"잠시만. 안 한지가 오래 돼서. 기억을 좀 더듬어 보겠네."


가볍게 복기를 마치고 양측에 돌을 놓아 판을 깔면서 와론이 한 가지 제안을 내놓는다. 

"그냥 하기는 아까우니까, 말을 잡을 때마다 상대에게 질문을 할 기회를 주도록 할까. 말 세 개에 질문 하나."

힌셔는 그 제안이 지금 상황에서 적절한 방법이라 생각해 동의했다.

"장(將)이 먼저야."

검은 장갑 끝에 뻗어나온 창백한 손가락들이 그에게 권한다.  





"그럼 내가 먼저 묻도록 하지."

먼저 세 수를 따낸 힌셔가 구부정한 자세로 묻는다. 

"내가 깨어난 것이 잘못됐다고 보는가?"

"지금 그걸 나한테 묻는 거야?"

오 백여년 전 기사가 있는 제국 내에서 일반적인 군사전략은 통용되기 어려웠지만 잦은 전쟁으로 인해 새로운 전술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동대륙의 반상 게임을 들여와서 형편에 맞게 바꾼 것이 유행했고, 귀족이나 무인들 사이에서 왕을 중심으로 한 영지전을 전제로 훈련의 일종이나 전술 시연용으로 쓰였다. 그 시대의 기사는 명예직 보다는 군사에 가까웠다. 

"동대륙과 전쟁이 터진다면 전쟁을 겪어 본 당신은 전력이 될 테지. 의회에 신뢰를 주지 못하는 기사들의 입지를 설득해 바꾸어 놓을 수도 있을 테고." 

그러나 이 시대에 기사는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기초를 세운 장본인이 힌셔였다. 지금에 와서 기사, 명예나 신뢰의 상징으로서의 그가 다시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나머지는, 글쎄. 당신의 역할은 당신이 찾아야지..."

와론은 아리송하게 끝을 흐린다. 힌셔는 그것으로 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힌셔를 과거의 사람으로 봐야 할지 현재의 사람으로 봐야할 지는 와론에게도 모호했다. 정신은 지나간 시대에 머문다 해도 그가 발을 붙이고 있는 니젤은 그 이후로 수 백년은 지나있다. 둘 수록 새록새록 감이 돌아오는 걸 느끼며 힌셔는 궁금증이 일었다. 건너에 앉은 이는 과연 무엇 때문에 그를 불러 세워 이곳에 앉혔나. 


"이거 말일세,"

와론의 차례였다. 그의 손이 나무판을 툭툭 건드린다. 

"장이 죽으면 승부가 끝나나? 어떻게 생각하지?"

힌셔는 의외의 질문에 잠시 고심하다 답한다. 

"양사제(兩士)라는 게임의 룰이 있다네. 장을 뺀 채로 궁을 비워두고 두 기사를 죽이는 편이 이기는 게임이지. 사실상 후속전이나 다름 없네.

재미있지. 궁을 방어할 필요가 없으니까. 더 공격적으로 수를 둘 수도 있고, 기사도 더 멀리 움직일 수 있도록 행마도 달라진다네. 보통 방사형으로 두 칸까지 움직일 수 있지."

"왕이나 지킬 왕손까지 모두 존재하지 않는 경우를 상정한 거군. 실제론 어때. 그런 경우에도 전쟁을 계속하나?"

힌셔는 새까만 닭치고는 꽤 순진한 말에 다 알면서 일부러 묻지 말라는 듯이 숨을 픽 내쉰다.

"현실에서는, 거기까지 간 경우에는 한쪽이 완전히 전멸할 때까지 대부분 멈추지 않지."

싸우는 이들의 천성을 모를리가 없는 덤덤한 목소리로 덧붙인다. 와론은 쓰러진 마를 상 바깥으로 빼내어놓는다. 과연 전쟁의 시대를 겪어오고 안정시킨 장본인인가. 상대의 수가 만만치 않아 와론은 투구 깃을 매만져 넘긴다. 

밖으로는 물 바구니를 실은 밤의 수레가 터덜터덜 끌려가며 억수같이 물을 쏟아붓는다. 힌셔가 한쪽으로 몰아낸 와론의 병졸들 사이에 병(兵)과 차(車)를 깔았다. 상대의 차를 잡는 전법이다. 

"이봐, 이건 벌써 파훼 된지 오래된 방식이라고. 그러면 기사(象)를 다 잃을 텐데." 

"그런가? 누군진 몰라도 잘도 생각해서 깼군." 

그렇게 말하며 와론이 병(兵)을 잡았다. 힌셔가 아랑곳 않고 기사 하나를 더 움직인다.

"음? 요즘 것과는 조금 다르군." 

"병이 하나 없어도 차를 잡는 데에는 문제가 없어. 지적유희가 고도로 발달한 게 아닐세. 오히려 평화가 없는 시기에 단사는 더 급속하게 발전했지."

곱씹자니 그의 스승은 전략을 가르치는 용으로서 단사를 배우게 했고 놀이로 둔 적은 거의 없었다. 그래, 유희 따위가 그들에게 필요한 까닭은 무엇이던가. 치열함. 반상 위의 말은 모의전이나 진배 없다. 그렇게 말하며 힌셔가 와론의 병졸들을 쓸어내는 동안 와론은 그걸 남의 집 불구경하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대륙을 폭풍처럼 뒤흔들던 전란마저도 시간에 따라 풍화하면서 하나의 반상 위의 놀이로, 반상에서 마음을 가라 앉히는 사색으로, 심지어는 상대를 읽고 길을 암시해내는 해구책에까지 일구어진 것이다. 태평한 시기를 거치면서도 전쟁에 대한 욕구는 그 잔인성을 배제한 채 대국의 형태로 발현되고 승화했다. 전쟁이 없는 시대에도 판 위의 병법이 아닌, 살아있는 병사와 적군과 사이를 오가며 적장과 나누는 수담이었다. 

힌셔는 초대 그노제스가 정확히 그 뒤로 어떻게 지낸건지는 묻지 않았다. 와론이 게임을 제안한 이유는 어느정도 그의 물음에 답해주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마치 불문율이라도 되는 양 그에 대해 침묵하는 태도에 와론도 반쯤 모른척하며 수를 두었다. 와론과 힌셔는 돌을 번갈아 올려 서로에게 말을 주고받았다. 단사는 더 낮은 말이라면 자기 말도 잡을 수 있었는데 와론의 말이 장을 압박하자 힌셔가 사(士)하나를 먹으며 달아났다. 기사(象)가 내리 돌다가 와론의 기사 하나를 먹자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수 하나가 지나갈 때마다 말이 쓰러지고 질문이 몇 차례 오갔다. 

10 - 2  기사(象)

4  - 3  병(兵)

11 - 8  기사(象)

4  - 4  병(兵)

11 - 4  차(車)

11 - 4  장(莊)


"내 차례로군." 

힌셔는 와론의 말 하나를 치우며 말한다. 

"자네가 원하는 건 복수 인가?"

"직설이네."

확신에 가까운 말에는 많은 것이 이미 생략된 채다. 와론은 그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병(兵)이 기사(象)을 잡고

한 칸을 움직이기 위해 치밀하게 전열을 다듬는다. 

말을 잃는 건 중요한 문제였지만 그렇지 않기에 수를 두는 손이 망설임 없이 나간다. 

반상 위에선 쉬운 것들이 어려워지고 어려운 것들이 쉬워진다. 


"레툰에는 왜 갇혀 있었던 거야?"

"오백 년 전에 악마기사를 토벌하고 돌아갈 당시 길을 잘못들어서 그곳에 가게 되었네. 당시에는 그 죽지 않는, 람이 그의 일행과 함께 살고 있었어. 나는 자세한 전후 사정은 모른다네. 그러나 그때도 말토가 있었고 둘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졌지. 둘이라고 했지만 람도 그녀도 자신을 지킬 수 없었으니 난 그들을 대신해서 싸웠네... 내가 갇혀 있던 얼음마법은 말토에서 한 공격이지. 그 후에 일은 모르지만 아마 그녀는 죽고 람은 말토에 잡혀 갔던 것 같네."

"....뭐?"

"그러니까 람이ㅡ"

"그 불멸자 자식은 알고 있었다고?"

나뭇판 위로 잠시 침묵이 오간다. 

"죽었다고 생각했겠지. 

그때에는 그 상황에 처하지 않고서야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았네. 난 그들에게 도움을 받았고, 그의 불멸에 대해 정확히 모르는 채로 그가 죽는 걸 보고 이성을 유지하긴 어려웠으니."

정신이 들고 나선 오백 년이 지나있었다는 건가. 와론은 그걸 견뎌낸 쪽이 의심스럽다는 듯 투구 안의 어둠 속에서 눈썹을 까딱 치켜올린다. 

1  -  8 기사(象)

12 - 9 기사(象)

1   - 2 기사(象)

11 - 5 사(士)

"기사는 소중한 존재를 가져서는 안되는가?"

너희는 이런 단순한 명제조차 대답하지 못해. 와론은 말할 테면 말해보라는 듯 질문을 던진다. 기어스를 만들어낸 너라면 기사에 대해서도 정의 내릴 자격이 있고 지금도 네 입에서 나온 말에 그들의 정의가 달려 있겠지. 그리고 실패도... 빗줄기와 함께 유령이 속삭이는 듯한 귓가의 소리를 따라 와론은 말을 옮기고 있었다. 와론도 답하지 않은 질문이 있으므로 힌셔도 대답을 피할 수도 있었다.  

우물에서 물을 긷는 듯한 목소리로 힌셔가 입을 열어 말을 꺼낸다.

"와론, 나는 가끔

기사가 된 것을 지독하게 후회하네…"

와론은 왜 아무 대답이 없었을까. 무언은 긍정일 수도 부정일 수도 있다. 빗소리 속에 그의 투구 안의 코의 옆날 마저 드러날 것 같은 뇌우가 쳐도, 힌셔는 그 속을 볼 수 없었으니 그의 대답을 스스로에게 좋을 대로 정했다.

희미한 불빛 하나 없는 실내에서 건너편에 앉은 심연 속으로 등불이 깜빡 깜빡 그를 비추었다가 흐려진다. 살림 받느니 차라리 구해주는 것이 낫지. 

"가지고 싶지 않았다면 나 역시 가지지 않았겠지."

"!...."

투구깃이 퍼특 떨린다. 

"그도 아마 내가 잘 지내기를 바랄 거라네."

그노제스, 네가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서 기억되는 건 기쁜 일이다. 네 지독한 연인으로서- 그렇게라도 너의 이름을 들을 수 있다는 게. 네가 살아있지 않다는 사실에 지키지 못한 명예가 떠오른다. 

힌셔는 자신을 늘 받쳐주었던 그의 단단한 미소를 따라 지었다. 


11 - 3 차(車)

10 - 4 장(莊)

11 - 5 기사(象)

"복수. 하지마라."

"그건 질문이 아니야."

힌셔는 이미 결론을 내린 후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버텨낼 뿐이겠지. 어두움이 더이상 어두움이 아닐 때까지는. 슬픔이 더이상 슬프게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는.

와론은 진짜 와론 ㅡ그의 벗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 걸 짊어지고 살아갈 만큼 강하지 않았어,

너는. 그런 무게를 견딜 만큼 상냥하지 않았어.

내게도 잔인하게 굴었잖아. 그러니 아무 미련도 네게 남지 않은 척. 너와 세계 사이에 무관하고 드넓은 빈틈이 존재하는 척.

그저 잔인한 기억들은 과거가 감당하고 네게는 쪼개낼 필요조차 남지 않은 척. 우리가 만나고 헤어진 사건들은 다분히 무수한 우주만큼이나 개연성도 운명도 띄지 못한 것들인 양.

무엇도 개연을 말소할 수는 없다고 너는 단정했잖아. 그것에 매여 노예처럼 살아가느니, 네가 나아가야 길에선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겠다고. 

네가 빠져나가야 할 늪은...



주먹이 파고들어, 안쪽의 내장을 짓이기는 감각. 피부가 찢어져 인육에 그대로 단단한 손등이 파고드는 감각.

눈가로 피가 튀었다. 너를 잃었을 때 울었느냐고?

아니. 울지 않았다.

내가 처음 고개를 떨군 날은 기사사냥을 한 뒤였다. 손을 타고 흘러 흙을 적시는 건 붉은 눈물이었다.

젖은 안구에서 흐르는, 숨구멍 사이로 멎지 않는,

한줄기의 가느다란,

붉은 폭포.


너를 잃은 날 내가 손에 묻힌 건 흙 뿐이었다.

자신을 죽이는 인생에 의미가 있어? 묻는 말이 스스로에게 도로 떨어진다. 와론은 주먹에 피를 묻힌 채로 대답한다. 마치 복수귀에게나 할 법한 말이야, 그건. 살려준 목숨을 버리고 싶다는 건 아니었다. 

사랑은 증오보다 강하다…는 건가.

전투는 그 이후로 그의 삶의 전부였다. 오로지 싸우고 기사를 죽이기 위해서 창을 겨눌 곳을 찾아내고 살아왔으니까. 피로 대신하고, 생명으로 값을 지불하고, 뼈를 갈아내는 대신 와론은 기사의 안에 오롯이 머무를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그게 세찬 빗줄기로 가득 찬 무거운 비구름 속을 헤매는 것보다 덜하다고 하지는 않겠다. 

네가 내 눈을 직접 본다면 무엇을 얼마나 읽어낼 수 있을까? 힌셔?

그러나 투구 밖으로 비쳐보길 그런 빗속에도 길이 있기는 했다. 낙우가 흐르듯 가야 할 방향이 있기는 했다. 

돌아와야 할 곳으로 돌아간 건 

너 역시 마찬가지라고 힌셔... 


10 - 3 차(車). 

"자. 장군이네."

매끄러운 반상 위에 손 끝으로 집어든 가벼운 장기말 하나가 달칵 자리를 잡는다. 힌셔는 가뿐한 말투로 말하며 기지개를 핀다. 그늘 속으로 얼굴이 숨는다.

두 팔을 다리에 구부정하게 걸친 채로 손이 떨어지고도 한참 차(車)가 놓인 자리를 투구 속 시선이 응시한다. 어느 틈에 나버린 승부에 반발하지 않는 그는 아무 반응도 없다. 밖으로는 보이지 않는 밤비가 줄줄 새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찬 비가 죽음을 상징한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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