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의 기사&애늙은이

[커미션/애잔&파판14] 빛무리의 기사

애늙은이-잔불의 기사&파판14 크로스오버 커미션

* 커미션으로 쓴 [애늙은이-잔불의 기사]&[파이널판타지14] 크로스오버 글입니다.

* 신청자님 요청에 따라 전문 공개하며, 이 글의 어떠한 문장도 허락없이 이용될 수 없습니다.

* 파이널판타지14의 메인퀘 6.2까지의 이야기가 희미하게 섞여 있습니다(6.3 섞였을 수도 있음). 조금이라도 스포일러를 당하기 싫으시다면, 읽는 것을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

* 빛의 전사=모험가는 특정 빛전을 지정하고 쓰지 않았습니다. 다만 효월 나이트 주직 빛전이예요.

* [잔불의 기사]의 경우, 나진(견) 구출작전 성공 후~나륜vs승냥이닭 이전 어드메의, 본편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어느 시공으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해당 플롯은 [잔불의 기사] 144화가 최신 유료분이던 시점에서 구상되었으므로, 이후 본편과는 다소 모순이 있을 수 있습니다.

* [잔불의 기사] 전작인 [애늙은이]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기 때문에, 가급적 애잔 모두를 읽고서 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 어느 쪽 장르이고, 원작에서 공인되지 않은 모든 설정은 개인 팬피셜입니다.


세계를 넘는다. 그 문장은 빛의 전사이며 어둠의 전사이기도 한 모험가에게 있어 그럭저럭 익숙했다. 도시국가나 다른 대륙을 뺀질나게 드나드는 것처럼 굴었다는 거다. 거기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다른 차원인 제1세계를 자유자재로 넘어 다닐 수 있는 게 저 하나뿐인지라 새벽의 혈맹이 해체된 이후에도 산크레드는 뜨문뜨문하게 수양딸과 그 파트너의 안부를 물어왔고, 모험가는 그가 우물쭈물 말을 돌려 뭉개가며 건넨 선물을 린과 가이아에게 기꺼이 전하러 가곤 했으니.

가는 김이라며 아는 얼굴들을 곧잘 만나기도 했다. 이번에는 리예 기아 성이다. 지난번 제1세계를 방문했을 때, 모험가는 아주다야 씨의 건이 급한 나머지 루나르에게 차원 도약 가설을 검증 중인 마녀 씨의 안부만 휘날리듯 전해주고 쓱 돌아갔는데, 덕에 꿈속에서 저의 아름다운 가지가 몇 날 며칠을 투덜거렸던 거다. 그리하여 당신의 소중한 어린나무가 다음 방문에는 꼭 찾아가기로 약속했고, 그게 오늘이었다.

호기심이 많고 장난을 좋아하는, 그리고 그만큼 사람을 사랑하는 이번 대의 티타니아 요정왕은 꿈속에서 저를 그렇게 갈궈놓고는(물론 다 애정임은 안다만) 언제 그랬냐는 듯 열렬하게 환영을 해왔다. 다른 픽시족들도 간만에 이 땅을 밟은 친애하는 인간과 놀고 싶다며 덤벼들었지만 요정왕의 독점을 막지는 못했다. 온 마을의 픽시들과 노는 것과 페오 울과의 독대 중에서 고르라면 후자가 압도적으로 평안하기에 모험가는 어물어물 웃으며 그 애들에게 손인사나 해주었다.

그리하여 처음의 계약처럼 페오 울의 어린나무는 비록 그의 아름다운 가지가 제게 있었던 일을 앎에도 다시 한번 제 입으로 모험담을 설명하도록 한다. 원초세계에선 맛볼 수 없는 다과를 우물거리면서 그렇게 지난날을 돌이키고 있으면 몇 개월 전인가에 온 세계가 한꺼번에 멸망 목전까지 갔던 것이 거짓말 같기도 했다.

“―그렇게 된 거야.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페오.”

“흐음, 역시 내 귀여운 어린나무에게 직접 듣는 이야기가 훨씬 좋다니까. 그런데 매정하게도 내 어린나무는 잘 찾아오질 않지.”

“그, 그건…. 미안, 내 아름다운 가지.”

“아하하, 너는 이런 수많은 굴곡을 겪고도 끝까지 순수하구나, 나의 어린나무! 그냥 놀린 거야. 너는 자유롭게 세상을 거닐어 주렴.”

“페-오….”

저 대신으로 요정의 땅에 메여준 페오가 저를 그리 놀리고 있다가 문득 가만히 들여보다가 장난스레 웃었다. 모험가는 지금껏 오만 사건을 겪어왔던 경험에서 비롯한, 무언가 매끈하고 차뜩한 감을 느끼고 자세를 바로 한다. 그 곧음을 미뻐하며 페오가 말을 이었다.

“내가 이번에 어린나무를 왜 꼭 오라고 부른 줄 아니?”

“…혹시 제1세계에 뭔가 일이 생겼어? 내 친구들까지 불러야 할 정도로 큰일일까? 아니지, 지금이면 린이랑 가이아도, 아니면―.”

“이런,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렴.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너희가 이 세계를 맡기고 간 아이들은 각자 잘해 나가고 있다니까? 문제는 너야, 너. 가끔은 미련하기까지 한 나의 사랑스럽고 소중한 어린나무.”

수많은 야만신을 토벌하고 세상을 몇 번이고 구한 백전연마 빛의 전사라고 하기엔 때때로 너무도 허술한 표정을 짓곤 하는 모험가가 페오의 물음에 단박에 표정을 굳히자, 이번 대 티타니아는 손사래를 치며 그의 불안을 부정하며 이마를 툭 밀었다. 그 손길에 요정 특유의 에테르가 스며든 것 같아 모험가는 고개를 갸웃한다.

“내가 왜? 아주다야 씨 문제라면 든든한 동료들이 같이 갈 건데.”

“후후, 내가 걸어준 마법은 길을 잃더라도 안전히 돌아오게 하는 미아 방지 대책이야! 우리 픽시는 인간을 길 잃게 하기도 하지만 길 안내도 할 수 있으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인데, 내 어린나무는 이 아름다운 가지의 위대한 힘을 감사하게 될 거야.”

“길, 이제 예전만큼 잃지는 않는데….”

페오가 여타 픽시족에 비하면 인간 친화적이어서 그렇지 확실히 요정이 맞는구나, 따위의 감상을 주워 삼키면서 모험가는 이만 가봐야 한다고 했고 페오 울은 그를 순순히 보내주었다. 만족감으로 찬연하게 빛나는 요정왕의 존안에 대고 다음에도 풍성한 이야기를 들고 오겠노라고 약속하자, 페오는 소리 높여 웃었다.

그리고서 모험가는 익숙하게 제1세계에서 원초세계에 맞닿은 경계면을 넘었다. 차원을 넘으면 으레 보이곤 하는, 깊은 우주의 바다까지는 평소와 같다. 그런데 거기서부터 뭔가 이상한 거다. 여느 날처럼 살아있는 여러 세계의 파편이 비추어야 할 곳이 희고 검은 형태로 아스라이 뭉개진 게 아닌가. 알 수 없는 사태에 자주 조우해온 자 특유의 경계심을 가지고 그걸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는 돌연 깨달았다. 아지랑이처럼 생긴 그것이 아무리 보아도 사람의 형상을 입었다는 것을.

동시에, 그것과 눈이 마주치고 정신을 차렸을 때 모험가는 크게 반원을 그으며 그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세계’가 헐거워져서 이물질이 들어온 건가? 그때 바로 멸망하는 것보다야 나았겠지만, 귀찮네….”

까무룩 기절하면서 모험가가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서류의 산에 죽어가던 각 도시 수장과 비슷한 탄식이었다.

 

누군가 제 뺨을 툭툭 치는 감각에 모험가는 눈을 떴다, 가 냅다 숨을 집어삼켰다. 윤곽만 까만 아지랑이로 존재하는 사람(인지 혹은 에테르체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이 코앞에 있었다. 그 순간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것은 순전히 온갖 수라장을 뚫고 살아남은 경험의 힘이었다.

“깼냐?”

“…누구, 시죠?”

대뜸 시비조 반말로 말이 걸리긴 했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아우라를 읽은 모험가는 약간 망설이다가 존대하기로 한다. 그게 정답인 모양이었다. 눈코입 그 어느 하나 보이진 않았지만, 그가 씨익 웃는 게 느껴졌다. 아지랑이가 마저 입을 연다.

“이 세계의 관리자쯤 되는 셈이지. 너, 아니지, 여기 인류에게 있어서는 세계의 의지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고.”

“아, 네…. 그래서, 제가 여기서 뭐 해결할 일이 있는 건가요?”

“그건 네가 일이 아니야, 다른 세계의 가호를 받는 인간. 따지면 너는 피해자인 셈이지. 일이라면 내가 해야 하고. 물론 너도 거들 게 있기는 할 테지만. 음, 이건 발언 불가겠군. 법칙을 벗어나나.”

세계의 가호라는 건 하이델린을 뜻하는 것이겠거니 싶다. 인류를 생존하게 하여 끝까지 걷게 하고자 하는 그 사람의 의지를. 그런데 이 사람이 하는 말, 알아들어 먹기가 힘들다. 어느 쪽이냐 하면 저는 몸을 쓰는 사람이라서 이렇게 머리를 굴려야 하는 이야기는 똑똑한 동료(예컨대 우리의 친애하는 현인 친구들)에게 맡기는 편이었더랬다.

“그, 좀만 알기 쉽게 부탁드립니다….”

“아…. 이런. 역시 세계 버전이 다르면 읽은 게 다 일치하는 건 아닌가 본데. 너는 마나에게 사랑받는 인간 아닌가?”

“마법딜러 계열 직업군을 할 수는 있지만, 겉핥기라서요….”

“흐음, 용어도 다른가. 그럼 별수 없지. 일단 가라. 몸으로 겪어.”

“네?”

“다른 세계라고는 하지만 세계가 새겨둔 가호가 있으면 여기서는 결국 ‘기사’로 인식될 테니, 어디서 쉽게 뒈지진 않겠지. 네 기록 지층만 살펴봐도 확실하고. 성격도 이 세계에 있는 웬만한 녀석들보단 훨씬 좋으니까 내가 또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사고를 치진 않을 거고.”

모험가는 그저 속으로만 허허로이 웃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버리면 꼭 이렇게 되더라. 아무것도 설명이 되지 않았지만 대충 알아듣기로 “너는 방목해도 되겠다”라는 거 아닌가. 그러니 이제는 나도 모르겠다 싶었다. 어쨌든 그냥 저는 저답게 지내면 된다는 뜻이겠거니 한다. 그런데 잠깐만. 일단 가라니, 어디로?

뒤늦게 떠오른 의문은 입 밖에서 문장이 되기 전에 답을 얻었다. 썩 원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그 아지랑이가 저를 툭 떠미니 아까까지 잘만 딛고 서 있던 자리가 어느샌가 허공으로 변해 있었고, 그대로 자유낙하를 하고 만 거다. 모험가는 결국 떨어지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칠 수밖엔 없었다.

“넉백 낙사는 미리 언질을 주라고!”

 

그리고서 모험가는 언어가 되지 못한 고함을 지르면서 눈을 떴다. 양털을 뭉쳐다 떼어놓은 듯한 구름이 동동 떠 있는 파란 하늘이 보인다. 모험가는 자신이 지금 흙길 한가운데에 드러누워 있음을 깨닫고 몸을 일으켰다. 껌뻑껌뻑 눈을 깜빡이더라도 제가 왜 여기 몸 성히 있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아니, 잠깐 있어 봐. 나 왜 몸이 성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지?’

기억의 일부가 흐리게 지워져 있었다. 왜 여기에 있는지는 고사하고 제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제가 모험가라는 사실이나 어떤 여정(군데군데 뭉개지긴 했지만)을 겪었는지 무엇을 할 줄 아는지 따위는 생각났다. 악몽인지 현실인지에서 누군가를 만났고 떠밀린 것도 같은데…. 모험가는 흙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채로 턱 아래를 만지작거리며 골몰하다가 이내 때려치웠다. 몸뚱어리도 성하고 기억이 조금 애매해서 그렇지 여느 모험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잊은 기억들조차 결국 제게 돌아오리라는 묘한 확신도 있었고, 저 스스로 이런 감이 잘 들어맞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는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주변 지형이 전혀 눈에 익지 않은 것을 보면 어쨌거나 새로 만난 지역일 것이고 텔레포를 탈 만한 데가 없을 거다. 그렇다면 제일 먼저 할 일은 정해져 있다. 아공간 같은 제 가방 안의 재료들도 제대로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한 모험가는 의욕 있게 외쳤다.

“일단 가볍게 임시 거처를 만들어볼까!”

마침 이곳은 재료도 풍부한 숲속이었다. 아침이슬을 피할 만한 간단한 구조물을 만드는 것쯤이야 온갖 채집가와 제작자를 두루 섭렵한 제게는 간단한 일이었다.

 

중앙대륙은 틀림없이 기사가 주된 전력이며, 기사를 노리다가 결국은 포기한 이들의 단련된 육체 노동력이 사회의 꽤 많은 것을 지탱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법사와 마법이 천시받는 건 아니었다. 그야 아주 고대부터 현대까지 마나에게 사랑받는 자는 존재했고 위대한 두 번째와 세 번째가 마법을 쉽게 다듬어주었으므로 지금의 편리한 도구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명예라는 금칠이 안 되었을 뿐이지 마법사 역시 이 대륙을 지탱하는 존재 중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황제가 기사를 부릴 권리가 있듯이, 황제의 뜻을 필두로 움직이는 황실 역시 마법사를 모아 부릴 때가 있다. 도제처럼 약간의 점조직을 이루거나 말토처럼 거대집단을 형성하는 등 마법사의 소속감이란 천차만별에 이르나, 황실에는 원래부터 황실 나름의 마법사 연구단이 있었다. 기사가 분명 강하기는 하지만 그들 중 마력에게 사랑받는 사람은 드물었으므로, 빈틈을 보완한다는 명목이었다.

두 번째가 창설하여 음지에 머물렀던 말토가 변질되었음이, 그리하여 결국 파멸하였음을 확인한 황실은 그곳의 둥지 잃은 꽤 많은 마법사를 자기네 왕궁 아래에 들였다. 그들 중 일부 증언에 의하면 세계의 한 자락이 열렸다고 한다. 자기를 세계의 관리자이자 관찰자라고 소개한 어떤 자가 있었고, 그 직후 기억이 잘려 나갔기에 오히려 그 서술을 확신한다는 거다. 더 이상 말토라는 집단에 매이지 않은, 그저 탐구심 하나에 불타는 그들은 자발적으로 이것저것을 연구했다.

그들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 세계는 신비의 장막을 들춰진 탓에 크게 흔들렸으며 그 여파가 최소한 한 번은 찾아올 것이라고. 증거가 여기 있노라고 내놓은 것은 어느 외딴 황야에 잡힌, 저희가 아는 것과는 영 성질이 다른 마력 덩어리였다. 아직은 그저 힘의 집합체일 뿐이라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지만 거기 반드시 존재하는 어떤 것. 활화산이 분화할 징조를 나타내는 것처럼 언젠가는 몸을 움틀며 알 수 없는 존재를 입고 깨어날 것이라고 그들은 강력하게 주장했다.

황실의 수호자이기도 한 최강의 기사는 그 광신적인 목소리에 코웃음을 쳤으나, 그와 오래도록 짝을 지은 군청색 거북이는 나름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 혹시 모르니 교차검증을 해보라고 별천지에 지시했다. 공문을 숨기지 않은 탓에 이 사실은 자유기사이며 마법사인 흰 까마귀에게도 전해졌더랬다.

어느 쪽이고 내린 결론은 처음과 비슷했다. 황야에서 감지된 저것은 세상 그 어떤 마나와 주술과도 일치하지 않으며, 본디 이 세계에 있을 리가 없는 존재라는 것.

언젠가는 처리해야 하지만 그렇게까지 급하지 않을 수 있는 안건을 황실 자원을 써서 다루기엔 계륵 같은 일이었다. 보고서를 쭉 톺아본 달잔은 결정을 내렸다.

그날 담청색 기린을 필두로 한 특수 2기의 인솔기사가 지닌 키톤에는 지령 하나가 내려왔다. 신문물이나 다름없는 키톤 사용을 과반수가 포기하고 있었으므로 그걸 확인한 건 기린과 여우 정도가 끝이긴 했지만, 여하튼 그랬다. 누구 하나라도 보면 족하다는 식으로 온 것치고 내용은 썩 범상치가 않은 탓에, 전달 사항을 확인한 지우스와 루디카는 곧 서로를 쳐다보고선 한숨을 푹 쉬었다.

“귀찮은 걸 맡았군.”

“내가 이런 일 분명 있을 거라고 했지, 기린.”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어….”

“저 햇병아리들을 데리고 이걸.”

“해야지, 그럼. 안 할 수는 없잖아.”

다시금 한숨. 여기 있었으면 좋겠다는, 어떤 한 사람을 똑같이 떠올렸다는 걸 알지만 서로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그럴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되며, 만약 그리된다면 최악의 최악에나 꺼내 들 수다. 기사 임기 대부분을 군청색 거북이 옆에서 일을 거들며 보내왔던 기린은 입엣말로 이거 설마 일감 놓고 밖을 나도는 보복 아니냐고 중얼거렸고 여우는 피식 웃었다. 저희 동기의 사령탑이 웬일로 불평을 다 한다 싶어서다. 평소엔 영 위아래 없게 굴어서 못 느꼈는데, 저희를 제외한 기사들의 경력이 꽤 출중하다 보니 거기에 나름껏 압박받았던 걸지도 모른다. 친구의 미지근한 미소에서 그 뜻을 어렵지 않게 읽은 지우스는 괜히 손사래를 쳤다가, 어조를 가다듬었다.

“다른 기사들 좀 불러 모아 주겠어?”

 

“―그러니까 지금, 얌전히 황실의 뒤치다꺼리나 하라는 거지?”

전달 사항을 다 말하기가 무섭게 나무 둥치에 등을 기대고 있던 새까만 닭이 삐뚜름하게 뱉은 말이 저거다. 거친 요약이라 그렇지 썩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지라 기린은 크게 대꾸하지 않았고 다른 기사들 역시 모호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황실의 명령이라면 따라야지 않을까요?”

“뭐, 우리가 그런 입장이긴 하지. 그나마 문제의 그게 인적 없는 황야에 있어서 다행이네, 안 그래?”

뾰족해지려던 분위기는 그게 뭐가 문제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던 너구리와 상황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적극적으로 뒤집어 재고한 승냥이의 말로 풀어졌다. 두 사람의 말에 와론은 잠시간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어깨에서 힘을 뺀다. 만약의 경우 상황을 중재하려고 했던 동기끼리도 서로 눈짓을 주고받고서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무난히 풀려서 다행이다. 동대륙 정황도 심상치 않은 판국에, 언제 그쪽과 다시 맞붙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여기서 동료 간 견해차로 인한 다툼이 생기면 여러모로 곤란했다.

새까만 닭은 승냥이가 인명 피해를 우선시해서 생각한 점을 기꺼워하는 게 아닐까 하고 짐작해보는데, 실상이 어떨지는 투구를 쓴 저자 본인만이 알 일이다. 애꿎은 변수를 굳이 들쑤시지 않고서 지우스는 암묵적으로 합의된 사안을 재차 못 박았다.

“그러면 이대로 방향을 틀어서 문제의 황야로 향한다. 이참에 견습들한테 정체 모를 적을 찾을 땐 어떻게 처신해야 좋은지 배우게 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각자 맡은 분대원들, 단단히 지켜주길 바라.”

인솔기사 각각에 맞추어 배분한 인원들과는 이제 면을 트고 다듬어가는 중이었으므로 피도란스가 그러하였듯 나름대로 상황을 호의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기사들이 저마다 흩어지고, 곧이어 분대에서 견습 병아리들의 의아함에 찬 목소리가 들렸지만 금방 사그라들었다.

 

임시 거처 제작에는 약간의 사소한 애로사항이 있긴 했지만, 이래저래 무난히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 사소한 사항이 무엇이고 하니, 바로 가지고 있던 편속성 샤드와 크리스탈, 클러스터가 영 신통치 않음에 있다. 원래도 힘에는 자신 있으니 그럭저럭 뚱땅거려서 조립하긴 했으나, 각 속성이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는 것을 확인한 그는 괜히 손에 배긴 굳은살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처음 눈 떴을 때부터 미묘한 위화감을 느끼긴 했는데 아무래도 에테르의 차이였을지도 모르겠다. 전사와 용기사 그러니까 에테르와는 완전히 거리가 멀었던 직업군으로 한창 살 적이었다면 신경 쓸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마력 역시 조금이나마 운용하는 나이트가 아니던가.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주력 원거리 딜을 넣기 어려워지면 여러모로 손해가 아닐 수 없다.

‘전투부터 상정하는 게 좀 씁쓸하긴 하지만….’

그러다가 쓰게 웃고 만다. 동료도 없이 낯선 곳에 혼자. 이것만 놓고 보자면 막 처음 모험가로서 첫발을 뗐던 날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상황 속에서 현재를 대처하는 저의 자세는 완숙한 전투원의 그것 아닌가. 여하튼 잡상은 나중 일이었다.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나씩 해치워가는 게 우선이었지 탁상공론하듯 멈춰 서서 머리를 굴린다고 뭐가 해결되는 건 아니었으니.

“으음, 뭐라고 해야 할까…. 이 위화감. 야슈톨라나 알피노나 위리앙제가 있었다면 바로 명쾌하게 설명해 줬을 텐데 말이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모험가는 늘 해온 방식대로 에테르를 긁어모아 [성령의 권능]을 펼치려고 시도했다. 제 등에 가로 매인 검과 방패를 꺼내 드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쭉 끌려오던 에테르는 어쩐 일인지 산책하러 나간 길에 돌아오기 싫어하던 꼬마친구 아기 늑대처럼 벋팅기는 감각이 있다. 이래서야 실전에서 캐스팅 시간이 길어질 게 뻔하다. 모험가는 침음성을 삼키면서 난처한 듯 눈꼬리를 내리며 숨을 뱉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법 이론 같은 거에 젬병이긴 해도 책 한 장 더 들여다보는 게 나았을 거다. 자네, 그러니까 내가 뭐라고 했나! 머릿속에서 스리토 카리토 스승님께서 따끔하게 혼내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해서 멋쩍게 목덜미를 긁적이던 모험가는 곧 스쳐 지나간 생각에 비명을 지르면서 가방 안 어딘가에 굴러다니는 소울 크리스탈들이며 초코보 호루라기 따위를 모조리 끄집어냈다.

“아, 잠깐만 있어 봐! 혹시 잡 체인지가 안 된다거나 내 버디나 탈 것을 못 부르는 건 아니겠지?!”

이렇게 허둥대 본 게 삼대 도시국가나 간신히 떠돌아다녔던 무렵 이후에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다급하게 실험해 본 결과, 잡 체인지는 가능했으나 에테르를 사용하는 직업군은 유독 위화감이 있었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모든 호루라기가 먹통이었다. 버디가 안전한 게 맞을지 걱정되자, 모험가는 이제 안달복달 못하며 제자리에서 애꿎은 잔디밭이나 발끝으로 꾹꾹 짓이겨댔다.

“어쩌지. 혹시 내가 기절한 사이에 얘가 주변에 마을이 있는지 확인이라도 해 보겠답시고 튀어 나간 건 아니겠지?”

제아무리 믿을 수 있는 용맹한 파트너라고 해도 마물이 떼거리로 덤벼들면 그 애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게 뻔했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지만, 무턱대고서라도 찾으러 나가야겠다고 맘먹은 찰나에 혀를 쯧쯧 차는 소리가 들려서 모험가는 고개를 팍 들었다.

― 세상을 몇 번이나 구하면 뭣하니. 허둥대면 여전히 초보 모험가티가 팍팍 나는구만.

“에오스.”

에오스였다. 학자는 늘 화가 나 있다는 우스개처럼 제 요정도 은근하게 말투가 툭툭 쏘았다. 아무래도 아까 잡 체인지를 시도해 본다고 아무거나 쥐었던 게 학자 소울 크리스탈이었던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모험가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요정을 바라본다. 에오스의 노란 빛이 영 둔탁하니 흐린 감이 있었다. 착각은 아니다. 비록 제가 학자 크리스탈을 그다지 자주 꺼내지 않는다지만(대체로 안전한 곳에서 체력 회복을 돕는답시고 꺼내두는 꼼수를 부릴 때나 불렀다), 자기 사역마 상태 하나 모를 정도로 답 없는 놈은 아니었다. 흐리게 일렁이다가 부분적으로 발광하기도 하는 저의 에오스는 빛의 굴곡에 얼굴이 잘 보이지도 않는데도 걱정이 가득 낀 저를 쳐다보더니 픽 웃는 듯했다.

― 누굴 걱정하는 거야. 나는 네 에테르가 있으면 얼마든지 돌아오는 사역마야. 스승님이 알려주지 않으셨간?

“그렇지만….”

― 급하면 날 우적우적 씹어먹는 주제에.

“아아니, 그건, 그게….”

림사 로민사 뱃사람들 특유의 거친 말에 제1세계 픽시들이나 쓸 법한 화법을 구사하는 바람에 모험가는 정말 찰나지만 이게 제 사역마라기 보다는 원초세계의 픽시가 아닌가 하는 착각에마저 빠졌다.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주인을 두고서 에오스는 사역마라기엔 지나치게 자아가 가득한 만만으로 원래 하려던 말을 우다다 쏜다.

― 됐어. 지금 너랑 농담하려고 억지로 나온 것도 아니니까. 너, 여기가 우리의 아이테리스가 아닌 건 알고 있어?

“…우리 별이 아니야?”

― 맙소사. 마법 재능이 바닥을 기는 둔하디둔한 놈이란 건 알았지만, 너. 쯧, 에테르가 불안정하니 얼마 못 있겠다. 일단, 네 버디는 여기 없어. 축사에서 얌전히 네 귀가를 기다리고 있겠지. 그리고 여기부터는 귀 씻고 똑바로 들어. 이 땅에 있는 마나는 도구가 아니고 의지가 있는 애들이야. 그러니까 설득해. 너 그런 거 잘하잖아. 나나 내 자매를 부를 거면 그다음이야. 알겠지?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면 누가 이 주인님을 멸망에서 세상을 구한 영웅으로 볼까! 하지만 제게 이토록 강한 자아를 선사한 건, 그리하여 저를 도구로만 보지 않은 건 이 자의 다정함이 분명하다. 그러니 이 정도의 충고만으로도 해낼 테지. 에오스는 더는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파스스 허공으로 흩어졌다.

어정쩡하게 손만 내밀었던 모험가는 우선 제 버디가 무사하다는 증언에 안심하고서(저 애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에오스의 폭탄 발언을 다시 곱씹는다. 여기가 아이테리스, 행성 하이델린이 아니라면 제1세계로 소환됐을 때처럼 어딘가로 끌려온 모양이었다. 그때 겪어서 아는 바로는, 어쨌든 이쪽으로 왔으니 저쪽으로 돌아갈 길 역시 있다는 뜻일 테지. 방법만 찾으면 되니까 그 점은 걱정하지 않기로 한다. 중요한 건 에오스가 마나에 관해 증언한 부분이다.

“이곳의 마나는 의지가 있는 애들, 이라는 거지.”

그렇다면 전부 당연해진다. 평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에테르를 끌어내려고 했으니, 맘처럼 될 리가. 그런데 대체 어떻게 설득하라는 건지 감조차 오지 않아서 모험가는 한참 동안 거기 푯말처럼 서서 고민했다. 그러기를 한참, 결국 그는 머리칼을 헤집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으, 모르겠어! 그래, 부딪혀보면 될 거 아냐. 어떻게든 되겠지!”

목 안으로 앓던 그는 만약을 위해 임시 거처 안으로 들어가 들창 옆에 섰다. 여기라면 혹시 모를 들짐승도 막을 수 있고 창 너머로 자연과 맞닿은 채니, 지금부터 하려는 일에는 딱이다.

모험가는 심호흡하고선 나이트의 소울 크리스탈을 꺼내 쥐었다. 에테르를 감지하고 사용할 수 있으면서도 몸에 익은 직업군으로 기어를 바꾸는 게 이래저래 편할 거라는 판단이 반, 만약 누군가 쳐들어와서 전투가 벌어지더라도 이거면 버텨낼 수 있다는 짐작이 반이었다. 온몸을 순환하는 기억과 힘의 흐름이 익히 아는 상태로 안정되고서 그는 그냥 냅다 고개를 숙이고 손을 모으며 쩌렁쩌렁 외쳤다.

“아까는 너희한테 무례했어, 미안해! 그렇지만 날 좀 도와주지 않을래? 집에 돌아갈 때까지 너희의 도움이 없이는 어려울 거야. 혹시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그,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알려주면 나도 최대한 도울게. 안 될까…?”

아, 지금은 뿔의 아이가 정말 부러웠다. 그리다니아 숲의 그 세 사람이라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곳에 사는 정령과 마나의 말을 알아듣고 대화를 주선해 줬겠지. 모험가는 새삼스럽게 제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왔는지 절감하며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주변이 수런거리는 게 피부로도 느껴졌다. 아주 많은 양의 다양한 편속성 크리스탈이 활성화된 자리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한때 공포에 질려 날뛰었던 그리다니아 정령들을 앞뒀을 때와도 비슷한 감각이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각각 여러 속성의 살아있는 존재들이 활발하게 떠들고 있는 가운데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정말 난데없이, 숨통이 팍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물리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고 에테르적으로 그랬다. 지금껏 느낀 위화감은 아무래도 체내 에테르와 바깥에 존재하는 마나 사이의 균형이 안 맞아서 벌어진 일이었던 모양이다. 야슈톨라였다면 좀 더 멋들어진 용어로 설명했을 테지만 이게 제 한계였다.

잠시 후, 모험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선 활짝 웃었다. 에테르를 다시 모아보지도 않은 채로도 운용과 시전 자체는 제가 알던 대로 돌아왔음을 알아차린 그는 양팔을 활짝 벌려 주변에 필히 존재할, 이 세계의 마나 친구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정말 고마워! 오늘 처음 본 사람한테도 이렇게 친절하다니!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알려줘. 이 은혜는 집에 돌아가기 전에 꼭 갚을게!”

언어에 특화된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쿠루루가 있었다면 “너 정말 귀엽구나?”라거나 “착한 애네. 곤란해 보였는데 잘 됐다.” 그것도 아니면 “에테르? 너 되게 특이한 마나 운용을 하는구나?” 따위의 말을 듣고 전달해 줄 수 있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모험가 혼자였으므로 그는 알 길이 없었다.

원하는 장난감을 쥔 아이처럼 무구하게 기뻐하던 모험가가 칼날처럼 태세를 바꾸어 임시 거처 밖을 노려본 것은 겨우 찰나의 일이었다.

밖에서 낌새가 난다.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다수의 기색. 마물이 저를 덮칠지 말지 고민할 때와 비슷한, 팽팽한 긴장감에 모험가는 오른손에는 검, 왼손에는 방패를 꽉 쥐고 문간에 대기한다.

곧, 문 반대편에서 창 하나가 벽을 부숴가며 날아들었고 모험가는 방패로 그걸 막았다. 쇳소리가 쟁쟁하다. 전투 개시.

 

원래 일정대로라면 동대륙에 맞닿은 항구 쪽으로 가다가 적당한 곳에서 임시 진지를 마련하고 특수 1기를 마중 나갈 한 조와 중앙대륙 대기조로 나뉘었을 테지만, 갑작스레 지령이 들어왔으니 방향을 크게 틀어야 했다. 그렇게 만 하루를 꼬박 걸어 도착한 곳은 숲이었다. 문제의 황야에 도달하는 최단 경로상에 존재하는 숲은 원래 마나가 풍성하기로 유명하다고는 하는데, 특수 2기 전원에겐 썩 와닿는 감상이 아니었다. 이 중에서 마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받은 건 율니아 하나뿐이라고 봐야 했지만, 은하류의 후계자는 치료마법을 조금 할 줄 아는 거지 마법적으로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편은 아니었던 탓에 마법을 조금이라도 쓸 수 있건 없건, 이 집단이 생각한 거라곤 “오, 공기 좋은 숲.”이라는 게 전부였던 거다.

숲은 나무가 우거지다 보니 시야가 트이질 않아 그냥 마구잡이로 걷던 때와는 다르게 진형이 바뀌었다. 적의에 가장 예민하다고 볼 수 있는 와론과 다랑이 최선두에 있고 바로 뒤에는 견습들을 줄지어 세우고선 그 좌우를 피도란스와 루디카가 각각 맡았다. 모두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후방은 자동으로 지우스의 몫이 되었다. 진형과 진법에 관한 해설 역시 사령탑인 기린의 몫이었다.

지우스가 어떤 지형에서 어떤 점을 염두 해야 다수가 이동‧전투할 때 유리한지를 나직하게 설명하며 걷는데, 문득 나무와 나무를 건너뛰며 가던 새까만 닭이 론누를 세워서 들며 멈추어 섰다. 그런데 같은 위험을 감지했다면 똑같이 멈춰 섰어야 했을 하늘색 너구리는 몇 걸음 더 나가다가 따라오지 않는 일행들을 돌이켜보며 고개를 갸웃한다.

“엥? 왜 다들 안 오시죠?”

“앞에 누가 있는데? 뭐야, 집도 지었어? 야, 기린. 여기 사람 안 사는 숲이라지 않았냐?”

“누가 하나 있기야 하죠. 그런데 뭐…. 어, 근데 집이요? 와론 씨는 거기까지 보이시나 보네요! 눈 좋으시다!”

아예 투구 앞에 손날을 세워다 척후병처럼 굴던 와론은 짧게 휘파람까지 불었고, 다랑은 사태가 어찌 굴러가건 태연하면서도 엉뚱한 지점을 짚어서 감탄했다. 선두 둘의 반응이 극과 극으로 갈리자 견습들이 웅성거렸다. 병아리들의 혼란은 이 애들의 단련을 가장 많이 신경 쓰고 있었던 승냥이가 정리했다.

“꽤 강한데? 병아리들, 혹시 모르니까 기린 뒤로 빠져.”

“어쩔 거야, 기린?”

자기도 싸우겠다고 앞서려던 마르샤와 율니아는 회적색 여우가 눈을 치뜨고 노려보자 꿍얼거리면서도 다른 친구들을 따라서 대열 후미로 꾸물꾸물 마지못해 물러났고, 그걸 두 눈으로 확실히 보고 나서야 그가 제 동기에게 사령탑으로서의 지시를 물었다.

기린은 생각을 정리한다. 인솔기사 중 일부는 틀림없이 조금 전, 저 숲 안쪽에서 들썩이던 마나를 느꼈을 것이다. 뭐, 기사 중엔 마나와는 완전히 연이 없는 자들도 흔하니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여하튼 아이들에게 혼란을 줄 정보는 주지 않은 건 좋은 판단이다. 닭이 굳이 그 점을 언급하지 않았기에 눈치챈 다른 기사들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육감이 뛰어난 너구리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상대가 적의가 없을 수도 있다는 거다. 그런데 타인을 재어보는 눈이 확실한 승냥이는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모순되는 점에서 어떤 것이 일행에게 가장 안전한 판단인가, 를 따지는 중에,

“좋-아. 그럼 한 번 알아보실까!”

“잠깐, 새까만 닭! 기다려!”

“간만에 즐겁게 싸울 수 있을 텐데, 뭘 기다려!”

갑자기 새까만 닭이 론누를 들고 있던 팔을 등 뒤로 쭈욱 당겨 투창할 자세를 취했다. 지우스가 다급하게 말렸으나, 와론은 낄낄 웃어대며 론누를 무서운 속도로 날려냈다. 생각하고 자시고, 이래선 적의가 없던 상대도 덤벼오게 생겼다. 이마를 짚으면서도 기린은 잽싸게 지시를 내렸다.

“전원, 전투에 대비한다! 상대는 마법을 쓸 가능성이 있으니 유의하도록! 너구리, 마법 날아올 것 같다 싶으면 알려줘!”

“알겠어요!”

모두가 앞으로 내쏘아지는 것보다 론누가 나뭇가지 사이를 유연하게 누비며 화살처럼 날아가는 게 훨씬 빨랐다. 모양새를 보면 와론은 론누에게 시야를 옮겼을 텐데 그런 기색 없이 나무까지 잘 타가며 내달린다. 간만에 맘 놓고 싸울 상대를 만난 싸움 광은 제가 신난 티를 감추려고 들지도 않았다. 와론이 일행에게 들으라는 듯이 외친다.

“자, 이 정도 실력자가 왜 여기 있나 들어보자구!”

이제 시야 끝에, 와론이 말한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들어왔다. 오두막이라기엔 지나치게 검소하고, 임시로 쌓은 것이라기엔 만듦새가 좋은 단층 목조 건물을 론누가 뒤로 휘감아 돌아가는 게 보였다. 저희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으므로 저 집의 주인은 출입구 쪽을 향해 대기하고 있을 테니, 집 뒤로 돌아간 론누는 기습일 게 뻔했다. 지우스는 옆을 달리는 루디카에게 눈짓한다. 그 틈을 타서 상대를 제압하고 새까만 닭이 날뛰지 못하게 하자고. 또 다른 동기 파디얀만큼은 못 해도 동기로 지내 온 세월이 있어 이들 중에선 척하면 척하는 사이답게, 여우는 제 뜻을 알아듣고 폴스를 꺼내 세워서 들고 있었다.

그러나,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오두막 안의 그 사람이 론누를 막아낸 거다. 뒤편에서 견습들이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야 이 햇병아리들조차 론누가, 그걸 다루는 새까만 닭의 실력이 어떠한지 똑똑히 보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게 막혔다고? 견습들도 사태가 심상치 않은 걸 단박에 알아차릴 정도였으니 기사들은 더 했다. 심지어는 신이 나 덤벼들었던 새까만 닭을 상대해 본 적이 있는 담청색 기린은 더더욱 그랬다.

“오, 뭐야. 이걸 막아? 재밌는 녀석이네. 야, 숨어있지 말고 나와! 나랑 숨바꼭질하자는 거면 말리진 않겠지만, 그런 놈 아니잖아?”

“새까만 닭, 도발은 제발 관둬라.”

“적당히 나대자, 기린. 나 지금 신난 거 안 보여? 너네들, 아무도 손대지 말아라. 오늘 끼어든 놈은 나랑 죽을 때까지 대련할 줄 알아. 경고했어, 난.”

그러거나 말거나, 론누의 기습을 막은 상대에게 흥미로움을 백 점 만점에 백 점으로 느낀 와론은 들뜬 목소리로 크게 소리쳤다. 한 면이 무너진 오두막 안에서는 그 말에 기척을 숨길 생각을 완전히 지워버린 듯, 완연한 한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여우를 비롯한 다른 기사들은 다시금 특수 기수의 사령관에게 앞으로 어쩔 것인지 눈짓으로만 물었고, 기린은 재차 닭을 말려보았으나 불가하다는 결론만 얻고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새까만 닭의 위악성을 짐작한 이가 없다시피 해서 설명할 수도 없었다. 첨병을 맡겠다는 걸 요란스럽게도…. 짐짓 위악적으로 굴지 말라고 해야 몸이 근질거려서 안 되겠다는 말이 돌아올 것이 뻔하므로(반은 사실일 거다), 지우스는 나직하게 숨을 뱉으며 일행에게만 들릴 목소리를 하고서 일단 대기의 지시를 내린다.

“상대에 관해서 아는 게 없어. 우선 녀석이 새까만 닭과 어떻게 싸우는지를 관찰하고 필요하면 개입한다.”

“하하, 저 친구하고 먼저 죽는 쪽이 지는 대련은 사양하고 싶은데.”

“그 수습은 내가 할 테니 걱정하지 마, 승냥이.”

“믿는 구석이 있어 보이네. 좋아. 그으럼 저쪽 실력도 구경해볼까.”

피도란스가 그렇게 말하며 어깨에 걸치고 있던 기둥을 땅에 박아 넣고 관전할 태세를 갖추자, 뾰족뾰족 곤두섰던 이들이 슬슬 누그러졌다. 유일하게 좀 전부터 긴장감 하나 없이 느슨하던 다랑만이 여전히 불만 있어 보이는 루디카 곁에 서서 “루디카 씨는 누가 이길 것 같나요?”라고 태연자약하게 묻고 있더랬다. 거기에 이끌린 건지 여우 역시 짧게 숨을 뱉더니 몸에서 긴장을 푸는 게 보였다.

일련의 사태를 바라보며 담청색 기린은 과거의 제가 인솔기사진에 푸른 승냥이를 넣은 것을 정말 미친 듯이 다행으로 생각했다. 주변에 하도 한 성질 하는 녀석들이 많다 보니, 피도란스처럼 성정이 둥글둥글해서 적당하게 분위기를 풀고 안심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건 정말 컸다. 그게 기사라면 더더욱. 스스로 타인에게 붙임성이 있는 편이 아니란 걸 알기에 그 점에 있어서도 승냥이의 존재는 컸다.

그 짧은 사이, 와론은 오두막 안의 누군가와 기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사람 성질 긁는 데엔 자신 있는 편인데, 저 안쪽의 누군가 씨께서는 아까 정도로는 어림이 없는 모양이다. 인기척 지우는 걸 포기한 까닭도 제 실력을 가늠하고서 은신은 쓸데없는 짓이라는 판단을 해서이지, 숨바꼭질 운운한 말에 탄 게 아니란 것쯤은 안다. 정말 흥미롭네. 기사란 것들은 대개 성마른 놈들이라 이쯤만 긁어줘도 기사 명을 밝혀오며 덤벼드는데 말이지. 투구 안쪽에서 마른 입술을 한 번 핥은 그는 이제 더는 기다리지 말고 덤벼들기로 한다. 다 대 일 같은 건 원래 좋아하지도 않고(그래서 일행을 물렸다), 병아리들까지 끼고서 다 같이 위험한 다리를 건널 필요도 없다. 햇병아리들 뒤치다꺼리야 다른 녀석들이 해줄 테니, 저는 지금 온전히 자유롭다.

“뭐, 숨어있으려거든 그렇게 해. 아, 맞다. 일단 병아리들 앞이니 귀찮아도 할 건 해야 하나?―나는 기사, 새까만 닭. 싸우면서 네 이름도 밝혀야 한다? 안 그러면 억지로라도 말하게 할 거야.”

한참 전에 제게로 돌아온 론누를 대충 꼬나쥐고 있던 와론은 구색이나 대충 맞춘 기사의 예법을 내보이며 비꼬기가 무섭게 냅다 돌진했다. 말의 마침표가 떨어지기도 전의 일이어서 몇몇은 까만 망토가 손가락만큼 작아진 시점에서야 그가 튀어 나갔음을 깨달았을 정도다.

그리고 다시 격돌. 창의 시야로 보이는 것보다 선명하게, 방패를 들고 갑주를 두른 이와 마주했다. 하필이면 그가 은빛 기조의 갑주를 두르고 있는 터라 괜히 입이 썼다. 저도 모르게 품에 있는 목걸이에 손이 갈 뻔했지만 억눌렀다. 대신 그는 좀 더 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까꿍! 너 기사 맞아? 갑주를 꽁꽁 차려입는 녀석은 드문데.”

“장비 불량으로 걸리고 싶진 않아서 말이야.”

“이건 또 무슨 농담이래.”

“농담 아닌데….”

두 번이나 론누를 확실하게 막아낸 상대는 와론이 여러 갈래로 짐작한 상 중 어디에도 들어맞는 인물이 아니었다. 드문 일이지만 아예 없지도 않은 일이라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대신 새로운 정보를 입력받아 판단해 본다. 검과 방패의 기사는 어조와 내용을 보아하니 매사 진지하게 구는 부류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대는 붉은 해태와 동류는 아니다. 감이 그렇다. 그리고 지금, 확실히 감지한 게 하나 있다. 새까만 닭은 오랜만에 정수리까지 관통하는 긴장감을 만끽한다. 이 녀석의 강함은 저와 결이 같다. 목숨이 질긴 생존자. 악운을 가지고 겨우 가죽 한 장으로 이어 붙은 목을 들고서 몇 번씩이나 사선을 거듭해 쌓아온 경험을 축적한 자.

‘이런 놈하고 붙을 때가 제일 위험하단 말이지.’

그 점에서 나도 위험한 놈인 거고. 오의까지 꺼내는 일은 없길 바라면서 투구의 기사는 빠르게 세 번, 창을 내찔렀다. 처음은 그놈의 방패에 막혔고 두 번째엔 찌르는 감각이 있었으나 어쩐지 무딘 감이 있었으며 마지막은 찌르기가 무섭게 온몸이 둔하게 울렸다. 와론은 급하게 뒤로 뛰어 거리를 벌렸다.

“그 갑옷, 마도구였어?”

“응? 아니, 그냥 평범하게 제작한 건데? 아, 맞다. 아까 이름 물었지? 그, 진짜 미안하지만 내가 지금 기억이 안 나서….”

아니, 전언 철회다. 선량한 얼굴을 하고서 사람 놀려먹는 천재 아냐, 이 자식? 지 이름을 속여먹는 예는 있어도 그걸 까먹는 새끼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다고. 와론은 간만에 성질이 잔뜩 긁혀서 가감 없이 살기를 뿜었다.

 

모험가는 숨어있지 말고 나오라는 말에 나름껏 고민했더랬다. 직전에 기습해 온 상대가 과연 다른 수를 마련하지는 않았을까, 하고. 물론 고민한 시간은 짧았다. 창을 저 혼자 날려 보낸 기술이 뭔지는 몰라도 보아하면 저 사람은 용기사인 모양이고, 그럼 마물은 아닐 테니 갑자기 [죽음의 선고] 따위를 쓰진 않겠지. 그렇다면 웬만한 돌발사태는 [천하무적]으로 버틸 수 있을 거다. 그리 판단했다.

모험가가 인기척을 더는 숨기지 않자 저쪽도 한 사람만이 앞으로 나서고 나머지 적의가 풀린다. 일 대 일이라. 저쪽에서 강한 사람은 다섯, 아니지 넷 있었으니 예상한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늑대 우리를 구경했던 기억이 불쑥 튀어나왔다. 어어, 설마 둘 중 누가 쓰러질 때까지 싸워야 하는 건가? 그건 별로인데. 그렇게 멈칫거리는데, 아까의 창잡이가 또 저를 향해 외쳤다.

“―나는 기사, 새까만 닭. 싸우면서 네 이름도 밝혀야 한다? 안 그러면 억지로라도 말하게 할 거야.”

앞에 뭐라고 말한 건 목소리가 작아서 못 알아들었지만, 모험가는 속으로 탄식했다. 이름? 이 동네는 싸울 때 이름을 밝히는 관습이 있나? 어쩌지? 나 지금 내 이름도 기억 안 나는데? 억지로라도 말할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아서(그렇다고 아르버트의 이름을 팔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젬이라고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고!) 모험가는 제게 드리운 공격의 전조를 읽는 게 늦었다. 다행스럽게도 혹시나 해 켜두었던 [방패각성]이 제 몫을 해냈다. 창을 휘두른 이는 투구를 쓰고 있어 표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저를 꽤 놀라워하는 기색이란 건 알았다. 그 방식이 모 제국의 모 씨와 엇비슷하다는 감상이 스쳐 지나가면서 모험가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왜 어딜 가나 싸움 광 하나씩은 반드시 있는 걸까. 하나가 영영 사라지니 또 하나를 만나기나 하고.

“까꿍! 너 기사 맞아? 갑주를 꽁꽁 차려입는 녀석은 드문데.”

“장비 불량으로 걸리고 싶진 않아서 말이야.”

“이건 또 무슨 농담이래.”

“농담 아닌데….”

제 모 씨를 연상했던 것이 미안할 정도로 이 용기사?는 유쾌하게 말을 걸어왔다. 거기에 안심해서 저도 모르게 툭 쉽게 대답하니 아까보다 기분이 상한 듯한, 온도가 식은 답이 돌아왔다. 무어라 변명을 더 주워섬기기도 전에 상대가 냅다 공격해온다. 찌르기 삼 연격. 쾅, 쾅쾅. 라바나의 귀무신이 떠오르는 그것에 모험가는 도중에 효력을 다 한 [방패각성]을 대신해 한 박자 늦게 [거리유지]를 켰다. 상대가 너무 재빠르다 보니 무의식중에 그리해버린 모양이다. 운 좋게도 그사이에 맞은 한 대는 받아넘겨진 것 같았다. 거리유지의 둔화 효과는 자기를 [새까만 닭]이라 밝힌 용기사?에게 확실히 먹혀들었는지 그가 곧장 [교묘한 점프?]를 써서 뒤로 물러서는 게 보였다. 일단 검과 창으로 나누는 대화는 일시적으로나마 회피했다 싶은데,

“그 갑옷, 마도구였어?”

“응? 아니, 그냥 평범한 장비인데? 아, 맞다. 아까 이름 물었지? 그, 진짜 미안하지만 내가 지금 이름이 기억이 안 나서….”

“야, 내가 지금 장난까는 걸로 보이냐?”

처음의 장난기 넘치던, 중성적이어서 들뜬 티가 유독 선명하던 목소리는 제가 간신히 원래 전하려던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격앙되더니,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공격이 쏟아졌다. 모험가는 눈물이 찔끔 날 뻔한 것을 애써 삼키면서 다른 생존기를 올렸다. 이번에는 공격의 전조를 놓치지 않고 받아치는 데에만 주력했다.

‘이 동네, 이름 진짜 중요하게 생각하나 봐, 어떡해!’

새까만 닭이 알았으면 더더욱 기가 찼을 생각이나 하면서.

 

두 사람의 일방적으로 살기 넘치는 결판은 결국 흐지부지 중단되고 말았다. 새까만 닭이 그리 으름장을 놓았는데도 기사들은 물론이요, 견습 중 몇몇도 끼어들어 둘을 떼어버린 탓이었다. 그 새까만 닭의 말을 어긴 용자가 누구였는고 하면, 처음에 승냥이에게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말한 기린이 아니고 나진이었다. 정확하게는 나진이 말려야 할 필요성을 설명했고, 그걸 기린을 비롯한 다른 기사들이 납득했으며 발언자가 제안한 방식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저 사람, 뭔가 어수룩하지 않습니까? 마치 이방인처럼요. 기사명을 밝혔는데도 닭님에게 자꾸만 용기사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고요.”

“…동대륙 사람이라기엔 복장이 너무 달라.”

“마족도 아니겠지.”

마침 중앙대륙 곳곳에서 살던 사람들이 모여있는 덕에 온갖 동네 이야기까지 다 끄집어내서 내린 결론이란, 저 온몸에 갑주를 두르고 기사답지 않게 검과 방패를 모두 착용한 채 그 새까만 닭과 대등하게 합을 이뤄가는 저자는 이방인이고 여기는 불시착이든 표류해서든 덜렁 떨어진 게 아니겠느냐는 거였다. 그렇다면 따져보았을 때 저희가 보호해야 할 사람일 수 있었다.

물론 그 시점에서 나견은 다른 생각도 하고 있었다.

‘방금 설명은 평범하게 끌어낸 가설일 뿐.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

바로 저희가 향하는 황야에 벌어진 이상 사태에 의해서 생성되었을 존재. 영 어수룩한 언동은 이곳에서 자아를 얻은 지 오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마법사들이 감지했다는 힘의 덩어리는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담청색 기린이 이 가능성을 놓쳤을 리가 없다. 견은 제가 설명한 작전에 따라서 각자 위치로 향하는 이들을 곁눈질하다가 지우스를 흘끔거렸다. 앞머리 아래로 진 그늘 안에서 둔한 빛을 발하는 금안과 딱 마주치자, 그가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무언의 동의다. 견은 탄식한다. 기린이 저와 같은 가능성을 헤아렸다는 것은 어쨌든, 이쪽 가설이 더 설득력 있다는 뜻 아닌가. 저 혼자 좀 더 폭넓게 전황을 읽는 때는 있어도, 둘이서 같은 걸 파악했을 때 틀린 예는 없었으니 말이다. 무력이 정말 쓰레기 수준인 저에게 또 괴물 같은 것이 하나 더 붙다니. 그나마도 저 괴상한 것을 감시하는 임무는 다른 사람들에게나 돌아갈 거라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굳이 다행인 걸 하나 더 꼽으라면, 정체불명의 기사(추정이긴 하다만)가 영 어리숙하니 순박해서 뭘 속이고 숨길 인종이 아니라는 점일까.

그사이에 예측한 대로 설득 담당이 새까만 닭을 구슬리는 데에는 성공한 듯해서 견은 기린과 함께 미적미적 현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견의 계책은 잘 먹혀들었다. 남들은 다 무서워서 설설 피하는 새까만 닭이지만 지금까지 보아 온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는 아직 기사는 못된 미성년자인 저희 견습들에게 무른 편이었다. 보기보다 어린애들한테는 맥을 못 추는 편일 테지. 그러니 순도 높은 진담으로 가득한 으름장을 놓았더라도 견습들이 몰려들어 말리면 일단 한 번은 멈춰줄 거라고 판단한 건 먹혀들었다. 호전적인 싸움 광임에도 머리가 비상하고 늘 침착한 이성 파이기도 하니 그 후에 잘 회유하면 들어줄 것이고, 실제로도 설득 담당으로 지목된 지룬이 잘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낯선 이방인 쪽은 더 쉽다. 새까만 닭과 합을 맞대는 중에도 끊임없이 “부탁이니까 말로 하면 안 될까?”라고 몇 번을 외쳐댔으니, 누군가 싸움을 끊어주면 더는 공격하지 않을 거였다. 와론과 합을 맞대면서도 공격적인 전법은 단 한 번도 꺼내든 적이 없기도 했고.

“와, 진짜 고맙습니다. 새까만 닭, 이라고 했죠. 저 용기사분 파티원 같은데, 말려주셔서 감사해요. 이왕이면 덤벼들기 전부터 말려주셨으면 좋았겠지만, 음, 저분 성격을 보아하니 그건 어려웠을 것 같으니.”

그래, 지금처럼 어디서 사기당하기 딱 좋은 얼굴을 하고서 무르게 웃으며 한다는 말이 저거다. 견은 조감하듯이 규격 외의 인물을 평가한다. 어디 도시에 떨어졌으면 장기라도 뜯겨서 팔릴 상이지.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새까만 닭과 호각, 혹은 그 이상으로도 싸울 수 있는 자다. 공세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까도 전력은 아니었을 테지. 무엇보다 제일 신기한 점은 이 사람이 몇 번이고 새까만 닭의 공격을 읽어낸 것처럼 피했다는 점이다. 마치 론누의 궤도가 보이는 것 같았다. 기습과 교란, 양동과 시간 차. 그 무엇이 와도 그랬다.

그러다가 견은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때였다. 지금껏 와론에게 몇 대를 맞았어도 끄떡하지 않았던 그가 비틀거린 것은.

“으윽―어, 어어?”

나견? 제일 가까이 있었던 탓에 엉겁결에 그를 부축한 견은 숙인 고개 아래로 그 이방인이 제 진짜 이름을 웅얼거리는 것을 듣고서 뻣뻣하게 굳어 섰다. 심장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차라리 여기서 공격받을 낌새를 느꼈다고 하며 단도로 저자의 목이라도 찔러야 하나를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그가 저를 끌어내리는 시늉을 하면서 귓가에 속삭였다. 정말 민망하고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목소리였다.

“그, 나견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거지? 나진. 그렇게 부를게. 미안해,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봐? 뭐를?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억지로 멈추고서 견은 그 사람보다 훨씬 작은 성량으로 답했다.

“…부탁합니다.”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진이의 이름에다 제가 그 애의 이름을 빌리고 있고 그 사실을 숨겨야 하는 것까지 안다는 것은 저의 모든 비밀을 안다는 것과 동일한 뜻이라, 할 수 있는 말은 힘이 있는 척하는 협박이 아니고 비굴한 부탁이었다. 모험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고 몸통에 가려져 남들에겐 안 보이는 데에 엄지와 검지를 이어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이 거수자를 심문하는 역할은 견이 맡게 되었다. 처음엔 기린 당신이 안 하느냐고 넌지시 물었는데(“기린님이 하시는 게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돌아온 답이라곤 견습 동기들을 가리킨 손가락이었다. 그 끝에서 마주한 열렬한 눈빛들이란. 견은 전후를 짐작하고 속으로 한숨을 푹 쉰다. 이번 임무가 하달된 이후 견습 모두가 내내도록 짐짝 취급을 받아왔던 터라, 자존심 덩어리가 대다수인 이 애들은 견습 중 대표인 제가 뭐라도 공을 세우는 꼴을 봐야 면이 서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기사와 견습 모두를 합쳐 헤아려도 심문으로 정보를 캘 사람이 저 아니면 기린뿐이기에(새까만 닭도 하면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절찬리에 기분이 상한 채라 무리다) 피할 길이 없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해보죠.”

그렇게 얻은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견은 지금까지 나눈 질답을 간단히 정리해 단조롭게 늘어둔다.

“그러니까, 당신은 정신을 차리니 이 숲에 있었다는 거죠.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모험가였고, 다양한 종족을 동료로 두고 있었고요. 이름뿐만 아니라 왜 여기 오게 된 건지도 모르고, 그런데 일단 싸우는 법 같은 건 기억해서 어떻게든 될 것 같으니 여기 있었다는 거고요.”

“응. 노랑머리 친구 되게 똑똑하구나. 아까, 그, 이름이?”

“…나진입니다.”

“그래, 나진 군! 여하튼 집에 돌아갈 실마리가 나올 때까지 떠돌아 다녀볼까,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어. 아, 그, 여기는 이름이 중요한 것 같아 보였어서. 나는 일단 그냥 모험가라고만 불러줘도 돼. 내 친구들도 그렇게 자주 부르거든.”

굳이 남들 앞에서 이름을 묻는 능청스러움에 견은 잠시간 제가 ‘모험가’에게서 읽은 것이 틀렸나 의심했다가 이번만큼은 기존 판단을 번복하지 않기로 했다. 제가 겉으로 둘러대는 이름을 밝은 목소리로 부르며 맞춰온 시선은 과할 정도로 또렷하고 신의가 가득했기에. 어쩌면 라우준이 저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껴서 그럴지도 몰랐다. 그 애도 저희 형제를 향할 때면 저렇게 투명한 눈빛을 하곤 했으니까. 어쨌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다른 의문점은 특수 2기가 함께하는 자리에선 풀 수 없는 내용이니까. 견은 복잡한 머릿속은 하나도 내비치지 않은 채로 담청색 기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우스는 나견이 스스로 모험가라고 불리기를 원하는 이를 질의하는 것을 물끄러미 보면서 생각을 정리한다. 저 자는 우리 중앙대륙은커녕 마족의 땅이나 동대륙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다. 정말 어딘가 완전히 다른 곳에서 뚝 떨어진 이방인으로 가정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이상 현상과 무관할 수는 없어.’

그러면서 기린은 경우의 수를 간단히 갈라본다. 이 자는 위험한가, 아닌가. 와론을 필두로 한 특수 2기와 나견의 반응을 모두 종합했을 때, 총책임자이며 사령탑인 그는 후자로 결론짓는다. 그도 그럴 것이 최고의 육감을 자랑하는 하늘색 너구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제가 뽑아온 인선을 믿었다. 생각을 이어가다가 시선이 다랑과 마주쳤다. 영문도 모를 텐데 웃는 낯으로 엄지를 척 세워 보여 주는 너구리 덕에 그 역시 픽 웃고 말았다. 때맞추어 나견이 길고 너저분했던 질답을 깔끔하게 정리하고서(높은 확률로 제 동기들에게 똑바르게 전달하려는 거겠지) 이쪽을 바라본다. 방향성을 정할 때가 왔다. 기린은 차분히 말을 잣는다.

“이번 임무는 모험가와 동행하는 것으로 하지.”

가뜩이나 인원이 바글바글한 판국인데 정체도 불분명한 자를 들인다는 결정에 누군가는 반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들 아무도 토를 달지 않았다. 잘만 싸우던 중에 비겁한 수를 써서 저를 말렸다며 심기가 불편한 티를 숨기지 않고 꽁해있던 와론은 오히려 그 결정에 반색했다. 네가 웬일로 내 맘에 드는 짓을 다 하냐며 즐거워한 거다. 기사진은 당연히 똑같은 생각을 했다. 저거, 매일매일 대련하자고 물고 늘어지겠구만. 견습들 역시 루디카와 피도란스가 곧잘 조언했던 ‘관찰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기’를 따라, 와론과 대등하게 싸웠던 모험가에게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한 게 대부분이라(아니면 아예 아무 생각이 없거나) 특별히 반대할 이유도 없다는 분위기였다.

오히려 사양하는 기색을 보인 건 당사자인 모험가다. 정확하게 말해서 난데없이 호의를 받아서 멋쩍어하는 낌새라고 해야 할까.

“아니, 그, 너희들 뭔가 임무 하러 간다는 거 아녔어? 외부인인 나를 끌어들였다가 공정성이니 뭐니 해서 문제 생기는 거 아니야?”

“당신, 별걸 다 걱정하네. 얘가 우리 총책임자고, 일 생기면 그냥 맡기면 돼. 그게 얘 일이니까.”

“루디카….”

원래부터 우물쭈물 질질 끄는 걸 싫어하는 루디카가 손끝으로 지우스를 가리키며 모험가의 망설임을 냅다 동강 냈다. 특수 2기의 발의자이며 책임자가 담청색 기린이니 틀린 말은 하나 없었지만, 이걸 전폭적인 신뢰라고 뿌듯해야 할지 귀찮은 일은 다 맡기겠다는 선언으로 받아야 할지 싶어진 지우스가 드물게도 공적인 자리에서 제 동기를 이름으로 부르며 앓는 소리를 냈다. 동기 녀석의 그 반응을 보면서 루디카가 아주 살핏 웃었다가 곧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저런 단언까지 들었건만, 모험가는 여전히 여러분께 폐를 끼치는 게 아니냐고 눈을 데록데록 굴렸고, 덩치에 비해 소동물처럼 보이는 그의 등을 다랑이 팡 소리가 나게 치며 시원스레 웃었다.

“에이, 사람 하나 늘어도 우리 인원이면 티 안 나요! 우리도 말동무 늘면 재밌죠!”

“으음, 그, 그런가요….”

“그럼요!”

“그으럼 한동안 신세 좀 지겠습니다!”

의외로 모험가를 설득해 일행에 들인 것은 너구리였다. 친화력 만점. 엉뚱한 순진함이 있다는 점이 통한 걸지도 몰랐다. 모험가는 머쓱함을 던져버리고 막 쌓인 눈길처럼 하얗게 웃었다.

이리하여 특수 2기에는 임시 객원이 하나 동행하게 된 것이다.

 

그날 낮, 황실 자문 마법사단에는 비상이 걸렸다. 지금껏 마치 바윗덩이처럼 황야에 가만히 엉겨있던 힘의 덩어리에 변화가 일어난 거다. 움틀거리며 피어난 그것은 불과 철과 피를 두른 검의 형상이었다. 이 대륙에 있는 그 무엇과도 형태를 공유하지 않는, 차라리 숭배하고 싶기까지 한 어떤 신격.

마법사단은 당연하고 별천지 일부 직원까지 차출되어 그대로 야근 행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기사가 다섯에 견습이 열다섯, 도합 스물이라는 대규모 인원이다 보니, 각자 한두 마디로 자기소개를 해도 한 순 도는 데까지는 시간을 꽤 잡아먹었다. 가뜩 남 말 안 듣고 제 고집대로 살아가기 일쑤인 기사(그리고 그 지망생)들은 속으론 모험가가 도중에 집중력을 잃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웬걸, 그는 오히려 내내 웃는 낯이었던 더러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으면 말할 수 없을 추임새도 곧잘 넣었고 짧은 소개임에도 각각의 얼굴과 이름을 빠르게 익혔다. 누가 보더라도 단체생활에 익숙한 사람의 그것이었다.

자기소개가 한 바퀴를 돌자, 이번엔 모험가의 차례였다. 어물쩍 빠지려고 했던 그는 루지안이 손을 번뜩 들고서 “이제 모험가 씨 차례죠?! 저 일단 질문! 뭘 어떻게 하면 그렇게 강해져요?”라고 천진하게 묻는 바람에 딱 잡히고 말았다. 한 명이 묻기가 무섭게, 좀 전 모험가의 맞장구며 추임새로 그를 좋게 보고 있었던 병아리들이 여럿이서 덤벼들어 “당신 꽤 괜찮은 사람이니 원한다면 은하류의 기본 초식쯤은 알려줄 수 있어!”라거나 “진짜 강한 것 같던데, 최강을 노리는 나와 대련해!”라거나 “그 검과 방패는 혹시 마스터피스나 나린기인가요?”라고 부탁과 억지와 질문 세례를 쏘아댄다. 인솔진이 말릴 겨를도 없이 모험가를 둘러싸고 조잘조잘 떠들어대는 꼴을 보면, 본인들은 곧 죽어도 인정하지 않겠지만 햇병아리들 그 자체여서 헛웃음이나 났다.

모험가가 난처해한다면 다른 기사들과 합심해 애들을 떼어놓으려 들었던 기린은 그가 의외로 이 상황을 능숙하게 다루는 모양새를 보며 여우에게 시선을 돌렸고, 동기와 딱 눈이 마주쳤다. 저와 비슷한 표정을 하는 것으로 보아 같은 걸 생각한 모양이었다. 저 사람, 협력과 교육 둘 다에 능한 사람이라고. 이런 인재가 어디서 뚝 떨어졌을까, 하며. 거기까지의 감상은 같았지만, 여우는 기린과 달리 그 이상으로 신경 쓰지는 않았다. 루디카가 보기에 제 동기 녀석은 지금 어떻게 하면 저 치를 단순히 객원이 아니라 아예 정식으로 특수 2기에 눌러앉게 할 수 있을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중인데, 드물게 헛물이나 들이켜고 있는 동기를 말릴 의욕은 없다. 제 감으로는 모험가라 하는 저 사람은 결국 떠날 사람인데도. 떠나는 사람 붙잡지 않는 애가 격무와 과로에 못 이겨 조금 회까닥 돌아버린 건 아닐까 따위나 생각할 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험가는 견습 좌중을 진정시켜 가며 어쨌든 하나하나 답을 주고 있었다. 으응, 나는 내 동료들에 비하면 평범하지만, 내가 강해 보인다면 그 애들한테서 배운 게 있어서 아닐까? 은하류 그거는 맨손 무투를 기본으로 한댔지. 그렇다면 나보다는 내 친구 리세라는 애가 더 잘 다룰 것 같아. 최강이라, 목표가 좋네. 그렇지만 힘만 추구하면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어. 지금 너희 주변에 좋은 선생님들이 있는 것 같으니 차근차근-알았어, 알았어. 대련도 해줄게. 그렇지만 나도 사람이고 체력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적당히 하는 선에서. 마스터피스하고 나린기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 장비는 전부 내가 만들어서 쓰고 있긴 해. 견습들에게 줄줄이 내놓던 답변을 멀찍이 서서 듣고만 있었던 기사들이 동시에 펄쩍 뛰듯이 덤빈 건 그때였다.

“뭐? 너 무기 장인이기까지 해?”

“우와, 모험가 씨! 못하는 게 뭐예요?”

“아니 잠깐만, 무기뿐만 아니라 방어구도 만든다고?”

“너 진짜 정체가 뭐야?”

결코 부러지지 않는 론누의 내구성에 몇 번씩 맞부닥치고서도 견고하게 자리를 지켰던 그 검과 방패에 갑주까지를 모험가 본인이 만들었다는 말에 승냥이부터 너구리와 여우까지 경악을 금치 못했고 재밌는 놈이 합류했다며 기분이 그럭저럭 나아져 있던 닭이 다시금 경계심을 돋우며 으르렁거렸다. 물론 모험가의 뒤 꿍꿍이 따위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얼빠진 듯한 표정에 금방 맥 빠져 했지만. 이 넝쿨째 굴러들어 온 호박을 어떻게 우리 밭으로 끌어들일까 하고 있던 기린의 심상에도 바지직 금이 간 순간이기도 했다. 이런 과한 존재는 있을 수 없고, 혹 있더라도 그만한 대가를 요구하기 마련이므로.

난데없는 이목을 산 모험가는 여전히 제가 뭐 그리 특이한 걸 말했느냐는 얼굴을 하고서, 차라리 촌에서 키우는 송아지처럼 말간 눈을 하고서 끔뻑이기만 했다. 지우스는 여기서 모험가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넝쿨째 굴러들어온 인재인 건 맞지만 동시에 거의 백지나 다름이 없는 애로도 봐야 한다고. 상식이나 지식이랄게 하나도 없다. 그는 총대를 메고 모험가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당신이 스스로 소개해야 할 게 많을 것 같은데. 우리 쪽 나진과 질의한 것만으론 부족한 것 같다. 스스로 의아했던 점까지 포함해서 다 말해봐.”

“어? 어어. 알았어.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그럼…. 그래, 나는 에오르제아라는 대륙에서 왔고, 음, 소속 자체는 하나를 짚기가 뭣한데. 내가 너무 이곳저곳에 발을 걸치고 있어서. 전에는 새벽의 혈맹이라고 딱 댈 수 있었는데, 일이 있어서 해체되는 바람에 그게 안 되네. 아, 그, 뭔가 사고 쳐서 해체된 건 아니구 존재의의였던 일을 해결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거야. 음, 그럼 지금은 주로 나이트로 활동하니까 소속은 일단 은갑옷 기사단이라고 해야 하나?”

“…여기는 그런 이름을 가진 기사단이 없어.”

“응. 아마 여기는 내가 있던 곳과 아예 다른 세계라고 생각해. 아니, 그게 맞아. 내가 어쩌다 차원을 넘어서 왔다고 해야 할까.”

“그건 또 어떻게 확신하지?”

“내 요정이 말해줬으니까? 진짜 똑똑한 애야.”

이번엔 견습들이 질린 얼굴을 하며 몇 걸음 물러섰다. 어디 광인의 미친 소리 같지 않은가. 여기서 말을 얹은 건 동기들이 뒤로 물러서는 바람에 졸지에 맨 앞줄에 있게 된 나진이었다.

“아까 나이트, 그러니까 기사를 주로 한다고 하신 걸 보면, 다른 무언가도 할 줄 안다는 뜻이네요. 요정이라는 것도 그 일환일 거고요. 그러니 직접 보여 주시는 게 어떨지.”

말을 앞 질린 듯 기린이 입을 뻐끔거렸다가 견의 말에 끄덕였고 그 꼬락서니에 닭이 킥킥 웃었다. 기린은 당연히 무시했다. 그럴 줄 알기도 했고, 저 노랑머리 꼬마나 기린이 먼저 말 안 꺼냈으면 제가 도발해서라도 알아낼 작정이었으므로 와론은 이제 머리 쓰는 게 주된 업무인 두 사람이 모험가에게서 정보를 뜯는 거나 구경하려고 자세를 풀고 슬그머니 론누를 띄웠다. 다들 딴 데 집중하다가 갑자기 습격당해선 안 될 일이니. 기사가 저 말고도 넷이나 있으면 불필요할까 싶은데, 혼자 지내버릇해 새겨진 습관은 별수가 없다. 기사를 믿을 수 있느냐고 하면 그 답도 애매하고.

그러는 사이에 모험가는 소울 크리스탈이라는, 저희에겐 전혀 생소한 존재를 설명하고 있다. 기사와 마법사 겨우 그 정도가 전부인 저희 세상과는 다르게, 모험가가 왔다는 에오르제아에는 다양한 직업군이 있고(전투에 능한 전문 치유사의 존재에 모두가 놀랐다) 그 직업을 가진 누군가가 도제에게 그 도제는 다시 자신의 도제에게…, 같은 방식으로 전해 내려오는 기억 저장 장치라고 했다. 그걸 가지고 저 스스로 무엇을 할지를 고를 수가 있고.

“그 돌만 바꿔 끼우면 뭐든 할 수 있다니 너무 사기 아냐?”

“이렇게 설명하면 그런 식으로 들리긴 하겠다. 그렇지만 기술을 익히고 깨닫는 건 결국 경험을 통해서 스스로 해야 하거든. 그래서 나는 일단 마법 직군도 할 줄은 아는데, 정말 할 줄만 알아. 그래서 아까 나진 군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음, 직접 보여 주는 게 빠를 거랬지.”

루디카가 꽤 삐딱하게 내던진 말도 둥그스름하게 받아낸 모험가는 반달 모양 화살촉 한쪽을 깨물어 먹은 듯한 푸르스름한 돌 하나를 꺼내 들더니 잠시간 눈을 감았다. 그러자 율니아를 비롯해 조금이라도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이들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주변에 있던 마나가 움직인 거다. 곧이어 마나와는 친하지 않은 이들까지 이변을 알아차렸다. 그야, 눈 한 번 깜빡이는 사이에 모험가의 차림이 바뀌었으니. 나무 틈새로 비친 햇빛을 반사하던 검과 방패와 갑주가 간데없이 사라지고 금장식이 화려한 코트 차림에 웬 금박이 잔뜩 박힌 책을 들고 있는 모험가는 어디 수도 같이 큰 도시에서 회계 따위의 사무직을 할 것처럼 보였다.

“자, 그럼 셀레네. 나와줘.”

마법처럼 멈췄던 순간은 에테르의 파동이 모험가를 감쌌다가 사라진 찰나에 깨졌다. 노른자처럼 진한 노랑과 고급 천 가게에서나 보는 자주색을 기조로 한, 두 쌍의 날개를 가진 요정은 제게 집중된 스무 쌍의 시선을 찬찬히 돌아보더니 이내 모험가를 마구 타박했다.

― 야, 너는 내가 아무 때나 부르랬니?

“아, 아니. 셀레네, 그치만 에테르가 안정되면 불러도 괜찮다며….”

― 그렇다고 전투가 있던 것도 아닌데 불러내? 심지어 치료가 필요한 상황도 아니잖아, 지금! 너 날 뭐라고 생각해, 어?!

아름답다거나 경이롭다거나. 요정에게 품었던 감상은 대부분 저것으로 집약될 것이나 셀레네라 불린 그가 입을 연 순간, 그 첫인상은 삽시간에 휘발됐다. 남들이 보거나 말거나 거친 말로 모험가를 한참 닦아세우던 셀레네가 마지막엔 한숨을 푹 쉬면서 그들에게 몸을 돌렸다.

― 실례했네, 우리 모질이 탓에 고생이었겠어. 둔감한 녀석이지만 맘씨는 드물게 착한 애니까 잘 좀 부탁해. 상황을 보아하니 얘가 날 설명 담당으로 부른 모양인데, 묻고 싶은 게 있으면 어디 물어봐.

대충 전후를 끼워보면 셀레네는 사역마, 그러니까 인간에게 소유되는 쪽의 마법 생물일 텐데도 이 요정은 그 반대로 굴었다. 너무도 당당하게 모험가를 자기 부하처럼 다루는 태도에 얼떨떨했던 특수 2기는 곧 이 친구가 훨씬 조리 있게 설명해 줄 거라고 깨닫고는 너도나도 질문을 쏟아냈다. 셀레네는 니므 해병대 신병 교육 현장 같다는,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까르륵 웃으며 이것저것을 답해주었다.

― 자, 그럼 나도 묻겠는데, 이곳의 전투원이란 너희 같은 ‘기사’로 묶이고 세부 분류는 없는 모양인데, 맞아?

“어. 궁수니, 뭐니 하는 건 그냥 일반 병사들 분류하는 거고. 하, 여하튼 그래서 아까부터 쟤가 날 더러 자꾸 용기사 용기사 그런 거구나? 야, 창을 들면 다 창술사냐?”

“미, 미안해. 와론 씨.”

“미안하면 이따 대련 좀 하게. 너 창도 쓸 수 있다고 하니까 이번엔 창 대 창으로 붙자. 내빼면 죽는다?”

“응….”

호기심을 충족하고서 맘이 풀린 게 뻔한 새까만 닭이 부러 으름장을 놓는 게 훤했지만, 모험가는 그걸 진담으로 받은 모양인지 쩔쩔맸다. 툭하면 대련하자고(쌈박질 말고, 정말 대련) 덤벼오는 그를 상대해 줄 사람이 생긴 것은 무조건 다행이라 다른 이도 속으로 묵념하면 묵념했지, 그 누구도 나서서 말려주질 않았다. 와중에 셀레네는 이곳의 전투 행정 체제를 지우스에게서 한참 캐묻더니 한숨을 푹푹 쉬었다.

― 힐러도 없어, 전략전술도 없어. 너희 정말 용케도 싸우는구나.

“뭐, 그게 기사니까. 역할 분담이 확실하다는 그쪽 전투는 흥미가 생기는데. 전투 인원인 전문 치유사라는 건 특히나. …가능하면 객원으로 있는 중에 그 전략전술이란 것 좀 배울 수 있을까?”

― 머리가 똑똑하게 잘 굴러가는 애들은 환영이야. 아, 근데 나는 저기 똘똘한 노랑머리 애가 특히 맘에 들었으니까, 쟤도 꼭 데려와.

“저요…?”

꼴을 보아하니 오늘은 여기서 이대로 야영하겠다 싶어서 체력 온존이나 할 요량으로 슬슬 무리에서 떨어져 나무둥치에 기대어 쉬려고 했던 견은 난데없는 지명에 눈만 껌뻑였다. 셀레네의 칭찬에 루지안과 라우준이 곧장 곁에서 얘 진짜 똑똑하다면서 추어 올려댔고 그 덕에 뺄 수도 없게 되어, 나견은 속으로만 한숨을 푹 쉬었다. 귀찮게 되었다. 이계에서 온 지식이 어디까지 여기에 통용될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린이 저 지식을 탐내는 시점에서 저만 귀찮게 될 공산이 컸다. 그런데도 거절하지 못한 까닭이라 하면 이 이야기를 듣고서 눈을 빛내는 모험가의 순진무구한 표정 탓이었다. 남의 치명적인 약점을 쥐고서도 그걸 칼로서 휘두를 낌새 따위는 한 조각도 없는 이상한 사람. 견은 하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견대로 오늘 인원이 하나 늘어난 특수 2기는 이곳에 머물렀다. 오두막이 반쯤 부서지긴 했어도 벽과 천장이 있고 간단한 용품이 갖춰진 데를 홀랑 버리기엔 아까운 탓일 거다. 물론 꼭 그것만은 아닐 테지. 오늘 밤 불침번 순번을 보면 기린은 분명 객원 참여 및 이번 하달된 임무에 관한 보고서를 쓰고 있음이 틀림없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진과 모험가가 같은 시간대 불침번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그것도 모두가 푹 잠들었을 무렵이다. 마치 둘이 할 이야기가 있지 않으냐는 것처럼. 제가 나진이 아님을 짐작하고 있을 기린이 배분한 순서일 텐데, 저 인간은 오지랖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새벽은 검푸르게 투명하고 깊다. 오두막에는 책상이 있기에 기린이 거기서 보고서를 작성하던 것도 이제 한참 전이다. 그가 저와 모험가를 깨우고 자러 들어간 것이, 체내시계를 믿었을 때 삼십 분은 전의 일이었다. 그 사이엔 서로가 말이 없었다. 여느 때처럼 승냥이와 너구리가 잔뜩 패둔 장작 몇 개를 모닥불에 밀어 넣고 불을 좀 더 살리느라 냈던 소음이 전부다. 견은 이 침묵이 불편했다. 그렇다고 먼저 입을 열어 패를 까 보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때였다.

“이제 진짜 다들 잠들었으니까 이야기해도 괜찮을 것 같네.”

“…그런가요.”

저와는 다른 이유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모험가는 완전히 재가 된 장작 하나를 들쑤셔 곁가로 빼며 나직나직하게 운을 뗐다.

“너한테는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아까 지우스 씨한테 불침번 순서를 부탁했고.”

하나를 숨기려 들어도 셋을 찾는 인간에게 아주 단서를 들입다 들이부었구나 싶으면서도 차라리 기린이면 모른 척 눈감아줄 테니 득도 실도 없지 않은가 싶다. 견은 굳이 대답 없이 고개만 까닥였고, 모험가는 여전히 잔잔하게 말을 잇는다.

“내가 네 비밀을 어떻게 알았냐면, 나한테는 좀 특이한 힘이 있거든. [초월하는 힘]이라고 해서 나는 다른 사람의 과거를 볼 수가 있어. 내가 원할 때마다 볼 수 있는 건 아니고 통제도 안 되긴 하지만, 네가 숨기고 싶은 걸 멋대로 본 건 사실이니까 다시 한번 사과할게.”

“…비밀만 지켜주시면 상관없어요.”

“상관없긴. 너한텐 중요하잖아. 음, 그리고 동생분 일은 쉽게 말을 얹을 게 못 되지만, 심심한 위로를 보낼게.”

“…네, 뭐.”

이런 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알 수 없어서 견은 적당히 말을 뭉개고 말았다. 타인을 모조리 상황 위의 말로서 다루고 경계와 의심으로 외피를 갖추어 살아온 시간이 길어, 이처럼 순전히 주어지는 위로와 다정에는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다. 이 사람은 평탄한 삶을 살아왔을까, 그리하여 이토록 흠 없이 상냥할 수 있는 걸까. 그런 의문도 든다. 분명 생각만 했을 터인데, 모험가가 놀란 얼굴을 하고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 게 보였다. 견은 자기가 아까의 생각을 입 밖으로 뱉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숨을 집어삼켰다.

“아니, 놀라지 마. 날 그렇게 봐줬다니 고맙다면 고마운 일이지. 내가 그렇게 좋은 사람인지는 모르겠거든. 으응, 하긴. 나만 네 과거를 읽어서 알면 불공평하긴 하겠다.”

그러면서 모험가는 겻불처럼 옅은 목소리로 지금껏 걸어온 발자취를 더듬어 짚어, 신출내기 시절부터 걸출한 영웅으로 불리기까지의 굴곡을 덤덤하게 풀어나갔다. 상실과 불꽃 그리고 믿음의 이야기를.

“―그러니 네가 나에게서 본 상냥함이라는 건, 아마도 내가 여행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온 마음들일 거야. 좋은 사람들이 참 많았어. 그렇게 보내기엔 정말 아까운 사람들이.”

“…….”

견은 아연하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이 지독한 이야기를 잠잠하게 풀어나간 모험가의 정신머리에 기함했다. 기사란 정말 제정신이 아닌 족속들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기사도 아닌 주제에 여기 그런 인간이 하나 더 있다. 아니지, 이쪽은 차라리 기사보다 더하면 더했지, 하나도 덜하지 않다. 대체 어떻게 그는 아직도 인류를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인간의 선의를 그다지 믿지 않으며 살아온 나견에게 있어서 눈앞의 모험가는 차라리 일종의 비틀린 존재였다. 인간으로서 겪기 어려운 일들마저 겪었기에 오히려 탈인간화된 건 아닌지 의심까지 됐다. 가호가 있어 목 가죽 한 장으로 겨우 숨이 이어 붙여진 적도 있었다던 그는 어쩌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삶을 영위하는 건 아닌가. 분노와 증오를 품은 영원이란 괴로움이고, 그걸 피하려고 이런 방어기제를 쓰는 건 아닐까.

나견의 경악과 의구심을 읽어낸 듯, 모험가는 빙그레 웃었다.

“나는 불사가 아니야. 언젠간 결국 죽겠지. 그렇지만 많은 사람이 내 등을 떠밀어주었고 그렇다면 나는 숨이 붙어있는 한 어디까지라도 계속 걸어보고 싶어. 그 사람들이 지키려던 세상을 말이야.”

그리하여 모험가는 처음으로 표정에 서글픔을 입는다.

“너도 그렇지 않아? 같이 보고 싶었던 풍경이 있었잖아.”

견은 망연하게 새벽의 검푸름과 공명하는 슬픔을 본다. 구름 몇 조각이 달을 스치며 음영이 몇 번이고 몸을 뒤척인다. 그림자가 너울거리고 한때 다잡아 굳혀 재로 덮였다 믿었던 마음이 흔들린다.

그럼에도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그날 다 얼어붙은 눈물샘이다. 대원을 이루기 전에는 결코 봉封을 떼지 않으리라 다짐했고 그 마음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러나 여기, 낯선 세계에서 온 이방인은 오롯하게 저를 알며 상실과 복수를 이해한다. 그런 그가 기어코 삶은 이어지고 말기에,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경치를 언제까지고 걸어보는 것은 어떠냐고 고요히 묻는다. 순순히 끄덕일 수는 없었으나 모험가는 대답 없는 제게서 무엇을 봤는지 다시금 특수 2기 전원이 알던, 잔상처가 많으나 여전히 빛나는 갑주처럼 웃었다.

“내가 여기 있는 한, 아니 그 이후라도 반드시 네 편이 되어줄게. 나도 한때 몰려서 도망자 신세로, 외톨이로 있어 봤으니까. 누구 하나쯤이라도 전부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을 때의 안도감은 잘 알아. 그건 추운 날 건네받은 따뜻한 코코아가 든 잔 같은 거지.”

나는 모험가이지만 동시에 아젬이기도 해. 점과 점을 연결해 인연을 이을 줄 아는 열세 번째 자리. 내 인류 역사상 최고最古이며 최고最高였던 대마도사가 단언해 준 대로 말이야. 그러니 삶에 지지만 말자.

잠잠하며 잠연하여 거스러미 하나 일지 않은 목소리 위로 유독 밝은 별 하나가 길게 내리그었다. 그렇게 새벽이 밝아간다.

 

마지막 불침번이었던 와드린과 콰링이 야영지 모두를 깨운 것으로 새 하루가 시작됐다. 눈을 뜨고서 바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부터 잠에서 완전히 깨기까지엔 약간 시간이 필요한 사람까지 다양하다 보니 이제 막 깨어난 야영지는 영 부산스러웠다. 새벽의 고즈넉함 따위는 이제 눈 씻고 찾아볼 수도 없는 판이다.

오늘은 전달 사항이 있었다. 오와 열을 가지런히 맞추는 이들은 아니었으므로 제멋대로 자리를 잡는데, 모험가는 그걸 꽤 신기하게 여기는 듯했다. 물어보면 “기사가 황실 소속이래서 불멸대 같은 느낌일 거로 생각했어.”라고 답했다. 아무래도 저희네와 같은 명예관이 없는 세상에선 황실 소속이란 으레 황실 직속 군사들과 같이 꽉 짜여있다는 고정관념이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토론할 바는 아니었으므로 서로가 곧 입을 다문다. 웅성거림이 자발적으로 잦아든 후에야 담청색 기린이 입을 열었다.

“공식적으로 새로 객원이 된 사람도 있고 위에서 추가 자료를 전달해줬으니 이번 특별 임무를 다시 설명하도록 하지.”

기린의 설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았다.

현 위치에서 일행들 평균 이동 속도로는 사흘 떨어진 거리에 있는 이름 없는 황무지에 이변이 발생했고 현상이 정체된 채라 특수 2기에게 정찰 임무가 맡겨졌었다. 그러나 어제 낮을 기점으로 황무지에 있던 마나가 형상을 갖추었고, 해당 건을 황실 마법사단과 별천지 일부 직원까지 동원하여 분석 중이나 이는 못 해도 이틀은 걸릴 것이며, 때문에 정찰에 방점이 찍혔던 이번 임무를 가능하면 토벌에 무게를 싣고 시행하라는 점이 처음과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기린 너랑 병아리들만 아녔어도 하루 반이면 충분히 가는데 말이지. 그냥 너 빼고 나랑 얘네 셋이서 후딱 처리하고 오면 안 되나? 아, 그러게. 모험가, 너 발은 빠르냐? 발 빠르면 너까지 다섯이고.”

“되겠냐? 우린 지금 견습들 교육도 겸하고 있잖아. 정찰 임무 같은 건 원래 교육 계획에 없긴 하지만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그리고 모험가가 정식으로 임무에 참여하는 건 객원 참여를 허가받고 나서야. 윗선에 보고는 잘해두었으니, 오늘 밤이나 내일쯤은 답이 오겠지. 그 정도는 기다려.”

목적지까지 사흘거리라는 말에 새까만 닭이 굳이 모나게 빈정거렸고, 담청색 기린은 태연히 받아쳤다. 여기 모인 기사 중 그가 제일 발이 느리다는 걸 부정할 사람은 없는 것이다. 어차피 밖에 나와서 돌아다니는 건 우리고 야전사령관 권한 같은 건 없는 거냐고 새까만 닭이 툴툴거렸지만, 그 이상으로 토를 달지는 않았다. 아마 모험가를 데리고 다니는 것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이지 싶다. 맘껏 대련할 상대가 있으니 봐주겠다는 태도이긴 한데, 저쪽도 나름대로 주고받은 약조에 맞추어 굽혀주고 있는 것일 테지. 그건 그렇고. 지우스는 모험가가 보내는 반짝거리는 시선이 영 부담스러웠다. 고마움을 골조로 하여 놀라움과 경탄이 한데 모여서 장식품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눈매는 사람 잘 따르는 강아지를 닮기까지 했다. 그저 상식과 규칙 선에서 일 처리를 했을 뿐인데 저런 사의를 받는 건 무슨 일인가.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저렇게 반응하나 싶지만, 타인의 삶을 짐작하되 캐내어 묻지 않기를 신조로 삼았으므로 그는 시선을 피했다.

대열에서 조금 떨어진, 모두의 시선이 비껴간 자리에서 새까만 닭은 모험가와 기린이 영 어설프고 우스운 콩트의 단막을 그리는 꼴을 보며 내심으로 비식거렸다. 참 웃긴 모양새다. 몇 합 주고받으며 관찰한바 모험가 저 녀석은 웬만큼 뛰고 나는 놈들보다 훨씬 위를 걷는 실력자이며 같은 인간인가 싶게 과하도록 이질적이다. 탁 까놓고 말하자면, 마구잡이로 거슬릴 정도로 눈에 띈다는 거다. 한때 순백색 코끼리가 모든 색 가운데 눈에 띄게 이목을 끌었던 것과 비슷하게. 그런 놈이 순탄한 인생을 살았을 리 없지. 질시와 선망의 한가운데에서 눈먼 욕망의 손아귀에 도대체 몇 번을 주물러졌을까. 그럼에도 자기 원형을 유지한다는 건, 저 녀석이 강하다는 방증 아니겠나.

그리고 그런 사람과 합을 대보는 일은 대체로 즐거운 일이다. 와론은 한동안 만나지 못한 검붉은 하마를 떠올리고선 투구 안쪽에서 빙긋 웃었다. 힌셔가 그런 사람이지. 즐거운 대련이었고. 사냥이 아니고 즐길만한 싸움이란 그런 거 아니겠나. 아, 얼른 한 판 붙자고 하고 싶다. 새까만 닭은 그렇게 생각하며 야영지를 정리하고 움직이는 나머지 일행의 뒤를 휘적휘적 따라갔다.

 

인적 없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도적이네 산적이네 하는 것들과 마주칠 리도 없고 저 끝이 척박한 황무지였으므로 만날 위협이라고 해 봤자 들짐승이 전부였다. 물론 여기엔 기사가 다섯에, 그에 준하는 객원이 하나 있고, 기사급이 아니면 웬만한 것들에 상처 하나 입지 않을 견습기사가 잔뜩이니 사실상 위험 요소는 없다고 봐야 했다. 다시 말해 아무 사건도 없이 심심한 행군만 몇 시간 이어졌다는 뜻이다.

새까만 닭 와론은 그 지루함을 꿋꿋하게 참았다. 남들이 들으면 놀라거나 비웃거나 둘 중 하나인데, 엄정히 따졌을 때 그는 인내심이 상당히 깊었다. 그렇지 않으면 사냥꾼이라는 칭호를 얻을 리 없지 않은가. 그게 비록 기사사냥꾼이긴 하지만, 먹잇감을 노리고 기다리다가 숨통을 끊는다는 점에선 똑같으니 그렇다고 치자.

특수 2기는 아직 다 여물지 못한 병아리들에 여타 기사보다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상지평을 탓해야 할는지는 재고해야 할(동기라던 여우를 떠봤다) 담청색 기린이 있기에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웬만큼 기동성 있는 기사끼리라면 끊임없이 달리다가 해가 떨어져 시야 확보가 안 될 때가 되어서야 야영지를 적당히 골라잡으면 될 일이지만, 이 인원으론 그것이 불가능했으므로 머리 위에 떴던 해가 어느 정도 기우는 늦은 낮부터 적당한 장소를 선정하고 임시 야영지를 꾸리고서 견습들의 수업을 해왔다.

와론이 노린 건 그때였다. 어차피 견습이란 보고 배우는 자가 아닌가. 알찬 대련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공부가 될 거다. 물론 이런 이유가 통하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강행할 작정이긴 했다.

열에 여덟의 확률로 자미 놈이 뜯어말릴 줄 알았더니만 앞선 이유를 대자 꽤 순순히 맘대로 하라고 했다. 뭐, 잘된 일이다. 사상지평의 사용권을 두고 기사와 기사가 약속했으니 제가 나름대로 성심성의껏 굽혀주고 맞춰주고 있는 걸 놈도 알아야겠지.

와론은 희희낙락하며 론누를 꼬나쥐고 씨익 웃는다. 맞은편에 서 있는 모험가 역시 이번엔 창을 들고 있다. 차림새도 완전히 달랐다. 이번엔 단순한 방어용 갑주라기엔 덫처럼 뾰족뾰족한 데가 많아 보인다. 사냥꾼의 감으로 저 차림은 당해도 그냥 순순히는 당하지 않을 거라는 의지마저 읽힌다. 검과 방패를 들었을 때와는 전투방식이 다를 것이라는 예감에 제 한 켠을 구성하는 싸움 광이 오싹하게 전율했다. 소울 크리스탈인가는 열아홉 종류나 된다고 했으니 앞으로 즐길 거리가 많으리란 것을 떠올리면 더더욱.

“우리 진짜 싸워, 와론 씨…?”

“그럼. 대련 몰라? 게다가 우리 병아리들도 꽤 기대하고 있는데?”

“으윽.”

정작 모험가는 내키지 않는 투였다. 어제 약속한 것도 있고 하니 아예 내빼진 않는데, 이대로면 온전하게 맞붙지 못할지도 몰랐다. 힌셔를 도발해 전력을 내게 했던 것처럼 이 자도 한번 긁어야겠다 싶다.

그렇지만 의외로 그럴 필요는 없었다. 개시신호 없이 냅다 간격을 파고드는 새까만 닭을 맞이한 모험가의 입가가 전투의 고양감으로 솟은 거다. 그래, 이래야지. 전투의 짜릿함을 즐기면서도 거기에 잡아먹히지 않으며 냉정해야만 목숨을 건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빠르게 세 합, 잠시 거리를 벌렸던 모험가가 무릎을 굽히나 싶더니 와론의 옆구리를 노려왔고 그가 아슬하게 피하며 반격했을 땐 이미 원래 제자리 뛰기를 한 곳으로 돌아간 후였다. 지금 다시 보니 모험가의 주변에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돈다.

“진짜 신기한 놈이네. 그 푸르스름한 건 무기의 능력인가?”

“[용혈]은, 그냥, 뭐. 용기사면 쓰는 거야.”

“그렇게 쉽게 말할 게 아닌 것 같긴 하지만, 그건 좀 더 싸우면서 알아가면 될 것이고! 얼른 더 덤벼보라고~.”

“아니, 그러고 싶어도 이게 후측판정 때문에 곤란한데….”

창과 창이 닿을 땐 그렇게 공격적으로 굴면서 정작 그 틈에 나눈 대화는 지금까지 봐온 대로 묘하게 맥이 빠진 순둥이여서 와론은 기가 찼다. 물론 저도 썩 전력이 아니긴 한데 이래서는 상대 역시 마찬가지라는 뜻 아닌가. 게다가 또 알 수 없는 소리나 하고 있고. 새까만 닭은 목과 어깨를 잠깐 으드득 풀더니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속도로 속공해왔다. 모험가는 잠시 멈칫하나 싶더니 좌우로 움직이면서 그걸 다 피했다. 위로 뛰어서 피할 거로 예측해 노려 찌른 론누가 허공을 가른다. 모험가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곤 아까와 같이 뛰어서 급습해와서 와론은 그걸 가볍게 피했지만, 그 직후 뭔가 푸르고 길쭉한 파충류 같은 것이 저를 덮쳤다. 보이기는 마법 같았는데 정작 저만한 덩치에 실제로 얻어맞은 감각이라 새까만 닭이 조금 뒤로 밀려났다.

“야, 너야말로 창만 쓰는 게 아니지 않냐? 뭐가 창술사야.”

“그러니까 용기사…. 으음, 중앙대륙 기준으론 역시 아니려나.”

“됐어. 어차피 나도 창을 쓰는 기사니까 너도 뭐든 다 써 봐라.”

말을 끝낸 와론이 돌연 론누를 상공에 투척했다. 이미 한번 본 기술이었으므로 모험가가 허공에 뜬 창을 예의주시하는데, 그 찰나 거리를 좁혀온 와론은 즐겁게 웃으며 갑주 가시의 빈틈에 주먹을 날렸다.

“하하, 너쯤 돼도 이걸 속는구나?”

“윽…!”

이번은 제대로 유효타였던 모양이었다. 등 뒤로 떨어지는 론누에 신경 쓰다가 정면을 파고든 신형을 잠시 놓쳤던 모험가는 창과 새까만 닭 사이에서 벽공을 얻어맞고 몇 걸음 비틀거렸다.

“이제 더는 자기류 벽공이 아니지롱~. 힌셔한테 교정받았다고.”

“와론 씨, 주먹도 엄청, 맵구나…. 와, 더 맞았다간 골로 가겠네.”

“네 맷집도 죽여주는걸? 웬만한 놈들이 이거 맞으면 내장 토할 것 같다면서 바닥을 기거든. 아무래도 너랑은 더 즐길 수 있겠다, 야.”

투구로 눈이 안 보이는 두 사람이지만 서로 얼마나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선했다. 대련은 더더욱 변칙적으로 불타올랐다.

그걸 지켜보던 다른 기사들 역시 처음에는 나중에 견습들에게 해설해줄 요량으로 무심히 쳐다보고 있었지만, 이쯤 와서는 슬슬 자기도 저기에 합을 섞고 싶은 티를 팍팍 내었다(기린은 제외다). 기사는 강한 자 가운데서 더더욱 강한 자였으니, 결국은 자기 힘을 대보고 싶어 하는 생물이다. 무엇보다 모험가의 싸우는 방식은 저희 기사들과 궤를 완전히 달리하고 있어서 더 그랬다. 특히 그게 두드러지는 건 상대의 공격을 회피할 때였다. 그냥 보고 있는 저희만 해도 그런데 하물며 직접 상대하고 있는 와론은 더 할 것이다.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새까만 닭이 그 점을 물었다.

“근데 너 진짜 특이하다. 다른 애들이었으면 다른 지형지물로 뛰어오르거나 해서 피하려고 들 텐데, 넌 곧 죽어도 좌우로만 피하네? 공격 유효간격을 절대 안 놓치겠다는 의지려나?”

“그런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보이니까 피하는 거야. 굳이 그렇게 뛸 이유도 없고….”

그 순간, 대치하던 새까만 닭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아니, 기린을 제외한 장외의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희 중에서 종합적인 전투력으론 손에 꼽히는 와론이 저런 소리를 듣는다면 그건 그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거 아닌가. 제일 먼저 여우가 폴스를 꺼내 들었고 그다음은 승냥이가 기둥을 걸쳐 맸으며 마지막으로 그새 몸을 푼 너구리가 도토리를 꽉 움켜쥐었다. 견습들은 멀겋게 질린 얼굴로 살의 비스무리한 기세를 뿜는 저희 인솔진에게서 슬금슬금 멀어졌다. 기린 역시 동료들을 말릴 생각을 포기하고서 병아리들에게 손짓해 안전권으로 물러서게 했다. 특수 2기의 장이 아무 말 없이 물러선 것을 “맘대로 해”라고 받아들인 세 기사가 예고도 없이 대련에 난입했다.

그리고 모험가는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쭉 흐르는 걸 느꼈다. 아니, 실제로 저에겐 남의 공격이 ‘보이기도’하고 위로 뛰어봐야 공격받는 건 똑같으니 사실대로 말한 건데, 왜 갑자기 저렇게 화를 내지? 아무래도 상대가 뭔가 오해를 한 건 분명했지만, 새벽의 금고지기이자 최고의 담판가인 타타루가 저더러 “모험가님은 오해를 부추기는 편이시니까용!”이라고 하던 것이 생각나 그냥 입을 꽉 다물었다. 타타루의 충고를 들어서 잘못된 적은 없었으니까.

비록 속으로는 오만 비명을 질렀지만(어째 프레이와 셀레네가 한숨을 쉬는 것이 환청으로 들린 듯도 했다. 당신이란/너란 사람은), 다 대 일 전투에 특히나 익숙한 몸뚱어리는 착실하게 다음 동작을 해냈다. 지금도 어렴풋하게 눈에 보이는 공격 예상 범위들 사이, 발끝으로 설 만한 안전지대가 있어 발을 디뎠다. 그렇지만 이런 묘기도 두세 번이지, 눈 돌아간 기사 넷이 마구 덤벼드는 걸 딜러 직군으로 막아내는 건 분명 한계가 있었다. 연속으로 들어오는 타격을 어떻게든 흘려보내면서 모험가는 가장 익숙한 소울 크리스탈을 어떻게든 움켜쥐며 [나이트]로 되돌아왔다. 그 사이 네 종류의 서로 다른 무기가 코앞까지 육박해온다. 저걸 이대로 맞으면 단박에 골로 가겠지. 지금 잡이 음유시인이나 기공사가 아니라 진짜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정말 울고 싶다. 어쩌면 저와 동료들에게 토벌됐던 야만신의 기분이 이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모험가는 [천하무적]을 냅다 발동했다.

…회심의 일격이 이유도 모르고 무효타가 되어서 더더욱 약이 오른 기사들이 날뛰며 덤벼들기 앞으로 9초 전.

 

모험가와 기사 넷의 싸움박질은 원래 겉으로 내세웠던 목적은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기사들과의 뜻 모를 친목이나 쌓게 하며 끝났다. 간만에 신나게 날뛰었다며 깔깔 웃는 승냥이와 정말 즐거웠다면서 싱글벙글 웃는 상인 너구리는 모험가를 거의 뭐 십년지기처럼 대하고 있고, 닭은 시시때때로 또 뭐 가지고 있느냐고 찔러댔다. 천하무적인지 뭔지 그런 사기적인 기술은 짜증이 났지만, 그 외는 맘에 찼던 모양이다. 여우 역시 흥미가 없지는 않은 듯 간혹 무언가를 물었는데, 기린이 보기에 그가 절친한 흰 사슴을 염두하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건 저도 살짝 궁금하긴 했다. 모험가 역시 맨손으로 무투를 할 수 있다면 과연 저희 동기 중 가장 강했던 파디얀과는 어떻게 싸울지를.

문득 거기까지 생각했던 기린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해는 벌써 꽤 기울어버렸고 지금부터 야영지를 세우고 머물 준비를 시작해도 아슬아슬할 판이다. 한창 먹어댈 청소년기 애들까지 끼고 있어 끼니를 거를 수도 없기도 하니 곧장 식량 구해올 조를 파견해야 했다. 그는 흙먼지 따위로 꼬질꼬질해 더는 기력이 없어 뵈는 기사들을 향해서 말을 툭 던졌다. 저래 봬도 쌩쌩할 걸 안다.

“승냥이, 너구리. 터 좀 닦아줘.”

“예입~.”

“후딱 끝내볼까요!”

과연 모험가와 땅바닥에 주저앉아 웃고 떠들던 둘은 거리끼는 기색 하나 없이 기운차게 일어나서는 각자 대검을 가열차게 휘둘렀다. 깔끔하게 공터가 들어서고 땔감이 덤으로 생겨났다. 덕분에 기사님들 지쳐서 앉아있는 건 처음 본다며 속닥거리던 견습들만 토끼 눈이 되어 끔뻑거렸다. 늘 보는 광경이긴 했지만, 이번은 유독 심리적인 파괴력이 큰 탓이다. 아까의 대련이라기엔 당장 누구 목 하나 날아갈 듯했던 쌈박질 직후에도 평소와 똑같은 화력이 나온다니.

“아이고, 나무 아깝게…. 있지, 장작 팰 거 말고 나머지는 좀 남겨줄래? 식탁이나 뭐 그런 것도 좀 만들고 하게.”

그러거나 말거나 모험가는 태평하게 저런 소리나 했다. 견은 매번 이 꼴을 보면서 아깝다고 생각해왔던 저와 똑같은 감상을 가진 그에게 잠시 시선을 돌렸다가 시선이 맞자 슬그머니 피했다. 견이 자진해서 식량 채집 조에 자원했고(어차피 독초 구분 작업은 저와 기린의 몫이므로) 거기에 모험가 또한 손을 들었다.

수렵채집 조가 서넛으로 갈려 각자 전리품을 들고 돌아오기까지는 그리 오래지 않았다. 가장 늦게 돌아온 건 나진과 모험가가 낀 조였는데(더불어 견습이 제일 많이 배치됐다), 그 이유는 한눈에 보아 분명했다.

“우와, 그 물고기들은 다 뭐예요?”

“애들을 뭘 그리 많이 끌고 가나 했더니, 자신 있는 거였구만?”

“피도란스 님! 들어보세요! 모험가 씨, 낚시도 엄청 잘해요!!”

“낚싯대라는 게 원래 빛이 나나?”

“아니, 우리 지역에선 단 한 번도 못 봤는데….”

오늘 장작을 패기로 해 야영지에 남아있던 너구리가 제일 먼저 모험가 일행을 발견하고선 감탄사를 날렸다. 그야 따라간 견습마다 어른 몸통만 한 광주리를 한둘씩 이고 왔으니 말이다. 것도 실한 놈들만 가득해 펄떡거리고 있다. 이 주변에 들짐승이 많지 않다는 걸 들은 모험가가 물고기를 낚아오겠다고 해서 그러려니 했더니만, 이건 뭐 거의 씨를 말린 수준이 아닌지. 생태계 파괴를 염려한 기린이 견에게 너는 말리지 않고 무얼 했느냐고 눈짓하자, 견은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저 인간이 먼저 괜찮다고 했단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말려서 들을 것 같아요? 뻐끔뻐끔 입 모양만으로 그렇게 전하자, 기린이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 좋게 생각하면 애들 잘 먹이는 거지, 하고 마음을 돌려먹은 모양이다.

와중에 낚시라는 말에 혹해서 따라갔던, 눈의 땅 레툰 출신인 파이멜은 제가 본 광경에 반쯤 넋이 나가 있었고 곁에서 마찬가지로 상식을 부정당한 듯한 표정을 한 지룬이(정확히는 낚시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모두) 고개를 젓고 있었다. 덕에 화젯거리는 오늘 저녁 식사는 무엇이냐보다는 끝내주는 낚시꾼인 모험가와 그의 빛나는 낚싯대로 옮겨갔다. 그런데 정말 궁금하긴 한 것이다. 낚싯대가 왜 빛이 나는가. 간혹 수생 생물을 꼬여내기 위해 불빛을 켠다곤 하지만, 견습들이 떠드는 걸 듣자면 그런 광원은 아닌 듯했으니.

바로 물어볼 수는 없었다. 생선 손질은 맡겨주라며 팔을 걷어붙였던 모험가는 야영지 한 켠에 잔뜩 부려진 원목을 일별하더니 “어어, 제작수첩이랑 채집수첩 글씨가 왜 이러지? 뭐, 나머지는 대충 감으로 해볼까.”라고 중얼거리더니만 잠깐 광석 몇 개 좀 캐오겠다고(여기서 기사들조차 자기가 들을 말을 의심했다. 뭘 어쩌겠다고?) 자리를 비웠다.

오래지 않아 불룩한 가죽 주머니를 들고 온 모험가는 그길로 뭔가 뚝딱뚝딱 만들기 시작했다. 통나무는 어느샌가 목재로 변했고, 목재는 곧이어 식탁이나 의자, 침대 골격 심지어는 수저 스물한 쌍으로 탈바꿈했다. 나무 식기까지 그럭저럭 갖춰낸 그가 냅다 솥을 만들어냈을 때는 이제 모두가 하던 걸 멈추고 모험가의 진기명기를 구경했다. 가방에서 철못이나 청동판 같은 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왔을 적엔 곳곳에서 박수마저 터져 나올 정도였다.

지금껏 야외 취사용으로 간략하고 조잡한 조리기구를 사용해왔던 특수 2기는 음식점 주방에서나 볼 법한 도구가 척척 갖추어지는 것에 혀를 내둘렀다. 모험가의 기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서, 생선찜을 해주겠다며 부엌칼과 국자까지 드는 것으로 이어졌다. 어디 전승에는 군영 하나를 혼자서 먹여 살릴 수 있는 농경과 기술의 신이 있었다고 했는데 딱 그짝이었더랬다.

“으음, 간도 딱 좋네. 생선찜은 오랜만이었는데. 이대로 찌면 돼.”

“대량으로 요리하는 거, 되게 익숙해 보이시네요.”

“그야, 뭐…. 한창때는 피피라 피라 찜을 엄청나게 했었거든. 동료들한테도 친구들한테도 잔뜩 나눠줬으니까. 생선찜은 그때 이후로 오래 안 만들었는데 역시 몸이 조리법을 기억하네.”

“그럼 낚시도 그때 익힌 거예요?”

“그 빛나는 낚싯대는 직접 만드셨어요?”

“낚시 재밌어요?”

찜이라면 어느 시점에선 손을 떼어도 되기에 그때만을 기다렸던 콰링이 슬그머니 질문을 던졌다. 왜 그렇게 많이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그 세상에서 유행이었을지 또 어떻게 아나 싶고, 어쨌거나 모험가가 생선찜을 이골이 나게 요리했다는 건 충분히 전달됐다. 여하튼 그렇게 한 명이 답을 얻기가 무섭게, 또 다른 질문들이 우후죽순 쏟아졌다. 병아리들이 삐악삐악하는 소리에 다른 이들도 모험가의 답을 궁금해하며 슬며시 귀를 기울인다.

“어어, 답은 하나씩 천천히 할게. 낚시는 그냥 모험 중에 재밌어 보여서 시작한 건데, 그럼 취미 같은 건가? 응, 취미겠다. 터주가 열받게 할 때는 있지만. 그리고 이 낚싯대 말하는 거지?―여기에는 아주아주 많은 피땀 눈물이 들어있어. 아직도 가방에 물비린내 나는 것 같을 때가 있을 정도로….”

어느샌가 모험가 손에는 예의 빛나는 낚싯대가 들려있었다. 이제 이런 갑작스러움엔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차가운 파란색으로 빛이 나면서도 푸르스름한 기운이 손잡이 근처를 휘휘 뱀처럼 맴도는, 낚싯대라기엔 과하게 화려한 느낌이 나는 그것을 보면 아까 전 아이들이 왜 그렇게 조잘조잘 떠들어댔는지 단번에 이해가 갔다.

모험가가 영 죽은 눈으로 노동집약적인 빛나는 낚싯대에 관한 사연을 풀어준즉슨, 기록이 일부 소실된 과거의 도구를 복원, 개량했다는 거다. 그러면서 정말, 아주,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는 것도.

“수첩 낚싯대라고 해서 다른 빛나는 것도 있긴 한데, 그건 나도 아직 못 얻었네. 그놈의 홍룡. 절대 가만 안 둬….

지금껏 해맑은 모습만 보여주던 모험가가 얼굴에 누구 씨처럼 음영을 깔고 바닥을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모양새는 영 흉흉했다. 어부라는 직업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 사람이 저렇게 피폐해질 만큼 어려운 건가 보다. 일행들에게 이상한 오해를 적립시켰다는 걸 모른 채로 모험가는 이야기를 전환했다. 피피라 피라 찜, 아니, 자연산 물고기찜이 완성된 거다.

“자, 다 됐―잠깐만 율니아 군?! 지금 그거 입에 물고 있는 그거! 뭐야! 어디서 꺼냈어?!”

“우물우물(당신 가방).”

“뱉어! 당장 뱉어!! 푸딩살 그거 되게 오래됐어! 눌진 군!!”

“어, 네네. 율니아, 다른 것부터 먹자, 응? 나는 율니아가 맛있는 걸 먹는 게 더 좋은데….”

“아니, 그럼 왜 들고 있는 거야! 것보다 뭔 가방이 아무거나 다 들어있대!? 못은 그렇다 쳐, 근데 황동판이 나오는 건 역시 이상하지!”

“아니, 내 가방이 좀 그럴 수도 있지! 눌진 군, 됐어?”

“네에.”

“그치만 배고팠어. 더 기다리기 싫어.”

“그래그래, 다 됐대, 율니아.”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솥뚜껑을 열었던 모험가가 문득 반려견이 뭔가 우물거리면서 나타난 것을 본 것처럼 뜨악한 얼굴로 익숙한(그래서 더 경악스러운) 무언가를 씹고 있는 율니아를 향해 외쳤고, 하루 반 만에 율니아를 다루는 데에는 눌진만 한 사람이 없다는 걸 학습했기에 헬프를 외쳤다. 눌진이 쩔쩔매며 율니아가 질겅질겅 씹고 있는 걸 뱉게 하는 사이에 투리순이 거의 반사적으로 반말로 꽥꽥 소리쳤다. 아무래도 스스로 알던 상식이 너무 많이 공격당한 와중에 물리법칙을 초월한 가방을 본 더러 대체 왜 그런 걸 들고 다니느냐는 분통이 겹치다못해 터져버린 모양이었다. 자기도 막말을 한 건 알았는지 직후에 양손으로 입을 합 막긴 했다. 모험가는 어린 친구에게 반말을 들은 것쯤이야 신경 쓰지 않는다며 가볍게 손짓하고선, 뱉어져 바닥에 떨어진 푸딩살을 보고 먼 추억을 보듯이 은은하게 웃었다.

“극독약 써먹던 시절에 남은 재료가 어디에 남아있었나 보네.”

독약이라는 불순한 단어를 들은 특수 2기는 저도 모르게 모험가와 그가 만든 물고기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독. 모험가는 독도 만드나. 만드는 내도록 스무 쌍의 눈이 그를 지켜봤단 걸 알면서도 그랬다.

…물고기찜은 정말 어디서 고급 음식점을 차려도 될 정도로 훌륭하게 맛있었으며, 당연하게도 독 따위는 들어있지 않았다.

 

“끄, 끝났다….”

마나와 공간의 상관관계 및 환경 마나의 성질 변이 분석을 담당했던 마법사 셋이 거의 동시에 다 앓아 죽는 목소리를 하고서 책상 위로 엎어졌다. 연구는 체력이라며 나름대로 단련에도 힘써왔던, 마법사단 내에서도 정신력과 체력 하나는 끝내주던 사람들이 나자빠졌으니 다른 조들은 더 볼 것도 없었다. 눈 밑이 거뭇거뭇하게 퀭해서는 상한 채소처럼 보일 법도 하다. 괴짜가 많기로 유명한 별천지에서 파견된 직원도 힉힉, 웃는 건지 우는 건지 가늠도 안 가는 소리로 흐느끼고 있으니 누가 보면 여기가 시체를 일으켜서 부린다는 시체법사의 본거지로 착각할 정도였다. 겉모양이야 다 죽어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열다섯 명 남짓한 인원들의 면면에는 해냈다는 성취감이 그득했다.

그야 이 미친 분석을 정말 하루 반 꼬박 걸려서 끝냈으니까! 세기의 대발견이나 다름없는 결과물 앞에서 지식욕이 잔뜩 자극되어 달아오른 이들은 뇌가 과열된 채로 히죽댔다.

특수 2기를 보내둔 그 황야는 지금 완전한 이계다. 우리 세상에는 결단코 없던 환경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세계 바깥이 있다는 발견. 저 하늘 너머 어딘가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지금 네 번째 대마도사가 탄생한다느니 하며 마법계가 술렁이고 있으나, 이 내용을 발표하면 저희가 그 네 번째의 집단이 되거나 혹 아예 역사를 바꾼 마법사가 될지도 모른다. 사단장은 수면 부족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결과 요약본을 특수 2기의 키톤으로 전송했다.

그리고 까무룩. 연구실 모두가 곯아떨어졌다.

 

문제의 황야는 늦가을 추수가 끝난 들판처럼 메마른 빛깔을 하고 있었다. 빈 가지가 앙상한 나무가 듬성듬성 자리하고 한쪽으론 야트막한 강 하나가 흐른다. 저 멀리에는 꼭 흰개미 굴처럼 생긴 암벽 조형물이 성처럼 우뚝 솟았다. 초록빛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 누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과하게 낯선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저희가 대륙 곳곳에서 모여든 사람끼리라지만, 누구도 이런 풍경은 본 적이 없는 듯 견습들은 조그맣게 감탄사 따위를 나누고, 기사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다. 한참 후에야 기린이 선언했다.

“여기에 진지를 차리지. 하루 유예가 생겼으니 터를 잡아 임시 거점으로 삼아도 될 거다. 황야 바로 앞이기도 하고.”

목적지는 사흘 떨어진 거리에 있다고 했지만, 그보다 하루 앞당길 수 있게 된 까닭은 어김없이 모험가 덕분이었다. 그가 [음유시인]이라고 이야기한 직업이 뭔지는 몰라도(노래만 한다기엔 활을 쐈다. 그럼 궁수 아닌가?) 걸음을 빠르게 해주는 기술, [단체 질주]가 있는 덕이었다. 평균 이하의 달리기 속도를 가진 두뇌 담당 두 사람을 빠르게 달릴 수 있게 하니, 다른 기사들이 내친 김이라며 일행을 닦아 세워가며 강행군으로 달려와 가능했다.

억지는 아니었고, 특수 2기와 객원 모두가 합의한 내용이었다. 며칠 짜리 행군으로 피로가 쌓인 채로는 정찰이고 토벌이고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것 같으니 차라리 미리 도착해 임시 진지를 짓고 몸 상태를 끌어올린 후에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나을 거란 의견에 다들 동의했고, 임무 수행에 필요한 마법사단의 분석 결과는 아무리 빨라도 저희가 앞당겨 도착한 다음 날에야 받을 수 있을 거라 예상했기에 그랬다.

그런데 저희가 한결 빠르게 도착했듯이 괴짜 연구 집단 역시 예상보다 반나절 일찍 정보를 가져다주었고, 덕분에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전달 사항을 들은 지금에 이른다.

“어쩐지 기억하곤 다르더라.”

“뭐? 원래 이렇게 생긴 데가 아니라고? 그러면 여기가 고지 드라바니아 연기 황야처럼 생긴 게 아니라, 진짜 거기라는 거야?”

기사 경력이 꽤 길어 대륙 곳곳을 돌아다닌 적이 있던 몇은 이제야 이해가 간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처음 도착하자마자 자기가 있던 곳에도 이렇게 생긴 지역이 있다며 신기해했던 모험가는 거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더니, 그길로 잠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발언권을 얻겠다는 요량으로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시선이 오밀조밀 모여들자, 그는 화제의 중심이 되는 건 떨떠름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는 투로 미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곳이 내가 아는 연기 황야라면 우리가 누구를 상대해야 하는지 알아. 저번에 저기 있는 게 불과 철과 피의 마나라고 했지? 그렇다면 확실해. 한 번 싸워본 적이 있어.”

듣기엔 긍정적인 소식이었다. 견습들은 표정이 밝아졌으나, 기사들은 속단하기는 이르다는 무표정으로 모험가를 바라본다. 그러자 병아리들 대다수가 그 분위기를 이해 못 한 채로 눈치만 보았다. 견은 모험가가 무얼 말하려는지 짐작이 가서 일이 귀찮게 됐다 싶었다.

‘단순한 희소식이었다면 저런 표정으로 말할 리가 없지….’

무언가 걸림돌이 될 만한 사항이 있으리라. 과연 그 어림은 들어맞아서 모험가의 이어진 말에 모두가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저 끝에 있는 건 무신 라바나일 거야.”

[에덴]이란 곳에서 겪었던 기억을 토대로 재현된 투영체면 또 모르겠지만(이 경우는 미묘하게 공략법이 달라진댔다), 이라며 운을 뗀 모험가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갑각으로 감싸이고 네 자루의 칼을 쓰는 무예의 신 라바나. 모험가의 세상에서 그들 부류는 야만신이라 일컬어지며, 특수한 내성을 가진 이들 외의 존재를 세뇌한다고 했다. 영혼째로 탈취한다고 해야 할까. 그의 동료 알리제가 치료법을 찾긴 했지만 여기서는 필요한 재료를 찾을 수가 없고 혹 그게 있더라도 마법에 썩 능하지 못한 저는 치료용 사역마를 만들지 못할 것 같다는 점도 이야기했다. 모험가까지 가세한 특수 2기의 전력이라면 토벌 자체는 수월할 거로 생각했건만, 예상과 다르게 돌아가는 사태에 다들 앓는 소리만 냈다.

그때였다. 번개처럼 내리친 암전. 눈꺼풀이 한 번 깜빡 닫혔다가 열리는 찰나에 온 사방은 막을 내린 것처럼 깜깜해졌다. 그리고 다시 한번 눈을 깜빡였을 땐, 눈앞에 아지랑이로 이뤄진 인영이 서 있다.

짧은 웅성거림이 일행 사이에 퍼졌으나, 새까만 닭은 홀로 침착했다. 이전, 검붉은 하마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를 떠올린 덕이다.

‘저게 힌셔가 봤다던 관리자인가 뭔가 하는 놈이겠네.’

“어어…! 당신! 아, 기억났다! 까먹고 있었어요, 미안해요!”

들었던 말대로라면 저자의 장막에 들어온 이상 누가 어떻게 제외될지는 모르는 일이라, 혹 기습으로 막아볼 수 있을까 속으로 재어보고 있던 와론의 긴장감은 어이없을 정도로 상황에 어긋나 태평하기 그지없는 모험가의 말에 바스스 흩어졌다. 생각해보면 쟤는 기억 일부가 날아갔었다고 했다. 그 원인이 저놈이라면 납득간다. 저 관리자라는 놈이 누구는 죽을 운명이네 뭐네 거렸다는 게 영 맘에 들지 않았는데, 모험가가 시선을 끄는 사이 한 대라도 칠 수 있지 않을까. 기억상실의 원인이 된 놈을 때리면 모험가로서도 좋은 일 아닌가. 그런 생각이나 하는 사이 아지랑이가 한숨을 푹 쉰다.

“미안해할 것까지야. 그것보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듣게 될 거라곤 예상 못 했는데. 이게 법칙 내에서 조율될 일이긴 한가? 내버려 두면 여길 시작으로 세계끼리 유착될 테니 틈새가 생길 거고. …흠, 그래, 이제부터 발언자는 모험가 하나다. 자, 시간이 없으니 거두절미하고 말하지. 우선, 모험가. 네가 걱정하는 신도화는 신경 안 써도 된다.”

“네? 여기서 하이델린의 가호를 받는 건 나 하나뿐이잖아요?”

“네 가호는 ‘기사’…, 쯧, 이건 말 못 하나. 여튼 기사란 것도 비슷한 시스템이라 그럭저럭 저항할 거야. 그리고 견습들에게도 임시로 가호를 부여할 수 있게 네가 가진 그 크리스탈, 나름 법칙변조를 했지.”

[법칙변조]라는 말에 모험가는 아씨엔을 떠올리고 멈칫했다가 이어진 말에 후다닥 [아젬 크리스탈]을 꺼내 들었다. 주홍색 마노처럼 생긴 그것이 은은하게 빛이 나는가 싶더니, 돌연 찬란한 섬광을 뿜어내며 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모험가를 중심으로 보이는 일곱 개의 원이 가지를 뻗듯이 확장되어 견습들 아래에 펼쳐졌다. 깜짝 놀란 병아리들 몇몇이 펄쩍 뛰거나 거기서 멀어지려 했지만, 금빛 고리는 끝까지 그들을 따라갔고 열다섯 명을 완전히 감싸 안은 그것은 다시금 번쩍이더니 빛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어안이 벙벙한 그들을 무시하고 아지랑이는 견습들 면면을 살펴보더니 만족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사히 부여됐군. 나중에 쓸 일은 없겠지만 지금은 존재하게 되었으니, 우선 [아젬의 가호]라고 해볼까.”

“아니, 그, 지금의 내가 정확하게 아젬은 아닌데 그래도 되나요?”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씹어야지. 이 어긋남은 나중에 값을 치를 테니 신경 쓰지 마라. 처음에도 말했듯이, 이쪽 문제야.

뭘 더 전해야 했더라, 아, 그래. 투영체는 네가 아는 [투신 라바나]가 맞다. 변이체는 아니야. 그럼 이만.”

“아니, 저기 잠깐만요! 저는 그럼 집에는 어떻게―!”

모험가의 비명 섞인 외침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지랑이는 몸을 돌렸고 동시에 시야가 다시 암전되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그들이 원래 서 있던 풍경을 비추었다.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아우성이 치솟았다.

“젠장! 아, 드디어 말이 나오네!”

“대체 그건 뭐였어?!”

“그거 진짜 징그러워! 나만 그렇게 생각했어?!”

그제서야 모험가는 저 외에 그 누구도 말하지 못했던 것이 그자가 입을 막았기 때문이란 것을 깨닫고 부르르 떨었다. 근거가 내 직감뿐이긴 해도, 적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야. 어쨌든 그건 그거고. 모험가는 기사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연스레 눈과 눈이 마주친다. 같은 생각을 하는 동료들끼리 흔히 겪는 일이라 모험가는 입가를 들어 올려 웃었다. 이쪽은 새벽 동료들과 달리 마주 웃어주는 인원이 적긴 하지만, 뭐 어떤가. 한솥밥 먹고 등을 맞대고 같이 싸우는 사이인데.

마지막으로 눈이 맞았던 담청색 기린 지우스가 좌중을 둘러보고서 입을 열었다. 그런 괴이쩍은 일을 겪고서도 평온한 목소리다.

“…아까 봤던 자가 누군지, 지금은 중요치 않아. 그래도 이번 작전은 모험가에게 지휘를 일임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반대하는 사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모험가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에오르제아 도시국가의 총사령부에서 일단은 중령을 달고 있다던 모험가는 자기는 울며 겨자 먹기라고 하면서도 짬이 있는 사람답게 편제를 짰다. 셀레네의 신랄한 충고와 원래 특수 2기의 두뇌를 담당하는 지우스와 견이 이것저것 돕기는 했지만, 야만신 토벌이라는 특수한 전투를 상정한 작전은 경험자가 주가 되어 짜는 것이 맞긴 했으니까. 다만 산전수전 공중전에 우주전까지 겪은 모험가라도 예상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면, 이 세계에서 기사가 낀 전투란 으레 단체전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역할을 분장하자고 제안했다가 거기에 찬동하는 사람이 지극히 희박하다는 걸 깨달은 모험가는 여기 와서 처음으로 정색하고야 말았다. 아니, 차라리 경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저 역시 전장에서 홀로 싸운 적도 많았지만, 동료들이 다른 방식으로 제각기 지지해주었으니 완전한 독단은 아니었지 않은가.

“여기는 왜 무조건 각개전투를 상정하는 거야?”

“특수 2기는 단체전 실험 목적도 있다. 나나 내 동기들은 단체전에 더 익숙한 건 맞지만 대부분은 아닐걸.”

“남이랑 손발 맞추면 대체로 걸리적거리기 마련이라네~.”

“혼자서도 끝장낼 수 있는데, 굳이?”

모험가는 얼굴을 감싸 쥐며 앓는 소리를 냈다. 한참 끙끙 목 안으로 뭔가를 웅얼거리던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어떤 상황에서도 해사하며 온화하기만 하던 사람은 오간 데 없이 눈빛이 부리부리한 호랑이 교관이 있었다.

“특훈이야, 전원 특훈! 맙소사, 사람이 많으니까 수월하겠다 싶었더니! 아, 시룬 선생님, 스리토 카리토 선생님, 제가 좋은 교관일 수 있게 도와주세요!”

모험가는 하늘을 우러러 비명인지 기도인지 모를 것을 외쳤다.

 

단체전 연습은 연기 황야에서 했다. 거기에 떠도는 유독 큰 덩치의 산양(큰뿔산양이라고 했다) 떼가 있는데 모험가가 살던 곳에선 걔들이 마물이라면서. 척 보기엔 야생에 사는 들짐승 같아 그게 아니냐고 되물었지만, 모험가 왈 생김새만 그렇지, 마물이 맞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가리킨 물가에는 왜 아까까진 눈치채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혹은 신경 안 썼거나), 알을 등에 얹고 있는 괴상한 (아마도) 양서류, 소개받기로 맑은 강 닝카낭카가 있었다. 생전 보지 못한 모양새의 그것에 모두는 생각을 포기하고 여기 펼쳐진 황야는 저희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계라는 걸 전제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일단 한 번 해보자. 거리를 두고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마물에게 근접한 사람 안 맞추게 신경 쓰고, 마물한테 붙은 사람들은 등 뒤에 다른 사람들 있다는 것도 생각하고. 아, 전체적인 포위망도 잊지 말고!”

그렇게 우르르 지시사항을 읊은 모험가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방패를 힘차게 들어서…, 산양 하나에게 던졌다. 그러면 주변에서 마물이 우르르 몰려든다. 그러나 동시에 그걸 던져도 되는 거였냐는 반사적인 아우성이 나고, 몰려든 산양을 각자 알아서 처리하고 마는 거다. 그렇게 첫 시도는 장렬한 난장판으로 끝났다.

단체전 적응 훈련은 순탄치가 않았을 뿐, 조금씩 나아져 가기는 했다. 모험가가 그럭저럭 인내심이 깊은 교관인 덕도 있었고, 그 누구도 이 훈련의 의의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기도 해서다. 원래도 특수 2기의 설립 목적 중 협력하는 전투를 하는 기사를 육성하는 것이 있었고, 그를 위해 인솔 진도 모여서 제곱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뺄셈이 되지 않는 이들을 골라내 선정한 게 아니었던가.

물론 의욕만 가지곤 아무것도 안 됐다. 다들 해오던 버릇이 있어, 조금이라도 돌발상황이 벌어지면 제각기 판단한 대로 튀어 나가곤 했으니까. 특히 경력이 길수록 더 했다. 견습들은 기사님들이 모험가에게 잔소리를 들으며 혼나는(기사 쪽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 듯했지만) 걸 은근히 즐거워했지만 말이다. 모험가에겐 둘 다 피차일반이긴 했지만.

그래도 몸 쓰는 게 일인 기사와 그 지망생(하나는 제외지만)들은 꽤 빠르게 적응했다. 특히나 리아민은 연습 전투를 세 번 해보자마자 손발을 맞추어 전투하는 것에 능숙하게 되었고, 같은 지역 합격생인 파이멜이 그걸 자기 일처럼 괜히 으쓱여댔다. 그러곤 동향인 저 역시 지역 동기 발목을 잡을 순 없다며 열심을 부렸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자극받은 모양이다. 자기들은 다 컸다고 해도 애들은 애들이라, 경쟁심이 부추겨지니 알아서들 팍팍 따라오는 게 아닌가. 특히 첫 번째 달성자가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존심이 긁힌 (무려) 마르샤가 이를 악물다시피 하며 남들 보조를 맞추는 것을 시작으로, 쟤도 하는데 내가 못 할 게 뭐냐며 너나 할 것 없이 단체전 적응에 열을 올렸다.

병아리들이 저희끼리 경쟁에 열을 올리는 동안, 기사들은 조금 다른 곳에 꽂혀 있었다.

“오, 근데 이 시야 진짜 신기하긴 하다.”

“음, 좀…, 뭐랄까 사기 치는 느낌이에요. 이래도 되는 건가요?”

“와, 모험가 씨는 그러면 늘 이렇게 ‘보고’ 싸우는 건가?”

훈련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저 아지랑이의 장막에서 벗어난 이후, 모험가가 개시한 전투라면(흥미가 생긴 닭과 기린의 주도로 실험해 확인했다) 참여 인원에게 마물이 공격하려는 범위가 주황빛으로 반짝반짝 보이는 게 신기해서 그런 거지. 물리적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고 마력으로 드러나게 한 것도 아닌데(이것도 확인했다), 남의 의지를 읽어 확인하고 피할 수 있는 눈을 임시로나마 가지면 싸움으로 벌어 먹고사는 이들이 호기심을 가지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기사 쪽은 뭘 확인하고 싶다며 삼천포로 빠지는 편이었다.

모험가는 과열되는 견습들은 말리고 격려하면서, 딴 길로 새려는 기사들은 초보자의 집 교관처럼 몇 번이고 이름을 불러 주의를 환기하며 황야를 천천히 나아갔다. 물리 공격을 하는 큰뿔산양 뿐만 아니라 마법 공격을 하는 물 정령이나 땅 정령을 상대로도 이제는 그럭저럭 합을 맞춰볼 수가 있었다. 그즈음에 모험가는 이미 너덜너덜해져서 허여멀겋게 뜬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기력을 쭉 빨린 그 모양새에 괜한 동질감이 든 견이 슬그머니 다가와 수통을 넘겼다.

“어어, 고마워….”

“…다들 한 성격들 하니까요.”

“하하핫, 그래서 재밌는 거지. 그런데도 잘 따라와 주고. 아아, 이렇게 몸으로 때우는 훈련이 될 거였다면 에스티니앙이 있으면 딱인데. 걔가 그래도 용기사단 단장이라 가르치는 건 나보단 나았을 거야.”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되게 긍정적이시네요.”

“그런 소리는 많이 들어. 그렇지만 고민만 하고 있기엔 아깝잖아. 하긴 나 대신 걱정거릴 끌어안은 동료가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네. 아, 맞다. 셀레네가 너한테 전해 달랐는데. 너는 어떻게 쥐어짜도 에테르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으니까 연환계만이라도 알려주겠대.”

또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 나왔지만 이제는 모험가의 동료겠거니 하며 견은 굳이 파고들지 않고 말을 돌렸다. 이 사람하고 며칠 이야기해보며 파악한 점이 하나 있다면 모험가는 저 혼자 아는 사람을 언급하면서도 그걸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는 거였다. 친구의 친구와도 자주 친해지고 모두가 뭉뚱그려 어우러지는 일이 흔해서거나, 저희들 세계에서 유명한 기사와 기사지망생이 있듯이 모험가와 그 동료들은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서 그럴 것이다. 아예 다른 세계임에도 결국 그곳 역시 사람 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꽤 신기했다.

그건 그렇고 셀레네의 전언이란, 참. 견은 속으로 혀를 찼다. 마나와 에테르는 조금 다른 것 같아서 티끌 하나 분량의 기대감이나마 가져봤는데 아무래도 꽝인 모양이었다. 무력도 마법도 정말 아무것도 못 하는 이 몸뚱이는 대체 뭔가. 쌍둥이라는 게 한 사람이 쪼개져 생긴다는 미신이 있기야 한데, 그 말대로면 진이가 모든 재능을 다 가져간 게 맞는 것 같다. 그 점에 따로 불만이 있진 않다. 이런 거에 하나하나 좌절해서야 도움이 되질 않고, 주어진 건 뭐든 다 긁어모아다 써야 할 처지인지라 가용 자원이 늘면 좋은 셈 아니겠나.

…라고 생각했던 것을 견이 후회한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머지가 합을 맞추는 연습을 온종일 하는 사이, 셀레네가 죽으라고 굴리는 지옥 훈련에 짓이겨진 나견은 정말 하루 만에 연환계를 익히는 쾌거(라고 하기엔 당사자가 파김치가 됐다. 셀레네는 똑똑한 제자가 생겼다며 기뻐했다)를 이뤘다.

특수 2기와 그 객원, 라바나 토벌전 출격은 내일 오전 10시.

 

그나스의 토굴에는 정작 이어진 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파란 크리스탈이 곳곳에 박힌 흙탑에서 솟는 초록 연기는 아는 바가 있었지만, 공터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로스 불꽃요격자나 강철요격자 등은 씻겨나간 듯이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있어야 했던 그나스 철갑요격자나 탐색자, 우박요격자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부터 전투가 지난하게 이어질 거라는 예상이 빗나가는 바람에 견습들은 대개 맥이 빠졌으나, 기사들 쪽은 오히려 바싹 긴장했다. 모험가 역시 인상을 굳힌 채 주위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분위기가 내가 알던 것보다 흉흉해. 다들 조심―!”

그리고 엄청난 유량의 에테르가 사방을 뒤흔들었다. 눈앞이 벌건 안개로 뒤덮이며 어그러진다. 각자의 목소리가 범람하는 마나 속에 삼켜서 멀어졌다.

 

무예의 신은, 혹은 그의 그림자는 드디어 낯선 에테르로 짜인 몸을 일으킨다. 저를 단단히 둘러싼 갑각과 검을 쥐고 땅을 딛는 마디마디는 스스로 토벌돼야 할 운명을 안다. 철과 불로 일어난 자는 그 피에 고꾸라져 잠기리니. 무신은 저만치서 감지된, 이미 알고 있는 어느 영혼이 이쪽을 향하는 기척을 인식하고 웃어 보였다.

그러나, 스러질 운명이면 어떠할까.

“드디어 왔는가, 출중한 무예를 뽐냈던 자여. 다시금 검을 맞대어 솜씨를 견주어볼 때다.”

무예의 신 라바나는 에테르를 돋아 무신굴 앞으로 바싹 다가온 그들을 여기 무신의 투기장으로 불러들였다.

 

이상 사태에 빠졌던 특수 2기는 지금까지 훈련은 다 접어두고 각개로 흩어져 싸울 것도 고려하며 전투태세를 취했으나, 정작 시야가 잦아들었을 땐 모두가 아까 그 대형 그대로 서 있었다. 저희끼리 괜히 머쓱해한 것도 잠시, 모험가가 아무 말도 없이 등에 매어둔 검과 방패를 꺼내 겨눈 것을 확인한 면면들이 숨을 삼켰다.

거기, 눈앞에는 족히 팔 미터는 될 법한 누군가 서 있다. 모험가의 은빛 갑주와 다르게 검붉고 굴곡이 많은 그것은 갑각이라고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이는 갑충. 그러나 흔히 지성이 없는 것으로 묘사되는 그들과는 궤가 다름 또한 분명하다. 위아래 두 쌍으로 나뉘어서 들린 검은 한밤에 뜬 달처럼 찬연한 빛을 흩뿌리고, 등 뒤에 돋은 날개 한 쌍이 투기장의 더운 기운에 맞추어 오르락내리락 천천히 흔들린다.

이것이 야만신. 소원과 믿음이 집약하여 에테르로 구현된 힘.

저희를 기다렸다는 모양새는 품격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모험가가 왜 그들을 지칭해 감히 신이란 이름으로 설명했는지가 지금 와서 분명해졌다. 그리고 어째서 야만신이 영혼을 세뇌할 수 있는지도. 가호가 붙어있기에 지금 느껴지는 신성한 압력을 견딜 수 있는 거겠지.

누구보다도 빠르게 전투태세로 재정비를 마친 것은 새까만 닭 와론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강자와의 불순물 없는 겨루기를 즐겨하므로, 앞에 있는 자가 저와 어느 정도 마음이 맞음을 알아챈 듯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두근거림이 느껴진다.

“당신이구나? 우리 엉뚱하고 순박한 친구가 당신 이야기를 했지.”

“엉뚱하고 순박하다니, 와론 씨 날 그렇게 보는 거야…?”

“하하하! 너, 네 동료들 아녔으면 벌써 어디 굴러다니지 않았을까?”

“으음, 부정하진 못하겠지만….”

“둘 다 집중해. 적 앞이다.”

“예이예이. 거 출진 전 농담 따먹기도 못 하나?”

분위기 잡은 것치곤 멋지게 빗나가기 시작한 회화를 기린이 끊었다. 와론은 툴툴거리면서도 어차피 속에 없는 말이란 걸 알아 입을 다물었다. 제 창끝이 흔들리지 않음을 저 괘씸한 놈이 제일 잘 알 텐데. 아마 병아리들한테 본이 안 된다는 뜻이겠거니 한다.

견습들 무리는 다시금 나진이 공략법을 복창시키고 있다. 그들에게 맡겨진 주요 임무는 환영나비와 달빛나비의 신속한 처치. 그것들이 달의 검을 땅에 꽂아 넣었다간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라며 모험가가 몇 번이고 강조했던 점이다. 견습들은 대부분 긴장과 기대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빨리 정리해야 하는 거라면 기사님들도 합세해야지 않느냐고 했더니 모험가는 너희도 공략조 일원이니 한 사람 몫은 할 거고, 해야만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토벌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게 유효했던 모양이다. 지금껏 쭉 병아리로 취급받았던 이들에게 공을 세울 기회, 스스로 실력을 떨칠 기회가 찾아왔으니.

일행들이 뾰족하게 날을 세우거나 말거나 무신은 스물이 넘는 인원이 저를 맞서고 있다곤 느껴지지 않는 태연함으로 입을 열었다.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예가 출중한 자여, 그리고 그와 함께하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자들이여. 비록 그믐의 그림자 춤일지언정 우리가 검과 검을 맞대어 겨누어 나누는 시간은 가짜일 수 없으니.

대화의 시간이 왔다. 너희의 무위를 이 몸에게 보여라!”

입이 열리지 않으나 온 주위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는 틀림없이 전해졌다. 동시에 모험가가 제일 먼저 달려들어 북쪽에 그를 묶어두었다. 특수 2기와 그 객원, 이상 현상 무신 라바나와 여기서 격돌.

 

파르스름한 빛을 띤, 모험가가 찬드라 하스라 불렀던 달의 검이 그 빛깔과는 다르게 붉은 불티를 뿌리며 이 일행의 유일한 탱커에게 내리쳐진다. 모험가는 과연 평소에 느슨하다 싶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특히 힐러가 없으니 속전속결로 해야 한다며 거듭 당부했던 대로다. 달의 검이 겹쳤다가 모험가에게 검풍으로 덮쳐들며 그는 곧 [관용]으로 스스로 회복하고 외쳤다.

“다들 충격 대비!”

거의 동시에 라바나가 자리에서 발을 한 번 굴렀다. 돌바닥이 울리는 모양이 선하고 주변에 스민 붉은 안개를 흰 돌가루가 섞여 풀풀 날린다. 온몸을 울리는 충격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엔 모험가에게 다섯 갈래로 된 검기가 쏟아진다. 한 번은 은빛 갑주에 직격하나 그대로 견디고 모험가가 잽싸게 몸을 굴려 옆으로 나머지 이 연타를 피하는 게 보였다. 설명을 듣긴 했는데 어째 아슬하다. 한 박이라도 늦게 피했다간 그대로 썰리는 게 아닌가 싶다.

갑자기 라바나 주위에 무언가 얇은 피막 같은 것이 빛나고 몇몇 견습이 반응이 늦어 뒤로 확 밀쳐졌다. 아오씨! 생각보다 빠른데! 금방 전투에 따라붙은 그들을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한 번을 위해서 모두가 집중하고 있는 탓이다.

“라바나의 방어가 취약해지는 때가 있어. 그때 온 힘을 다 쏟아.”

지금까지는 모험가가 설명했던 순서대로였다. 누구 말마따나 예상보다는 밀려오는 속도가 빨랐지만, 하여튼 그랬다. 순간을 기다려야 하는 전투에는 익숙한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으나, 이때를 위해 합을 맞추지 않았는가. 자기 생각대로 먼저 행동하지 않고 최대의 결실을 거두기 위해서.

‘그건 그렇고, 이거 진짜 단단하네.’

원형 투기장의 먼 데도 때때로 론누로 확인해보면서 와론은 속으로만 그리 생각했다. 기사라면 누구나 비슷한 감상을 품었을 테다. 아마 저보다 근력이 우위인 승냥이와 너구리가 더할 거고. 기사끼리의 싸움은 빠르면 겨우 한두 합으로 마무리되기도 하며, 십 초를 넘어가면 일곱 합도 넘게 주고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체감하기론 일 분이 다 되어가는데 무신은 꿈쩍도 안 하지 않나. 이걸 각개전투로 풀어나가려고 했으면 골치 아프긴 했을 거다. 힘을 다 쏟지 않는 건 조금 근질근질했지만, 그것도 잠시겠지. 와론은 무신 라바나가 문득 검을 고쳐 쥐는 것을 확인하고 론누를 제 손에 다시 불러들였다. 오의까지 쓰는 게 맞을까 조금 고민은 됐지만, 모험가의 말대로면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건 이때 한 번뿐이랬다. 적당한 걸로, 큼직하게.

곧, 무신 주위에 붉은 에테르가 뭉쳐 들었다.

“불의 품새, 거침없이 공격하리라!”

“지금!”

“연환계, 준비 완료! 이대로 집중공격합니다!”

드디어. 와론은 투구 안에서 웃었다. 박혀 드는 감촉이 아까와는 전혀 달랐다. 가장 신난 것은 여지껏 날뛰지 못한 기사들로, 그 지우스조차도 전황 판단은 나견에게 맡겨두고 공격에 집중하기까지 했다. 겨우 1, 2초의 찰나에 불과한 순간에 어마무시한 굉음이 투기장을 뒤덮는다. 타격감이 아주 살짝 줄어드나 싶은 시점에서 나진이 외쳤다.

“빠지세요! 울타리까지!”

설명 들었던 광염:발단이다. 어느새 붉게 물든 라바나의 검 주위로 불의 마나가 휘몰아친다. 공기가 뜨겁게 달궈져 들이쉬는 숨이 따갑다. 곧이어 광범위한 원형 베기. 라바나의 신형이 솟구치며 모험가의 시야를 빌려온 그것에 불의 길이 잡힌다. 모두가 우왕좌왕하며 흩어졌다가, 아슬하게 스쳐 가는 칼날을 피한다. 살의를 읽어 피하는 자들이라면 영 까다로워질 공격이었다. 그야 무기에 실린 의지라고 하면 무생물이라 살기라곤 느껴지지 않으니까.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다. 모험가의 설명대로였다면 이다음은 전방 270도로 검기를 뻗치고 그의 분신이 세 면에서 돌진해오는 것이 순서인데 검을 휘두르고 거둔 무신이 외친 것은 다른 말이었다.

“그대들의 무위는 가늠이 되었다. 그대들이라면 깨지지 않을 무신의 갑각도 반드시 깨뜨리겠지. 그러니, 이어짐이 끊어진 여기 이곳에서 단단히 각오할지어다! 무예의 진수를 보라!”

“뭐?! 다들 모여! 내 등 뒤, 빨리!”

모험가가 거의 비명을 지르며 땅에 제 검을 꽂아 넣었다. 그러자 새파란 에테르가 날개처럼 뻗어난다. 붉고 흉포한 기운과 푸르고 단단한 기운이 어우러져 힘겨루기하는 모양새는 문득 아름답기까지 하다. 회적색 여우에게 덜미를 덜렁 잡힌 나진이 맨 마지막으로 무사히 합류했을 때, 라바나의 영창이 끝났다.

월하일섬!”

몸의 제어를 상실하고 허공으로 떠오른다. 버둥거림조차 할 수 없다. 마치 채집 당해 판에 꽂힌 곤충처럼. 그 위를 가르는 일섬. 붉은 보름달이며 동시에 푸른 초승달이기도 한, 변환 자재인 달의 검이 온 천지를 베어 가른다. 투기장의 울타리가 일부 무너지며 원형 돌바닥이 파헤쳐졌다. 그 아래로 내려앉은 특수 2기가 정신을 채 차리기도 전에 라바나가 허공에서 지상으로 돌진하는 게 보인다.

“춤추어라, 나비여! 병사의 혼령이여! 여기, 한데 모여 검과 불과 철의 무도를 몇 번이고 추거라!”

“나 땐 안 이랬는데! 왜 이러지?! 어쨌든, 밀려난다! 등 뒤 조심해!”

나뒹굴면서도 모험가는 째지는 비명과 함께 지시를 외치고, 나비 처리를 담당한 견습들의 총지휘를 맡은 견이 잽싸게 주위를 훑으며 아직 자세를 바로잡지 못한 인원을 이름 불러 정신을 차리게 했다.

쾅! 투기장 한가운데 다시 강림한 무신은 즐거이 웃으며 하나둘 땅에 강림하는 나비들 틈에서 검무를 춘다. 다시금 붉게 물든 검, 상체를 조금 낮춘 자세. 광염:전개가 지금 펼쳐지고, 사령탑 둘이서 목에 핏대가 서도록 방향과 위치를 외친다.

붉고 푸른 나비들은 견습 두셋이서 맡았다. 한 마리가 바스스 흩어지는 건 빠르나, 끝없이 쏟아내려 쉴 틈은 없다. 그 사이, 투기장 반면이 넘게 불의 칼에 그슬렸다. 나비에 집중하는 사이 대체 기사들 조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한 자리에 모였다가 흩어지는 기사들의 머리칼이며 옷 군데군데가 다 그을려 뒤집혔다.

“기사님들 신경 쓸 때가 아니야! 저기 7시에 달빛나비! 율니아, 눌진, 마르샤가 가! 3시에 세 마리 출현! 가까운 사람!”

언제나 침착하고 냉정해 표정이 매끈하기 그지없는 나진이 눈을 부릅뜨고서 굳은 얼굴로 소리치니 견습 중 그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원래도 저희끼리의 최고는 나진이지 않으냐고 암묵적으로 통했지만, 지금은 더 했다. 쟤가 저만큼 긴장하고 초조해하는 걸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지금도 변칙적이긴 하나 잘 진행되는 거 아닌가 싶지만, 저 애가 저런 반응이면 꼭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실제로 모험가와 지우스, 견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몰려드는 공격의 순서가 엉망진창이라는 건 다시 말해 광염:파멸이 언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것. 그것만큼은 모험가도 손을 쓸 수 없다고 했으므로, 그 기술이 펼쳐지는 순간이 이름 그대로의 파멸이 될 거였다. 게다가 광염:절정이라는 기술을 파훼하기 위해선 반드시 넉넉한 공간이 필요한데 지금 이대로라면 공간 활용이 어려운 순간이 올지도 몰랐다. 어쩌지. 어떻게 할까. 문득문득 부딪히는 시선들이 난처함을 토로하나, 뾰족한 수가 마땅히 보이질 않는다. 그러다 돌연 기사들 사이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놀라서 고개를 들면 어느샌가 투기장 바깥에 라바나의 복제가 셋이 서 있고, 금속성 광택을 띤 마나구가 가느다란 선에 매달려 기사들 각각과 연결되어 있었다.

“제기랄! 이게 진짜 미쳤나!”

“병아리들! 우리한테서 떨어져!”

“나진! 애들 방향 지시 똑바로 해! 죽고 싶지 않으면!”

“철갑산탄 처리는 시계방향으로 돌 거야! [천하무적] 쓸 거니까 난 신경 쓰지 마!”

생각이 멈추는 느낌이었다. 원래 설명대로라면 이때 모험가 씨가 유도한 공격을 피하면서 저 마나구 달린 사람들보다 조금 앞서서 이동해가며 싸우는 거였는데, 지금 전황을 보면 첫째, 바깥에 선 라바나의 복제가 돌진하는 것을 차례로 피하면서 둘째, 모험가가 유도하는 공격 범위에 서지 않고 셋째, 저 마나구가 터지지 않을 안전지대에서 빨리 쓰러뜨리지 않으면 안 되는 나비들을 처리해야 한다는 거다.

“―다들, 지금 내려온 나비는 두고 기린님 쪽! 거기로 가! 직후에 달리기 자신 있는 사람들이 바로 뛰어가는 걸로!”

분신 하나가 불길을 일으키며 돌진하는 굉음 사이로 나진이 목이 찢어지도록 소리치는 게 들려서, 덜걱 동작이 멈췄던 견습들이 죽으라고 달렸다. 정작 지시를 외친 나진은 안전지대를 파악하느라 달리기 시작한 게 늦었는지 뒤로 쳐지는 바람에 한참 앞서가던 우디온 동기들이 그길로 뒤돌아 뛰어와 고향 친구를 회수했다.

곧 눈앞이 화려하게 터져나간다. 삼 층 짜리 건물만 한 불기둥이 돌풍을 일으키며 솟구치고, 모험가를 향해서는 중심에 선 라바나의 본체가 승냥이나 너구리에 지지 않을 만큼 무서운 검압을 일으켜 세로 베기를 한다. 기사들은 그 불길과 풍랑 속에서 마나구를 유도하면서도 여전히 무신에게의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불현듯 소리가 딱 그치고 무신은, 비록 표정을 알 수 없는 형상을 했으나, 틀림없이 웃었다. 그런 그가 즐거이 외친다.

“자, 출중한 무예를 지닌 자들이여! 마지막까지 춤춰보자꾸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위 공기가 불길에 타오른 낙엽처럼 파르륵 떨었다. 네 개의 검에 다시금 불이 모인다. 여전히 모험가의 시야가 겹쳐 있는 그들의 눈에 새파란 검의 형상이 누군가의 머리 위로 떠오른 것이 보였다. 칼이 하나, 둘, 셋, 넷. 순서는 회적색 여우, 푸른 승냥이, 하늘색 너구리, 새까만 닭이다. 그걸 확인하기 무섭게 네 기사가 각자 협의한 위치로 도약하고 담청색 기린과 나견의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령탑이 동시에 외쳤다.

“기사들, 전원 요격 준비!”

“다들, 나비 중앙으로 모아와! 한꺼번에 처리하자!”

“이젠 이판사판이야, 우리 여기서 못 끝내면 어려워져!”

사령탑의 지시가 끝나기 무섭게 걱정에 가까운 말을 외치긴 했어도 모험가는 승리를 예감한다. 보라, 지친 탓에 숨을 몰아쉬면서도 일사불란하게 착착 움직이는 견습 아이들과 여기저기 너덜너덜한 채로도 여전히 눈빛이 죽지 않고 기세도 쨍쨍한 기사들. 최후에 땅을 딛고 일어선 자는 늘 마음이 강한 자였다.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나아가려는 뒤나미스. 바닥에 앉아버린 그의 갑주는 처음의 반짝임을 다 잃어 까맣게 그을리고 할퀴어져 우그러진 채였으나 끝끝내 모든 것을 견디어 버틴 자의 상흔으로 존재한다. 모험가는 결국 환하게 웃고 만다.

하늘에서 불쑥 내려앉는 나비들은 이제 서서히 줄고 있어 견습들 역시 마무리를 볼 여유가 생겼다. 첫 번째 칼이 사라지고 라바나가 저희들 머리 위를 스쳐 루디카를 덮쳐든다. 거대한 존재 앞에서도 결단코 움츠러들지 않는, 냉정과 열정 모두를 품은 금안은 궤도를 또렷하게 읽어내 폴스로 맞받아 찌른다. 그러자 라바나의 갑주 한 켠이 무너져 붉은 에테르가 피처럼 쏟아졌다. 처음 있는 일에 견습 병아리들 사이에 “와!”하고 탄성이 났다. 여우는 검압과 불길에 엉망인 채로 중앙 본진에 들어와 쓰러졌다. 모험가는 그 곁에 다가가 앉아 주먹을 내밀었다. 그걸 본 루디카는 드물게도 마주 웃으며 툭, 주먹을 맞대었다.

그 사이 두 번째 칼이 사라지면서, 루디카가 서 있던 곳에서 피도란스 쪽으로 라바나가 돌진해왔다. 평소 온화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하는 그들의 주된 훈련 교관은 쨍쨍한 눈으로 목표물의 숨통을 노린다. 대검 기둥이 공격을 받아내며 그 여세를 몰아 옆구리를 깊게 베었다. 거기도 마찬가지로 붉은 에테르가 별가루처럼 흩어진다. 검을 들어 올려 돌진하는 힘을 견뎌낸 피도란스는 거의 퉁겨져 구르듯이 본진에 돌아왔다. 아까의 무시무시한 표정은 이제 아이처럼 해맑기만 하다. 피도란스가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양손에, 모험가는 하이파이브로 답례했다. 짝, 손뼉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다.

세 번째 타자인 다랑은 아무래도 앞선 둘이 화려한 묘기를 보여준 게 걸렸는지 도토리를 들고서 고개를 갸웃하다가 벌써 지척에 다가온 라바나를 보고선 기합성과 함께 자리에서 대검을 비스듬하게 휘둘렀다. 바로 코앞에서 결단한 일이었는데도 라바나의 다리 하나가 확 날아갔다는 점에서 중앙에 모인 이들 사이에서 감탄이 흘렀다. 과연 순간적인 괴력과 직감에 기민한 반사신경이 어우러지면 저런 일이 가능하구나 싶다. 물론 힘과 힘이 맞부닥친 거라, 다랑 역시 균형을 크게 잃었으나 금방 유연하게 자세를 다잡고 본진으로 화다닥 귀환했다. 그 역시 바닥에 내던져진, 자기가 잘라낸 다리가 붉은 안개 사이로 반짝거리며 스며드는 걸 보며 잔뜩 상기한 얼굴을 했다. 전투의 고양감이 꽉 들어찬 그대로 냅다 내달려 모험가를 끌어안은 다랑은 신이 나서 그 등을 팡팡 두들겨댔다. 보았냐고, 내가 해냈다는 목소리가 개선가처럼 울려 퍼진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네 개의 칼이 붉은 깃을 두른 투구 위에서 사라지는 것을 모두가 지켜본다. 와론은 평소처럼 껄렁하고 삐딱하게 선 채로 론누를 꼬나쥐고 있다. 따로 무언가를 할 것은 아닌가, 하기엔 그에게서 피어오르는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네 덕에 전력으로 즐겼으니 좋은 걸 보여줘야지. 전별금이다.”

주위 소음에 묻힌 목소리를 무신 라바나는 틀림없이 들었다.

돌진해오는 라바나와 마주한 새까만 닭이 일순 몸을 낮추어 무릎을 굽히나 싶더니 몸을 틀며 훅 뛰어올랐다.

“창술 오의―나선 찌르기.”

아래에서 위로, 론누와 하나가 된 것처럼 라바나의 몸통을 꿰뚫은 창의 회오리는 일행들이 지금껏 오래도록 두들겨 온 갑주의 잔금부터 부서뜨리며 관통했다.

무신 라바나가 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투기장 돌바닥에 하나 남은 무릎을 꿇었고, 와론은 체력을 잔뜩 쓴 와중에 도약 없이 무리한 자세를 취한 여파로 착지 대신 온몸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의 착지 실패를 예감한 승냥이와 기린(그 외는 다리가 접질린 채라 더는 못 움직인다)이 뛰어가 새까만 닭을 회수해왔다. 당황한 얼굴로 뛰어갔던 둘은 곧 장난스럽게 집게와 중지를 펼쳐 보이며, 이겼다고 히죽이는 와론을 어이없다는 듯이 보고선 본진으로 부축해서 데리고 왔다.

콰링이 마지막 나비를 처리하자, 드디어 투기장에 정적이 찾아왔다. 내내 짙었던 붉은 안개가 옅어져 가며 무신 라바나가 붉은빛의 알갱이로 변해 흩어지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즐거웠다, 출중한 무예를 지닌 자들이여…. 나는 잠시 드리워진 그림자. 소리 없이 예언된 토벌될 운명을 이루었으니, 원하지 않고서도 드리웠던 장막을 거둘 때다. 나와 같은 세계에서 온 모험가여, 그대 역시 떠날 채비를 하게나.”

무너진 몸을 하고서도 라바나의 목소리는 곧고 웅장했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어서, 이제서야 한시름 놓았다며 긴장을 풀어가던 특수 2기 전원이 아연하게 눈을 깜빡인다. 그러면서 알아차리고 만다. 지금껏 사방이 꽉 막혀 두터운 붉은 안개만이 어스름하던 이곳에 햇빛이 있다. 바깥에서 들어온 햇빛이. 그것도 틈새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투명한 것을 통과하듯이 말이다. 그랬다. 여기 무신의 투기장부터 아지랑이처럼 흐려져 가고 있는 거다. 반쯤 투명해진 투기장 밖의 연기 황야도 마찬가지다. 마른 초겨울의 회색빛 땅은 몇몇이 알던 황토색 흙으로 일렁이며 바뀌고 있고, 하루 꼬박을 연습에 동원된 마물들조차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고 흐려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모, 모험가 씨! 몸, 몸이!”

“어어? 아…. 아니, 이런 돌아가는 방식, 좀 공포스럽지 않아?”

“그런 말이 나오냐, 넌!”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 송별회도 못 하겠네.”

“그래도 내가 돌아간다는 건 뭐든 잘 끝났단 뜻이니까 괜찮잖아.”

“하여간 속 알맹이 없는 웃긴 놈이지.”

모험가 역시 윤곽부터 서서히 흐려지며 흩어지고 있었다. 제일 먼저 이변을 감지한 다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말을 잇질 못했는데, 여전히 맥 빠지는 답이나 돌려주는 꼴이 딱 지금껏 보아온 모험가여서 루디카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열불이 터진 듯했고 피도란스는 영 아쉬워했다. 기사가 급작스레 사라지더라도 서임식이 장례식 대신인 사회에서 오래 살아온 만큼, 기사이며 기사가 아닌 그에겐 제대로 된 배웅을 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 맘도 몰라주고 다 잘 끝난 거니 괜찮지 않으냐고 한 모험가에게는 처음에 그러하였듯, 와론이 뚱한 말을 날렸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은근한 다정이 묻어나는 정도일 것이다. 모험가는 그 다정이 떠날 이방인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앎으로 방긋 웃어줬다. 투구의 기사가 얼굴을 가리는 까닭 또한 그는 희미하게 짐작했으나 속에만 묻기로 한 지 오래다.

“…위에는 잘 이야기해둘 테니,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가길 바라.”

기사들이 각자 한마디를 해버린 터라 지우스 역시 우물쭈물 말을 붙였다. 벌써부터 피곤한 표정을 짓는 그가 무얼 생각하는지는 짐작이 갔다. 하긴, 후속 처리가 복잡하긴 하겠지. 모험가는 공적인 절차를 두고 골머리를 앓았던 민필리아나 쿠루루를 떠올리고선 고개를 까닥 숙여 미리 감사를 표했다. 그즈음엔 이미 사지의 윤곽은 없다시피 했으므로 견습 하나하나를 살뜰히 보듬을 틈은 없었다. 모험가는 아직 덜 여문 청소년들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말을 하기로 했다.

“울고, 화내고, 두려워하더라도 살아있는 한 계속 걸어 나가렴. 그 걸음엔 함께해주는 동료가 있을 거고, 그게 곧 희망이기도 하니까.”

아마 직접 겪지 않고서는 체감할 수 없겠지만. 뒷말을 삼킨 모험가는 이제 제가 희끄무레한 유령이나 다름이 없다는 걸 알았다. 실제로도 목소리가 더는 나오지 않았으니까. 여기서 새로이 얻은 동료들의 면면을 마지막으로 둘러보던 그가 최후에 시선을 맞춘 것은 견이었다. 가장 큰 상실과 절망을 안고서 걷고 있는 아이. 아젬으로서의 힘이 온전히 있었다면, 베네스처럼 누군가에게 가호를 걸 만한 힘이 있다면 좀 더 안심할 수 있게 무언가를 남겨주는 건데. 일말의 후회를 담아 그는 뻐끔뻐끔 입을 여닫았다. 잘 지내, 하고. 그러자 그 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쩐지 그 모습이 놀랐을 때의 알리제를 닮은 것도 같아 모험가는 이번에야말로 유쾌하게 웃었다. 그래, 이런 걱정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앞으로의 여행길을 축복하면 될 뿐. 이 애는 무력을 따지면 약할지도 모르나 틀림없이 강한 아이기도 하니까.

 

한 세계에서 유리되는 감각은 확실히 텔레포를 탈 때와 비슷했다. 모험가는 곧, 그 원인을 볼 수 있었다. 화려한 불꽃과도 같은 에테르. 페오 울이 제게 남긴 작은 마법. 그것이 원초 세계를 향해 나뭇가지처럼 뻗어있다. 그제서야 모험가는 페오가 제게 말했던 미아 방지 대책이 무엇인지 깨닫고 활짝 웃었다. 역시 의지가 되는 나의 아름다운 가지! 집으로 가는 길은 안전하리란 걸 깨달은 모험가는 이제 발밑에 까마득해진, 닷새간 모험한 세상을 굽어본다. 이곳 역시 아이테리스처럼 찬란하게 아름답다. 인과보다는 우연에 의해 만났던 세계. 두 번은 없을 신기한 모험. 거기서 만났던 면면을 곱씹으며 모험가는 이제 자신의 세계, 제 동료들과 걸어 나갈 모험의 길로 향했다.

끝은 새로운 시작. 끝이 반드시 종막만은 아님을 아젬에게서 그 혼을 이어받은 저 자신이 증명하지 않았나. 혹여 다시 만날 수 없게 되더라도, 만남과 인연은 흔적이 되어 서로를 이어줄 거다.

 

특수 2기는 대뜸 황무지에 서 있는 저희들을 보며 당황했다. 이 무리 중 표정이 희박하기로 최고를 다투는 두 사령탑마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교차하는 시선 속에서 그들은 저희 모두 어느 기억이 뭉개졌음을 감지한다. 이름조차 모르는 모험가. 그가 실은 이름을 밝혔던가, 아니었던가. 얼굴은커녕 성별이나 키, 몸집 따위도 당장에 떠올릴 수가 없어 아연하다. 모두가 동시에 같은 기억을 잃을 수 있는 걸까. 그 분위기를 가볍게 깬 건 새까만 닭이었다.

“아~, 아쉬운데. 대련한 게 재밌었다는 것밖에 생각 안 나.”

그러더니 그가 기린에게 턱짓했다. 그 동작만으로 와론이 무얼 말하는지 알아들은 담청색 기린은 영 초조한 기색으로 키톤을 꺼내 마법사단에 연락했다. 답장은 금방 왔다. 그걸 읽은 지우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선고한다.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관련자 전원에게서 지워진 것 같다.”

이번에야말로 동요가 눈에 보일 듯이 일렁였다. 태연한 척을 했던 새까만 닭의 손에 들려있던 론누 끝이 잠시 휘청인다.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모래시계처럼 시시각각으로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날 저녁이었다. 이 망각은 모종의 대가라는 어슴푸레한 명제만이 결론으로 남았고, 특수 2기의 이번 임시 임무는 완료된 것으로 보고가 올라갔다고 했다. 실제로도 임시 임무를 내렸던 마법 사단에는 글자가 드문드문 증발해 원본을 알 수 없어진 보고서가 수십 부 쌓여있다고 했으니, 저희만 겪는 집단 망각은 아니었고 자료가 미흡해도 이상 현상이 사라진 건 또 사실이라 내사 종결한 듯했다.

그 설명을 가만히 듣던 견은 속으로만 갸웃한다.

‘그 사람하고 했던 대화 일부는 아직도 또렷해. 나만 그런가?’

언제나 네 편이 되어줄게. 그러니 삶에 지지만 말자.

그렇게 말해주었던 다정한 목소리만이. 차갑게 식었다고 생각한 마음 한 켠에 자그마한 등불을 켜둔 그 사람의 흔적. 견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 사람의 얼굴은 여전히 빛에 뭉개져 보이지 않으나, 어디서든 잘 지낼 것이다. 그러니 걱정 대신에 기원을 보내도록 한다.

‘당신은 모험가라고 했죠. 즐거운 모험 되시길.’

 

모험가는 동료들에게 돌아왔다. 환한 얼굴을 하고서 그가 말한다.

“다녀왔어!”

“어머, 딱 맞춰서 왔네요, 당신.”

“네가 제일 늦었어, 파트너. 놓고 갈 뻔했다고.”

“에스티니앙, 그대야말로 모험가를 제일 기다리고 있지 않았나.”

동료들이 반겨준다. 이제 새로운 모험을 떠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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