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장편

일기의 재구성

지우견 + 아주 약간의 진앤견

*현대 AU

대학생 지우스 X 편의점 알바하는 나견


1.

나견은 여느 때처럼 일기장을 펼쳤다. 초등학생 때는 일기 쓰기가 숙제였다지만 머리가 더 크고 나서도 자기 전 하루를 요약하는 습관이 남았다. 일종의 통과 의례인 셈이었다. 오늘도 어떻게든 잘 마무리 지었구나 하는 심정으로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어내고 나서야 편하게 잠이 왔다.

나견은 샤프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머릿속으로 종일 일과를 요약해보다가 한 문장을 적었다.


오늘 그 사람이 또 왔다.


2.

"어서 오세요-"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에 맞춰 나견은 자동응답기 마냥 점장이 입력해둔 문장을 고저 없이 읊었다. 몇 번이나 봤다고 벌써 눈에 익은 풀빛 머리카락이 고개가 짧게 까딱거림을 따라 이마로 쏟아졌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저게 저 사람 식 인사였다. 제 딴엔 묵례랍시고 하는 거겠지만 어딘가 성의가 없어 보이는 고개 까딱임. 나견도 그에 맞춰 턱을 당겼다가 부드럽게 힘을 풀었다. 이런 답변을 보고 나면 그 사람은 매번 같은 매대 사이로 사라졌다. 과자 코너 뒤쪽, 냉장칸으로.

집어오는 건 항상 똑같았다. 삼각김밥. 그것도 딱 하나만. 처음 왔을 때는 참치마요더니 그다음에는 전주 비빔, 어제가 제육볶음이었다. 오늘은 뭘까. 나견은 혼자만의 내기판을 만들었다. 맞추면 내가 1점. 틀리면 저 사람이 1점. 닭갈비가 새로 들어왔으니까 그걸 먹지 않을까. 지금까지 골라왔던 게 전부 다 다른 종류였던 걸 보면 나름 전날과 안 겹치게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매대 하나를 끼고 한 바퀴를 돌아 계산대로 온 그 사람은 사무적인 동작으로 들고 있던 삼각김밥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다른 쪽 손으로 외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나견은 고개는 포스기로 돌린 채로 눈동자만 굴려 제품명을 확인했다. 무의식적으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꾹 눌려 내렸다. 포장지 앞면에 두꺼운 글씨체로 쓰인 '닭갈비' 세 자에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오늘 일기에 써야지. 나견은 속으로 다짐했다.

실내 테이블, 계산대에서 왼쪽으로 두 번째 자리가 그 사람 전용석이었다. 나견은 입장부터 의자를 꺼내 앉을 때까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동작을 약간의 경외감과 함께 바라보았다. 깔끔하게 포장을 뜯은 다음 삼각김밥 모서리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그제야 비로소 음식을 먹어서 에너지를 충당하는 '인간' 같았다. 그전까지는 누군가 정교하게 프로그래밍한 기계처럼 보인다는 소리였다. 문득 나견은 그 사람이 처음으로 제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편의점에 손님으로 왔을 때, 그러니까 참치마요를 계산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그는 비닐을 벗기려는 손짓 사이로 급하게 끼어들었다.

"저기, 전자레인지에 안 데워 드세요? 냉장칸에 있던 거라 차가울 텐데."

"별로 신경 안 써서요.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저도 딱히 염려한 건 아닌데요. 나견은 이렇게 대꾸하는 대신 어색함을 가장해서 말끝을 흐렸다.

"아, 네..."

그게 우리의 첫 대화였다.

오늘은 그때와는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꺼냈다.

"판매 기간 지난 삼각김밥이 재고로 좀 있는데 하나쯤 더 얹어서 드릴까요? 상한 건 아니라 먹는 데는 지장 없을 텐데..."

"아뇨, 괜찮습니다. 남는 거라면 그쪽 드세요.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많이 먹어야죠."

"그쪽도 딱히 나이 들어 보이진 않습니다만."

"...그런가요."

그 사람이 멋쩍다는 듯 짧은 숨을 내뱉으며 작게 미소 지었다. 나견이 근무하는 시간대의 편의점은 희한하게도 손님이 적었다. 그런 와중에 나흘 연속 방문을 하는 사람에게 미약한 정감을 느끼는 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몰랐다. 직원이 단골손님에게 갖는 딱 그 정도의 정. 단골손님을 계속 '그 사람'이라고 지칭하자니 어딘가 어색해서 나견은 한 가지를 더 물었다.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그 사람은 이런 질문은 처음 받아본다는 얼굴로 나견을 돌아봤다. 마주친 눈 한가운데에 샛노란 개나리가 피어있었다.

"...지우스입니다."

"나견이에요."

그렇게 대답하곤 어깨를 살짝 들썩였다.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죠, 하는 표정으로. 왠지 말도 없이 표정으로만 얘기해도 그 사람은, 그러니까 지우스는 알아들을 것 같았다.


1 대 0. 그 사람 이름이 지우스라고 했다.

눈이 예뻤다


3.

나견은 손으로는 문제에서 주어진 조건을 동그라미 치며 눈으로는 옆 단락에 자리한 지문을 빠르게 읽어 내렸다. 언제든 덮어서 치울 수 있도록 풀고 있는 쪽과 문제집 앞표지까지를 통째로 왼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둔 채였다. 저녁 시간대 편의점에서 근무하며 대부분의 또래들보다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그 역시 대학 입시를 위해 공부를 해야 하는 처지였다. 때문에 나견은 편의점으로 출근할 때마다 손님이 없는 틈을 타서 가볍게 풀만한 문제집과 필통을 챙겼다. 그가 목표로 하는 대학이 최상위권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입학하려는 학생들에게 높은 성적을 요구하는 이상 버릴 시간 따윈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혹자는 편의점 같은 어수선한 공간에서 집중이 되느냐고 의문을 표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기억해낼 수 있는 첫 번째 순간부터가 보육원에서였던 나견에겐 해당하지 않는 사항이다. 제 밑으로 한참 어린 동생들이 온갖 소란을 다 피우며 노는 와중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책을 읽었던 아이가 나견이었다. 손님이 있다면 맞이해야 하기 때문에 흐름이 끊기는 건 사실이지만, 손님이 없다면 존재하는 소음이라고는 냉방기 돌아가는 소리와 근처 길가를 주행하는 차들이 만드는 마찰음 정도 밖에 없는 아담한 공간은 그에게 있어 독서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가족이나 다름없는 선생님들, 그리고 동생들과 함께한 추억으로 곳곳이 장식되어 있는 보육원이라지만 역시 집중 가능성 측면에서는 편의점이 더 낫다고, 나견은 평가했다. 적어도 편의점에는 같이 놀자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옷소매를 잡아끄는 아이들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을 보고 있자면 아무리 해야 하는 일에 있어서는 단호한 그라도 거절이 힘들었다.

이번 주에 월급 나오니까 애들한테 선물이라도 사갈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견은 문제 조건에 부합하는 선지에 표기했다. 샤프심이 종이에서 떨어짐과 동시에 출입문에 매달아 둔 풍경이 딸랑거렸다. 맑고 경쾌한 소리가 느닷없게도 정답을 축하하는 골든벨을 연상케 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문제집을 덮어 방금까지 앉아있었던 의자 위로 샤프와 함께 던졌다. 그러곤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닿은 자리엔 그 사람이 있었다. 아니, 아니지. 지우스가, 있었다. 나견은 굳은 표정을 풀고 단골손님을 맞았다. 기계적인 인사말 대신, 다른 문장으로.

"또 오셨네요."

"또 왔습니다."

지우스 역시 미소를 머금고 회답했다.

4.

"좀... 사적인 질문일 수도 있는데, 하나 물어봐도 됩니까?"

"너무 개인적인 질문이라면 대답 안 해도 된다는 뜻인가요, 그건?"

"편하신 대로."

"얘기해 보세요."

"몇 살이세요?"

"...그쪽은 그게 사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하세요?"

"개인정보는 맞으니까요, 아무래도."

"...열 아홉입니다."

"...바쁘시겠네요."

"그런 편이죠, 아무래도."

"스물 다섯이요."

지우스의 어깨가 '다'에 가볍게 올라가 '요'에서 제자리를 찾아갔다. 꼭 어제 나견이 취했던 모양새처럼. 허, 터져 나오는 헛웃음을 막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럼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마음에 드는 대로 불러요. 아, 나도 말 놔도 되나?"

"뭐, 편하신 대로."

"아까부터 자꾸 내가 한 말 따라 하는데,"

"형도 제가 한 행동 따라 하셨잖아요. 무승부로 치죠."

"아니 너는 두 번이었-"

"무승부예요."

두 번째 실소는 지우스에게서 새어 나왔다.

지우스 형

 아 왜 웃기지?

5.

부드럽게 열리는 출입문 사이로 들어온 쌀쌀한 공기를 느끼며 나견은 또다시 지우스의 저녁 메뉴를 점쳤다. 참치마요 먹은 지 꽤 됐으니까 오늘은 참치마요일 것이다.

규칙적이진 않지만 일주일에 네 번 이상 꾸준히 매출을 올려주는 탓에 입장부터 퇴장까지 지우스의 행동 대부분이 저절로 외워졌다. 어느 정도냐면, 유려하게 이어지는 몸놀림 중간을 파고들어 적당한 때에 맞춰 상대방 손에 들린 삼각김밥을 낚아챌 수 있을 만큼. 그는 바코드를 찍으면서 포장지에 적힌 상품명을 확인했다.

'베이컨' 참치마요.

절반의 성공이라고 치자.

"너 표정 되게 미묘한 거 알아?"

천성적으로 얼굴에서 자신의 감정은 숨기고 남의 감정은 읽어내는 데 능한 나견이지만 상대가 상대였다. 지우스는, 당장 나견에겐 쓸데없이, 관찰력이 좋았다. 관찰한 사실을 바탕으로 빠르게 진실에 다가가는 추론력 또한 갖추고 있었다. 나견이 지우스와 '표정으로 대화하기'를 몇 번 시도해 본 끝에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 그놈의 능력 때문에 이렇게 꼬투리가 잡히고 말았지만.

지우스가 알아챈 이상 숨기기에도 의미가 없었다. 나견은 그렇게 큰 비밀도 아니었다고 자신을 다독이며 내기판의 현황을 보고했다.

"그... 저 혼자서 하는... 놀이 같은 게 있거든요? 형의 저녁 메뉴 맞추기인데..."

"어. 약간 알 것 같다."

"제가 맞추면 제가 1점. 틀리면 형이 1점. 그렇게 계산해서 지금 7.5 대 4예요."

"내가 4야?"

"네. 형이 4요. 저 많이 맞췄어요."

"그러네. 근데 0.5는 또 어디서 난 거야."

"그런 게 있어요."

6.

10월 접어들더니 공기가 많이 선선해졌다. 진이가 기숙사 방 건조하다면서 냅다 1.5리터 짜리 생수 한 통을 허공에 들이부으려는 걸 간신히 뜯어말렸다. 입시 시험이 정말 머지않아서 얘도 많이 이상해진 모양이지.

지우스 이 양반이 낯짝 안 비춘 지가 일주일이 넘었다.

7.

 ...톡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해주지 않으련."

한참을 정면 유리창만 바라보며 나견이 손가락으로 찍어내는 박자를 가만 듣고만 있던 지우스가 결심이라도 한 듯 한숨을 들이마시곤 입을 열었다. 끝 음을 낮게 마무리 지은 음성은 '그렇게 사람 잡아먹을 것처럼 쳐다보지 말고', 하는 다음 문장을 삼킨 채였다.

"불만은 아니고, 의문이라고 해두죠."

"하여간 뭐가 그렇게 맘에 안 드는데."

나견이 맘에 안 들어 하는 바는 다음과 같았다. 지우스가 잠수를 타버린 것이었다.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그들이 가깝다거나 하는 사이는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서로 개인정보까지 까 보이고, 몇 주간 꾸준히 봐 왔던 상대가 갑자기 얼굴을 비추지 않는 상황에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 마디로, 삐쳤다.

"한동안 다른 편의점 찾아간 건가 싶었어요. 거기 삼각김밥이 종류가 더 많아서 이리로 안 오는 건가도 싶었고."

그게 문제였나. 나견은 이마 위로 드리워진 녹빛 그늘 너머로 순간 아래로 처지는 눈꼬리에서 그런 생각을 읽어냈다.

"시험 준비하느라 저녁 먹을 시간이 안 났다. 그리고 변명해보자면... 딱히 너한테 연락할 방도가 없었어. 뭐, 전화번호를 아는 것도 아니고."

듣는 사람을 달래려는 듯 평소보다 나직하지만 그만큼 더 부드러운 어조였다. 그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견은 제게 심술부릴 이유가 마땅치 않음을 인식했다.

"그건... 그러네요."

"그래도 미리 언질 못했던 점 미안하다."

"사과하실 건 없고요..."

"평소 같았으면 신경 썼을 일인데, 나도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지."

"아니에요, 그냥 제가... 형이 대학생이란 걸 감안 못 한 거죠."

신경 썼을 일이라니. 이 사람은 원래부터가 저녁 사 먹으면서 잠깐 얼굴 보는, 지인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상대에게까지 내가 오늘은 못 들를 것 같소 하고 알림을 보내는 성격인가? 찰나에 감지된 두 가지 이유로 인해 나견은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여 시야에서 지우스를 걷어냈다. 첫 번째 이유는, 말을 이을 수록 통상적으로 '헷갈림'이라고 정의되는 느낌이 강해져서. 더 덧붙였다간 논리도 뭣도 없는 중얼거림만 횡설수설할 것 같았다. 두 번째는, 대화 시작부터 지금까지 샛노란 홍채가 빤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히는 잔뜩 흔들렸을 게 뻔한 그의 눈동자를.

안타깝게도 나견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은 그리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잠깐의 고요를 가르고 웬 날벼락 같은 발언이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말 나온 김에, 내 번호 줄까?"

"예? 아니, 갑자기요? 진심으로?"

"진심이지 그럼 가짜일까. 핸드폰 줘 봐."

"그... 평소에도 이렇게 막 함부로 번호 주고 다녀요?"

"너한테는 함부로가 아니지 않나? 왜, 보이스피싱이라도 하게?"

"아니, 하,"

"기말 공부 들어가기 전에 연락 한 번 해야지. 너 또 삐칠라."

"삐친 거 아니거든요."

"맞는데? 딱 보니까 삐쳤구만."

"아 아니라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지우스는 가지런하게 숫자가 찍힌 휴대전화를 건네며 눈동자에 장난기를 가득 담고 입꼬리를 한껏 끌어당겨 웃었다. 하여튼 쓸데없이 눈치가 빠르다.

내가 형이 오기를 기다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근데내가이형을? 왜?

8.

사람이 정신적으로 피로해지면 별 되도 않는 생각으로 머릿속 하얀 칠판을 메워버리기 마련이다. 육체가 지쳤다면 편안한 곳에 앉아 온몸에 힘을 풀고 휴식을 취하면 퍽 금방 해결된다. 하지만 향정신성 물질(예를 들자면 나견이 물 마냥 마셔대는 음료에 가득 든 카페인)에 뇌가 절여져 잠은 오지 않으면서 무작정 피곤하기만 하다면, 그 칠판은 글씨를 적은 사람조차 알아볼 수 없도록 검은색으로 빼곡히, 몇 번이고 덮어씌워진다.

그게 당장 나견의 상태였다. 겉보기에는 그저 멍때리는 모습이겠지만 스스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인식하지 못하고 우주를 유영했다. 다만 학교 내에서는 그뿐만 아니라 동나이대 아이들 전원이 그와 같거나, 그에 준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자각하지 못했을 뿐, 나견은 충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편의점에 들어와 앉아있는 사람 이외에 추가로 손님을 받을 일은 없겠다는 근거 없는 확신을 한 이후로 쭉 계산대 탁자에 관자놀이를 대고 엎어져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책 한 장을 더 읽었을 여유지만 오늘만큼은 글자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자신의 숨소리를 들으며 어딘가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나견은 입안을 떠돌던 생각 하나에 소리를 입혀 느긋하게 끼니를 씹어 삼키던 삼각김밥 애호가에게 건넸다. 지우스는 어느새 계산대 쪽으로 한 칸을 더 옮겨왔다.

"형, 제가요."

"응."

"생일 지나서 법적으로는 성인 맞거든요?"

"안 돼."

"...뭔 줄 알고 반대부터 하는데요."

"네가 뭘 보고 있는 지가 빤히 보이잖냐."

나견의 눈동자를 유혹한 것은 다름 아닌 주류 코너였다. 나진에게 학교 졸업하기 전까지 술은 입에도 댈 생각 말라고 엄포를 놓은 게 자신이라는 사실도 잠깐 잊기로 했다. 일시적이고 의학적으로는 결코 권장되지 않는 방법일지라도 그에겐 마취 효과가 간절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와라. 그때 되면 같이 마셔줄게."

"어, 진짜죠?"

"응, 진짜로. 어떻게, 지장이라도 찍어줘?"

"그런 건 됐고, 기억해둘 거예요."

"그래그래."

학교 졸업하자마자 형한테서 술을 받아낼 것.

내일은 공책을 새로 사러 가야겠다. 하루에 그렇게 길게 적지도 않는데 벌써 다 써간다.

9.

"진아 너 공책 여분 아직 남았어? 오늘 문구점 갈 건데."

"공책은 새 거 좀 남았고 나... 파란색 볼펜 하나만. 한 800원 하려나?"

"됐어, 그냥 사줄게. 더 필요한 건 없고?"

"어엉. 아 오늘 일 끝나면 바로 들어와. 애들이랑 떡볶이 밀수하기로 했어."

"그거 쌤들한테 걸리면..."

"죽음이겠지, 아마?"

"'니들 대입 시험 한 달도 안 남았는데 뭐 하는 거냐'부터 시작해서..."

"지금 우리에겐 무엇보다 사기 증진이 필요하잖아. 그건 쌤들도 인정하실걸?"

"그게 목적이 아니라 야식이 진짜 목적 같은데."

"견이 너까지 잔소리하지 말고오. 아무튼 이따 빨리 들어와야 해?"

"아라써-"

"어엉-"

10.

기숙사에서 나와 편의점으로 출근하는 길목에서 발길을 오른쪽으로 틀었다. 나견이 어릴 적부터 들락날락하던 문구점이 있는 방향이었다. 사장님은 꼬맹이가 혼자 준비물도 잘 챙긴다며 싸구려 막대사탕을 하나씩 입에 물려주시곤 하셨다. 요즘은 얼굴 못 비춘 지 꽤 오래됐건만 여전히 사장님은 그를 기억하고 계셨다.

수많은 파란색 누름단추들 사이에서 나견은 자신이 즐겨 쓰는 모델을 하나 뽑아 들었다. 흰색 몸체에 손가락 관절이 닿는 부분만 파란색 고무로 마감 처리된 볼펜은 가볍고 튼튼해서 그와 나진 모두가 좋아했다. 나견이 월급으로 두둑하게 찬 카드를 손에 꼬옥 쥐고 색깔별로 쟁여두려 했을 때는 나진이 그를 진정시켜야 했을 정도로.

문구점에 온 목적을 온전히 달성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물건을 더 골라야 했다. 그는 일기장으로 쓰는 공책은 손바닥 두 개 정도 크기를 선호해서 필기용으로 살 때보다 선택의 폭이 좁았다. 때문에 나견이 이것저것 전부 비교해보고 신중하게 물건을 고르는 성격일지라도 전부터 일기장을 살 때만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그중에서도 유난히 생각하는 시간이 짧았다.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단박에 눈길을 잡아끈 색깔이 있었다.

"이거 그 형 머리색이잖아."

한겨울 소나무를 떠올리게 하는 암녹색 표지는 가운데 부근이 작고 샛노란 병아리로 꾸며져 있었다. 얘가 개나리였으면 완벽한데. 아니 병아리도 어울리나? 나견은 사장님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목소리를 높여 중얼거렸다.

11.

문구점을 나와 편의점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교대 시간이었다. 공책과 볼펜은 가방에 고이 모셔둔 채로 계산대 안쪽으로 들어가 앉으니 기다렸다는 듯 지우스가 바깥바람을 이끌고 문을 열었다. 나견이 예상한 대로 지우스는 참치마요를 집어 왔다. 숫자가 너무 커져 점수 계산에는 미련을 버린 지 오래였지만 전날 매대를 정리할 때 부러 다른 종류들보다 눈에 잘 띄는 곳에 배치한 보람이 있었다.

"근데 형은 왜 삼각김밥만 먹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나견의 머릿속 한 구석을 차지하고 앉아있던 의문이 무자각을 가장해 밖으로 뛰쳐나왔다. 지우스는 신용카드를 건네다 말고 정체불명의 외국어라도 들은 표정으로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나견이 카드를 넘겨받던 도중 행동이 멈춘지라 서로 다른 모양을 한 손가락이 맞닿은 채로 시간이 머뭇거렸다. 주로 서늘함을 유지하는 말단에 그닥 높지 않은 상대의 체온만으로 열감이 차올라 둘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견은 간지럽지도 않은 목덜미를 연신 쓸었다. 지우스는 몇 번의 시도 끝에 머뭇거리던 입술을 열었다. 손가락은 떨어진 지 오래였건만 온기는 가실 줄 몰랐다.

"이게 제일... 먹는 데 편해. 양은 많지 않은데 종류는 많으니까."

"그래도 종종 다른 것도 골라오세요. 너무 하나만 먹으면 좀 물리잖아요."

지우스는 주위를 몇 번 둘러보더니 계산대 바로 옆 선반에서 샌드위치를 하나 꺼냈다. 정삼각형이 아니면 이등변삼각형이라니. 이쯤 하면 그가 그냥 삼각형에 집착하는 건 아닌지 나견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럼 김밥은 환불하고 그거 계산할게요."

"그냥 계산만 하고, 이건 너 먹어."

"제가요?"

"참치마요 안 좋아해?"

"그런 건 아니고, 저 나중에 떡볶이 먹기로 했어요."

"그럼 내일 아침으로 먹어."

"아침엔 조식 따로 나오는데-"

"수업 중간에 간식 하던가."

"...받으면 되잖아요."

이번에는 손끼리 스치지 않게 조심했다. 녹음이 드리운 눈가에 언뜻 아쉬움이 비쳐 보인 건 기분 탓일 것이었다. 나견은 제게 들린 삼각김밥은 그냥 바로 먹어 치울 작정을 했다. 나진과 한 약속이 떠올랐고, 제가 입이 짧은 건 나견 스스로도 인정하는 사항이었지만 이 정도는 괜찮겠지 싶었다. 지우스는 손님용 의자 하나를 끌어와 계산대 맞은편에 팔꿈치를 걸치고 앉았다. 벗긴 포장지는 대충 탁자 한 켠으로 밀었다.

"치킨마요 더 좋아해요. 하여간 잘 먹겠습니다."

"그래."


지우스 형이 오늘은 삼각김밥 말고 샌드위치를 먹었다.

시험이 이젠 진짜 얼마 안 남았다.

12.

천천히 넘어가는 태양이 공기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얼굴에 피곤을 바른 학생들이 긴 그림자를 등지고 시험장 바깥으로 밀려 나왔다. 나견은 조금 느린 속도로 발을 놀렸다. 푸르게 번지는 창공에 주황빛 새털구름이 너울거렸다. 예쁘다. 그런 감상이 전부였다. 몇 년을 준비한 시험이 끝났는데 큰 동요가 없다는 게 그 자신에게도 신기했다. 후련함이랄지, 허무함이랄지 하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저 하늘이 예뻤다.

이대로 기숙사 방에서 좀 누워있다가 편의점으로 출근할 생각이었다. 점장은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된다고 권했지만 나견 자신이 거절했다. 그가 아니면 그의 단골손님 삼각김밥은 누가 계산해준단 말인가.

방문을 열어보니 나진이 먼저 대자로 뻗어있었다. 그는 곁눈질로 들어온 이가 나견임을 확인하곤 한쪽 하완만 힘없이 들어 올려 손을 흔들었다.

"어땠어, 많이 힘들었어?"

"너는 되게 시험 안 친 것처럼 얘기한다 견아..."

"나야 뭐... 그래서 어땠는데?"

"나 찍신을 영접한 거 같애. 힘 다 썼어."

"그래, 그래 보인다. 아이고 나도 좀 눕자."

"어어... 나는 좀...... 자야겠어..."

"진아 잘자아."

"으응..."

나견은 그새 잠든 형제 옆에 한동안 나란히 누워있다 조심스럽게 방을 빠져나왔다.

13.

바코드 인식기를 들고 마중을 위해 목을 길게 뺀 나견은 지우스가 계산대 앞으로 나오기를 기다렸다. 이번엔 양손에 삼각형이 들려있었다. 전에 먹은 샌드위치 하나, 치킨마요 삼각김밥 하나.

"거봐요, 샌드위치 이거 맛있었죠?"

"응. 치킨마요는 너 먹어."

"...또 사주시게요?"

"오늘 시험 본다고 수고했을 거 아냐."

그렇게 말한 입꼬리가 곱게 휘었다. 지우스는 나견이 바코드를 찍기 편하도록 그들의 저녁 식사를 바르게 들어주며 덧붙였다.

"이거랑 던힐 프로스트 하나만."

"형 담배도 피워요?"

"어... 몰랐어?"

"가끔 옆에 가면 화-한 향 나길래 향수 같은 건 줄 알았죠. 그거도 좀 떨어지면 아예 안 나고."

"그게 멘솔 향이야. 관리를 한다고 하는데 냄새가 나는 건 맞는 모양이네. 아니 그거 말고 더 아래. 그래 그 줄에서 왼쪽으로 세 칸 더. 어 그거 맞아. 한 갑만."

"형, 신분증."

"...검사 해야겠어?"

"안 하면 저 점장님한테 혼나요."

"그래 알았다..."

14.

"나견."

이름 주인은 삼각김밥을 오물거리던 입을 잠깐 멈추고 부른 사람과 눈을 맞췄다. 지우스는 짐짓 놀란 얼굴을 금세 갈무리한 다음 본래 물으려던 바를 질문했다.

"...너 졸업이 언제라고 했지? 얘기 했던가?"

"얘기한 적은 없죠. 12월 말일이요."

"그날 저녁에... 아니다, 친구들이랑 놀러 가려나?"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이젠 대답을 해야 하는 당사자는 한참을 뜸을 들였다.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가, 손가락 마디를 괜스레 문지르다가. 그를 기다리던 나견이 참지 못 하고 김밥을 한 입 더 베어 문 후에야 본론을 꺼냈다.

"...내가 술 사주겠다고 했잖아, 전에."

"그게... 그렇게 말하기 어려울 일이에요?"

이 형은 별것도 아닌 데서 망설이는 경향이 있어. 저번에 이름 물어볼 때도 그렇고. 나견은 제 발로 걸어 나가려는 어처구니의 목덜미를 잡아 도로 끌고 와선 연말 일정을 상기했다. 기가 막히게 텅 비어있었다. 더구나 나진은 검도 동아리 뒤풀이로 하룻밤 밖에서 자고 다음 날 오후 늦게나 돌아온다고 했다. 바꿔 말하면, 그가 술을 마셔도 말릴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의미였다.

"저는 좋아요."

"혹시 다른 약속 있으면 나중ㅇ, 어, 뭐?"

"저는 좋다고요. 이게 몇 주 전 선약인데 다른 일이 있을 리가. 졸업식 당일 저녁이죠?"

"어... 알았어."

"형 표정 되게 이상해요, 알아요?"

"크흠...... 사거리에 나와 있을래? 데리러 갈게."

"그럼 그때 봐요.

기다릴게요."

나견은 어깨를 으쓱하며 비닐 쓰레기를 정리하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턱을 가볍게 괸 지우스의 상체가 그를 따라 천천히 돌아갔다. 표정에 가득 담겼던 당황은 다 어디 가고 옅은 미소만이 눈가에 자리했다.

"너 어깨 그거 버릇이야."

"알아요. 알고 하는 건데?"

"진짜, 하, 아니다."

귀여워서 봐준다. 눈동자는 분명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15.

하아-

손을 가지런히 모아 입김으로 덥혔다. 한 달 가량 사이에 기온이 더 떨어져 가만히만 있으면 냉기가 체온을 온통 앗아가 버렸다. 더운 숨이 순식간에 얼어붙어 구름을 그리다 사라졌다. 거리 곳곳에 달린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전구 장식은 가게 점주들의 게으름 덕분에 연말과, 길면 새해까지를 축하했다. 나견은 아른거리는 조명과 어디들 가는지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일찍 나왔네? 많이 기다렸어?"

그 누군가가 제말을 들었는지 성큼성큼 걸어왔다. 조금 전까지 바라보던 조명과 퍽 비슷한 색을 띈 홍채가 약간의 걱정과 함께 나견을 담았다.

"아뇨, 딱히. 저도 금방 도착했어요."

"손 많이 시려? 핫팩 같은 건 없는데..."

"많이 춥진 않아요. 근데 우리 어디로 가요?"

그의 질문을 들은 건지 만 건지 지우스는 나견의 손등 위에 제 손을 덮어 찬 바람을 막는 데에만 집중했다. 손끝은 비슷하게 차가웠지만 손바닥은 따뜻했다. 지우스는 두 사람분의 손이 서로 온도가 비슷해진 다음에야 답변을 보냈다.

"내가 자주 가는 데 있어. 안주로 요리를 같이 파는데 네 입맛에 맞을진 모르겠다."

그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나견을 이끌었다. 손은 맞잡은 채로 끌어당겨 긴 외투 주머니에 수납했다. 두꺼운 안감으로 깔끔하게 마감된 주머니 속은 누군가의 온기로 포근했다. 나견은 구태여 빼내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16.

그래서 같이 술 마시러 간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어 깼어?"

"...여기 어디예요?"

눈 떠보니 낯선 천장이고, 침대에 누워있는 그와 달리 지우스는 부스스한 머리칼을 대충 쓸어 넘기며 '바닥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정황 증거로 미루어보아 여기는...

"우리 집."

나견은 진심으로 지우스에게 미안해졌다. 제가 지금 정신줄은 어디다 내팽개치고 집주인을 마룻바닥에서 재웠단 말인가.

"너 어디 사냐고 몇 번을 물어봤는데 대답을 안 해서 그냥 이리로 데려왔다. 미안해하진 말고. 길바닥에서 재우기는 내가 싫어서 그랬으니까."

"그거어, 는 그런데."

"속 쓰리다거나 골 울린다거나 하진 않고?"

"그 말을 들으니까 머리가 아픈데요."

"어디 봐."

어느새 몸을 다 일으킨 지우스는 누워있는 나견과 시선을 맞추기 위해 상체를 약간 숙였다. 손가락 두 번째 마디가 이마 한가운데에 닿았다가 이어서 관자놀이까지 꼼꼼하게 짚어 혹시나 열이 나는지 확인했다. 자고 일어난 직후라 그런지 평소보다 더 깊은 눈동자와 목소리를 피해 나견은 눈을 도로 감았다. 사각거리는 촉감의 이불에서는 섬유유연제 향과 비누로 추정되는 알데하이드 향이 섞여 났다. 지우스의 체향이 꼭 그랬다. 담배 피운다더니 그런 냄새는 어디에서도 나지 않았다.

"열은 없고. 일어날 순 있겠어?"

"네... 에? 아니 아니요..."

"좀 누워있다 내킬 때 나와. 죽 데워놓을 테니까."

지우스는 푸스스 웃으며 나견의 이마를 짚던 손가락으로 금빛 머리카락을 몇 번 헤집어 헝클어뜨렸다. 그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 나견은 이마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속으로는 비명을 질렀다. 아주 큰일이 난 것 같았다.

지우스가, 이 형이, 단골손님 양반이,

잘생겨보였다.

큰일이 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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