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회복

지우견

*잇올이 님과 트위터에서 나눈 이야기 기반. 상처 입은 나견을 간호하는 지우스입니다.

항상 어수선한 병원 현관을 타고 유독 곧은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입원 중인 환자들을 보러 온 보호자들에게 병실을 안내하던 간호조무사는 서류철로 내리깐 고개를 힘겹게 들어올렸다. 몇 번씩 보다 보니 그새 얼굴이 익은 격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눌러쓴 모자 탓에 이마에 그늘이 진, 초록빛 머리 기사였다. 신입 시절부터 임무 중 입은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자주 들락날락거리긴 했으나 근 일주일 동안은 다른 일로 찾아왔다. 말없이 고개만 가볍게 숙여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에게는 더이상 안내가 필요 없다는 사실을 조무사는 잘 알았다. 그가 향하는 병실은 주욱 하나였다.

‘어쩜 저렇게 지극정성이람.’

조무사는 기사가 찾아가려는 환자를 떠올렸다. 실려 올 당시에는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긴 했으나 위독하긴커녕 평균보다 차도가 빠른 편이었다. 얼핏 본 팔이 가늘어 걱정했지만 역시 견습기사 중에서도 유망주는 유망준가 보다,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때문에 기사가 비치는 태도에는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봉합수술 후 환자가 깨어나기 전부터 줄곧 옆자리를 지키더니 가벼운 움직임에는 무리가 없을 만큼 회복된 지금까지도 그는 매일 얼굴을 비추었다. 하지만 조무사는 오래 생각하기보다는 의문을 옆으로 치워두고 도로 문서로 시선을 돌리기를 택했다. 말마따나 명예에 살고 명예에 죽는, 그리고 그 환자의 보호자임이 확실한 격기사가 해를 가할 리야 없지 않나. 또 자세히 알지도 못하는 사정들을 파헤치기엔 병원은 항상 바쁜 법이다.

지우스는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던 복도를 걸었다. 그를 조금이라도 오래 봐온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아차릴 수 있도록 표정엔 늘상 들어서 있던 여유로움이 부재했다. 손으로는 연고며 붕대며 갖은 치료용품이 가득 찬 바구니를 들었다. 자기네가 하겠다며 그를 만류하는 병원 측 인사들을 지우스는 정중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돌려보냈다. 마치 원래부터 제가 했어야 하는 일을 수행하는 양.

하얀 문을 열자 새빨간 눈동자가 돌아보았다. 잔잔히 생기가 찰랑였으나 당장이라도 사윌 듯 위태롭던 것이 얼마 전이었다. 안도는 불안을 품을 수가 있었다.

오셨어요. 입술 대신 눈꺼풀이 느릿하게 닫혔다 열렸다.

지우스가 침대 가에 걸터앉아 가져온 짐을 정리할 때까지도 눈동자는 가만 그 모습을 따라 담기만 했다. 붕대 풀려면 옷은 벗어야 하는데. 지우스는 하던 것을 내려놓고 오늘따라 미동도 없는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마주쳤다. 타이르듯, 병실 안에 처음으로 목소리가 울렸다.

“나견.”

기사는 언제나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산다. 하물며 부상은 어떨까. 벽지를 향하는 임무는 적지 않고, 변변한 의료시설의 존재라는 행운은 드물다. 어지간히 경력을 쌓은 기사라면 야전에서 중상까지도 처치해 본 경험을 한 번 이상은 겪었을 것이다. 그런 직업 특성상 이미 수도 없이 감아본 붕대이니 만큼 지우스가 어설플 리는 없었다. 나견이 느끼는 감정은 우려가 아닌 부채감이었다.

지난 임무 이후 담청색 기린은 작전 수행 책임자로서 결과 보고 및 피해 지역 복구를 위해 여기저기 불려 다녔다. 평소보다 배는 더 바빴는데, 일을 분담해줄 또 다른 사령탑이 의사들 손에 의해 잠정적으로 병원을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지우스 스스로도 환자에게 서류 뭉치를 들이밀 생각은 맑은 하늘 구름 조각만큼도 없었지만.

그런 와중에 꼬박꼬박 나견의 붕대를 갈아주러 걸음하는 판이었다. 도움이 되지는 못할지언정 수고를 더하는 탓이 나견은 못내 죄스러웠다. 이참에 확실히 전달해두기 위해 부러 뜸을 들이던 차였다.

“기린 님.”

다지듯 운을 뗐다. 얽혀있던 시선에 무게가 실렸다.

“저 괜찮습니다. 상처는 어느 정도 아물기도 했고… 호의는 감사하지만, 매번 번거롭게. 괜찮습니다. 이러실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이런 반응을 기대하진 않았다. 지우스의 눈동자 속에서 여태 본 적 없는 파도가 일었다. 물결이 목소리로도 실렸다.

“괜찮다고 해서 진짜 괜찮아지는 게 아니잖아.”

그가 말끔히 관두리라고는 생각한 적 없었다. 모든 판단에 이유가 있는 사람이니. 사령탑이자 사수로서 부상 입은 후배를 챙기는 건 당연하다는 식의 논리를 들어 저를 설득하리라 예상했고, 반박도 준비해두었다. 현실은 계산과는 한참 떨어진 반응이었다. 단순히 호의를 거절했다고 해서 사람이 저런 착잡한 눈을 지을 수가 있을까.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남의 표정을 읽어온 대가는 그간 애써 외면해왔던 감정을 여과 없이 알게 되는 형태로 돌아왔다. 나견은 얼이 빠져 되묻고야 말았다.

“…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 텐데.”

깊어가는 황혼을 품은 홍채가 작게 떨렸다. 아니, 아니지. 그를 바라보는 제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견은 지우스의 말을 따라잡으려 사건을 되짚었다. 차근차근 과거로 돌아가던 중 어느 한 시점이 마음 저 구석에 턱 걸렸다.

순간 어처구니를 뻗어 칼날이 파고드는 경로를 비틀었기에 망정이지 제대로 맞았다면 심장이었다. 진작 체력이 바닥을 기던 나견은 그 공격이 결정타로 작용해 쓰러졌다. 급소를 비껴갔을 뿐 가슴팍부터 어깨를 긋고 지나간 상처는 결코 얕지 않았다. 고통은 매번 다른 형태로, 다른 세기로 찾아와 하나하나 넘겨내기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고통을 참고 견디고 아무렇지 않게 꾸며내는 법만은 익숙했다. 어릴 적부터 해왔으니. 그때도 분명 그랬어야 했지만.

하필 제 등을 받친 사람이 그라서. 제 실체를 대부분, 어쩌면 전부 파악한 사람이라서. 속내를 보여내도 좋을 유일한 사람이라서.

그 사실들에 어쩌면 저도 모르게 안도했는지도 몰랐다.

“기린 님.”

“가만, 지원 불렀으니 곧 의료진이 올 거다.”

“지,우스 님….”

“조금만… 조금만 참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아픕니다.”

“….”

“저 아파요….”

“이제 와서 아닌 척, 없었던 일인 척 해봤자,”

문장만 본다면 살갗이 찢겨나간 사람에게선 으레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속 깊숙이 숨긴 것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벽을 몇 번이고 덧쌓았더니 마침 그때 균형을 잃고 무너진 모양이다.

지금껏. 너무 아팠어요.

그날 차마 내뱉지 못한 마지막 문장은, 그를 대신하는 표정은, 결국 흘러버린 눈물은. 진심이었다.

“아직도 선연한데.”

이 사람이라면 마음에 담아둘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생각하지 않았을까.

자기자신을 스스로 바라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세계를 속이는 자는 누가 보아주는가.

“나견.”

나견. 제 이름이다. 무의식적으로라도 반응하게 되는, 그런 반응조차 지워 내려 안간힘을 쓰던 나견이다. 지우스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견을 불렀다. 찾았다. 바랐다. 그래서 나견은 고개를 들었다.

“그래, 나견.”

그 작은 움직임이 뭐라고 대견함을 씌워 지어 보인 웃음이 썼다.

단지 더 쳐다보고 있기가 벅찬 탓이었다. 단단한 어깨 위로 느릿하게 쓰러졌다. 지우스는 체격이 큰 편은 아니었지만 위태로운 불꽃 하나를 받아내기엔 충분히 넓었다. 옷가지로 몇 겹씩 덮여있음에도 이마에 닿는 느낌은 맨살과 같이 따스했다. 나견은 그 미적지근한 온도를 좋아했다. 피부는 데지 않으나 칼바람에 저릿해진 몸을 녹이기 알맞았다. 연신 얼굴을 비벼 숲을 닮은 체향이 밴 품을 파고들었다.

“화나신 건 아니잖아요.”

“너는 정말….”

머리 위로 짧은 한숨이 떨어졌다. 이내 곧은 손가락이 금빛 머리칼이 흩어진 목덜미를 감쌌다.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네가 괜찮아질 때까지, 아니, 괜찮아진 이후에도 언제든. 기대도 좋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지우스가 부드럽게 쓰다듬는 대로 가만 이끌리다 나견은 조용히 환자복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지우스는 이불 위에 잠시 내려두었던 바구니에서 소독제를 꺼내 들었다. 환부를 만지는 손은 깨끗해야만 했으므로. 묶였던 붕대를 풀자 날붙이로 그인 기다란 상흔이 드러났다. 하필 전과 비슷한 자리라 간신히 옅어진 흉터 위를 도로 가로지른 모양새였다. 지우스가 다시 자국이 남지 않도록 각별히 관리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어린 새를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이 갈라진 살갗에 닿았다. 아픈 감은 없었다. 천조각이 사그락거리며 서로 스치고 엉겼다. 다정이 내려앉는 소리였다.

상처 입은 자들이 회복을 위해 머무는 곳. 병실은 그다지도 안온했다.

회복 回復

원래 상태를 되찾다. 원래 상태로 돌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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