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튜버

잠수

hye by h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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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최악.'

처음 해보는 사랑에 처음 해보는 이별이라, 헤어진다는 게 이렇게까지 아플 일일 줄은 몰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눈 안에 더 이상 무메이가 담겨있지 않다는 것도, 차갑게 식은 상대의 손안이 아닌 내 바지 주머니에 대충 꽂아둔 것도, 발걸음이 너무 빨라지면 뒤에서 웃음과 함께 과장된 숨소리를 내뱉으며 잠시 멈춰달라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는 것도 전부 처음이라.

그래, 이젠 다른 곳에 눈 돌리지 않고 집 가는 길 위에 눈을 붙일 수 있었으며, 어색한 자세로 남에게 손을 뻗은 채로 불편하게 걸어갈 필요도 없었고, 상대의 발걸음을 맞추느라 억지로 속도를 늦출 필요도 없었다. 전화가 오면 설렘에 뛰는 심장을 가라앉힐 필요도 없었고, 몰래 문자로 서로 사랑 고백을 하다가 숨기지 못한 웃음에 교수님께 한 소리 들을 일도 이젠 없다. 다음 학기 수업 시간표는 같이 맞출 필요도 없으니 내 취향대로 신청하면 될 거고, 긴 강의 끝 금요일 밤에 같이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겠다고 2인분 치의 식자재를 사 오거나, 영화를 고르거나. 전부 할 필요 없었다. 할 수 없게 된 것이 아니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치, 서로 쌍방합의로 헤어진 거니까. 나의 선택도 50%나 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완전 최악.

내가 고하지 않은 이별을 겪는 건 마치 불이 다 꺼진 가로수길을 끝없이 걷다가, 마지막에 다다라서 바다에 잠겨버리는 감각이었다. 차라리 무메이가 날 바다에 밀어버렸으면 이렇게까지 아프진 않았을 거다. 그런데, 누가 봐도 이해할 만한 이별 사유였기에. 서로 이해하고, 서로를 위해 고해진 이별에 긍정적으로 대답했으면서도 스스로 바다에 빠진 건 나라서. 단지, 이제 내 옆에서 숨을 나누어줄 그가 없으니 몸 속에 물이 차오르는 채로 가라앉아가는 것이다. 한여름도 아닌데 공기가 너무 습했다. 폐에 모든 공간을 습기가 가득 채웠다. 집안의 모든 제습 기능이 있는 가전제품을 켜두었는데도 찝찝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드디어 미쳐가는구나 싶어서 밖에 나가 공기라도 쐬러 일어나면, 말라버린 눈물 탓에 눈 아래 피부가 당기는 걸 느끼곤 금방 포기했다. 며칠째 씻지도 못한 채 울기만 했던 기억에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어떤 모습일지 뻔했으니까.

'이 꼴로 나갈 순 없지.'

그는 완벽했으니까. 완벽하지 못한 모습으로 혹여나 아는 사람을 만나면 댈 수 있는 핑곗거리도 없이 바로 '헤어진 충격으로 며칠 째 집에서 울고만 있던' 크로니라고 소문이 나버릴 테니까. 정말 한 치의 오류도 없는 정답이었지만 — 크로니는 남들의 머릿속에 서로의 이해와 합의 속 예쁘게 헤어진 구연인. 이라고 기억되길 원했다. 어느 시간, 어디에서든 무메이를 만나게 된다면 절대 영향받지 않고 잘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도 있었다. 딱히 전 애인에서 자존심을 세우려는 건 아니었고, 이별을 겪은 크로니라도 완벽해야 했으니까.

비록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는 이별 노래들이 흘러나오고 있을지라도. 이 가수들은 이럴 때를 대비해 이런 노래들을 만들었을까. 그렇다면 참 잔인한 사람들이다.

잠수

말은 그렇게 해놓고 실상 크로니의 이별을 견디는 과정은 완전 최악이었다. 완전 오답. 모범오답. 겨우 씻고 혹여나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칠까 차려입기까지 했는데 정작 집에 다시 들어왔을 때 손에 들린 것은 앞으로 2주간 또 나가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을 만큼의 식품과 물뿐이었다. 그리고 계산대에서 눈에 보이길래 산 스트레스 볼 까지. 개강하면 교수님 바로 앞자리에 앉아서 종일 주무르고 있을 셈이었다.

월요일의 첫 수업은 12시 문학. 시간표를 보고 있으면 잊고 있던 기억이 점점 스며들기 시작한다. 분명 같이 짰던 시간표. 목요일 공강에 금요일은 빨리 끝내고 집에서 같이 쉬자는 의미로 오전 수업 두 개. 휴학 — 이라는 단어가 생각나자마자 더 이상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너무 클리셰잖아. 대학교에서 사귀다 이별하고는 한쪽이 휴학하는 클리셰. 그렇지만 크로니도 조금 억울한 부분이 있었다. 대학교가 아니라 고등학교부터 사귀었는데 어떡해. 하나 다행이라고 할 점은 둘은 딱히 연인 관계를 소문내는 편도 아니었고, 서로 합의된 이별에 한쪽이 티 내며 숨을 필요도 없던 것이다. 웃으며 헤어졌고 앞으로도 좋은 사이로 남자고 약속했으니까. 무메이는 아마 그 말을 잘 따를 것이다, 원래도 그런 성격이니까. 굳이 잘잘못을 가르자면 지금 약속을 지키지도 못하고 미련이 뚝뚝 흐르는 채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이별의 아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크로니의 잘못일 것이다. 무메이도 지금 울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냥 잠깐 마음 아픈 건 나만 억울하니까. 진짜 많이 울었으면 좋겠다. 왜 이별했을까 후회도 해줬으면 좋겠다. 남이 들으면 악담일 수도 있는 말들을 울음과 같이 흘려보냈지만,

크로니는 단지, 아직 자신이 무메이에게 있어 여러 감정을 겪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길 바랐다.


엄청 바쁘게 지낸 탓에 겨울 방학은 금방 지나가, 당장 이틀 뒤가 개강이었다. 아침엔 운동, 점심엔 알바. 저녁에는 밀린 드라마를 몇 편보다 보니 생각보다 방학이 짧다는 느낌도 들었다. 일요일인 내일은 아무런 일정도 두지 않았기에, 개강 하루 전날이어도 오늘과 같은 날일게 뻔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금방 들리는 초인종 소리에 묻어두게 되었다.

"사나?"

"연락도 없이 미안! 많이 취했는데 최근에 이사 간 집이 어딘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내 집에서 재우자니 임자 있는 몸이잖아?"

임자있는 몸... 문을 열면 사나의 품에는 얼마나 마신 것인지 힘이 빠져 축 늘어진 채 안겨있는 무메이의 뒤통수가 보였다. 사귀기 시작했던 고등학교 시절의 어느 날에도 딱히 발표를 하지 않았던 둘처럼, 이별의 공지도 하지 않은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눈치가 빠른 사나는 옆 고등학교 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둘의 연애를 일주일 만에 알아차렸는데, 이별은 딱히 못 알아차렸나보다. 헤어졌다고 얘기해봤자 이별의 감정에 이기지 못하고 술에 취한 친구를 버려둔 냉정한 사람으로 오해될게 뻔했으니, 품에 무메이를 받아서 들고 사나에게 조심히 들어가라며 인사를 건넸다. 품 안에 안긴 무메이의 다리에 닿을 만큼 길었던 갈색 머리카락은 언제 잘랐는지 짧은 단발로 바뀌어있었으며 술김일까 밖의 매서운 찬바람 때문일까. 두 볼이 붉게 올라와 있었다. 조용히 규칙적인 숨을 쉬는 모습이 마치 따뜻한 품을 찾아 잠이 드는 갓 태어나 날개도 펴지 못하는 새 같기도 했다.

"안 취한 거 다 보여, 무메이."

혹시 만약에, 0.1%의 확률로도 무메이가 정말 취해서 잠들어있던 거라면 오해로 그를 깨우고 싶지 않았기에, 최대한 낮춰 조용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 부드럽고도 차분한 목소리에 무메이는 크로니의 가슴팍을 두손으로 밀치며 고개를 들고는 크로니의 말에 웃음을 흘렸다.

"들켰네."

무메이의 작은 입에선 웃음만이 흘러나왔다. 폴짝- 작게 뛰는 모션을 취하며 크로니의 품에서 완전히 벗어난 무메이가 한번, 두 번. 주름 잡힌 옷을 펴고는 크로니의 집을 빙- 둘러보았다. 정신 차리고 치워둬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한 크로니는 무메이가 무슨 말이라도, 무슨 행동이라도 취할 때까지 기다렸다. 제 앞에 서서 미소만 띄우고 있는 무메이에 인내심이 바닥나게 생긴 크로니는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온 거야?"

이별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자신을 위한 방어 수단이었을까, 아님 더 이상 여지를 주고 상처받지 않기 위한 공격 수단이었을까. 차마 얼마 전까지 연인 사이였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날카로움을 무의식 속에 내뱉어버린 크로니의 말에도 상처받지 않은 듯 무메이는 크로니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아차- 하는 순간에 사과를 할 기회도 주지 않고 크로니는 무메이의 눈을 마주 볼 수 밖에 없었다. 저 눈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함부로 빠지면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만 같이 깊이를 알 수 없었던 저 눈.

"오고 싶었어."

이 집에 볼 게 뭐 있다고 집에 오고 싶어 하는지. 와중에 속으로는 대답이 '보고 싶었어.' 가 아니었다는 것에 상처받지 않도록 노력했다.

"취한 척하면, 애들이 어디서 재워줄지 궁금하기도 했고. 우리 헤어진 거 다들 아직 모르나 봐."

그야 나는 아무한테도 말 안 했으니까. 대답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아마 무메이도 남들에게 알리지 않았던 거겠지.


그 후로는 무슨 대화를 나눴더라. 이미 늦은 밤에 집까지 들어왔으니, 다시 무메이의 집으로 보내는 것은 너무 매정한 행동이었고 이미 같이 밤을 보내는 것이 기정사실이 되었다. 크로니는 포커페이스를 몇겹씩이나 세우고는 아픈 마음을 들키지 않으러 애썼다. 습했던 폐는 어느새 말라가고 있었고, 무메이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 다리가 생기고 바다에서 건져 올려진 인어처럼 다시 육지를 걸었다. 처음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한 학교 얘기, 친구들 얘기만 한가득 했었는데. 어느새 대화는 둘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었고, 깊어져 버린 감정의 갈등에 무표정의 무메이 앞에 크로니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결혼할래?"

언젠가 꺼내와서 대접한 찻잔에 한입 머금은 녹차를 뱉어버릴 뻔했다. 이 책임감 없는 질문은 또 뭐야. 한 번도 서로에게, 아니 최소한 크로니는 무메이에게 서운해한 적은 없었지만, 처음으로 무메이의 말에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단지 무메이의 말에 따르는 장난감이 아니었으니까. 무메이가 짜놓은 시놉시스에 따라 움직이는 배우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서운해할 틈도 없이 무메이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게 아니면, 나는 모르겠어 크로니.

크로니가 왜 우는 지는 알 것 같아.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그 울음을 멈춰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좋아해, 크로니."

"그럼, 그럼 된 거 아니야? 왜, 왜, 대체 왜 이별을—"

"그런데, 좋아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이 무슨 처음 짝사랑을 자각한 중학생이 할법한 말인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게 무슨 소리냐며 화를 냈을까, 더 울었을까, 아니면 미친 것처럼 웃어버렸을까. 그렇지만 크로니는 알 수 있었다. 이별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심해에서 나눠 쉴 숨 하나 없이 습도에 갇혀 숨을 몰아쉬던 본인의 옆에, 무메이도 같이 빠져있었구나. 단지, 나눠줄 숨이 없으니, 알아채질 못했구나, 하고.

"그럼 우리 좋아하기만 하자."

다시 육지로 올라온 나의 귀를 시원한 파도 소리가 채운다. 발 옆에 있던 조개껍데기는 올라온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그 모습을 나는 조개껍데기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광활한 바닷속에서 저 조개껍데기는 어디까지 흘러갈까. 심해에 가라앉다가 다시 치는 파도에 모래사장으로 다시 한번 밀려 올라오려나.

"좋아하기만 하다가, 우리 서로 감정에 여유가 생기면—"

심해 속에서 서로에게 나누어 줄 여분의 숨이 생기면—

"그때 결혼하는 거야."

손을 잡고 입을 맞춰 숨이 막혀가는 쪽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자.

"...만약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된다면 이 관계도 끝내는 거야. 그렇지만,"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마지막 말은 평생 소리로 형상화 되어 완성되지 못했다. 대신, 두사람의 입이 맞닿으며 나누어진 숨에 모든 이해가 담겨있었다.

이번에 나누어 쉰 숨은 나의 폐에 언제까지 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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