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튜버

사랑하지 않을 이유

hye by h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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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보단 혀를 감싸는 묽은 액체의 느낌에 깨닫는다 -- 또 뜯겼구나, 하고. 여기저기 묻어버린 이질적인 맛보단 상대의 입술을 훑을 때 쉽싸리 사라지지 않고 퍼지기만 하는 점도에 깨닫는다. 괘씸한 마음에 아랫입술을 깨물어버려도 상대는 움츠러들지 조차 않았다.

짜증나, 짜증나.



사랑하지 않을 이유 



도서부장 직책의 장점은 도서관 열쇠를 손에 쥘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크로니는 도서부장이 아니었고, 당연히 열쇠도 본인 게 아니었지만. 열쇠 구멍에 넣고 오른쪽으로 돌리면 너무 자연스럽게 90도 돌아간 열쇠에 잠깐 당황한 채 손을 놓으면 열쇠는 튕겨 올라 다시 똑바로 선다. 열려있네.

시간은 벌써 오후 여섯 시. 교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이미 문을 닫았어야 할 도서관에 학생이 있는 건 충분히 수상한 장면이었다. 고민하지 않고 들어간 도서관은 전부 불이 꺼진 채 바닥에는 먼지 한 톨 없이 정리된 채였다.

길게 늘어진 책상을 훑다 눈에 들어온 삐뚤어진 의자에 시선이 돌려졌다. 대충 벗어던진 가방과 교복 재킷. 세입 쯤 마시고 방치되어 겉에 물이 흥건히 맺힌 빨대 꽂힌 아이스커피 까지. 애초에 도서관에 음료 반입이 되던가 고민하기엔 너무 익숙한 장면이었다.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발은 돌아가 책장 사이사이를 걷다 가장 끝 쪽 미닫이 식 책장 앞에 멈춘다.

"집에 가야지."

미닫이 책장 사이에 몸에 꼭 맞도록 들어간 채 앉아있는 무메이의 모습을 바라보곤 입을 열었다. 고요함을 깨뜨린 소리에 놀란 듯 어깨가 움츠러들었지만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 필요도 없이 무메이는 나긋하게 대답을 뱉었다. 책장을 옆으로 밀어 여는 것조차 귀찮은 건지 매번 좁은 공간에 꾸깃꾸깃하게 들어가느라 앞으로 뻗은 다리 주변엔 도서관 구석 책장에서 꺼내왔을 법한 책들과 복사본들이 부주의하게 널려있었다. 대체 학교 도서관에 왜 존재할까 싶은 제목들과 인생에 필요하긴 할까 싶은 주제를 담은 부제목들을 째려보고 있으면 앞의 상대가 대충 교복을 몇 번 털곤 기지개를 켠다.


누가봐도 녹슬 대로 녹슨 열쇠와는 확연히 대비되는 최근에 조여진 열쇠고리에 손가락을 넣고 돌리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당연히 닫혀있을 거라 믿는 도서관 유리문에 등을 기대면 작은 몸집에도 빠른 속도로 밀려 열려버렸다. 등 뒤의 지지대가 사라진 채 뒤로 넘어간 무메이는 출납 카운터의 모서리를 간신히 잡아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입에서 튀어나온 의도치 않은 반응은 작은 소리였지만 빈백 소파에 누가 봐도 의도치 않게 잠든 모습의 상대를 깨우기엔 충분했다. 정전기에 소파 표면 여기저기 퍼져 눌린 머리카락 위로는 저녁 여섯 시의 햇빛이 비추고 있었다.

금방 잠에서 깼음에도 머쓱하게 무메이를 맞이하는 그는 분명 종례가 끝나고 곧장 도서관으로 왔을 것이다. 도서부장의 열쇠 담당을 의도치 않게 자처하게 된 지 몇 주, 선생님 몰래 복사한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작 찾는 소녀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고 고요만이 넓은 공간을 채웠다. 물론 상대가 도서관에 있었어도 고요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을 테지만.

쪽잠에서 반쯤 깬 상태였지만 상대의 손에 걸린 열쇠고리는 눈에 계속 들어왔다. 저걸 걸어준 게 본인이었으니까. 물론 열쇠에 고리를 걸었다고 해서 열쇠가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크로니의 눈에 발견되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체육관 계단 손잡이라던가, 남의 집 현관문 열쇠 접시 위 라던가. 당연히 남의 집에서 "남"은 크로니였다.


학년이 바뀌어도 계속된 도서관에서의 만남은 일상을 넘어 두사람의 습관이었다. 언제 생겼는지 모를 피부 위의 스크래치처럼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는, 유래도 기억나지 않게 스며든 무의식이었다. 종례 후 바로 집에 갔다가 혀 끝에 자연스럽게 붙은 상대의 이름을 곱씹다 기억해내곤 우체국에서 택배를 찾듯 도서관에서 서로를 주워온 적이 15번, 몇번이고 엇갈리다 못해 결국 서로의 집 앞에서 마주친 적이 7번. 서로를 믿었음에 안주했던 것이다.

시간이 계속해 흐르듯 기다림도 자연스레 따라 흘렀다.


안도는 착각, 익숙함은 환상, 그리고 기다림은 죄악이었다. 그래, 시간은 죄악이었다.

"졸업 안 하면 안 돼?"

타이까지 맞춰 입은 교복에 패딩, 거기에 커다란 꽃다발까지 - 반납해버린 열쇠에 이젠 돌아올 수 없을 도서관에는 두 사람만이 서 있었다. 3년의 습관은 도서관 가장 안쪽 창문틀의 잠금장치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채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반만 열린 창문에 몸을 끼우고 걸터앉아있던 크로니가 뜬금없는 질문에 휴대폰에서 고개를 들어 상대와 눈을 맞췄다.

헛웃음인지 한숨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작은 숨이 내쉬어지곤

"누가 보면 너는 졸업 안 하는 줄 알겠어."

라고, 크로니는 대답했다.


무메이는 3년의 습관을 지우는 게 두려웠다. 두 사람의 관계에 이름 붙이기가 무서워 무시해 왔던 지난 3년이 애석하게 느껴지도록 고등학교는 영원하지 않았다. 유치원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대학교를 너머 미래에 서로 각자 가정을 꾸리게 된다 해도 계속해서 함께 하자는 말은 어린아이의 투정이었을 뿐이니까.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두 사람이 더 잘 알고 있었다.

평생 옆에 두지 못할 거면 영원히 고등학생에 머무르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서로 미래에 가지게 될 직업이 고등학생이 될 뿐이고 나중에 같이 살기로 한 집이 도서관이 될 뿐이었다. 무메이는 안될 것 같은 미래도 이루어내기 위해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자신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자신감보단 본인이 그렇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인지함에서 나오는 확신이었다.

"계속 같이 있어 주지 않을 거잖아."

무메이의 한마디는 투정으로 감춘 협박과 비슷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크로니가 모를 리 없었으니 3년 그리고 졸업식까지 무메이의 손안에 놀아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딱 하나 크로니가 그 시간 동안 실패한 것이 있다면, 사랑하지 않을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이었다.


"반지는 이런 것도 예쁘겠다."

"반지 사려고?"

겨울이 다가오는 듯 빨리 지는 태양이 교실 안을 주황빛으로 비추는 시간이었다. 평소라면 같은 두 사람이 도서관에서 함께였겠지만 아무리 제멋대로인 두 사람도 공사 중이라는 팻말과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잠금장치 뒤를 넘어가는 건 불가능했다. 

"아니, 우리 약혼반지."

바닥에서 대충 부러진 분필을 주워들어 칠판에 낙서를 그리던 크로니의 손이 삐끗-하더니 이내 멈췄다. 

"약혼... 반지?"

"크로니는 프러포즈 안 해줄 것 같아서 내가 하려고 했지."

어색한 침묵이 교실을 매웠다. 놀란 마음에 뒤를 돌아본 크로니의 두 눈과 천천히 보고 있던 잡지에서 눈을 떼 올려다본 무메이의 눈이 마주했다. 

"왜? 크로니가 할래?"

"아니, 아니, 아니. 잠깐만. 잠깐만, 약혼은 또 무슨 소리야."

"안 해? 우리 평생 같이 있기로 했잖아."

고등학교 2학년. 18살.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크로니가 배운 것이 있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무메이의 생각은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 아? 근데... 그런 게 꼭 필요할까? 약혼... 약혼 같은 거 안 해도 같이 있을 수 있고..." 

원래도 빠져들어 갈 것 같은 깊은 눈과 함께 해독하기 어려운 표정의 무메이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더욱더 눈을 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아, 아니 하지 말자는 건 아니고. 원하면... 하자, 그래, 응." 

무메이의 눈이 다시 보고 있던 잡지와 휴대폰에 옮겨졌다. 


크로니의 엄지가 왼손 약지를 어루만졌다. 오래된 눌린 자국에 하얗게 변해버린 피부는 적응하지 못할 느낌이었다. 졸업하고 5년, 고등학교를 떠난 학생들은 각자의 길로 나아가 적응하고 있는 과정의 시점. 잠시 빼놓았던 반지를 다시 왼손 약지에 끼면 마치 평생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제 자리를 찾아간다. 드레스룸의 문을 통통- 울리고 문 뒤에서 크로니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왜?"

"아니, 다 갈아입었나 해서."

문을 마저 두드리다 열리는 바람에 공중에 멈춘 무메이의 왼손에는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있었다. 

"응, 다 됐어."

두 사람이 거실로 나가 크로니가 소파에 앉으면, 자석이 서로 이끌리듯 무메이가 자연스레 크로니 옆에 자리 잡는다. 서로 몸이 겹치지 않기엔 너무 가까이 달라붙은 두 사람이었지만 오랜 시간의 습관 속, 두 사람은 이미 가장 편한 자세로 함께 있는 법을 알고 있었다. 각자의 한쪽 다리도, 팔도 엉켜버렸지만 그 속에서 서로에게 느끼는 습관 속 편안함을 찾은 지 오래였다. 

약혼 반지는 화려하고 의미 있게, 결혼반지는 무난하고 빼지 않을 수 있게 맞춘다고 했던가. 그럼 지금 각자 왼손 약지에 끼워진 무난하고 오래 끼고 있기에 편한 반지는 둘 중 어디에 속하는 걸까. 결혼과 약혼의 순서가 바뀌어도 될까? 

"우리 그러고 보니까 약혼도 안 했잖아."

"응?"

"반지, 오래 보고 있길래."

소름끼치도록 머릿속 생각을 간파당한 크로니가 무메이를 놀란 두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언제나 그랬듯, 뭐라 답하고 싶은 마음에 입이 간지러웠지만 정작 언어는 입술을 벗어나진 못했다. 

"내가 해준다고 하긴 했었지."

무덤덤하게 말을 뱉어낸 무메이는 다시 크로니에게 반쯤 기대 누운 자세로 돌아가 휴대폰을 스크롤 해 내렸다. 그래, 그랬지. '크로니는 너무 완벽하니까.'라는 우스갯소리와 함께 약혼 프러포즈는 무메이의 몫으로 남겨졌었다. 


안도는 착각, 익숙함은 환상, 그리고 기다림과 시간은 죄악. 계속 같이 있어 주지 않을 거라면 둘만이 이곳에 남아버리자는 도서관에서의 약속이 무색하게 졸업 후 두 사람은 말로 정의되지 않은 관계를 이어 나갔다. 각자의 공부를, 각자의 취미를 이어 나가다, 어쩌다 맞은 우연에 응답해 서로 거주지를 가까운 곳에 있게 되고, 우연을 살짝 조정한 두 사람은 한집에 옮겨 들었다. 

이 순간까지도 언어로 정의하지 않은 두 사람의 관계는 시간이 갈수록 정의하지 못한 관계로 변하고 있었다. 어느 개념으로 정의해버리면 형상화될까 봐, 형상이 생기면 깨뜨려버릴까 봐. 

"이대로도 좋을지도 몰라."

"뭐 불편한 거 있었어?"

"아니."

"뭐야, 이상해."

"우리가 그렇지 뭐." 

너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을까, 우리의 관계에 대한 일방적인 대답이었을까.

아무튼 내가 선택한, 네가 선택한 무지함이었다. 너와 내가 선택한 안도였고, 네가 선택하게 만든 나의 환상이었다. 그것뿐이면 되지 않았을까. 

"우리 신혼여행 갈까?"

"여행 가고 싶어?"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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