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my melancolie
Jamais Vu 에필로그
- 있잖아,
- 너네 무슨 사이야?
새벽 세시, 마지막 청소가 언제였더라 기억도 나지 않는 기숙사 바닥에는 맥주캔이 나뒹굴었다. 발뒤꿈치를 툭- 하고 치는 맥주캔을 무심하게 밟아버린 그의 손에는 또 다른 맥주캔 두 개가 들려있었다. 애인을 그리워하는 바람에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술로 밤을 지새우는 드라마 속 주인공들을 비웃었던 게 바로 엊그제 였는데.
to my melancolie
너는 감정을 완성해 나의 우울을 완성하더니,
나의 삶까지 완성했다.
"뭐야, 갑자기 얘 왜 이래."
"너 나가자마자 네 이름 울부짖더니 쓰러져서 지금 이 꼴."
새벽의 찬 바람 탓에 몸을 한번 크게 떤 아이리스가 두 손 가득 들린 간식과 술을 내려놓으며 거실 바닥에 누워있는 베이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바닥에 닿은 캔의 날카로운 소리가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던 베이의 정신을 깨웠는지, 울며 뭐라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커지더니 아직 자리에 다 앉지도 못한 아이리스의 다리에 엉겨 붙었다.
"완전 이별 PTSD."
"아니... 우리 최근엔 안 헤어졌다니깐..."
사회의 입장에서 정상적인 커플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주기적으로 헤어지는 게 디폴트인 연인 사이가 어디 있겠느냐고. 권태기를 흘려보내기 위해 시간을 갖는 것도 아니고, 클리셰인 툭하면 집 나가는 것 대신 헤어지는 것이었다. 일단 한쪽이 이별을 고하면 며칠 뒤에 둘 중 하나는 선 연락이 오니까.
엉겨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베이와 제발 자리에 앉게 좀 해달라는 아이리스의 티격태격을 지켜보던 크로니는 헛웃음만 내뱉었다. 고등학교 4년에 대학교 2년째. 총합 6년 동안 크로니는 진지하게 이 둘을 연애 문제 해결 프로그램이라던가 신청서라도 넣어보려다 행복하면 될 거라는 생각으로 보류했던 게 올해만 45번째였다. 초신성이고 뭐고, 완전 새로 보는 타입의 인간관계를 창조해 온 두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고민은... 딱히 이젠 하지 않는 것 같다. 아마 대학교 2학년 때 쯤 멈췄으려나. 어제는 다정한 연인에 다음날엔 대차게 싸워서 인사도 안 하다가. 일주일 뒤의 SNS에는 커플 여행을 간 사진이 올라온 모습에 당황해하던 사람들의 반응이 시끄러울 때는 언제였는지, 바쁜 대학 신입생의 생활에 베이와 아이리스를 둘러싼 이슈는 하나둘 사그라들었다.
12학년이 어떻게 지나갔더라. 연인이라는 이름을 붙인 관계가 되었음에도 주어진 상황이 도움이 되진 못했다. 절반은 대학 입시에 바빴고, 절반은 대학 발표에 바빴다. 같이 넣어본 대학의 결과 발표날 저녁 6시, 대학에서 날아온 이메일을 동시에 열면 콘페티가 터지는 효과와 학과장의 손글씨로 축하를 표하는 편지가 눈에 들어와, 해가 지고 있음에 주황빛으로 물든 창가를 등지고 기쁨에 꽉 껴안았다는 것은 기억한다.
5월에 대학에 입학 의사를 전달한 후로는 졸업 준비로 바빴었다. 졸업하기 전에 가장 큰 이벤트가 뭐가 있었더라.
프롬 무도회.
지나가는 교실 복도마다 공개적으로 파트너 신청을 하는 학생과 그를 구경하고 박수쳐주는 이들로 붐볐다. 사랑이 이루어지고 모두가 그 장면을 축하하는 정말 아름다운 장면이었지만 다음 수업까지 5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버스도 타지 못한 베이에겐 아니었다. 공개 파트너 신청을 하나 겨우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달리고 있으면 멀리서 너무나 익숙한 자홍색 빛깔의 머리카락이 바람결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베이! 있잖아,"
"아이리스! 왜 여기 있어? 아— 아냐, 나 지금 대차게 늦었으니까-"
반가운 얼굴을 본 건 좋았지만 수업 출석은 별개의 문제였다. 늦었다고 말했으니까 아이리스도 이해해주겠지. 정류장으로 뛰어가는 등 뒤로 주변 학생들의 웅성거림이 수상할 만큼 시끄러웠지만, 학교라는 곳은 언제나 그런 곳이었기에.
이마에 흐르는 땀을 대충 닦고 자리에 앉으면 10명 쯤 되는 교실의 모두가 베이를 쳐다보았다. 누구는 얼굴에 웃음을, 누구는 슬픔을. -- 누가 봐도 뭔가 일이 있다는 듯한 분위기였다. 기분 탓이겠지, 하고 넘기며 앞에 앉은 학생에게 수업에 관련된 내용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과제의 진행도 라던가, 어느 정도 얘기하던 중 계속 눈치만 보던 옆자리의 학생이 휴대폰을 들이밀며 베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파트너 신청은 왜 찬 거야?"
...
"뭐?"
"그때 나 진짜 상처받았어."
같은 대학에 들어온 지 2년. 아이리스는 그날의 사건을 재미있는 대화 주제라며 만나는 사람마다 소개하고 다녔다. 시간표, 점심시간, 동아리까지 아이리스와 거의 비슷하게 맞춘 탓에 떨어지지도 못한 채 옆자리에 앉아 모든 부끄러움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은 벨즈.
나머지 사건은 어떻게 흘러갔더라. 상황 파악을 끝낸 베이는 수업 내도록 손톱을 물어뜯으며 집중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기다렸고 선생님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가방을 대충 챙긴 채 아이리스가 있을 만한 곳으로 뛰어갔다. 학교의 퀸카를 완전 시크하게 차버린 학생회장. 맞는 부분은 한 군데도 없었지만 학교의 소문은 이런 식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오후 3시 40분, 아이리스는 수업이 없을 시간이었으니, 아마 아직 기숙사에 있었을 것이다. 주변 학생들의 질문을 애써 예의 바르게 대답 - 거절에 더 가까웠다 - 해 준 뒤 기숙사 로비로 도착했을 때 눈에 바로 들어온 건 가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이리스였다.
우와, 가식.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건 그 옆에 앉아있는 이들이 진심으로 아이리스를 위로해주고 있었던 것과 아마 일이 이렇게까지 된 것에 베이 본인의 책임도 아마?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뛰어오는 바람에 숨을 고르는 베이를 보자마자 주체하지 못한 입꼬리를 올리는 아이리스를 보면 진짜, 정말, 100% 가식 울음이었다.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든 건 내가 아니라 본인이었잖아.
그 후의 이야기는 누가 들어도 별로 즐겁지 않을 이야기. 아마 아직도 이 사건을 가지고 베이를 놀리기 바쁜 아이리스에게만 즐거울 이야기였다. 오해를 풀려고 이유를 설명해봐도 남들 귀엔 핑곗거리로 들릴 뿐이었다. 휴대폰에 저장해둔 시간표를 모두에게 공개하고 아이리스에게 공개적으로 파트너 신청을 받아준 후에야 둘은 학교의 가십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애초에 아이리스는 본인이 가십거리의 주인공이 되길 원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싱글벙글한 표정의 아이리스를 방까지 데려다준 뒤 베이는—
그렇게 첫 이별을 고했다.
- 있잖아,
- 너네 무슨 사이야?
본인이 이별을 고하고 문을 쾅 닫고 나왔으면서, 베이가 가장 첫 번째로 한 일은 너무 많이 울어 엉망이 된 표정으로 다른 친구들을 찾은 것이었다. 언제나처럼 크로니의 방문을 열면 무메이와 파우나도 함께 있었으며, 담요 속에 함께 앉아 넷플릭스를 보던 셋 사이에 앉아버렸다. 연인이라는 이름을 붙인 관계는 깨져버렸지만 프롬 파트너는 깨지지 않았다. 전통대로 같은 디자인의 꽃 액세서리를 나누었으며, 베이는 동급생의 승용차까지 빌려 가며 아이리스를 고급스러운 저녁 식사에 초대했고, 밤 9시가 되었을까, 축제의 시작 쯤 학교로 복귀했다. 어색함은 느끼지 못했다, 즐거웠으니까. 함께 할 수 있음에 즐거웠고, 같이 다니는 곳이 즐거웠으며, 입을 열며 나누는 대화 주제들이 즐거웠다. 무엇보다도, 베이는 고등학교의 마지막 무도회를 우는 얼굴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너네 무슨 사이야?"
말리는 크로니와 파우나를 뒤로 한 채 궁금증을 참지 못한 무메이가 입을 열어 물어보았다. 이상할 만도 하지, 베이는 관계를 끊은 후, 셋에게 위로를 받으며 4일 내내 울다가, 5일 차엔 갑자기 드레스를 사 오더니, 나머지 이틀은 메이크업을 연습하는 데에 다 소비했다. 그리고 보이는 표정은 세상에서 가장 환한 얼굴로 웃고 있는, 누가 봐도 무도회의 주인공. 댄스플로어를 비추는 조명들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모두 하코스 벨즈를 향해있는 듯했다. 이 효과에는 그의 파트너 아이리스도 한몫했는데, 다홍빛 머리카락이 베이의 어깨선에 흐르면 모두가 둘의 조화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무메이의 질문에 아이리스는 고민 없이 대답했다. 파트너이자, 사랑하는 사이라고. 평소였다면 연인이라고 답했겠지만, 둘은 더 이상 연인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이는, 맞았음에도.
아이리스는 사랑받는 것에 익숙했다. 사랑은 언제나 그를 따라오는 명사였고, 동사였으며, 그를 설명하는 형용사가 되어버리기도 했다. 사랑. 사랑은 아이리스이자 아이리스는 사랑이었다. 이걸 눈치챘을 때 쯤의 베이는, 그때는 답하지 못했던 문자에 답할 수 있었다.
- 응. 불안해.
- 불안했어.
사랑 그 자체인 사람을 이름 붙인 관계가 아니라면 어떻게 붙잡을 수 있을까. 겪어보지 못한 사람이 베이를 욕할 수 있을까. 뱀에 홀려 선악과를 먹은 이브에게 우리가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 정당한 걸까. 그렇다고 우리가 역으로 사랑을 욕할 수 있을까.
프롬이 끝나고, 졸업식 마저 끝난 지 2개월. 대학 입학식을 앞두고 시간표를 짜러 만난 둘의 자리에서 베이는 아이리스에게 그의 불안함을 대답했다. 그런데도 아이리스와 베이는 다시 두 사이를 연인이라 이름 붙였다. 딱히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자주 가던 카페에 커플 세트가 출시되었던 것이 시작이었다. 그다음 이별은 아마 타학생과 대화하던 베이의 표정이 너무 밝아 보인 탓에 일방적인 질투로 이루어졌다. 오해가 다 풀린 후에도 변화 없던 두사람은 이런 거로 헤어지는 거 너무 바보 같지 않아? 라는 베이의 무심한 한마디에 다시 관계에 이름을 붙였다.
누군가는 둘을 보며, 절대 서로 사랑할 수 없는 성격들이라고 비웃을 지도 모른다. 역시, 함께하기에 참 안 맞는 구석이 많은 연애 타입이었다. 그렇지만, 몇십번, 몇백번의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이 두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까.
"하코스 벨즈."
교수님도 부르지 않는 풀네임이 들리자 등골이 오싹해지며 베이는 뒤를 돌아보았다.
"뭐, 뭐야..."
떨면서 시선을 올리자 정장 차림으로 아이리스가 웃음을 참지 못한 채 베이를 향해 서 있었다.
"나, 뭐, 잘못했어? 하코스 벨즈? 아니 그보다, 정장?"
어디서부터 질문을 시작할지 몰랐던 베이의 두뇌가 터질듯하며 입에서 질문이 쏟아져나왔다. 그 장면에 아이리스는 결국 겨우 참던 웃음도 전부 쏟아내 버리곤 흐르는 눈물을 다소 과장된 모션으로 닦아내더니 베이를 진지하게 쳐다보았다.
대충 사건의 시작은 아이리스가 몰아보던 드라마. 주인공이 기념일이라며 호화스러운 호텔에서 꽃과 비싼 선물을 전해주며 키스를 하는 장면이었다. 둘이 함께 보던 드라마였기에, 베이도 알고 있는 장면이었다. 차이점이었다면, 베이는 드라마 속 주인공과 상대 주인공의 사랑에 몰입해있었다면 아이리스는 해보고 싶다는 도전 의식이 앞서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기념일을 언제로 잡아야 하는지도 문제였고 애초에 정식으로 하루 날을 잡기도 굉장히 애매했다.
"그래서 고른게... 프롬?"
"그, 딱히 날짜 생각나는 날이... 그때 밖에 없기도 하고..."
억지스러운 대답이었지만 이것이야말로 둘을 너무나도 잘 표현했다. 기념일도, 비싼 선물도, 호텔도, 꽃다발도 준비하지 않아 없었지만, 키스와 서로는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이 두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까. 그야, 너는 감정을 완성해 나의 우울을 완성하더니, 나의 삶까지 완성했으니. 또다시 무수한 반복을 거쳐 서로의 삶을 채워나갈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관계에 다시 한번 이름을 붙이자,
- 나의 멜랑콜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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