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mais Vu
- 있잖아
- 아이리스
- 우리 대체 무슨 사이야?
3년간 줄다리기처럼 갈피를 못 잡던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같이 찍은 여름방학 사진 한장마저 없이 학년이 바뀜과 동시에 끝나버렸다. 하루 열다섯번은 다시 눌러보던, 결국 답장하지 못한 채 읽고 남겨둔 상대의 마지막 메시지는 새 학기 전날 밤 지워버렸다. 그날 밤에 학교 주변 공터에서 불꽃놀이 축제가 있었다던가. 화약이 터지는 소리를 귀에 담았다. 감정도, 사랑도, 심장도 전부. 전부 저렇게 터져버렸으면 좋겠다.
- 왜,
- 불안해?
Jamais Vu
"나 이제 진짜 공부만 한다."
12학년의 첫날, 새 학기의 설렘보다는 이미 3년이나 봐온 지긋지긋한 얼굴들을 이제 일 년만 더 참으면 된다는 생각이 가득한 시기.
"야, 다음 달이 홈커밍이야."
"아니 나 공부한다니까."
"안 가?"
안그래도 두 명이 겨우 사는 기숙사 방에, 그것도 혼자 자라고 만들어둔 침대 위에 네명이 올라와 대충 누워 각자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할 말만 하는, 지난 3년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는 평범한 고등학생들의 모습. 단호하게 들어온 질문을 듣던 베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미쳤나. 당연히 가야지."
그래, 네가 안 가면 누가 가냐- 잠깐의 침묵이 흘렀지만 곧 다가오는 홈커밍 파티는 여고생 4명의 대화를 시작하기에 충분한 주제였다. 다음 주에 드레스 사러 갈까? 신발은? 메이크업은 네가 해줄래?
"여기 파트너 없는 사람."
침대벽에 기대앉아있던 베이의 눈을 세 명분의 시선이 올려다 마주쳤다. 크로니, 파우나, 무메이. 십몇년을 친구로서 같이 살다시피 한 애들이었지만 아직도 베이는 이들의 관계를 해석하지 못했다. 친구 이상, 연인 완전 이상. 가족? 이상. 지난 3년간 셋이서 프롬 꽃을 나눠달고 저녁 데이트도 같이 한 뒤, 댄스파티를 위해 학교 강당으로 복귀한 세 명의 립스틱이 나란히 번져있는 꼴을 직접 봐온 입장에서 물어보기 완전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셋 중 한명이라도 다른 파트너가 생긴다면 - 애초에 셋은 남이 절대 낄 수 없는 관계였다 - 아예 안 가고 말 애들이었으니.
"미친. 나만 없네."
지난 3년간 하코스 벨즈의 홈커밍과 프롬 파트너는 변한적이 없었다. 6번의 학생 무도회의 하이라이트는 매년 표를 휩쓰는 학생회장이 학교의 유명 인사 아이리스의 파트너 신청을 받아줬다는 뉴스였다. 제비뽑기로 뽑힌 과학실 파트너로 만나 금방 연락처를 공유하고 새벽 세 시까지 웃긴 영상에 쓸데없는 잡담을 하며 가까워진 사이는 금방 친구 이상의 사이가 되었다.
"친구 이상 애인 미만이지, 뭐."
우리 사이는 뭘까, 라는 베이의 뜬금없는 질문에, 무메이에게 손톱을 칠해주던 크로니가 무뚝뚝하게 답했다.
"근데, 굳이 애인이 되어야 하나? 그냥 네가 확인 받으려고 고백하고 싶은 거 아니— 아, 너 때문에 번졌잖아."
별 걸 다 내 탓을 해라... 조용히 중얼거린 베이는 갑자기 밀려오는 억울함과 연애질하는 커플 - 둘, 아니 셋은 맨날 부정했지만 못 알아챌 리가 있나 - 들이 꼴 보기 싫어짐에 탁자에 놓여있던 화장 솜을 크로니 얼굴에 던지곤 방을 뛰쳐나갔다. 놀라서 웬 괴상한 고함을 지르는 크로니와 무메이의 웃음소리는 방문 뒤에 두고 기숙사 복도를 끝까지 달렸다. 운 좋게 1인실에 걸린 아이리스의 방은 가장 끝, 그것도 길게 늘어진 복도에서 한번 꺾어 들어가야만 보이는 나름 숨은 방이었다. 이렇게나 우중충한 방의 위치 선정에도, 역시 학교의 유명인은 다르다고- 문 앞과 그 복도, 문고리까지 어디 하나 빠짐없이 장신구로, 선물로, 팬레터로 꾸며져 있었다.
아이리스가 받은 간식의 절반은 내가 먹었을 텐데-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며 뿌듯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다 말고 눈앞의 문을 크게 두드렸다. 누구냐고 물어보는 목소리에 대충 웃긴 목소리로 답하면 안에선 발소리가 잠깐 들리더니 문이 언제 닫혀있었냐는 듯 벌컥 열린다.
"베이!"
꽤나 나는 키 차이는 문제 되지 않는다는 듯 아이리스의 품에 뛰어 안긴 베이는 아이리스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나서야 한껏 들뜬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아차- 분명 방금까지 두사람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우울해했는데. 얼굴을 보자마자 몰아치는 감정은 그 모든 것이 쓸데없었다는 것처럼 작용했다. 화약이 터지는 소리에 귀가 먹먹해지고 주변의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는 것 처럼. 귀도 호흡도 심장박동도, 모든 게 터져버린 것 같아.
"키스해도 돼?"
훅 들어온 질문에 아직 안긴 채로 멈춘 베이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두 손으로 아이리스의 입술을 막았다. 나 거절당한 거야? 라는 질문을 하는 듯한 눈빛으로 아이리스는 베이를 쳐다보다 둘 다 동시에 웃음이 터져버리며 그대로 방바닥의 카펫에 넘어지듯 누웠다. 푹신한 털로 이어진 카펫에 머리와 무릎을 엉망진창으로 부딪혀도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으니, 둘만의 공간에 그 무엇도 방해 받아 엇갈리지 않은 채, 흘러가는 시간 따위에도 방해받지 않은 채 입을 맞췄다.
아, 또다.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진 지 오래라 가로등 하나 없는 기숙사에서의 풍경은 말 그대로 암흑이었다. 하교 후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침대에서 자는 아이리스의 얼굴을 바라보면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베이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또다, 아이리스에게 부족함 없이, 넘치도록 감정을 나눠 받고 있는데. 또다시 베이는 심리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래 맞아, 고백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 보통 자연스럽게 흘러가서 알아서 발전해가는 게 사랑이니까. 아마, 아이리스도 그런 성격인 거겠지. 굳이 단어로, 사회가 만든 관계를 지칭하는 단어로 속박받지 않는 사람인 거겠지. 근데, 근데 베이는 이름 없는 관계를 언제 바닥날지 모르는 사랑만으로 유지해갈 자신이 없었다.
아니야 그래도,
이번 한번만 더 눈감고 지나가기로 하자.
이번 한번만 더 심장을 터뜨려서 모른 채 지나가자.
"아 대박, 좋은 생각났어. 나 애인 한명만 빌려줘."
"애인 아니라니까. 아 쫌, 발로 그만 좀 찔러."
"애인인지 친구인지 아무튼! 응? 파우나? 아님, 무메이? 나 정도면 괜찮지 않아? 왜 이렇게 욕심쟁이 들이야, 두 명은 많지 않아??"
"욕심쟁이라니, 여자의 자존심이야. 그리고 빌려달라니, 진짜 쓰레기 전 애인 같은 발언이다, 너."
아아악—! 고함을 이불 속에 지르고 한숨을 끝없이 내뱉던 베이가 이불에 숨이 막힐 때 쯤 급하게 고개를 들고는 우는 소리를 멈추곤 입을 열었다.
"나 진짜 혼자 가기 싫은데."
"우리 셋이랑 같이 갈래?"
"아니. 진짜 싫어. 너희끼리 애인 짓 하는 걸 혼자 서서 보고 있으라는 거냐고."
웃음이 터진 방에서 혼자 웃을 수 없었던 베이는 삐죽 나온 입술로 투덜거리다가 짜증나 다 나가버려! 소리 치다 침대에 풀썩 누워버렸다. 애초에 크로니 방이었으니, 나가야 할 사람은 본인이었지만.
투덜거려도 소용없다는 걸 안 베이가 휴대폰을 열어 이미 너무 많이 새로고침을 해버려 더 이상 업데이트 되지 않는 SNS 피드만 쳐다봤다. 한 5분 쯤 쳐다봤을까, 새 게시글 알림이 울리며 정사각형으로 잘린 사진이 베이의 주목을 빼앗았다. 평범한 파티의 사진. 왼편에는 아이리스가, 그 옆은 누군지 모르겠는 다른 학생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부러움 - 아니, 부러움 같은 건 느끼지 않았다. 자존심 상하잖아. 질투 - 내가 질투를 할 위치이던가? 누가 나한테 질투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줬더라? 속상함 - 왜 속상하지? 부러움과 질투, 속상함의 세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건 끔찍했다. 더 끔찍한 것은 이 세 감정을 느낌으로써 쌓이는 죄책감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11학년 마지막 날 3년간 쌓인 외로움을 담아 보낸 메시지.
- 있잖아
- 아이리스
- 우리 대체 무슨 사이야?
3분도 지나지 않아 와버린 답장.
- 왜,
- 불안해?
이럴 줄 알았으면 평생 읽지 말 걸 그랬다. 3개월의 여름방학을 우울하게만 지내느라 다 망쳐버리고 오는 연락을 다 무시하다 12학년의 첫날, 여름의 더위에 취해 지워버린 탓에 더 이상 읽을 수도 없었지만. 통화기록도, 문자도 전부 지워버렸지만 아이리스의 SNS 계정들과 전화번호는 차마 지우지 못했다. 이대로 휴대폰마저 터져버린다면 좋을 텐데.
작게 누군가가 방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한 노래가 끝나고 다음 노래로 넘어가는 사이의 침묵 구간이 아니었다면 헤드폰 너머로 작게 들린 노크 소리를 놓쳐버릴 뻔했다. 어차피 올 사람은 몇 없으니까- 라는 생각에 대충 알아서 문을 열라며 대답하면 문 너머의 상대는 머뭇거리고만 있는 듯 문고리를 잡았다 놓았다.
뭐야, 누구야? 라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문이 열리고 검붉은 색의 머리카락이 시선에 들어왔다.
"창문으로 뛰어내릴까..."
큰소리로 내뱉어버린 나름 진지했던 고민에 문을 열고 들어온 상대는 살짝 흠칫하는 듯했지만 애써 웃음을 비추었다.
"시간... 돼?"
"안 된다고 하면, 나갈 거야?"
"... 진심이면 나갈게."
3년간 봐왔지만 학교 유명 인사의 처음 보는 다운된 모습에 차마 내쫓지는 못했다. 통화기록도, 문자도 전부 없애버렸지만 마지막 단계인 차단은 3일 내도록 고민하더니 결국 못해버린 것처럼.
"문자... 때문이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유치한 행동인 걸 알았다. 문자를 받고 제대로 의미를 물어보지도 않은 채 연락을 끊어버린 행동이라던가, 방학 3개월 내도록 우연히 마주쳐도 무시하고 다른 길로 지나갔던 베이의 발걸음이라던가. 그렇지만,
"나도 내가 되게 유치한 거 알아. 그런데, 이게 나야. 그냥 감정만으로는, 행동만으로는 안심할 수가 없어. 안심이라니, 나도 참 웃기지.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닌데 말이야. 우리 사이에 뭔가 있었더라면, 이미 —"
"자, 잠깐 멈춰봐!"
방학 내도록, 아니 3년 내도록 참아왔던 감정이 한 번에 터지며 눈물이 참을 수 없게 흘렀다. 어느 정도 예상했겠지만, 이 정도를 예상하지는 못한 아이리스가 당황한 채 베이를 향해 팔을 뻗으며 그를 말리러 들었다.
우는 와중에도 베이는 말려들지 않겠다는 듯 팔을 내치고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아이리스는 사랑받는 것에 익숙했다. 그와 동시에 사랑하는 것에도 익숙했다. 받은 사랑은 보답한다는 생각으로, 베이와의 관계도 처음은 이 생각이 우선시되었었다. 그러다 언제쯤이었을까, 단순히 보답이 아닌, 그 이상의 감정이 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의 아이리스는, 갈 곳 잃은 어린아이 신세가 되어있었다. 보답하는 게 아닌 사랑은 어떻게 하는 거지?
다소 무례하게 느껴지는 불안해? 라는 답장은 아마 스스로 하려던 질문이 주소를 잘못 찾았던 것이었다. 놓치고 싶지 않은 베이와 계속 틀리는 것 같아 불안한 자신의 사랑법.
불안해? 라는 자신의 질문에 아이리스는 베이의 방문을 여는 것으로 답했다.
웃어야할까 울어야 할까. 원망하고 미워했던 아이리스가, 알고 보니 날 버리고 간 쓰레기 같은 자식이 아니라 나름의 고민을 하던 중이었던 것이다.
그래 역시, 학교의 퀸카가 원래 가장 힘든 포지션이라더니.
이제 어떻게 할까, 둘은 숨김없이 모든 걸 털어놓았고 아직 그전의 관계가 그립다는 것도 인정했다. 둘 사이의 관계에 이름을 붙일 필요성도 잃어버렸다.
원한다면 단어를 붙이자는 아이리스의 말에도 베이는 거절했다. 그따위 단어가 우리를 설명할 수는 없지- 라며 웃어 보였다. 웃음은 잠깐일까, 3년 동안 쌓인 감정은 한 번에 무너져내려, 금방 다시 울음과 불안함으로 바뀌었다.
"...우리 또 분명 헤어지고 말 거야."
갑자기 터진 눈물에 다 망가진 표정으로 아이리스를 내려다보면, 소중한 것을 쓰다듬듯 두손으로 베이의 한손을 감싸 쥔 아이리스는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다시 만나면 돼. 헤어지는 건 또 다른 시작이잖아."
"내가, 내가 또 참지 못하고 헤어지자고 할 거야, 분명. 아니, 또 일방적으로 연락 끊어버릴지 몰라."
"그럼 내가 또, 파트너 신청할게. 지금처럼. 또 고백할게."
"......내년에 대학가잖아."
본인이 생각해도 분위기와 맞지 않는 바보 같은 대답에 눈물 사이로 웃음이 터져버린 베이의 반응에 아이리스도 겨우 첫 웃음을 내뱉었다.
방문을 열 때부터 들고 온 가방에서 상자 두 개를 꺼내 들었다. 하나를 열면 흰색과 붉은 색으로 물든 꽃 브로치가 담겨있었다. 조심스레 손으로 꺼내 든 후 쇄골 아래 옷에 장식한 아이리스는 그 옆에 놓인 다른 상자를 열어 보였다. 비슷한 디자인의 꽃이 엮인 팔찌를 꺼내 들었다.
불꽃놀이가 터지는 것과 별 하나가 터지는 것 중, 사람의 눈에는 전자가 더욱 강렬하게 보일 것이다. 별의 폭발은 뉴스에서나 지나갈 정도의 이야기일 뿐, 딱히 살아가는 데에 변화를 주진 않으니까.
그러니까 화약이 터질 때 나의 심장도 같이 터져버려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심지어 내 자신의 감정도 방해할 수 없는, 저 멀리 나만 아는 우주의 별은, 초신성의 끝은 떨어지는 화약 덩어리가 아닌 아무도 감히 평가할 수 없는 빛으로 비출 테니까.
"벨즈 하코스, 내 파트너가 되어줘."
우리의 초신성은 아마 둘의 생이 끝날 때까지 이어질지도 모른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