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열
감기ㅔ 걸려버린 스이세이와 간병하는 미코.
" 아...큰일 났네. "
멍한 머리를 부여잡은 채 손에 들린 체온계를 멍하니 바라본다.
체온계의 계기판에 표시된 숫자는 38.9.
두 번 세 번을 봐도 틀림없는 고열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생각하지 않아도 그거겠지.
어제 미코와 했던 데이트.
데이트에서 돌아오는 길에 운 없게도 쏟아진 비 때문에, 우산은 커녕 비를 막을 가방조차 없던 우리는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필 집에서도 상당히 먼 거리였던 탓에 바로 씻지도 못하고, 축축한 상태로 집에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집에 들어와 몸을 씻고 잠을 청하기 전 살짝 몸이 으슬으슬한 것을 설마 정말 감기에 걸리겠냐며 애써 무시하며 애써 잠을 청했다.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던가.
오늘 아침, 보란 듯이 독한 감기에 걸려 일어나지도 못하고 골골대고 있는 것이다.
머리가 지끈지끈 울리고, 입으로부터는 기침이 끊이질 않는다.
아아, 어지간히도 독한 놈에게 걸려버렸네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오늘은 별 스케줄도 없는 데다 누군가와 약속을 잡지도 않은 것이 유일한 구원이었다.
아마, 하루 이틀 여유롭게 푹 쉬고 일어나면 금방 나을 것이다.
...별일만 없다면 말이야.
뚜르르르.
그런 결심은 겨우 5초 만에 기계적인 전화 소리에 깨져버리고 말았다.
힘겹게 핸드폰을 집어 들어 발신인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사쿠라 미코의 다섯 글자가 화면에 드러나 있었다.
평소라면 어떻게 놀려줄지를 생각하며 기쁘게 받겠지만, 열 때문에 멍한 머리는 이 앙큼한 불청객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순간 듣지 못한 척 끊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나중에 돌아올 노성에 시달릴 생각을 하면 마냥 그럴 수도 없는 것이었다.
결국 너덧 번의 벨이 울린 후 수락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 여보세요...? "
" 스이 쨩~! 놀러 가자! "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귀를 때리는 활기찬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픽 흘러나왔다.
신기하게도, 이 목소리만 들으면 아픈 것이 마치 거짓말처럼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든다.
목소리에도 마약 같은 종류가 있는 것일까.
" 미안, 오늘은 좀...힘들지도. "
" 에? 스이 쨩 오늘 스케줄 있었어? "
" 그건 아니지만... "
" ....스이 쨩, 어디 아파? "
그 순간, 거짓말을 들켜버린 것처럼 움찔 하고 어깨가 뛰었다.
딱히 아픈 티를 내지도 않았는데, 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걸까.
평소에는 열을 알려줘도 하나를 알 만큼 맹한 주제에, 이상한 곳에서만 날카로운 직감을 발휘하니, 생각할수록 수수께끼다.
" 응...아무래도 감기인 것 같아. 그러니까 오늘은... "
" 간병 갈게! "
"......응? "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느닷없이 내지른 말에 벙쪄있는 와중에, 전화가 그대로 끊겨버리고 말았다.
간병이라니, 제 몸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할 것 같은 아이가 누굴 간병한단 말인가.
만약 찾아온다고 해도 그대로 돌려보내자.
허튼 짓을 하다가 감기가 옮아버리면 안 되니까.
잠시 후, 보지 않아도 알 듯한 의문의 인물이 초인종을 눌렀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현관으로 내려가 인터폰을 엿보자, 미코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코트를 대충 걸친 가벼운 차림으로 양손에 무언가에 의해 가득 채워진 봉투를 들고 있었다.
제대로 단추조차 잠그지 않아 펄럭대는 코트는 그녀가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문을 열어주지 않은 채 가만히 지켜보자, 그녀는 점차 당황하기 시작하더니 허둥지둥 이곳저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설마 문을 따고 들어오기라도 할 셈인 걸까.
그렇게 찾아봐도 화분 밑에 열쇠는 두지 않는 주의인데 말이야.
그렇게 허둥대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즐거웠지만, 슬슬 빨갛게 물들기 시작한 그녀의 콧잔등을 보고는 한 차례 웃음을 흘리고 문을 열어주었다.
" 아, 스이 쨩! 괜찮아? "
" 괜찮은데...왜 온거야? 미코치한테 옮으면 큰일이잖아? "
" 괜찮아! 미코는 감기 걸린 적 없으니까! "
" ...바보는 감기에 안 걸린다더니... "
" 뭔가 말했어? "
" ...아무것도 아닙니다. "
흥 하고 콧방귀를 뀐 미코는 그대로 양손의 봉투를 들고는 부엌으로 직행했다.
안내라도 해줄까 했지만, 환자는 얌전히 누워있으라며 밀어대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말에 따라 침실로 돌아갔다.
뒤에서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려왔지만, 신경을 쓸 수록 머리가 아파질 것 같기에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해보지만, 아래에서 가끔 들려오는 괴성 비슷한 소리에 자꾸만 신경이 쓰여 잠이 오질 않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미코가 들어와서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내 용태를 살피더니 침대의 끝자락에 살짝 걸터앉아서는 내 이마에 작은 손을 가져다 댔다.
이마에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고통으로 살짝 일그러졌던 표정이 부드럽게 펴지는 게 느껴졌다.
그러자 지켜보던 그녀의 얼굴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배어나며, 기분 좋은 감촉은 그대로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렇게 안심감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으려는 찰나, 기분 좋은 감촉이 머리에서 떨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 그럼 미코는 죽이라도 만들어 올 테니까, 졸리면 자도 돼. "
" 아... "
" ? 왜 그래? 스이 쨩 "
" ...머리, "
" 머리가 왜? 많이 아파..? "
" ...더, 쓰다듬어줘. "
마치 그라데이션처럼 화악 밝아지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나는 자신의 발언을 뒤늦게 후회했다.
맙소사, 아이에게 머리를 쓰다듬어달라고 조르는 어른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자신의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후회에 사로잡히지만, 이내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 넘기는 감촉은 그 후회를 삽시간에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바로 몇 십 분 전까지 두통에 시달리던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나는 안심감에 감싸여 눈을 감았다.
한참이 지나, 코를 자극하는 좋은 향기에 무거운 눈꺼풀이 열렸다.
얼마나 잔 걸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탁상시계를 찾고 있으니, 문이 열리며 그녀가 들어왔다.
그 손에는 무언가 가득 든 그릇이 들려있었고, 그것이 죽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 머리는 어때? 안 아파? "
" 응...많이 괜찮아졌어. "
" 다행이네! 자, 아앙! "
밝게 미소 지은 그녀는 이내 죽 그릇을 들더니 한 스푼 떠올려 나에게 내밀었다.
이 녀석, 설마 이걸 전부 먹여줄 셈인가.
거절의 의미로 고개를 젓고 스푼으로 손을 뻗자, 내 손을 탁 하고 쳐내고는 엄한 눈길로 나를 노려보며 스푼을 입가에 밀어댔다.
왜 이런 것에 집착하는가 하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고는 얌전히 입을 벌리자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입안에 스푼을 밀어 넣어주었다.
한 숟갈 입에 넣을 때마다 마치 아이를 다루듯 상냥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볼수록 괜히 얼굴이 뜨거워져서, 괜히 신경질적으로 빼앗듯이 먹어버리고는 시선을 피해버렸다.
" 응, 잘 먹었네! 그럼 미코는 정리하고 올 테니까, 스이 쨩은 쉬고 있어! "
" 아니, 만들어준 것도 미안하니까, 정리는 내가... "
그 순간, 그녀의 어깨가 움찔 하고 떨렸다.
명백하게 굳은 채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이불 속으로 밀어 넣으려는 그녀를 보자, 의구심이 솟구쳐올랐다.
" ...미코치. "
" ㄴ, 넵... "
"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면 봐줄게. "
" ....진짜? "
" 진짜. "
" 그...죽을 만들다 조오금 실수를 해서... "
죄지은 아이처럼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이쪽의 안색을 엿보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 보나 마나 변변찮은 실수겠지만, 오늘은 죽도 얻어먹었으니 관대하게 봐줄까.
그런 생각은 부엌에 들어선 순간 모래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온 바닥에 어그러진 식기들과 식탁이며 싱크대에 범벅이 된 소스와 식재들, 화구 위에 얹어진 냄비에서는 정체 모를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구석의 쓰레기통에는 아마 급하게 썼으리라 짐작되는 레토르트 봉지가 잔뜩 구겨 넣어져 있었다.
뒤에 숨어있는 그녀에게 슬쩍 시선을 주자, 엉거주춤 시선을 피하더니 문 뒤로 숨어버렸다.
어이, 주거 침입범.
" 아, 아니 그게...오랜만에 해보는거라 사알짝 실수해서... "
" 살짝? "
" 아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발 바보털만은!! "
이 앙큼한 덜렁이를 대체 어떻게 해주면 좋을까.
꿀밤을 먹이듯이 손을 치켜올리자, 깜짝 놀라며 눈을 꼭 감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마음같아선 이 머리를 혹으로 덮어주고 싶지만...뭐어, 간병을 해준 건 사실이니까.
그대로 손을 머리에 얹어 퐁퐁 하고 토닥여주자, 살그머니 눈을 뜨고는 이쪽의 눈치를 살폈다.
그 조심스러운 모습에 피식 웃어주자, 그제야 표정이 밝아지며 그대로 가슴에 안겨 왔다.
" 이러면 미코치가 감기에 걸리는데? "
" 그러면 다음에는 스이 쨩이 간병해줘! "
" 네네, 얼마든지. "
" 만세! "
" 엉덩이에 파를 꽂으면 빨리 낫는다던데... "
" 거짓말?! "
그렇게 또 언제나처럼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음꽃을 피운다.
아침까지만 해도 지독하게 시달리던 두통은, 어느샌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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