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이변
- 가상의 내용인 2차 팬픽입니다.
- 3,845 자 단편
"프러포즈 하시나 봐요?"
"아... 네. 오늘 밤에요."
이 주 전 예약해둔 꽃다발을 찾으러 꽃집을 들어가자마자 들은 질문에 무의식적으로 거짓된 답변을 늘여놓았다. 점원이 포장하고 있는 해바라기가 담긴 꽃다발은 프러포즈는 무슨, 고백도 못 해본 사람에게 갈 예정이었다.
오늘 밤에는 프러포즈가 아니라 오랜 친구, 이나의 전시회 개장이 있는 시간이었다. 긴 영생을 살며 본인을 드러내기를 거절하는 성격에 전시회를 도와주는 사람들의 양해를 구해 밤에 열게 된 전시회에 가져갈 꽃다발을, 점원의 멋대로인 추천으로 프러포즈 용 꽃들로만 구성해버린 탓이 컸다. 꼭 성공하시라는 응원을 받으며 꽃집 문을 등으로 열면서 나오는 아메의 손에는 웬만한 행사장에서도 보기 힘들 크기의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겉표면을 두르는 푸른색 위주의 작은 꽃들과 가운데를 향할 수록 노란색의 꽃들이 중심을 채우고 있었다. 우산을 펴기에도 힘들 크기에, 가장 중요하게도 무게가 일반인은 버티기 힘들 수준이었던 탓에 비가 쏟아지는 저녁 여섯 시 퇴근길에서 아메는 택시를 잡을 수 밖에 없었다.
차, 엄청 막힐 텐데. 라며 고민을 하는 와중에 정작 다 젖어버린 괜히 맞춰 입은 정장과 머리카락은 신경 쓸 틈새도 없었다. 오직 늦지 않을까, 하는 고민에 움직이지 않는 차 바닥을 애꿎은 구두코로 누르며 붉은 차 전등 빛들을 맨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빵빵 거리는 소리도 없는 조용한 차도 위, 다섯 시 이십오분을 지나는 회중시계와 주머니 속에는 이미 개장 시간이 지나버린 전시회의 티켓. 밖에는 전혀 줄어들지 않은 세기의 비와 갑작스러운 기상이변에 우산 없이 집으로 뛰어가는 사람들. 지구 온난화에 심해진 기상이변과 감히 기상이변을 탓해보는 얼굴에 홍조.
기상이변
유리
"늦어서 미안!"
중간에 멈춰서서 숨을 고를 틈도 없이 택시에서 문이 열리자마자 뛰어나왔다. 12시 종에 맞춰 계단을 뛰어 내려갔던 신데렐라가 있었다면, 아메는 그렇게 감명 깊은 장면을 연출하는 중은 아니었고, 누가 쫓아오랴 애써 맞춰 신은 구두로 전시회장의 계단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역광에 상대의 얼굴이 잘 안 보인 탓인가, 화났나...? 라는 생각을 한 것이 무심하게 환한 표정으로 아메를 맞이하는 것은 니노마에 이나니스. 필멸자가 감히 따라올 수 없을 그림 실력과 노력의 결과물 - 그녀의 개인 전시회장 - 앞에서 환히 웃는 이나의 모습을 사진, 혹은 그림으로. 한장으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럴만한 실력은 없었기에 심장의 두근거림과 감탄함만으로 넘겼다. 매번 긴 시간의 노력의 결과라며 겸손의 대답을 내놓는 이나였지만 감히 그 누가 불멸의 힘을 얻었더래도 그녀의 노력을 깎아내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걸 가장 잘 알고 있는 상대가 바로, 불멸을 주어지지 못한 왓슨 아멜리아.
"괜찮아? 다 젖었는 걸. 무리해서 올 필요 없대도."
"첫날이잖아. 꼭 전해주고 싶었는걸."
전시회장 뒤편으로 들어가면 있는 개인 작업실에 비치되어있던 손수건으로 대충 얼굴만 닦아내고 꽃다발을 이나에게 건넸다. 셔츠를 포기하고 벗어던진 정장 재킷으로 최대한 가리고 온 덕인지 꽃은 여전히 싱싱한 채로 보존되어있었다. 비 냄새가 섞이긴 했지만, 꽃다발에서 은은하게 묻어나오는 꽃향기도 함께였다.
"...라서 노란색인 거야?"
"응? 미안, 못 들었어."
"아메 머리카락 색이라 노란색 꽃인 거냐고."
한 건 했다는 표정으로 꽃다발을 들지 않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음을 겨우 참는 이나의 모습은 아메의 눈에 들어오지 않고 갑자기 훅 들어와 얼떨결에 받아버린 질문에 혼란스러운 감정만 남아버렸다. 무슨 의미로 물어본 거야? 차마 되물어보지 못한 채,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차마 하고 싶은 대답을 찾지 못한 채.
"ㄴ, 네 눈 색이잖아."
"눈?"
"아,"
맞다, 이나의 눈 색은 노란색이 아니었다. 뭐야! 누구랑 헷갈린 거야?! 겨우 웃음을 참으며 마치 애인의 불륜 현장을 발견한 것처럼 반응하는 이나의 모습에 200배 정도 더 당황한 채 아메는 말을 더듬을 수 밖에 없었다. 아니, 그, 그, 너 주변에 있는 것들 있잖아, 그 노란색. 그거. 응, 그거. 진짜였다. 이번에는 말이 잘못 나와 거짓말로 얼버무리는 게 아니라 진짜 그 이유로 노란 꽃을 산 것이었다. 물론 본인의 머리카락이 노란색인 이유도 있었지만 차마 이나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뭐야~ 누구랑 바람난 거야, 참."
놀리는게 질리지도 않는지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으로 꽃잎을 매만지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잃지 않은 채 아메를 바라보는 이나의 반대편에는 얼굴이 붉어질 대로 붉어진 아메가 서 있었다. 이 정도 홍조는 차마 기상이변의 탓도 하지 못한 채 그냥 부끄러운 사람이 될 뿐이었다.
애써 말을 돌려보려 전시회에 주인공이 안 가 있어도 돼? 질문을 던졌지만 이미 중요한 사람들은 다 만나고 와서 괜찮다는 대답이 돌아오는 바람에 다시 상태는 원점이었다. 바람은 무슨, 불륜은 무슨, 고백도 못 해봤는데.
또다시 애꿎은 구두코만 바닥에 짓누르고 있으면 작게 아메, 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 올린다. 조금만 더 빨리 고개를 들었더라면 부딪히고도 남았을 거리까지 다가온 이나의 모습에 놀라 앉아있던 간이 의자에서 일어나면 균형을 잡지 못하고 의자 등받이 쪽으로 넘어가 버리는 나무 의자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ㅇ, 왜?"
"아메, 있잖아."
"으응, 아하하... 근데 왜, 왜 이렇게 가까이 다가와...."
신화생물사제라는 게 이런 말이었나.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를 마주한 것처럼 발이 앞으로 떨어지지 않고 아메는 계속된 뒷걸음질에 결국 액자가 여러 개 걸린 벽에 등을 부딪히고야 말았다. 얼마나 긴장된 몸으로 벽과 부딪혔는지, 머리 위의 액자가 떨어지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
"아니 그냥, 내 눈 다시 보라고."
똑똑히 기억해둬.
"아메, 괜찮아?"
"..."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 소리를 뒤따르는 건 방 안으로 들어온 이나와 그녀의 손에 들린 찻잔 두 개. 2인이 눕고도 남는 큰 침대의 안쪽 자리에 누운 탓에 휴대폰이 놓인 작은 책상까지는 손을 뻗어야 했기에 아침 햇살에 아파지는 눈과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면 이나가 침대 끝자락에 걸터앉아 다시금 말을 건다.
"꿈?"
"악몽 꿨어."
"무슨 악몽?"
"그날. 전시회. 너랑 사귀기 며칠 전."
툭툭 내뱉은 짧은 답변들에 웃음이 터져버린 이나를 보고 아메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본인과의 기억을, 정확히는 본인을 악몽이라고 부르는데도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것은 성격이 좋아서 일까, 아니면 정말 웃겨서일까... 답이 무엇이든 까불면 안된다는 걸 이미 오래전에 배운 아메였다.
악몽의 결말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전시회는 모두의 예상대로 성황리에 끝맞췄다. 꽃다발은 이나의 손에 하나씩 가지런히 말려져 끊어진 생명을 이어 나갔다. 며칠 뒤의 왓슨 아멜리아의 고백을 건너뛴 프러포즈도 성공적이었다. 네가 나 좋아하는 거, 너만 빼고 다 알고 있었어- 라며 놀리는 이나의 모습에 다시금 붉어진 얼굴로 도망쳐 나온 바보 같은 아메는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누구랑 바람피웠어?"
"응, 있지~ 옆 꽃집에 되게 예쁜 알바생이 들어왔더라고."
아싸, 받아쳤다. 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불안함이 급습했다. 휴대폰에서부터 고개를 돌리면 이나의 청색과 보라색 그 사이 어딘가의 눈동자 색이 제일 잘 보이도록, 아메의 얼굴 바로 앞에 이나의 얼굴이. 바보 같은 얼굴로 입을 열어 사과하려는 아메의 입을 막은 건 이나 본인의 입술이었다. 갑삭스러운 공격에 앞니가 부딪히고 통증을 아파할 틈새도 없이 틈을 비집어 들어온 살덩이에 당황하며 분위기에 타야 하나 고민하고 있으면 갑자기 날카로운 송곳니가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도망가버린다.
"아야!"
아파할 틈도 없이 문밖으로 도망가는 이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면 헛웃음만이 터져 나왔다.
"...바보 같아."
다시한번 붉어진 얼굴에서는 한동안 열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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