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올가와 바네사

꽃들이 햇빛을 받아 형형색색 빛나고, 새들이 즐거이 지저귀는 어느 날의 오후.

바네사 테레즈 알드 룬은 사람없는 도서실의 문을 열었다.

원래라면 오늘 다른 기사들과 함께 파견을 갔어야 하지만, 어째선지 예정이 급히 취소되는 바람에 하루의 일정이 비어버렸다.

자신은 나름대로 휴일을 알차게 보낸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운 휴식이 찾아오니 무얼 해야 할지조차 특별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다, 가만히 앉아있는 것보다는 어디로든 움직이는 것이 좋겠다 생각하여 방문을 열고 복도에 나가보았다.

다른 기사들은 대부분 파견 혹은 원정에 나가있는 탓에 왕성의 복도는 꽤나 한적했다.

복도에서 장난스레 놀다 자이라 경에게 붙잡히고 마는 프라우 경의 모습도, 대련을 하자며 끈질기게 로드를 재촉하는 프람 경의 모습도, 루실리카 경과 기쁘게 대화를 나누는 샬롯 경의 모습도.

어느 하나 잔상만이 남아있는 고요한 복도는, 어딘가 허전하게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고요한 적막도 왠지 모를 안심감을 가져다 주어서, 싫지만은 않았다.

다만, 바이올린 정도는 가져오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조금 들기는 했지만.

제 발소리만이 울리는 조용한 복도를 지나 눈에 밟힌 것은 도서실의 팻말.

멍하니 생각에 잠겨 걷고 있으니 어느새 이런 곳까지 와버린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출격이다 파견이다 해서 책을 가까이 할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았더랬지.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고 하니, 가끔은 책을 읽으며 마음을 채우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조심스레 목제 문을 밀어젖혔다.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린 문을 지나 도서실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따스한 햇빛이 들이치는 창가의 작은 소파였다.

평소라면 기분 좋은 따스함이 스며드는 자리이기에 사람으로 북적였을 테지만, 대부분의 기사들이 밖으로 떠나있는 지금은 단 한 명만이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올가..경…?”

작게 이름을 불러 보았으나, 그녀로부터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너무 작게 불러 듣지 못했나 싶어 조금 소리를 높여 다시금 불러보았지만, 이번에도 대답이 돌아올 기미는 없었다.

평소라면 문이 열리는 소리만으로도 뒤돌아보았을 텐데,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가보니,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 대신에 얕은 숨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살며시 앞으로 돌아가 얼굴을 살피니, 책을 넘기던 손은 가만히 멈추어 있었고, 빛나는 듯한 보석 같은 눈은 눈꺼풀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그녀가 잠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에 약점이라곤 없는 듯 완벽한 그녀가 이런 곳에서 쪽잠에 빠져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도 의외여서, 한참 동안이나 그녀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 그녀의 몸에 드리운 제 그림자를 보고서 문득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알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너무 몰입해있었던 것인가, 창밖의 풍경은 이미 저녁노을이 뉘엿뉘엿 모습을 감추려 하고 있었다.

아마 머지않아 기사들도 돌아오겠지.

그리 생각해 그녀를 깨우려 다가가다, 실수로 발이 걸려 휘청거리고, 그녀 쪽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옆의 소파에 손을 받쳐 그녀에게 부딪치지는 않았지만, 혼란을 추스르고 눈을 떠보니, 그녀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와있었다.

말 그대로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에, 인형 같은 얼굴이 있었다.

내 입술에 따스한 숨결이 닿아오는 감각에 심장은 자꾸만 요동치고,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차버렸다.

어서 떨어져야 하는데, 이대로 있다가 그녀가 눈을 뜨기라도 한다면, 놀래켜버리고 말 텐데.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메워도, 시끄럽게 날뛰는 심장은 전혀 들어줄 생각이 없는 듯 해서.

오히려 더욱 다가가버리라고, 누군가가 등을 떠미는 듯한 착각마저 느껴졌다.

지금이라면.

아직 그 눈이 감겨있는 지금이라면.

아주 살짝, 살짝만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만의, 한 순간의 실수로 묻어버린다면 괜찮지 않을까.

“…올가 경.”

살며시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보았다.

반응은 여전히 없다.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퍼져나갈 뿐.

마음속으로 그녀에게 사죄의 말을 건네고, 숨을 꾹 삼키고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한다.

그녀의 작고도 부드러운 입술이 나의 것과 맞닿는, 바로 그 순간.

“…바네사 경?”

“헤…?”

지금 이 순간에, 너무나도 듣고 싶지만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내 귓가를 간질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에? 아, 그, 그렇죠! 한참이 지나도 일어나질 않으셔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했지 뭐에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뭐, 뭘요..! 그럼 갈까요…?”

방금 전의 시끄러운 심장 소리가 들렸을까, 새빨개진 얼굴이 보였을까.

시곗소리가 고동을 가려주기를, 저녁노을에 드리운 그림자 속에 숨을 수 있었기를 빌며, 그녀에게서 떨어져 출입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녀는 야속하게도 나의 도주를 허락할 생각이 없는 듯이 보였다.

몸을 돌리는 순간 잡혀버린 손목에, 조심스레 돌아보니 언제나의 표정없는 맑은 눈이 나를 잡아먹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시나요…?”

“…무슨, 뜻입니까.”

“무슨 뜻이라니요…?”

“……만약, 제 생각이 맞다면.”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고서, 나와의 거리를 성큼성큼 좁혀왔다.

무서웠던 것인지, 아니면 불안했던 것인지, 나는 그에 맞추듯이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는 얼굴을 가까이 해왔다.

“눈을, 감아주십시오.”

마치 유성우가 떨어지듯 거리를 좁혀오는 보석 같은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아, 나는 이미.

이 사람에게 사로잡혀버렸구나.

사냥꾼에게 잡혀버린 토끼와 같이, 벗어날 수 없게 되어버렸구나, 하고.

다가오는 그녀에게 화답하듯 그녀의 허리에 손을 얹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부드럽게 닿아오는 달콤한 촉감에 취하듯, 그녀를 받아들였다.

부디 이 시간이 흐르지 않기를 바라며, 손에 조금 힘을 주어 그녀를 더욱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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