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과 선의 유니버스 (Fin.)

[올가바네올가] 물보라

동급생 바네사 x 올가

바네사를 미워하는 누군가가 일정을 짜놓은 게 아닐까. 어떤 날이 더 최악인지 경쟁이라도 하듯이. 가볍게 건드린 도미노가 와르르 무너지듯이. 어제와 오늘이 계속 바통을 주고받았다. 오늘이라는 날이 최악이란 이름표를 계속 붙이고 있었다. 시작점을 되짚어 보려면 주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성적표를 받은 주말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부모님에게 성적표를 보여줘야 했다.

식사 후에 마시는 차가 찻잔에 담겼다. 부드러운 향이 감돌았다. 향과 달리 마음은 부드러워지지 못했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네사 맞은편에 부모님이 앉아 있었다. 부모님은 찻잔을 검지에 끼우고 들어 올렸다. 차를 마시며 성적표를 봤다.

눈으로 훑어 내렸다. 끝까지 읽고 나서 책상 위에 올려놨다. 찻잔도 마찬가지였다. 잔과 그릇이 부딪치면서 나는 소리에도 예민해졌다. 일등은 아니었지만. 바네사가 받은 성적에 그럭저럭 만족한 걸까. 질책은 없었다. 그저 잘했다고만 해줬다.

중학생 때도 일등이 아니었어도 칭찬해줬으니까. 이상한 점은 없었다. 학교 시험, 모의고사, 수행평가 성적, 그리고 동의를 구해야 하는 학사 일정. 부모님과 마주 앉아서 대화를 나눌 소재는 그런 것들뿐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대화가 종점에 다다른 줄 알고 있었는데. 무언가가 나아가려는 바네사 발목을 붙들었다.

덜걱거리면서 멈춰버렸다. 고개를 돌려서 확인해봤다. 새로운 게 아니었다. 지겨울 정도로 많이 봤던 문제. 먼지가 잔뜩 끼어있는 문제가 있었다. 부모님은 바이올린을 언급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시치미를 떼어봤지만. 부모님이 끝끝내 바네사에게 대답을 요구해왔다.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줬다고 생각하는데."

 

마음속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자습하겠다고 말한 이후로. 부모님은 바이올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러니 잘 해결 했다고 생각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중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부모님은 바네사와 다른 게 많았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해결된 문제가 아니었다. 잠깐 미뤄둔 문제였다. 찻잔을 감싸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찻잔 안에서 작은 물결이 일어났다.

바이올린을 그만두겠다고 말한 거도. 공부하겠다는 거도. 바네사가 홧김에 저지른 일탈. 사춘기에 나타나는 충동. 일시적인 변덕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착각이나 다름없는 생각에 바네사는 들어있지 않았다.

바네사가 가진 생각은 들어가지 않았다. 부모님이 생각하는 대로. 따라가기를 바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네사는 그래야만 했다. 생각이 결론에 다다르자. 부모님이 원하는 대답이 어떤 건지 알게 되었다. 중학생 때 경연대회에 나갔던 거처럼. 다시 시작해서 올라가란 뜻이었다.

싫다.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깔끔하게 매듭지을 선택지는 있었다. 바이올린을 그만둔다고 말했으니까. 정말로 그만뒀다고. 선택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면 끝난다. 물어볼 때마다 같은 식으로 답해주면 끝나는 문제였다.

깔끔하고 쉬운 길이 있는데. 게시판에 걸려있던 단원 모집 홍보지가 떠올랐다. 왜 이럴 때 눈앞에 어른거리는지. 저도 모르게 쉬운 길을 지나쳤다. 작게 숨을 삼키다가 입을 열었다. 복잡하고 어려운 길을 택하고 말았다.

 

"…학교에서 관현악단 단원을 모집한다는 홍보지를 봤어요."

"관현악단? 아직도 그런 거에 관심을 두고 있는 거냐?"

 

한 치의 여유도 없는 짧은 대화가 끝나고. 부모님과 바네사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차가 식었다. 손잡이마저 차가웠다. 침묵은 분위기를 진정시키긴커녕 험악하게 만들었다. 그런 거라니. 놀랄 거리는 없었다. 예상한 반응이었다. 사실 바이올린을 다시 시작할 마음은 없었으니. 반응을 봐도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입술을 깨물었다. 목 끝까지 차올랐던 무언가를 가까스로 눌러냈다.

냉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부모님 뒤에 있는 게 보였다. 진열장이었다. 진열장 안에는 트로피가 진열되어 있었다. 진열장이 꽉 찰 정도로 많았다.

부모님이 그렇게 바라고 바랐던 자리. 최고라는 걸 증명해주는 상징이었다. 바네사가 받은 트로피도 있었다. 트로피를 받았을 때가 떠올랐다. 부모님은 바네사를 자랑스러워했다. 바네사는 자기 자신이 전혀 자랑스럽지 않았다. 트로피도 매한가지였다. 다른 사람들이 앉아야 할 자리를 억지로 빼앗고, 자리에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춘 흔적. 그뿐이었다.

갈라졌던 틈을 시간으로 겨우 메워놨는데. 망치로 부서진 느낌이었다. 부서진 잔해 사이로 정리되지 않은 기억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복도에서 누군가가 울고 있던 모습과 연주음이 마찰음으로 변하던 거까지. 모든 게 고통스러웠던 기억이었다. 쏟아진 기억은 바네사를 날카롭게 만들었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부모님의 표정이 점점 더 험악하게 변했다. 두려움이 없었다. 물러서지 않았다. 처음으로 부모님에게 맞섰다.

 

"네. 바이올린을 다시 하게 된다면 그런 거만 할 거예요."

"너…."

"정말로 저를 위해 물어보는 게 맞나요? 아니잖아요."

 

저도 모르게 날 선 말이 튀어나왔다. 무슨 말을 했는지 놀랄 틈이 없었다. 날 선 말을 다듬을 여유조차 없었다. 결국 자기 자신이 칼끝으로 변해버렸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말끝을 베어버렸다. 여태까지 최대한 붙잡고, 또 붙잡았다. 붙잡느라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다. 곧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늘어져 있었다. 겨우 유지하고 있던 이성의 끈도. 제 손으로 잘라버렸다.

 

"저에게 어울린다는 자리에 정말로 제가 있나요?"

 

다음에 어떻게 됐더라.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아귀가 맞지 않는 말을 쏟아낸 건 기억났다. 타협점을 찾아보려는 노력조차 없었다. 서로 일방적인 말만 한바탕 쏟아내더니. 부모님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길조차 주지 않고 바네사를 지나쳤다.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이 닫힐 때 나는 소리가 요란했다. 긴장감마저 끊겨버린 느낌이었다. 손이 쓰라릴 정도로 잡아당겨서 팽팽해진 끈이 단숨에 끊겨버렸다.

맥이 빠졌다. 바네사는 책상 앞에 깍지를 끼고 찻잔만 바라봤다. 대화에 끝맺음이 없었다. 해결된 게 하나도 없었다. 찝찝한 느낌만 남게 되었다. 부모님에게 맞선 걸 후회하지 않았다. 생각을 드러내면 조금이라도 후련해질 거 같았는데. 나는 어떻게 하고 싶었던 걸까. 되짚어보니 다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로 바이올린을 다시 하고 싶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그냥 부모님이 자기를 내버려 뒀으면 하는 마음이었을까. 눅눅한 공기를 마시는 거처럼 답답했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한 문제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내가 착각한 게 아닐까. 사실 해결된 문제는 하나도 없는 게 아닐까. 차마 내쉬지 못한 숨과 들이키지 못한 차향이 섞였다.

잠을 설치고 말았다. 한두 시간 잤을까. 언제 잠든 건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알람을 듣고 겨우겨우 일어났다. 등교 준비를 하는 내내 눈은 따갑고, 온몸이 무거웠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밖으로 나와서 찬 바람을 맞아도 여전했다. 그래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명확했다. 매번 갈 수밖에 없는 곳. 올가가 있는 교실이었다.

올가는 바네사보다 빨랐다. 마주치게 되면 걷잡을 수 없이 번져왔다. 그게 두려웠다. 어느덧 올가가 있는 자리가 시선에 자리 잡고 말았다. 자기도 모르게 익숙해지는 모습이 두려웠다. 마음속으로 모습을 지워내려고 손을 저었다. 그럴수록 더 진하게 물들였다. 잔뜩 물들어진 가슴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바네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였다.

올가에게 티 나지 않도록. 빠르게 뛰는 가슴을 미소 뒤에 꼭꼭 숨겨둬야 했다. 감추려고 애써도. 완전히 감출 수는 없는 걸까. 올가는 바네사 모습을 보고 걱정됐는지. 오늘은 자습 시간이 끝나면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어봤다.

우연히 만나서 같이 돌아간 걸 계기로. 올가는 가끔 자습이 끝나는 시간에 같이 돌아가자고 권했다.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왔다. 바네사가 그어둔 선에 올가의 발이 걸쳐졌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매일 돌아갈 수 없었다. 올가가 잘못한 게 아니었다. 전부 다 바네사 탓이었다. 이런 상태로 올가를 계속 보게 된다면. 숨기려고 애썼던 게 모두 다 드러날 거 같았다.

알고 있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이라도. 올가라면 받아줄 수 있을까. 다정함을 의심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이것마저도 바네사 때문이었다. 설사 올가가 받아준다 해도. 행복한 결말은 아니었다. 숨기고 있는 게 너무나도 많았다. 깊은 곳에 숨겨놨던 감정까지 드러낸다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겠지.

변변치 않은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바네사가 거절하면 올가는 다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걸쳐있던 발이 테두리에서 벗어났다. 바네사에게 이유조차 물어보지 않았다. 부모님과 다르게. 물러서면 정말로 끝이었다. 여지조차 주지 않는 모습마저 마냥 좋아했던 때와 다르게. 좋으면서도 상처에 약을 바른 듯이 쓰라렸다. 그러니 오늘도 거절해야 했는데. 어째서인지. 권유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새삼스럽지만.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자신을 스스로 추궁 해봐도 답이 돌아오는 일이 없었다.

다만.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속내가 드러나는 게 느껴졌다. 사정을 어디에다 말할 수 없고, 감정을 드러낼 수도 없었지만. 올가와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올가를 위하는 마음이 아니었다. 올가가 상처받는 걸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순전히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를 탓했다.

자습 시간 내내 같은 페이지만 맴돌았다. 주말에 몰아친 일이 좀처럼 정리가 되지 않았다. 수업 시간을 제외하고 비어있는 앞자리를 보며 불안했다. 물음표를 그렸다가 지우는 걸 반복했다. 문제가 풀리지 않았다. 여러 가지로 집중 안 되는 하루였다. 종이 울리자마자 가방을 챙겼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생각이 엉켰지만. 그래도 가야했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떠올랐다. 교문 쪽으로 갔다. 네가 기다리고 있어서. 갈 수밖에 없었다.

교문으로 가보니. 역시 올가가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운동복 차림으로. 변함없는 차분한 표정으로. 바네사를 보자마자 바로 다가와 줬다. 다가왔지만 가까워지지 않았다. 두 발자국 거리를 유지했다. 올가가 정한 거리는 그쯤일지도 모르겠다. 갈까. 짧은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올가가 정해둔 거리를 유지하며 나란히 걸어갔다.

가로등 사이로 겹겹이 발라진 밤공기가 서늘했다. 올가는 바네사를 보며 괜찮냐고 물어봤다. 차분하던 표정이 달라졌다. 목소리에 걱정이 담겨 있었다. 마음에 귀를 기울여주려고 노력했다. 바네사도 괜찮다고 말하며 노력했다. 괜찮지 않아. 아니다. 잘 모르겠어. 내가 어떤지. 차마 그런 말을 올가 앞에서 할 수 없었다. 네가 나에게 다정한 만큼. 나도 너에게 다정해야 하는데. 바네사는 올가에게 무엇 하나 돌려주지 못했다.

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이해해달라고 설득할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다. 이 정도면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나쁜 소리가 나올법한데. 올가는 바네사에게 불평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고맙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미안했다. 너무 미안한 나머지. 다정함을 어설프게 따라 했다.

 

"도서부 일은 어때? 힘들지는 않아?"

"바쁘긴 하지만 곧 끝나니까 괜찮아."

 

올가가 무언가를 말해왔다. 올가가 노력하는 거처럼. 귀를 기울이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파도처럼 저 멀리 휩쓸려갔다. 파도라면 다시 돌아와야 하는데. 휩쓸려가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옆모습을 담지도 못했다.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올가의 목소리도, 다정함도. 무엇 하나 담아내지 못했다. 마음속에 여유가 없었다. 담아내기도 버거웠다. 주는 대로 전부 다 바닥에 흘리고 말았다.

다시 주워 담지도 못했다. 받은 만큼 돌려주지 못하고, 주는 거마저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러면서 사이가 멀어질까 봐 불안해하다니. 자신의 이기심에 질리고 말았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 잘못되었으니 바꿔야 했다. 바꾸기 힘들다면 원래대로 돌아가야 했다. 어느 쪽이든. 선택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가야 할 길도 없는 파도 위에서 혼자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떠다니던 배가 작은 섬에 잠깐 닿았다. 가라앉는 마음을 품고 걷다 보니 어느덧 집에 도착했다. 정신을 차리고 올가를 봤다. 여태까지 말을 안 했던 걸까. 굳게 다문 입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헤어질 때 올가를 부르고 인사했다.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끝끝내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해주지 못했다. 그런데도 올가는 바네사에게 미소를 지어줬다.

올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혼자서 조명을 받게 되자. 바네사는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조명이 바네사를 인지 못 하고 꺼질 때까지. 바네사는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다. 겨우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 보니. 거실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부모님이 보였다. 눈이 마주쳤지만 동시에 시선을 피했다.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냉랭한 분위기였다. 갈등을 터뜨린 이후로 쭉 이런 상태기에. 부모님과 마주치는 게 달갑지 않았다. 바네사는 살얼음을 뚫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소리 없이, 빈틈없이 문을 닫았다. 가방을 아무 데나 던져뒀다.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누웠다. 마음은 눈치도 없지. 천장을 스크린 삼아 상영회가 다시 시작되고 말았다.

예전이라면 못 이기는 척 보겠지만. 이번만큼은. 올가를 보고 싶지 않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거실에 남아있던 한기가 새어들어 왔나 보다. 이불을 덮었는데도 너무 추웠다. 이불 안에서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싼 채 눈을 감았다.

반 애들 공책을 모아서 선생님에게 제출하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게시판에 모집 홍보지가 그 자리 그대로 붙여져 있었다. 아직도 못 구한 걸까.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젓고 다시 걸어갔다. 걸어가던 도중에 한 명이 바네사 시야를 가로지르고 들어왔다. 바로 멈춘 덕분에 가까스로 부딪히지 않았다. 걸음걸이로 보아서. 지나가던 도중에 마주친 게 아니었다. 바네사를 기다린 모양이었다. 마주친 적은 있지만 친하진 않은 사람이었다.

어색한 미소를 띠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바네사를 보며 한참이나 망설였다. 그런 모습만 봐도. 보통 일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할 말이 있다면서 다른 곳에서 얘기하자고 권했다. 쉬는 시간이라 복도에 애들이 많았다. 애들이 지나가며 마주 보고 서 있는 두 사람을 한 번씩 쳐다봤다. 이런 식으로 주목받는 건 부담스럽기에. 마지못해 권유를 받아들였다.

함께 밖으로 나오자 햇볕이 내리쬐었다. 햇빛은 바뀌지 않았는데. 여름과 다르게 무덥지 않았다.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걸어가는 이 순간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그 사람은 반 발자국 앞서 걸어갔다. 걷고, 또 걷다가 주위가 조용해지자 헛기침을 했다. 뒤를 돌아보며 바네사를 바라봤다. 이제는 얘기할 준비가 된 걸까. 별다른 감흥 없이 바라보던 도중에. 예상치 못한 발언이 툭 튀어나왔다.

좋아해. 짧은 세 글자였다. 친구로서 좋아한다는 의미로 말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건 바네사도 알고 있었다. 좋아한다는 말은. 바네사가 숨기고 있는 마음과 똑같은 마음이 담긴 말이겠지. 고백받는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눈만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딱히 좋은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적 사이로 불쑥 끼어든 게 있었다. 편지였다. 고개를 들어 편지를 들고 있는 사람을 바라봤다.

사귀자. 정말 간단한 말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전부 다 일방적인 모습이었다. 그때부터였을까. 편지를 들고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남을 생각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감정을 건네는 모습. 자기 자신과 겹쳐 보였다. 고개를 작게 저으면서 다시 바라봤다. 이번에는 올가가 겹쳐 보였다. 올가도 바네사에게 무언가를 건네줬다. 너무 달아서 입안에 단맛이 오랫동안 남았던 음료수, 여기저기 표시된 책.

올가가 건네줬던 모든 건 일방적이지 않았다. 전부 다 바네사를 위한 호의였다.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겹쳐졌던 올가가 사라졌다. 그제야 바네사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다시 보였다. 그래서일까. 고백을 다정하게 거절할 수 없었다. 자신을 대하듯이. 냉정하게 대했다. 차가운 목소리로 단박에 마음을 끊어냈다. 어찌 보면 화풀이나 다름없었다.

 

"받아줄 수 없어."

해일이 휩쓸고 지나간 마음은 처참했다.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이어붙일 엄두가 나질 않았다. 내쉬는 숨 속에 편안함이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에 힘이 없었다. 이 정도로 너덜너덜해졌으면. 악의를 가졌다 해도 조금은 다정해지면 안 될까. 지친 마음에 드는 생각이었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계단을 오르면서 한숨을 푹푹 쉬었지만. 시원해지지 않았다.

교실 문을 열려고 했다. 무언가에 턱 걸리더니 덜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교실 문에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누구도 없다는 뜻이었다. 이상하다. 교무실에 가보니 열쇠가 걸려있었다. 이 시간에 바네사 말고는 없다는 뜻이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계단을 두 칸씩 건너뛰며 올라갔다. 열쇠로 자물쇠를 열었다. 요란한 소리가 날 정도로 문을 세게 열었다. 교실은 비어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헉헉거리며 들어오지 못하는 바네사를 비웃듯이. 바람이 머리를 헤집고 지나갔다.

머릿속에 그리던 사람이 없었다. 뭐지. 매번 바네사를 맞이해주던 올가가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지. 며칠 내내 집요하게 괴롭히던 누군가는 바네사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학교에 갔다. 최대한 힘을 내서 뛰어왔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고를 새도 없이 교실 문을 열었다. 또 덜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열쇠를 가져와서 교실 문을 열었다.

오늘도 교실은 텅 비어있었다. 창문 너머 새벽하늘은 주홍빛을 내고 있었다. 사소한 변화가 물보라를 일으키고 말았다. 쓸려나갈 것도 없는 마음이 물보라 때문에 쓰라려졌다. 올가는 아침에 일찍 오지 않았다. 평소랑 정반대였다. 제일 마지막으로 교실에 들어왔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바로 도서관으로 갔다. 점심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수업 시간에도 자리를 비우는 일이 종종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헤어질 때 인사하는 건 여전했다. 안녕. 짧은 두 글자와 함께 돌아서는 거도 변하지 않았다. 바네사를 지나쳐서 밖으로 나갔다. 자습 시간이 끝나면 같이 가자고 권하지도 않았다. 애매한 엇갈림이 일주일 동안 이어지고 말았다. 하루 이틀은 우연이라고 넘길 수 있지만. 딱 들어맞듯이 어긋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우연이라 치부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의도적으로 바네사를 피하는 거 같았다. 거리를 두자는 통보나 다름없었다. 받아들이려고 마음먹었다. 원인을 제공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사람은 무언가를 받고 싶어 하지. 돌려받지 못하는데 계속 주고 싶어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바네사에게 잘해주던 올가를 받아주지 못했다. 오히려 올가를 밀어내 버렸다. 일방적으로 선을 긋더니. 여기까지라며 거리를 뒀다. 아무리 올가가 다정하다고 해도. 이기적인 바네사에게 질리고도 남았겠지.

자업자득이었다.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말자고 정했는데. 소중하게 간직하자고 다짐했는데. 학기 초에 다짐했던 것들 중에 지켜낸 게 하나도 없었다. 그때 그었던 선은 어디로 간 걸까. 내려다보니 어느새 선이 사라졌다. 올가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도서관에서 일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여름에 봤던 모습 말이다. 반납대에 있던 책을 제자리에 꽂던 모습. 마음에 담아둔 모습은 많은데. 제대로 떠올릴 수 없었다. 올가를 좋아했다. 올가에 관한 모든 것에 관심이 쏠렸지만. 바네사는 다른 의미로 올가에게 무심했다.

올가가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지 몰랐고. 학교나 도서관이 아닌 다른 곳에서 어떻게 지내는지도 몰랐다. 고개를 조금만 움직여도 비어있는 앞자리를 보게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손으로 짚어봤다. 비어있는 자리가 서러워 보였다. 교실이 사람으로 가득 차려면 아직 멀었기에. 바네사는 올가 자리에 몰래 걸터앉아봤다. 이제 정말로 안 되는 걸까. 실은 받아들이기 싫었다.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두 손에 한가득 꼭 쥐고 싶었다.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담임 선생님에게 부탁해서 자습을 건너뛰게 되었다. 선생님은 자습에 빠지겠다고 말하는 바네사를 보더니. 너무 무리하지 말고 푹 쉬라고 말했다. 그 정도로 힘들어 보인 걸까. 교무실에 거울이 걸려 있었지만. 거울을 보지 않았다. 수업 시간이 끝나고 가방을 챙겼다. 올가에게 들었던 말이 겨우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수업 시간이 끝나고 한 시간 정도 도서관에 있다는 말. 그 말만 계속 되새기며 도서관 문 앞까지 와버렸다.

감정에 휩쓸려 여기까지 오게 되어버렸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도서관은 여름 방학 때랑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오긴 했는데. 이제 어쩐담. 문 옆에 있는 게시판에 새로운 게 걸려 있었다. 신착도서 안내문이었다. 안내문에는 책 표지가 붙여져 있었다. 애들이 하나하나 붙인 거 같았다. 안내문만 봐도 바쁘다는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손잡이를 잡은 손이 움직이질 못했다. 바쁜데 괜히 방해하는 건 아닐까.

숙제 때문에 어떻게든 가야만 했던 여름과 다르게. 지금은 도서관에 가야 하는 이유도 없었다.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수만 가지였다. 쉽게 돌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올가가 너무 보고 싶었다. 단 하나였다. 거리를 두려고 하는 사람이 들이닥치면 곤란해하겠지. 곤란해하는 모습을 떠올려야 하는데. 떠올릴 수가 없었다. 당연했다. 올가는 바네사에게 그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문을 열고 말았다.

문을 열자 도서부 애들이 일제히 바네사를 바라봤다. 몇몇은 목장갑을 끼고 있었다. 올가는 보이지 않았다. 일하던 애들이 다가와서 바네사에게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찾는 게 있냐는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짧은 순간이지만 망설이게 되었다. 애들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올가가 여기 있다고 해서…."

"아~ 지금 책 옮기고 있어. 금방 돌아올 거야."

 

바네사 표정이 심상치 않았던 건지. 도서부 애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바네사를 불렀다. 그러더니 그동안 일어났던 일을 꺼내기 시작했다. 요즘 새로 온 책 때문에 바빠져서 학급 일정에 빠지는 일이 많을 거라고 했다. 심지어 도서부 애들 중 한 명이 발을 다쳐서 목발을 짚는 바람에. 올가가 다친 애가 해야 하는 몫을 대신 떠맡았다.

그것도 누가 시켜서 한 게 아니라. 자기가 하겠다며 다친 애를 배려했다. 아무 내색 없이. 묵묵히 일했다. 그래서 다른 애들보다 훨씬 더 바쁘다는 사정을 올가 대신 털어놓았다. 그래도 거의 다 끝나가니까 너그럽게 봐달라면서. 바네사에게 두 손을 모으며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바네사는 도서부 애들 입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애들 눈에는 올가에게 한 소리하러 온 사람으로 보였나 보다. 두 사람의 관계를 겉치레로나마 수식하던 단어. 친구라는 단어가 없어지자마자. 바네사는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표정만 봐서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알 수 없으니까. 그게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얘기라도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퍼뜩 스쳐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구나. 같으면서도 달랐다. 다른 사람한테 자랑할 법한 일인데도. 다친 애를 탓할 수도 있으니까. 자세하게 얘기하지 않고 바쁘다는 말로 덮어줬다. 세세하게 배려하는 모습이 멋있고 다정했다. 그에 비해 나는. 올가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주제에. 제멋대로 오해하고, 초조해했다.

자신이 만든 물보라인데. 그것조차 버티지 못하고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었다. 한심함과 죄책감이 뒤섞이는 순간. 뜨거운 게 흘러내리는 느낌이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바네사 뺨에 굵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울고 말았다. 감정이 터져나가서 차마 소리도 내지 못했다. 자꾸만 눈물을 쏟아냈다.

애들은 바네사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괜찮냐고 물어보다가 휴지를 찾기 시작했다. 너무 놀랐는지.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했다. 그러다 책상 위에 있던 두루마리 휴지를 가져왔다. 다급하게 둘둘 말아서 끊어내더니. 곧바로 바네사에게 건넸다. 어떤 애는 컵에 물을 담아 와서 마시라고 했다. 휴지로 눈물을 닦아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보는 애가 오더니, 앞뒤 맥락 없이 대뜸 울어버린 꼴이었다.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정말 한심했다.

오늘은 안 되겠다. 울고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 올가가 돌아오기 전에 가려고 했다. 애들에게 사과하며 휴지로 다시 한 번 눈가를 닦아냈다. 훌쩍거리는 코끝에서 시원한 향이 스쳤다. 누가 방향제라도 놓은 걸까. 책상 위를 훑어봤지만,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도 시원한 향기가 끈질기게 붙어왔다.어떤 냄새였더라. 어딘가 많이 맡아본 향이었다. 다시 한 번 맡아보며 되짚어봤다. 단번에 떠올릴 수 있었다. 민트 향이었다. 고개를 들었지만, 거기에 올가는 없었다.

 

"바네사."

 

짧은 세글자에.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바네사는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소나기가 내렸던 때처럼. 올가는 거기에 있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G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