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과 선의 유니버스 (Fin.)

[올가바네올가] 겨울 자락

동급생 바네사 x 올가

겨울 향이 알싸해진 코끝을 파고들었다. 아침을 넘어 점심이 되어서도 햇살이 비춰주지 않았다. 지나가는 매장에 있던 라디오에서 오늘 밤에 눈이 내린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가득한 길 한복판에 올가가 서 있었다. 올가는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조금 빨리 와버리고 말았다. 하늘이 회색빛으로 가득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올가의 입에서 입김이 흘러나왔다. 가을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더니. 벌써 겨울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희한한 점이 있다면. 맞이했던 겨울은 매번 추웠는데. 이번 겨울은 춥지 않았다. 저번에 봤던 다큐멘터리가 떠올랐다. 지구 온난화가 심각하다고 했는데. 겨울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심각해진 걸까. 뜬금없는 생각에 깊게 빠지지 않고 마음속에 넣었다. 코트 주머니에 넣어뒀던 핸드폰을 꺼냈다. 토요일. 오후. 날짜와 시간, 요일이 적힌 글자 뒤에 누군가의 사진이 흐릿하게 떠 있었다. 손가락으로 잠금 화면을 넘기자. 흐릿했던 사진이 초점을 맞춘 듯이 선명해졌다.

사진을 보자마자 올가는 미소를 지었다. 사진을 구경하던 도중에, 조금 늦어진다는 메시지를 보내버린 주인공. 바네사의 사진이었다. 올가는 자기도 가고 있다면서. 걱정하지 말라는 거짓말이 섞인 답장을 보냈다. 짧은 대화를 끝내고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주말이라서 어딜 가든 사람이 가득했기에. 한산한 곳을 찾는 건 포기했다. 올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주변을 구경했다. 별생각 없이 구경하던 와중에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올가가 서 있는 곳 건너편에 진열된 편지지였다.

토요일. 편지지. 두 가지 단어일 뿐인데도. 머릿속에서 저절로 꺼내오는 기억이 있었다. 올가가 바네사에게 마음을 전하기 위해 썼던 편지가 생각났다. 이유는 별거 없었다. 수학여행이 기대된다는 바네사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바네사와 더 얘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말했던 순간부터. 감정을 더 숨길 수 없다고 직감했다.

토요일에 문구점에서 편지지를 샀다. 종류가 많지 않았다. 많지 않은 편지지 중에 하나를 고르는 거뿐인데. 올가는 편지지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바네사에게 보낼 편지니까. 읽을 사람에게 어울리는 걸 고를지. 아니면 올가가 보내는 편지니까. 보내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걸 고를지. 고민을 담아낸 손가락이 쉽게 움직이질 못했다.

한참 고민하다가 손가락이 닿은 편지지가 있었다. 올가는 아무 무늬도 없이 줄만 그어져 있는 편지지를 골랐다. 바네사에게 보내기 위해 편지를 쓰는 거지만. 일방적인 말만 쓸 게 분명하기에. 자신과 어울리는 편지지를 골랐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두근거렸다.

두근거리는 건 맞지만. 여태껏 느꼈던 두근거림과 조금 달랐다. 글이나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두근거림을 품은 채 집에 돌아와서. 책상 위에 편지지를 꺼냈다. 어떤 펜을 써야 할지 고민했다. 겨우겨우 펜 하나를 골랐지만. 글자를 쓰지도 못했는데 편지지 하나를 구기고 말았다. 그걸 수도 없이 반복하고 나니. 하루가 지나가 버렸다.

짐을 챙기고, 여행 전날 밤이 되고 나서야. 올가는 다시 책상에 앉아서 편지지를 꺼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편지지였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초조함 때문일까. 여전히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부단히 펜을 돌렸다. 이윽고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렸다. 편지지에 얹었다. 손으로 편지지를 고정하고. 드디어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네사. 세 글자를 쓰고 멈칫하다가. 옆에 두 글자를 더 붙여서 첫 문장을 완성했다.

바네사에게. 다섯 글자를 쓰기 위해. 꼬박 며칠이 걸렸다. 길게 한 문장을 잡고 있는 동안. 올가는 바네사에 대해서. 아니 그보다도. 자신의 마음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 편지지 위에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지나갔던 시간으로 통하는 문을 열 수 있었다. 첫 문장 아래로 펜을 내리더니. 망설임 없이 내용을 적어 내려갔다. 두 장을 넘기지 않았다. 올가가 말을 많이 하는 편도 아니었고. 긴 편지는 역시 부담스러워할 거 같았다.

좋아하는 이유를 쓰기보다 바네사를 생각하는 말을 많이 썼다. 먼저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인정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일방적으로 감정을 건네는 방식은 잘못되었다고 쓰면서. 편지를 받고 놀랐을 바네사에게 미리 사과했다. 편지를 받은 시점에서 이미 부담스럽겠지만. 바네사가 무슨 선택을 하더라도 받아들이겠다고. 바네사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고 썼다. 정말로 괜찮으니까. 원하는 대로 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수학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볼 테니까. 수학여행에서 바라고 있는 점을 썼다.

바네사에게 말했던 거처럼. 수학여행에서 많이 얘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좋은 추억을 많이 쌓으면 좋겠다고 남겼다. 마지막 한 줄이 남자. 쉴 틈 없이 움직이던 펜이 다시 멈추고 말았다.

여름방학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봐왔던 바네사를 떠올렸다. 햇빛을 잔뜩 받은 채 복도에서 혼자 서 있는 바네사를 떠올렸다. 햇빛을 받는 바네사 옆에 자신을 세워봤다. 옆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조금 어색하지 않나 하는 마음도 들었다. 조금 더 생각해보던 올가는 펜을 다시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줄을 채웠다.

좋아해. 어울리지 않더라도. 가능하다면. 올가가 바네사 옆에 있는 모습을 상상에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욕심을 부려보자면. 옆에 있는 자신을 보며 웃어줬으면 좋겠다. 마음을 담아둔 편지가 닿기 전에. 마음을 담은 말이 먼저 닿았다.

좋아해. 편지에 적었던 말과 같은 말인데도. 바네사가 말하자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올가의 대답을 듣고 울어버린 바네사에게. 올가는 어떤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손수건을 건네주려던 손도 떨려서. 어떤 것도 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떨리는 두 손을 뻗고. 바네사를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서로의 손을 잡는 게 익숙해질 즈음. 바네사는 올가에게 자신의 어떤 점이 좋았냐고 물었다. 글쎄. 어떤 점이 좋았을까. 서랍 안에 담아뒀던 것들을 꺼내 봤다. 바네사에게 보여주기 전에. 스스로 꺼내놓은 걸 찬찬히 살펴봤다. 바네사는 올가에게 먼저 다가와 주고, 감정을 말해줬다. 용기 있는 모습이 좋았다. 전에 약속했던 거처럼. 올가에게 모든 걸 솔직하게 말해줬다. 털어놓기 쉽지 않은 얘기까지도. 올가에게 모두 다 말해줬다. 솔직하게 말해주는 점이 좋았다. 올가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얘기해주더니. 바이올린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고 알려줬다.

내년에도 학교 관현악단에서 단원을 모집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올해는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미뤘지만. 내년에는 모집에 신청하고 싶다는 계획까지 말해줬다. 연습 때문에 바빠질 수 있다면서.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으며 용서를 구했다. 미안해할 일이 아닌데도. 올가에게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모습이. 그래도 올가에게 연락은 하루에 한 번씩 꼭 하겠다고 말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이 정도로 많은데 다 말해줘야 할까. 다 말해주기엔 너무 많았기에. 뻔할지도 모르고, 간지러운 말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담아뒀던 것들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 말. 네가 사랑스러워서 그래. 그래도 달아오른 뺨이나, 횡설수설하면서 좋아하는 반응을 보니. 그런 대답으로도 만족해주는 거 같아서 다행이었다.

기분 좋은 기억을 꺼내다 보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행복에 젖은 올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손가락이 올가 뺨을 쿡 찔렀다. 어느새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바네사가 옆에 있었다. 익숙해질 정도로 자주 하던 장난이었지만. 바네사는 뺨을 찌르고 나서,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뺨을 문질러줬다.

서둘러서 왔는지 바네사 코끝이 살짝 빨갰다. 기다렸냐는 질문에 방금 왔다고 대답했다. 거짓말인 걸 보기만 해도 알고 있는지. 바네사는 문지르던 손으로 올가 뺨을 지그시 눌렀다. 화난 건 아니었다. 장난기 넘치는 미소는 여전했다. 장난스러운 모습도 잠시였다. 바네사는 춥지 않았냐고 걱정해주면서 다른 손으로 차가워진 올가 손을 덮어줬다. 온기를 뺏겨서 차가울 텐데. 올가를 위해 기꺼이 온기를 나눠줬다. 자기를 바라보는 올가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

 

누가 봐도 티가 나는 걸까. 아니면 바네사라서 알아차린 걸까. 미소가 걸려있는 바네사를 보다가. 문득 처음이 생각났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앉아있던 올가에게 인사하던 바네사가 보였다. 안녕. 두 글자로 시작된 처음이 떠올랐다. 바네사는 대답을 기다려줬다. 올가는 시선을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두 사람을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더니. 다시 바네사를 바라봤다. 대답을 기다리는 바네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기 손을 덮어줬던 바네사의 손을 쓰다듬었다.

이상하게 느낄 만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바네사에게 그림자를 드리우더니. 입술이 바네사에게 닿았다. 아주 짧은 입맞춤이었다. 올가는 천천히 떨어졌다. 반짝이는 바네사 입술을 손가락 끝으로 훑어줬다.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랐는지. 바네사는 주춤거리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바네사 얼굴 뒤에 분홍빛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거 같았다. 올가는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그러더니 귓가에 작게 속삭이듯이 대답해줬다.

네 생각. 바네사에게 말해준 건 세 글자뿐이었지만. 너무나 많은 생각을 담고 있었다. 너에게 보내기 위해 써 내려갔던 한 단어, 한 문장, 그리고 하나의 편지가 될 때까지. 마음에 적셔오던 행복함. 같은 마음이라는 걸 알았을 때까지.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리게 하던 기쁨. 그리고 지금 바네사가 웃으면서 손을 잡아줬을 때 느끼고 있는 설렘.

다시 한 번 처음에 만났던 모습을 떠올렸다. 처음 인사를 건네줬던 그 날부터. 올가는 바네사의 인사를 무시하거나, 넘기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마도. 나는 처음부터 너를 좋아했던 거야. 지금, 이 순간. 좋아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생각보다 많을까. 아니면 생각보다 적을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었기에. 더욱 소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올가는 바네사의 손을 꼭 그러쥐었다. 오늘도 전혀 춥지 않은 따뜻한 겨울이었다. 먼저 다가와 준 바네사에게 고마움이 많이 남았다. 바네사가 맞이하는 이번 겨울이. 자신이 느끼는 이번 겨울처럼. 따뜻했으면 좋겠다. 웃음소리가 섞인 새하얀 입김이 흩뿌려졌다. 언젠가 꺼내 보면 추억이 될 오늘도. 올가는 바네사와 같이 걸어가며 추억을 쌓았다.

점과 선의 유니버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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