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바네올가] 새로운 계절
동급생 바네사 x 올가
용기를 내서 말을 꺼냈지만. 정작 표정은 좋지 않았나 보다. 올가는 대답 대신에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봤다. 당황해서 아무 일도 없다면서 격하게 부정하는 바람에. 오해가 깊어지고 말았다. 솔직하게 얘기해도 시간이 모자랄 판에. 오해를 만들면 어쩌자는 건지. 오해가 깊어지는 와중에 폭죽이 터지는 소리에 움찔거렸다. 이러다 불꽃놀이도 끝나게 생겼다.
다급함은 용기를 끌어 올리게 만들었다. 바네사는 표정을 가다듬고 올가를 바라봤다. 올가에게 약속했던 걸 지금 말해주고 싶다고 대답하자. 오해가 풀린 모양이었다. 걱정하느라 인상 쓰던 표정이 풀어졌다. 오해도 풀었으니. 이제 올가에게 말하기만 하면 되는데. 입을 열다가 도로 닫고 말았다.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주변에 방해가 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여기도 충분히 외진 곳이긴 했지만. 애들이 듬성듬성 남아 있었다. 지금 말해버렸다간 애들이 다 들어버리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어젯밤에 수다를 떨었던 애들처럼 말하겠지. 여기저기서 만드는 소문이 파도가 되어서. 물결처럼 넓게 퍼지겠지. 바네사는 소문에 휘말리는 건 익숙했다. 자기가 소문에 휘말리는 건 괜찮지만. 올가가 휘말리는 건 싫었다.
올가는 머뭇거리는 모습만 봐도 눈치챘는지. 사람이 없는 곳을 봤다면서. 자리를 옮겨도 되겠냐고 바네사에게 허락을 구했다. 바네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따라와 달라면서 앞장섰다. 앞장서는 뒷모습을 보자. 기억이 눈치 없게 끼어들었다. 방학식 때. 자기가 올가에게 다른 길로 걷자고 권했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덕분에 따라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깨닫더니. 올가는 슬그머니 뒤를 돌아봤다. 괜히 잘 신겨 있는 신발 앞부분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신발 탓을 하면서 올가를 따라 걸어갔다.
늑장 부리다가 불꽃놀이도 놓치는 게 아닐까 싶어서. 조급한 마음에 발걸음을 조금 더 서둘렀다. 따지고 보면 다른 이유도 있었다. 올가와 같이 보고 싶어서, 불꽃놀이를 보면서 마음을 말하고 싶어서. 무슨 이유가 되었든. 올가에게 휘둘리는 느낌이었지만. 바네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조금 더 걸어가자. 올가가 도착했다면서 걸음을 멈췄다. 올가가 말했던 대로 애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래도 아주 늦지 않았나 보다. 도착하자 불꽃이 하나둘씩 터지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곳이긴 했지만. 오히려 하늘을 가리는 것들이 없어져서 불꽃이 아까보다 더 선명해 보였다.
정말 아무도 없는 곳이었기에. 불꽃놀이가 둘만의 축제 같았다. 손이 소매 주변을 겉돌았다.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하느라 그런 건지. 겉돌던 손은 어느새 손가락으로 바지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용기를 내서 올가를 여기까지 데려온 건 좋았으나.
다음이 문제였다. 이래서 무언가를 하려면 계획부터 세워야 하는구나. 지금은 필요 없는 교훈을 뼈저리게 느꼈지만. 정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쯤 되면 궁금해서라도 물어볼 텐데. 역시나 올가는 잠잠했다. 사실 그 자리에 계속 있을 거 같은 모습 덕분에. 바네사는 매번 용기를 내서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서거나, 눈을 딱 감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매번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 같았다. 불꽃놀이가 끝나면. 고백이 끝나고, 관계가 끝나면. 너에게 나는 어떻게 남을까. 의미 없는 생각을 하며 올가를 바라봤다. 수족관에서 그랬던 거처럼. 눈이 마주치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수족관에서 눈이 마주쳤을 때랑 달랐다. 이상하게도. 올가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네사를 먼저 담았던 시선이. 다른 데를 향하고 있었다. 거절할 걸 알면서도. 확신하면서도. 그런데도.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올가를 보자. 수족관에서 눈이 마주쳤을 때 느꼈던 느낌이 다시 찾아왔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을 맞이한 느낌이었다. 그때 용기가 있었다면. 돌아가려던 올가를 붙잡고 마음을 전했을 텐데. 불꽃이 한 번 터지고 사라졌다. 사라진 불꽃을 신호 삼아. 입이 제멋대로 열리고 말았다.
"좋아해."
저질러버렸다. 호수에 던진 작은 돌처럼 소리소문 없이 가라앉을 거 같은. 너무나도 가벼운 말처럼 들릴 수 있는. 밑도 끝도 없는 고백이었다. 한 마디를 울컥 뱉어내자. 달콤하면서도 쌉쌀한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올가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 정도로 당황하는 표정은 처음 봤다. 처음 봤지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바네사에게 고백했던 애들한테. 바네사도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겠지. 겪어봤으니까 자기는 다를 거로 생각했다. 적어도 일방적인 애들과 다를 거로 생각했는데.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사람은 역시 자기가 직접 겪어봐야 느낄 수 있는 걸까. 올가에게 고백을 내뱉고 나서야. 지금까지 고백했던 애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숨 쉬는 법을 잊을 정도로 떨리는데. 장황하게 말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올가에게 좋아하는 이유를 말해주고 싶었다. 예전에 올가가 바네사에게 말해줬던 거처럼. 바네사도 말해주고 싶었다. 올가에게도 좋은 점이 얼마나 많은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는 안다면서. 올가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의도는 좋았지만.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말이 쉽게 떠오르질 않았다. 마음과 머리에서 떠오르는 건 수만 가지인데. 입으로 나올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떠오르는 말과 전혀 다른 말을 하고 말았다.
"나는 너를 좋아하는데…. 너는 다르겠지?"
자기 자신이 말한 말이지만. 미련이 흐르다 못해 넘쳐버렸다. 나중에 바네사가 회고록을 쓰게 된다면. 살면서 가장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적어도 이상하지 않을 말이었다. 멀리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번쩍거리는 빛과 함께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네사도 고개를 돌리고 하늘을 바라봤다. 까만 하늘을 도화지 삼아서. 불꽃이 눈부시게 퍼지고 있었다.
종종 불꽃놀이를 보긴 했지만. 지금까지 봤던 불꽃 중에서 제일 커다란 꽃이었다. 여기 있는 바네사는 끝을 맞이해야하는데. 불꽃놀이는 얄궂게도 절정을 향하고 있었다. 한참 하늘을 수놓는 불꽃을 바라보던 와중에. 올가가 바네사를 불렀다. 이번에는 바네사가 고개를 돌렸다. 올가는 바네사를 바라보지 않았다. 시선을 피하면서 입을 열었다.
"미안해."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애당초 거절당하려고 뱉어냈던 고백이었다. 그러니 괜찮아야 하는데. 왜일까. 올가의 대답을 듣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느낌이었다. 괜찮을 거라 믿었지만. 돌아올 대가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올가가 받아주지 않는다면. 당장 내일부터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숨을 길게 내쉬는 소리가 들리자. 바네사는 올가를 다시 바라볼 수 있었다. 얼굴을 긁적이면서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딱 봐도 곤란해 하는 거 같았다. 바네사가 어떤 말을 하든, 어떤 거를 제안하든. 올가는 곤란해 한 적이 없었다. 그런 올가가 이 정도로 곤란해 하는데. 내 생각만 하고 있었구나.
땅만 바라보던 올가는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바네사를 바라보지 않았다. 다른 데를 보면서 이마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모습을 지켜보던 바네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미안해할 일이 아닌데도 미안하게 만들고. 곤란하게 만들고. 민폐도 이런 민폐가 어디 있을까. 너무 늦었지만.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네 사물함에 편지를 넣어놨어."
거절은 예상했지만. 이런 말은 예상하지 못했다. 학교에서 출발하기 전에 넣어놨다는 말을 들었지만. 기계에 오류가 난 거처럼. 머리에 들은 말을 입력해도 결과가 나오질 않았다. 제대로 만들어진 문장이 나오기는커녕. 종이에 물음표만 가득 채울 뿐이었다. 상황 파악도 못 하고, 말도 이해하지 못한 채. 올가가 말을 이어 가기를 기다려야 했다.
"너처럼 직접 전해야 했는데…."
설마. 아닐 거야. 아니다. 혹시. 설마. 앞뒤 순서 없는 단어가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쯤 되면 두근거려야 하는데. 두근거리긴커녕 멍해졌다. 며칠 동안 마음의 문을 두들기던 소리가 잠잠했다. 필요 없을 때는 시도 때도 없이 나오더니. 나오라고 할 때는 안 나오는 게 얄미웠다.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올가를 바라봤다. 수많은 불꽃을 뒤로하고. 올가는 조용히 바네사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살짝 얽히며 온기가 느껴졌다. 아주 잠깐 온기를 나누고. 다시 떨어져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손을 잡은 거도, 바네사를 보며 웃는 거도. 평소라면 알아차렸을 텐데. 여전히 고장 난 상태라서. 올라가 바네사에게 정확한 의미를 입력해줘야 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올가는 스며드는 물감처럼 옅게 웃었다. 그러더니. 떨어뜨려 둔 줄임표를 주웠다. 바네사에게 정말 필요했던 말을 건네줬다.
"나도 좋아해. 너랑 같은 의미로."
마지막 문장 같은 말을 듣자. 올가가 달라 보였다. 여태까지 봤던 올가와 다른 느낌이었다. 불꽃놀이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올가는 너무 멋있고, 눈부셨다.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앞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다. 이질감이 현실을 부정하게 했다.
사실 꿈이 아닐까. 대답하는 순간 깨어버리는 건 아닐까. 꿈이 아니라면. 머릿속에서 틀어둔 상영회였다던가. 시나리오를 떠올린 상상이었다던가. 바네사를 바라보는 올가의 눈에 모습이 비쳤다. 크게 뜬 눈으로 올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가 봐도 바보 같은 표정이었다.
어떤 말을 해도. 대답이 될 거 같지 않았다. 어떤 표정을 지어도. 지금 느끼는 감정을 전할 수 없을 거 같았다. 그래도. 소리 내 대답해줘야 하는데. 머릿속에서 이러쿵저러쿵 얘기만 하는 걸 보고. 해결책이 없어서 답답했던 걸까. 몸이 앞장서고 말았다.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말았다. 뒤늦게 놀라서 손으로 닦아봤지만. 닦아내도 계속 흘러내렸다.
이게 뭐람. 고백은 자기가 해놓고. 대답을 듣고 울고 있다니. 머리로는 울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바닥에 고개를 푹 떨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닦지도 못한 눈물이 뺨과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올가는 바네사를 보고 놀라더니. 바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마 손수건을 찾고 있는 거겠지. 주머니 안을 뒤적거리던 손이 멈췄다. 이내 손을 주머니에서 뺐다. 손이 비어있었다.
바네사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손수건은 없었다. 대신에. 올가는 두 팔을 뻗어서 어깨를 감싸듯이 잡아줬다. 다정한 손길에 이어서. 부드럽게 끌어 안아줬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천천히 좁혀지더니. 공기조차 끼어들지 못했다. 올가가 어떤 의미로 안아줬는지. 바네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올가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만 울어야 하지만. 네가 나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그만둘 수 있을까.
두 사람을 축하하듯이 폭죽 소리가 요란하고, 쉴 틈 없이 들리고 있었다. 밤하늘에 또 다른 하늘빛을 수놓으면서. 불꽃놀이는 마지막을 맞이하고 있었다. 불꽃놀이는 끝이 나고 있지만. 두 사람은 끝나지 않았다. 마음을 확인하느라 하늘에 수놓은 불꽃을 보지 못했지만.
사실 수놓은 불꽃은 바네사에게 상관없었다. 올가가 안아주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때문에. 바네사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웠던 불꽃놀이였다.
한바탕 울고 나서 숙소로 다시 돌아갈 때까지. 머리는 짧다면 짧은 순간의 기억을 저장해뒀다. 잘 저장되었는지 확인하려는 듯이. 바네사에게 계속 그때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줬다. 반복해서 보여줬을 뿐이지. 길이는 짧았다. 짧은 순간 동안 두 사람이 했던 일은 별로 없었다. 걸어갈 때 손을 잡았다. 뒤늦게 올가에게 좋아하는 점을 말해줬다.
주책이 가득 담긴 말이었던 거 같았다. 기억에 남는 게 하나 있다면. 올가는 웃으면서 고맙다고 말해줬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에. 올가가 빨개진 눈가를 문질러줬다. 차가운 물로 식히는 게 좋겠다고 말해줬다. 돌아가면 금요일이니까. 금요일에는 돌아가서 푹 쉬고, 올가와 주말에 만나기로 했다.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잘자. 짧은 인사와 함께 헤어졌다. 그게 마지막 장면이었다.
바네사는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좋아한다고 말했을 뿐인데.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고 대답해줬을 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걸까. 사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리는 건 기본이었고. 공중에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이질감이 들었다. 자기 상태가 어떤지.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었다. 바네사가 느낄 수 있는 건 두 가지밖에 없었다. 다음날 눈을 떠보니 눈가가 너무 따갑다는 것과 애들은 반장이 너무 힘들어서 울었다고 오해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며칠간 방에 풀어놨던 짐을 정리하고, 각자 챙겨온 가방을 멨다. 돌아가는 날이기에 교복을 입어야 했다. 애들은 그냥 사복을 입으면 안 되겠냐고 투덜거렸다. 그러다가도 바네사와 눈이 마주치면 얌전해졌다. 투덜거리는 거도 바네사에게 부담이 간다고 생각했나 보다. 얌전히 교복을 입었다.
바네사는 반장이기에. 짐을 챙기고 나서 다른 방을 돌아다녀야 했다. 역시나 확인 때문이었다. 빠진 애들은 없는지, 아픈 애들은 없는지 확인해야 했다. 오해가 반 전체에 퍼져버렸는지. 마주치는 애들마다 바네사에게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다. 몇몇은 고생 많았다면서 격려했다. 격려가 담긴 말에.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어서. 그런 이유로 울었다고 해명할 수도 없어서. 바네사는 마지못해 격려를 받아들였다.
복도로 나올 때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당사자인 자기도 실감이 나질 않는데. 오해를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 생각을 빠지던 도중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리수거함이 있는 쪽이었다. 문 너머로 익숙하다 못해 두근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오해를 풀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이자. 바네사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사람. 분리수거를 끝내고 걸어오던 올가와 마주쳤다. 바네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완전히 달라져 버린 바네사와 다르게. 올가는 평소 같았다. 차라리 더 차갑거나, 더 다정하면 좋으련만. 바네사를 보고 살짝 손을 흔들더니. 모여 있어야 하는 곳으로 가버렸다. 그게 숙소에서 봤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남은 일정을 소화하는 동안에. 바네사는 많은 생각을 했다. 대부분 쓸데없는 상상으로 가득 찼지만. 문득 한 가지 상상에 꽂히게 되었다. 모두 다 내가 꾸는 꿈이 아닐까. 수학여행도. 홧김에 저질러버리듯이 고백한 거도. 올가가 고백을 받아준 거도. 답답한 마음에. 자기도 실감하지 못하는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마지막으로 단체 사진을 찍고, 애들을 통솔하며 버스로 가는 걸음은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역까지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기차에 타고, 여행 첫날에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이동하는 내내 피곤함에 눈이 감길 뻔했지만. 바네사는 잠들지 못했다.
이대로 잠들었다가 눈을 뜨면. 진짜로 꿈에서 깨버리는 게 아닐까. 시시한 이유로 필사적으로 잠을 참았다. 차라리 선생님이나 애들이 바네사를 부르면 좋으련만. 다들 피곤해서 곯아떨어졌다. 다리도 꼬집어보고, 물도 마셔보고, 음악도 들어봤다. 몇 시간 동안 자신과 싸움을 계속하자. 역에 도착했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안내 방송이 나오기 전까지는 너무 졸렸는데. 방송을 듣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꿈이고 현실이고 간에. 수학여행 내내 몸에 입력된 신호가 바네사를 움직이게 했다.
선생님과 함께 마지막으로 인원 확인을 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다 모였다. 모두 모인 걸 확인하자. 선생님은 간단히 종례했다. 바네사는 맨 뒤에서 종례를 들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꿈이든 현실이든. 반장으로 할 일은 끝났다. 어느 영화의 주인공처럼. 자유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비어있던 옆자리가 누군가의 발걸음에 채워졌다. 올가였다. 올가는 뒷짐을 지었다. 뒷짐을 지는가 싶었더니. 온기가 느껴져서 고개를 들었다.
올가는 뒤에서 손을 뻗어 바네사의 손을 몰래 잡아줬다. 근처에 있던 애들은 두 사람이 뒤에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다들 종례를 들으면서 친한 애들끼리 수다를 떨고 있었다. 바네사가 올가를 바라보자, 올가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이내 시치미를 떼듯이 다른 곳을 바라봤다. 그래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바네사의 손을 부드럽게 문질러줬다.
손길이 간지럽고, 따뜻했다. 아. 꿈이 아니구나. 꿈이 아니라는 걸 자각하는 순간. 행복함이 밀려들어 왔다. 누군가가 간지럼이라도 태우듯이. 가슴팍이 너무 간지러워서 참을 수 없었다.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참는 게 힘들었다. 손가락 틈을 비집고 깍지를 꼈다. 밀려 올라가는 입가를 어떻게든 잡아당겨 보려고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평소랑 다르게 너무 빨리 포기해버렸다. 어쩔 수 없었다. 닿고 있는 손가락이 간지러워 죽겠는데.
참을 수 있어야 말이지. 바네사도 다른 데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바로 집에 돌아가라는 잔소리가 섞인 종례가 끝나자 수학여행이 끝났다. 애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저마다 인사를 나누고 다른 길로 갈라졌다. 어느새 올가와 바네사만 남게 되었다. 그제야 올가는 잡았던 손을 놓아줬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도 되겠지만. 남아 있는 걸 마저 해결해야 했다.
편지. 바네사는 올가에게 학교에 가자고 했다. 올가는 불쑥 들이 밀게 된 제안에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바네사의 제안을 받아줬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출구로 나왔더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그림자가 길어졌다. 학교가 역에서 가까운 게 좋을 줄은 몰랐다. 길어진 그림자를 이끌고 같이 학교로 갔다. 선생님들이 허락해주지 않으면 어쩌나 싶어 걱정했는데. 예상외로 어렵지 않았다.
수학여행을 다녀온 일학년이 이 시간에 학교에 오다니. 선생님들은 두 사람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지만. 바네사가 놓고 가버린 참고서가 있다는 핑계를 대자. 속아주는 척하며 핑계를 받아줬다. 허락을 받고 교무실에서 교실 열쇠를 가져왔다. 이제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데. 바네사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동안 올가는 가만히 있었다. 바네사와 같이 들어가지 않았다.
뒤늦게 이상하다 싶어 바네사가 뒤를 돌아보니. 올가는 복도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소설로 치면 미리 알고 있는 결말이었지만. 중간에 비어있던 과정만큼은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마음을 적어둔 편지만큼은. 여기까지 닿은 과정만큼은. 온전히 바네사만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바네사 혼자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나 싶어 교실 문은 열어뒀다. 비어 있는 교실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리움을 느낄 정도로 오래된 건 아니지만.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가 앉아 있었기에. 교실이 비어있던 적은 별로 없었다.
한 발짝 두 발짝. 사물함에 가까워질 때마다. 가슴이 점점 더 두근거렸다.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 선물을 열어볼 때도 이 정도로 떨리지 않았다. 심호흡하면서 사물함을 열자. 말해줬던 거처럼 편지가 있었다. 하긴 올가가 거짓말을 했던 적이 있었던가. 무늬 하나 없는 갈색 편지 봉투. 뒤집어보니 정갈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바네사에게. 특별한 장식이 없어도. 멋들어진 필기체가 아니어도. 바네사에게 특별한 편지였다. 조심스레 편지를 꺼내 들었다. 편지를 가방에 넣었다. 구겨지지 않게 소중하게 다뤘다.
교실에서 나와서 문을 닫고. 뒤를 돌아봤다. 복도에서 올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름 방학에도 이렇게 기다려줬지. 감회가 새로워져서 미소를 짓고 말았다. 편지를 잘 읽어보겠다는 말에. 올가는 멈칫하다가 미소를 지어줬다. 놀라는 반응을 기대했지만. 이런 반응도 좋아져 버려서. 아무래도 어떻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정말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가져왔던 열쇠를 제자리에 놓고 계단을 내려갔다.
올가와 함께 교문을 나서자. 차가운 저녁 공기가 찾아왔다. 아까는 해가 지고 있었는데. 이제 밤하늘이 드리워졌다. 하늘에 달까지 걸려 있었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일정표에 나왔던 도착 시각을 훌쩍 넘어버리고 말았다. 부모님에게 늦게 돌아왔다며 혼날지도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오래 걸리는 길을 선택했다. 바네사가 여름 방학 때 알려줬던 길이자. 올가가 줄곧 혼자 집으로 돌아갈 때 걸어왔던 길이었다.
조명을 받는 올가의 옆모습이 보였다. 거리낌 없이 마음속에 잔뜩 담아냈다. 흔들림 없는 모습은 변함없지만. 주변은 변한 게 너무 많았다. 여름에 올가를 보며 생각했던 게 떠올랐다. 두 번 다시는 이런 여름을 만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 마음속으로 펜을 꺼냈다. 여름이라는 단어를 대각선을 지익 그었다. 여름 위에 고쳐 쓰듯이 다른 두 글자를 썼다. 계절. 두 번 다시는 이런 계절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친구에서 다른 관계로 넘어가는 계절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문득 바네사는 궁금해졌다. 가방에 고이 모셔둔 편지. 올가는 편지에 어떤 말을 적어놨을까. 어떤 말로.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줬을까. 있잖아. 세 글자로 첫 말을 띄웠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방끈을 고쳐 맸다. 언제나 그랬듯이. 올가는 기다려줬다. 여태까지 미뤄왔던 게 많았던 탓에. 바네사는 미룰 수가 없었다. 궁금한 걸 참지 못하고. 올가에게 바로 물어봤다.
"편지, 지금 읽어봐도 될까?"
아까도 흔들리지 않았으니까. 올가라면 지금 읽어보라고 하지 않을까. 네가 원한다면 읽어보라는 다정한 말로. 부끄러워하지 않고, 평소랑 같이 차분한 목소리로. 예상과 다르게. 올가는 대답이 없었다. 바네사에게 돌려줄 대답도, 이렇다 할 말도 없이 한참 걸었다. 신호등이 보일 때까지 걷고 나서야 걸음을 멈췄다. 같이 멈춘 바네사를 보면서 대답했다. 올가를 알고 나서 지금까지. 바네사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목소리를 들었다.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대답하는 올가의 목소리가 떨렸다.
"…집에 가서 읽어줘."
매번 똑바로 바라보던 시선이 바네사를 피했다. 얼굴을 보여주지 못했다. 옆모습 사이로 삐져나온 귀가 보였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거 같았다. 귀 끝까지 빨개져 있었다.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딱 봐도 감정을 알 수 있는 모습을 보니. 바네사는 확신할 수 있었다. 올가는 바네사를 좋아한다. 바네사와 같은 의미로 좋아했다. 정말로 좋아하고 있다.
바네사가 손을 뻗었다. 바네사의 손가락이 올가의 손에 닿자. 올가는 부끄러워하다가도 바네사의 손을 잡아줬다. 오해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이제 와서 느낄 수 있었다. 올가 손가락에서 맥박이 느껴졌다. 마음마저 다 확인했는데도. 아직도 열기가 가시질 않았다. 두근거리고 떨리고 있었다. 바네사도 마찬가지였다. 올가의 대답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말을 하는 대신에. 소리 내 웃고 말았다. 잡은 손마저 빨개지는 느낌이었다.
조금 더 얘기를 나누고, 저녁이라도 같이 먹고 싶었지만.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내일은 토요일이었다. 시간을 마음껏 보낼 수 있는 주말이었다. 설레서 잠들지 못하겠지만. 잠을 설치고 내일이 오면. 또다시 올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와중에 신호등에서 녹색 불이 켜졌다. 그래. 내일이 있잖아. 올가와 발을 맞추며 걷기 시작했다. 밤하늘에 머물러있던 별이 쏟아지는 거 같았다. 변해가는 계절을 거쳐서. 바네사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계절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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