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의 유니버스

[올가바네올가] 산하엽

투명하지만 사라지진 않는

점심을 먹고 나서 연습실에 왔다. 연주회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연습을 거르는 건 좋지 않으니까. 시간이 날 때면 연습실에 오는 게 일상이었다. 바이올린을 쇄골에 얹어놓았다. 활을 들었다. 활을 잡은 손이 유독 아파졌다.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느낌보다 바이올린 소리는 경쾌했다. 아름다운 활주가 이어졌다. 완연한 봄기운처럼 가득했다. 연주는 아름답지만, 마음은 연주를 따라가지 못했다. 연주할 때마다 슬픔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곡을 연주해도. 고통과 슬픔이 뚜렷하게 기억났다. 슬픔을 한데 모아 활로 다듬었다. 점점 박자에 어긋나버렸다. 검지가 활을 제대로 잡지 못할 만큼 부르르 떨렸다. 더 버티지 못하고 바이올린을 내려놓았다. 손이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떨렸다.

감정은 바네사를 옭아매었다. 어깨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시계를 봤다. 벌써 오후 다섯 시였다. 시간을 잊고 연주를 했다. 오늘은 이걸로 끝이구나. 연습을 진행하긴 어려워 보였다. 바이올린을 케이스에 넣고, 악보를 정리했다. 문을 여는 내내 손이 욱신거렸다.

오후 다섯 시가 다 되어가는 데도 복도는 화창했다. 해가 길어진 게 실감 났다. 날씨도 손부채질 할 만큼 더워졌다. 케이스를 손에 들고 복도를 걸어갔다. 창문마다 햇빛이 들어오고 벽으로 가려진 부분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파릇파릇했던 초록 잎사귀 틈으로 푸른 여름이 스며들고 있었다. 봄을 덮으려고 하고 있었다. 계절은 이전 계절을 덮어내려고 필사적이었다.

케이스를 내려놓고 창문에 등을 대었다. 바네사의 몸을 타고 그림자가 길어졌다. 한숨 돌리던 차에 올가와 마주쳤다. 기대있던 창문에 등을 떼자 그림자가 짧아졌다. 올가를 보니 스쳐 지나간 기억이 있었다. 가끔 연습하던 연주를 평화롭게 들어주던 올가가 있었다.

바네사의 연주가 슬프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마음을 꿰뚫은 말이었다. 바네사에게 감상을 말한 이후로. 올가는 연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바네사도 올가에게 의견을 묻지 않았다. 연주회가 끝나고 다른 기사들이 대단하다며 칭찬할 때도. 올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할 뿐이었다.

올가는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로드에게 제출할 보고서겠지. 올가와 사소한 대화를 나눴다. 들고 있는 게 뭐냐고 물어보니 보고서라고 했다. 케이스를 보고 연습하고 오는 길인 걸 알았나 보다. 컨디션 조절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을까. 올가는 예상 범위 내의 말을 건네줬다. 매번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그럼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떨리는 손을 감추려고 살짝 주먹을 쥐었다. 대답과 다르게 무리해버렸으니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왜 그럴까. 연주에 슬픔이 묻어나는 걸 들켰기 때문일까.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올가는 묵례를 하고 다시 걸어갔다. 바네사도 손을 흔들며 올가를 보내줬다. 올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한숨을 쉬었다. 쥐고 있던 주먹을 펴자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다른 손으로 떨리는 손을 붙잡았다. 계절뿐만 아니라 바네사도. 무언가를 덮어내려고 필사적이었다.

식탁에 있던 치즈 케이크가 바닥에 떨어졌다. 딱딱한 바닥에 버티지 못하고 뭉개졌다. 뭉개진 케이크가 누군가의 발에 짓밟히며 터져갔다. 잔인한 꿈을 꿨다. 섬뜩한 느낌에 눈이 번쩍 떠졌다.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오싹함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상실의 기억은 계속 묻어뒀던 걸 끄집어냈다. 계기나 맥락도 없이. 그냥 자기 마음대로 나타나서 바네사를 헤집어버렸다.

아발론에서 지내며 그런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또 기억이 휘몰아쳤다. 책상에 올려뒀던 잔을 잡았다. 차가운 물은 이미 미지근해졌다. 그대로 잔을 들이켰다. 참으려고 했다. 물을 마시며 삼켜내려고 했다. 기억이 주리를 틀며 마음을 비틀어냈다. 다 삼켜내지 못하고 뱉어내야 했다. 손으로 입을 가리며 기침했다. 기침에 몸이 들썩일 때마다 괴로워했다. 들썩이는 가슴팍을 붙잡으며 창밖을 봤다.

바깥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꿈을 꾸게 되면 누워있던 곳에서 머무를 수 없었다. 그럴 때면 매번 밖으로 나갔다. 우산도 없이 밖으로 나왔다. 습한 비 냄새가 바네사를 둘러쌓았다. 차가운 공기를 입안에 가득 넣어봤다. 축축했다. 따뜻한 햇볕도 없고, 편하게 쉴만할 그늘조차 없었다. 옷에 빗방울이 튀어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

걸어가던 길 끝에는 정원이 있었다. 다들 비를 피하느라 각자 숙소에 있는 건지. 정원에 바네사 밖에 없었다. 먹구름이 쏟아내는 비에 젖어갔다. 숨을 깊게 쉬어도 시원하게 뚫어주지 않았다. 잃어버리고 싶지만,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많았다. 잃어버릴 수 없다면. 안고 가야만 했다. 눈꺼풀이 따끔거렸다. 빗소리가 투둑거리며 이어지자 눈을 감았다가 떠봤다.

고개를 숙여 정원에 심어진 꽃을 봤다. 비에 적셔져 꽃잎이 투명한 꽃이 보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을 되짚어보며 이름을 찾아냈다. 정원에 심어둔 흰 꽃을 처음 봤을 때. 바네사가 지나가던 루인에게 꽃의 이름을 물어봤다. 루인이 바네사에게 미소지으며 대답해주던 이름.

산하엽. 그래. 내 마음은 산하엽이었다. 한 번이라도. 하얀 꽃잎을 드러내고 싶었다. 젖어 들어가는 마음을 보이고 싶었다. 사람은 매번 모순적이었다. 드러내고 싶으면서도. 숨기고 있었다. 마음에는 늘 비가 내렸다. 늘 눈물이 흘렀다. 꽃잎은 속절없이 젖어갔다. 슬픔으로, 후회로, 애달픔으로. 감정에 잠겨 투명해진 꽃잎에 자신조차 속아갔다. 투명해지면 무언가가 보이는 걸 잊어갔다.

세상이 출렁이고 있었다. 눈물인지 비인지 알 수 없는 물로 고인 눈이 바라보던 세상은 늘 그래왔다. 뿌옇게 파도가 쳤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뜨거운 게 흘러내려 갔다. 파도치던 게 멈추자 다른 것이 보였다. 아무도 없던 정원에 올가가 있었다. 올가는 우산을 들고 있었다. 바지 밑단이 비 때문에 젖어 들었다. 올가가 입고 있던 모든 옷의 색이 진해졌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올가가 얼마나 급하게 따라왔는지 알 거 같았다. 옷에 빗물이 튈 정도로 급하게 뛰어왔지만. 숨을 고르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비에 흠뻑 젖은 바네사를 봐도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두 발자국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바네사를 바라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꼬리를 올리는 게 너무 힘들었다. 안간힘을 쓰며 미소 지었다. 자신을 바라만 보는 올가에게 바네사가 먼저 말을 걸었다.

"비가 내릴 줄 몰랐어요."

뻔한 거짓말이었다. 하늘은 종일 비를 내릴 거라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선전포고하듯이 으르렁거렸다. 바네사가 나올 때 먹구름은 이미 비를 쏟아붓고 있었다. 올가는 바네사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가만히 우산을 쥔 채 바네사를 바라봤다. 문득 지겹다고 생각했다. 혼자 비를 맞는 거도. 혼자 눈물을 삼키는 거도.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말을 이어갈 때 아주 짧은 쉼을 두었다.

"우산 좀 빌려줄래요?"

여태까지 마음속에 담아온 슬픔이 너무 컸다. 흘러넘치느라 연주에 묻어날 만큼. 버티지 못해 꿈에서 나타날 만큼. 여태껏 쌓아왔던 감정이 뿌리 뽑히고 부서져서 폐허가 된 마음에 큰 부분을 차지했다. 다른 감정이 들어올 공간은 없다고 생각했다. 남이 이해해줄 수 있는 슬픔이 아니었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니 슬픔은 바네사의 몫이었다. 전부 혼자서 받아내고, 버텨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올가가 마음속에 들어와 버렸다. 발을 내디뎠을 뿐인데도. 바네사가 숨겨놓은 모든 걸 이해하고,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연주에 묻어난 슬픔을 읽어낼 때는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말도 안 되는 얘기일 수도 있지만. 철렁거리면서도 편안함을 느꼈다. 마음속에 담긴 생각이 너무 많았다. 슬픔에 젖어 들어 투명해졌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에 거리가 좁혀졌다. 바네사 머리 위에 우산이 씌워졌다. 그제야 바네사는 올가를 마주 봤다. 흔들림 없고 깨끗한 눈동자였다. 바네사와 같을 수 없는 동공이 보였다. 우리가 엘프와 인간인 거처럼. 우리는 같을 수 없었다.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올가가 지은 표정을 보게 되었다. 올가를 보고 나서야. 바네사는 생각을 바꿔야 했다.

얼굴이 아릿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꾹 다문 입술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드러낸 상처를 봐도 섣불리 위로하지 못해 허공에 머물렀다. 바네사가 주먹을 쥔 것처럼. 올가도 주먹을 말아쥐고 있었다. 우리는 같은 걸까. 변하고 있는 걸까. 올가는 바네사의 손에 자기가 쓰고 있던 우산을 쥐여줬다. 손잡이에 얽혔던 손가락이 천천히 떨어졌다.

바네사와 우산을 같이 쓰지 않았다. 오롯이 바네사에게 씌워줬다. 올가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언제나 그래왔다. 우리의 마음은 가라앉는데. 빗방울은 즐겁게 박자를 타며 떨어졌다. 그대로 뒤로 물러갔다. 손끝으로 닿아오지만 올가를 잡지 못했다. 올가는 비를 맞으며 돌아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걸어갔다.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정원에 바네사만 남겨지게 되었다.

더는 비가 내리지 않는데도 눈물이 흘렀다. 아팠다. 투명해서 잘 보이지 않을 땐 아프지 않았는데. 비를 맞지 않게 된 마음이 흰 꽃잎을 드러냈다. 숨겨왔던 마음이 나타났다. 슬픔과 후회가 섞여버렸다.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파졌다. 올가는 바네사 주위를 맴돌며 테두리만 그려왔다. 상처받은 게 안쓰러워 차마 쓰다듬어주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바네사가 아파하면 우산을 건네주러 왔다.

자신을 위해주는 올가를 마주할 수 없었다. 우산을 쥐지 않은 손으로 한쪽 눈을 가렸다. 절반조차 보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마음속에서 뜨거운 감정이 올라오다가 눈 밑으로 흘러내렸다. 입술을 비틀어서 막았다. 그래도 울음은 간간이 입술 사이로 빠져나갔다.

슬펐다. 더 담아낼 감정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다른 감정이 마음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더 담아낼 수 없어서 빠져나오겠지. 지금처럼 슬퍼하며 마음을 젖게 할 것이다. 젖어버린 마음은 투명해져서. 또다시 생각을 드러내고 말 것이다. 

올가가 지었던 표정이 마음속에 새겨져서 지워지질 않았다. 이제 숨길 수도 없었다. 없었던 일로 할 수 없었다. 우산이 떨어졌다. 두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가렸다. 상념에 젖었다. 너무 투명해져서. 잘못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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