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하루트
당신과 순간의 사이
"바이올린을 가르치기로 했어요." 느닷없는 선언이었다. 해가 점점 저물어 가고 있는 저녁. 바네사는 감자 칼과 감자를 쥔 채 말했다. 감자는 예쁘게 깎여 있었다.저녁 준비를 하다가 말할 거리는 아닌 거 같은데. 올가는 갑작스러운 선언에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도마 구석에는 양파와 당근이 채를 썬 채 올려져 있었다. 바네사가 깎은 감자를 받아서 도마에 올
말끔한 차림인 바네사가 벽 한쪽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벽에 걸려있는 칠판에 글씨가 쓰여 있었다. 요즘 두 사람 사이에서 유행하는 게 생겼다. 칠판을 이용한 필담이었다. 시작은 올가가 가져온 칠판이었다. 걸어보니 벽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큰 칠판이었다. 수직 수평이 잘 맞았는지 확인하는 올가에게 이유를 물어봤다. 일정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대답이
올가는 미루는 성격이 아니었다.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면 반드시 해결했다. 해결하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렸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정답을 다 알고 있는 시험이나 다름없었다. 문제에 맞춰서 미리 준비해둔 답을 답지에 적었다. 문제마저 간단했다. 좋다, 싫다. 맞다, 틀리다.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객관식일 뿐이었다. 주관식도 마찬가지였다. 지켜야 하는
오늘은 로드가 주최하는 연회가 있는 날이었다. 동맹국들과 함께 하는 게 아니라 아발론에서 기사들끼리 즐기는 연회였다. 딱히 기념할 만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기사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단 이유로 연회를 벌이곤 했으니까. 그때마다 로드 뒤에서 루인이 예산 때문에 골치아파 했지만. 바네사는 준비를 마치고 거울 앞에 섰다. 파란색 실크 드레스가 결을 타고
점심을 먹고 나서 연습실에 왔다. 연주회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연습을 거르는 건 좋지 않으니까. 시간이 날 때면 연습실에 오는 게 일상이었다. 바이올린을 쇄골에 얹어놓았다. 활을 들었다. 활을 잡은 손이 유독 아파졌다.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느낌보다 바이올린 소리는 경쾌했다. 아름다운 활주가 이어졌다. 완연한 봄기운처럼 가득했다. 연주는 아름답지만, 마
"요즘 비가 잦네요." 바네사가 내민 손바닥에 빗방울이 담겼다. 손금 사이로 밀려나던 빗방울은 속절없이 밑으로 흘러갔다. 모든 게 아래로 흘러가는 날이다. 아침부터 심상치 않더라니 일이 끝난 이 시간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비로 적셔져서 색이 더 짙어졌다. 파견을 나온 날부터 지금까지. 며칠 내내 비가 내렸다. 도착하자마자 우르르 쏟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