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바네올가] 필담
기다리게 되는 대답
말끔한 차림인 바네사가 벽 한쪽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벽에 걸려있는 칠판에 글씨가 쓰여 있었다. 요즘 두 사람 사이에서 유행하는 게 생겼다. 칠판을 이용한 필담이었다. 시작은 올가가 가져온 칠판이었다. 걸어보니 벽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큰 칠판이었다. 수직 수평이 잘 맞았는지 확인하는 올가에게 이유를 물어봤다. 일정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두 사람이 지내는 곳은 너무 한적하다 못해 조용한 곳이었다. 지내던 방식이 점점 달라지고 있었다. 해야만 했던 일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로 변했다. 그래도 관성이라는 게 있어서. 처음 몇 달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실제로 정원을 다듬는 일을 해야 하니 바쁘게 지내야 했다. 지내는 동안 계절이 한 번 바뀌었다. 정원도 나름대로 예쁘게 꾸며졌다. 한적한 생활이 자리 잡게 되었다.
올가는 아무 생각 없이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바네사가 부르거나, 해야 할 일이 떠오르면 일어나는 게 일상이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올가를 존중하기로 했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 변해가는 자신에게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마을에 다녀오겠습니다.
반듯한 필체로 적힌 글씨를 보니 올가의 목소리가 저절로 들렸다. 문장 옆에는 몇 시에 돌아오겠다고 덧붙여 놨다. 또 남겨둔 게 있나 살펴봤다. 바네사가 어젯밤 칠판 구석에 남겨둔 글이 눈에 띄었다. 자러 가기 전에 종종 남겨두곤 했다. 무언가를 더 사 와달라고 부탁하거나,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봐달라고 부탁하는 글이었다. 바네사가 밤에 글을 남겨두면, 올가가 다음 날 아침에 확인했다는 표시처럼 아래에 글을 남겨줬다. 알겠습니다. 간결한 여섯 글자였다.
올가가 성심성의껏 대답해주듯이 남겨주는 건 좋았다. 그래도 뭔가 아쉬웠다. 요즘은 질문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어제 남긴 질문이었다.
오늘은 몇 시에 일어났어요?
올가가 질문을 놓칠 리가 없었다. 질문 아래에 답글처럼 남겨놓은 게 있었다.
여덟 시에 일어났습니다.
일찍 일어났구나. 만나서 말해줘도 되는 얘기인데도 올가는 별다른 말없이 답변을 써줬다. 사랑해주는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괜히 마음이 따뜻해졌다. 따뜻해진 마음을 품은 채 다이닝 룸으로 가봤다. 식탁에는 샌드위치가 올려져 있었다. 대각선으로 반듯하게 잘려져 있었다. 누가 만든 작품인지 알 거 같았다.
의자에 앉기 전에 밖으로 통하는 문을 활짝 열었다. 날이 점점 더워지고 있어서 문을 열게 되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날이지만 날씨는 화창했다. 시계를 봤다. 올가는 칠판에 적어둔 시간에 딱 맞춰서 돌아왔다. 덕분에 시간에 쫓겨 조급해하거나, 일정이 틀어질까 봐 걱정할 일이 없었다. 돌아오려면 얼마나 남았는지 머릿속으로 가늠했다. 올가가 돌아올 때까지 여유가 있었다. 샌드위치를 먹고 나서 느긋하게 준비하면 될 거 같았다.
점심은 무엇을 만드는 게 좋을까. 점심에 만들 걸 생각하며 샌드위치를 집었다. 한 입 베어 물고 먹던 와중에 익숙한 맛이 느껴졌다. 설마. 베어 물었던 곳을 들여다봤다. 저번에 남겨놨던 올리브와 치즈가 들어있었다. 보자마자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나와버렸다. 아침에 외출하는 날이면 바네사를 위해 샌드위치를 만들어줬다. 일어난 바네사가 느낄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올리브와 치즈가 있다면 빼놓지 않고 넣어놨다. 바네사가 좋아하는 음식인 걸 알고 있으니까. 당연한 결과였다.
좋아하는 걸 빠짐없이 챙겨주고, 샌드위치 재료로 생각하는 건 한결같았다. 말해주지 않으면 쭉 샌드위치 재료로 생각하겠지. 나름대로 귀여울 거 같았다. 필담도 그렇고, 샌드위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이 쓰거나 만든 거나 다름없는데. 올가가 남긴 글이 있고, 올가가 직접 만들어줬단 이유만으로. 같아 보이지만 전혀 다른 단어가 되어버렸다.
덕분에 점심 만들 때 더 즐겁게 만드는 기분이었다. 즐거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재료 손질하거나 요리 실력도 점점 늘어서 만드는 시간이 단축되었다. 자기밖에 모르는 모습이지만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자기 자신이 아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요리를 완성하고 시계를 보니 시간도 딱 맞았다. 만들어둔 점심을 그릇에 담아두고 성취감을 느꼈다. 이곳에서 지내면서 사소한 거에 즐거워하고, 자기 자신을 칭찬하게 되는 날이 많아졌다. 좋은 현상이라 생각했다.
잔디가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하던 걸 멈추고 문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봤다. 올가가 돌아왔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었다. 자세히 보니 봉투를 두 개나 들고 있었다. 대신 들어주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올가는 딱 봐도 가벼운 걸 바네사에게 건네줬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을 들여다보니 마을 사람들에게 추천받아서 사 온 것들이 담겨있었다. 봉투를 내려놓고 미리 준비해둔 물을 건네줬다.
봉투에 들어있던 걸 같이 정리했다. 꺼내다 보니 봉투에 담긴 스콘도 있었다. 올가에게 물어보니 마을 사람들이 디저트로 먹으라며 선물해 준 거였다. 같이 정리하니 금방 끝낼 수 있었다. 올가에게 고생했다고 말해주며 가볍게 껴안았다. 토닥여주고 다시 떨어졌다. 손을 씻고 마주 앉아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시간에 맞춰서 바람이 살살 불어왔다. 그릇과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점심을 먹으면서 마을 사람들과 얘기했던 걸 말해줬다. 인과 관계를 보고하듯이 딱딱하게 말한 적이 있었다. 올가에게 익숙한 화법이었다.
익숙하지 않았지만 이해했다. 요즘은 자연스럽게 얘기해줬다. 짧고 서툴렀지만 노력해줬다. 심지어 바네사에게 어땠냐고 물어봤다. 일방적으로 얘기만 하고 끝내지 않았다. 그만큼 관심을 가져줬다. 점심을 먹고 나니 내리쬐던 햇빛이 누그러졌다. 시계를 보니 늦은 오후가 되었다. 설거지를 하는 올가를 불렀다. 밖에서 스콘을 먹자고 권했다. 올가는 설거지를 마저 끝내고 오기로 했다. 봉투에서 스콘을 꺼내서 그릇에 얹었다. 포크 두 개와 칼을 챙겼다. 문턱을 넘자마자 바로 밖이었다. 이럴 때는 참 편리했다.
데크에 내놓은 의자에 앉았다. 뒤늦게 따라온 올가가 잔을 건넸다. 냉침한 차와 얼음이 담긴 잔이었다. 바네사가 잔을 받아들자 옆에 앉았다. 바로 마시지 않고 작은 책상에 올려뒀다. 얼음이 담겼던 잔에 물방울이 맺히고 나서야 대화를 시작했다. 결론이 딱히 필요 없는 얘기를 나눴다. 최근 들어 올가와 자주 나누는 대화 주제는 잠이었다. 요즘 그렇게 잠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고민은 아니었다. 지나가듯이 가볍게 말했다. 올가도 가볍게 받아줬다.
피로가 쌓인 게 풀린 거로 추측했다. 그런 걸까요. 그럴 겁니다. 간단하게 대화가 끝났다. 이번에도 결론은 나지 않았다.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않았다. 가져온 스콘을 반으로 잘라서 나눠 먹었다. 올가는 바네사가 자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고 말해줬다. 자고 싶을 때 마음껏 자면 좋겠다고 말해줬다. 상쾌하고 담백한 목소리 때문일까. 진심이 담겼지만 무겁지 않았다. 덕분에 바네사는 고맙다고 말할 수 있었다. 부담 없이 받아줄 수 있었다.
바네사도 올가가 여유로워져서 좋아 보인다고 말했다. 올가도 고맙다고 받아줬다. 의자 손잡이에 올려진 올가의 손에 자기의 손을 얹었다.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이 귀엽다고 말해줬다. 올가는 이해하기 힘든 건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여워요. 바네사가 반복해서 말하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순간 대화가 멈춰버렸다. 계속 말을 걸고 싶었지만. 이대로 있어도 괜찮겠단 생각이 들었다. 의자에 몸을 한껏 기댔다.
같은 곳에 함께 있으면서, 같은 걸 먹고, 같은 풍경을 바라봤다. 일상에서 보내는 모든 건 함께하는 여행이 되었다. 집안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시계에서 나는 소리였다. 종소리를 신호 삼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보니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석양을 한껏 받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벌써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같이 저녁을 만들었다. 아침에는 올가가, 점심은 바네사가, 저녁은 같이 만드는 게 두 사람만의 규칙으로 자리 잡았다.
저녁을 먹는 내내 따뜻해졌다. 날씨가 무더워서 푹푹 찌는 느낌과 다른 느낌이었다. 설거지도 저녁에는 같이 나눠서 했다. 어찌 보면 저녁은 두 사람이 온전히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니까. 하나라도 더 같이하고, 일 분이라도 더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나란히 칠판 앞에 섰다. 하루를 마무리하기 전에 다음 날 해야 하는 일을 정리하는 일과가 자리잡혔다. 먼저 지우개를 들어서 적어뒀던 글을 지웠다. 신기하게도. 남겨져 있던 글이 사라지는 순간 올가가 돋보였다. 올가와 소소하게 얘기를 나눴다.
내일도 여덟 시에 일어날 거냐고 물어봤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늦게 일어날 거라고 대답해줬다. 그래도 바네사보다 빨리 일어날 게 뻔했다. 올가가 적어두는 걸 지켜보니 내일 무엇을 할지 상상이 되었다. 정원 꽃에 물 주기, 키클롭스 정비, 독서. 사실 매일 하는 일이기에 상상할 거리도 없었다. 내일 아침에 남은 스콘을 마저 먹기로 했다. 올가는 그대로 받아 적어줬다. 내일 아침 메뉴는 스콘으로 정해졌다.
이따금 바네사가 칠판에 직접 자기 일정을 썼다. 연주회도 끝났고, 마을 사람들이 수업을 부탁한 것도 없었다. 그만큼 여유로웠지만 적어둘 게 있었다. 내일 밤에 마당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로 했다. 올가만 들을 수 있는 작은 연주회를 열고 싶었다. 어느새 넓은 칠판에 절반을 채워놨다. 적을 게 별로 없을 거 같았는데. 매번 칠판 절반을 차지하는 게 기본이었다. 분필을 내려놨다.
바네사는 한 발자국 떨어져서 칠판을 바라봤다. 매일 두 사람의 시간이 담기게 되었다. 새삼스럽지만 지나간 시간을 보관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물건이었다. 함께하는 여행이 아니라 남겨둔 흔적을 되짚는 기분이었다. 영영 만나지 못하고, 겹치지 못할 시간 선에 남겨진 흔적. 평생선 같은 느낌이었다. 함께하지 못하지만 쓸쓸하지 않았다. 내일의 올가가 이어서 남겨줄 테니까.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 찼기에 외롭지 않았다. 올가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 욕심을 내보자면. 올가도 같은 감정이길 바랐다.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는 언제나 부족했다.
퍼뜩 스쳐 지나간 기억이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내리 앉았던 날, 소리 내어 바네사를 부르고 다가와 줬던 날에. 올가가 바네사에게 해줬던 말이 있었다. 눈에 잘 보이는 중앙에 분필을 대었다. 오늘은 다른 곳에 쓰기 시작했다. 올가가 정리하는 틈을 타서 칠판에 글을 남겼다. 쓰는 내내 바네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내일도 날씨가 좋겠죠?
다른 날에 비해 눈이 일찍 떠졌다. 그래도 늦게 일어나긴 했는지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시원한 물소리가 들렸다. 창밖을 내다보니 올가가 보였다. 호스로 정원 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어제 칠판에 적은 대로였다. 낯이 익은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바네사가 사 온 밀짚모자였다.올가에게 처음으로 보여준 날이 떠올랐다. 올가는 밀짚모자를 쓴 바네사를 보고 미소 지어줬다. 잘 어울린다고 칭찬해주며 가볍게 입 맞춰줬다.
지금 보니 올가한테도 잘 어울렸다. 나중에 같은 걸 사서 올가에게 선물해 줘야겠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칭찬해주고 싶다는 마음뿐만은 아니었다. 어제 바네사가 몰래 적어둔 글. 오늘 올가가 보고 무슨 말을 적어놨을지 기대되었다.
시간이 된다면 같이 산책하러 갈래요?
칠판으로 가봤다. 바네사가 남겨둔 글 밑에 어김없이 올가가 아침에 적어둔 말이 있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입니다.
보자마자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통하는 문은 이미 열려있었다. 문턱을 넘어서며 걷는 발걸음이 점점 더 빠르고 경쾌해졌다. 올가와 가까워질수록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숨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미소를 한껏 머금은 채 소리 내어 올가를 불렀다. 자신을 바라봐주는 올가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의 발이 서로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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