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바네올가] 일상의 자락
피어난 이야기를 너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기로 했어요."
느닷없는 선언이었다. 해가 점점 저물어 가고 있는 저녁. 바네사는 감자 칼과 감자를 쥔 채 말했다. 감자는 예쁘게 깎여 있었다.저녁 준비를 하다가 말할 거리는 아닌 거 같은데. 올가는 갑작스러운 선언에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도마 구석에는 양파와 당근이 채를 썬 채 올려져 있었다. 바네사가 깎은 감자를 받아서 도마에 올릴 뿐이었다. 감자를 채를 썰면서 언제부터 시작하냐고 물어봤다. 프라이팬에 물을 끓이던 바네사에게 이번 주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채를 썬 감자를 건네주며 달력을 봤다.
오늘은 목요일이었다. 잠깐 못 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지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늘 저녁 메뉴는 음식만 있는 게 아니었다. 마저 못한 얘기는 저녁 메뉴로 남겨둔 모양이었다. 바네사가 선보일 때까지 기다기로 했다. 저녁 식사가 완성되고 창밖을 보니 해가 져서 하늘이 짙은 남색으로 물들었다. 늦은 저녁이었다. 이곳은 시간이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흘러갔다.
같이 만든 저녁을 식탁에 올려두고 마주 앉았다. 바네사는 천천히 먹으면서 준비해둔 메뉴를 꺼냈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마을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중이었다. 읽을 책을 사기 위해 가끔 들르는 서점이었다. 몇 권을 고르고 계산을 하려고 했다. 서점 주인이 포장해주다가 머뭇거렸다. 무슨 문제가 있나 싶었는데. 바네사에게 부탁이 있다고 말했다. 바이올린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음악에 관해 얘기를 나누거나, 연주하는 건 익숙했다. 남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는 건 처음이었다. 가르쳐 달라니. 누군가를 가르쳐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하지. 자신이 잘 해내는 거와 남에게 가르쳐 주는 건 전혀 다른 영역이었다. 입은 머리가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물론이죠. 가벼운 한 마디로 부탁을 들어주고 말았다. 바네사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지만. 올가는 이유를 알 거 같았다. 바네사는 조금 더 마음이 가는 일을 하고 싶어 했다.
여태까지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아발론을 찾아왔다. 올가를 사랑했다. 사랑하는 올가와 함께 이 마을에 정착했다. 조금씩 선택을 늘려가며 자신만의 길을 나갔다. 평화롭게 흘러가는 일상은 소중하지만. 일상에 작은 변화도 필요했다. 새로 맞이하는 일은 늘 설레니까. 기분 좋은 자극이 될 거로 생각했다.
새삼스레 지나온 시간이 생각났다. 두 사람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터널을 헤쳐왔다. 지쳐가는 몸과 닳아가는 마음을 이끌고 헤쳐 나왔을 터널.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길고 어두웠던 터널을 헤치고 나오자. 비로소 서로를 만날 수 있었다. 바네사는 어느 날보다 더 아름답게 웃어줬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바네사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하겠다며 미소를 지었다. 미소를 볼 때마다 무엇이든 다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무엇을 고르든 맞는 길이라고 믿었다. 올가는 반지를 끼고 있는 바네사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반지가 맞닿았다. 바네사라면 잘 할 거라는 격려도 잊지 않았다.
약속한 날이 다가왔다. 올가는 매번 일어나던 시간에 맞춰 눈을 떴다. 바네사는 역시나 자고 있었다.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잠들었다. 자기 품 안에 자는 바네사를 보다가 뺨에 손가락을 대었다. 미동 없이 색색거리는 숨만 내쉬는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 여유가 있었다. 바네사가 깨지 않게 조용히 침대에서 나왔다. 바네사보다 조금 빠른 올가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주말 일정도 다를 게 없었다. 데크 청소를 마치고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침실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올라갔다. 평소라면 더 자게 내버려 두겠지만. 수업이 있으니까 깨워야 했다. 문을 열어보니 바네사는 깨어있었다. 까치집을 지은 채 일으킨 몸을 침대 헤드에 기댔다. 바네사가 주말 아침에 스스로 일어나다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완전히 깨어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깨어있는 게 어딘가 싶었다. 바네사에게 다가가서 아침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의 아침 인사는 간단했다. 뺨에 한 번, 입술에 한 번. 차례대로 가볍게 입 맞춰주며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했다. 올가가 입 맞춰주며 인사해주자 배시시 웃어줬다.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나서야 침실에서 벗어났다. 토요일은 마침 올가가 장을 보러 가는 날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바네사와 같이 외출 준비를 했다. 지갑과 장 볼 거리를 적어둔 메모장을 챙겼다. 신발을 신을 때 즈음 준비를 마친 바네사가 계단을 내려왔다. 집에서 편하게 입던 옷과 다르게 격식 있게 차려입었다.
아발론에서 지낼 때 자주 입은 옷이었다. 생각해보면 격식 있게 입은 쪽이 더 익숙할 옷일 텐데. 막상 보니 새삼스레 새로웠다.익숙함은 상대적인 감각이었다. 한쪽이 익숙해지면 다른 쪽이 새로워졌다. 어느 쪽이든 올가 눈에는 다 예뻤다. 바네사가 신발을 신을 때까지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어줬다. 올가가 손을 건네줬다. 바네사는 건네준 손을 잡은 채 신발을 신었다. 챙겨야 할 것들을 다 챙겼는지 확인했다.
살짝 현관문을 밀었다. 상당히 무더워진 공기에 두 사람이 나란히 발을 내디뎠다. 여름이 한 발짝 다가오며 푸르름을 더해갔다.바네사와 손을 잡은 채 마을로 걸어갔다. 길에 심어져 있는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줬다. 더위를 식혀주는 바람이 불었다. 작게 숨을 들이마시자 더운 공기가 차올랐다. 마을에서 처음 맞이하는 계절 하나하나가 새롭게 다가왔다.
처음 봄을 맞이할 때, 올가도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마당에 꽃을 심었다. 정원을 가꾸게 되었다. 꽃은 올가가 해준 것만큼 커왔다. 물을 주고, 관심을 준 만큼.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줬다. 마당으로 나오게 되면, 어느덧 만개한 꽃이 손을 흔들어줬다. 시간이 지나면 첫눈이 내릴 것이다. 이곳에서 처음 맞이하는 겨울이 올 것이다. 그러면 나뭇가지 위로 흰 눈이 쌓이는 걸 볼 수 있겠지. 이왕이면 바네사와 함께 보면 좋겠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는데 올가는 이미 겨울을 생각하고 있었다. 겨울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 둘이 보낼 여름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 한껏 기대에 부푼 바네사의 미소를 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지금. 지금을 소중하게 담아내자고 생각했다. 울퉁불퉁한 길이 끝나자 마을이 보였다. 기차에서 내려서 발을 디딜 때를 떠올렸다. 아기자기한 집으로 둘러싸인 마을. 바네사는 예쁜 집이 줄지어 서 있는 걸 보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날은 바로 집에 가지 못했다. 해가 질 때까지 마을 구경을 했다. 마을 사람들이 두 사람을 알아보고 인사했다. 두 사람의 집은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섬 같았다. 한적함 속에 빠져있다가 새로운 파도를 맞이할 때마다 새로웠다.
지나가다가 한 마디씩 던져주는 인사를 받아주면서. 밀려오는 파도를 탔다. 걸리는 거 하나 없이 매끄럽게 흘러갔다. 파도를 타고 흐르다 보니 서점에 도착했다. 서점이자 약속 장소였다. 약속을 위해서 팻말이 걸려 있었다. 여태까지 잡고 있던 손을 떼어야 했다. 각자 해야 하는 일이 끝나면 찻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어느 찻집인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찻집은 마을에 하나밖에 없으니까.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듯이 잡아주며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천천히 좁혀져 오는 두 사람의 사이. 공기마저 끼어들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바네사를 격려해주는 올가만의 방법이었다. 따뜻한 포옹에 바네사도 웃으면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잘하고 올게요. 타고 오는 진동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손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주머니에 넣어뒀던 메모지를 꺼냈다.
가게에 가서 메모지에 적은 물건을 사기로 했다. 물건을 찾으면서도 드문드문 생각이 끼어들었다. 잘하고 있으려나. 끼어든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잘하고 온다고 했으니까. 잘하고 오겠지. 어찌 되었든. 다시 만나서 바네사가 해주는 얘기를 들어주면 되었다. 걱정하지 않고 해야 하는 일을 계속했다.
머릿속에 그려둔 경로대로 지나가면서 메모지에 적힌 물건을 하나씩 골랐다.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을 마을 사람들이 신기한 듯이 바라봤다. 어쩜 그리 잘 아느냐고. 몇 번이고 봤지만, 신기하다고 했다. 그러다가 오늘은 바네사랑 같이 안 왔냐고 물어봤다. 맥락 없는 사담이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친근하게 던지는 사담조차 생소했다. 지나오면서 만나온 사람들은 올가를 어색해하거나 어려워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조심스레 말을 붙이는 게 보통이었다. 그랬기에. 훅 들어오는 사담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어떤 말을 해야 만족해할지 몰랐다. 그래서 처음에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요즘은 별거 아니라고 담담하게 말하고, 오늘은 혼자 왔다고 말해줬다. 그 정도 대답으로도 사람들은 만족한다는 걸 알았다. 종류가 많지도 않고, 무거운 거도 아니었다. 봉투 하나에 고른 걸 모두 담아놨다. 사람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봉투를 한 손으로 든 채 걸어갔다. 물건을 골라서 바로 사 왔는데도 시간이 꽤 흘렀다. 밖으로 나서니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바네사가 먼저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찻집으로 향하던 도중에 발걸음이 멈췄다. 꽃집이 보였다. 올가와 인연이 깊은 곳이었다. 몇 달 동안 하루가 멀다 하고 들락거리던 곳이니까. 밖에서 잘 보이도록 화분을 진열해뒀다. 앙증맞은 허브가 심어진 화분이 눈에 띄었다. 키우기 쉽고, 수확해서 먹어도 좋다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꽃집 주인은 올가를 보더니, 밖으로 나왔다. 익숙한 얼굴이다 보니 주인이 반갑게 인사해줬다. 올가도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무언가 필요한 게 있냐며 올가에게 말을 붙였다. 정원에 심어둔 꽃으로 충분했다. 그런데도 올가는 보고 있던 화분을 가리켰다. 주인에게 이걸로 달라고 부탁했다. 바네사가 그랬듯이. 올가도 마음이 가는 일을 해보기로 했다.
유리창 너머로 바네사가 제일 먼저 보였다. 악보를 보고 있었다. 악보 옆에는 허브가 띄워진 차가 있었다. 올가는 조금 더 가까이 가서 바네사를 바라봤다. 바네사는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유리창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소리가 들리자 바네사는 고개를 들었다. 유리창 너머를 바라봤다. 올가를 보자마자 미소를 지었다.
얼른 와요. 희미하게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딸랑거리는 청아한 종소리와 함께 문을 열었다. 조명으로 이어진 선을 눈으로 따라가다가, 시선의 끝이 바네사에게 머물렀다. 바네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 있는 건 신경 쓰지 않았다. 만나자마자 올가 손부터 먼저 잡아줬다. 뒤늦게 올가가 들고 있는 화분을 발견했다. 물어보는 바네사에게. 올가는 바네사와 똑같이. 미소를 지으며 느닷없이 선언했다.
"기르기로 했습니다."
올가가 들이게 된 앙증맞은 손님은. 햇빛이 잘 드는 데크에 자리를 잡았다. 한적한 집에서 보내는 일상을 함께 해줬다. 바네사도 손님을 환영했다. 이따금 졸음이 묻어난 나른한 미소를 지어줬다. 좋은 아침이라며 말을 걸어줬다. 햇빛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관심도 받았다. 겉흙이 마르면 물도 듬뿍 주었다.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내리쬐는 햇빛을 받으며. 집안에서 흘러나오는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자라났다.
자라나는 게 눈에 띄지 않는. 지루할 수도 있는 시간이었지만. 하루하루 자기만의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떡잎에서 본잎이 나올 때까지. 바네사는 부지런히 마을과 집을 오갔다. 바네사가 들려주는 얘기는 식사 후에 곁들이는 후식이 되어줬다. 마을에서 진행하는 수업도, 집에서 자라나는 허브도 순조롭게 흘러갔다. 일상은 평온했지만 상쾌하고 열정적이었다. 평일 내내 바이올린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같은 구간을 몇 번이고 연주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연주를 멈추고 악보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기도 했다. 악보를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다른 세계에 빠져버린 눈빛이었다.
마음에 담고 있는 열정을 아주 뜨겁게 쏟아붓는 모습이었다. 열중하는 바네사의 모습을 보자니. 바람이 잘 부는 날에 창문을 열어둔 기분이었다. 가끔 연주하다가 무언가 안 풀릴 때는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올가를 껴안은 채 얼굴을 파묻었다. 올가에게도 신선한 자극이었다. 이것마저도 기분 좋은 모습이었다.
어렵게 나온 본잎은 날이 갈수록 쑥쑥 자라났다. 며칠 만에 본잎이 활짝 펴졌다. 무더운 날이 잦았지만, 녹색의 푸름은 더해져만 갔다. 아침부터 시원한 물소리가 가득했다. 호스에서 나오는 물줄기가 정원에 있는 꽃에 골고루 뿌려졌다. 바네사도 올가 옆에서 호스를 쥐고 있었다. 올가의 일을 도와주겠다고 나섰기에. 밀짚모자를 쓴 채 물을 주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후식 같은 얘기가 이어졌다. 요즘은 서점 주인과 곡을 연습하고 있었다. 세레나데. 듣던 올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부터 곡을 연습할 수 있는 악기던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곡을 연주하는 단계까지 가려면 아주 오래 걸리고, 어렵다는 건 알고 있었다. 바네사도 의아했던 점이었다. 처음 갔을 때도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초심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래 손을 놓아서 녹슨 감이 있지만, 초심자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 펼쳐보지 않으면 깊이조차 가늠할 수 없는 사정이. 서점 주인이 들려주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오래전부터 바이올린에 흥미를 느꼈다. 소음이나 다름없는 음을 내어도 즐거웠다. 즐겁다 보니 조금 더 배워보고 싶었다.혼자서 배우긴 힘든 악기였고, 마을에서 가르쳐주는 곳이 없기에. 먼 곳까지 찾아가서 선생님에게 배운 적도 있다고 했다. 썩 좋은 선생님을 만난 건 아니었다.
연주를 듣자 선생님에게 재능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재능이 없다면 즐길 수는 없는 걸까. 즐기려고 했던 취미가 부담되어버렸다. 자신이 내는 음에 자신이 없어졌다. 케이스 지퍼 양 끝을 한 곳으로 잡아끌었다. 경쾌하게 닫힌 케이스는 더 열릴 일이 없었다.그러던 와중에 바네사가 마을로 왔다. 멀리서 들어도 아름다운 연주였다. 그만큼 재능이 있다는 뜻이기에. 재능이 있는 바네사에게 의견을 듣고 싶었다고 했다.
저는 역시 잘 못 하는 걸까요. 풀죽은 목소리로 물어보는 질문에 바네사는 웃으면서 말해줬다. 즐거우시다면 잘하실 필요는 없어요. 바네사의 말에 용기를 받았다. 한 발자국을 내딛자. 더 나아갈 힘을 얻었다. 연습을 너무 열심히 하는 바람에. 손가락에 밴드를 둘둘 감고 온 날도 있었다. 더듬더듬 음을 내면서 한 걸음씩 나아갔다. 올가가 키우고 있는 허브와 비슷했다. 눈에 띄지 않아도 조금씩 자라나는 모습마저 비슷해서. 하루하루 가르치는 게 즐거웠다. 고된 연습에도 행복해했다. 그마저도 자신이 처음 바이올린을 잡았을 때와 겹쳐 보였다.
조그만 소망을 심었다. 결혼기념일이 다가온다고 했다. 결혼기념일에 연주하고 싶어 하는 곡이 있었다. 처음으로 배우자와 같이 갔던 연주회에서 들었던 곡. 바이올린을 시작하게 만들어준 곡이었다. 그래서 하루가 멀다 하고 똑같은 곡을 연습했구나. 퍼즐처럼 들어맞았다. 바네사는 얘기를 마치고 호스를 껐다. 뿌려준 물 덕분에 꽃들에 싱그러움이 가득했다.
"저도 연주해드릴 걸 그랬네요."
올가를 보며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서점 주인의 이야기에 바네사가 발을 내디디고, 중요한 일에 이름을 남겨준 거처럼. 서점 주인을 통해 들었던 짧은 이야기는 두 사람의 이야기 한 가운데에 심어졌다. 별반 다르지 않은 마음이 피어났다. 이 마음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로 자라날까.
"줄곧 연주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올가는 간단하게 대답해줬다. 처음부터 줄곧. 바이올린을 연주해줬다. 올가에게 줄곧 보여줬다. 다정한 모습일지 모르겠지만. 바네사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미소를 지어줬다. 올가의 미소를 보더니 아쉬움이 걷어졌다. 바네사는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올가는 모두 다 기억했다. 남들과 다르지만, 이야기가 부족하거나,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만의 얘기가 있었다.
구름에 햇빛이 가려진 주말. 서점 주인이 말했던 결혼기념일이 하루 남은 날이었다. 마지막 수업이었다. 올가는 바네사와 같이 마을에 가지 않았다. 아침에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마을로 가는 바네사를 배웅해줬다. 매번 그랬듯이 올가가 해주는 격려를 듣고, 포옹을 받고 나서 손을 흔들었다.
놓아뒀던 화분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옆에는 가위와 그릇이 놓여 있었다.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릴 수 있을 만큼 커졌다. 수확하기 좋은 시기였다. 가위로 잎을 따서 그릇에 담았다. 화분에서 거둔 첫 수확이었다. 정원에 피어난 꽃을 처음 볼 때와 비슷하지만 다른 느낌이 들었다. 앙증맞았던 잎이 자라나서 수확하는 기쁨을 안겨줬다. 잎을 따서 정리하다 보니 전보다 더 성장한 게 눈에 띄었다.
다음에 넓은 곳으로 옮겨줘야겠다.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다음이 있으니까.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위와 그릇을 들고 열려있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면 한쪽으로만 바람이 밀려오는 게 아니었다. 생각하고 느껴오던 감정과 받았던 감정이 밀려들어 왔다. 식탁 위에 그릇을 놓았다.
저녁 메뉴가 정해졌다. 바네사가 돌아오면. 수확한 잎을 곁들인 파스타를 만들어야겠다. 저녁을 먹으면서. 바네사가 해주는 얘기를 들어주고, 바네사에게 얘기해줘야겠다. 벌써 저녁이 기대되었다. 다음을 바라보며 문밖에서 보이는 정원을 바라봤다. 새롭지 않은 데도 볼 때마다 새로워 보이는 풍경이었다.
바네사가 얼른 돌아와서 얘기해 주기를 바라며. 살랑이는 바람에 맞춰 그릇을 들고 부엌으로 걸어갔다. 평화로운 늦은 오후가 저녁을 향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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