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의 유니버스

[올가바네올가] 첫 대화

뱀파이어 물네사 x 엘프 물올가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거 같았다. 지금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세탁기처럼. 바네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면서. 돌아가고 있는 세탁기 안을 바라봤다. 지금 서 있는 바닥 밑에도 뭔가 깔린 건지. 한없이 아래로 내려가는 착각이 들었다. 넘길 것도 없는데. 바짝 마른 입 때문에 계속 침을 삼켰다.

바네사가 계획했던 일정은 물거품으로 변해버렸다. 예매 시간이 훌쩍 지나가서 영화는 물 건너간 지 오래다.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와서 퍼즐을 맞춘다는 계획도 없어졌다. 강아지 영상을 보면서 귀여워하는 시간도 사라졌다. 아침을 즐길 시간 따위 바네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어찌 보면 인과응보지만. 뭔가 억울했다. 하필이면 그때 텀블러 뚜껑이 열려서. 애꿎은 텀블러 탓해봤자 소용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식탁에 앉아있는 사람. 아니, 사람이 아닌 손님 덕분에. 오늘 하루는 길어도 너무 길어질 거 같았다.

얘기가 길어질 거 같기에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바네사가 영화관을 가려다가 어떤 사람하고 부딪혔다. 텀블러에 담았던 피가 쏟아졌다. 피를 들킨 거도 큰일이지만. 설상가상으로 바네사에게 주스가 아니라 진짜 피냐고 물어봤다. 반응에 당황하던 찰나. 자기도 사람이 아니란다. 알고 싶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과 바네사는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갈아입으려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 사람하고 동선이 겹쳤다. 처음에는 우연인가 싶었다. 같은 길을 걷다가, 같은 아파트로 들어가고, 같은 층수를 눌렀다. 심지어 바네사 집 옆에서 사는 이웃이었다. 그런 이유로. 얘기도 나눌 겸 세탁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다.

바네사는 식탁 쪽을 슬쩍 바라봤다. 검은색 터틀넥으로 갈아입은 손님은 아무 미동이 없었다. 자기 손만 응시한 채 조용히 앉아있었다. 손님이니까 대접을 해야겠지. 살금살금 부엌으로 들어갔다. 뭐라도 있을까 싶어 냉장고를 열어봤지만. 냉장고를 열어봤다가 그대로 닫아버렸다. 냉장고 안에 피가 든 병만 그득하게 채워져 있었다. 피만 마시고 사는데 당연했다. 당연했지만. 아무래도 남에게 보여주기 곤란했다.

오른쪽 찬장을 열어봤지만 역시나. 별 다른 게 없었다. 그나마 건진 건 친구가 놀러 와서 두고 갔던 티백이었다. 티백과 함께 남겨둔 주전자도 있었다. 왼쪽 찬장에서 작은 잔을 꺼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집에 무언가를 담을 잔은 차고 넘쳤다. 티백도 있고, 물을 끓일 주전자도 있고, 잔도 있다.

문제가 생겼다. 물을 어느 정도 부어야 마실만 한 걸까. 피만 마시고 사는 게 이 정도로 문제일 줄은 몰랐다. 찬장을 다시 열고 티백이 담긴 상자를 살펴봤다. 상자에 적힌 용량대로 물을 부었다.  물이 조금씩 쏟아져 잔으로 흘러 들어가자. 티백이 물 위로 둥둥 떴다. 투명한 물이 점점 빛을 입어갔다.

물을 먹어 무거워진 티백은 잔 아래로 가라앉았다. 친구가 놀러 와서 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잘 섞이도록 저어줬다. 잔에 담긴 색이 조금 더 진해졌다. 이 정도면 되겠지.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손님에게 잔을 내려놨다. 향을 품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생각지 못한 대접에 놀란 걸까. 손님하고 또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바네사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얼버무렸다.

"대접해드릴 게 이거밖에 없네요."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잘 마시겠다는 대답과 다르게. 손님은 바네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 눈치였다. 이 사람이 바네사에게 호의적인 건 알겠지만. 역시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 적응이 안 되었다. 고양이와 비슷한 눈동자를 마주할 때마다 식은땀이 삐질삐질 흐를 정도였다. 잡아먹는 거도 아닌데 왜 이렇게 긴장되는 거지.

다른 사람들하고 대화하는 게 싫은 건 아니다. 바네사는 오히려 대화를 즐기는 편이었다. 그래도. 상황이라는 게 있는 거다. 이게 피냐고 대뜸 물어보고, 자기가 인간이 아니라고 밝히는 손님. 이런 손님과 대화를 이어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대화를 끊어버리는 건 예의가 아닌 거 같아서. 수많은 경험으로 쌓은 지식으로 대화를 소재를 찾아봤다. 생각해보니 적절한 소재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제 이름도 모르시죠, 참."

짧은소리와 함께 손님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손님이 먼저 입을 열고 자신을 소개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올가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올가 씨. 저는 바네사라고 해요."

호칭은 올가 씨로 괜찮냐고 물어보니 고개를 끄덕여줬다. 이름을 알게 되면 대화할 거리가 생기나 싶었는데. 여전히 막막했다. 올가도 시선을 옮겨 잔에 담긴 차를 가만히 응시했다.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모양이었다. 이럴 때는 기다려줘야겠지. 바네사는 올가 맞은 편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올가가 얘기해 줄 때까지 기다려줬다.

올가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셔츠에 묻은 냄새가 수상해서 의심했다. 텀블러에 담긴 게 피라고 확신하는 순간.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다. 바네사를 떠보기 위해 터무니없는 말로 대화를 시작한 거였다. 거기서부터 이상하게 흘러갔다. 떠보는 올가의 말에 바네사는 지나칠 정도로 당황했다. 당황하다 못해 뻣뻣하게 굳었다. 심지어 눈빛에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숨기는 걸 들켰거나, 당황해서 나오는 두려움이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두려움이었다. 

그 와중 벌어진 바네사의 입에서 드러난 송곳니가 눈에 띄었다고 했다. 특이한 송곳니와 반응을 보니.바네사가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추측했다. 추측하던 시점에서 올가가 모습을 드러낸 건 도박이었다. 이유는 글쎄. 인간이 아닌 존재를 만난다면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다고 했다. 올가가 말해주는 얘기를 들어주다 보니. 바네사는 머리가 띵해졌다. 

나는 그 정도로 무방비인 채로 다녔구나. 동족들이 들으면 뒤집어질 정도로 허술하고, 무방비했다. 평화로운 삶에 익숙해지다 보니. 경계심도 무뎌진 모양이었다. 올가는 얘기를 끝내자 고개를 숙이면서 사과했다.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충분히 설명해 드려야 했는데."

"그, 그럴 수 있죠! 괜찮아요!"

올가도 비슷한 존재가 반가웠던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올가가 조금 달라 보였다. 바네사는 올가의 마음을 이해했다. 인간이 아닌 존재는 이곳에서 혼자였다. 이방인. 그 단어가 어울렸다. 어디에 속하지도 못하고, 다른 게 들키지 않을까 숨기면서 다니는 삶. 외로움이나 소외감은 둘째치고 답답한 일이었다. 올가도 답답하고 긴 시간을 혼자 참아왔겠지. 망망대해 같은 사람들 속에서. 조금이나마 비슷한 존재인 바네사를 지나칠 수 없었나 보다. 거꾸로 생각해보자면. 바네사도 그랬을 거 같았다. 자신과 비슷한 존재와 마주치게 된다면. 그대로 지나치지 못하겠지.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동질감은 경계가 쌓아놨던 벽을 빠르게 허물었다.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긴장감은 어느새 녹아내렸다. 그래도 의심은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올가라면 괜찮아 보였다. 터무니없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지만. 올가는 바네사를 해칠 거 같지 않아 보였다. 올가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바네사의 말을 듣자 미소를 지었다. 긴장이 풀리고 나니 궁금한 게 생겼다. 바네사는 귀를 가리키며 물어봤다.

"그러면 올가 씨는 평소에 귀를 가리고 다니시나요?"

"보통 장치를 이용하는 편입니다."

"불편하진 않으세요?"

"익숙해져서 괜찮습니다."

올가 얘기를 들어보니 신기한 점이 많았다. 올가는 엘프였다. 엘프. 뱀파이어와 사이좋게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존재였다. 영화에서 나오는 모습과 거의 비슷한 뱀파이어와 다르게, 엘프는 영화에서 보여주는 모습과 아주 달랐다. 모습을 가려주는 장치는 물론이고, 정체를 들키는 걸 대비해서 기억을 지우는 장치도 있다고 했다. 얘기만 들어보면 첨단 과학기술이 집결한 모습이었다. 영화에서 흔히 보여주는 자연 친화적인 모습이나 친환경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하긴. 그 정도로 노력해야 사람들 사이에서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겠지. 상상했던 이미지와 비슷한 걸 굳이 꼽아보자면. 인간보다 수명이 매우 길다는 점이었다.

바네사의 질문은 끝나가는데. 올가는 바네사에게 많은 걸 물어보지 않았다. 바네사에게 하나만 물어봤다. 바네사는 피를 마시는 뱀파이어냐고. 바네사가 그렇다고 하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처음 보는 뱀파이어면 궁금할 법한데. 딱 봐도 조심스러워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편견으로 대하는 거처럼 보일까 봐 그런 걸까. 배려해주는 태도는 고마웠지만. 편견에 섞인 말도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기에. 바네사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되려 자신을 배려하는 올가에게 미안했다. 정작 바네사는 머릿속으로 숲속에서 활을 쏘고 있는 올가를 상상해버렸다. 이거도 시간이 해결해주려나. 더 다가가진 않았다.

어색한 질문 시간이 끝날 즈음. 세탁이 완료되었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대화를 끝낼 시간이었다. 세탁기로 가서 건조까지 끝난 셔츠를 꺼내 보니. 핏자국이 말끔하게 지워졌다. 심지어 옷이 상하지도 않았다.옛날에는 피가 묻으면 꼼짝없이 옷을 버려야 했는데. 발전된 기술에 새삼 감탄했다. 꺼낸 셔츠에서 햇빛 냄새가 났다. 건조가 끝났을 때 나는 특유의 냄새였다. 옷이 식기 전에 햇빛 냄새라도 맡고 싶었지만. 남의 옷이니까 참아야 했다.

쓸데없는 욕망을 억누르고 올가에게 셔츠를 건네줬다. 올가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떠날 준비를 했다. 자리를 일어서는 올가 뒤로. 벽에 걸려있는 시계가 눈에 띄었다. 시간은 새벽을 향하고 있었다. 바네사에겐 점심시간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잠이 부족 할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올가에게 말했다.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아침에 일어나셔야 할 텐데."

올가는 고개를 돌려 시계를 봤다. 바네사가 걱정하는 거와 다르게. 대답하는 올가는 담담했다.

"잠이 부족해도 큰 지장은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밤이 편합니다."

말 사이에 끼어든 짧은 정적. 바네사는 짧은 정적 틈으로 많은 걸 보게 되었다. 틈을 파고들 수 있겠지만. 바네사는 올가와 친해지고 싶은 거지. 심문하고 싶지 않았다. 지내다 보면 얘기해주겠지. 시간은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해주니까. 처음 보는 사이인데 더 가까이 다가갈 필요는 없었다. 적당히 거리를 두는게 나아 보였다. 바네사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바네사가 거리를 유지해주자. 올가도 편하게 받아들였다. 밖으로 나가려는 올가를 현관까지 배웅해줬다.

"마주치기 힘들겠지만 가끔은 이웃끼리 대화 나눠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현관 문이 닫혔다. 얼마 안 가서 옆집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한 명이 들렀다 갔을 뿐인데. 식탁에 놓인 잔 때문일까. 집이 더 휑하게 느껴졌다. 남아 있는 차를 한 모금을 마셨다가 인상을 썼다. 역시 차는 뱀파이어하고 안 맞았다. 대충 잔을 치우고 거실로 걸어갔다. 좋든 싫든. 살아가려면 타인에 섞여 살아가야 하는 게 운명인가보다. 인간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현관을 바라보니 밖으로 나가려는 올가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올가 씨. 뱀파이어를 만난 소감은 어때요. 인간이 아닌 이웃은 마음에 드시나요. 저는 당신을 만난 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던 말을 잇지 못했다. 순식간에 밀려오는 감정 때문에 피곤해졌다. 소파에 걸터앉아 커튼을 들춰봤다. 하루가 끝나려면 아직도 멀었다. 바네사는 늘어지는 소리를 내며 소파에 몸을 한껏 기댔다. 눈을 감으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오늘 하루는 너무나 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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