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과 선의 유니버스 (Fin.)

[올가바네올가] 시작선

동급생 바네사 x 올가

바네사는 오랜만에 꿈을 꿨다. 여름 방학 때 꿨던 꿈과 같은 꿈이었다. 책상에 앉아서 시험지를 풀고 있었다. 꼭 풀어야만 하는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주관식은 아니었다. 친절하게 선택지가 주어져 있었다. 선택지는 세 가지가 있었다. 말도 못 꺼내고 어영부영 시간만 보낸다. 어떻게든 고백해서 사랑을 이뤄낸다. 알게 모르게 스며 들어서 관계를 발전한다. 세 가지 중 하나만 고르면 되는 객관식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문장에서 중요해 보이는 부분들은 애매한 단어로 넘어갔다.

꿈이라서 누가 출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문제를 이런 식으로 냈다면 난리 났을 거다. 바네사는 눈으로 선택지를 읽어갔다.

첫 번째는 지금도 하는 거니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생각해보니 두 가지 중에 어느 걸 선택하든. 똑같이 해야 하는 게 있었다. 빠르든 늦든, 올가에게 고백해야 했다. 고백이라.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아 본 적은 있지만. 바네사가 누군가에게 고백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받았던 고백을 떠올려봤다. 대부분 바네사에게 대뜸 좋아한다고 말했다. 좋아하는 이유를 자세히 들어보지 못했다. 고민할 시간도 주지 않고, 바로 답을 내놓으라고 하는 격이었다.

나도 그런 식으로 고백해야 하는 걸까. 올가가 어떻게 반응을 할지 상상해봤다. 듣고 놀라지 않을까.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대뜸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그러고 고심하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한참 고민하다가. 신중하게 고른 말로 고백을 거절하겠지. 정중하게 거절하면서 바네사를 오해하게 했다고 사과할 거 같았다.

마지막으로. 거절했지만 친구로 지내는 건 괜찮다면서. 자기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거라고 위로해주지 않을까. 거절했지만 우리 관계가 끝나는 건 아니라며 안심시켜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올가도 바네사를 좋아한다면. 고백을 받아주게 된다면.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 기대감이 밑도 끝도 없이 치솟았다. 마음을 뚫고 밖으로 나오기 전에. 바네사는 문을 빈틈없이 꽉 닫았다. 좋아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올가에게 다 말해주겠다고 약속했던 만큼. 언제까지고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고 싶진 않았다.

거리는 더 가까워졌고, 답은 정해져 있지만. 사이에는 아직도 너무 많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두 가지 선택지를 펜으로 톡톡 치면서 고민하던 와중에. 알림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고 말았다. 결국 바네사는 꿈에서 어떤 선택지도 고르지 못했다.

애매한 시간을 보낼 때 즈음. 이도 저도 못하고 있는 바네사를 보는 게 답답했는지. 기회가 제 발로 찾아오고 말았다. 종례 전 마지막 수업 시간. 담임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담임선생님은 수업 대신 학급 회의를 진행했다. 칠판에 적는 단어가 있었다. 수학여행.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저번 주에 가정통신문을 나눠줬던 게 떠올랐다. 장소는 남부의 해안 도시였다. 처음 가보는 곳은 아니었다. 초등학생, 심지어 중학생 때도 많이 가봤던 곳이었다. 애들이 보자마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한숨을 쉴 정도였다.

고등학생이 되면 조금 달라지나 싶었는데. 역시나 중학생 때와 다를 바 없었다. 굳이 달라진 점을 찾아보자면. 이번에는 장소까지 버스가 아니라 기차를 타고 이동한다고 했다. 선생님은 쪽지가 담긴 통을 꺼냈다. 방 배정은 제비뽑기로 정한다고 했다. 이쯤 되면 선생님도 뽑기를 즐기는 거 같았다. 몇몇은 투덜거리긴 했지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바네사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중학생 때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던가. 특히 방 배정. 방 배정을 담당했던 바네사를 붙들고 일어났던 온갖 상황들이 다 떠올랐다. 떠올리기만 해도 저절로 고개를 젓게 만들 정도였다.

모든 애가 돌아가면서 쪽지를 뽑았다. 바네사가 뽑은 쪽지에는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선생님은 쪽지에 적힌 도형을 보고 손을 들라고 했다. 맨 처음에 불린 건 동그라미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네사는 손을 들면서 슬쩍 앞을 바라봤다. 올가는 손을 들지 않았다. 칠판에 바네사 이름이 적혔다. 다른 거로 뽑았구나. 아쉬운 마음에 어깨가 살짝 내려갔다. 세모, 네모. 각자 다른 도형 옆에 차례대로 이름이 채워졌다. 마지막에 불린 별표. 그제야 올가는 손을 들었다. 올가의 이름은 맨 마지막에 적혔다. 방이 다른 거도 아쉬웠는데. 하필이면 끝과 끝이었다.

방장을 정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바네사가 있는 방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바네사가 맡게 되었다. 거의 떠맡듯이 맡긴 했지만. 어차피 반 애들을 통솔해야 하는 입장이니까. 그러려니 하면서 받아들였다. 다른 애들도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정하거나, 모여서 상의를 해서 정했다. 각자 다른 방법으로 방장을 정해서 선생님에게 알려줬다. 선생님은 방장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쳤다. 동그라미를 네 번 치는 동안. 올가의 이름에는 동그라미가 없었다. 올가가 있는 방의 방장은 다른 아이가 맡게 되었다. 하긴. 올가는 자기가 필요한 상황이면 망설임 없이 나서겠지만.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적극적으로 나서는 성격은 아니었다.

바네사는 손으로 턱을 괴고 같은 방인 애들과 얘기하는 올가를 바라봤다. 얘기라고 했지만. 애들이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게 대부분이었다. 올가에게 말하는 애들은 아직도 무서워하고, 어려워했다. 보기만 해도 어색함이 흘러넘칠 정도였다. 애당초 힘든 일이겠구나. 대하기 어렵고, 어색한 애한테 맡기느니. 조금 더 친한 애한테 방장을 맡기는 게 최선이겠지. 알고 보면 어렵지 않은데. 다정하고 멋있고, 가끔은 귀엽고. 좋은 수식어를 모두 다 가져와서 붙여도 모자라지 않을 텐데. 떠오르는 올가 모습을 나열하다 보니.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히죽거리듯이 입 꼬리가 올라가고 말았다.

애들이랑 얘기가 끝난 건지. 올가는 뒤를 돌아봤다. 올가랑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표정을 가다듬을 틈도 없었다. 턱을 괴던 손도 삐끗거리는 바람에. 자세가 무너지고 말았다. 올가는 바네사를 보자 한두 번 눈을 깜빡였다. 돌아보니까 보이는 게 얼빠진 모습이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눈을 깜빡이던 거도 잠시였다. 이내 바네사에게 미소를 지었다. 마음을 두들기는 기대감 때문일까. 아니면 눈에 또 셀로판지가 낀 걸까. 얼핏 작은 웃음소리를 들은 거 같았다.

귀엽다는 듯이 웃는 거처럼 보였다. 기대감이 은근슬쩍 바네사 옆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봐도 수상하다는 속삭임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수업 시간이 끝나는 종소리를 듣고 나서야. 바네사는 정신을 차렸다. 하마터면 착각에 빠질 뻔했다. 담임선생님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애들을 자리에 앉히긴커녕. 간단한 안내 사항만 전달하고 그대로 종례를 끝냈다. 종례가 끝나고. 애들은 하나하나 돌아갈 곳을 향해 흩어졌다.

밖으로 나가는 애들과 다르게. 올가는 바네사 쪽으로 다가왔다. 책상에 걸어둔 가방을 꺼냈다. 조명 같이 쏘아진 햇빛이 올가의 옆모습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만큼은.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올가를 위해 존재하는 거처럼 보였다. 손을 흔들며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뒤늦게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기대감이 불러일으킨 두근거림 덕분에. 문제집에 집중하지 못했다. 두근거림도 두근거림이지만. 한심함이 밀려왔다. 올가를 좋아하는 건 그렇다 쳐도. 사소한 거 하나하나에 의미를 가지게 될 줄이야. 이쯤 되면 호감이 아니라 집착이 아닐까. 머릿속에서 토론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집착이다, 집착이 아니다. 밖은 조용하지만, 안은 시끄럽다 못해 난장판이었다. 잔소리가 쏟아져서 머리가 아파졌다. 자습이 끝나고, 계단을 내려가면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머릿속에서 일어난 토론 덕분에. 자습 시간 내내 지끈 거리는 머리를 붙잡아야 했다. 공부고 뭐고 뭐든지 손에 잡히지 않는 하루였다.

교문 밖으로 나가보니 올가가 있었다. 이제 일상으로 자리잡힌 모습이었다. 운동하다가 우연히 마주쳐서 같이 돌아간 게 시작이었는데. 어느새 올가가 매일 바네사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요즘 바네사에게 새로 생긴 버릇이 있었다. 바네사를 기다려주는 모습을 볼 때마다. 주먹을 살짝 쥐게 되었다.

언젠가는 전해져야 하지만.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전해지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올가를 부르려고 벌어졌던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한 글자만 꺼내려 해도 주책없이 가슴이 뛰어서. 이름을 부르는 대신. 장난을 치기로 했다.

슬금슬금 다가가서 어깨를 톡톡 쳤다. 고개를 돌리자 손가락으로 올가 뺨을 꾹 찔렀다. 유치한 장난일 수도 있겠지만. 바네사에게 최선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장난기로 덮어냈다. 자기를 바라보는 올가에게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손을 흔들고 인사했다. 올가는 바네사가 손가락으로 찌른 자기 뺨을 살짝 문질렀다. 한 박자 늦게 바네사에게 인사했다. 어쩜 반응도 그렇게 귀여운지. 주책스러운 말을 마음에 담은 채 같이 걸어갔다.

오늘의 대화 주제는 역시 수학여행이었다. 장소가 예전에도 가봤던 곳이다 보니. 추억을 꺼내며 대화를 나눴다. 놀러 간 거라 즐거운 얘기가 많았지만. 좋은 얘기만 있는 건 아니었다. 올가는 바네사가 말하는 거에 공감하면서 말을 얹어줬다. 심지어 이상한 교관 때문에 얼차려를 받은 거도 기억해냈다. 올가도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게 새삼스레 와닿았다. 생각해보면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를 나왔으니 당연했다.

왜 한 번도 못 마주쳤을까. 저도 모르게 호기심이 튀어나왔다. 올가는 혼잣말 같이 중얼거리는 말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도 좋지만. 조금 더 빨리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올가도 혼잣말처럼 흘려냈지만. 바네사에게 대답한 거나 다름없었다. 바네사도 올가의 말을 놓치지 않았다. 터질 듯이 두근거리는 가슴이 증명해줬다. 얼굴까지 달아오를 거 같은 느낌에.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이번에는 이동할 때 기차도 타보고, 안 가봤던 수족관도 가보니까. 전에 갔던 거랑 다를 거라면서. 기대된다고 했다. 갑자기 화제를 돌렸는데도. 올가는 자연스레 받아줬다. 자기도 기대된다고 받아준 거까진 좋았데. 다음에 꺼내는 말은 바네사에게 좋지 않았다.

"너랑 더 얘기할 수 있으면 좋겠어."

 

한 마디에 넋을 놓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 올가가 해주는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지금도 학교에서 많이 얘기하지만. 여행을 가서 얘기하는 건 다른 느낌일 거라면서. 수학여행을 계기로. 조금 더 알아가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 말을 해주면 위험하다는 건 알기나 하는 걸까.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는 바네사 마음도 몰라주고. 올가는 평온해 보였다. 바네사가 해줄 수 있는 말은 한 가지였다.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전혀 동요하지 않는 척하면서. 자기도 올가랑 더 얘기하고 싶다고 대답해줬다.

올가와 전혀 다른 마음이지만. 같은 마음인 척했다. 올가는 바네사의 대답에 만족했는지 미소를 지었다. 주말 잘 보내. 올가가 건네는 이번 주 마지막 인사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면서 일으킨 작은 바람 때문일까. 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가서 허공에 대고 인사를 건네버렸다. 가족들하고 마주칠까봐 서둘러서 방에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자 거울에 비친 모습이 보였다. 바네사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차가운 물로 씻고,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덮고 나서야. 얼굴 끝까지 올라왔던 열이 가라앉았다. 열은 가라앉았지만. 뒤척일 때마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콩닥거리다 못해. 귀에서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두근거렸다. 바네사는 벌떡 몸을 일으키고 말았다.

가슴이 뛰어서 잠을 못 자겠다. 나를 좋아한다고 말한 거도 아닌데.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잘 보내라는 다정한 말과 다르게. 기대감이 올가 말을 그대로 받아 적은 팻말을 주말 내내 들고 있었다. 너를 조금 더 알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사실 올가도 바네사와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가능성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말을 바네사 옆에서 끊임없이 속삭이는 탓에. 바네사는 주말을 잘 보내지 못하고 말았다.

시간은 눈에 보이는 거보다 더 가까이 있는 걸까. 소란스러운 주말이 지나고, 출발 일이 바네사 앞으로 와버렸다. 알림이 울리자마자 눈이 번쩍 떠졌다. 바네사는 평소에 일어나는 시간보다 더 일찍 일어났다. 나갈 준비를 끝내고 어제 준비해둔 가방을 들었다. 방 밖으로 나오면서 가방을 메고 신발을 신었다.신발을 신던 와중에 목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렸다. 부모님이 바네사를 배웅해줬다. 어색해하는 바네사에게 몸조심하고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건네줬다.

밖으로 나오자 채도 높은 푸른색이 머리에 내려앉았다. 끝도 없이 높은 하늘이 가을이라는 걸 실감하게 해줬다. 조금 서늘한 공기마저 좋았다. 뭐든지 확실하지 않을 때가 더 설레는 법일까. 중학생 때 가봤던 곳이지만. 오랜만에 가는 여행이라 설렜다. 뭐 이런 이유도 있지만. 설레는 이유에서 전부가 될 수 없었다. 운동장은 한산했다. 바네사처럼 일찍 와서 기다리는 애들이 몇몇 있었다. 듬성듬성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올가였다.

얼마나 일찍 온 걸까. 바네사도 일찍 온 편인데. 올가는 이미 가방을 자기 옆에 두고 스탠드에 앉아 있었다. 앉아있던 올가는 바네사를 보더니, 손을 작게 흔들었다. 바네사도 인사하면서 올가 옆에 앉았다. 교실이 아니라 운동장에서 바라보니까 신선했다. 설렘에 이유를 아무거나 가져다 붙여도 설명이 되지만. 가슴이 뛸 정도로 설레는 건 역시나. 올가 때문이었다. 매번 그랬듯이. 올가와 얘기를 나눴다. 일정표를 보면서 어떻게 다닐지 상상했다. 올가는 일정표를 더 가까이 보려고 바네사 쪽으로 더 다가왔다. 그러다가 어깨가 닿았다.

살짝 닿았을 뿐인데. 서로 흠칫 놀라서 떨어지고 말았다. 올가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일정표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코끝에 묻은 향기도, 공기도 시원한데. 바네사는 점점 더워지고, 공기는 뜨거워졌다.

숨을 고르듯이 잠깐 정적이 흘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자고 미리 정한 듯이. 두 사람은 다시 일정 얘기를 했다. 바네사가 놓친 부분이 많았지만. 놓친 부분을 신경 쓸 정도로 여유 있지 않았다. 애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걸 보고, 우리 반은 여기로 모이는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어쩌다 보니 집합 지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선생님도 애들이 모인 곳으로 왔다. 오자마자 반장인 바네사를 부르는 바람에. 두 사람만의 시간은 끝나고 말았다. 아쉬운 마음 반, 안도하는 마음 반이었다. 조금 더 얘기하고 싶어서 아쉬웠지만. 사실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려서. 더 얘기하다간 이상하게 보일 거 같았다. 복잡한 마음을 뒤로하고 올가와 헤어졌다.

선생님이 차례대로 역으로 이동한다고 말했다. 기차역이 학교에서 가까워서.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라 가능했다. 기다리는 동안 줄을 세우고, 마지막으로 인원수를 확인했다. 확인이 끝나자 다른 반을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드디어 떠나는구나. 교복을 입고 교문 밖으로 나가는 건 늘 있던 일인데. 이른 시간에 교문 밖으로 나가는 건 일탈 같아서. 괜히 마음이 두근거렸다. 역에 도착하고 올가와 대화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있었지만. 현실을 맞이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다. 반장이 수학여행에서 어떤 고생을 하는지. 역이든, 기차 안이든, 이동하는 길이든. 반 애들이 모이게 된다면 선생님과 함께 인원 파악하는 건 기본이었다. 확인과 확인의 연속이었다. 기차 안에서 애들하고 수다를 떠는 건 잠깐이었다. 수다를 떨다가 몸이 안 좋은 애를 보게 되면 지나칠 수 없었다.

어떻게 아픈지 물어보고 선생님에게 알려서 약을 받았다. 받은 약을 물하고 같이 건네주고, 그래도 아프면 또 얘기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다 전달해 줘야 하는 물건이 있으면, 뒤로 전달해달라고 말하면서 애들에게 건네줘야 했다. 건네주는 거에서 끝나지 않고. 빠짐없이 받았는지 확인했다. 쉴 틈 없이 살펴봐야 하기에. 바네사만의 시간은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기차에서 그렇게 고생했으니. 내리고 나서는 한숨 돌리면 좋겠는데. 고생길이 훤히 보였다. 기차 안은 그래도 막혀있으니까 괜찮았지만. 밖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기차 안에서 있을 때보다 더 신경 써야 했다. 역 근처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는 버스들이 있었다. 애들이 다른 반 버스를 타지 않도록 하나씩 챙겨줬다. 버스에서도 계속 인원 파악을 하고, 아픈 애는 없는지 확인했다.

버스까지 탔으니 바로 숙소로 가면 좋겠지만. 일정표에는 숙소를 가기 전에 가야 할 곳이 산더미였다. 버스에서 내려서 줄을 세우고, 다같이 목적지로 이동했다. 뒤에 있는 애들은 선생님 말씀이 닿지 않을 수 있기에. 바네사가 중간중간 뒤로 가서 애들에게 전달했다. 그러면서 다른 길로 새지 않게 통솔하는 건 덤이었다. 단체 사진을 찍으면 대형을 맞춰 달라고 해야 했고. 다시 버스를 타야 하면 선생님과 함께 버스 주변에서 기다렸다. 애들이 다 타는 걸 확인하고 가장 마지막에 탔다.

여행 시작부터 지금까지 정신이 없어서. 눈을 깜빡이면 세상이 핑글 도는 기분이었다. 바네사는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중학생 때 수학여행을 갔던 게 떠올랐다. 아마 사흘 내내 이러겠지. 반장으로서 맞이해야 하는 고생을 직감하자. 마음속으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분명 날씨는 서늘한데. 바네사 몸에서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간단한 안내 사항을 듣고, 배정받은 방으로 가자마자.

바네사는 늘어지는 소리를 내면서 주저앉았다. 애들도 바네사가 고생한 걸 알기에. 고생했다면서 바네사를 토닥였다. 간식을 얻어먹고, 음료수까지 받았다. 음료수 뚜껑을 열던 도중에 익숙한 라벨이 보였다. 지금은 캔이 아니라 병이지만. 여름 방학 때 올가가 건네줬던 음료수와 같은 음료수였다. 핑계나 다름없는 계기 덕분에. 올가가 떠올랐다. 오늘 올가랑 얘기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너무 정신없는 바람에. 아침에 봤던 모습을 제외하면 다른 모습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음료수를 들이켰다. 익숙한 달콤함이 입안에 퍼졌다.

역시 쉽지 않구나. 올가에 관한 일은 쉬운 적이 없었던 거 같았다. 여행을 오기 전에 기대한다고 말해줬는데. 올가도 아쉬워할까. 스쳐 지나가는 생각 때문에 음료수가 목에서 턱 막혀버리고 말았다. 억지로 넘기자 꽉 막혀서 가슴이 답답했다.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 해도. 착각은 하지 말아야지. 일부러 사레가 들린 듯이 기침을 하자. 바네사의 마음을 모르는 애들이기에. 고생하느라 음료수도 제대로 못 마신다고 안쓰러워했다.

낮이 짧아져서 그런지. 천천히 라는 말을 모르는 듯이 해가 재빠르게 사라졌다. 저녁을 먹고, 돌아가면서 샤워를 하고, 애들과 함께 이불을 펴고, 잠자리를 정했다. 그러다 보니 금세 밤이 와버렸다. 소등 시간이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바네사가 불을 껐다. 각자 자리를 잡아서 누웠지만. 잠들 기는 이른 시간이었나보다. 선생님 눈치를 보느라 잠시 조용했다가. 작은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바네사는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선생님 말씀을 애들에게 대신 전달하랴, 이쪽으로 이동해야 한다며 애들 통솔하랴, 빠진 애들이 없는지 인원 파악하랴. 여러모로 피곤한 하루였기에 피곤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반쯤 졸고 있었다. 올가라는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 올가 이름을 듣자마자 눈이 번쩍 떠졌다. 졸음이 확 달아나버렸다.

희한하다. 애들이 올가에 관해 얘기할 거리가 있던가. 호기심보다 걱정이 앞섰다. 어느새 자는 척하면서 엿듣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어떤 애가 다른 방에 있는 친구한테 들었다는 말로 포문을 열었다. 마른 침을 삼키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얘기를 들어보니 역에서 내려서 단체 사진을 찍을 때였다. 어떤 애가 앞을 안 보고 걷다가 헛발질을 하는 바람에 휘청거렸다. 그대로 넘어질 뻔했는데. 뒤에 있던 올가가 붙잡아줬다. 잡아준 덕분에 넘어지지 않았지만. 밑에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덕분에 신발이 푹 젖어버렸다. 올가는 젖은 신발을 보더니, 손수건을 꺼냈다. 손수건이 더러워지는 건 신경 쓰지 않았다. 신발에 묻은 물기를 꼼꼼하게 닦아줬다. 얼떨떨해서 감사 인사도 제대로 못 했는데. 올가는 감사를 바라지도 않는 거 같았다. 물이 차가워서 감기 걸릴 수 있으니까. 물기는 다 닦아내라는 당부가 마지막이었다.

걱정과는 다르게. 멋지고, 다정한 모습이 담긴 얘기였다. 애들도 얘기가 끝나자마자 환호성이 섞인 감탄을 냈다. 감탄이 어찌나 컸는지. 결국 선생님이 찾아왔다. 조용히 하고 자라면서 주의를 줬다. 선생님 때문에 흐름이 끊길 거 같았지만. 흐름이 끊기긴커녕 계속 이어졌다. 역시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 무서워 보였는데 그런 면이 있을 줄 몰랐다. 의외로 다정한 거 같다. 그런 얼굴에 다정하기까지 하면 유죄다.

애들 사이에서 오르내리는 올가에 대한 얘기들은 칭찬밖에 없었다. 바네사는 이미 알고 있던 모습이기에. 쏟아지는 칭찬에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고 있었다. 그래. 올가가 그래서 멋있다니까. 오해로 가려져 있던 모습이 드러나는 거 같아서. 당사자가 아닌데도 뿌듯하고 기뻤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나온 대화에는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완전 푹 빠졌나 봐. 말하는 내내 걔 눈에 하트 그려진 거 같더라."

"그러다 내일 고백하는 거 아니야?"

내일은 캠프파이어를 하는 날이니까. 캠프파이어 할 때 고백하는 애가 있더라. 그러다 눈이 맞아서 사귀는 애들도 있더라. 애들은 웃으면서 넘어갔지만. 바네사는 가볍게 넘어가질 못했다. 돌부리에 걸려 엎어진 기분이었다. 농담이 섞인 대화를 마지막으로. 다들 피곤했는지 대화를 멈췄다. 하나둘씩 잠들기 시작했다. 바네사도 잠들려고 노력했다. 이불에서 나는 낯선 냄새 때문일까. 노력해도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눈을 감았다가 떠도 어둠만 넘실거렸다. 바네사가 잠들지 못하자. 버릇이 나타나 버렸다. 천장을 스크린 삼아 상영회를 시작했다. 올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까지는 똑같았는데. 이번 상영회는 무언가 달랐다. 누군가가 올가에게 고백했다. 다정한 모습에 반했다는 말은 덤이었다. 올가는 놀라다가도 미소를 지어줬다. 바네사에게 지어줬던 부드러운 미소까지 지어주면서. 마음을 표현해줘서 고맙다고 하더니. 그대로 고백을 받아줬다. 고백을 받아준 거까지 상상해버리자. 드라마에서 봤던 연인들의 모든 모습을 대입해버렸다.

저도 모르게 이불을 잡았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 눈에 바네사의 생각이 보인다면. 바네사 주변을 뭐지라는 단어가 에워싼 게 보일 것이다. 고개를 저으면서 자신을 에워싼 단어를 떨쳐냈다. 올가는 누구의 것도 아닌데. 빼앗기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에 남겨진 숙제는 좀처럼 결정을 못 하겠고. 애들 말을 들어보면. 정말로 누군가 올가에게 반해버릴 거 같고. 올가는 어떤 마음인지 알 수가 없고. 정말로 빼앗기려나 불안했다. 고민이 쌓이는 와중에 밤이 더 깊어져 갔다. 벌어진 입술 틈으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모두가 잠들어 조용한 방 안에서. 잠들지 못한 사람이 이불을 걷어찼는지. 팡팡거리는 소리가 작게 서너 번 울려 퍼졌다.

다음 날 아침, 기상 방송과 함께 눈을 떴다. 잠을 설쳐서 그런 건지. 아니면 어제 종일 고생해서 그런 건지.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삐걱거렸다. 애들도 잠에서 덜 깬 모양인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지나가는 말로 밤에 이불 차는 소리가 들린 거 같다고 했지만. 다들 피곤해서 잘못 들었겠거니 하며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다들 잠옷에서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오늘은 사복으로 활동하는 날이었다.

중학생 때는 어딜 가든 교복을 입어야 했는데. 이번 수학여행에서는 사복을 허용해줬다. 그래서일까. 다들 비몽사몽 옷을 갈아입다가도, 사복을 입어서 좋다면서 만족해했다. 바네사도 사복을 입었다. 애들이 잘 어울린다고 칭찬해줘서 그런지. 아침부터 살짝 들떴다. 그러다가 올가가 또 생각나 버렸다.

시도 때도 없이 올가에 대한 생각이 끼어들었다. 올가가 어떤 옷을 입을지 궁금한 거는 그렇다 쳐도. 바네사가 입은 옷을 보고 어떤 말을 할지 상상하려고 했다. 집합하라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신호로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애들에게 집합하자고 말하면서 생각을 떨쳐냈다. 마지막에 복도로 나오면서 문을 빈틈없이 닫고, 이동하기 전에 열리지 못하게 단단히 잠갔다.

생각을 지울 때는 일이 최고였다. 반장인 바네사는 오늘도 어김없이 정신없었다. 수족관으로 가려면 버스를 타고, 내려서 걸어가야 했다. 애들을 이끌고 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선생님도 통솔하고 있지만. 하나하나 세세하게 통솔하는 건 바네사의 몫이었다. 가끔은 줄의 시작점에서 끝까지 뛰어다녀야 했다. 낙엽이 수족관으로 걸어가는 발걸음 사이로 떨어졌다. 떨어진 낙엽을 밟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높고 파란 하늘만 보고 있어서 몰랐는데. 어느새 가을도 끝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반 애들이 빠짐없이 들어간 걸 확인하고 나서. 바네사는 마지막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직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수족관 안에서 벌써 감탄이 섞인 환호가 들렸다. 그 정도로 수족관이 좋나 보다.

사실 애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단체 사진을 수족관 입구에서 찍었다. 돌아갈 때까지 번거롭게 다시 모일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자유 관람이라서. 집합 시간 전까지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바네사에게도 좋은 소식이었다. 모이기 전까지 개인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작은 기대감을 품었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사방이 물로 가득 차고, 새파란 조명으로 둘러싸였다. 여기저기 전시된 수조 모습이 드러나자. 바네사도 짧게 감탄사를 내고 말았다. 해파리들이 빛을 내며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물로 가득 차 있어서 바다에 빠져 있는 착각이 들었다.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는 건 즐거웠다. 그렇지만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즐기기는커녕 정신없이 뛰어다녔으니. 걷는 건 지겨울 정도였다. 심지어 피곤함 때문에 다리가 아파졌다.

지친 발걸음이 멈춘 곳은 대수조였다. 물고기가 헤엄치며 선을 그려냈다. 선은 느리지만, 끊임없이 이어졌다. 헤엄치는 물고기 사이로 고래가 보였다. 고래는 물고기 사이에서 고고하고 부드럽게 헤엄쳤다. 간간이 수조 안에서 공기 방울을 뿜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캔버스에 그려낸 그림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수조 앞에 의자가 있었다. 극장에 있는 관람석 같았다. 애들은 벌써 보고 가버린 걸까.

의자는 주인 없이 텅 비어있었다. 평소라면 자리를 비워두며 앉았을 텐데. 지금은 신경 쓰지 않고 중앙에 앉았다. 아무도 없으니까 괜찮겠지. 몸을 한껏 기대며 늘어지는 소리를 냈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힘이 빠졌다. 노곤한 눈을 깜빡이다 이어폰을 꺼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잔잔한 음악을 골랐다. 주변 소리가 묻히지 않도록 크기를 조절했다. 중학생 때는 틈만 나면 음악을 들었는데. 요즘 음악을 듣는 게 뜸했다.

돌이켜보면 이어폰을 귀에 꽂을 틈도 없었다. 음악을 들으며 헤엄치는 물고기를 느긋하게 구경했다. 그러다 물고기와 고래를 하나씩 돌아가며 살펴봤다. 예전에 놀러 갔던 수족관에서 봤던 물고기도 있고, 처음 보는 신기한 물고기도 많았다. 시야에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어두운 실내와 바네사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음악과 주변 소리 사이에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여기 있었네."

 

고개를 들어보니 올가가 서 있었다. 며칠 동안 올가는 점처럼 작게 보였는데. 어느새 눈에 가득 담을 수 있을 만큼 크게 다가왔다. 심지어 올가가 바네사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아까 들이마신 숨을 내쉴 수 없었다.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뺐다. 넘길 것도 없으면서 대답을 마른 목으로 삼켜버렸다. 올가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옆에 앉아도 되겠냐면서. 바네사에게 허락을 구했다. 바네사는 얼떨결에 옆자리를 내줬다. 저번처럼 조금 떨어져 앉으면 좋으련만. 바네사가 중앙에 앉아버리는 바람에 떨어져 앉을 수 없었다.

민트 향이 수족관 특유의 물비린내와 섞였다. 청량한 향이 감돌았다. 향을 맡을 정도로 가까워지고 나서야. 바네사는 올가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올가는 운동복도, 교복도 아닌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깔끔한 청바지와 티셔츠, 그리고 그 위에 카디건을 입었다.

옷차림은 평범했다. 다른 애들도 입고 다닐법한 옷차림이었다. 실제로도 올가와 비슷하게 입은 애들을 봤다. 그런데 입고 있는 사람이 올가라서 그런 건지. 은은하게 빛나는 착각이 들었다.

밖이라서 소재는 차고 넘쳤다. 가령 앞에 있는 대수조라거나. 올가도 수조를 구경하러 왔냐고 물었다. 그런데 올가는 고개를 저었다. 수조 크기는 크지만 길이는 생각보다 짧아서. 이 수조는 벌써 봤다고 했다. 그러면 수족관 밖에 있는 걸 구경해도 될 텐데. 뒤늦게 올가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여기 있었네. 한 글자씩 뜯어보고, 문장 그대로 바라봐도. 무언가를 찾다가 발견했을 때 쓰는 말이었다.

마음속에 기대감이 삐져나오고 말았다. 고삐를 풀고 밖으로 뛰쳐나오려는 생각들을 겨우 붙잡았다. 기대감을 억누르기 위해서. 바네사는 올가에게 왜 여기에 계속 있냐고 물어봤다. 바네사가 이유를 궁금해 하면. 올가는 피하거나 얼버무리지 않았다. 이유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해줬다. 너랑 얘기하고 싶어서. 한 마디가 심장에 날아와 꽂혔다. 뛰쳐나온 생각들은 문을 부실 듯이 두들기고 있었다.

살짝 설렜다. 가슴이 주책맞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얘기할 시간이 없었으니까. 덧붙인 한 마디에 두 뺨이 뜨끈했다. 두 마디만 들었을 뿐인데. 분명 내 몸이 맞는데. 왜 내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건지. 기대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듣자마자. 마음속은 비상등을 키며 난리가 나버렸다. 한바탕 소란스러워지며 열기를 띄웠다. 수족관이라서 다행이었다. 푸른색에 달아오른 뺨이 감춰졌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올가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힘들지?"

"응, 정신없어…."

괜찮다고 말해도 틀린 대답은 아니었지만. 다짐했던 게 떠올랐다. 숨기거나 얼버무리지 않고, 솔직하게 말해주자는 다짐.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짧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럴 거 같았어. 짧은 대답이 들려왔다. 대화를 이어나가야 할 텐데.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입을 조금 벌렸다가 다무는 걸 반복했다. 모처럼 둘이서 보내는 시간이니까. 조금 더 새로운 걸 해보고 싶었는데. 사람은 새로운 걸 찾는 데 한계가 있는 걸까. 전에 한 번 즈음은 해봤던 일을 반복했다.

이틀 동안 돌아다니면서 봤던 것 중에 어떤 점이 좋았는지, 반장이라서 해야 할 게 산더미라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올가에게 전부 다 얘기해 줬다. 올가는 쏟아지는 바네사의 목소리를 담았다. 새 학기에 자리를 바꾸고 얘기했던 때랑 비슷했다. 바네사가 말하면. 올가는 들어준다. 그걸로 끝나면 똑같겠지만. 똑같지 않았다. 큰 틀은 전과 비슷했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

이번에는 바네사가 얘기를 하면서 종종 올가에게 물어봤다. 이틀 내내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같은 시간, 같은 곳에 있었던 올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올가는 최선을 다해 대답해줬다. 어떤 수식어도 붙이지 않아 담백하고 간결한 감상들뿐이었다. 바네사는 그것마저 좋았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설레는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마음속에 찾아온 설렘은 바네사를 긴장하거나, 움츠러들게 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묻어나는 피곤함을 지워주고,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줬다. 기분 좋은 설렘이었다.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정적이 후식처럼 찾아왔다. 바네사는 다시 수조를 바라봤다. 수조에 흐르는 물결처럼.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헤엄치는 고래를 한참 구경하다가 다시 올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네사의 시선이 올가에게 향했다. 같이 수조를 구경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올가는 바네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의 끝에는 바네사가 있었다.

어느 날의 수업 시간처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의 시선은 오직 서로를 향했다. 아주 가까이에서 눈동자를 마주하자. 더 빛이 났다. 은은하다 못해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났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입을 살짝 벌리고 말았다. 다른 건 몰라도. 넋 놓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대신 다른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올가를 보며 배시시 웃어버리고 말았다. 예쁘다. 일부러 주어를 빼놓고 말했다. 그러게. 올가는 모호한 말을 간결하게 받아줬다. 자신에게 웃어주는 바네사를 보더니. 미소를 지어줬다. 조명을 받아 일렁이는 푸른 물결이 얼굴과 옷의 결에 따라 곳곳에 스며들었다.

신기하다. 푸른색이 이렇게 따뜻한 색이었던가. 수족관에 있는 모든 색은 푸른색으로 덮어졌지만. 차갑지 않았다. 분명 차가운 색이라고 배웠는데. 오히려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고생했어. 짤막한 말로 바네사를 위로해줬다. 한 마디가 퍼즐 조각이 되더니. 뚫려있던 빈 곳을 채워줬다. 색은 다른 색으로 덮어질지 몰라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다정했기에 따뜻했다.

올가는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다른 수조를 구경해야겠다고 말했다. 듣는 순간에 스친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같이 구경하자고 권하거나, 조금만 더 있다가 가라고 부탁하거나. 바네사는 선택지를 고르지 못했다. 권하는 거든, 부탁하는 거든. 이유를 붙여야 할 텐데. 꼬리말처럼 붙일 이유는 한 가지였다.

너랑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 솔직해지자고 다짐했지만. 차마 올가에게 그런 말은 하지 못하겠다. 조금 이따 보자. 평소랑 다른 인사말이었다. 인사를 남기고 걸어가는 올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어찌 보면. 소나기가 내리던 날에 멈춰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때도 올가는 인사를 하고 지나쳐갔다. 바네사는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돌아봐 줘. 하고 싶은 말을 참고 멀어져가는 모습을 계속 바라봤다.

돌아봐 줬으면 좋겠다. 간절한 마음으로 바랐다. 하지만 동시에. 올가가 돌아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간절하게 바랐지만, 올가에게 텔레파시가 닿지 않았는지. 조그맣게 멀어져갔다. 지금 주어진 선택지에서 아무것도 고르지 못했지만. 꿈에서 주어진 선택지를 고를 수 있게 되었다. 어떤 대답을 듣게 되든 상관없었다. 올가에게 어떤 대답이라도 들어보고 싶었다.

바네사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보기 지루했는지.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른 거 같았다. 수족관에서 올가와 대화한 이후로. 남아있던 일정이 파도에 휩쓸리듯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네사는 아직도 남아있는 두근거림을 품은 채. 밖에서 애들과 같이 서 있었다. 장기자랑도, 레크리에이션도 진행한 거 같았는데.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분명 뭔가 한 거 같았는데. 뭐였더라. 바네사가 어떻게든 떠올리려고 머리를 쥐어 짜내고 있는 동안. 맨 앞에 있던 사회자가 마이크를 든 채 말하고 있었다. 캠프파이어를 끝으로, 수학여행 일정이 모두 끝났다고 말했다. 지금부터 마음껏 놀라는 사회자의 말에 애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귀가 울릴 정도로 크게 틀어둔 노래를 시작으로. 저마다 모여서 즐겁게 얘기를 나누거나, 장난을 치며 놀기 시작했다.

바네사는 애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오히려 애들이 바네사를 보면서 놀자고 붙잡아도. 바네사가 사양하면서 어울리지 않았다. 애들이 또 권할까 봐. 무리에서 벗어나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뛰어다니듯이 걷고 나서야 찾으려고 애썼던 걸 겨우 발견했다. 바네사는 급하게 두 발을 멈춰 세웠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애들이 없는 외진 곳에 올가가 서 있었다. 카디건 팔 부분에 있는 줄무늬를 보니 알겠다. 수족관에서 입었던 옷을 똑같이 입고 있었다.

올가를 보자마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또다시 새로운 올가를 캔버스에 가득 그려내고 있었다. 여태까지 어떤 느낌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어떤 느낌인지 말할 수 있었다. 사랑스러웠다. 올가를 부르려고 했지만. 긴장한 탓인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기회라고 생각한 걸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전할 기회. 사실 지금이 아니어도. 기회는 또 찾아올지 모른다. 솔직히 지금이 기회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기회가 아니라고 핑계를 대며 미룰 수 있겠지만. 애들이 말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다른 애들마저 오해를 걷어내고, 올가를 더 알게 된다면. 좋아할 수밖에 없겠지. 좋아할 수밖에 없는 다정함이었다.그러다 누군가가 바네사보다 더 용기가 있다면. 정말로 간절하다면. 올가의 마음에 먼저 닿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올가는 어떻게 반응할까. 평생 맞닿을 수 없는 평행선에서. 바네사가 아닌 다른 사람의 팔짱을 끼고, 웃어주고, 누구보다 더 다정하게 대해주겠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올가가 그렇게 된다면. 마음이 견딜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누군가가 마음에 닿는 모습을 보기 전에. 바네사가 제일 먼저 다가가고 싶었다. 지금 와서 꿈에서 받았던 선택지 중에 굳이 고르자면. 어떻게든 고백해서 사랑을 이뤄내는 쪽을 선택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바네사는 올가에게. 욕심이 나고 말았다. 욕심이 나서. 용기를 낼 수밖에 없었다. 바네사는 소리 내 올가를 불렀다.

 

"올가."

 

이제 되돌릴 수 없었다. 바네사가 이름을 부르자. 올가는 바로 고개를 돌려 바네사를 바라봤다. 반가운 건지 희미하게 미소 짓더니.

바네사 쪽으로 먼저 다가와 줬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불꽃놀이가 시작된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마음을 전하는 방법은 아직도 모르겠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그래도. 불꽃놀이는 시작된다. 고개를 들어 올가를 똑바로 바라봤다. 밤이라 색이 더 짙어진 눈동자를 마주했다. 무엇이든 시작해야 하기 마련이었다.

 

"할 얘기가 있어."

 

그렇기에. 바네사도 시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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